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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우주영웅과 전장연 시위

김초엽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실린 단편 ‘나의 우주영웅에 관하여’는 매혹적인 작품이다.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48세의 미혼모 ‘재경’은 인류를 대표해 ‘우주 터널’을 통과할 우주인으로 선발된다. 우주 터널 저편에 있을 새로운 유토피아를 탐사하기 위해, 척박한 우주에서 생존하기 위해 18개월의 신체 개조를 견뎌낸 그녀는 사이보그 같은 초월적 몸을 갖게 된다. 마침내 우주 터널 프로젝트가 개막하는 날, 재경은 우주로 가는 대신 깊은 심해로 몸을 던져버린다. 엘리트주의가 한 개인에게 과도하게 짊어지운 성공 서사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주체적 선택을 통해 우주가 아닌 심해라는 제3의 세계,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닌 자기 개인을 위한 완벽한 자유를 개척한 것이리라.재경은 동양인, 여성, 미혼모, 48세, 왜소한 신체 등 온갖 소수자적 조건을 갖춘 약자이자 비정상인이다. 이러한 재경이 인류를 대표하는 우주인으로 선발된다는 설정은 엘리트주의가 강요하는 ‘정상성’ 개념을 비판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독자들은 우주가 아닌 바다로 뛰어든 재경의 선택을 두고 생각이 복잡해진다. 정상성이라는 왜곡된 신화를 해체하는, 획일화된 성공 서사를 무력화하는 소수자 여성의 주체성으로 읽으면 응원하게 되지만, 우주 터널 프로젝트에 동원된 사회 자본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생각하면 한없이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이 양가적 감정 사이에 김초엽은 우리에게 화두를 하나 던진다. 개인의 신념과 행복 추구가 사회라는 전체와 충돌할 때, 또 소수자의 목소리가 보편다수의 평화에 노이즈를 일으킬 때 우리는 과연 그들의 타자성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재경에게 지워진 세계의 과도한 기대와 부담, 그것을 저버린 그녀의 주체적 선택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정부와 진보 지식인들은 ‘남북 평화’, ‘세계 평화’라는 거대담론을 내세워 선수 개개인에게 남북 단일팀 구성이라는 부당한 희생을 강요했다. 젊은 세대에서 반발이 일자 “어차피 메달권도 아니다”, “올림픽 정신도 모르는 이기적 철부지” 따위 막말도 했다. 국가라는 전체주의의 낡은 망령이 개인에게 가한 이 폭력을 보면서 대부분 사람들은 선수들을 응원했지만, 일각에서는 “국민 세금으로 국가가 제공한 시설에서 운동한 선수들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시위를 두고 여론이 팽팽하다. “그만큼 절박하기에 저렇게까지 해서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게 아니냐”는 옹호 여론과 “아무리 절박해도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폭력이다”는 비난 여론이다. 나는 전장연의 시위가 벼랑 끝에서 살려달라고 간신히 내뱉는 신음 같아서 안타깝고 아프다. 그들의 행동이 다 옳은 건 아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하고 응원하는 입장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장애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야멸치게 느껴진다. 그런데 ‘당사자성’이라는 네 글자가 가슴 깊은 곳에 가 박히면 꽉 막힌 체증이 된다. 전장연 시위로 인해 중요한 취업 면접에 가지 못했다는 한 청년의 사연이 내 이야기였다면 나는 과연 지금처럼 고상하고 정의로운 척 그들을 옹호할 수 있을까?사회의 소수자, 약자들이 절박한 목소리를 낼 때, 그들의 권리 추구가 사회라는 전체, 보편다수의 ‘정상성’과 충돌할 때, 소수자들을 위해 다수가 자신들이 누리는 이익과 편리와 평화의 일부를 희생해야만 할 때, 그들로 인해 우리가 피해를 감수해야 할 때, 멀리서 쉽게 정의를 노래하다가 내가 피해의 직접 당사자가 될 때 우리는 과연 그들을 수용하고 보듬을 수 있을까?레비 스트로스가 지적한 대로 인류의 가장 큰 고민은 늘 ‘타자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김초엽 소설집의 또 다른 단편 ‘스펙트럼’에서 외계인 ‘루이’는 지구인 ‘희진’을 처음 본 순간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놀라움은 이질적 타자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고, 아름다움은 감성, ‘생물’이라는 단어는 합리적 이성을 지시한다. 소수자의 타자성 앞에서 우리는 감성과 이성의 균형을 지켜야 한다. 어려운 얘기다.

2022-05-03

쓰는 비건

실외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되면서 다시금 색조 화장품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상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상승해선지 지난 달 색조 화장품 중심 매출이 최대 40% 증가하였고 로드샵과 면세점, 백화점 아울러 전반적인 화장품 매출 증가가 급증하였다고 한다.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로 코로나19 사회적인 분위기 흐름이 조금 달라지면서 ‘비건’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나 최근 ‘비건 뷰티’가 핫한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는데, 비건 화장품은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고 동물성 원료를 대신하여 친환경 성분만을 사용하여 만드는 제품을 일컫는다. 비건 제품은 동물 실험으로 인해 얻어지는 성분과 원료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과거 무작위로 착취 해왔던 동물 실험 자체도 일절 이루어지지지 않는다.많은 이들이 비건 뷰티에 관심을 갖기 이전, 그간 가루 형태의 파우더나 반짝이는 펄은 전부 동물이나 생선의 비늘에서 원료를 얻었다. 속눈썹을 길고 짙게 보일 수 있도록 해주는 마스카라의 경우엔 인체에 무해한지 실험하기 위해 토끼를 대상으로 실험 하였으며 화장할 때 흔히 쓰이는 붓의 경우엔 다람쥣과의 청설모 털을 사용하는 등 동물성 털로 만들어졌다.문제는 원료를 생산해내는 과정이 굉장히 비윤리적이라는 점이었다. 털이나 재료를 얻기 위해 감금은 물론 학대와 폭력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젠 소비자의 인식이 분명히 변하고 있는 듯하다. 스킨이나 수분 크림 같은 기초 제품이 비건 위주로 쏟아지는 데다 최근에는 색조 제품 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비건 립밤은 물론 선크림, 파운데이션, 마스카라, 아이쉐도우, 하이라이터, 립스틱, 틴트까지 그간 동물성 원료가 필수적으로 들어갔던 색조 화장품은 비건 제품으로 대체되어 종류가 무궁무진 증가하였다.더 놀라웠던 건 일반 화장품과 비교했을 때 결코 제품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비건 인증기관에서의 까다로운 기준과 인증 과정을 거쳐야만 출시되는 데다 FSC 인증을 받은 포장재 사용, 화장품 공병 수거를 위한 캠페인 진행으로 지속 가능한 자원 순환과 나아가 환경 보호를 지향한다는 점도 놀라움을 자아냈다.비건 마크를 확인하는 방법으론 화장품 케이스 뒷면에 영국의 비건 소사이어티, 프랑스의 이브 비건, 한국비건인증원 비건 마크를 확인 하면 되어서 비교적 판별도 쉬워 구매하기에 용이하다.패션 업계 또한 비동물성 소재만을 사용하는 비건 패션이 중요 트렌드로 자리했다. 명품 브랜드 구찌의 최고경영자인 마르코 비자리는 더는 모피를 제작하거나 팔지 않겠다는 반모피 운동을 선언했고 줄줄이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베르사체 등 모피 사용을 중단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많은 패션 브랜드들 또한 그간 동물 학대와 착취를 통해 얻어지던 가죽과 모피를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대신할 소재를 찾아 나서고 있다. 특히나 겨울용 옷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메리노 울은 양의 엉덩이쪽 살을 비윤리적으로 잘라내어 무작위로 생산해내는데, 더 많은 양의 울을 얻기 위해 일부러 양의 엉덩이쪽 살을 쭈글쭈글하게 만들어 개량하기도 한다. 비건 패션은 이렇게 강제적으로 채취하는 울이나 모피를 대신하기 위해 인조 모피와 에코 퍼 소재를 대체하여 사용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또한 말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소재가 개발되고 있는데, 와인 찌꺼기로 만든 가죽이나 파인애플 잎으로 만든 천연 섬유 또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먹는 비건 뿐만 아닌 내가 쓰는 물품도 비건을 지향할 수 있단 사실이 알면 알수록 놀라웠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씻곤 했던 손세정제나 옷, 화장품, 붓 등 얼핏 보면 작고 사소한 물건이지만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동물들이 희생되었단 사실은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그러니 이제부턴 물건을 구매할 때 더욱이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사실 조금 더 시선을 확장해보면 별다른 수고로움 없이도 너무나 쉽게 비건 제품을 만나볼 수 있다.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것이 무언가에게 도움이 되는 옳은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 때엔 내 자신이 조금 더 맑고 선명해지는 기분이 든다. 먹는 비건이 어렵다면 쓰는 비건부터 차근차근 실행해보는 것이 비건을 시작하는 좋은 방법 같다.

2022-05-03

그 많던 꿀벌은 어디로 갔을까

영화감독 M.나이트 샤말란은 초현실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감독이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식스 센스’에서부터, ‘싸인’, ‘언브레이커블’ 3부작, ‘데블’, ‘비지트’, 최근의 ‘올드’에 이르기까지, 감독은 하나의 이상 현상을 전제한 후 이로 인해 벌어지는 일상의 뒤틀림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이상 현상을 영화의 주된 장치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샤말란 감독의 영화가 포착하는 세계란 이해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현실로 인해 느끼는 공포가 어떤 것인가를 극대화시킨 세계라 할 수 있다.그렇기에 샤말란 감독의 영화는 ‘코즈믹 호러’와 닮아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인간이 감히 대적하거나 지각할 수 없는 거대한 미지’로 인해 촉발되는 공포다. 오로라나 거대한 협곡, 인간의 인지를 아득히 뛰어넘는 크기의 현상을 마주할 때 느끼는 경이로움과 숭고함과 같은 부류의 공포감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영혼이나 악령 혹은 초능력자나 시간 가속과 같은 비일상적이며 불가해한 사건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샤말란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초현실적인 장치란 그러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전제라 할 수 있다.그런 샤말란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해프닝’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은 인간의 이유 없는 ‘자살’이다. 어느 날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와 같은 현상이 특정한 개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발생한다는 점이다. 산책을 하던 사람이, 책을 읽던 학생이, 일을 하던 인부가 갑작스레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인간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 이해하지 못한다.때문에 사람들은 그러한 현상을 해석하고자 여러 가지의 가설을 내놓기 시작하고, 독가스 테러일 것이라 가정한다. 때문에 영화에서 사람들은 이와 같은 가정에 초점을 맞춰 살아남기 위한 행로를 결정하지만, 그와 같은 가정과 가설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만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테러일 것이라는 예측에 그들은 한적한 교외로 향하지만,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의 사건이 벌어지며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버리고 만다.이유를 알 수 없는, 그러나 계속해서 벌어지는 ‘해프닝’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이유를 알 수도, 그렇기에 저항할 수도 없는 불명확한 대상 앞에서 인간은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한없이 무력한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가 으레 그렇듯, 이 영화 또한 우연의 우연이 중첩되며 가까스로 사태는 진정되지만 공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상 현상이 사실은 자연이 인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방어 기제로 인해 만들어진 독소로 인한 것이었으며, 때문에 언제든 사태는 반복될 수 있다는 암시가 남기 때문이다.물론 이와 같은 가정은 비과학적이며 극단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쉽사리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영화의 초반부에 제시되는 하나의 설정 때문이다. 그것은 꿀벌의 실종이다. 갑작스럽게 시체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꿀벌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사라지는 것인가. 이것은 단지 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기에 더욱 섬뜩할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도 꿀벌의 실종에 대해 여러 가설을 내놓고 있지만, 그 이유를 완전하게 해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와 같은 현실을 과연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꿀벌의 실종이 인간의 집단 자살 현상이라는 파국적인 결말의 전조로 설정되어 있었던 것을 떠올려보자면, 현실의 이와 같은 사건 또한 더 큰 비극과 파국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일지도 모른다. 지구 온난화를 비롯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초래될 비극의 전조 말이다.우리가 지구 온난화와 환경오염의 문제를 더 이상 쉽사리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으며 이를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은 눈앞에 벌어지는 자연 현상에 대해 전지전능하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사례들을 단지 ‘해프닝’으로 치부함으로써, 우리가 자연을 충분히 이해하고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견고한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의 무지와 환상의 대가는 언제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닥쳐올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샤말란 감독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뿐인 채로.

