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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타인의 리듬으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앓고 있는 우영우가 자동문을 지나가지 못해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그것을 본 우영우의 동료는 이렇게 얘기한다. “왈츠를 춘다고 생각해요. 쿵짝짝, 쿵짝짝.” 둘은 천천히 리듬에 맞춰 발을 굴리고, 그렇게 왈츠의 리듬으로 하나의 문을 함께 통과한다.‘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인물 ‘우영우’의 좌충우돌 사회 적응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이 장애를 가진 인물인 탓에 이 드라마는 보통의 법정 드라마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을 갖는다. 때로는 범죄를, 때로는 일상적인 민사를 다루면서도 사실은 법리가 아닌 인간을 다루는 드라마. 그러나 흔한 법정 드라마와 달리, 이 이야기는 ‘우영우’와 그의 동료들이라는 프리즘을 거치며 여러 갈래의 빛으로 다채롭게 쏟아진다. 때로는 의뢰인에게 너무 몰입한 나머지 감정적으로 변하기도 하며, 자신이 변호해야 하는 변호인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갖기도 하는 등, 여러 이야기와 감정들이 쏟아진다.그리고 그렇게 쏟아진 감정들은 다시금 우영우라는 인물의 인격과 특성을 거쳐 하나의 이야기로 종합된다. 예컨대 너무나 상식적인, 그러나 상황으로 인해 우리가 차마 발설하지 못했던 사회적 정의에 대한 것들 말이다. 예컨대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장애’라는 특성은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내는 연출적 장치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알고 있음에도 말하기가 허락되지 않던 이야기들을 발설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로서의 역할 또한 겸하고 있다.그러나 이 장치로서의 ‘장애’가 만능키인 것은 아니다. 드라마의 초반부에서 드러나듯 그녀의 장애가 노출되는 방식은 재능과 비사회성이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갈음된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를 암기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상황과 맥락 속에 녹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래얘기 금지!”라는 동료 변호사의 대사는 그런 그녀의 특징을 잘 드러내준다. 예컨대 그것이 하나의 재능으로 갈음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드라마는 작은 에피소드들을 계속해서 연출하며 나름의 노력을 다하는 셈이다.때문에 우영우의 주변 인물들은 그가 하는 발언과 행동을 상황과 맥락에 맞추어 재가공하는 절차를 수행한다. 배려라기엔 너무나 충분하고 사회적이라 하기엔 너무나 친절하고 상냥한 동료들의 태도 속에서 ‘우영우’라는 인물은 하나의 재능과 하나의 모자람을 갖춘 독특하면서도 평범한 한 사람의 직장 동료로 자리매김해 나간다.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상사인 ‘정명석’이다. 인터넷에서는 ‘서브아빠’라는 별명으로도 불릴 만큼, 그는 우영우를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의 멘토와 멘티로서 대하고자 노력한다. 물론 이러한 노력이 드라마의 특성과 메시지로 인해 다소 작위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명석의 모습은 ‘나’와 다른 타인을 대하는 하나의 교본적인 모습이라 할 만 하다. 그는 우영우라는 인간을 한 명의 변호사로서 ‘한바다’라는 거대 로펌의 위상에 걸맞는 역량을 보여주길 기대하며 그녀를 대하는 것이지, 그녀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편애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명석의 눈 속에서, 우영우의 ‘장애’는 인격과 철저하게 분리된 하나의 특성일 따름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우리는 종종 장애를 가진 이를 대할 때, 그 사람이 가진 장애를 그의 인격과 동일시하곤 한다. 과잉된 배려와 친절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태도 속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 대접받는 것이 아닌 시혜의 대상으로 존재할 따름이기에, 이와 같은 시혜적 태도 또한 하나의 차별이자 배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시선과 태도의 이면에 존재하는 것은 ‘나’는 장애를 가진 ‘저 사람’과 다르다는 배타적인 의식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위하는 것’ 같은 모습이 연출되지만, 궁극적으로 그와 같은 태도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과 인권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의 표출이기도 하다.다시금 1화로 돌아가 보자. 우영우가 회전문을 통과하지 못해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리고 있던 모습 속으로. 우리는 한 번이라도 회전문이라는 것이 그토록 위협적이거나 난해한 장애물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그와 같은 회전문이 누군가에게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본 적이 있을까?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함께 왈츠를 추며, 같은 리듬으로 뛰어들 수 있을까? 우리가 우영우를 바라보면서, 그녀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궤적을 함께 지켜봐야만 하는 이유이다.

2022-08-16

나를 더 잘 아는 방법

퇴사를 한 뒤의 나의 하루 일과는 단순해졌다. 여섯시 반쯤 일어나 물을 한컵 마시고 몸무게를 잰 다음, 냉장고 앞에 서서 아침은 무얼 먹을까 생각한다. 밤새 틀어놓은 선풍기 때문에 배가 차게 느껴진다면 따뜻한 국물 요리를, 요리하기 어려울 만큼 집이 너무 덥다면 가성비 좋은 식당에 가서 끼니를 해결한다.오전 여덟시쯤 되면 노트북과 안경 간단한 필기구를 챙겨 카페로 나간다. 그리곤 재취업을 위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를 손본다. 초중고 학교 이력, 각종 자격, 전에 어떠한 일들을 했는지 몇 줄의 문장들과 사진으로 나를 설명하다 보면 나는 과연 쓸모 있게 증명될 수 있는 사람인지 의구심이 든다. 그렇게 빈약한 이력서를 횡설수설 고치다보면 어느덧 오후 세네시가 된다.집으로 돌아가 간단한 식사를 하고 나면 문제의 ‘그 시간’이 찾아온다. 운동을 해도, 밀린 집 청소를 해도, 또는 새로운 게임을 하거나 좋아하는 지인을 만나도 무기력함과 지루함을 쉽게 감출 수 없다. 이렇게 일상이 희미하게 지워지는 것 같거나, 삶의 주도권이 어딘가에게 뺏긴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에는 나 자신을 철저히 객관화 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번아웃을 앓는 내게 작은 도움이 되고 있는 건 규칙적인 생활습관이다. 최근 유튜브에서 리추얼 라이프란 생활 습관을 알게 되었는데 리추얼이란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으로, 일상 안에서의 반복적인 행동 패턴을 뜻한다. 물 2리터 마시기, 일어나서 이불 정리하기 등 자신이 정한 생활 습관을 반복하며 나를 의미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전에 언급했던 ‘갓생 살기’의 목표 설정은 단순히 행할 수 있는 것과 그에 따른 성취감과 행복 추구였다면, ‘리추얼’은 반복적인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식화하는 습관’에 가깝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 물 한잔 마시기를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복 물 한잔에 의미를 부여하여 의식하고 정서적 활동을 더하여 나의 긍정적인 일상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리추얼 라이프의 실천을 돕는 플랫폼인 ‘밑미’는 구경만으로도 재밌다. 육아 일기 쓰기, 피아노 연주 기록, 주말 제철 식재료 요리, 플레이리스트 만들기 등 최소 6인에서 20명까지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공통된 리추얼을 행하고 기록을 남긴다. 리추얼을 통해 나의 취향과 생각의 틀을 확고히 굳히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수행을 공유한다.성공이나 행복에 대한 강박은 내려놓고 내가 지루하다 생각하는 시간에 이름을 붙여주고, 키워드를 정해주다 보면 어느덧 긍정의 기운이 찾아온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시너지는 배가 된다.두 번째로 도움이 되었던 건 ‘갤럽 강점 검사’다. MBTI가 성격유형 검사라면 갤럽 강점 검사는 개인의 타고난 소질이나 재능을 알려주는 유료 검사다. 총 177개의 질문을 20초 안으로 대답해야 하고 총 검사시간은 35분이 걸린다.강점과 약점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강점이 될 수도 있고,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쩔쩔 맬 때엔 약점이 되기도 한다. 나는 가장 첫 번째 특성으로 ‘공감’이 나왔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마치 나의 감정처럼 느끼고, 상대방의 감정을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특성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좋게 말하면 이해와 배려심이 넘치는 타입이라 볼 수 있겠지만 나는 공감이란 감정을 약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특히 사람이나 외부에 잘 동화되는 특성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가진 부정적인 기운을 그대로 흡수하여 나의 기분까지 흐트리는 경향이 있었다.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미안해서 곤란한 일을 맡을 때엔 혼자 도맡아 처리하기도 했다. 이러한 나의 강점을 잘 알아두면 해결책을 찾기도 쉬워진다. 긍정적인 시너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을 주위에 채워 영향을 주고받는 것과 일이 많은데 부탁해서 미안하지만, 이라는 대화로 선 공감 후 부탁을 요청하여 건강한 방법으로 해결해보잔 솔루션을 찾기도 했다.내가 가진 특성 중 어떤 것을 잘 활용해 볼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어떻게 적용시켜 볼지 생각하게 된 좋은 계기였다. 일과 관련된 방향과 삶의 전반적인 방향 또한 조금 더 뚜렷해 진 것 같아 마음의 짐이 조금 덜어졌다.

2022-08-09

내 집 아닌 내 집

이사를 했다. 3년 만에 하는 이사라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이참에 짐 정리도 할 겸 불필요한 것들은 모조리 버리기로 했다. 다행히 친구가 이 집으로 들어오겠다 해서 가전제품이나 가구들은 양도할 수 있었다. 집주인에게는 7월까지만 살고 나갈 거라 미리 얘기도 해둔 터였고, 더구나 다음 세입자를 구해놓았다고 얘기까지 해놓았기에 모든 게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매우 순진한 생각이었다.막상 짐을 빼고 이사를 마치고, 친구와 계약을 일주일 앞둔 상황이 되자 집주인은 별안간 월세를 올릴 거라고 통보를 해왔다. 300에 40짜리 작은 옥탑에 갑자기 45만원을 받겠으니 친구에게 말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친구도 나처럼 사회초년생인지라 한 달에 45만원을 월세로 지불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작은 옥탑에 보증금 300, 월세가 45만원. 친구가 이사를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사실 그 옥탑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다. 같은 가격대에서는 크기도 상대적으로 넉넉했고, 옥탑인 탓에 채광도 좋았다. 대학원생이던 나에게 학교까지 도보로 20분이라는 건 매우 큰 장점이었다. 나에게 맞춤형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집이었다. 문제는 그게 옥탑이었다는 거고.생각보다 옥탑에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게다가 그 옥탑이 구축의 개인 주택에 달린 옥상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살던 곳은 다른 무엇보다 단열이 문제였다. 여름이면 옥탑은 오븐처럼 뜨겁게 달궈졌고, 겨울이면 온몸이 얼어버릴 정도로 외풍이 심했다. 에어컨과 선풍기, 보일러와 전열기는 옵션이 아니라, 옥탑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수품에 가까웠다. 그래도 단열이 되지 않는 탓에 곳곳에 물이 맺혀서 곰팡이가 피었다. 나쁘진 않았지만,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집이었다.그런 집에 월세로 45만원을 달라니. 매달 전기세며 보일러세로 일반 가정집의 2배는 족히 나오는 집인데 월세마저 올려달라는 건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닌가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집주인은 300에 40은 3년 전 시세라고 했다. 결국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주인에게 300에 40이 아니면 계약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아마 이 집을 그 가격에 월세를 놓는 게 상당한 무리라는 건 집주인도 알고 있었을 거다. 당장 부동산에만 가 봐도 300에 40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 옥탑을 한 달에 45만원이나 주고 살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집주인은 우리가 가난한 고학생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새로 들어올 사람과 나의 관계마저 알고 있었으니 그런 무리수를 둬본 것이겠지. 게다가 짐도 여기에 이미 들어와 있는 상태고. 그러니 “300에 40은 3년 전 시세”라는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이겠지. 가난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지라곤 고작 더 낙후한, 대신 조금이라도 저렴한 곳을 찾아 가는 것뿐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으니까.창신동 쪽방촌의 주거 실태와 주거 빈곤층의 실상을 밝힌 이혜미 기자의 ‘착취도시, 서울’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빈곤 비즈니스’,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되, 빈곤을 벗어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닌, ‘빈곤을 고착화’하는 산업. 가뜩이나 돈 없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의 곤궁한 처지를 이용해, 마땅한 노력 없이 불로소득으로 폭리를 취하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에만 관심을 보이는 형태.”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누군가에게는 현명한 투자라 생각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곤궁을 고착화시키는 현실의 아이러니. 물론 알고 있다. 집주인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것일 거라고 믿고 싶다.가난한 사람은 월세가 오를까봐, 집에서 쫓겨날까봐 늘 두려움에 떤다. 비록 그 집의 평당 임대료가 서울 전체 아파트의 평당 평균 임대료의 몇 배를 상회할 지라도, 당장 목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으니 한 달 수입의 절반 가까이를 월세로 지불하면서 살아간다.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모으기는커녕 점점 더 낙후된 곳으로 이동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낙후된 주거 환경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쪽방촌, 고시촌, 원룸 촌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구조 속에서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하지 않는 것, 아이를 낳지 않는 것뿐이라 생각하면서.

