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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익숙함과 새로움의 경계에서

레트로 열풍이 한창이다. ‘김희선 곱창밴드’로 시대를 풍미했던 헤어 스크런치가 다시 유행하고 배꼽티와 통 넓은 바지가 옷가게 여기저기에 걸려있다. 추억의 경양식 돈가스를 전면에 내세운 식당은 인테리어며 식기며 심지어 콜라병조차 이전에 생산되었던 모양을 고수한다. 음악은 또 어떤가. 최근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혼성그룹 ‘싹쓰리’로 활동하고 있는 이효리, 유재석, 비는 90년대 느낌이 물씬 나는 청량한 노래를 발표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비트를 듣고 있노라면 코끝이 찡해진다. 눈을 감으면 새하얀 백사장과 파도가 일렁이는 어느 여름 바닷가가 펼쳐지는 듯하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든다. 나는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 거지? 사실 미디어에서 주입하는 추억은 내 추억이 아니다. 어쩌면 나는 그리움마저 답습해버린 세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나의 추억에는 멋이 없다. 초등학생일 때부터 휴대전화를 썼고 방과 후엔 컴퓨터 학원에 다녔으며 만화영화로 ‘스폰지밥’과 ‘파워 퍼프 걸’을 즐겨봤다. 이문세의 ‘붉은 노을’보다 빅뱅의 ‘붉은 노을’이, 산울림의 ‘너의 의미’보다 아이유의 노래가 익숙하다. 종로의 LP바에서 “아, 심신 최고였지”하는 선배의 넋두리를 들으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미안해요. 난 이 노래 몰라요. 나 때는 동방신기가 최고였다고요.11학번의 문학도로 나는 꽤나 갈팡질팡한 대학 시절을 보냈다. 대학생이라는 자아와 문학도라는 자아가 만나 이상하리만치 비대한 자아가 탄생했는데, 그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 하는 사람’의 흉내를 냈다. 옆구리에 보들레르 시집을 끼고 미간을 살짝 찌푸려 고뇌에 빠진 표정을 짓는 건 기본이었다. 윤동주와 기형도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통기타에 김광석의 노래를 흥얼거리던 남학생들도 있었다. 우리 학교에는 학생운동 시절부터 전통으로 내려오는 ‘문선’이란 것이 있었다. ‘바위처럼’이나 ‘가자, 노동해방’과 같은 노동요에 맞춰 정해진 율동을 하는 행위였다. 학교 축제가 되면 무대에 올라 사회에 저항하는 몸짓을 선보이는 것이 관습이었다. 나는 무려 문선장을 맡아 이마에 빨간 띠를 두르고 “마침내! 노동 해방!”을 부르짖었다. 문선을 가르쳐주던 선배들은 말했다. “질문은 허용하지 않는다. 당연히 해야만 한다.” 나 역시 후배들에게 그렇게 일렀다. “너희들은 이 명맥을 꼭 이어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뭔 진 몰라도) 아주 큰 일이 날 것이다.”실제로 우리는 이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했다. 수업이 끝나면 강제로 남아 빈 강의실에 모여 밤늦게까지 율동을 익혔으며 완벽한 ‘칼군무’를 위해 주말에도 학교에 나왔다. 시큼한 땀 냄새를 풀풀 풍기며 ‘바위처럼’을 오백 번도 넘게 들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의 율동을 열심히 연습하던 친구가 운동화를 벗어 자신의 양말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아이돌그룹 샤이니의 멤버인 태민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은강아, 사실 나 샤월(샤이니 월드)이야. 태민이 최애야.” 그랬다. 그녀는 유재하도 김광석도 아닌 샤이니의 팬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내 모닝콜도 ‘누난 너무 예뻐’야.”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노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지? 무엇을 위하여? 어쩌면 과거의 선배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나, 너희 아직도 이거 해?나는 왜 “노동 해방”을 외치면서 “문선 해방”은 외치지 못했는가. 그야말로 구시대적 행위를 대학 시절 내내 고수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그것이 멋있어 보였다. 자신을 내던져서 정치적 열망을 부르짖는 행위는 내가 생각했던 진짜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문선을 연습하는 동안 나는 체제에 저항하며 대단한 일을 행한다는 자기애에 빠질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는 유튜브 동영상 박제라는 끔찍한 벌을 받게 되었지만.돌이켜보면 그랬다. 가끔은 이전 세대를 지나왔던 이들을 질투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시청하며 내 것이 아닌 향수에 잠기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쟁취라는 내러티브를 살아보고 싶었다. “겪어보지도 못한 네가 뭘 아느냐”며 배제 당하는 일은 억울하지 않은가.