2022-04-26

사랑하는 일

설레는 순간을 경험해본 적 있을 것이다. 커피를 몇 잔이나 들이켠 것처럼 심장이 자꾸만 뛰고. 늦은 밤 침대에 누워도 잠은 쉽게 오지 않고. 양 발이 허공에 붕 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따금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사랑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다보면 흔히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말로 외로움과 고독을 떠올리기도 한다. 외로움과 고독은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집어 삼키는 괴물처럼 성큼성큼 다가온다.그것은 인식할수록 선명해지는 것이라서 무엇보다 인간이 혼자 있을 때 더욱 거세게 문을 두드린다. 우리는 이 괴물이 두려워서 타인을 찾아가기도 한다.누군가가 곁에 있어주면 외로움과 고독은 완전히 소멸된 것처럼 느껴지고 일종의 안심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괴물은 언제고 다시 찾아올 수 있으므로 불안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자신을 구원해줄 미지의 상대를 간절히 기다리기도 한다.불안과 고독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사랑을 찾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이 아닐까.혼자서 무시무시한 괴물을 물리치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분명 몇 번이고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먼저 보살피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쓸모없게 느껴지고 아름답지 않은 부분까지도 감싸 안을 수 있는 너른 포용력이 필요하다. 불완전한 존재인 자신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신뢰하게 되었을 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렴풋하게 느끼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타인을 사랑하는 일까지 나아가게 된다.불가해한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문자 그대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까다로운 일을 번번이 해내는 이상한 존재들이다.사랑에 빠진 사람은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겉으로 보기에만 예쁘고 반짝이는 모습이 아니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오히려 괴로운 일에 가깝다. 대상을 사랑하는 일은 영원할 수 없다. 언젠가는 상실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언제나 이별은 힘겹다. 사랑했기 때문에 더욱 괴롭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고 외치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한다. 설레고 기쁘고 즐거운 것을 넘어서서 아픔과 고통까지도 감내한다. 그러니 사랑은 슬픔까지도 기어이 껴안고야 마는 행위이며 이는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사랑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고자 하는 노력의 영역이다. 인간은 평생 오직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좋거나 싫다고 결정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랑은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한다. 혼자였다면 결코 맛보지 않았을 음식의 맛을 느끼게 되고, 묻지 않았던 질문에 관한 답을 찾게 되며, 그동안 자신이 아니라고 믿어왔던 것을 긍정하게 되는 일을 경험하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의문하게 되며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다.사랑하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자기에게 갇혀 있던 시야는 계속해서 넓어지게 된다. 상대의 어려움을 고민하고 인간을 넘어선 생명의 영역에 대해 생각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아스팔트 사이로 아무렇게나 피어난 들꽃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일상의 아주 작은 영역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은 자기 반경을 무한히 넓히는 일이며 끊임없는 성장을 하게끔 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세상의 모든 언어를 쥔다고 해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완전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온갖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놀라운 형식으로 발현될 때 우리는 어렴풋하게 그것이 사랑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뿐이다.‘자기 앞의 생’의 마지막 구절은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끝난다. 그렇다.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끊임없는 자기모순을 경험하면서도 종국에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일.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타인을 신뢰하게 되는 일.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일. 슬픔까지 기꺼이 껴안으면서도 이토록 복잡한 세계까지 이해하게 일. 일말의 가능성을 믿는 일.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끝끝내 해내야만 하고 자신도 모르게 이행하고 있는 신비한 사랑의 영역이다.

2022-04-26

누구에게나 편리해야 할

키오스크(터치 스크린 방식의 무인 단말기)를 이용할 땐 약간의 긴장을 하게 된다. 시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늘 화면 앞에서 눈을 부릅떠야하고, 글자는 작고 메뉴는 설명 없이 사진만 덩그러니 놓여 있기 때문에 고르는 데도 은근 어렵다. 무사히 메뉴를 다 정했다면 포인트 적립이나 카드 할인 혜택, 결제 방식 등의 단계를 맞닥뜨리게 된다.괜히 포인트 적립이나 카드 할인 혜택을 받겠다며 이것저것 잘못 누르다간 시간 초과로 처음 화면으로 돌아가게 되니, 웬만하면 복잡한 과정 거치지 않고 빠르게 결제를 향해 달려야 한다. 거북이의 속도로 키오스크 한 대를 내 것 마냥 점령했다간 뒤에서 빨리 좀 끝내라는 은근한 압박이 날아올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미션 임파서블의 한 장면처럼 신속하면서도 능숙하게 모든 과정을 끝내면 결제가 완료 되었단 영수증 하나를 받아볼 수 있다. 겨우 메뉴 하나 주문하는 게 이토록 복잡하고 어려울 필요 있는 건지, 손바닥 만한 작은 종이 쪼가리를 집어들며 괜스레 머쓱해진다.최근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서비스가 증가하면서 키오스크 보급률이 대폭 증가했다고 한다. 2021년 기준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6,574대의 키오스크가 신규 보급되었고 햄버거 프렌차이즈 버거킹의 경우 코로나 이후 키오스크 도입 비율을 95%나 늘렸다고 한다.이제는 음식점뿐만 아니라 영화관이나 카페 은행이나 병원 관공서 등 일상 곳곳에서 키오스크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에겐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지만, 이에 반해 65세 이상의 고령 소비자인 디지털 취약 계층은 무인기기 사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한국소비자원의 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 동안 키오스크를 경험한 65세 이상의 고령 소비자 245명을 대상으로 설문해보았더니 평균 난이도 75,5점으로 많은 고령층이 키오스크 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드러냈다. 병원과 외식업 대중교통과 문화시설 관공서 순으로 다양한 장소에서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고령 소비자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나 외래어, 조작방식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글 글자 크기조차 작은데다 외래어까지 섞여 있으니 충분히 어려울 만도 하다. 더군다나 각 키오스크마다 내장된 하드웨어가 다르고 메뉴를 택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 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대형 마트의 경우엔 옆의 직원이 상주하고 있다지만, 무인 카페나 편의점인 경우엔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데다 안내 음성도 없으니, 이러한 곳은 시각장애인이나 어린이 또한 출입조차 불가능할 정도다.편리함을 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키오스크지만 특정 계층에서 불편함을 겪고 있고 소외 현상이 느껴진다면 서둘러 운영 상황을 개선하고,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이에 각 기업은 디지털 소외계층이나 휠체어에 탑승한 고객도 쉽게 손이 닿을 수 있도록 화면을 아래쪽에 배치하는 등의 개발 노력을 하고 있다. 디지털 기기 이용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을 대상으로 기기 사용을 가르쳐주는 디지털 배움터 또한 각 17개 광역시·도 별로 상세히 운영하고 있다.다양한 스마트 기기를 상시 체험할 수 있고 키오스크 외에도 태블릿 PC나 AI 스피커 등의 사용법을 익힐 수 있고 디지털 강사의 강의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국회에서도 디지털 포용법 제정에 논의가 한창이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소외와 차별 없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단 취지다.디지털 취약 계층을 비롯하여, 어린이와 시각 장애인 등 사회에서 배제되는 일이 없도록 모두가 전보다 보다 편리하고 나은 삶을 택하여 누릴 수 있어야 한다.이 때문에 난 아직도 키오스크가 마냥 편하지 않다. 물론 아직까지 사람에게 직접 가서 주문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다.단골이라며 늘 덤을 챙겨 주는 카페 직원 언니와 주기적으로 근황을 나누어야 하고, 위염 때문에 자주 뵙는 간호사 선생님께 꾸준히 충고도 들어야 하니까.어쩐지 막연히 기계 앞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면, 키오스크에 더 느리게 적응해도 좋을 것 같다.

