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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K잼버리다

등록일 2023-08-15 17:55 게재일 2023-08-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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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에서 본 스카우트 대원들.
서울 시내에서 본 스카우트 대원들.

지난주 월요일, 을지로에 나왔다가 영국 스카우트 대원들이 폭염의 광장시장 앞에 퍼질러져 있는 광경을 보고 측은했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스카우트 스카프를 매고, 배지를 달고 있었지만 영락없는 난민 꼴이었다. ‘엑소더스’에 성공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티고 있었다간 태풍에 풍비박산 났을 테니 말이다.

새만금 잼버리가 종료됐다. 153개국 4만3천여 명 청소년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 행사는 다른 의미로 ‘역대급’이 됐다. 천억 원 넘는 예산을 어떻게 사용한 건지 뭐 하나 제대로 준비된 게 없었다. 기록적인 폭염 가운데 그늘 하나 없는 풀밭에서 잼버리 대원들은 온열 질환과 모기, 개미 등에 시달렸다. 열사병 환자들이 속출했지만 의료 지원은 미비했고, 열악한 야영 환경에서 세계 청소년들의 종아리에는 벌레 물린 수포 자국이 가득했다. 청소가 이뤄지지 않은 화장실에서는 악취가 나고, 인원수 대비 턱없이 부족한 샤워장은 비좁은 데다 수압까지 약했다. 비위생적인 시설에서 전염병이 창궐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만큼 후진적이었다. 그 와중에 단독 입점한 GS25 편의점은 바가지 상술까지 부렸다. 총체적 엉망진창. 전체 예산 1170억 원 중 야영장 시설 조성에 쓴 돈은 129억 원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날카로운 감사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새만금에서 잼버리를 개최한 것부터 난센스다. 새만금은 끔찍한 생태 학살의 현장이지 않은가? 자연의 보고인 갯벌에 시멘트를 들이부어 바다 숨구멍을 막아버린 곳이다. 자연과 인간의 상생을 주장하는 잼버리 정신을 완벽하게 위반한다. 뉴스에 보도된 현장 영상과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황량하기 그지없는 사막 같은 데다 천막을 쳐놨다. 애초에 장소 선정부터가 틀려먹었다. 이 파행을 예상 못했을까? 게으른 관료주의는 아마 ‘들판에서 텐트치고 애들 놀다 가는 거’ 정도로 잼버리를 얕잡아봤을 것이다. 돈 잔치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전 세계적인 개망신을 당했다.

정부가 부랴부랴 수습에 나섰다. 조기 퇴영한 대원들을 서울로 불러 시티투어 버스 태워주고, 경복궁 구경시켜주고, 홍대 기숙사에서 재우고, K팝 콘서트를 보여줬다. 다른 지자체들도 거들었다. 잼버리 대원들은 악몽 같은 새만금을 잊고 부산 광안리에서 해수욕하고, 드론쇼 보고, 보령 대천해수욕장에서 머드 축제 즐기고, 전국 각지에서 템플스테이, 레고랜드, 민속촌 관광 등 다채롭게 놀았다. 정부와 지자체의 위기 대응은 ‘K스러움’이 뭔지 제대로 보여줬다. 인간성이 결여된 디지털 콘텐츠, 규격화된 관광 자원, 자연과의 불화, 자본이 급조해낸 문화 양식 등이다. 나는 새만금 잼버리보다 ‘폭망’한 잼버리를 수습하기 위한 ‘K관광’이 더 큰 실패라고 생각한다. 잼버리를 고작 단체 패키지 관광, 애들 수학여행으로 전락시켰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급히 대책을 마련하느라 정신없었겠지만. 다른 나라 대원들과 함께 교류하며 협동심과 이타심을 발휘하고, 도시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불편함을 낭만으로 바꾸는 씩씩함이 잼버리 정신임을 떠올린다면 실내 체험 행사와 도시 투어, K팝만을 내세운 대응은 아쉽다. 국가별로 뿔뿔이 흩어져 노느라 ‘잼버리 공동체’는 조각나고, 대자적 기억 대신 개개인의 즉자적 추억만 남았다. 캠핑 인구가 700만 명이나 되고, 육군이 사계절 야영 훈련을 하는 ‘야영 강국’ 대한민국인데, 잼버리의 취지에 보다 부합한 대책은 없었을까?

“여러분은 시련에 맞서 이것을 오히려 더 특별한 경험으로 맞바꾸었습니다. ‘여행하는 잼버리’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아흐메드 알헨다위 세계스카우트연맹 사무총장의 폐영식 발언에는 뼈가 있다. ‘시련’, ‘특별한 경험’, ‘여행하는 잼버리’에 밑줄치고 싶다. ‘K잼버리’의 가장 큰 문제는 그늘 없는 새만금이 아니라 관료주의의 빈곤한 상상력이다. 한국사회 특유의 효율과 가성비 지상주의다. 호방하고 장쾌한 데가 없이 모든 문화가 비좁고 답답하다. 땡볕의 간척지로 상징되는 산업화의 난개발은 우리에게서 자연을, 자연과 어울리는 낭만을, 숲과 반딧불을, 맑은 공기를, 조화와 연대의 감각을 앗아가고 협소한 생활과 작위적인 문화만 남겨뒀다. 여기저기서 발생하는 칼부림 사건과 잼버리의 파국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기원이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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