2022-08-02

여름방학을 지나며

지금 우리는 여름의 한복판에 서 있다. 청명한 하늘을 마주하면 한없이 들뜨다가도 지나치게 무더운 날씨에 실온에 둔 음식처럼 기분이 상한다. 푸르른 바다와 싱그럽게 자라는 식물의 줄기를 상상하지만, 습도만큼 불쾌지수가 높아지고 몸도 마음도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만 같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듯한 찝찝함이 온종일 가시질 않고 에어컨 없는 공간은 상상조차 못 할 정도다.이 여름, 나는 휴식에 관해 골몰한다. 문자 그대로 어떻게 하면 제대로 쉴 수 있을지 고민한다. 따가운 햇볕이 정수리를 달구는 한낮에도, 창 너머로 후텁지근한 바람만 불어오는 늦은 밤에도, 쉬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는 기분이다. 어느덧 올해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음을 상기하면 어쩐지 숨이 가빠진다.학교에서 일하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방학이 있다는 것이다. 학생일 때의 방학과 선생이 되어서 체감하는 방학의 무게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에게 방학은 그저 마냥 즐거운 기분이라면 후자는 숨을 쉴 유일한 기회다.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붙잡는 동아줄 같은 시간이나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해서 쉬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임해야지만 다음 학기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다. 동료들과 손을 맞잡고 다짐했다. 열심히 쉬다 옵시다, 우리.몇 달 전부터 나는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방법을 궁리했다. 비행기 표를 사서 이국의 휴양지에 다녀올까. 괌이나 하와이 같은. 아니면 서울 근교의 세련된 호텔에서 며칠 머물면서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온종일을 보내는 것도 좋겠다. 주말에는 사람들로 붐벼서 쉽게 갈 수 없던 유명한 식당이나 평일 오후의 미술관도 떠올렸다. 그렇지만 내게 필요한 휴식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경험이 아니라 비움이 필요했다. 그건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던가 좋은 곳을 구경하면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리하여 이번 방학의 목표는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으로 설정했다. 방학 계획표 따위는 그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노트북과 책도 내려놓았다. 떠오르지 않으면 한 문장도 발화하지 말자. 텍스트를 읽고 싶으면 그때 소설을 펼치면 되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자.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바리바리 싼 짐을 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 후줄근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마당에 앉아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듣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지리산에 올라가 입이 떡 벌어지는 경치에 감탄하고 천년을 살았다는 소나무와 마주했다.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다가 지겨워지면 평상에 누워 낮잠을 잤고 해가 넘어가면 가족들과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셨다. “엄마 아빠는 어떻게 이 일을 삼십 년이나 해냈어?”하고 내가 물으면 “자식을 키우려면 뭔들 못하겠느냐”고 부모님은 대꾸했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마을에 찾아가 회상에 젖기도 했다. “우리 꼬마가 이렇게 자랐어!”하고 외치던 목사님의 손은 너무나 다정했고 나는 어느덧 한 시절을 통과해왔다는 감각을 느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누구에게나 방학은 필요하다. 직장인에게도 여름방학을 달라는 말은 그저 실없는 농담이 아닐 테다. 짧은 휴가로는 충족될 수 없는 긴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똑같은 삶이 쳇바퀴 돌 듯 지나간다. 물결처럼 흘러가야 하는 시간이 고이고 응축되면 썩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특히 여름은 부패하기 쉬운 계절이니, 누구나 지치기 마련이다. 휴식은 육체와 마음을 재정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일로 나아가고 더불어 내일로 나아갈 힘을 얻게 한다.이렇게 나의 방학이 지나가는 중이다. 풀벌레가 시끄럽게 우는 여름밤, 나는 오랜만에 노트북을 켜서 떠오르는 생각을 적는다. 내년에 계약 만료가 되는 월셋집과 손봐야 할 소설의 무수한 장면들, 매일매일 체감하는 나의 부족함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그밖에도 처리해야 하는 현실적인 일이 가득하지만 잠시 눈을 감기로 한다. 그 대신 여름의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던 강의 표면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통과하면서 내는 소리를 떠올린다. 이제 며칠 후면 나는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하고 지켜야 할 약속을 이행하며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방학은 끝나지 않았으므로, 마치 문을 닫듯 상념은 잠시 거기에 놓아두고 나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2022-08-02

단순함의 미학

‘탑건: 매버릭’엔 1980~90년대 낭만적 허세가 있다. /영화 홈페이지 ‘탑건: 매버릭’을 봤다. ‘남산의 부장들’ 이후 2년 6개월 만에 극장에 가서 본 영화다. 코로나로 인해 극장에 가길 꺼려했고, 같이 영화 볼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 볼 만한 영화가 없어 통 극장에 가질 않았다. 그런데 1986년 개봉한 ‘탑건’의 후속편이라니, 또 주변에서 재밌다고 난리 치니 극장에 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로 기억한다. 청소년 관람불가였음에도 비디오 가게에서 ‘탑건’을 빌려 봤다.오프닝 화면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좀 뭉클해졌다. 1986년작과 똑같은 음악, 똑같은 구도의 시퀀스, 본편의 오리지널리티를 고스란히 되살려낸 연출이 1980~90년대 향수를 자극했다. 80년대에 나는 미취학 아동이었으므로 별로 할 말이 없지만, 90년대라면 다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를 90년대에 보냈다. 그 시절에 보고 듣고 읽은 영화, 음악, 책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톰 크루즈가 철 지난 항공점퍼를 입고, 레이밴 선글라스를 끼고, 가와사키 오토바이를 타고 이륙하는 전투기와 나란히 달리는 장면에서 쾌감을 느꼈다.한 줄 감상평을 남기자면, “다시 군대에 가고 싶을 지경”이다. 오랜만에 가슴 뜨거워지는 영화를 봤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스펙터클한 영상미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투박하고 간단하지만 명료해서 좋았다. 선이 굵고 호방해서 통쾌했다. 석양, 해변 럭비, 술집 골든벨, 오토바이, 레이벤 선글라스, 록 밴드 음악, 제복 등 구닥다리 형식으로 폼 잡는 게 좋았다. 그게 흥행의 이유라는데, 사실 ‘주말의 명화’ 시절 영화들은 다 그랬다.‘다이하드’, ‘리셀웨폰’ 같은 액션 영화들은 물론이고, 팔씨름 하는 영화(‘오버 더 톱’), 양치기 돼지가 주인공인 영화(‘꼬마돼지 베이브’), 누가 오래 잠수하나 시합하는 영화(‘그랑블루’)도 있었다. ‘가을의 전설’이나 ‘브레이브 하트’, ‘늑대와 춤을’ 같은 영화는 서사의 아름다움과 함께 영상미가 압권이었다. 우리나라 드라마 ‘모래시계’만 봐도 마지막 장면은 지리산 노고단의 겨울 석양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의 역광 속 뒷모습을 담았다. 단순하지만 멋이 있었다. 아니, 단순해서 멋있었다.요즘 영화도, 음악도, 문학도 다 복잡하기만 하다. 내밀한 세계로, 미시적인 세계로만 파고들다보니 작고, 어렵고, 난해하다. 천재적이지만 멋이 없다. 근래 한국소설을 읽다보면, 장편도 아니고 단편임에도 자기가 설정한 이야기의 복잡성에 갇혀서, 작가 스스로 미로를 헤매는 그런 작품들을 종종 보게 된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계산적이고, 복잡다단하고, 속을 알 수 없다. ‘탑건: 매버릭’을 보며 제일 반가웠던 건 1980~90년대의 낭만적 허세,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단순함이었다.얼마 전 한 영상이 화제가 됐다. 중년 남성이 커피숍 키오스크 사용법을 몰라 주문에 애를 먹자 애꿎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욕설을 했다. 아르바이트생은 자주 겪는 일이라는 듯 유쾌하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대뜸 큰소리부터 지른 소위 ‘개저씨’를 비난하는 여론 가운데 키오스크 시스템이 디지털 문명에 익숙지 않은 고령 세대를 소외시킨다는 우려도 있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패스트푸드점이나 커피숍 키오스크뿐인가? 스포츠 경기, 공연, 항공권 예매도 이제는 온라인 서비스나 무인 시스템으로 거의 전환됐다. 각종 보안 인증 시스템도 문제다. 공인인증서는 폐지됐다지만 더 복잡한 것들이 생겨났다. 지난 5월 종합소득세 신고를 위해 국세청 홈택스에 접속했다가 짜증나 죽는 줄 알았다. 세금 신고와 납부를 장려하려면 관련 용어와 절차부터 좀 쉽게 바꾸면 안 될까? 세무 전문가가 아닌 이상 알아볼 수 없는 어려운 한자어와 수식들을 보면서 ‘일부러 이러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오만해진다. 오래된 것은 모두 낡고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긴다. 사회 시스템도, 영화도, 음악도, 문학도 모두 첨단을 지향하는데, 첨단으로 가는 방법이 많아질수록 절차는 복잡해진다. 그 복잡함은 결국 우리 스스로를 폐쇄된 세계 안에 가두게 한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자꾸 틀려 집에 못 들어가거나 웹 사이트 패스워드를 분실해 영영 ‘온라인 미아’가 되기도 한다.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 곁에는 친구가 없다. ‘탑건: 매버릭’에서 매버릭은 중요한 순간에 늘 망설이는 루스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지 마.”