2022-04-19

쓸 수 있다

매일 밤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쓴다. 뭐가 걸려 올라올지 모르는 채 바다로 나가는 어부가 그럴까. 생계를 위한 하루의 노동을 마치면 정신의 노동이 시작된다. 그것은 생계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위협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를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해 쓰는지 모르면서 쓴다. 나는 시를 위해 시를 쓰는 것이다, 라고 혼잣말하면서도 시가 뭔지 모르겠다. 20년째 같은 혼잣말을 하고 있다.먼저 모드를 전환해야 한다. 일하던 몸, 먹고 사는 일 앞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던 몸, 인사하고 부탁하고 아부하고 싸우던 몸을 시 쓰는 몸으로 바꿔야 한다. 생각에서 감각으로, 이성에서 직관으로, 베타파에서 알파파로 모드를 바꾸기 위해 핸드 그라인더로 커피 원두를 간다. 촛불 냄새, 연필심 냄새, 나무 냄새, 새벽 이불 냄새, 비 내린 저녁 냄새 같은 커피향이 방 안에 진동한다. 호흡이 차분해진다.너무 작아져서 더는 사용하지 않는 비누, 그래서 녹을 수 없는 비누, 거의 소멸됐지만 소멸이 유예된 비누에 대해 쓰고자 한다. 생각이 도무지 나아가지 않는다. 비누를 들여다보고 냄새 맡아보고 손에 쥐어본다. 비누가 말을 걸어오길 기다린다. 비누는 말이 없고, 옆집 변기 물 내리는 소리, 고양이 비명, 담배 연기만 수런거린다. 이 짓을 하고 있다 보면 이상(李箱)이 떠오른다. 시 쓰기는 육체의 일인가 정신의 일인가, 노동인가 아니면 유희인가 생각하는 것이다.“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 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라던 이상의 고백은 가난이 예술가에게 질병과 굶주림이라는 절망을 가져다 줄 때 오히려 정신은 풍요롭다는 역설이다. ‘육체’의 세계인 자본주의 도시, 대중성과 결별하여 정신적 공간인 ‘방’ 안에 스스로 고립되는 순간 예술가는 마침내 ‘천재’를 회복해 “유쾌하다”고, 이상은 말한다. 하지만 나는 시 쓰는 게 유쾌하지 않다.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이후로 시는 언제나 고통이고 절망이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내가 이상보다 12년을 더 살았다. 김유정보다, 기형도보다 10년을 더 살았다. 나는 이미 그들처럼 될 수 없다.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무언가 쓰고 있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이고 싶지는 않다. 천재는 애초에 틀렸고, 박제가 되기 싫다. 잘 살고 싶다. 건강하게, 남들처럼, 돈 벌고, 결혼하고, 주말엔 외식하고, 저축하고, 4대 보험의 혜택 안에서 살고 싶다. 밤마다 세속적 욕망과 문학에 대한 열정이 격렬하게 싸운다. 삶과 문학 사이에서 길항하다보면 삶도 문학도 다 이룰 수 없다는 걸 두려워하면서도.20대에는 시가 돈이 되지 않아도 행복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오솔길의 임금이 된 것만 같았으니까. 서른 살이 되자 돈이 되지 않는 시를 계속 붙잡을 수 없었다. 멀리 달아났다. 그런데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시는 더 세게 나를 잡아당겼다. 돌아선 뒤통수에 쏟아지는 시의 따가운 눈총이 괴로워 취해버린 밤도 많았다. 돈 잘 벌고 ‘잘 나가도’ 시 한 편 쓰는 성취감에 비할 바 아니었다. 그래서 돌아왔다. 붙잡혀 끌려왔다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만.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30만원짜리 반지하 월세방에서 10년을 살았다. 많은 시와 평론, 논문을 썼다. 방 세 개 전셋집으로 이사했지만 시를 쓴다는 건 여전히 죄스럽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을 한다는 누명이 억울하기도 하다. 세상의 냉대와 외면, 왜곡과 오해에 떠밀려 마음의 거처는 여전히 반지하에 머무는 날이 많다. 그때마다 시로 무언가를 이뤄야겠다고 다짐한다. 뭘 이룰 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뭐라도 이루고 싶다.시 쓰면 굶어죽는 줄 알았는데 아직 살아 있고 건강하다. 등단을 했고, 시집도 냈다. 물론 등단이나 시집이 대단한 성취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느 해엔가는 밥벌이를 다 잃고선 글만 써서 즉석밥과 라면을 먹었다. 이런저런 원고료로 전기세, 가스비 내고 방값도 냈다. 이룰 수 없는 문학을 붙잡고서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해왔다. 시를 이루다보면 삶도 이뤄지는 기적을 믿을 수밖에 없다.이수명 시인은 내게 “시는 이뤘으나 이룰 수 없으므로 늘 이루지 못하게 한다”고 말했다. 시 쓰기는 언제나 무승부인 싸움, 또는 언제나 내가 지는 시합이다. 도대체 이걸 왜 붙잡고 있냐고,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질문에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면서, 흔들리면서, 여기저기 부딪치면서 어디론가 나아간다.비누를 들여다본다.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2022-04-19

생각보다 이 세계는 나쁘지 않아

그런 상상을 해본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내게 한 마디를 전할 수 있다면? 로또 당첨 번호를 외치는 것도 괜찮고 부동산 시장에 관해 귀띔하는 것도 좋겠다. 그러다 고개를 갸우뚱. 그게 정말 최선일까.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는 내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막막한 시간 속에서 힘이 될 수 있는 말. 무수한 조언들 사이에서 시간을 정면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하는 말. 그렇다면 역시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겠다.“생각보다 이 세계는 나쁘지 않아.”돌아보면 그랬다. 나는 현재에 안주하는 법이 없었고 보다 더 잘 살아가고 싶은 욕심으로 가득했다. 언젠간 져버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둔 채로 미래에 대한 기대는 자꾸자꾸 부풀어만 갔다. 십대에는 성인이 된 내 모습을 기대하며 수능특강을 풀었고 대학에 입학한 뒤엔 서른이 되면 경제적 자유를 누릴 것이라고 상상하며 캠퍼스를 거닐었다.서른이 되면 세상에 대한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지금의 힘든 일은 언젠가의 추억거리가 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열정이 넘치지만 불안은 가득한 이십대를 지나면서 미래에 대한 갈망을 더욱 커져만 갔다. 무엇이 되어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며 현실을 외면하기도 했었다. 여긴 완결된 페이지가 아니야. 더 멋진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렇게 믿으면서 삶의 어떤 부분을 미래의 나에게 미루었다. “내 꿈은 서른이 되는 것”이라며 떠들고 다니기도 했는데 친구들은 내게 너무 쉬운 꿈을 가졌다며 놀려댔었다. 그때의 내게 서른이란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의 상징에 가까웠다. 내게도 그날이 찾아온다는 건 일말의 위안이었다.물론 미래를 상상하는 건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했을 때, 몇몇 선배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왜 글을 쓰려고 해? 이거 쉬운 일 아니야.”나는 그런 이야기가 유난스럽다고 생각했고 나를 좌절시키려는 그들의 태도가 원망스러웠다. 소설가로서의 삶이 대부분이 평균적이라고 생각하는 삶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그들의 이야기가 어쩐지 섬뜩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건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모종의 두려움이었다.서른이 된 지금, 선배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제 나는 돈을 벌기 시작했고 진짜 어른의 세계에 들어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얻어낼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서른이 되면서 느끼는 이 흐릿한 패배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세상의 많은 부분이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내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누군가에겐 하찮은 일 중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자꾸자꾸 깨닫는 중이다.과거의 나를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거의 나와 비슷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후배들에게 그런 말들을 늘여놓는 것은 아닐까. ‘나 때는 말이야’라고 시작하는 조언에는 그 시간을 지나온 자의 쓰디쓴 경험이 담겨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그래서일까. 이따금 소설을 쓰겠다는 후배들을 만나면 언젠가 선배가 지었던 그 표정을 나도 모르게 따라하게 된다.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을 텐데, 하는 말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러다가 고개를 젓는다. 나는 이 선택을 후회하는가? 그렇지 않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생각보다 이 세계는 나쁘지 않아. 그런 이야기는 결국 그 시간을 지나온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이곳은 꿈과 희망이 가득한 모험의 세상도, 사랑과 낭만이 가득한 곳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명예 혹은 경제적인 부의 동의어가 아님을 알고 있다. 나 자신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지난한 시간을 기꺼이 견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제 다시 나는 다가올 미래를 기다린다.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게 무슨 말을 건넬까? 현재의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영역이다.가끔은 나 자신이 민들레 홀씨 같다는 기분이 든다. 목적지에 정확하게 안착하지 못하고 바람이 부는 대로 아무렇게나 부유하는 느낌이다. 무력하게 흘러갈지언정 끝끝내 어딘가에 내려앉겠지. 그리하여 꽃을 피우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나를 만든 과거의 나 자신이 기특하고 자랑스럽다. 할 수만 있다면 캄캄한 내일을 향해 고군분투하던 나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다.

2022-04-12

보호자의 두 가지 책임

오은영과 강형욱의 공통점은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잘못된 태도를 취하는 보호자를 향해서는 확실하게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이러한 행동이 아이나 반려동물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려준다. 그와 더불어 보호자가 대상에 대해 어떤 자세와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은지 명확하게 선을 그어준다.두 사람의 이와 같은 태도는 보호자에게 한 가지 사실을 일깨운다. 무조건적인 애정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나 반려동물의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해주고, 문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무책임한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물론 보호자는 대상을 어떤 위험이나 문제 상황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보호자는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줄 책임이 있다.아주 당연한 사실이지만, 우리는 자주 이와 같은 보호자의 두 가지 책임을 헷갈려하거나 잊어버리곤 한다. 예컨대,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에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아이나 반려동물을 지나치게 통제하기도 하고, 반대로 통제하고 훈육해야 할 때에 ‘그럴 수 있지’라고 넘겨버리거나 무조건적으로 옹호해주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비일관적인 보호자의 태도다. 동일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떨 때에는 대상을 나무라기도 하고, 어떨 때에는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기만 한다면, 이와 같은 보호자의 태도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조금은 우스운 이야기일수도 있겠지만, 오은영과 강형욱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보호자의 가장 큰 책임이란 일관성이 아닐까 싶다. 예컨대, 통제하고 계도해야 하는 상황과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상황을 구분하는 것 말이다. 누군가를 보호하고 기르는 것이 어려운 것은, 자신의 감정적인 혹은 공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일관성을 유지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피곤하더라도, 내가 힘들더라도, 내가 슬프고 괴롭더라도 ‘나’는 보호자로서 그와 같은 일관성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조금은 잘못된 접근일 수 있겠지만, 두 사람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지혜를 나는 다른 관계들에 적용해 보고픈 생각이 든다. 단지 부모와 아이의 관계나 반려 동물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일상적인 관계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예를 들면 연애라거나, 직장 동료라거나, 혹은 이웃과의 관계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한 관계들이 결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한 방법을 무조건적으로 적용하기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나라고 해도, 수평적인 관계에 있는 누군가가 나를 통제하려 하거나 일방적으로 훈육하려 한다고 느낀다면 그가 나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는다고 느낄 테니 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수평적인 관계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지혜가 있다면, 그건 역시나 ‘일관성’이 아닐까 싶다. 내가 다소 감정적인 상황이더라도, 혹은 피곤한 상황이더라도 상대방의 태도에 대해서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사람이 짊어져야만 하는 책임감이 아닐까? 이렇게 쓰고 보니, 관계라는 건 참 어렵고도 힘든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이 든다.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리는 사실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타자의 행동에 대해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어려운 까닭은 또 있다. 그건, 우리 또한 타자에 대한 ‘나’의 태도의 옳고 그름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은영과 강형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건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아주 확실한 정답을 제시해주곤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솔루션을 제시하면서 자주 강조하는 사항이 있다. 그건, 어떤 방법이나 방책도 사랑과 애정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아이를 키우는 것,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은 완벽한 존재를 창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을 지켜주기 위한 행동이다. 때문에 솔루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에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대상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건 사실 ‘정답’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에 필요한 마음가짐과 내면의 힘의 중요성이 아닐까 싶다. 어떤 관계도 한 번에 정답에 이를 수는 없다. 모든 관계는 오답들을 거치며 정답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깨달음처럼 들려와 마음이 아프다.

