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잠자코 기다리는 일

등록일 2022-02-08 20:08 게재일 2022-02-09 17면
스크랩버튼
시간이 약이라는 간단명료한 막연함을 믿고 싶은 날들이다. /언스플래쉬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밥을 만들 때엔, 몇 가지 조심해야 하는 게 있다. 우선 요리하기 전 바깥에서 있었던 일은 깡그리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칼을 이용해 식재료를 다듬을 때엔 달팽이의 속도로 아주 느리게 썰어야 하고, 무언가 볶거나 구울 땐 반드시 약한 불로 해야 한다.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로 요리를 하면 반드시 다치기 마련이다. 빠르고 거칠게 칼질을 하면 손가락을 깊게 베어버리기 쉽고 잡생각에 빠져 들다간 눈 깜짝할 사이에 손을 데이고 만다.

저녁 식사를 만드는 동시에 다음날 먹을 점심 도시락까지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요리 시간이 은근 긴데다 어느 때엔 고된 노동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고 대충 끼니를 때우다 보면 빈혈이 더 심해질 게 뻔하니, 무슨 수를 쓰던 건강한 밥을 만들어 먹기 위해 부던히 노력중이다. 물론 그만큼 두 손과 팔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날이 늘고 있지만.

언제부터였을까. 학창시절 별명이 고구마일 정도로 답답할 만큼 행동도 느리고 만사태평하던 내가, 지금은 모든 상황에 쫓겨 ‘빨리 빨리’를 외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다음 열차를 타도 되지만 굳이 떠나려는 열차에 몸을 구겨 넣는다거나, 빠르게 오가는 환승 구역에서 천천히 걷는 사람을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만다.

씻는 것도 빨리, 먹는 것도 빨리, 업무조차 빠르게 끝내기 위해 점심시간마저 쪼개어 일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과다한 업무량과 무의미한 결과물뿐이라 현재는 나 몰라라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대체 무엇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나는 자꾸 화가 나 있었다. 장소불문 누군가 말만 걸어도 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어서, 내 꼴이 약간 우스워 보였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짧고 자극적인 미디어를 소비하는 일이 유일한 취미가 되는 동안 날카롭고도 생소한 문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을 너무 쉽게 잊어 버렸다. 이젠 문장을 읽어내는 일이 외로운 해독처럼 느껴지는데다, 읽고 쓰는 행위에 있어 떠오르는 의문이나 생각을 저 멀리 던져버리는 요령이 생겼다. 내 생활 패턴과 생각은 나날이 심플해지고 단순해지는데 어느 때엔 이게 좋다가도 어느 때엔 아득히 암울해진다.

아주 가끔 글 쓰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특히 또래의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이들을 마주하면 피해갈 수 없는 몇몇 질문들이 있는데, 그럴 때면 정말 아무 구멍이든 파고선 들어가고 싶다. 그 어떤 물음에도 명확히 대답할 수 없는데다가 이 모든 게 정말 알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심히 요리한다 한들, 예기치 못하게 생겨버리는 몇몇 개의 물집이 있다. 모두 나의 조급함에서 생겨나버린 크고 작은 상처들. 약간의 힘만 주어도 뜨거운 물을 흘리며 터질 물집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지기 마련이니 일단 그대로 둔다. 시간이 약이라는 간단명료한 막연함을 믿으며.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2018년 나는 원인모를 피부 알레르기를 얻었다. 단순한 자극이나 마찰이 생겼을 때 두드러기가 올라오는데, 요즘은 별 다른 이유 없이 작고 빨간 수포가 피부 위로 일어나고 있다.

돌연 생긴 수포는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을 유발하는데 이럴 때에 처방 받은 약을 먹기도 하고, 스테로이드 연고도 발라보고, 세라마이드가 함유된 차가운 로션을 듬뿍 발라 온 몸을 도배해보지만 사실 그리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이럴 때 필요한 건 기다림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얄밉게 쏙 사라지고 마니까.

지금 내 손에 맺혀 있는 물집들도 그렇다. 다른 일을 하다 문득 물집을 보면 이미 터져버리고선 반투명한 막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것이다. 웅크려 있던 뱀이 허물을 벗고 홀연 사라진 듯이.

불청객 같은 상처가 사라지고 불그스름한 새 살이 돋아난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간단하게 일어나는 건지도 모른다. 그게 아무리 식상하고 단촐한 물집 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잠자코 기다려보기로 한다.

2030, 우리가 만난 세상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