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었어, 나를 용서해. 요즘 네가 술에 기대어 말 못하고 아파했던 이유가 나인 줄은 몰랐어. 한동안 넌 사랑을 하고 이별한 걸 알았기에 너를 떠난 그 사람이 그리운 그 탓인 줄 알았어. (…) 날 사랑한다고 지금까지 왜 말 못 했어. 나 얼마나 그 말을 기다려왔는데. 그래 늦지 않았어. 미안하단 말은 하지 마. 이제 시작해. 우리 사랑을 위해.”
며칠 전 운전하며 집에 가는데 라디오에서 녹색지대의 옛 노래 ‘그래 늦지 않았어’가 흘러 나왔다.
비도 자분자분 내리고, 비에 젖은 네온사인 불빛들이 알록달록 글썽거리는 밤의 낭만에 취해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노래를 목청껏 따라 불렀다. 그러다 문득 ‘요즘은 왜 이런 노래 가사가 없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호 호감이 있던 남녀가 바보 같이 서로의 마음을 모른 채 친구처럼 지내다가, 뒤늦게 사랑인 걸 알고 “그래 늦지 않았어” 외치는 노래다. 4분짜리 짧은 노래를 들었는데 16부작 미니시리즈 드라마 한 편을 본 것 같다. 가사 한 마디마다 서사가 있고 장면이 있다.
“술에 취한 네 목소리, 문득 생각났다던 그 말. 슬픈 예감 가누면서 네게로 달려갔던 날 그 밤. 희미한 두 눈으로 날 반기며 넌 말했지. 헤어진 그를 위해선 남아있는 네 삶도 버릴 수 있다고. 며칠 사이 야윈 널 달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지막까지도 하지 못한 말 혼자서 되뇌었었지.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어. 나를 봐, 이렇게 곁에 있어도 널 갖지 못하잖아.”
이 노래는 또 어떤가? 한국 대중가요 불후의 명곡이라고 생각하는 뱅크의 ‘가질 수 없는 너’다. 추운 겨울밤, 짝사랑의 대상인 ‘너’가 술에 취해 전화를 건다. 생각났다고, 보고 싶다고. 쿵쾅거리는 가슴 안고, 허연 입김을 뿜으며 술집으로 달려가 마주 앉았더니 그녀는 개차반인 전 남친 얘기만 한다. 우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이 찢어진다. 한 편의 멜로 영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핸드폰을 가졌는데, 그때 대리점에서 뒷 번호 네 자리를 의미 있는 숫자로 하라고 해서, 자주 가서 부르던 우리 동네 만남노래방 금영코러스 ‘가질 수 없는 너’ 3668로 한 게 아직까지 내 전화번호다.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어” 어릴 때부터 이 노래를 좋아했는데, 마흔이 되도록 이 노래대로 살줄은 몰랐다.
“머리를 쓸어 올리는 너의 모습. 시간은 조금씩 우리를 갈라놓는데 어디서부턴지 무엇 때문인지 작은 너의 손을 잡기도 난 두려워. 어차피 헤어짐을 아는 나에겐 우리의 만남이 짧아도 미련은 없네.(…) 멈추고 싶던 순간들 행복한 기억,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던 너를 이젠 나의 눈물과 바꿔야 하나. 숨겨온 너의 진심을 알게 됐으니.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날 보는 너의 그 마음을 이젠 떠나리. 내 자신보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널 아끼던 내가 미워지네.”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있다 혹은 없다’는 영원한 화두를 우리에게 늘 던져주는 노래다.
친구 사이지만 미묘한 긴장 관계에 있는 두 남녀가 사랑이 깊어져 연인이 되면, 언젠가 이별의 순간 친구로마저 지낼 수 없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는 내용이다. 2절에 “연인도 아닌 그렇게 친구도 아닌 어색한 사이가 싫어져 나는 떠나리”를 따라 부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단 몇 줄의 노래 가사인데도 가사에 없는 수많은 장면들, 벚꽃부터 첫눈까지 두 사람이 나눴을 우정 또는 사랑의 추억들, 서로를 바라보는 애틋한 표정이 그려진다.
프랑스 철학자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서사가 사라지고 파편적인 작은 이야기들만 남는다고 말했다.
장편소설이 점점 자취를 감추는 문학의 풍조도 시대적 현상이다. 현대사회는 찰나의 감각적 도취, 말초적 자극, 일회성 흥미로만 가득하다.
그래도 90년대까지는 노랫말도 문학이었는데, 요즘 대중가요 노랫말을 보면 뜻을 알 수 없는 의성어, 조어, 외국어, 심지어 욕설까지 온갖 비문학적 말장난 투성이다. 내용을 정서적으로 ‘전달’하는 것보다 비트와 멜로디를 직관적으로 ‘투척’한다.
아아, 영화 같은, 드라마 같은 노래 어디 없을까? 노래의 주인공이 되어, 애절한 발라드풍의 연애 한 번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