2022-04-12

우리 집 치킨이 맛있대요

배달 라이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정말 많은 음식점들을 가게 된다. 프랜차이즈 식당부터 작은 동네 가게까지, 한식, 중식, 양식, 일식, 도시락, 빵, 커피, 아이스크림 등등 메뉴도 다양하다. 워낙 인기가 많아 하루에도 몇 번씩 가게 되는 식당들도 있다. 그런 가게는 직원들도 많고, 항상 분주하다. 음식을 가지러 매장에 도착하면 아예 배달 주문 음식들만 따로 한 곳에 수북하게 쌓인 걸 보곤 한다. 배달 기사가 알아서 주문번호를 확인해 음식을 찾아 가야 한다. 주방이며 홀이며 카운터며 워낙 바빠서 뭘 어떻게 물어볼 틈도 없다.반면 ‘파리 날리는’ 가게들도 있다. 홀에 손님은 하나도 없고, 배달 주문 전화도 좀처럼 걸려오지 않는다. 대부분 프랜차이즈가 아닌 동네 골목 식당이거나 단골 장사를 오래 해온 가게들이다. 아주머니나 아저씨 한 분이 음식 만들고, 홀 서빙하고, 계산까지 혼자 다 한다. 이런 집들에 배달하러 가면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진다. 안 그래도 힘든 자영업인데, 코로나 시대에 얼마나 고달프실까. 장사가 잘 되길 진심으로 바라면서, 음식을 받아 나올 때 늘 하는 인사인 “감사합니다” 대신 “많이 파세요”라고 크게 외치곤 한다.요식업 중에도 치킨은 가장 치열한 전쟁터다. 수많은 프랜차이즈들과 동네 골목 상권이 경쟁을 벌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메뉴가 등장하고, 온갖 광고와 프로모션이 넘쳐난다. ‘치맥’이 배달 음식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치킨 공화국’이다. 우리나라 식품 관련 자영업의 20퍼센트가 치킨집이라고 한다. 하지만 폐업할 확률이 높다. 코로나19가 지배한 최근 몇 년 동안은 매년 6~7천 개의 치킨집이 창업하고, 1만 개 넘는 집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치킨 한 마리에 2만원 시대라지만 재료비와 서비스비(배달 앱 수수료와 배달 운임)를 제외하면 매장에서 가져가는 마진은 10퍼센트, 약 2천원 정도다. 하루에 닭을 100마리 튀겨야 20만원 버는 셈이다.평촌의 오래된 아파트 상가 건물에 작은 치킨집이 하나 있다. ○○치킨. 웬만한 치킨집은 다 한번쯤 들어봤는데, ○○치킨은 정말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가을볕이 따사로운 토요일 오후, ○○치킨을 찾아 미로 같은 아파트 상가를 좀 헤맸다. 낡은 상가 건물 지하 1층 한 구석에 자그맣게 자리 잡고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끼익 끽 소리를 내는 녹슨 철문을 열고 “배달이요” 외치자 연세 지긋한 노부부께서 “거의 다 됐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하신다. ‘배민’이냐 ‘쿠팡’이냐 묻지 않으신다. 배달 주문 들어온 게 딱 한 건인 모양이다.테이블 몇 개 없는 매장 안은 한산하기 그지없다. 겹쳐놓은 치킨 박스 더미 옆에 작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미스터 트롯’ 뽕짝 소리가 기름 끓는 소리와 어우러져 정겹다. 빈 테이블 위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마요네즈’, ‘튀김가루’, ‘엿기름’ 등을 적어 놓은 메모지가 널브러져 있다. 아주머니가 치킨을 튀기면 아저씨가 그걸 양푼에 담아 양념 넣고 버무린다. 맛있는 소리와 냄새가 토요일 오후를 채색한다. “아이고, 세 마리나 한꺼번에 주문이 들어와서 좀 걸렸어요. 미안해요” 아주머니는 포장 박스가 닫히지도 않을 만큼 치킨을 가득 담더니 양배추 샐러드까지 용기에 꽉꽉 채워 넣으신다. 잔뜩 무거워진 비닐봉지 세 개를 건네받고는 왠지 떠나기 싫다는 생각이 든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날 늦은 저녁, 한 건만 더 하고 퇴근하려는데 마침 배달 콜이 울린다. 어라? 아까 낮에 갔던 ○○치킨이네? 반가운 마음에 금방 달려갔다. 이번에는 헤매지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아저씨가 “빨리 오셨네. 다 됐어요” 하신다. “저 아까 낮에도 왔다 갔는데, 오늘 두 번이나 오네요” 말씀드리니 이번엔 아주머니가 주방에서 고개를 쓱 내밀면서 “그래요? 아 맞다. 아까 낮에 세 마리, 맞아 맞아” 하신다.“얼마나 맛있으면 저한테 두 번이나 콜이 들어 왔겠어요. 퇴근하고 집에 가서 먹게 양념 반 후라이드 반 하나만 포장해주세요. 이거만 배달하고서 찾으러 올게요” 낮부터 내 침샘을 자극한 소리와 냄새가 치킨집 안에 다시 가득 퍼지기 시작한다. 치킨을 건네받고 “다녀올게요” 하는 나를 보며 아주머니 아저씨가 해사하게 웃는다. “우리 집 치킨이 그렇게 맛있대요. 먹어 본 사람들이 다 맛있다고 그래.”

2022-04-05

사소하고 수월한 행복

걷기 좋은 봄이다. 서늘한 밤 목련 주우며 거니는 산책로도 좋고, 얇은 경량 패딩 하나 입고 가벼운 걸음으로 걷는 것도 즐겁다. 겨울 길거리에서 만나는 녹차호떡이나 크림 붕어빵을 파는 트럭은 보기 어려워져서 아쉽지만, 그럼에도 주머니 안쪽에 3천 원씩 품고 다녀야 하는 이유가 하나 있다.퇴사를 한 뒤 시간 여유가 많아지면서 그간 못 갔던 병원도 다니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만났지만 어쩐지 금방 시들해졌다. 여유 시간엔 새로운 취미생활을 갖기 위해 양말에 꽃 자수 놓는 법도 배워보고, 펀칭니들이나 썬캐쳐 만들기 등 손으로 집중할 수 있는 취미에 몰두해 보려 했지만 이 또한 쉽게 질리고 말았다.그러다 우연히 집 근처 마트 안에 있는 토이 샵에서 뽑기 기계를 발견했다. 기계 앞에 내 또래로 보이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지 순간 장난감 샵에 들어온 게 맞는지 다시금 확인 했다. 대부분 팔에 플라스틱 바구니를 끼고선 한창 뽑기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인기 캐릭터를 뽑을 수 있는 기계 앞에선 줄이 길게 늘어서 있을 정도로 진귀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직원분께 여쭈어보니 인기 캐릭터인 경우엔 매장에 입고된 지 4시간 만에 뽑기 상품이 동날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했다.호기심에 친구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뽑기에 시도해보았다. 동전을 차곡차곡 넣어 레버를 돌릴 때 묵직하면서도 경쾌하게 돌아가는 움직임이 어찌나 짜릿하던지! 동그랗고 매끄러운 플라스틱 케이스가 배출구로 떨어지는 소리도 유쾌한데다 형형색색의 캡슐을 쥐고 있으니, 어린 시절 문방구 앞에서 납작이 수그려 뽑곤 했던 해맑은 열정이 단숨에 기억나고 말았다.레고나 인형, 스티커나 다이어리 등 키덜트족들의 취향을 겨냥한 제품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다. 어른(adult)이지만 아이(kid)시절 좋아하던 감성과 취향을 추구하고 즐기는 키덜트 족은 이미 식음료, 뷰티, 패션 업계 아울러 놀라울 만큼 커다란 시장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한국 콘텐츠진흥원의 자료를 참고해보자면 국내 키덜트 시장 규모는 지난 2014년 5000억원대에서 지난해 1조6000억원까지 성장했고 추후 최대 약 11조원까지 성장할 것이라 예측했다. 특히 뷰티나 패션 쪽에서도 큰 확장세를 보이고 있는데 뷰티 브랜드 이니스프리는 찰스 M. 슐츠의 만화 피너츠(스누피) 캐릭터와 협업하여 한정 에디션을 출시했고 의류 브랜드인 빈폴 또한 스누피 캐릭터와 콜라보한 제품을 내놓았다. 이탈리아 대표 명품 브랜드인 구찌는 2020년 쥐띠 해를 맞이하여 미키마우스X구찌 컬렉션을 선보였었으며 출시 후 완판될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또한 밀레니얼 세대의 어린 시절 즐겨 먹던 먹거리를 다시금 재현한 포켓몬 빵 시리즈, 초등학교 문방구에서 팔던 간식 세트 등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 먹거리들이 뉴트로 트랜드 흐름에 발맞추어 반가운 모습으로 재등장 하고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어린 시절 소풍 필수품이었던 뿌요 소다 또한 24년 만에 재출시 되었는데, 집 근처 편의점에서 나의 첫 탄산 음료였던 뿌요소다를 발견하자마자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언제 찍혔는지도 모를 만큼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사진 한 장을 우연히 발견한 느낌이었달까.물론 강렬한 추억 여행을 하게 해준 건 뽑기였다. 뽑기 기계가 있는 마트 주위만 가도 기분이 절로 상기되는데다, 어느새 뽑기를 하러 가기 위해 산책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뽑기에 한참 빠져들 때쯤 느낀점이 하나 있다. 원하는 걸 뽑기 위해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 너무나 당연하지만 막연히 심취해 있다 보면 갖고 싶은 제품을 뽑기 위해 잔뜩 욕심이 올라 무작정 돈을 밀어 넣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 필요 없는 제품만 실컷 뽑다가 덩그러니 남은 씁쓸한 욕심을 마주했을 때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이렇게 자제력을 잃고 낭비를 저지른 날엔 바다 깊숙이 머무르고 있는 해녀를 생각한다. 딱 자신의 숨만큼만 있다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해녀처럼 내게 딱 주어진 몫만을 고려하여 행동할 것. 열정과 중독은 비슷한 듯 싶으면서도 분명한 한 끗 차이를 지니고 있다. 뽑기로 다시금 지혜로움을 배운다.

2022-04-05

무사고라구요?

