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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불빛

등록일 2022-02-08 20:08 게재일 2022-02-0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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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철 주워 월세 보태던 할아버지는 저세상에선 ‘내 집’을 구하셨을까?

배달 대행 아르바이트를 한 지 벌써 5개월이 됐다. 일은 익숙하지만 날씨는 적응하기 힘들다. 종일 겨울비가 내린다. 우비도 챙겨 입어야 하고, 빗길 안전에도 유의해야 한다. 비 오는 날 신경 써야할 것은 또 있다. 고급 아파트 단지는 배달 오토바이의 지상 출입을 막는다. 이런 날 지하 주차장은 위험하다. 에폭시로 마감된 바닥면에 물기가 생기면 몹시 미끄럽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갑자기 중심을 잃고 넘어질 수 있다. 그러면 다치는 것도 문제지만 손님이 주문한 음식이 엉망이 된다. 특히 국물 음식은 더 조심해야 한다.

절대 넘어져선 안 돼. 천천히, 두 발을 땅에 디디면서,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자전거를 배울 때처럼, 엉금엉금 오토바이를 몬다. 땀인지 빗물인지 몇 방울의 물이 눈썹을 타고 뺨으로 흐른다. 차가운 겨울비와 우비 안의 열기가 섞이면서 하얀 김이 오른다. 107동 지하 현관 앞에 간신히 오토바이를 세운다. 40층에서부터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나도 40층에 가야 하는데, 아마 음식을 주문한 손님이 조금 전 귀가한 모양이다.

신축 고급 아파트여선지 지하까지 엘리베이터가 금방 내려온다. 40층 버튼을 누른다. 문이 닫힌다. 40층은 처음이다. 이렇게 높은 아파트가 있는 줄 몰랐다. 아기가 자고 있으니 초인종을 누르지 말아달라는 요청에 조심스레 음식을 문 앞에다 내려놓는다. ‘배달완료’ 버튼을 누르고 돌아서는 등 뒤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감사합니다” 마음 환해지는 한 마디. “맛있게 드세요” 속삭이듯 말하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지하 2층에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40층까지 올라오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복도 끝에 창문 하나가 열려 있다. 창문 밖 야경을 바라본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다는 건 이 일의 기쁨 중 하나다. 40층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의 모든 불빛들이 물기를 머금어 보석처럼 빛난다. 상자에서 마구 쏟아진 사탕 같고, 엉킨 채로 콘센트 꽂은 크리스마스 전구 같고…. 글씨가 됐다가 얼굴이 됐다가 어느 한 시절 혹은 잃어버려 그리운 무엇이 되는 저 불빛들이 애틋하기만 하다.

현재 우리나라 자가보유율은 61퍼센트다. 얼마 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한 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자가보유율을 80퍼센트까지 올리겠다고 말했다. 자가보유율이 80퍼센트가 되어도, 90퍼센트가 되어도, 아니 99퍼센트가 되어도 내 집은 없을 것만 같다. 10명 중에 6명이나 집을 갖고 있다는데, 왜 내 주변엔 집 없는 사람들뿐인가. 나도, 아버지도, 엄마도, 동생도 자기 집이 없다. 고철 주워 월세 보태던 할아버지는 12년 전 돌아가셨는데, 저세상에 ‘내 집’을 구하셨을까?

화장한 분골더미 속에 철심 몇 개가 녹지도 않고 널브러진 걸 보며 ‘저세상에서도 방세 치를 걱정에 쇳덩어리를 지니고 가시려 했구나’ 안쓰러웠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수없이 많은 불빛들 중 내 것은 하나도 없구나. 나는 문득 내가 데이빗 보위의 노래 ‘Space Oddity’에 등장하는 우주비행사 ‘톰 소령’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톰 소령은 비행선이 고장 나 캄캄한 우주를 끝없이 표류한다. 지구는 점점 멀어져 희미한 한 점 불빛이 되고, 그는 지구와의 교신이 끊어지기 직전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제 톰 소령은 망망한 암흑을 영원히 떠도는 우주 먼지, 나도 “Can you hear me, Major Tom?”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저 무수한 불빛들 중 내가 돌아갈 별이 어디 있을까 찾아본다. 불빛들이 한꺼번에 뭉치면서 윤곽 없는 색채의 덩어리가 되고 만다.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지하 2층으로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안은 중력 없는 우주공간의 깡통우주선 같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다음 배달 콜이 울린다. 짧은 공상, 그리고 긴 감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갈 때다.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자 세상의 모든 불빛들이 내게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세상 어딘가에 환하게 빛나고 있을 내 불빛을 찾아서, 나도 쏟아지듯 달려가야지. 비에 젖은 채 뭉개지는 저 불빛들을 보면서 시구 하나를 외운다. “이제 불 켜진 집에 돌아가게 허락해주십시오. 고통이신, 그리고 사랑이신 적막한 황혼의 하나님이여”(장석주, ‘완전주의자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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