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어는 한 사회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다. 멸시에 가까운 혐오적인 표현인 ‘~충’과 같은 표현은 우리 사회가 어떤 요소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밥을 소리 내면서 먹는다 해서 붙여진 ‘쩝쩝충’, 상대가 무슨 말만 하면 훈수부터 두고 본다 해서 붙여진 ‘훈수충’과 같은 귀여운(?) 수준에서부터 한때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까지 했던 ‘일베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유행어의 흐름은 우리 사회가 무엇을 앓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표현 가운데에는 ‘~녀’, ‘~남’과 같은 표현도 있다. 흔히 부정적 속성을 덧붙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를 덧붙여 의미화 시키기도 한다. ‘개념녀’나 ‘뇌섹남’과 같은 표현들이 그렇다. 재밌는 건, 이와 같은 ‘~남’, ‘~녀’와 같은 표현에서 엿보이는 불균형감이다. ‘개념녀’가 군 문제를 비롯한 한국 남성의 사정에 친화적인 발언을 한 여성을 지칭한다면, ‘뇌섹남’을 비롯한 표현들은 여성에 대한 태도가 아닌 사회적 능력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처럼 긍정적 의미에서의 ‘~녀’와 ‘~남’ 사이에 존재하는 성적 불균형감은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 사회가 해당 성별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했던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잠시 이야기를 돌려보자. ‘뇌섹남’이라는 표현이 유행하고, 그 뒤를 이어 무수히 많은 ‘~남’이 우리 곁을 스쳐갔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가운데 ‘요섹남’이라는 표현을 기억할 것이다. ‘요리를 잘해서 섹시해 보이는 남자’라는 의미의 이 말은 주로 잘생긴 남성 연예인을 향해 주로 사용되었다. 이런 말이 만들어진 까닭에는 요리를 하는 남자가 그만큼 적기도 했거니와 남자가 요리를 해야 하는 상황을 어색하게 느끼는 사회적 분위기 또한 반영되었으리라. ‘요리’라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대중 문화적 요소로 자리 잡게 된 것 또한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요섹남’이 될 수 있는 남성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잘생기고 충분히 매력적인 남성을 향해 사용되지, 보편적이고 평범한 남성을 향해서나 혹은 직업으로서의 요리인을 향해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요리를 잘 할 필요가 없는 능력 좋은 남성’을 향해서만 사용된다. 더불어 이 말에는 대칭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녀’, ‘~남’의 표현들이 그렇듯, ‘요섹녀’라는 표현은 사용되지 않는데, 이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여성은 요리를 잘해야 한다’라는 고정관념과 남성이 요리를 하는 것은 ‘옵션’이라는 고정관념 탓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말도 이제는 옛말이다. ‘뇌섹남’이라는 표현이 뒤안길로 사라진 것처럼, 어느 순간부턴가 ‘요섹남’이라는 표현도 사라지고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요섹남’과 같이 젠더 불균형적인 표현의 소멸은 우리 사회가 성적 평등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지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섣부른 단정이 아닐까 싶다. 아마, ‘요섹남’이라는 표현의 소멸은 1인 가구 비율의 급증과 그에 따라 요리를 해야 하는 남성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일어난 자연스런 변화가 아닐까 싶다. 작년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1인 가구의 비중은 전체 가구 가운데 약 30%를 웃돌고 있으며, 1인 가구의 형태는 매년 유의미한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2016년 대비 약 5% 가까운 상승률로 집계된다).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요리를 비롯한 집안일들이 자연스레 자신의 몫이 되었다는 의미이겠다. 즉, 요리하는 남자가 늘어남에 따라 그건 더 이상 ‘섹시함’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이제 우리는 또다른 ‘~~녀’, ‘~~남’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게 ‘이대남’, ‘이대녀’와 같이 정치적이며 세대론적인 멸시의 표현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다른 종류의, 우리가 이제껏 생각 못해본 또 다른 젠더 문제가 뭉뚱그려진 표현이 될 수도 있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와 같은 표현에는 우리 사회에 내재한 문제가 젠더의 외관을 덮어쓴 채 잠재되어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그러한 표현의 생성과 소멸은 결코 문제의 해결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겠다. 새로운 단어가 생겨나고 사라지듯, 우리 사회 또한 변하고 달라질 것은 자명하다. 문제는, 그게 좋은 방향일지 혹은 잔잔한 호수 밑에 썩은 흙이 잠들어가는 것처럼 기묘한 평온의 상태가 될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