군대에서 보았을 평범한 풍경 하나. 대대급 단위의 건물 입구에는 어김없이 붙어있는 ‘무사고 XX일 달성’이라는 현판. 자신들의 주 업무가 수십, 수백일 째 무사히 수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그 현판은 해당 대대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업무 수행 능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그 현판은 매번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여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어. 그러니 너도 문제를 일으키지 마.”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자. 복무가 익숙해짐에 따라 알게 모르게 옆 소대나 타 대대의 사정 따위를 전해 듣곤 하였다. 군대라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건 사고들이 하루를 멀다하고 발생하고 있었다. 노후된 장비나 민간인과의 마찰 등 여러 종류의 문제들이 있곤 했지만, 대개의 경우는 병사나 장교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물리적 폭력에서부터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많은 사건들. 그 속에는 경미한 사례들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한 사람의 인격이 말살되었다고 느낄 정도로 심각한 사례들도 들려오곤 하였다.하지만 그 수많은 사건들이 모두 공론화가 되고, 무사원만하게 해결되진 않았다. 대개의 경우는 공론화도 되지 못했으며, 간혹 피해자의 전출로, 그보다 더 간혹 가벼운 수준의 징계로 끝이 났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가는 군대의 풍경 속에서, 나는 그제서야 ‘무사고’ 현판이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되었다. 그건,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일차원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무사고 ‘XX일’이라는 말은 그 긴 기간 동안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부대의 능력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 긴 기간 동안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제대로 문제화되거나 해결된 사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잔인한 사실에 대한 과시다. 비단 군대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조직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문제를 감추기 위해 피해자를 향해 합의와 화해를 종용한다. 충분한 제도가 없기에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제도를 갖추고서도 그에 맞춰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이의 문제로 환원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그와 같은 사례들에서 우리는 자주 ‘가장’이라는 단어를 마주한다. ‘그래도 OO가 가장이잖아. 걔가 이 일로 직업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어? 니가 한 가족 다 굶어 죽이는 거야. 그래놓고 감당할 수 있겠어?’ 단어나 표현에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아마 많은 사람들이 들어봤을 그 말들. 명백한 2차 가해임에도 그게 옳은 거라고 믿고 행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그들을 향해 묻고 싶다. 그럴 거면 왜 그런 문제를 일으켰느냐고. 책임감과 책임에 대한 공감이 왜 사고가 터진 후에야 작동하는 것이냐고.인터넷에서 ‘무사고’를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 가운데 ‘무사고 6000일’ 달성을 기념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있다. 그 사진의 아래에는 빨간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사고 나도 무사고’. 아마 많은 군필자들이 군대에서 하인리히의 법칙을 들어보았을 텐데, 나는 그렇게 사고가 아니게 된 사고들과 문제가 아니게 된 문제들이 하인리히의 법칙이 말하는 사소한 징후와 작은 사고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군복무를 하면서 무수히 들었던, ‘작은 사고나 경미한 징후들도 빠짐없이 보고하라’는 그 말이, 정작 자신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던 무수히 많은 ‘가장’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직장을 떠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수많은 사건사고의 피해자들은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그 ‘가장’ 속에는 나 또한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성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인지적 감수성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와 같은 인지적 감수성이 없을 때, 우리는 그 ‘가장’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그건 그렇게 문제될 일이 아니다’라고 손쉽게 판단해버린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위치에서. 적어도 군대라는 조직 내에서, 나는 그 ‘가장’의 편이었지 피해자의 편에 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군생활이 꼬이는 게 싫다는 이유로 말이다.군을 비롯한 많은 문제들과 부조리에 있어, 우리는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눈을 감거나 혹은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도 우리는 이미 문제들에 연루되어 있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 또한 사태를 방조한 가해자의 위치에 서있는 것이다. 당신과 나 또한 하인리히의 329번의 무수한 징조로부터 눈을 돌린, 비겁한 가해자였을 따름이다. 우리가 무죄일 수 있는 방법은 옳은 일을 행하는 것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몰랐던 일이라며 무고함을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지와 무능의 죄를 인정하는 일일 뿐이다. 공군 중사 이예람 님의 명복을 빈다.

2022-03-29

엄마를 이해하는 방법

김혜진의 소설 ‘딸에 대하여’는 딸을 가진 엄마의 입장에서 쓰인 소설이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주인공은 그 무엇보다 자신의 딸이 어렵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을 골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딸을 이렇게 표현한다. “딸은 내 삶 속에서 생겨났다. 내 삶 속에서 태어나서 한동안은 조건 없는 호의와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존재. 그러나 이제는 나와 아무 상관없다는 듯 굴고 있다. 저 혼자 태어나서 저 스스로 자라고 어른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주인공의 딸은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한다. 레즈비언이고 사회적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인물이다. 그녀는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의 애인과 함께 주인공의 집으로 들어온다. 주인공은 딸과 애인을 보며 생각한다. “이 애들은 세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말 책에나 나올 법한 근사하고 멋진 어떤 거라고 믿는 걸까. 몇 사람이 힘을 합치면 번쩍 들어 뒤집을 수 있는 어떤 거라고 여기는 걸까.” 자신의 배로 낳았지만 완전히 낯선 사람인 것처럼만 느껴지는 딸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끊임없이 싸우고 견뎌야 하는 일상”을 지나보내야만 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이 저릿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감정의 어느 지점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통상적으로 묘사되는 부모와 자식 간의 모습이 아님에도 우리는 이들의 상황과 태도에 공감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의 방식으로 그려졌던 어머니가 아니며 딸은 부모에게 연민을 내보이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충돌하는 영역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를 통하여 자신의 시선으로서는 가닿기 힘든 영역을 마주치게 되는 것을 그린다.돌아보면 나와 엄마의 사이도 그랬다. 우리에게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기가 있었다. 특히 내가 사춘기를 지나오면서 우리의 불화는 절정에 달했다. 엄마는 항상 내 행동에 제약을 거는 존재였으며 마치 일부러 나를 괴롭히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는 자주 언성을 높이고 싸우곤 했었는데 그 내용은 다시 생각해도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엄마는 내게 ‘왜 하교를 했는데도 교복을 있느냐’는 잔소리를 했고 그러면 나는 ‘내가 무슨 옷을 입고 다니든 엄마가 무슨 상관이냐’고 응수하곤 했다. 혹은 엄마는 내게 ‘양말을 뒤집어서 벗어놓지 말라’고 했고 나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꼬투리를 잡는다’고 반박했다. 엄마는 내게 기본적인 생활 태도를 가르치려 했던 것이고 나는 엄마가 나를 통제하려 든다고 생각했었다. 우리의 대화는 본질로 향하지 못하고 언저리만을 뱅뱅 돌았다. 서로의 생각을 정확하게 바라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로 불만을 토로했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했다.특히 내 쪽이 그랬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엄마는 계속해서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엄마에게도 자신만의 신념이 있고 기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엄마이기 때문에 당연히 나를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는지 깨닫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엄마와 딸의 관계를 넘어서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엄마는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한 명의 인간이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였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소설을 쓰다보면 타인에 대한 이해는 필연적으로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소설을 쓰는 입장으로서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헤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선은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으로까지 향하게 되는데 그건 무척이나 고단하면서도 유의미한 일이다. 나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이상한 선택을 하게 되는 인물을 내 손으로 그리면서도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했었다. 그러나 끝끝내 그러한 인물마저도 끌어안게 되고 어쩔 수 없음의 영역을 경험하게 된다.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들이며 무차별적으로 다가오는 삶의 폭풍 속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헤쳐 나가는 중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이해의 방식에는 나와 엄마도 대입할 수 있다. 엄마와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존재다. 우리는 한 집에서 살았지만 각자 다른 생각을 했다. 매일매일 다른 체험을 하고 상반된 감정을 겪었다. 이토록 이상하고 특별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지만 몇 번이나 실패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엄마와 나의 세계는 조금씩 확장될 것이다. 어렵지만 기대되는 일이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2022-03-29

선거운동 유감

온갖 네거티브와 마타도어가 판친 ‘비호감 대선’이라선지 선거 운동 방식도 ‘극혐’(극도로 혐오한다는 뜻)이었다.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구닥다리 ‘선거차 유세’ 좀 그만 보고 싶다. 이번 대선 기간에도 경찰서에는 연일 시민들의 민원이 쏟아졌는데, 가장 많은 게 소음 관련 신고였다.선거 이틀 전인 3월 7일, 시끄러운 앰프 소리에 잠에서 깼다. 선거 유세 차량에서 크게 틀어놓은 로고송 때문이었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1번도 2번도 모두 국민을 위한 정치, 민생을 살피는 정치를 하겠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아침 일곱시부터 저질 로고송 틀고 소음공해나 만드는 게 과연 국민을 위한 일인지 묻고 싶었다. 국민들의 보편적인 삶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정치는 무슨 정치.아직 더 자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밤에 일하고 아침에 자는 3교대 근로자들도 있고, 고시 준비하는 수험생들도 있고, 아이 재워야 하는 부모들도 있고, 명상이나 독서로 차분하게 하루를 시작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타인 삶의 평화를 함부로 침해하는 이들이 어떻게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시민들이 왜 이른 아침부터 저급하게 개사한 ‘남행열차’, ‘진또배기’, ‘질풍가도’ 따위 유세송을 들어야 하는가? 옆동네에서는 ‘찐이야’, ‘찰랑찰랑’이 울려 퍼졌을 테니, 품위 없는 선거 유세는 여당이나 야당이나 마찬가지다. 앰프를 얼마나 크게 틀었는지 온 동네가 쿵쿵거렸다. 부아가 치밀어 112에 전화 거니 1390 선관위로 연결해줬고, 선관위는 다시 내가 사는 지역구 선관위로 통화를 돌렸다. 세 차례나 민원을 넣어 항의한 덕분인지 아니면 다른 데 가서 또 그 난리를 치려는지 시끄러운 유세차량은 30분 후 물러났다.소음뿐만이 아니다. 도로 통행을 막아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일도 허다하다. 빨간 점퍼, 파란 점퍼, 노란 점퍼 입은 당원들이 떼로 모여 마치 자기들 세상인양 차도와 보행로를 점거한다. 그야말로 무법천지다. 군산에서는 국민의힘 유세 차량이 시장 골목 입구에 버티고 선 채 차량 통행을 20여분 동안 가로막아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현장에서는 고함과 욕설 항의가 빗발쳤다.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택시 타고 김포공항 리무진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동안 민주당 유세 차량이 고가도로 옆 편도 1차선을 점령한 채 비켜주지 않는 바람에 결국 버스 놓쳤다. 추운 날씨에 밖에서 40분 넘게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분노가 뻗쳤다.이 볼썽사납고 시끄럽고 혐오스러운 선거 유세 방식을 바꿀 생각은 없는지, 정치인들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낡은 방식을 고수한다면 유권자들로부터 외면 받을 것이다. 곧 있을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난 서울시장 보궐 선거와 이번 대선에서 캐스팅보트를 쥐었던 2030세대 표심을 잡으려는 각 정당들의 노력이 가상하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는 자신의 권리나 이익이 침해되는 걸 견딜 수 없어 한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걸 극도로 경계하면서 자신 역시 남으로부터 작은 피해도 입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기성세대는 집단을 과시하고 공동체의 동일성 논리로 ‘우리’의 승리를 위해 소음공해나 교통 불편쯤 괜찮다고 뭉개지만, 젊은 세대는 철저히 개인이다. 집단이라는 다수의 폭력이 소수적 삶의 평화를 위협하는 걸 참지 못한다. 개인주의자들인 2030세대는 공정과 평등에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고, 사회적 약자 등 타자에 대한 배려를 항상 의식한다. 웬만해서는 지하철 임산부석과 노약자석에 앉지 않는다. 위법한 호의나 원칙을 무시한 배려는 거절한다. 공공질서를 지키고, 법을 준수하는 한 사람의 성숙한 시민들이 모여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고 믿는 이들이다.시끄러운 로고송 틀고, 마구잡이로 길 막으며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정당들이여 제발 정신 차려라. 이제는 음주운전이나 성범죄에 관대했던 쌍팔년도가 아니다. 여전히 구시대적 감성으로 법과 질서 따위 가볍게 무시해도 되는 줄 아나본데, 그러다 국민들한테 혼난다. 타인 삶을 함부로 침해하는 행위에 2030세대가 얼마나 엄격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음주운전 사고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옛날 같으면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그릇된 온정주의가 설쳤겠지만, 요즘은 “예비 살인자, 다른 사람 죽이지 말고 깔끔하게 혼자 죽으라”고 한다. 싸구려 로고송 틀려면 실내 체육관 빌려서 당신들끼리만 들어라. 넉 달 후면 지방선거다. 지켜보겠다.

