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무사고라구요?

등록일 2022-03-29 20:02 게재일 2022-03-30 17면
스크랩버튼
인간이 무죄일 수 있는 방법은 옳은 일을 행하는 것뿐 아닐까. /Pixabay

군대에서 보았을 평범한 풍경 하나. 대대급 단위의 건물 입구에는 어김없이 붙어있는 ‘무사고 XX일 달성’이라는 현판. 자신들의 주 업무가 수십, 수백일 째 무사히 수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그 현판은 해당 대대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업무 수행 능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그 현판은 매번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여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어. 그러니 너도 문제를 일으키지 마.”

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자. 복무가 익숙해짐에 따라 알게 모르게 옆 소대나 타 대대의 사정 따위를 전해 듣곤 하였다. 군대라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건 사고들이 하루를 멀다하고 발생하고 있었다. 노후된 장비나 민간인과의 마찰 등 여러 종류의 문제들이 있곤 했지만, 대개의 경우는 병사나 장교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물리적 폭력에서부터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많은 사건들. 그 속에는 경미한 사례들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한 사람의 인격이 말살되었다고 느낄 정도로 심각한 사례들도 들려오곤 하였다.

하지만 그 수많은 사건들이 모두 공론화가 되고, 무사원만하게 해결되진 않았다. 대개의 경우는 공론화도 되지 못했으며, 간혹 피해자의 전출로, 그보다 더 간혹 가벼운 수준의 징계로 끝이 났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가는 군대의 풍경 속에서, 나는 그제서야 ‘무사고’ 현판이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되었다. 그건,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일차원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무사고 ‘XX일’이라는 말은 그 긴 기간 동안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부대의 능력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 긴 기간 동안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제대로 문제화되거나 해결된 사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잔인한 사실에 대한 과시다. 비단 군대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조직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문제를 감추기 위해 피해자를 향해 합의와 화해를 종용한다. 충분한 제도가 없기에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제도를 갖추고서도 그에 맞춰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이의 문제로 환원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와 같은 사례들에서 우리는 자주 ‘가장’이라는 단어를 마주한다. ‘그래도 OO가 가장이잖아. 걔가 이 일로 직업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어? 니가 한 가족 다 굶어 죽이는 거야. 그래놓고 감당할 수 있겠어?’ 단어나 표현에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아마 많은 사람들이 들어봤을 그 말들. 명백한 2차 가해임에도 그게 옳은 거라고 믿고 행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그들을 향해 묻고 싶다. 그럴 거면 왜 그런 문제를 일으켰느냐고. 책임감과 책임에 대한 공감이 왜 사고가 터진 후에야 작동하는 것이냐고.

인터넷에서 ‘무사고’를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 가운데 ‘무사고 6000일’ 달성을 기념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있다. 그 사진의 아래에는 빨간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사고 나도 무사고’. 아마 많은 군필자들이 군대에서 하인리히의 법칙을 들어보았을 텐데, 나는 그렇게 사고가 아니게 된 사고들과 문제가 아니게 된 문제들이 하인리히의 법칙이 말하는 사소한 징후와 작은 사고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군복무를 하면서 무수히 들었던, ‘작은 사고나 경미한 징후들도 빠짐없이 보고하라’는 그 말이, 정작 자신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던 무수히 많은 ‘가장’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직장을 떠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수많은 사건사고의 피해자들은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그 ‘가장’ 속에는 나 또한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성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인지적 감수성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와 같은 인지적 감수성이 없을 때, 우리는 그 ‘가장’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그건 그렇게 문제될 일이 아니다’라고 손쉽게 판단해버린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위치에서. 적어도 군대라는 조직 내에서, 나는 그 ‘가장’의 편이었지 피해자의 편에 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군생활이 꼬이는 게 싫다는 이유로 말이다.

군을 비롯한 많은 문제들과 부조리에 있어, 우리는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눈을 감거나 혹은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도 우리는 이미 문제들에 연루되어 있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 또한 사태를 방조한 가해자의 위치에 서있는 것이다. 당신과 나 또한 하인리히의 329번의 무수한 징조로부터 눈을 돌린, 비겁한 가해자였을 따름이다. 우리가 무죄일 수 있는 방법은 옳은 일을 행하는 것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몰랐던 일이라며 무고함을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지와 무능의 죄를 인정하는 일일 뿐이다. 공군 중사 이예람 님의 명복을 빈다.

2030, 우리가 만난 세상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