2022-07-26

고물가 시대 생존법

장을 보러 갈때면 한숨이 푹푹 나온다. 금겹살이라 불리는 돼지고기는 쳐다보지 않은지 오래 되었고 자두나 복숭아, 수박 같은 여름 과일도 가격 보고 놀라 금세 내려놓고 만다.높은 가격에 섣불리 카트에 담지 못하다 결국 향하는 건 세일코너. 그런데 이마저도 쉽지 않다. 카트에 물건을 담을 떄마다 더해지는 가격 계산을 하다보니, 언제부턴가 장보기가 숙제마냥 피로하게 느껴진다.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점심을 밖에서 해결해야 할 때도 난감하다. 냉면은 1만원 중반대를 훌쩍 뛰어 넘는데다가, 비빔밥이나 국밥도 9천원이나 달한다. 만 원 아래로 사 먹을 수 있는 메뉴가 굉장히 제한적이니, 이제 외식은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야 잘 하지 않게 되었다.물가 폭등 현상은 비교적 소득이 적은 20대에게 더 무겁게 다가온다. 최근 여러 신조어도 생겨났는데, 물가 상승으로 직장인들의 점심값 지출이 늘어난 상황을 뜻하는 ‘런치 플레이션’, 앱을 통해 돈을 아끼는 ‘앱테크족’. 외식을 지양하고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로 끼니를 해결하는 ‘냉털족’ 등이 생겨났다.사회에 발을 내디딘 지 1년 차인 초년생 친구는 점심을 저렴하게 해결하기 위해 편의점 서비스에 구독했다고 한다.편의점 구독 서비스란 단어가 생소해서 알아보았더니. 2000원에서 4000원 사이의 월 이용료를 내면 약 20~30%정도 상품을 할인가에 살 수 있는 멤버십 제도였다. 물론 상품 가격마다 다르지만 도시락은 약 1000원에서 1500원에서 정도 할인 받아 살 수 있었고, 커피 또한 할인받아 1000원 아래로 즐길 수 있었다.먹거리 외에도 와인이나 맥주 같은 주류, 또는 생리대와 마스크 같은 생활용품도 다양하게 보였다. 결제시 통신사 할인이나 기타 할인까지 더할 수 있으니, 월급 빼고 다 오른 웃픈 현실에서 편의점 구독화하기는 필수처럼 여겨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인터넷에서 물건을 살 때도 이젠 최저가 검색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정 쇼핑 사이트에서 물건 구매시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쇼핑 플랫폼이 주목받고 있다.G마켓이나 11번가, CJ온스타일 등 250여개 브랜드와 제휴를 맺어 할인 정보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했고, 일일이 쇼핑몰 사이트를 방문하는 것이 아닌, 해당 플랫폼 페이지를 통해 물건을 구입하면 결제 금액의 일부를 현금으로 환급해주는 방식이다.본가에서 나와 1인가구를 꿋꿋이 유지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날 때면 ‘이토록 아껴서 뭘 하나’ 싶을 정도로 시시하지만 유쾌한 정보와 감정을 공유하는 순간이 있다.대중교통 비용을 할인해주는 알뜰교통카드 발급이나 일정 금액 이상 꾸준히 저축시 2배 이상의 금액을 더해주는 저축 제도, 또는 소셜커머스 플랫폼에서 이벤트로 저렴하게 나온 핫딜 구매가 등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안부를 묻는다.최근 친구들에게 반응이 좋았고 나 또한 만족스레 이용하고 있는 건, 버려질 위기에 처한 농산물 구입이다. 생각보다 농산물은 맛이나 영양소에 큰 변화가 없더라도 작은 흠집이 있다거나 모양이 이상하거나, 또는 판로가 부족하여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여러 이유로 버려질 위기에 처한 농산물들을 저렴한 가격에 배달해주는 여러 플랫폼들이 생겨나고 있다. 검색만 해도 쉽게 찾을 수 있어서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업체를 선택하면 된다. 대부분 배달 주기도 원하는 기간으로 설정할 수 있고 선호하지 않는 채소가 있다면 뺄 수 있어서 편리하다.가지나 감자, 방울토마토, 브로콜리, 초당 옥수수 등 다양한 종류를 소량으로 박스에 담아 보내주고, 시세 대비 30% 저렴한 가격인 약 2만원 안쪽으로 살 수 있으니 1인 가구에 적합하다.물가 오름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원인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져 있어 해결책이 쉽지 않다.아직도 지구 한 편에서는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니 전 세계 공통적으로 쉬이 풀 수 없는 지난한 일임을 인지하고 나는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대응책을 찾아보려 한다. 또한 정부에서 물가 안정을 위한 대책이 지속적으로 강구될 수 있도록, 진심으로 바라본다.

2022-07-26

도둑맞은 가난

매 선거철마다 보이던 풍경 가운데 하나. 선거를 앞둔 후보가 가난한 쪽방 촌에 2~3일 가량 머물며 기자들과 인터뷰를 한다. 대한민국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었는지 몰랐다며, 가난한 우리 이웃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진심어린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이런 쪽방촌이 무수히 남아있다.영국의 래퍼 겸 작가인 대런 맥가비는 이와 같은 광경을 ‘가난 사파리’(돌배게, 2020)라 부르며 꼬집는다. 정부와 시민단체로부터도 평소 때에는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다가, 선거철이 되면 관심이 집중되는 광경을 비꼬는 말이다. 2017년 영국의 켄징턴 북부에 위치한 임대아파트 그렌펠 타워 화재사건으로 150명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 정부와 언론은 빈민층의 실태를 집중조명 했지만, 여론의 관심은 금새 더 자극적인 화제로 옮겨갔고, 빈민층에 대한 관심은 금방 사그라졌다. 맥가비는 그와 같은 사회적 풍경을 진열창 앞의 안전한 거리에서 원주민을 잠시 구경하며 동정을 표하다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며 이를 ‘사파리’에 비유한 것이다.우리가 이와 같은 영국의 풍경에 선거철 정치인들의 모습을 겹쳐 본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진정성은 있다. 그렇게나마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가난을 잠시나마 보고 듣고 경험해보는 것이 어쩌면 그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거주민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인 민폐만 끼치며 어떠한 배려도 보이지 않은 채, 떡볶이를 먹고 국밥을 먹고 라면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모습에서 무슨 진정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단지 가난을 소비할 뿐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말이다.이것을 단지 정치인들만의 문제라 말할 수 있을까. 매년 이즈음이 되면 생기던 대학생 쪽방촌 체험도 그렇다. 정작 그곳에 사는 주거민의 동의는 구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체험 프로그램 속에서, 가난은 현실이 아니라 단지 테마 체험에 불과하다. 브라질의 호싱야, 인도 뭄바이의 다라비,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타운십 등지에서 이루어진 슬럼가 투어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한 때의 감정적 여흥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여행을 하며 이국의 정서를 체험하듯 가난을 잠시 체험해볼 뿐이다.사람들은 가난을 이해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자신이 가난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가 가난하고 불우했다 생각하지만, 그와 같은 가난은 상대적인 개념일 뿐, 앞서 거론한 지역에서의 절대적 가난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이 말하는 가난이란, 자신의 물질적 욕구가 여러 제반으로 인해 충족되지 못했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거나 현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질적 수준이 모자랐던 시간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가깝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가난이란 실제적인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은 잔인하리만치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여전히 가난한 것은 자신과 달리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가난은 생을 위협하는 재난이 아니라, 자신이 정복해온 삶의 여정의 트로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문제는 이와 같은 상황이 실제로 절대적 가난에 처한 사람들의 내면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가난을 부정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배척한다. 적어도 자신은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 그들의 삶을 부정하고 그들의 노력을 부정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이 사회의 중산층이라 여기지만, 하루하루 몰려오는 빈곤에 따른 여파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나 비슷한 생활수준의 타인에게 분노하게끔 만든다. 예컨대,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한 것을 가난한 사람들이 빼앗거나 무임승차한다는 식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인터넷 공간만 돌아봐도 자신의 실제적 가난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자신은 이미 가난을 극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반, 자신은 가난하다 말하지만 실제 경제적 수준은 절대적 가난과는 한참은 거리가 먼 사람들이 반이다. 진정한 절대적 가난에 처한 사람들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여러 방식으로 그들의 삶은 감춰지고 사라진다. 문제화되지 않기에, 그와 같은 사람들과 공간은 한국 사회에서 없는 것으로 셈해지고 만다.이제는 TV 프로그램마저 달동네와 쪽방촌을 조망하지 않으며,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의 나름의 힘든 삶을 가난으로 포장해 보여줄 뿐이다. 소설가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보다 훨씬 더 질이 안 좋은, 심지어 그와 같은 ‘가난장난’이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마저 스스로를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 현실이, 대한민국의 현재이다. 부디 이번에는 그 많은 공약과 정책들이 무사히 이행되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2022-07-19

내향인으로 살아남기

내향적인 사람으로 산다는 건 오해를 사는 일의 연속이다. /언스플래쉬 사람마다 정해진 에너지가 있다는 말을 온몸으로 깨닫는 요즘이다. 근무 시간 내내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리고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쓰노라면 일순 머리가 핑 돌기도 한다.연비가 좋지 않아. 내 몸은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자책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아프다, 골골대면서 모처럼 찾아오는 휴일엔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침대에 누워있는 것으로 시간을 다 쓴다. 어쩌면 나는 게으른 사람인 걸까? 소중한 주말을 멍하니 흘려보내면 그런 생각이 떠오르고 쉽게 우울해진다.그러다 최근, 나 자신을 변호하기 좋은 말을 발견하게 됐다.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오은영 박사가 한 이야기였다. 시도 때도 없이 누워있는 아이를 보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긴장감이 높다. 특히 변화가 있거나 새로운 걸 할 때는 긴장을 많이 한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긴장한다. 그래서 집에 오면 그 긴장을 완화시키려고 누워있는 거다. 게으른 게 절대 아니다.”그녀의 말에 위안받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무수한 ‘집순이’, ‘집돌이’들, 특히 언제 어디서나 누워있는 것을 생활화하는 이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을 테다. 그렇다. 우리를 단순히 게으른 자로 취급해선 안 된다. 사회를 살아가는데 남들보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할 뿐.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는 ‘집순(돌)이’들도 두 부류로 나눠진다. 집에서도 바쁘게 움직이는 쪽과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쪽. 당연히 나는 종일 누워있어야만 하는 쪽이다. 침대 밖을 나오는 것도 힘든데 하물며 집 밖으로 나서는 일은 문자 그대로 강행군이나 다름없다.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만남, 혹은 좋아하는 사람을 보러 가는 발걸음조차 무겁다. 누군가를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눠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말을 꺼내는 상대의 의도를 돌아보게 되고 대화 도중 문득문득 떠오르는 침묵이 불안하고 스스로의 말을 끊임없이 검열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피로감이 쌓이는 것이다.외향적인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봤을 때 내향적인 사람은 어딘가 불편하게 보일 수 있다. 자신만큼의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서운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내향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떠올려 보기를 권한다. 바깥으로 뻗어가지 않고 안쪽으로 향한다는 것. 모두의 에너지가 향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 상대를 이해하기가 조금은 수월해진다.내향적인 사람, 다시 말해 내향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오해를 사는 일의 연속이다. ‘요즘 뭐 하고 살아?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는 연락은 내향인들에게 있어 강도 높은 업무를 부여받은 것과 비슷하다. 약속이 정해지는 순간부터 약속 당일까지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디서 만나야 하지? 만나서 먹어야 할 음식은? 어떤 주제의 대화를 나누어야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을까? 그 시간대는 사람들이 붐빈다던데 차라리 다른 곳에서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상대를 만나기도 전에 완전히 지쳐버린다.이러한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억울한 목소리로 외치고 싶다. 알아요. 나도 이런 내가 싫단 말이에요.싫어도 별수 없다.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인류의 오랜 소망으로 여러 장르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변형의 형태를 보라. 마블 코믹스의 ‘스파이더맨’은 루저에 가까운 인물이 거미에 물려 하루아침에 슈퍼 파워를 갖게 되는 서사를 담고 있지 않은가.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나 자신에서 탈피하여 완벽하게 다른 것으로 탄생하는 상상은 즐겁지만 결국 허구에 그칠 수밖에 없다. 내향인은 자신이 내향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이것은 슬프거나 끔찍한 일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을 자는 것처럼 당연한 일일 뿐이다.그러니까 이 글은 수다스럽고 불필요한 자기 대변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내향인의 누명을 한 꺼풀 벗겨내고 싶다.당신의 지인이 연락을 잘 받지 않는다던가, 만남을 차일피일 미룬다면, 그것은 당신이 싫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그는 자신의 지난한 일상을 살아내기 위하여 가진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아껴서 사용하는 중이며 스스로와의 대화를 나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미덥지 않더라도 약간의 애정으로 내향인을 들여다보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당신을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돌파하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애쓰고 있다는 것을.