2022-03-22

포켓몬이 돌아왔다

요즘 없어서 못 구한다는 문제의 포켓몬 빵. 친구가 포켓몬 빵 사겠다며 새벽같이 일어나 편의점 순회를 돈다고 이야기 했을 때, 나는 그 옆에서 대놓고 피식 비웃었더랬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들른 편의점에서 우연히 포켓몬 빵을 발견한 뒤론 문제의 빵 구하는 재미에 푹 빠지고 말았다.운은 처음이 다였는지 그 다음날에도, 심지어는 보름이 넘어가는 데도 포켓몬 빵 구하기는커녕 그림자 보기도 힘들어졌다. 점점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자 어느덧 포켓몬 빵을 구하기 위해 옆 동네와 옆옆 동네 편의점까지 원정을 나서는 열정을 보이고 있었다.포켓몬 빵은 2000년대 초 캐릭터 라이선스 계약이 종료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올해 4월 22일 돌연 모습을 드러내었다. 총 7종으로 구성되어 16년 만에 고스란히 돌아온 포켓몬은 출시 2주 만에 약 350만개 판매량을 돌파했고, 편의점 빵 매출 1위 자리를 단숨에 꿰찼다. 3월 19일 기준 SNS상에선 #포켓몬빵 해시태그로 등록된 게시글만 해도 4만3천 개나 된다.2030세대에서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는 덕에 물량 구하기도 쉽지 않다. 수요에 비해 공급량이 따라가지 못하는 사태까지 발생해서 현재 편의점 당 하루 1~2개의 빵만 입고되고 있을 정도다.워낙 희귀하다 보니 천오백 원짜리 포켓몬 빵에 이만 원 가량이나 하는 초콜릿이나 사탕을 끼워 파는 상술도 생겨났다. 편의점보다 마트 물량이 더 많다고는 하지만 1인당 포켓몬 빵 구매 개수가 5개로 제한이 걸려 있는데다 마트 오픈과 동시에 매진되다 보니 이마저도 쉽지 않다.포켓몬 빵의 인기 비결은 바로 빵과 함께 들어있는 ‘띠부띠부 씰’이다. 떼었다 붙였다 하기 쉬운 스티커로 총 159개의 포켓몬 캐릭터로 구성되어 있다. 귀여운 스티커를 보며 잠시 소소한 기쁨을 맛보기도 하고 어릴 적 포켓몬 빵 하나 사며 행복해했던 추억으로 복기하는 재미도 있다. 더군다나 이렇게까지 포켓몬 빵을 사는 이유는 아무나 살 수 없단 희소성과 SNS나 친구들 사이에서 상황을 공유하여 놀이처럼 즐길 수 있는 것 또한 한 몫 하는 듯하다.159개의 띠부 씰을 전부 모으는 컬렉터들도 많다. 띠부 씰이 무작위 랜덤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빵을 구한다 한들 스티커가 중복되는 경우가 생긴다. 컬렉션을 다 모으기 위해선 기약 없는 빵 사기를 계속 해야 하고, 한계가 있다 보니 오히려 컬렉터들의 소유하고 싶은 심리를 자극하는가 보다.현재 인터넷 중고 장터에서 띠부씰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희소성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가장 인기 많은 ‘뮤’와 ‘뮤츠’ 캐릭터 스티커는 개당 최대 5만원선으로 거래되고 있을 정도다.여러 군데 전전해본 결과 포켓몬 빵을 사기 위해선 몇 가지 간단한 전략이 필요하다. 우선 집근처 포켓몬 빵을 파는 편의점을 확인해야 한다. 안파는 편의점을 제외하고선 동선을 체계적으로 짜야 하기 때문이다.또 중요한 점은 각 편의점마다 물건이 입고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제품이 들어가는 시간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고객 유입량이 적은 한적한 편의점을 노리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상황이 녹록치 못해 사람 많은 편의점 위주로 돌아야 한다면, 편의점 앱을 이용하여 해당 편의점 재고 파악을 한 뒤 가면 좋다. 물론 편의점으로 가는 사이 팔릴 수 있단 위험 리스크가 있다.기다림을 즐길 수 있다면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해 대량 구매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인터넷 쇼핑몰도 매진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기나긴 완불 대기를 감내해야 한단 단점이 있다.진심인 듯 보이지만 내게 포켓몬 빵 사기는 일종의 가벼운 취미다. 산책도 할 겸, 같이 걷는 친구와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눌 겸 이곳저곳을 열심히 걷고 있다. 다행히 날도 좋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우연히 마주친 포켓몬 빵 하나엔 어찌나 기쁜지 모른다.너무 조급하게 하루하루 생활하다 보니 가끔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 행운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듯싶다. 행운은 생각보다 가까이 머물러 있고, 만약 보이지 않는다면 이렇게 뚜벅뚜벅 두 다리에 힘주고 찾아 나서면 되는 거니 말이다. 오늘도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이곳저곳 소소한 운을 맞이하러 나가본다.

2022-03-22

말하지 않음과 말할 수 없음

언어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언스플래쉬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하다 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가 있다.수업종이 울리면 마흔 명의 학생이 기다리는 교실로 향한다. 말간 얼굴의 학생들이 반듯한 자세로 앉아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면서 준비한 강의록을 꺼내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은 집중력을 잃는다. 노트에 낙서를 끼적이거나 하품을 흘리고 책상에 엎어져서 자는 경우까지 속출한다. 이윽고 교실에서 떠드는 사람은 나 하나가 된다.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겪으며 자란 나는 이 친구들이 질 높은 수업을 경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토론 주제를 꺼내놓으면 그에 관해 논의하고 생각을 모아서 놀라운 결론으로 도출해내는 방식을 꿈꿨다. 서로가 서로의 선생이 되어주는 것.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내어놓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학생이었던 내가 꿈꿔오던 수업이었으며 이상적인 교육 활동의 모습이었다.그러나 현실은 가혹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던 학생들은 계속해서 묵묵부답이다. 우리가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각자의 발화를 강제하지 않으면 입을 꾹 다문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다. 나는 과거에 그렇게도 싫어했던 선생님들의 표정을 지으면서 교탁을 탕탕 내리쳤다.“너희는 왜 말을 안 하는 거야?”또 다시 침묵. 잠시 뒤 한 학생이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말할 수 없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란 말인가. 그 의아함을 학생은 단 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해결했다.“몰라서요.”문학은 수학 공식처럼 정확한 답을 내어놓을 수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자신 안에 있는 언어가 미진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럴듯한 대답 대신에 모자람을 내어놓을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두려움에 가까운 마음일 것이다. 학생들은 자신이 말할 수 없다고 여기면서 말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다.나라고 무엇이 다를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의식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선택하지 않는 것을 택한다. 무언가를 발화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보다 기성의 문법을 따른다. 나 자신이 세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맞는가하는 의구심이 입을 막는다. 경솔한 언행으로 스스로의 얕음을 들켰던 경험이 있다. 여기저기 흘린 말과 글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는 내가 감히 세상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에 관해서 쉽게 믿을 수가 없다.침묵을 지키는 사람은 신중하다. 그러나 침묵을 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자는 비겁하다. 나는 신중함보다 비겁함의 위치에서 용기를 내지 못했던 적이 더 많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불편한 상황들을 피했고 안온한 상태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의 침묵은 분명한 혐의를 가진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날카로운 화살처럼 가닿았을지도 모른다. 소통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파괴했을 수 있다.입을 다물어버리는 것과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두 지점을 제대로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현명함이다. 말과 침묵의 간극에서 헤매지 않으며 적확한 언어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누구도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 그러한 불가능성을 바라는 작가들은 지치지도 않고 새로운 글을 써내려간다. 실패하고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여전히 발화하는 것이 두렵다. 이렇게나 겁이 많은 사람인데 글을 쓰는 일을 택했다. 스스로 고통 받기를 자처했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자람을 들키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어리석음을 보이는 것보다 쓰는 상태를 포기하는 일이 더욱 괴롭기 때문에 결국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오늘도 모니터 속의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망설이는 중이다. 교실의 맨 앞자리에 앉아 손을 번쩍 들고 답하는 모범생이 되고 싶지만 “잘 모르겠는데요.”하고 중얼거리는 학생에 더 가깝다. 이런 이야기는 세련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저런 이야기는 너무 정치적이지 않나. 경계하고 의심하면서 한 글자씩 써내려간다. 조금씩 채워지는 종이를 보면서 생각한다. 말할 수 없음의 영역을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음의 태도를 줄여나가는 용기를 얻고 싶다고.

