신유박해로 시작된 장기 유배, 절망 속에서 피어난 실학의 뿌리 제1회부터 축적된 인문 자산, 올해는 ‘3도(道) 유배문화 교류’로 확장 6월 13일, 장기중학교 및 유배문화체험촌 일원에서 인문축제의 장 열려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 그가 전남 강진으로 가기 전, 생애 첫 유배의 발길을 내디뎠던 곳이 바로 포항 장기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801년, 정조의 승하와 함께 몰아친 신유박해의 칼바람 속에서 다산은 ‘사학(천주교)을 믿었다’는 죄목으로 장기 마현리에 위리안치됐다. 고향 이름과 똑같은 ‘마현’이라는 땅에서 그는 농민들의 애환을 담은 ‘장기농가’를 지으며 절망을 학문적 성찰로 승화시켰다.
비록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강진으로 이배(移配)되며 장기에서의 시간은 220여 일에 그쳤으나, 그 짧고도 강렬했던 사유의 흔적은 오늘날 포항의 소중한 인문 자산이 됐다.
△ ‘고립’을 ‘교류’로···5회째 맞는 장기유배문화제
포항문화재단은 오는 6월 13일 장기중학교(장기숲)와 장기유배문화체험촌 일원에서 ‘제5회 포항 장기유배문화제’를 개최한다.
2019년 제1회 축제를 시작으로 장기유배문화제는 매회 발전을 거듭해 왔다. 초기에는 유배촌을 배경으로 한 역사 재현 위주였다면, 회차를 거듭하며 시민들이 직접 유배객의 삶을 체험하는 참여형 축제로 진화했다. 특히 지난해 4회 축제에서는 AI 영상 등을 활용해 유배지의 사유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며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올해 제5회 문화제의 슬로건은 ‘겨울을 뚫고 온 서신’이다. 차가운 유배지에서 가족과 세상을 향해 띄웠던 편지들처럼, 단절된 공간을 소통과 인문의 공간으로 재정의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포항·강진·남양주가 하나로, ‘3도(道) 유배문화 교류’
이번 축제의 가장 큰 특징은 다산의 발자취가 서린 세 지역—경북 포항, 전남 강진, 경기 남양주—가 함께하는 ‘3도 유배문화 교류’다.
축제는 학(學)·문(文)·식(食)·락(樂)·풍(풍) 다섯 가지 테마로 풍성하게 꾸며진다.
學(학)’ 섹션에서는 3도 유배문화 학술교류와 인문해설사 간의 네트워크 장이 펼쳐지며, ‘文(문)’에서는 다산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모티브로 한 서간문 백일장과 3도 인문책방이 운영된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서 착안한 자연관찰 기록물과 유배객의 문장을 담아내는 서예·캘리그라피 체험도 기대를 모은다.
유배지의 소박한 미학을 담은 ‘食(식)’ 분야도 풍성하다. 강진·남양주·포항의 차(茶)를 함께 나누는 ‘3도 다례연’과 장기면 주민들이 직접 정성을 담아 준비한 ‘유배 밥상’이 차려진다. 열무비빔밥, 잔치국수, 우뭇가사리 등 당시 유배객들이 마주했을 소박한 먹거리와 함께 새끼줄 꼬기 체험과 지역 특산물을 만날 수 있는 ‘3도 물산 교류전’이 활기를 더할 예정이다.
가장 이색적인 프로그램은 ‘락(樂)’ 분야의 ‘자발적 유배체험’이다. 참가자들은 현대판 유배객이 돼 장기중학교에서 유배 호송 행렬과 함께 장기유배문화체험촌으로 이동하며 고독과 사색의 길을 걷는다. 특히 송시열과 정약용의 적거지에서 홀로 머무는 시간은 유배객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이이어지는 이번 축제의 백미다.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민들이 직접 포졸, 유배객, 마을 주민 역할을 맡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환희의 순간을 마당놀이 형식으로 풀어낸다. 참여자들은 직접 이별의 편지와 한시를 읊으며 유배와 해배의 역사적 찰나를 생생하게 재현해 주민과 관람객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축제의 정점을 찍을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풍(風)’ 분야에서는 유배문화길 투어와 미션형 스탬프 투어, 장기향교에서 진행되는 의병 역사 체험 등 장기의 역사적 숨결을 따라가는 다채로운 시민 참여형 콘텐츠가 마련돼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채운다.
△장기, 전국 유배문화 교류의 거점으로 우뚝
특히 이번 축제에서는 남양주시에서 제작한 다산 영정의 제작과 봉안 과정, 장기로 오게 된 이야기를 다루는 토크 콘서트 ‘그 얼굴 다시 모셔 놓고 보니’를 통해 다산 정신을 현대적으로 조명한다.
이상모 포항문화재단 대표이사는 “장기는 학문과 문화가 교류하던 인문의 보고”라며 “이번 문화제를 통해 장기를 유배문화 교류의 거점으로 육성하고, 시민들이 그 가치를 체감하는 역사축제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고뇌와 철학이 서린 장기숲에서 200년 전 다산이 보냈던 인문학적 메시지를 직접 확인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천 및 폭염 등 기상 상황에 따라 장소와 프로그램이 일부 조정될 수 있으며, 변경 사항은 포항문화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안내될 예정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