2022-07-19

이상하고도 특별한

이상하다는 건 뭘까. 사전에선 정상적인 상태와 다르다, 또는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지식과는 달리 별나거나 색다르다는 의미를 뜻한다. 유의어로는 독특하다 괴상하다, 특이하다라는 단어들이 뒤따른다.ENA 채널 드라마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선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 스팩트럼을 동시에 가진 변호사 ‘우영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영우는 한번 본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다. 5살부터 법조문과 판례문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달달 외우는 명석한 두뇌를 지님과 동시에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 수석 졸업, 변호사 시험은 1500점 이상의 점수를 받으며 천재의 면모를 보여준다.27살이 된 영우는 대한민국 최초의 자폐인 변호사란 타이틀을 따내며 법무법인 한바다에 인턴으로 입사한다. 하지만 대형 로펌에서 살아남기란 그리 녹록치 못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은 거꾸로 읽어도, 똑바로 읽어도 우영우라 소개하며, 갑작스레 고래 이야기에 푹 빠져서 대화의 흐름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길을 가다 영우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옆으로 비켜서서 걸을지도 모른다. 영우는 모든 감각을 과민하게 느끼기 때문에 출근길에도 극도로 예민해져선 몸에 힘을 잔뜩 준채로 어색하게 걷는다. 회사에 도착해선 회전문을 통과하지 못해 문 앞에서 서성인다. 어렵사리 회사 건물에 들어가도 자폐 스펙트럼 증상 중 하나인 반향어(상대방의 말을 따라하는 행위)를 사용하여 주위 사람을 난처하게 한다.영우를 가장 위기로 몰아넣는 건 사람들의 시선이다. 일하는 변호사가 아닌, 자폐를 가진 사람으로 많은 이들이 지나치게 영우를 배려하거나, 반대로 무시 하거나, 정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변론을 하지 말아달라는 편견과 멸시를 묵묵히 받아들여야 한다.하지만 영우는 본인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는 동시에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 또한 잘 알고 있다. 누군가는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라 단정 지으며 사건을 그간의 규칙에 맞춰 해결하려하지만, 영우는 그렇지 않다. 정형화된 틀이나 선입견이 영우에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고 결정적인 핵심 키를 찾아 불리한 위기를 유리한 기회로 가볍게 뒤집는다.장애에 대한 시선은 영우에게만 주목되지 않는다. 1화에선 노년 여성이 등장하고 2화에선 성소수자, 3화에선 영우와 같은 스펙트럼 장애를 앓고 있지만, 지능이 높지 않은 김정훈이 등장한다. 영우는 세상의 바깥에 밀려난 이들을 같은 시선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려 집요하게 애쓴다. 그 과정에서 세상의 많은 이들이 장애를 다루는 태도나 인식이 너무나 미흡함을 극명히 보여준다.‘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지난 6월 29일 수요일에 시작했으며, 스카이TV가 운영하는 ENA 채널을 통해 방송되고 있다. 닐슨코리아 전국유료가구 기준에 따르면 1회엔 0.9%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2회에선 1.8%, 3회에선 4.0%, 그리고 4회만에 5.2%라는 이례적인 상승세를 보여주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드라마가 뜨겁게 주목받으면서 많은 이들이 영우에게서 위안을 느낀다고 한다. 거듭되는 차별과 실패로 위기를 마주해도 영우는 엉뚱하고 유쾌하게 정의된 규칙과 틀을 마구 깨부순다. 그 과정이 과장되었다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섬세하고 씩씩하게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그간 영우를 편견으로 바라보았던 주변 인물들과 시청자까지 자신의 편으로 이해시킨다.나와 다름을 인지하고 이해하려는 데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간 내가 갖고 있던 지식과 선입견을 모조리 벗어나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며 장애는 무조건 보호하고 연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무작정 선의를 내보이는 건 오히려 무심히 상처를 줄 수 있단 걸 깨달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최선은 장애를 가진 이들을 이상한, 남다른, 독특한, 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다.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며,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깊이 공감할 때에 세상은 아주 조금씩 변화하여 단단해진다. 이러한 드라마를 마주하면 크게 안심이 된다.

2022-07-12

그 섬에 가고 싶다

섬, 이라고 소리 내 발음하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체온이 조금 내려간다. 한 여름 무더위와 열대야로 고생할 때 써먹기 좋은 방법이다. 섬은 나른한 꿈의 세계, 모든 생각이 평화로운 비무장지대다. 그럼에도 섬에서 나는 죄 지은 것도 없이 죄인이 된다. 수평선을 훔친 내 눈이 푸른 수의를 입고 푸르디푸른 감옥에 갇힐 때,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기도 싫은 자발적 징역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섬에 가면 그냥 눌러앉고 싶어진다.나는 섬을 사랑한다. 내 몸에는 섬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 전남 완도의 작은 마을 초평리가 엄마의 고향이다. 그러니까 섬은 일종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살면서 수많은 섬을 여행했다. 제주도, 가파도, 마라도, 지귀도, 우도, 추자도, 울릉도, 덕적도, 비진도, 사랑도, 가거도, 완도, 청산도, 보길도, 외도, 홍도, 만재도, 위도, 개야도, 녹도, 초도, 강화도, 교동도, 거금도, 식도, 금오도… 이국의 섬들도 아름다웠다. 크레타, 산토리니, 카프리, 바이칼 알혼… 그러고 보니 모두 사람이 사는 섬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섬, 무인도에는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가서는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섬이라는 운명이 혹 무인도 표류로 이어지진 않을까, 가끔 걱정하며 상상하곤 한다.“무인도에 간다면~”으로 시작하는 질문은 만국공통 게임일 것이다. 무인도에 간다면 꼭 가져갈 세 가지로 낚싯대, 라디오, 가족사진을 꼽는 나는 ‘현실 반 낭만 반’적인 사람 같다. 집이야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이용해 대충 만들고, 식수는 코코넛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명색이 전문 낚시인인데, 낚싯대 하나만 있으면 식량을 확보하는 건 자신 있다. 라디오는 세상 소식을 알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지만, 음악을 듣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음악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가족사진은 그리움을 달래주고,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환기시켜줄 것이다.인터넷에 ‘무인도 가는 법’을 검색하면 인천 팔미도나 사승봉도, 실미도 관광 상품이 안내된다. 무인도도 관광지화된 것이다. 아니면 망망대해에서 표류해 기적적으로 섬에 닿는 것이 무인도에 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다. 둘 다 싫다. 관광 상품은 동물원에 갇힌 아프리카 코끼리를 보는 듯한 슬픔을 일으킬 것 같고, 표류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어차피 갈 수 없다. 왜냐하면 무인도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 유인도가 되는 무인도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비실재의 세계다.나에게 있어 사랑이란 무인도를 무인도로 남겨두는 일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내 사랑은 혼자 하는 놀이, 혼자 앓는 열병이었다. 짝사랑의 대상에게 차마 마음을 말하지 못했다. 말하는 순간 사랑이라는 환상이 깨질까봐, 혼자 설레고 혼자 황홀한 세상이 물거품처럼 사라질까봐 그저 상상의 영역으로, 어딘가에 있다는 아름다운 섬으로 남겨두는 쪽을 택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때로는 용기를 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을 고백하면 그녀들은 멀리 떠나고, 나는 슬픔이라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난파선, 아니 내 자신이 아무도 찾지 않는 무인도가 되었다. 사랑을 고백하지 않으면 그녀가 결코 닿을 수 없는 무인도로 영영 남고, 사랑을 고백하면 내가 무인도가 되어버리는 이상한 바다에서 청춘을 보냈다. 어느 시절에는 뜨겁게 연애하기도 했지만, 사랑이란 늘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우리를 추락시킨다. 멀리서는 평화롭고 아름답게만 보이던 섬에 막상 들어가 보면 뱀, 전갈, 독거미, 불개미가 득시글하고 뜨거운 뙤약볕에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나에게 사랑이라는 섬은 잔혹했다.지난달에는 연평도에 농어 낚시 다녀오고, 통영 연화도에 전갱이 잡으러 갔다 오고, 며칠 전에는 제주도에 가서 한치 잔뜩 낚아 왔다. 다음주에는 고흥 나로도에 민어 잡으러 간다.이 섬에서 저 섬으로 신나게 낚시 다니다 보니 벌써 7월, 30대의 마지막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다섯 달만 지나면 마흔이다. 정신 차리고 연애를 모색해야 할 때다. 노총각으로, 무인도로 영영 남고 싶지 않다. 내 생이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이어선 곤란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정착할 수 있는 “그 섬에 가고 싶”다.