2022-03-15

안녕, ‘요섹남’

유행어는 한 사회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다. 멸시에 가까운 혐오적인 표현인 ‘~충’과 같은 표현은 우리 사회가 어떤 요소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밥을 소리 내면서 먹는다 해서 붙여진 ‘쩝쩝충’, 상대가 무슨 말만 하면 훈수부터 두고 본다 해서 붙여진 ‘훈수충’과 같은 귀여운(?) 수준에서부터 한때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까지 했던 ‘일베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유행어의 흐름은 우리 사회가 무엇을 앓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그러한 표현 가운데에는 ‘~녀’, ‘~남’과 같은 표현도 있다. 흔히 부정적 속성을 덧붙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를 덧붙여 의미화 시키기도 한다. ‘개념녀’나 ‘뇌섹남’과 같은 표현들이 그렇다. 재밌는 건, 이와 같은 ‘~남’, ‘~녀’와 같은 표현에서 엿보이는 불균형감이다. ‘개념녀’가 군 문제를 비롯한 한국 남성의 사정에 친화적인 발언을 한 여성을 지칭한다면, ‘뇌섹남’을 비롯한 표현들은 여성에 대한 태도가 아닌 사회적 능력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처럼 긍정적 의미에서의 ‘~녀’와 ‘~남’ 사이에 존재하는 성적 불균형감은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 사회가 해당 성별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했던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잠시 이야기를 돌려보자. ‘뇌섹남’이라는 표현이 유행하고, 그 뒤를 이어 무수히 많은 ‘~남’이 우리 곁을 스쳐갔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가운데 ‘요섹남’이라는 표현을 기억할 것이다. ‘요리를 잘해서 섹시해 보이는 남자’라는 의미의 이 말은 주로 잘생긴 남성 연예인을 향해 주로 사용되었다. 이런 말이 만들어진 까닭에는 요리를 하는 남자가 그만큼 적기도 했거니와 남자가 요리를 해야 하는 상황을 어색하게 느끼는 사회적 분위기 또한 반영되었으리라. ‘요리’라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대중 문화적 요소로 자리 잡게 된 것 또한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요섹남’이 될 수 있는 남성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잘생기고 충분히 매력적인 남성을 향해 사용되지, 보편적이고 평범한 남성을 향해서나 혹은 직업으로서의 요리인을 향해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요리를 잘 할 필요가 없는 능력 좋은 남성’을 향해서만 사용된다. 더불어 이 말에는 대칭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녀’, ‘~남’의 표현들이 그렇듯, ‘요섹녀’라는 표현은 사용되지 않는데, 이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여성은 요리를 잘해야 한다’라는 고정관념과 남성이 요리를 하는 것은 ‘옵션’이라는 고정관념 탓이 아닐까 싶다.그러나 이 말도 이제는 옛말이다. ‘뇌섹남’이라는 표현이 뒤안길로 사라진 것처럼, 어느 순간부턴가 ‘요섹남’이라는 표현도 사라지고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요섹남’과 같이 젠더 불균형적인 표현의 소멸은 우리 사회가 성적 평등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지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섣부른 단정이 아닐까 싶다. 아마, ‘요섹남’이라는 표현의 소멸은 1인 가구 비율의 급증과 그에 따라 요리를 해야 하는 남성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일어난 자연스런 변화가 아닐까 싶다. 작년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1인 가구의 비중은 전체 가구 가운데 약 30%를 웃돌고 있으며, 1인 가구의 형태는 매년 유의미한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2016년 대비 약 5% 가까운 상승률로 집계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요리를 비롯한 집안일들이 자연스레 자신의 몫이 되었다는 의미이겠다. 즉, 요리하는 남자가 늘어남에 따라 그건 더 이상 ‘섹시함’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이제 우리는 또다른 ‘~~녀’, ‘~~남’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게 ‘이대남’, ‘이대녀’와 같이 정치적이며 세대론적인 멸시의 표현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다른 종류의, 우리가 이제껏 생각 못해본 또 다른 젠더 문제가 뭉뚱그려진 표현이 될 수도 있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와 같은 표현에는 우리 사회에 내재한 문제가 젠더의 외관을 덮어쓴 채 잠재되어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그러한 표현의 생성과 소멸은 결코 문제의 해결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겠다. 새로운 단어가 생겨나고 사라지듯, 우리 사회 또한 변하고 달라질 것은 자명하다. 문제는, 그게 좋은 방향일지 혹은 잔잔한 호수 밑에 썩은 흙이 잠들어가는 것처럼 기묘한 평온의 상태가 될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2022-03-15

진보꼰대와 젤렌스키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나라,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샤갈을 배출한 위대한 예술의 나라 러시아가 독재자의 탐욕과 광기로 인해 전범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해 푸틴이 몰락하기를 바란다. 우크라이나의 무고한 민간인들, 어린이들, 양국의 청년들이 독재자의 야욕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푸틀러’는 그 죗값을 치러야만 한다.중국과 북한, 러시아의 위성국가나 다름없는 벨라루스만 빼고 전 세계가 러시아를 규탄하고 있다. 러시아 내에서도 반전 시위가 벌어지는 중이다. 합리적 이성과 양심, 인간에 대한 연민을 지닌 세계의 보편 인류가 우크라이나 편에 서 있다. 그 응원에 힘입어 우크라이나는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다. 러시아 군대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조국과 가족을 지키려는 우크라이나 군인들과 명분 없는 전쟁에 동원된 러시아 군인들의 차이다.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으나 내어주면 되돌릴 수 없다” 조선의 주권을 침탈한 일본에 맞서 싸운 독립군들의 이야기다. 지금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그렇게 싸우는 중이다. 세계 2위 군사대국 러시아에 맞선 우크라이나는 골리앗 앞의 다윗이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피를 토하며 외치는 중이다. “빼앗길지언정 내어주지는 말자”고. 그는 수도 크이우에 남아 국민들과 함께 결사항전 중이다. 미국의 피신 지원을 거절하며 한 말이 세계를 울렸다. “내게 필요한 건 피신을 위한 승용차가 아니라 탄약이다”현재 젤렌스키의 지지도는 91퍼센트에 달한다. 두 해 전 대선에서 70퍼센트 넘는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그런 젤렌스키 대통령을, 또 침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그런 천박한 짓을 하느냐고? 중국이나 북한? 아니면 벨라루스 사람? 아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낀 채 우크라이나와 비슷한 질곡의 역사를 겪은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이다. 그것도 입만 열면 평화를 늘어놓는, 진보세력을 자처하는 이들이다.이재명 후보는 “대통령을 잘못 뽑아 전쟁의 위기에 내몰렸다”고 말했다가 국제적인 비난을 사고서야 해명했다. 추미애 전 장관은 “지도력이 부족한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 감당하지 못할 위기를 자초했다”, “외교 경험이 없는 코미디언 출신 아마추어 대통령이 미숙한 리더십으로 러시아를 자극했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역사학자 전우용 씨는 “무식하고 무능한 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뽑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처지가 안타깝다”고 했고, 음식 칼럼니스트 황교익 씨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대국민 선언을 “바보 선언”이라고 조롱한 데 이어 “멍청한 젤렌스키”라는 원색적 모욕을 했다. 그러고는 “인기를 얻기 위해 자극적인 발언이나 하는 자에게 국가를 맡기면 우크라이나 꼴을 당할 수 있다”며 우크라이나의 비극을 국내 정치로 끌고 와 도구화했다. 황씨는 민주당 경선 당시 “오로지 이낙연의 정치 생명을 끊는 데 집중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자극적인 발언이나 하는 자가 과연 누구인가?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자신들만이 정의롭고 선하며 똑똑하다는 선민의식, 우월의식이 바로 ‘진보꼰대’들의 문제다. 많은 2030세대가 왜 민주당에 등을 돌리게 됐는지 모르는 걸까? 진보의 이름으로, 정의라는 미명으로 자신들만이 옳다는 환각에 취해 피해자와 약자와 소수자를 비하하고 조롱하고 가르치려드는 데 환멸을 느낀 것이다. 설사 그들 논리대로 우크라이나가 친서방 노선으로 러시아를 자극했다한들 전쟁과 인명 살상의 책임을 침략국이 아닌 피해국에게 돌리는 게 말이 되는가? 성폭행 피해자에게 “네가 옷을 야하게 입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소년공은 대통령이 될 수 있어도 코미디언은 안 되나? 코미디언은 직업일 뿐이지 우스운 사람이 아니다. 왜 자신들의 정치적 선전을 위해 특정 직업군을 비하하는가? 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타국의 대통령을 조롱하는가? 무슨 권리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이성과 용기를 모욕하는가? 내 눈엔 ‘피해호소인’이니 ‘마이클 잭슨을 닮은 여인’이니 ‘김건희로부터 성상납’이니 하는 망발을 일삼는 이들이나 노욕 덩어리 푸틴이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김용민 같은 자의 음담패설은 쓰레기가 아닌가. 푸틴에 대해서는 정신이상설마저 돌고 있는 반면 젤렌스키는 처칠에 비견되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코미디언이든 구두닦이든 배달 라이더든 성소수자든 그게 누구든 젤렌스키 같은 지도자가 대통령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충실한 국민이 되겠다. 내년쯤에는 용감한 대통령과 국민들이 지켜낸, 금빛 밀밭과 푸른 하늘이 아름다운 우크라이나로 여행가고 싶다.

2022-03-08

오뚝이처럼 헤엄치기

올해 1월에 야심차게 짜 놓은 여러 계획이 엎어졌다. 뭐 아직 3월밖에 안 되었으니 목표를 재수정하고 다시 시도하면 되지만, 어쩐지 새롭게 수정된 목표 앞에서 또 주저하게 된다. 누구나 시작에 앞서 두려움을 크게 느낀다지만 나는 유독 더 지레 겁을 먹고 만다.사실 난 의문의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엄친아 캐릭터처럼 모든 일을 프로페셔널하게 착착 해내는 근사한 모습이면 참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다.게으르고 어설픈 완벽주의 성향이라 아주 사소한 선택이어도 결정하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스스로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단 생각이 들면 그 일의 시작조차 시도하지 않는다.게으른 완벽주의 성향은 사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줄 알았지만 성인이 되고 회사를 입사하면서까지 이러한 습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심해져선 초조함과 불안감을 폭발할 때까지 쌓아서 일을 처리하곤 했으니까. 과다한 업무량도 있었지만 너무 사소한 것까지 실수하지 않기 위해 시간을 들인 나의 잘못이 컸다.뿐만 아니라 공부도 그랬다. 그냥 책을 펼쳐서 단어를 외우면 되는 일인데도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펴는 것조차 너무 많은 걱정으로 에너지를 소비했다.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만약 책을 폈는데 단 한 문장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오늘 목표량은 단어 30개 외우기지만 10개도 못 외운다면 어쩌지? 그렇게 계획한 것을 지키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포기해버리기 일쑤였다. 아직 결정 나지도 않은 실패를 홀로 예견하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 동안 무력감이 겹겹이 쌓였다. 그런 감정은 생활의 리듬을 깨버리기도 했다.중요한 일정이 있을 땐 오히려 그 일정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운동을 하면서 에너지를 소비했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타이밍에 능력치 발휘를 못했고 결국 언제나 부끄러운 결과물을 손에 쥐었다.작가에게 약속과도 같은 원고 마감일은 또 어떤가. 스스로 정해둔 데드라인은 늘 넘어서기 일쑤고 하루 온종일 초조함과 불안감에 스스로를 원망하면서도 평소 잘 하지 않는 집안 청소나 밀린 빨래를 처리하곤 했다.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음에도 일의 적합한 타이밍이 오기까지 무작정 기다렸다,하루하루 데드라인 앞에서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살아가니 나의 능력과 자기 확신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최근엔 은행 앱을 통해 계좌 가입하는 일 조차 너무 버거운 일 같아 대책 없이 미룬다거나, 또는 단순히 오해가 쌓였단 이유만으로 사람과의 관계마저 쉽게 포기해버리는 상황을 마주하고선 심각함을 인지했다.이젠 조금씩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성향을 벗어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모든 일을 성공할 수 없다는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애초부터 한 번에 도달 할 수 없는 허무맹랑한 목표는 설정하지 않고, 그저 시도만으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사소한 목표부터 세워 꾸준히 실천하기로 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두 번짼 성공은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하여 거머쥘 수 있는 걸 꼭 기억해두기로 했다. 단 한 번의 시도로 성공하는 운의 흐름에 기댄다거나, 또는 한 번의 시도로 성공하겠단 오만에서 부디 벗어나기로 다짐했다. 어려움이 없지 않겠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최근 소소한 취미로 캡슐 뽑기에 빠졌는데 우연히 오뚝이를 뽑았다. 어렸을 때나 보던 오뚝이를 마주하니 전생에서나 보던 물건처럼 묘했지만 그에 비해 큰 감흥이 없었다.막상 책상에 올려두고 보다보니 이상하게 시선이 갔다. 아무리 외부 자극이 있어도 살랑살랑 흔들리고선 제자리를 찾아 우뚝 서는 게 신기하고 대견했다.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자세는 오뚝이의 자세일 것이다. 무엇이든 정해진 답은 없고 완벽도 없으니 불명확한 것에 사사건건 신경 쓰지 말고 유연히 흔들리기. 그리고 아무리 형편없는 결과가 예상되어도 그 일을 끝내기 위해 애쓰기. 수영을 하기 위해선 우선 몸에 힘을 빼야 한다고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숨을 다시금 골라 본다.

