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1일 아침을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비명 같은 위급 재난 문자 알림음과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이라는 섬뜩한 문자 내용, 그리고 사방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 습관처럼 네이버에 접속하려는 데 접속이 되질 않자 무언가 일이 크게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마치, 재난 영화 속 한 장면에 내가 던져진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고, 나는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헌데, 무엇을?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같은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서울특별시에서 발령한 경계경보는 오발령 사항임을 알려드림’이라는 행정안전부의 문자가 올 때까지.
비록 20분의 짧은 시간이지만, 그 순간에 느낀 공포를 말로 형용하긴 어려울 것 같다. 공포라는 말도 왠지 적절하지 않은 것 같고. 아마 무력감에 더 가까웠지 싶다.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라는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무력감 말이다. 그렇게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 뒤엉킨 채로 아침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들에게 인사처럼 참 특별한 아침인 것 같다고, ‘수령님의 모닝콜’ 덕분에 지각생이 없는 것 같다는 비틀린 농담을 던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 모든 감정의 폭풍이 ‘오보’로 인해 초래되었다는 건 꽤 의미심장한 일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 문자는 허술한 점이 참 많았다. ‘대피하라’라는 술어에도 불구하고, 문자는 무엇으로 인해 대피해야 하는지,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무작정 쓰인 ‘대피하라’는 말은 꼭 영화 ‘미스트’ 같았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고, 우리에게는 최소한의 답이나 혹은 습관이라도 있어야만 했다. 수없이 많은 참사와 재난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재난에 취약하다. 그게 전쟁이든, 혹은 자연재해든, 우리는 어떤 상황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더불어 문자에서는 어떤 상황인지조차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느낀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 건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단지 대피하라는 말 뿐, ‘왜’와 ‘어떻게’를 생략해버린 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부추길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더불어 그런 상황에서 네이버와 같은 대형 포털 사이트가 접속자 초과로 인해 먹통이 되어버린 건 의미하는 바가 큰 것 같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습관적으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사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고, 그건 우리의 삶에 있어서 특정 사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문제적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정부를 불신하고, 그와 같은 불신을 사기업의 정보망을 통해 보충하려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비슷한 일은 얼마 전에도 있었다. 4월 28일 종로에서 있었던 지진 경보 오발송이다. 그때 나는 종로3가의 한 술집에 있었는데, 그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4월 28일 21:05 지진발생/추가 지진 발생상황에 유의 바람-종로구’라는 문자를 받은 사람들은 건물 밖으로 대피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부터 찾기 시작했다. 술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나는 그 광경이 꼭 만화 ‘일본 침몰’의 한 장면 같아 소름이 돋았다. 눈앞에 닥친 위기가 현실임을 인지하지 못해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재난에 휘말리는 사람들. 그런데 그게 정말 그 사람들만의 탓일까?
‘오보’가 갖는 위험성이 바로 이것이다. ‘오보’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사람들의 심리에 치명적인 효과를 미친다.
‘오보’는 우리가 가진 위험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실제 상황이 터졌을 때 잘못된 대처를 하도록 만든다. 그때도 그랬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잘못된 낙관주의가 습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잘못된 정보가 초래하는 효과가 정정문자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까닭이다.
더불어 이번의 경계경보 오발령 사건은 북한과 엮여 있다는 점에서 사태가 더 복잡하다. 북한의 위성 발사실험이 사전 고지된 사항이었음에도 이것을 이례적인 것처럼 이슈화시키고, 정보를 왜곡하여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고전적인 북풍 공작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이건 지레짐작에 불과할 것이다. 오보는 오보여야만 한다. 그럼에도 오보가 단지 오보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왜일까. 어쩌면 이런 잘못된 정치적 상상도 오보에 대해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인 것일까? 여전히 많은 의문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무엇이 문제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