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시적 대상화 않기

등록일 2022-02-22 20:44 게재일 2022-02-23 17면
스크랩버튼
이산하 시집 ‘악의 평범성’.

최근 우리 시에서는 ‘대상화하지 않기’가 일종의 캠페인처럼 전파되는 중이다. 타자를 섣불리 시적 대상화해 시인의 주관대로 비참함이니 아름다움이니 페이소스 따위를 부여하지 말자는 것이다. 대상화에 반대하는 기조는 기성 시단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다. 그동안 기성 시들이 민중이니 양심이니 하는 윤리적 우월감, 또 미적 완결성에 대한 왜곡된 신념에 도취되어 타자를 쉽게 대상화하고, 그 과정에서 특히 여성의 신체나 약자의 고통을 미의 대상으로 사물화, 도구화해온 비윤리적 관습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 결과 젊은 시인들에게는 ‘재현의 윤리’가 창작의 중요한 기율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출간된 시집들 중 가장 의미 있는 작업으로 이산하의 ‘악의 평범성’을 꼽고 싶다.

주지하다시피 ‘악의 평범성’은 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기록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아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장교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법정에 선 그가 지극히 평범하고 왜소한 한 중년 남성이라는 데 충격을 받았다. 악은 악마의 얼굴이 아니라 평범한 모습으로 온다는 것이 ‘악의 평범성’의 표층적 함의라면, 그 심층은 보다 복잡하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의 실행에 그 어떤 고민이나 반성, 죄의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악’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던 것이다. 나치 친위대 고위 장교라는 직책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그저 열심히 수행했을 뿐이었다.

이산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때, 일상의 매너리즘과 소수적·개인적 평화에 젖어 타자와 외부세계에 가해지는 폭력들에 무감각해질 때, 분노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절규하지 않고, 울지 않을 때, 타인의 비극마저도 정치적 성향이나 계층 이익 실현을 위해 이용할 때 악마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우리 안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예컨대 “약자를 추방시키는 국민청원에 수십만 명이 달려들 때”(‘지난번처럼’), “모두 장밋빛 꿈의 복선을 적당히 깔며 정서적 타협을 할 때”(‘멀리 있는 빛’),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새로운 유배지’)될 때 우리는 모두 아이히만이 된다. 이산하는 5.18과 세월호 희생자들을 조롱하는 인터넷 게시물에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악의 평범성 1’)이라는 것을, 그게 곧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해,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악의 평범성 2’)임을 인식시키기 위해 이 세계에 반복되어져 온 무수한 ‘악’을 고통스런 언어로 재현하고, 민족과 국가, 세계라는 거시 역사가 개인이라는 미시 역사에 가한 폭력들을 통시하면서 인간의 본성과 악의 본질을 탐구한다.

이러한 시적 작업에서는 필연적으로 폭력의 피해자들을 대상화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시인이 ‘먼지의 무게’라는 시에서 “네팔의 한 화장터”의 끔찍한 풍경, “여기저기 불길 속으로 머리들이 터졌고/ 사방으로 흩어진 뇌수를 개들이 핥아먹”는 “가난한 집의 시신들”을 묘사한 것은 ‘가난’이라는 구조적 폭력이 인간의 존엄을 얼마나 참혹히 훼손하는지 증언하기 위함이며, 풍족한 환경 속에 살면서 “시를 짓듯 죄를 짓고/ 죄를 짓듯 시를 지”은 ‘도시문명인’으로서의 자기존재를 반성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이 세계의 불편한 진실을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현실에 비추어 ‘나’를 성찰하게 하는 과정에서 타자의 대상화와 감정이입은 불가피한 법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밤마다 바이올린 선율이 수용소에 울려퍼졌다/ 죄수들은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위안했다./ 어느날/ 죄수들은 모두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인에게는 연주가 금지된 베토벤의 곡이었다./ 모두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들었다./ 달빛처럼 은은하게 흐르던 선율이 갑자기 멈췄다./ 다음날 아침 굴뚝 옆의 교수대에/ 어린 소년과 바이올린이 매달려 있었다.”(‘마지막 연주’)와 같은 시에서도 교수대에 매달려 죽은 어린 소년의 이미지는 독자에게 전쟁의 참상을, 동일성이라는 원리로 타자를 배격하는 순혈주의의 폭력성을 생생하게 감각시킨다.

미학적, 정치적 욕망보다 인간을 향한 연민, 타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으로 쓰인 이러한 시를 ‘선한 대상화’의 시라고 부르고 싶다.

이산하의 시집을 읽으며 두 가지 생각을 해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고, ‘마이클 잭슨을 닮은 여인’ 같은 불온한 ‘저질 대상화’ 또한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고.

2030, 우리가 만난 세상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