2022-03-08

네? 그건 상식이라구요?

인터넷 커뮤니티의 게시판들을 돌아다니다보면 종종 그런 글들을 마주치게 된다. “영국이 섬이라는 게 상식이야?”, “시계 읽을 줄 모르면 멍청한 거야?”, “꼭 자기 이름 한자로 쓸 줄 알아야 해?” 등등, 타박을 듣거나 혹은 창피함을 느꼈던 경험을 토로하며 정말 상식이 맞는 것인지 되묻곤 한다. 물론 여기에 달린 댓글은 대개 “응, 상식이야. 그 정도는 제발 좀 알아둬”와 같은 상식(?)적인 댓글이 달리기는 하지만, 간혹 그러한 글들을 읽다 보면 나 또한 의문이 들곤 한다. 대체 상식이라는 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건가 하는 의문.초등학교 1학년 때 한자 시간에, 담임 선생님에게 그런 타박을 들은 적이 있다. 숫자를 10까지 한자로 쓸 줄 모른다는 이유로 상식이 없다는 둥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는 둥, 온갖 모멸적인 말이 8살 아이에게 쏟아졌다. 그땐 그게 어마어마하게 큰 죄인 것처럼 느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8살짜리 애가 모를 수도 있지. 왜 남의 집안을 들먹거린담? 자기는 8살 때 그렇게 잘 알았나? 아니 그리고, 애가 모르면 가르쳐야지. 참고로 그날 울먹이며 집에 돌아온 나를 본 할머니께서는 이야기를 듣곤 화가 머리끝까지 나셔서 교무실을 아주 뒤집어 버리셨다. 애가 모르면 가르쳐야지, 선생이 애한테 못된 소리나 하고 있다며.조금 상관없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다. 누구든, 무엇이든, 모르는 건 언제나 존재한다. 박사에 평론가에 이런저런 타이틀을 달고 있는, 밖에서 보면 어쩌면 꽤나 수재(?)같아 보일 나는, 사실 상식이 없다. 아닌 게 아니라 고등학교에서 당연히 배우는 내용은 잘 모른다. 열일곱 살 때 고등학교를 자퇴했었고, 복학해서도 3학년 때까지 수업시간에 제대로 집중해본 일이 없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들께 참 죄송하긴 한데… 뭐,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모두가 똑같이 모범적이고 평범하게 살겠어요.지금도 학교에서, 문단에서, 출판사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내가 모르는 게 참 많다는 걸 느낀다. 매번 대화를 끊고 모르는 걸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요즘엔 모르는 게 나오면 조용히 기억해놨다가 대화가 다 끝나면 옆 사람에게 몰래 묻거나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보곤 한다(심지어 웃긴 얘기조차 뒤늦게 이해하곤 혼자 낄낄거리기도 한다). 이런 경험들 속에서 나름 체득한 게 있다면, 모르는 게 죄는 아니지만 다만 어떤 순간에는 실례일 수도 있다는 것. 나로 인해 회의가 중간에 끊어지거나, 혹은 대화의 맥이 끊기는 경우들 말이다.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가 모르는 이야기가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정중함을 장착하곤, 물어볼 타이밍을 조심스럽게 재곤 한다. “저, 사실, 제가 그런 쪽은 잘 모르는데, 그게 어떤 거죠?” 그렇다보니 누군가 내 이야기에서 모르는 부분에 대해 물을 때면 역시나 정중해지게 된다. “어, 음, 그게 말이죠. 사실 저도 잘은 모르는데 이런저런 이야기예요.” 중요한 건, 그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안기지 않는 것. 묻는 일에서도 대답하는 일에서도 중요한 건 ‘나’의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누군가의 눈에는 지금이 무척이나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대로 생각되겠지만, 나에게 체감되는 ‘현재’는 좀 과하게 엄하고 과도하게 엄밀한 시간 같기도 하다. 글에서 혹시라도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틀릴 때면 곧장 자격논쟁이 벌어지기도 하거니와 방송에서 조금이라도 꼬투리 잡힐 이야기를 하면 하차하라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비판과 비난의 경계쯤에 놓인 그 엄정한 말들에서, 모르는 것은 ‘죄’로 취급받으며 그에 대해 사죄하라는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진다(마냥 모르는 것도 마냥 틀린 것도 아닌데도). 나도 모르는 새에 우리나라는 원스트라이크 아웃 제도가 아주 상식적인 것으로 굳혀진 것 같다. 정작 그래야 할 부분에선 안 그러면서.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이 이야기의 논점은 모르는 게 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무지를 죄로 취급할수록 무지한 자들은 자신의 무지를 숨기기에 급급한 나머지 타인의 무지를 물어뜯는 것에만 더욱 집중하게 된다. 반대로, 모르는 게 자랑은 아니다. 알려는 노력이나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인정 없이, 사람은 나아질 수 없다. 모르는 게 죄냐며 발끈하는 사람과, 모르는 건 죄라고 발끈하는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말해보는 게 좋을지 고민이 많다.

2022-03-01

패배한 조연이 향하는 곳은

추억의 만화영화를 찾아보는 재미에 빠져 있다. 매주 같은 시간에 방영되던 만화영화를 보기 위해서 놀이터의 미끄럼틀까지 포기하고 텔레비전 앞을 향해 달려갔던 어린 시절을 지나왔더랬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오프닝 음악을 따라 부르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었다. 만화 속의 세계는 얼마나 매력적인지. 상영 시간은 어찌나 짧게 느껴지던지. 그렇게 한 화가 끝나고 나면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누가 이겼는데?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는데? 내일을 손꼽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것만이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OTT 서비스의 시대가 왔으며 좋아하는 만화의 시작부터 완결까지 한 번에 볼 수 있는 재력을 갖추게 되었으니. 원하는 시간에 보고 싶은 만큼 만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달콤한 과자를 곁들이며 편안한 자세로 누워 만화를 보고 있노라면 성공이라는 개념에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최근 내가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은 ‘요리왕 비룡’이다. 주인공인 비룡은 열세 살로 사천 출신의 천재 요리사다. 사천요리의 대가였던 어머니의 비기(秘技)를 물려받아 특급 요리사 시험에 응시하게 되고 최연소로 합격하는 영광을 누린다. 비룡의 신념은 명료하다. 요리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선사하는 것이라는 것. 그는 사명을 가지고 불우한 이들에게 최상의 요리를 선물하는 역할을 자처한다.비룡과 요리 대결을 펼치는 대부분의 조연은 그러한 신념과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다. 명예나 돈, 이기심을 앞세워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한다. 요리를 순수하게 즐기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일까. 비룡은 그들과의 대결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비룡을 응원하고 그의 승리를 바랐던 어린 날과 달리 지금은 조연들에게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일생일대의 승부에서 무참하게 패배한 그들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뛰어넘지 못하는 벽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세상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모습과 나 자신이 서서히 겹쳐 보이는 것이었다.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지금 패배한 조연에 공감하고 있구나. 그때 비로소 나는 내가 정말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매번 승리하는 주인공은 비룡뿐만이 아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거나 어떤 어려운 상황이 찾아와도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인물은 주인공이라는 이름으로 주인공의 자리에서 원하는 바를 이뤄낸다.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승리를 쟁취하며 겸손이란 미덕까지 겸비하고 있다. 그건 패배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패배자의 절규로 인해 주인공은 진정한 승리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그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젊은 나이에 놀라운 결과를 이뤄낸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현대 사회에서 원하는 인재이자 세상을 바꿀 힘을 가진 이들이 아닌가. 그러니까 주인공이라는 칭호는 이런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 나 자신이 보잘것없게 느껴진다.이따금 우리는 자기 자신이 세상의 변두리에서 헤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들은 정해져 있으며 우리가 흘려보내는 일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만 같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 이유는 주인공을 빛내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신발에 들어 있는 모래 알갱이처럼 거슬린다. 툭툭 털어내도 떨어지지 않는 우울감이 덮쳐오면 이 지난한 시간이 별 볼 일 없는 삶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누가 그랬던가. 승리하면 배울 수 있는 것이 적지만 패배하면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그러나 연이은 패배만큼이나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끊임없이 승리한다는 것은 비현실의 영역이며 그것이야말로 만화적 상상력이라는 걸 안다. 그렇기에 승리로 점철된 주인공의 인생을 관조하고 일종의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낙관이 가득한 세계와 만나는 일. 그것은 지금까지도 만화영화를 시청하는 까닭이자 동시에 거기에서 보여주는 이야기가 어렸을 때만큼 마냥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주인공에게 패배한 채로 떠나는 조연의 등을 본다. 그들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거기에서는 과연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승부에서 비참하게 패배할 수도 있고 어딘가에서 전설의 요리를 만들어낼지도 모를 일이다. 이깟 요리, 더 이상 안 하겠다고 포기할 수도 있다. 어쨌든 패배한 조연은 자신만의 길을 떠났다. 비록 ‘요리왕’이라는 칭호는 얻지 못했지만 나는 그들의 서사가 애틋하고 그들이 그려낼 내일이 궁금하다.

2022-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