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을 해본다. 사실 나는 외계의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는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닐까.
지구라는 행성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이 게임의 목적은 캐릭터가 얼마나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생을 마감했느냐에 있다. 게임의 유저는 캐릭터의 행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경험치를 올린다. 언어를 가르치고, 학교에 보내고, 그러다 보면 직업이 생기고, 소중한 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문은강이라는 캐릭터는 조금씩 성장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것이 행복은 아닐까, 어렴풋하게 알 때가 되면 팝업창이 뜬다. ‘이쯤에서 게임을 종료하겠습니까?’ 유저가 ‘YES‘ 버튼을 누르면 나의 존재는 소멸하는 것이다.
이런 실없는 상상을 지속할 수는 없다. 현실의 나는 억지로 침대 밖을 빠져나와 세수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가끔은 너무 글이 쓰기 싫어서 엉엉 울기도 한다. 공과금과 보험료는 무섭도록 정확한 날짜에 통장에서 빠져나가고 날씨가 흐린 날에는 몸 구석구석이 쑤신다. 너무나 지쳐버린 어느 날에는 미지의 존재를 향해 “나 너무 힘들어. 어서 빨리 이 게임을 종료해줘!” 하고 외치고 싶다.
당연하게도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다. 대체 나는 왜 살아가는가.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수 세기를 걸쳐 철학자들이 골몰했던 이 주제는 2021년에도 유효하다.
나는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미래의 꿈에 관해 묻곤 한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대답이 주를 이룬다. 돈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의 좌표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나의 바보 같은 질문에 아이들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친다. “노력해야죠.”
‘노오력이 부족하다’는 인터넷 밈이 유행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개개인의 노력을 강조한다. 밤을 새워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꼬드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존재가 불평등의 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노오력’으로 사회적 성공을 이룬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노오력’으로 만들어낸 부와 명성을 그들의 자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세습하고 있다. 그 모습은 희망찬 미래만을 바라보고 달려가던 청년들을 패배주의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최근 ‘롤린’이라는 노래로 4년 만의 역주행에 성공한 걸그룹 ‘브레이브걸스’를 보면서 나는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그들의 영상이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면서 무명이던 이 걸그룹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조명됐다.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노력하는 사람은 결국 빛을 본다’는 은근한 소망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노력=성공’이라는 완벽한 공식은 가능할까. 세상의 모든 일이 노력한 만큼의 정확한 보상이 돌아온다는 장담은 할 수 없다. ‘나도 열심히 노력하는데 왜 빛을 보지 못할까’라는 질문은 충분히 유의미하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마라톤을 뛸 때 단 세 가지의 목표를 상정한다. 골인하는 것, 걷지 않는 것, 그리고 레이스를 즐기는 것. 그는 스스로가 정한 목표를 향해 충족감을 가지고 달려간다. 자신의 한계를 알면서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오래 능력과 활력을 유지하는 모습에 자기만족을 얻는다.
우리는 오늘도 하루라는 트랙을 달린다. 다른 사람보다 멀리 나아가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적어도 걷진 않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달려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으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어느덧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불어오는 봄바람을 온몸으로 느끼자.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