뉴트로의 탄생엔 이런 맥락도 있을 것이다. 뉴트로란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과거의 것을 새롭게 향유하는 현상을 말한다. 레트로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며 향수를 느끼는 것이라면 뉴트로는 과거의 모습에서 색다름과 신선함을 느낀다.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콘텐츠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현재의 시선을 통해 전혀 색다른 종류의 질감을 가지게 된다. 미지의 문화를 직접 발굴해낸다는 일종의 고고학적 감수성과도 궤를 함께하게 되는데, 나는 이 강렬한 경험에 공감한다.나는 첫 번째 장편소설의 주인공을 50대 여성으로 설정했다. 1980년대를 청년 세대로 살아온 그녀를 표현해내는 것은 꽤 어려운 작업이었다. 누군가에겐 당연하게 존재했던 시간이 내겐 불가해한 우주를 탐사하는 것과 같았다. 집필을 하며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은 부모님이다. 나는 그들의 젊은 시절을 생생하게 전해 들었다. 정치적 열망이 가득했던 그때를. 사랑과 낭만이 흐르던 어느 밤을. 동시에 부모님 역시 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내가 생각하는 시스템의 문제와 나를 억압하는 시선에 관하여. 우리는 한곳에 모여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각자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의 삶은 더 이상 상상의 영역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시야를 공유하면 확장된 세계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지금보다 더 큰 세계를 알게 되는 일. 다양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는 일. 그것은 단순한 답습도 강요도 아니다. 함께 공존하며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가치다.어쩌면 미래의 아이들은 지금의 일상을 신기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할머니 세대에는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다녔다면서요? 분리수거도 운전도 직접 했다면서요? 완전 멋지다. 그렇게 말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으이구 무지몽매한 어린 것들”하고 혀를 쯧쯧 차는 할머니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그때의 나는 샤이니의 노래가 얼마나 좋았는가에 관한 연설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즐거워할 것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는 말한다.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 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래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런 거니까.”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추억은 아름답다. 우리는 거꾸로 된 거름망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일상을 집어넣으면 무겁고 커다란 절망이 가장 먼저 빠져나가고 아픔이 점점 퇴색되어 고통은 지워지고 가볍고 빛나는 것들만 남게 된다. 그것을 아름다움의 형태로 재구성하여 추억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어쩌면 그리움은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생산품일지도 모른다.나의 여름은 현재진행형이다. 바지런히 살아가며 미래의 추억거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조악하게만 느껴지는 현실도 언젠가는 역사가 될 테다. 얼마 전, 엄마와 함께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이효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는 그녀의 타투가 조금 무섭다고 했고 나는 너무나 간지난다고 했다. 엄마는 그녀가 핑클로 활동했을 때를 추억했고 나는 효리네 민박에 출연했던 모습에 대해 말했다.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가며 자기 소신을 지키는 태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멋있는 사람이야.” 우리는 입을 모아 말했다. 라디오에서 싹쓰리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효리가 40대라니,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 것 같다며 엄마는 작게 웃었다. 가사를 흥얼거리며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들이 있지. 그중 하나는 과거의 시간을 지나온 이들을 향한 존경의 마음일 거라고.