2022-07-12

오타쿠, 세이브 더 월드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년 소녀들의 성장 드라마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차원 우주에서부터 초능력, 소련의 스파이와 미 정부의 비밀 실험 등 갖가지 음모론을 버무려놓은 작품으로 청소년판 X-파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매 시즌 새롭게 등장하는 음모와 그 안에 감춰진 세계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은 추리물과 액션을 훌륭하게 조합하면서 특유의 레트로적인 분위기를 살리고 있어 굉장한 몰입도를 자랑한다.하지만 내가 이 드라마를 챙겨 보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건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즐기는 ‘던전드래곤’이라는 게임 때문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게임은 흔히 TRPG라 부르는 게임의 일종으로 전사, 마법사, 성직자, 도둑 등 각자의 역할에 맞춰 연기하는 일종의 상황극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마스터는 캠페인을 만들고 상황을 조율하며, 참여자들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적절한 퀘스트와 보상을 제공한다. 반대로 게임의 참여자들은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연기를 수행하며 공동의 목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가운데 ‘던전드래곤’은 그 가운데 검과 마법이 발달한 세계인 ‘포가튼 렐름’을 주 무대로 삼는 캠페인 세계관으로,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데모 고르곤과 마인드 플레이어, 베크나 역시 이 세계에 등장하는 유명한 악마와 괴물, 마법사의 이름이다.요즘 등장하는 RPG 게임의 기본 틀을 만들어낸 ‘던전드래곤’이지만 사실 이 게임에 대한 처우는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테이블에 앉아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습 때문인지, 이 게임은 ‘너드’,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오타쿠’들이 하는 게임이라는 인상이 강했던 탓이다. 때문에 드라마에서도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급생들의 처우는 흔히 말하는 ‘찐따’ 취급에 가깝고, 그런 만큼 아이들은 서로를 더 의지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이들에게 ‘던전드래곤’이란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이들에게 검과 마법이 난무하는 ‘던전드래곤’의 세계는 현실에 억눌려 있던 자신의 자아와 신념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유로운 세계이며, 그런 서로를 의지하고 인정해주는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어 외롭지 않은 세계이다.덕분에 아이들은 이성적으로는 해석될 수도, 해결될 수도 없는 사건들 앞에서도 무너지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하나의 캠페인을 마주하듯 자신들의 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해결해나가고자 시도한다. 얼굴이 갈라지고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에게는 ‘데모고르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친구의 마음을 조종하는 알 수 없는 괴물에게는 ‘마인드 플레이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런 행동들은 어른들의 눈에 아이들의 소꿉장난처럼 비춰지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나가는 것은 그와 같은 아이들이다. 어른들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체념하고 슬퍼할 때, 아이들은 그와 같은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 새롭게 해결해낸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재밌는 건 아이들의 이 과정에 있어 ‘던전드래곤’이 현실의 이해와 해석, 문제의 해결을 위한 중요한 참조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세계를 경유하여 현실을 바라보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모든 문제들이 자신들의 손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서로에게 다짐한다. 마치, 그들이 플레이하던 캠페인인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결코 어른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자신들만의 세계를 경유해 현실을 바라보며, 그렇게 현실의 문제에 대처하는 나름의 방법을 배워나간다.조금 먼저 성숙해버린 아이들로부터 현실에서 ‘찐따’ 취급을 받던 아이들이 세계를 구해낼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공동체 속의 누군가가 특수한 취향을 가지거나 혹은 그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것에 야유하고 그들을 배척한다. 단지 취향을 이유로 하는 배척 속에서, 아이들은 은연중에 사회를 배워나간다. “남들과 다른 것을 원하지 말라.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있더라도, 남들이 원하는 것을 똑같이 원하는 척 따라가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배제될 것이다.” 하지만 ‘기묘한 이야기’는 그와 같은 독특함과 취향이 오히려 세계를 구하는 열쇠라고 속삭인다. 기묘하고 괴이한 것은 이 세계이지 당신이 아니며, 당신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당신에게는 단지 당신만의 서사가 있을 따름이며, 그건 결코 괴이하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는 다정함.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 ‘기묘한 이야기’에 담긴 아이들의 성장 서사에 열광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2022-07-05

우리는 서로의 등을 맞대고 자

‘등을 지다’는 말처럼 서운하게 느껴지는 문장이 또 있을까. 그것은 나의 시선이 더 이상 당신을 향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우리라는 관계를 떠나 반대의 방향으로 가겠다는 의미를 가진다. 상대의 등을 바라보는 행위는 애달프다. 돌아보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과 끝내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떠오른다. 등이라는 신체 기관은 어긋남에서 오는 슬픔의 상징일지도 모른다.내게 자신의 등을 보이는 존재가 있다. 팔뚝만 한 크기의 작은 개다. 보리라는 이름을 가진 이 친구는 조용히 다가와 자신의 등을 내 몸에 밀착시키곤 한다. 그러면 뜨거우면서 말캉한 감정이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느껴진다. 작은 소리에도 날카롭게 반응하는 동물이 다른 종의 동물에게 아무렇지 않게 등을 보인다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이전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우리는 서로의 등을 맞대고 잔다. 취침 시간이 되면 이부자리를 정돈하면서 보리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툭툭 친다. 나의 작은 개는 손짓을 따라서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오른다. 나는 보리의 배를 긁어주기도 하고 머리부터 꼬리까지 이어지는 털의 결을 따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잠에 빠져든다. 웅크리고 자는 중에 등 뒤에서 따뜻한 기운이 닿는다. 둥글게 말린 척추가 느껴지면 자연스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 뒤를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그 신비롭고 이상한 사실에 관하여.개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감정적 부분이 있을 것이다. 개가 인간에게 주는 사랑과 기쁨이 있지만 그만큼 굉장한 책임감을 져야만 한다. 한 생명이 자라날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은 당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훈련하고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가끔 개와 관련된 사건사고가 들려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한다.캐롤라인 냅은 자신의 저서인 ‘개와 나’에서 말한다. “나는 개에 대해 감상적이지는 않다. 모든 사람이 개를 키운다고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개와 주인의 관계가 언제나 건강하고 유익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순간의 선택으로 개를 키우게 된 저자는 개와 함께 사는 삶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개는 우리를 정답고 온화한 세계로 이끈다’는 말이 황당하게 느껴졌다. “개는 정답고 온화할 때도 있지만, 무서울 때도, 짜증 날 때도, 혼란스러울 때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공격적이고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이기도 하다.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또 주인에게 책임감과 강제성, 그리고 의존성에 대해서 온갖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그녀의 말대로다. 개와 함께 산다는 건 아름답지만은 않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만큼이나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적확한 문장으로서만 마음과 마음이 닿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보리와 나는 같은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우리는 손짓이나 뉘앙스로 소통한다. 그러다 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오해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어린 시절 상상했던 드넓은 마당에서 개와 함께 뛰어노는 목가적 풍경은 내 것이 아니다. 나의 개는 동화에서 본 것처럼 아름답고 충성도 높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실질적인 문제를 제공한다. 내가 아끼는 물건을 마구잡이로 물어뜯어 놓고, 나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기도 하며, 오줌을 싼 자리에는 지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별것 아닌 일에 지나치게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구는 면이 있다. 보리는 내가 꿈꾸던 완벽한 반려견이 아니며 나 역시도 보리에게 있어서 완벽한 반려인이 아닐 것이다.그렇지만 밤이 되면 우리는 동시에 같은 자리에 눕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등과 등이 맞닿는다. 내 뒤통수는 내 시선이 닿지 못하는 곳. 내가 볼 수 없는 곳을 지켜주는 존재가 내 곁에 있다. 위안과 안도, 그리고 약간의 슬픔이 찾아온다.나의 작은 개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너는 나의 뒤에서 무엇을 보는 거냐고. 우리는 서로의 내부로 들어갈 수 없기에 등과 등이 맞닿는 것으로 안심한다. 안희연의 시 ‘그의 작은 개는 너무 작아서’에는 이런 시구가 있다. “한 존재를 끌어안고 너무 깊이 와버렸기 때문에/ 자신이 끌어안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대로라면 행복하다고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서로가 있기 때문에 충분한 밤을 보내고 아침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척추뼈의 감각에서 사랑을 읽는다.

2022-07-05

퇴적공간, 종로3가

종로3가 유진식당에서 냉면과 수육에 막걸리 마셨다. 종로는 늘 정겹고 애틋한 곳이다. 종로3가역 5번출구 ‘송해길’ 송해 선생 흉상 앞에 분향소가 설치돼 있었다. 눈길을 끄는 현수막이 보였다. “송해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함께여서 즐거웠습니다. ㅡ종로 이웃 성소수자 일동” 송해 선생은 퀴어 축제를 옹호하는 등 생전 성소수자들을 편견 없이 환대했다.‘이웃’이라는 단어 앞에 먹먹했다. 종로3가는 과거부터 성소수자들이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한 곳이다. 생산력 없는 노인들, 장애인들도 종로3가에 모여 별 일 없이 하루를 보낸다. 해거름 무렵 나이 든 손님들이 노상 테이블에 앉기 시작했다. ‘퇴적공간’의 저자 오근재는 탑골공원을 비롯한 종로3가 일대를 사회 중심에서 밀려난 아브젝트들의 집적지라고 했다. 하루 3천여 명의 노인들이 모여드는데, 가정이라는 집단에서 1차 추방을 당하고, 사회적 변화로부터 2차 추방을 당한 이들이라고 덧붙였다. 추방당해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이웃’들이다.어느 장소에 오래 다니다보면 장소와 사람이 한 몸이 되는 느낌이다. 장소가 사람에게 스며든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이는 장소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장소애라는 것은 말 그대로 장소에 대한 사랑이다. 쉽게 말하자면 장소와 살 부비며 사는 동안 정분이 나는 것이다. 마틴 부버의 말을 빌리자면, ‘나’와 장소가 ‘나-당신’의 관계가 되는 것, 무의식과 실존 안에서 주체와 장소가 하나 되는 것”(장석주, ‘장소의 탄생’)이다. 종로3가는 한국 도시 문명이 통과해온 사회·문화적 맥락을 극적으로 수록해온 장소로서 쇠락과 번영이 공존하는 ‘서울’을 대변한다. 종로3가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번영보다는 주로 쇠락을 살아내는 이들이다. 낮술의 흥취가 즐겁지만,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지는 이유다.종로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돈암동이다. 1989년 2월 18일, 돈암동 세입자대책위 부위원장이던 철거민 정상율은 세입자에게 행패를 부리는 집주인을 말리러 갔다가 집주인이 휘두른 칼에 가슴을 찔려 사망했다. 그는 돈암2동 606-377번지에 살던 소시민이었다. 이 죽음은 재개발 시대 도시 빈민들의 고통을 증언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듬해 봄, 돈암동 철거민들의 오랜 아픔과 눈물이 마침내 영구임대주택 건립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그날 달동네에서는 잔치가 열려 돼지 삶고 막걸리 나눠 마시며 춤추고 노래했다. 그 후 30년이 지나 돈암동에는 근사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김광섭이 ‘성북동 비둘기’에서 묘사한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이 울려 퍼지던 “산1번지 채석장”이 지금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다. 재개발 시대는 끝났지만 30여 년 전 정상율의 노제를 지낸 흥천사 입구에는 천원 동냥하는 노숙인들이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청계천 버들다리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도 두터운 점퍼를 입은 채 바닥에 누워 잠든 노숙인들이 늘 있다. 무관심과 소외의 그늘이다. 이번에 성소수자들이 내건 송해 선생 추모 현수막이 뉴스에 보도됐는데, 혐오, 분리, 차별의 댓글들을 읽는 게 고통스러웠다. 한편 종로를 대표하는 노포인 ‘을지면옥’이 이제 헐린다고 한다. 다른 곳으로 이전해 계속 장사하겠지만, 오래된 건물이 주는 아늑함과 곰살맞은 세월의 숨결은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뉴스 댓글에도 흉물이니 슬럼화니 알박기니 하는 천박한 자본논리들만 판친다. 을지로 노가리골목의 원조집인 을지OB베어는 두 달 전 강제집행으로 철거됐다. 옆 가게인 만선호프가 건물을 매입해 쫓아낸 것이다. 이제 골목에는 만선호프 뿐이다. 그런 식으로 확장한 만선호프만 10개다. 좋은가? 미친 짓이다.한국 사회는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으나 사람들의 욕망은 점점 획일화되어 간다. 자본화된 욕망은 밀려난 이들, 약자와 소수자들, 오래된 것들, 이질적 타자를 품지 못한다. 추억과 낭만들이, 이웃들의 삶이 여기저기 철거되는 중이다. 유진식당에서 낮술 마시고 일어나는데, 연둣빛 정장을 멋지게 차려 입은 어르신께서 아무 이유 없이 자판기 커피를 뽑아주셨다. 늙고, 낡고, 병들고, 촌스럽고, 조금은 지저분하고, 싸구려지만, 생면부지의 타인에게도 마음을 여는 이웃들이 종로3가에 있다. 이때 종로3가는 대명사다. 사람과 장소가 한 몸이 되어버린, 사랑하는 그곳을 나는 잃고 싶지 않다.

