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서 수업을 하다 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가 있다.
수업종이 울리면 마흔 명의 학생이 기다리는 교실로 향한다. 말간 얼굴의 학생들이 반듯한 자세로 앉아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면서 준비한 강의록을 꺼내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은 집중력을 잃는다. 노트에 낙서를 끼적이거나 하품을 흘리고 책상에 엎어져서 자는 경우까지 속출한다. 이윽고 교실에서 떠드는 사람은 나 하나가 된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겪으며 자란 나는 이 친구들이 질 높은 수업을 경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토론 주제를 꺼내놓으면 그에 관해 논의하고 생각을 모아서 놀라운 결론으로 도출해내는 방식을 꿈꿨다. 서로가 서로의 선생이 되어주는 것.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내어놓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학생이었던 내가 꿈꿔오던 수업이었으며 이상적인 교육 활동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던 학생들은 계속해서 묵묵부답이다. 우리가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각자의 발화를 강제하지 않으면 입을 꾹 다문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다. 나는 과거에 그렇게도 싫어했던 선생님들의 표정을 지으면서 교탁을 탕탕 내리쳤다.
“너희는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또 다시 침묵. 잠시 뒤 한 학생이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말할 수 없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란 말인가. 그 의아함을 학생은 단 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해결했다.
“몰라서요.”
문학은 수학 공식처럼 정확한 답을 내어놓을 수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자신 안에 있는 언어가 미진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럴듯한 대답 대신에 모자람을 내어놓을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두려움에 가까운 마음일 것이다. 학생들은 자신이 말할 수 없다고 여기면서 말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다.
나라고 무엇이 다를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의식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선택하지 않는 것을 택한다. 무언가를 발화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보다 기성의 문법을 따른다. 나 자신이 세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맞는가하는 의구심이 입을 막는다. 경솔한 언행으로 스스로의 얕음을 들켰던 경험이 있다. 여기저기 흘린 말과 글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는 내가 감히 세상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에 관해서 쉽게 믿을 수가 없다.
침묵을 지키는 사람은 신중하다. 그러나 침묵을 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자는 비겁하다. 나는 신중함보다 비겁함의 위치에서 용기를 내지 못했던 적이 더 많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불편한 상황들을 피했고 안온한 상태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의 침묵은 분명한 혐의를 가진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날카로운 화살처럼 가닿았을지도 모른다. 소통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파괴했을 수 있다.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과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두 지점을 제대로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현명함이다. 말과 침묵의 간극에서 헤매지 않으며 적확한 언어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누구도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 그러한 불가능성을 바라는 작가들은 지치지도 않고 새로운 글을 써내려간다. 실패하고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발화하는 것이 두렵다. 이렇게나 겁이 많은 사람인데 글을 쓰는 일을 택했다. 스스로 고통 받기를 자처했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자람을 들키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어리석음을 보이는 것보다 쓰는 상태를 포기하는 일이 더욱 괴롭기 때문에 결국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오늘도 모니터 속의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망설이는 중이다. 교실의 맨 앞자리에 앉아 손을 번쩍 들고 답하는 모범생이 되고 싶지만 “잘 모르겠는데요.”하고 중얼거리는 학생에 더 가깝다. 이런 이야기는 세련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저런 이야기는 너무 정치적이지 않나. 경계하고 의심하면서 한 글자씩 써내려간다. 조금씩 채워지는 종이를 보면서 생각한다. 말할 수 없음의 영역을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음의 태도를 줄여나가는 용기를 얻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