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난히 말을 잘하는 아이였다. 말싸움이라고는 져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세 살 터울인 친오빠를 필두로 학교 친구들, 동네 언니들, 심지어는 선생님들과도 언쟁을 피하지 않았다.
말끝마다 “왜요?” 하고 묻는 아이들의 화법에는 묘한 힘이 있다. 생각의 여지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혹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까닭을 제대로 설명해보아라”와 같은 말은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스스로 증명하라는 것과 같다.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식의 태도를 유지하며 말싸움을 하다 보면 상대는 제풀에 지치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가 아주 강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싸움의 특성에 관해서 깨달았다. 상대를 공격하면서 드러나는 무시무시한 폭력성과 뒤따라오는 허무함. 상대를 이긴다는 건 정말 이기는 일이 아니었고 일그러진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이겼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했다.
어떤 것도 좋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나쁜 상황만 생겨났다. 어째서 나는 이들과 언쟁하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그런 의문이 길어지자 묘한 회의감이 찾아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자그만 갈등도 피해버리는 사람이 되었다. 분명한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도 그랬다.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꾹 눌러 삼켰다. 솟아오르는 감정을 외면하거나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하고 이해해버리는 방향을 선택했다.
칼날은 차라리 목구멍 안에 감추고 있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누군가는 내가 점잖아졌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내가 드디어 어른이 되었다고 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마침내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싸움의 지난한 과정이 귀찮아졌을지도 모른다.
뭔가에 분노한다는 건 굉장한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 마음이 특정한 상대를 향해 있을 때는 더욱더 힘들다. 자신의 감정을 외면해버리면 끝날 일이지만 싸우려고 하면 여러모로 복잡해진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상대의 잘못뿐만 아니라 내 잘못까지도 자연스럽게 들춰지게 된다.
누군가를 비난한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편협하고 비겁하고 치졸한 인간인지 꺼내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한 과정이 힘겹고 아프고 성가실 수밖에 없다.
회사 선배가 습관처럼 성차별적인 발언을 한다는 친구의 고민을 들었다. 지적하기에는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고 함부로 건의했다가는 사이가 틀어질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분도 그럴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그냥 좋게 생각해.”라는 말이 내 입에서 기어코 튀어나왔을 때야 나는 내가 ‘너무 쉽게’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시위대 때문에 꽉 막힌 도로를 바라보며 ‘아, 정말 피곤하다’라고 생각한다든지, 부당한 상황에 놓인 이들이 시스템을 바꾸려는 목소리를 낼 때 ‘그도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하면서 넘겨왔던 날들. 어리석고 게으른 생각으로 점철된 시간들.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이런 나의 모자람을 친구에게 들킨 것이 창피했다.
이제까지의 나의 싸움은 얕보이기 싫어서 내는 큰소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입을 다무는 건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나는 싸우지 않아야 할 때와 싸워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진정으로 싸워야 할 때를 아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꺼내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을까?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는 것일 테다. 그래야만 하니까. 누군가는 그런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기꺼이 싸운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위해, 자유와 평화를 위해,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 배제된 이들의 존립을 위해. 더 나은 세계를 위해. 단 한 사람의 평온한 일상을 위해.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때를 떠올린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는 날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 내게는 더 많다. 이 고요한 시간은 누군가의 투쟁으로 인해 받고 있는 특혜라는 생각을 한다. 그 치열한 분투를 내가 잊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