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면 손에 잡히는 소설이 하나 있다. SF소설인 천개의 파랑은 안락사가 확정된 경주마 ‘투데이’ 위에서 두 번째로 낙마하고 있는 휴머노이드 ‘콜리’의 독백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멀고도 가까운 2035년에는 인간보다 더 빠른 말의 경주 속도에 짜릿한 전율을 느끼고 선망하는 스포츠인, 경마가 유행하고 있다. ‘어느 무엇보다 더 빨라야 하는’ 인간의 욕심과 욕구가 점철되어 있는 공간은 지금과 변함이 없지만 2035년에는 말의 기수가 휴머노이드로 대체되었고, 경기장뿐만 아니라 세상 곳곳에는 인간 대신 휴머노이드로 대체 된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연재를 만나기 전까지 콜리는 휴머노이드 C-27로 불렸다. 인간의 실수로 탄생된 C-27은 세상의 채도가 높은 것에 놀랄 줄 알고, 노을을 감상하고 감탄하며 단어와 지식을 무작위로 학습한다. C-27은 어느 날 경주마 투데이와 민주를 만나게 된다. 투데이의 움직임을 따라하고 등에 앉아 주로를 질주하는 순간 누군가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기쁨’을 알게 된다.
그러나 투데이는 최고의 기록을 세우기 위해 혹사당했고, 늘 1위를 유지했던 유망주에서 벗어나는 순간 많은 인간들이 질타를 받게 된다. 몸값이 떨어지고 인간의 관심이 사라지는 동안, C-27은 투데이가 점점 달릴 때 행복을 느끼지 않는 다는 걸 않고 고민에 빠진다.
어느 늦여름의 경기에서 투데이가 쓰러질 듯 달리는 걸 깨달은 C-27은 투데이를 지키기 위해 낙마를 선택한다. 뒤따라오는 말발굽에 밟혀 골반과 하반신이 전부 부서지고 결국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게 된다.
곧 자신을 수거해올 하청업체를 기다리는 동안 연재를 만나게 된다. 하늘을 보기 위해 넋을 놓다 말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들은 연재는 C-27을 자신의 집으로 수거하여 돌본다. 그리고 ‘콜리’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연재의 동생인 은혜는 다리를 쓸 수 없는 하반신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모습과 비슷한 콜리에게서 연민과 동질의 감정을 느낀다. 연재와 은혜의 엄마 보경은 로봇 콜리를 만나며 죽은 남편의 모습을 회상하며, 자신의 멈춰버린 시간을 흐를 수 있도록 현재의 행복을 쌓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그렇게 촛불이 타오르듯 서서히, 그녀들의 평범한 서사가 빛을 발하며 반짝이기 시작한다.
그녀들의 서사는 콜리를 만나며 더 이상 개인의 아픔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곧 안락사 위기에 처한 투데이를 다시 한 번 경마장 위에 달려보게 하는 공통된 목적을 갖게 된 그녀들은, 누군가는 타인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지나칠 법한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응시한다. 자신 또한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는 인간일 뿐인데도 타인에게 섬세하면서도 정제된 언어를 건넨다. 동시에 자신의 아픔을 돌아보고 보살핀다. 그러한 시도와 용기는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의문을 가질 때 콜리는 “저는 실수로 만들어 진거라고 연재가 말했어요. 연재는 실수가 기회와 같은 말이래요.”라며 담담하게 말한다.
퇴사를 하고 난 뒤의 일상은 여유와 조급함을 오간다. 어느 날엔 새롭게 시작하는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도, 어느 날엔 사소한 일에도 쉽게 무력해지고 만다.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긴장감 있는 반전 서사나 놀라운 반전이 없다. 그저 평범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간다. 조금 심심하고 담백하지만 호흡하며 읽어나가는 동안 어느덧 책의 끝장에 다다른다.
파랑을 떠올리면 하늘이 연상되고, 하늘은 아주 많은 것을 담는 그릇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 날씨를 담고, 새를 담고, 무지개도 담고, 수많은 인간의 그리움도 목소리도 담는다. 그래서인지 천 개의 파랑이라는 제목과 책의 이야기는 무척 넓은 품을 가지고 있는 듯 잘 어우러진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라는 문구를 휴대폰에 기록하여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 또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감정의 결을 포착해 하나씩 각자의 이름을 붙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조금 더 천천히 숨을 고르다보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분명 선명히 보일 것이다. 그런 믿음과 함께 여름을 맞이하러 나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