2020-08-11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른바 ‘2030세대’는 기성세대와는 전혀 다른 시각과 촉수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본다. 고정된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경제·정치·문화적 현상을 해석하고 있는 20~30대 4명이 ‘21세기 오늘의 문제’를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고전적 매체인 종이신문에 젊은 감각을 더해줄 이병철(시인), 문은강(소설가), 강백수(뮤지션), 윤여진(시인)이 이어갈 새로운 연재에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린다.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다. 나 스스로에게 묻고, 만나는 이들에게 질문하고, 그러다보면 갑론을박 토론이 되는데, 나는 여전히 낙관주의자여서 코로나 이전의 일상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내 주변엔 비관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더디기만 한 백신 개발 현황이라든가 바이러스의 변이 가능성 등 객관적 사실을 논거로 내 막연한 희망을 무참히 짓밟으면 “그럼 계속 이렇게 살자는 거야?” 역정을 내며 자리를 뜨곤 한다.주제 사라마구가 ‘눈먼 자들의 도시’와 ‘죽음의 중지’에서 그려낸 ‘기능 마비 사회’를 우리는 현실에서 체험하는 중이다. 최초 확진자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나는 동안 전염병은 종식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우리 삶은 너무나도 많이 달라졌다. 소설보다 현실이 더 소설 같다. 기업, 공장, 상점 등의 생산과 소비가 멈추면서 경제가 침체되었다. 국가 간 입출국이 막히면서 무역, 여행, 문화교류가 중단되었다. 국가고시들은 연기되거나 취소되고, 어렵게 개학한 학교들은 다시 문을 닫고 있다. 종교시설은 집단감염의 온상이 되었고, 공연 및 전시, 스포츠도 집단감염 우려로 취소되거나 관객 입장이 제한되었다. 마스크 착용이 필수 에티켓이 되자 이제는 마스크 쓴 사람들이 안 쓴 사람들을 혐오하고, 안 쓴 사람이 착용을 요청하는 이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배출할 창구들이 막히면서 분노와 우울 같은 감정들이 점점 압력을 견디지 못해, 여기저기서 폭력적인 방식으로 터져 나올 게 염려되는 요즘이다.보편적 삶의 양상들이 달라진 만큼 개인의 내밀한 일상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나는 ‘국경 없는 세계’를 지향하며 한 해에 한 두 번씩은 꼭 외국엘 가곤 했는데, 마음껏 여행할 수 있던 시절이 몹시 그립다. 여행이 사라진 세상은 너무 뻔하고 지루하다. 이 권태를 견디기 위해 인디밴드의 공연장이나 클래식 연주회에 가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을지로 만선호프에서 생맥주를 마시고 노래방에 가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던 날들은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다. 헬스클럽에서 마스크 쓴 채 운동하느라 숨이 턱턱 막힌다. 외출하는 길에 마스크를 두고 온 게 생각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일쑤다. 컨디션이 조금만 안 좋아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까봐 노심초사한다. 지난해 한 매체에 경북 바닷길 기행문 연재한 것을 올해 책으로 낼 계획이었는데,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직격탄을 맞은 지역에 관한 여행서적이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해 결국 무산되는 일도 있었다.가장 안타까운 것은 요양병원 면회가 금지되면서 할머니를 뵙지 못하는 슬픔이다. 고관절 골절 수술 후 침상에 누워만 계신지 4년째다. 앞을 못 보는 데다 흡인성 폐렴을 앓은 후엔 콧줄로 식사를 하기에 오직 청각이 세상을 감지할 유일한 감각이지만, 그마저도 가족들이 면회를 가 보청기를 끼워드려야만 가능하다. 며칠 전 괴로운 낮잠 끝에 “병철이!” 내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며 꿈에서 깼다. 할머니 귀에 대고 “할머니, 나 ㅂ, 벼, 병” 말하려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힘껏 쥐어짜 겨우 외쳤다. 그런 잠꼬대는 말이 아니라 울음에 가깝다. 요양병원에 부모를 모신 이들 누구나 그런 속울음을 우는 중이다.요즘 몇 분의 공연기획자, 축제기획자, 무대감독, 연극연출가들과 함께 ‘평화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작은 움직임’이라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시각예술, 다원예술, 전시, 축제, 음악, 무용, 문학 등 각각 예술 분야에서 ‘평화’에 대해 고민해보는 협업이다. 평화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특히 코로나 시대에 어떻게 위협 받고 있는지, 평화를 회복하고 널리 함께 나눌 방법이 무엇인지 탐색하고 연구하는 중이다. 홀로 머무는 공간에서 쓴 글을 온라인으로 전송하면 그만인 문학과 달리 공연과 전시, 특히 축제는 사람과 사람의 접촉이 필수적이다. 