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만화영화를 찾아보는 재미에 빠져 있다. 매주 같은 시간에 방영되던 만화영화를 보기 위해서 놀이터의 미끄럼틀까지 포기하고 텔레비전 앞을 향해 달려갔던 어린 시절을 지나왔더랬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오프닝 음악을 따라 부르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었다. 만화 속의 세계는 얼마나 매력적인지. 상영 시간은 어찌나 짧게 느껴지던지. 그렇게 한 화가 끝나고 나면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누가 이겼는데?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는데? 내일을 손꼽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것만이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OTT 서비스의 시대가 왔으며 좋아하는 만화의 시작부터 완결까지 한 번에 볼 수 있는 재력을 갖추게 되었으니. 원하는 시간에 보고 싶은 만큼 만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달콤한 과자를 곁들이며 편안한 자세로 누워 만화를 보고 있노라면 성공이라는 개념에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최근 내가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은 ‘요리왕 비룡’이다. 주인공인 비룡은 열세 살로 사천 출신의 천재 요리사다. 사천요리의 대가였던 어머니의 비기(秘技)를 물려받아 특급 요리사 시험에 응시하게 되고 최연소로 합격하는 영광을 누린다. 비룡의 신념은 명료하다. 요리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선사하는 것이라는 것. 그는 사명을 가지고 불우한 이들에게 최상의 요리를 선물하는 역할을 자처한다.
비룡과 요리 대결을 펼치는 대부분의 조연은 그러한 신념과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다. 명예나 돈, 이기심을 앞세워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한다. 요리를 순수하게 즐기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일까. 비룡은 그들과의 대결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비룡을 응원하고 그의 승리를 바랐던 어린 날과 달리 지금은 조연들에게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일생일대의 승부에서 무참하게 패배한 그들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뛰어넘지 못하는 벽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세상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모습과 나 자신이 서서히 겹쳐 보이는 것이었다.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지금 패배한 조연에 공감하고 있구나. 그때 비로소 나는 내가 정말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매번 승리하는 주인공은 비룡뿐만이 아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거나 어떤 어려운 상황이 찾아와도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인물은 주인공이라는 이름으로 주인공의 자리에서 원하는 바를 이뤄낸다.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승리를 쟁취하며 겸손이란 미덕까지 겸비하고 있다. 그건 패배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패배자의 절규로 인해 주인공은 진정한 승리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젊은 나이에 놀라운 결과를 이뤄낸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현대 사회에서 원하는 인재이자 세상을 바꿀 힘을 가진 이들이 아닌가. 그러니까 주인공이라는 칭호는 이런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 나 자신이 보잘것없게 느껴진다.
이따금 우리는 자기 자신이 세상의 변두리에서 헤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들은 정해져 있으며 우리가 흘려보내는 일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만 같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 이유는 주인공을 빛내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신발에 들어 있는 모래 알갱이처럼 거슬린다. 툭툭 털어내도 떨어지지 않는 우울감이 덮쳐오면 이 지난한 시간이 별 볼 일 없는 삶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누가 그랬던가. 승리하면 배울 수 있는 것이 적지만 패배하면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그러나 연이은 패배만큼이나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끊임없이 승리한다는 것은 비현실의 영역이며 그것이야말로 만화적 상상력이라는 걸 안다. 그렇기에 승리로 점철된 주인공의 인생을 관조하고 일종의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낙관이 가득한 세계와 만나는 일. 그것은 지금까지도 만화영화를 시청하는 까닭이자 동시에 거기에서 보여주는 이야기가 어렸을 때만큼 마냥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주인공에게 패배한 채로 떠나는 조연의 등을 본다. 그들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거기에서는 과연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승부에서 비참하게 패배할 수도 있고 어딘가에서 전설의 요리를 만들어낼지도 모를 일이다. 이깟 요리, 더 이상 안 하겠다고 포기할 수도 있다. 어쨌든 패배한 조연은 자신만의 길을 떠났다. 비록 ‘요리왕’이라는 칭호는 얻지 못했지만 나는 그들의 서사가 애틋하고 그들이 그려낼 내일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