2022-06-28

갓생 살기

요즘 ‘갓생’이란 말이 여기저기서 자주 들린다. ‘갓생’이란 갓(God,신)과 인생(人生)을 합친 신조어로 꾸준히 계획적으로 살아내는 삶을 뜻한다. 그런데 목표를 설정하는 게 그리 거창하지 않다. 자신의 삶을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면서, 이루기 쉬운 작은 목표들을 설정한다.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 물 한잔 마시기, 하루에 한 번 하늘 올려다보기, 밥 먹고 눕지 않기, 명상하기 등 쉽게 행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성취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목표를 지향한다. ‘갓생 살기’의 핵심 포인트는 지속 가능한 꾸준함과 그에 따른 성취감이기 때문이다.과거 자기 계발 열풍이 불었을 땐 유명인이 행하는 루틴을 그대로 따라한다거나, 1년 안에 10KG 빼기, 책을 100여권 읽기 등 다소 거창한 목표를 크게 잡아 노력했다면 이와 다르게 갓생살기는 개인이나 상황에 초점을 두고 지금 당장 이룰 수 있는 목표에 집중한다. 절대적으로 옳은 삶의 방식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듯, 갓생 살기를 실현하는 이들이 세운 목표는 힘을잔뜩 뺀 채로 ‘개인’에 맞추어져 있다. 하루 영양제 챙겨 먹기, 식사 후 양치질 곧바로 하기, 밥 한공기만 먹기, SNS 이용 시간 제한하기 등 나의 삶에 중점을 두고선 개인이 원하는 행복의 방향을 추구한다는 것이다.경험이나 체험을 인증하고 공유하는 MZ세대 사이에서 ‘갓생’이 유행처럼 번지자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 오하명(오늘 하루 명상) 등의 해시태그가 달린 챌린지 게시물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행한 노력을 SNS에 인증하며 자신감을 얻고 또 사람들에게 응원을 받으며 오늘의 성취를 쌓고 쌓아 나의 삶을 보살피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취지다.해외선 이미 ‘THAT GIRL’ 챌린지가 한창이다. 유튜브에 THAT GIRL CHALLENGE, THAT GIRL VLOG 등 간단히 검색만 해보아도 게시물들이 폭설 마냥 쏟아진다. 갓생살기와 비슷한 맥락이지만 THAT GIRL은 일도 잘하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과 자기관리 전부 완벽한 현대 여성을 뜻하는 듯하다.전문가들은 이러한 유행의 흐름을 두고선, ‘갓생 살기’는 코로나 19가 불러온 현상이라 말한다. 제한된 일상에서 많은 이들이 무기력함과 우울함을 겪었기에 오히려 자신이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여 주체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삶을 택한다는 것이다.갓생이 트렌드로 자리 잡자 이와 관련된 서비스나 마케팅이 활발해졌는데, 캐시워크는 ‘영양제 먹기 챌린지’ 이벤트를 시행한 바 있다. 14일 동안 빠지지 않고 영양제를 먹고선 SNS에 인증샷을 남기면 CU 편의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프티콘을 증정했다.농심은 수분 섭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른 물 습관 캠페인을 선보였다. 전지현의 하루 물 루틴이란 콘셉트로 하루 중 언제 물을 마시면 좋을지 소개했고, 갓생 사는 이들을 타깃으로 하루 2L 물 마시는 습관을 권장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최근 GS편의점에 방문했다가 신기한 초콜릿을 발견했다. 나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어 즐길 수 있다는 ‘오늘 하루 초콜릿’은 아침과 점심, 저녁으로 초콜릿을 때에 따라 먹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아침 초콜릿은 칼슘과 비타민 D가 들었고, 점심은 타우린, 저녁은 마그네슘이 포함되는 등 기발한 아이디어와 재미가 더해진 제품이라 인상 깊었다.오늘 하루 초콜릿을 기획한 GS 리테일의 ‘갓생기획’팀은 ‘공감’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토대로 그간 없던 새로운 먹거리를 꾸준히 내놓는다. 유명 도넛 브랜드인 ‘노티드’와의 콜라보한 노티드 우유와 허니버터땅콩으로 알려진 바프(HBAF)와의 협업한 꿀젤리를 선보이며 특별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갓생기획의 굿즈도 존재한다. 갓생을 살겠다는 글자가 쓰여진 다이어리부터 시작해서 MZ세대에서 핫한 ‘인생네컷’을 따라한 무무씨의 갓셍네컷 등 웃음을 자아내는 상품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갓생은 오늘 당장의 ‘나’에 대해 집중한다. 먼 미래의 희망을 막연히 기대한다기보단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며 ‘오늘의 행복’에 기댄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사소하고 가벼운 목표여도 갓생을 실천하는 이들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보인다. 머지않아 이 다짐과 원동력이 배로 커질 수 있도록, 계속 되는 여러 좌절에도 나아가려는 MZ세대 친구들에게 함께 하잔 응원을 보내고 싶다.

2022-06-28

이것은 나의 몫, 나의 책임

사람들은 모두 꿈을 꾼다. 불완전한 자신을 벗어나 완전하고 충만한 자신의 모습을 꿈꾼다. 더 나은 삶, 더 즐거운 인생, 더 나은 ‘나’의 모습을 꿈꾸며 저마다의 미래를 꿈꾼다. 그래서 꿈은 모두 제 갈래의 길로 갈라져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는 공통된 목적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가닿는 방법은 모두가 다르다. 같은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설혹 비슷한 미래를 꿈꾼다 할지라도.이렇게 말하자면 모두가 다른 꿈의 조각을 앓으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같은 꿈의 조각을 앓고 있다. 지금의 나에 대한 불만족으로부터 비롯되는, 더 나은 내가 되는 꿈 말이다. 어느 누구도 지금의 자신을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제 각각의 불완전함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꿈이 모두 나름의 색으로 칠해져 있어 제각각의 색으로 빛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원하는 건 사실 꽤나 단순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무언가, 자신의 삶을 충만하다 느낄 수 있게 해 줄 무언가다.어렸을 때,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줄 알았다. 내가 원하는 걸 마음껏 꿈 꿀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가난과 화목하지 않은 가족 속에서, ‘나’의 꿈은 실현 불가능한 미래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그 무렵 나는 음악이 하고 싶었다.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나는 내가 재능이 있다고 믿었고, 얼마든 열심히 할 수 있고 또 잘 해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문제는 돈과 시간이었는데, 가난했던 우리 가족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그게 밉고 싫어서, 나는 학교도 가지 않은 채 매일을 떠돌아다녔다.나는 진심을 다해 나를 둘러싼 환경을 마음껏 원망했다. 세상에는 자신이 무얼 원하는 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토록 허다하게 많은데, 하고 싶은 일을 찾았음에도 그걸 할 수 없게 만드는 무능한 가족들이 미웠다. 나의 삶이 비극으로 끝난다면, 그건 나의 환경 탓이리라고 진심으로 믿었다.어느새 20년 가까이 지난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씩 그 무렵의 감정을 생각한다. 그때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만약 내가 정말로 음악이 하고 싶었다면,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주말이면 레슨을 받고 했다면 됐지 않았을까? 정작 학교를 관뒀을 때 지독한 무기력감에 시달렸던 건 왜였을까? 왜 나는 내가 스스로 해내지 않고, 부모님에게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도록 ‘전부’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던 걸까. 그들이 결코 내어줄 수 없으리라는 걸 그보다 더 어렸을 때에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그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에 가닿게 된다. 나는 정말 음악이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정말로 음악이 하고 싶었던 걸까. ‘나’라는 인간이 사실은 그저 평범하고 아무런 재능도 없으며, 죽기 살기로 노력해야 겨우 평범한 수준에야 이를 뿐인 지극히 보통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건 아닐까. 그렇기에 ‘음악’이라는 닿을 수 없는 꿈을 목표로 설정하고 스스로의 결핍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타인의 탓으로 돌렸던 건 아니었을까.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아마 답은 없을 것이다. 그건 이미 20년이나 지나버린 과거이고, 그때의 열정은 그때의 나만이 알고 있을 것이므로. 어쩌면 그건 오로지 ‘나’만의 탓도 아닐 것이고, 오로지 ‘부모’의 탓도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공평하게 무능했고, 공평하게 비겁했던 것 같다. 할 수 없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이 공평하게 뒤섞여,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만약 그때 정말로 음악을 시작했더라면, 부모님께서 나를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었다면, 나는 그만큼 음악을 열망하진 않았으리라는 거다. 적어도, 나의 음악에 대한 열망은 그만큼 순수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 다만, 여전히 나는 방법을 모른다. 단 하나 아는 것이 있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이 실현될 수 없을 때, 그걸 남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건 나의 삶이 타인에 의해 규정되도록 만드는 생각이니까. 환경이 나의 삶을 규정하도록 내버려두는 짓이니까.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어야만 했다. 내가 나의 욕망을 실현시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건 타인의 탓이 아니라 나의 무능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이다. 오직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만이, 나의 삶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게 점점 나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2022-06-21