관객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비무장지대에서 평화를 노래하는 음악 축제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의 김미소 총감독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국내 25개 음악 축제 중 17개가 무기한 연기되거나 취소 또는 아예 개최되지 않았다. ‘피스트레인’ 역시 취소되었다. 이틀간의 축제를 준비하는 데 1년 가까운 시간과 상당한 제반비용, 1만 명에 달하는 인력이 소요된다고 하니 스태프와 뮤지션들, 축제를 기다려 온 관객들의 상실감이 클 것이다. 물론 안 하는 게 맞다. 코로나 극복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서로 이질적 타자인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자유, 평화, 인권, 소수자의 더 나은 삶, 정치적 올바름을 한 목소리로 외치고, 함께 울고 웃으며 마음의 온도를 나누는 마당이 사라지는 것은, 이미 코로나에 잠식된 우리 일상은 물론 이따금 일상 밖에서 하루쯤 선물처럼 주어지던 평화마저 빼앗기는 일이다. 우리는 다시 모일 수 있을까?사실 나는 코로나 시대를 양가적 감정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이 글 내내 코로나를 원망하며 투정했지만, 나쁜 것만도 아니다. 대학 수업이 비대면 온라인 강의로 진행되면서 강의실이라는 제한적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오프라인에서는 활용할 수 없던 영상, 소리, 이미지, 자막 등을 통해 보다 알찬 수업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강사 생활 5년 만에 강의평가 최고점을 받았다. 강의평가 결과를 확인한 순간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228.56이라는 꿈의 점수를 받고 놀라던 김연아 풍으로 활짝 웃었다. 이런 얘기는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또 보편적이기도 하다. 오프라인 수업이라는 재현 불가능한 원본이 온라인을 통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무한히 반복되면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거나 다른 공부를 함께 하거나 기숙사를 나와 고향집에서 수업을 듣는 등 학생들에게 다양한 삶의 선택권이 생겼다. 100년 넘도록 현장성과 일회성을 무기 삼아온 대학의 강력한 권위가 도전 받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코로나가 가져 온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역설적이게도 사람의 차단이다. 앞에서 한 말을 뒤집는 것은 아니다. 축제에 가는 것은 개인의 자발적 의지이지만 회식이나 회의에는 강제성이 있다. 어쩌면 사회적 격리야말로 코로나 시대의 축복인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회식과 모임이 사라지고 개인이 자기 시간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공공장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안전거리’가 생겼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집단 안에 개인을 편입시키는 폭력적 스킨십이 얼마나 많았는지 새삼 생각한다. 해병대 체험이나 단체 래프팅 따위 ‘애사심과 단결력 고취’를 위한 전체주의적 행사는 물론 ‘술잔 돌리기’ 같은 비위생적 회식문화는 진작 구시대 유물이 되었어야 했다.너무 많던 경조사들이 듬성듬성해진 것도 반가운 일이다. 황금 주말에 교통체증을 견디며 예식장에 가 축의금 내고 지루한 주례사가 언제 끝나나 하품이나 하다가 뷔페 음식 두어 접시 먹고 오는 결혼식만큼 한심한 의식이 또 있을까? 있다. 돌잔치가 그렇다. 결혼도 아이 돌도 가족들끼리 모여 기념하면 그만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꽉 조이는 색동옷 입고, 억지로 웃어 사진 찍고, 저급한 유머나 던지던 행사 MC로부터 판사봉 잡아라, 청진기 잡아라 강요받는 건 아동학대라고 생각한다. 결혼도 못하고 애인도 없는 나로서는 결혼식보다 짜증나는 게 돌잔치 청첩이다. 이참에 선언한다. 이제 안 간다!이병철 시인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간절히 돌아가고 싶다. 여행하고, 공연장에 가고, 전시를 관람하고, 축제에서 춤추던 때로 가고 싶다. 온라인 수업이 아무리 강의평가 점수를 잘 받아도 현장에서 학생들과 묻고 답하고 토론하고 싶다. 요양병원에 가 할머니 귀에 보청기를 끼우고 ‘도라지 타령’ 들려드리고 싶다. 노래방에 가고 찜질방에도 가고 싶다. 북콘서트와 낭독회에서 독자들과 만나고도 싶다. 그러면서 또 간절히 돌아가기 싫다. 회식과 회의와 온갖 쓸 데 없는 모임과 경조사와 오지랖과 훈수와 원치 않는 스킨십이 있던 시절로는 가고 싶지 않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거리두기’이다. 코로나가 종식되더라도 우리 삶에는 개인과 개인 사이 건강한 간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계속 필요하다. 육체의 질병보다 마음의 감염이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2020-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