이야기의 힘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우리 가족은 고향을 떠나 다른 도시로 이사를 해야 했다. 익숙한 환경을 뒤로한 채 낯선 세계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학생을 향한 조건 없는 환대를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자주 교실에 홀로 놓였다. 같은 반 친구들과 나누는 시답지 않은 대화. 짝을 지어야만 하는 체육 시간. 삼삼오오 모여 급식소로 향하는 경쾌한 발걸음. 그러한 일상은 내게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대로인데 나를 둘러싼 세상은 완전히 변해있었고 그 간극을 메우는 방법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진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책은 내게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만화나 게임기는 가차 없이 압수하던 선생님이 소설만큼은 허용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발자크 같은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두드려주기까지 했다. 그 격려가 나의 유일한 자부심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에 들러 어려워 보이는 책을 찾았고 모든 문장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끝끝내 읽어내기 위해 노력했다.그러니까 소설을 읽는 행위는 중학생이었던 내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의 방식이었다. 육체는 교실에 있지만 정신은 머나먼 곳을 유영하면서 일종의 자유로움을 느낀 것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는 생생한 체험으로 다가왔으며 강렬한 방식으로 나를 매료시켰다. 어느 순간부터 소설은 단순한 도피처가 아닌 나 자신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다.인간은 상상하는 동물이다. 이 괴상한 능력 덕분에 인류는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작가들은 상상의 영역으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세계를 그린다. 그것은 희망적인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고 섬뜩하고 두려운 형태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는 작가의 결심에 달려 있다. 놀라우리만치 디테일한 세상을 그려낸 올더스 헉슬리, 조지 오웰, 그리고 마거릿 애트우드처럼.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는 전체주의 국가를 상상한다. 소설의 배경은 21세기 중반이다. 전 지구적 전쟁과 환경오염으로 출생률이 급격히 감소하게 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면서 ‘길리아드’라는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남성 권력자 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 사회로 구성원들의 활동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이토록 끔찍한 국가에서 가장 희생당하는 건 여성이다. 그들은 기능대로 옷의 색이 정해져 있으며 여성의 역할은 가임과 출산에 국한된다. 이러한 체제를 옹호하는 자는 말한다. 과거의 사회는 선택권이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차고 넘치는 선택의 여지에 죽어가는 사회’였다고. 그러니 지금의 상황이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고. ‘세상에는 자유가 한 가지밖에 없는 게 아니야. 목표를 향한 자유가 있는가 하면 무언가로부터의 자유가 있지. 무정부 시대의 자유는 무엇을 행할 자유였어. 하지만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무언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거야.’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러나 주인공은 자유를 박탈당하기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며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것을 내가 꾸며내는 이야기로 믿고 싶다. 만일 내가 꾸며낸 이야기라면, 결말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언젠가 끝이 나고, 진짜 삶은 그 후에 이어질 것이다. 끝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허구의 인물은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도 그것이 허구이기를 바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우리는 너무나 명징한 현실을 발견하게 된다.그런 면에서 이야기는 신비하고 이상하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일수록 그렇다. 선명하게 흘러가는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완전히 빠져들게 되고 그러다가도 순식간에 모든 것이 휘발되며 백지상태가 되기도 한다.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고 한 시대를 뒤흔들 수 있는 거대한 가치를 마주하다가도 하등 쓸모없는 허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애트우드는 이야기를 쓰는 행위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어둠, 그리고 욕망이나 충동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 들어가서 운이 좋으면 어둠을 밝히고 빛 속으로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오리라는 욕망 또는 충동 말이다.’막막한 외로움에 어쩔 줄 모르던 과거의 내게 세상의 모든 낙관적인 단어를 모아 건넸다 한들 어떤 위로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도서관에 꽂혀 있는 무수한 소설책 또한 완전한 위로의 방식이 될 순 없었다. 늘 그렇듯 소설은 해답을 주지 않으니까. 하나의 이야기를 그저 보여줄 뿐이니까. 거기에서 빛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것은 결국 스스로가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라는 전언이며 그 무심하면서 다정한 언어야말로 내가 경험했던 이야기의 놀라운 힘이다.

2022-06-21

송해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송해 할아버지 이제 편히 쉬세요. 덕분에 행복했어요. /연합뉴스 송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선생님이나 어르신 등 여러 호칭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싶다.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누구에게 “할아버지!” 부른 일이 없었다. 슬픔과 애틋함, 그리고 사랑을 담아, 할아버지! 참 오랜만에 불러본다. 송해 할아버지… 할아버지!실시간 인기 검색어에 송해 할아버지가 오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주무시는 할아버지의 코에 손을 갖다대보는 어린 손자처럼, 조마조마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온 국민이 다 그랬다.여섯 해 전 죽도시장 ‘울릉도 돼지집’에서 머릿고기에 탁주 마시는데, 주인 할머니가 울상이었다.송해 할배 돌아가셨대서 시장 사람들 다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힌다고. “헛소문이래요. 멀쩡하시대요” 말씀드리자 옆집 아주머니에게 “만우절도 아닌데 왜 거짓말해! 악썽루머 싸이버 수사대에 의뢰한단다!” 역정을 냈다.그 모습이 재밌어 큭큭 웃었다. “건강하단다! 어이고 오래 살겠다!”라던 돼지집 할머니 예언대로라면 백 살은 넘기셨어야 하건만, 너무 일찍 가셨다. 코로나로 야외 공개방송이 중단되면서 에너지를 잃어버리신 게 아닌가 싶다. 계속 팔도를 돌아다니며 무대에 올랐다면 10년은 더 사셨을 것이다.장수의 아이콘이셨다. 제임스 딘, 엘비스 프레슬리, 체 게바라, 레이 찰스보다 형님이고, 그레이스 켈리에게는 오빠이자 마릴린 먼로에게는 한 해 아래 동생이셨다. 백 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으니 천수를 누리셨다. 말년에 무의미한 연명치료 받으며 고생하다 가신 것도 아니니 어찌 보면 호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황망하고 먹먹한 것은, 그분은 정말 천 년 만 년 사실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실 줄로만 알았다.어린 시절, 일요일 정오가 되면 늘 “전구우욱~! 노래자랑!” 외치는 소리와 함께 “딴따단 딴따단딴” 흥겨운 오프닝 음악이 집안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가도 “전구우욱~!”, 엄마랑 동네 국수집에 잔치국수 먹으러 가도 “노래자랑!”, 친구네 집에 놀러가도 “딴따단 딴따단딴”, 쌀집에 떡 찾으러 심부름 가도 “딩동댕동” 어느 곳에서나 ‘노래자랑’이었다. 괜히 ‘전국’이라는 총체성의 명사가 붙은 게 아니다. 앞집, 옆집, 뒷집, 너 나 아무개 할 것 없이 누구나 틀어놓는 프로그램, 안 봐도 틀어놓는 프로그램이 ‘전국 노래자랑’이었고, ‘일요일의 남자’ 송해 할아버지의 익살맞고 다정한 음성은 공기처럼, 물처럼 늘 있는 것이었다.온몸에 꿀벌을 두르고 무대에 오른 양봉업자 아저씨 때문에 벌에 쏘이기도 하고, 짜디짠 어리굴젓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어주는 아주머니 손길을 거절 못해 우물우물 잡수기도 하고, 김인협 악단장(2012년 별세)에게 용돈을 갈취(?)해 어린아이들 나눠주기도 하고, 때로는 꼬마아이와, 때로는 백 세 어르신과 함께 덩실덩실 춤추기도 하셨다.‘전국 노래자랑’에는 각 지역의 고유한 특색이 늘 살아 숨 쉬고, 가족과 이웃 공동체의 따뜻한 온정이 있고, 서민의 웃음과 눈물, 삶의 애환과 고락이 흥건했다. 전국 노래자랑이 방영되는 일요일 점심이면 온 나라가 다 시장터고, 약수터고, 광장이고, 가설무대였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요양병원에 오래 누워 계셔서 이제는 보지도, 거의 듣지도 못하는 나의 할머니께서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 중 가장 좋아하는 분이 송해 할아버지셨다.문맹인데다 눈과 귀가 어두운 할머니는 당신이 아는 기초적이고 직관적인 언어를 조합해 의미를 만들곤 하셨는데, 매주 일요일 정오가 되면 전국 노래자랑이라는 프로그램 이름 대신 늘 ‘산에서 노래하는 거’ 틀어달라고 내게 부탁하시곤 했다.“그 할아버지 웃겨 죽겠어”라며 박장대소하던 할머니와 함께 계란을 삶아 까먹던 그 일요일,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그 모든 일요일들에 언제나 송해 할아버지가 계셨다. 이제 요양병원 면회가 허용되지만, 할머니 귀에 보청기를 껴 드리고 “할머니!”하고 불러볼 수 있지만, 송해 할아버지 소식은 차마 전하지 못할 것 같다.모두의 할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드려야겠다. 송해 할아버지 편히 쉬세요. 덕분에 행복했어요.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천구우욱~! 노래자랑!” 신나게 외쳐주세요. 이땅의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웃을게요.

2022-06-14

오늘도 나마스떼

요가에서 중요한 건 꾸준함이다. /언스플래쉬 일상이 고되게 느껴질 땐 매트 위로 오른다. 유튜브 즐겨 찾기에 저장해둔 요가 영상을 틀면 잔잔하고도 낮은 선생님의 음성이 수련의 시작을 알린다.요가는 몸의 상하좌우를 균일하게 늘리는 스트레칭으로 시작한다. 어느 한쪽의 방향에 치우치지 않게 몸의 오른쪽을 늘리면 그 다음은 왼쪽을 늘린다. 일직선으로 서 있는 ‘타다이사’나 자세는 머리부터 시작해서 어깨, 골반, 무릎, 발끝까지 일자로 곧게 버티고 서 있는다. 어느 부위 하나 불룩 나오거나 들어가지 않게 힘을 주어 반듯함을 유지한다.소 자세인 ‘비틸라아사나’와 고양이 자세인 ‘마리쟈아사나’, 테이블 자세 등 순서에 맞춰 자세를 취한다. 상체를 길게 늘어뜨려 근육에 자극을 주거나 느슨하게 푸는 이완을 반복하며 몸의 신경이 구석구석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정강이와 종아리 순으로 자극을 옮기고, 오른쪽 손바닥에만 무게를 집중하는 등 의도한 대로 힘을 분산시켜 내 몸에 크고 작은 부위가 자리하고 있음을 느껴본다. 신경이 세밀하게 자리하고 있음이 느껴질 때면 살아있다는 감각이 생생히 전해져서 만족스럽다.요가는 겉으로 매우 정적인 듯 보이면서도 굉장히 동적이다. ‘8개의 가지’란 뜻을 지닌 ‘아쉬탕가’는 60가지 이상의 시퀀스를 쉬지 않고 빠르게 이어서 동작한다. 아직 수련이 부족한 난 뻣뻣한 몸으로 겨우 몇 가지 동작만 해내고, 이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흠뻑 땀으로 젖어 기진맥진해버릴 정도다.주로 즐겨하는 ‘빈야사’는 산스크리트어로 연결하다란 뜻을 가졌다. 다양한 동작을 자유로운 흐름으로 이어가는데 개인적으로 아쉬탕가보다 조금 수월하게 느껴진다. 흐름에 맞추어 동작을 행하다 보면 꼭 안무를 추는 것 같기도 하다. 반복적이지만 리듬이 있고 이야기에 기승전결이 있듯 순서에 따라 동작에 깊이감이 존재한다.이외에도 정말 많은 요가 종류가 있지만, 유튜브 영상 속 선생님께선 수련을 할 땐 늘 새로운 경험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특히 매번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지루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데, 그럴 때 일수록 움직임 하나하나를 각기 다르게 바라보고 느끼도록 연습해야 한다고 하셨다.하나의 자세를 새롭게 바라보고 임하는 것. 사실 요즘 나의 근황은 썩 좋지 못했다. 비슷한 나날과 비슷한 감정으로 존재하는 동안 나 스스로를 방치하다시피 살아갔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절실히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힘을 응축시킨 채 웅크려 있었다. 그러던 와중 익숙한 것에서의 낯섦을 찾으며 매번 새로움을 경험하고 수련해야 한다는 영상 속 요가 선생님의 말씀에 얼마나 크게 안도했는지 모른다. 본격적으로 요가를 배우고 싶어 최근 집 근처에 위치한 학원에 등록했다. 총 16명이 모이는 오전반으로 아침부터 부지런히 사람들이 모여든다. 매트를 깔고 일정한 거리에서 각자의 수련을 진행하는 동안 학원 원장님은 옆 사람과 본인의 자세를 비교하면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하신다. 자세를 따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려운 동작 부분에선 무리하지 않고 가만히 숨을 고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하셨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신기하게도 매번 매트 위로 오를 때마다 같은 동작임에도 수월히 해낼 때가 있고, 유독 어느 날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날씨도 온도와 습도가 다르게 바뀌듯, 사람의 감정과 체력도 마찬가지라서 해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매번 다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중요한 건 꾸준함이다. 새롭게 바라보며 늘 겸손하게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단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요가를 통해 배웠다.수업을 가는 오전 열시와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 열한시 반은 같은 길을 걸을지라도 많은 부분이 다르게 보인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나 미세하게 다르게 변한 나무의 그림자, 바람의 세기까지 계속해서 변화하는 시공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움을 찾을 수 있도록 유연한 생각을 지녀보려 한다. 그것이 실패와 좌절뿐일지라도 말이다.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산행을 만끽할 수 있고, 높이 오르지 않아도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음을 알려준 요가 선생님의 말씀을 되짚어보면서 요가의 끝은 합장으로 마무리 한다. 합장 자세는 평온함이자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몸짓이라 한다. 손바닥을 맞대어 우뚝하고도 도저한 산을 흉내내며 오늘도 작게 말해본다. 나마스떼.

2022-06-14

세상의 모든 둘째에게

나는 삼 남매 중 둘째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들 역시 그렇다. 둘째끼리는 통하는 어떤 지점이 있는 것이 아닌지 쓸데없이 헤아려보곤 한다. 우리 모임은 ‘둘째들’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갖고 있는데 나는 이 명명이 썩 마음에 든다.우리 ‘둘째들’은 말이 얼마나 잘 통하는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밤을 새우기 일쑤다. 언니나 오빠에게 당했던 에피소드, 동생에게 화났던 일을 늘어놓으려면 2박 3일도 모자라다. 부모님, 조부모님 관련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끝도 없다. 우리는 둘째라는 것에 대한 묘한 억울함과 설움을 가지고 있다. “언니(혹은 오빠)의 말을 잘 들어야지”라는 말과 “동생에게 양보해야지”하는 말이 뒤섞여서 나는 늘 참아야만 하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고 그렇다면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식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 덕선은 이러한 둘째의 전형이다. 집안의 자랑이자 학창 시절 1등을 도맡아 하던 잘난 언니와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는 동생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인 덕선은 유쾌하고 발랄한 성격의 소유자면서 철없는 면모도 다분하지만 주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세심함을 갖추고 있다.덕선은 받는 것보다 양보하고 참는 것을 먼저 배웠다.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은 계란프라이보다 콩자반이 좋다고 말하고 치킨에서 가장 맛있는 부위인 닭다리를 언니와 동생에게 양보하면서도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인다.쌓여가던 서러움이 폭발하는 사건이 벌어진 어느 날, 덕선은 아이처럼 앙앙 운다. “왜 나만 계란 후라이 안 해줘? 나도 콩자반 싫어하거든? 나도 닭다리 먹을 줄 알거든. 언니는 보라고 동생은 노을인데 왜 나만 덕선이냐고!”덕선의 외침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둘째가 공유하는 지점일 것이다.언제였던가. 친구 중 한 명이 어릴 때 겪은 일화를 내어놓았다.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언니에게 양보했을 때, 할머니는 “아이고 참 착하다”라며 자신을 칭찬했지만 동생이 자신에게 뭔가를 양보하자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던 일. 그 단호한 어투가 여전히 귓가에 생생하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양보할 필요가 없다고 교육받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의문했더랬다.캐나다로 어학연수 가고 싶다는 남동생에게 부모님이 너희 누나들은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고 다독이자 그는 “어차피 작은 누나는 그런 것들 필요 없잖아!”라고 소리쳤고 결국 친구는 폭발하고 말았다. 야, 나도 인간이거든. 그저 항상 너한테 양보했을 뿐이었거든. 고성이 오가던 가운데 부모님은 친구의 어깨를 붙잡았다. “둘째야, 그래도 네가 누난데 참아야지.”이야기를 듣고 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히 ‘둘째들’다운 에피소드였다. 그래, 우리가 참아야지. 항상 그랬듯이.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야, 둘째라고 가오가 없냐. 쟁취해야 하는 것이 있음에도 욕심내지 않는 건 바보 같은 일이야. 그렇게 서로를 토닥이며 코끝이 찡해오던 밤, 우리는 다짐했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 희생하는 착한 아이로 사는 일은 이제 그만두자고.그래서였을까.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었다.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는 정중하게 대접받지 못한 상황에 자주 노출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깨달음이 오자 우리가 외치던 부당함이 단순한 투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첫째만큼의 든든함도, 막내만큼의 깜찍함도 없는 애매한 위치의 둘째들에게 고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가 서러움이 없겠느냐만, 둘째의 설움은 둘째만이 아는 법. 뭐 그런 사소한 것을 마음에 담아 두냐고 혀를 차지만 우리만큼은 서로의 마음을 다독여주자.나 역시 그랬다. 그렇지. 맞아. 서운하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둘째들’이 있었기에 그 시절을 무사히 보내올 수 있었다. 미세한 차이를 경험해본 자들. 이상하고 부당하다고 차마 말하기 어려웠던 상황들을 잘 알고 있기에 서로가 다정하고 애틋해지는 것이다.그리하여 만국의 둘째들이여, 행복하자. 지구의 실세가 언젠가는 둘째들로 거듭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그날까지 모두 평온하고 건강하도록.

2022-06-07

가장 느린 해방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소설이나 평론을 인용하시던 교수님께서 드라마의 대사를 인용하시다니. 나는 순간 얼어붙었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드라마 내용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교수님께서 하신 얘긴 대충 그런 거였다.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사람들보다, 망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정직할 수밖에 없다고. ‘나의 해방일지’에서도 그러지 않느냐고. 항상 소설이나 평론가의 말을 인용하시던 선생님께서 드라마의 제목까지 거론하시며 이야기를 하시다니. 나는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웃음을 터뜨려야 하나 꽤나 고민을 했더랬다.드라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최근에 재밌게 본 드라마라고 해도 ‘바이킹스’ 뿐이고, 남들 다 좋다던 ‘이태원 클라쓰’도 세 번을 도전했다가 중도 하차했다.드라마 특유의 느린 템포가 내 성미에는 맞질 않았던 거다. (‘바이킹스’를 끝까지 봤던 것도, 아마 한 화마다 한두 번씩은 잔인하고 자극적인 장면이 나와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교수님께서 드라마를 재밌게 보신다니, 말동무라도 해드리려면 나도 봐야할 것만 같았지만, 영화나 소설이나 평론이라면 모를까, 드라마라니. 교수님과 대화를 하기 위해 드라마까지 보는 건 좀 아니다 싶어 몇 주를 미루고 있었다.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선생님은 그 말을 했던 거였더라. 왜 잘 사는 사람들보다 망가진 사람들이 정직하다고 하셨던 거였더라. 웃자고 하셨던 건 아니었던 것 같고,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시던 와중에 하셨던 것 같은데. 아. 안되겠다. 한 번 그 대사 나오는 대목만 봐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드라마를 틀어놓았다. 도저히 그 긴 시간을 버틸 수가 없어서 빨래나 개고 바닥이나 닦으면서 볼 요량으로 말이다.사실 첫 화는 그냥 그랬다. 서울에 태어났으면 뭔가 달랐을 거라 말하는 정서를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거니와(나는 서울 토박이라 그 정서를 온전히 이해하긴 힘들었다. 죄송합니다.) 다들 자신이 힘들다고는 하는데, 그들의 삶의 적어도 ‘나’보다는 나아보여서 그렇게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헌데 2화쯤부터는 내 귀가 점점 드라마에 쏠려가더니, 3화 중반쯤부터는 개던 빨래를 손에 쥔 채 멍하니 열중하고 있었다. 세상에. 내가, 드라마에, 열중을 하다니. 그것도 나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말이다.나는 자신의 힘듦을 토로하는 서사에 좀처럼 공감하지 못한다. 그들의 힘듦 그 자체에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 힘듦이라는 것이 ‘나’의 힘듦보다 객관적으로 힘든 것인지 자꾸만 비교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그래도 쟤들은 나보다 이런 점에선 낫네, 그래도 쟤들은 집이라도 있네, 그래도 쟤들은 밥걱정은 없네 등등. 그런 푸념을 하며 이야기는 나에게서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그런데도 내가 ‘나의 해방일지’에 집중하게 되는 건, 그들이 경험하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트러블에 공감이 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 모든 인물들이 이 일상을 행복도 불행도 아닌 어딘가 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그렇지 않은가. 보통의 사람들에게 일생이란 그다지 불행한 것도, 그다지 행복한 것도 아니다. 크나큰 슬픔이 찾아오는 경우도 드물고 말도 못할 희열의 순간이 찾아오는 경우도 드물다.적당한 슬픔과 적당한 기쁨. 그마저도 적당한 기쁨은 자주 찾아오지도 않으면서 적당한 고달픔만 반복되기에, ‘나’의 삶은 괴롭고 힘들게만 느껴진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보란 듯이 잘 사는 사람들은 그런 정도의 괴로움을 적당히 숨기거나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어딘가 망가진 사람들은 작은 자극에도 그 적당히 반복된 고달픔을 우수수 쏟아내고야 만다. 어딘가 마땅한 방향성을 지니지 못한 채 쏟아지는 적당한 고달픔의 말들은 그래서 대단하지도, 거창하지도 못하다. 단지 진심어릴 뿐이고, 그래서 처연하고 사랑스러울 따름이다.‘나의 해방일지’라는 거창한 제목과 달리, 이 드라마는 그렇게 거대한 악과 싸우지도 않으며 거대한 성공을 거머쥐지도 않는다.단지 조용히, 자신을 옭아매오던 작은 고통들과 맞서는 법을 하나씩 배워볼 따름이다. 그래서 이 작은 해방의 과정은 결코 성공을 향해 있지 않다. 다만 조용히 자신의 발밑을 바라보며, 자신이 선 자리를 바라볼 뿐이다. 조금의 해방을 위해서. 잘해야 한다고, 성공해야 한다고. 누구에게도 지적받지 않아야 한다고. 누군가에게든 사랑받아야만 한다는, 누구나 갖고 있는 강박으로부터 아주 조금씩 천천히 말이다.

2022-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