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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a! 클라라 주미 강!

등록일 2021-06-14 18:57 게재일 2021-06-15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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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콘서트홀에 마련됐던 클라라 주미 강 포토존.

클라라 주미 강의 바이올린으로 5월을 닫고 6월을 열었다. 롯데콘서트홀과 경기아트센터에서 연이틀 공연을 보고 황홀했다. 이번 무대에서 그녀는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전곡을 연주했다.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전곡은 연주시간만 140분에 달한다. 극심한 난이도와 체력 부담, 바이올린 한 대만으로 무대를 채워야 하는 연주자의 심리적 압박까지, 바이올리니스트에겐 최고의 도전이자 거장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과정이다. 마라톤이나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비견되곤 한다. 나는 주미 강의 연주에서 종교적 광휘를 느꼈는데, 봉쇄수도원에서 고행하는 수도자가 보이기도 하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필사하는 새벽 신도가 보이기도 하고, “얇은 사 하이얀 고깔 고이 접어 나빌레라”의 여승이 보이기도 했다.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주미 강이 등장할 때, 1년 반 동안 잘려나간 삶의 절단면이 복구되는 걸 느꼈다. 코로나 이전, 객석에서 주미 강의 연주를 감상하는 일은 일상의 특별한 행복이었는데, 그게 중단되자 낭만도 몽상도 시들어 나는 가뭄이고 폐허였다. 그녀가 다시 1708년산 ‘엑스 스트라우스’를 들고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났다. 그 눈물을 봄비 삼아 오뉴월 초록이 마음으로 번질 때, g minor 코드의 고혹적인 보잉과 함께 주미 강의 바흐가 시작됐다.

주미 강은 바흐가 꿈꾼 오직 바이올린만의 광활 우주를 이상적으로 재현해냈다. 그녀의 아우라는 소리가 빠져나갈 구멍 없이, 관객의 집중이 새나갈 틈 없이 완벽한 밀도를 이뤘다. 바이올린으로 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부터 큰 소리까지, 제일 두꺼운 소리부터 가느다란 소리까지, 짧은 소리부터 긴 소리, 어두운 소리부터 환한 소리, 속주부터 비브라토까지 자유롭게 오갔다. 첼로, 콘트라베이스, 피아노, 바이올린을 동시에 연주하는 것만 같았다.

프랑크 소나타나 브루흐의 스코티시 판타지 등 장조 곡을 연주하는 모습이 내겐 익숙한데, 단조 위주인 바흐 무반주의 짙고 무거운 격랑 속에서 주미 강은 ‘밤의 여왕’이었다. 그녀의 연주에선 35년의 한 생애 전체가, 지나온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이, 삶과 죽음이, 바흐의 300년과 엑스 스트라우스의 300년이 휘몰아쳤다. 밤바다에서 죽고 태어나는 파도의 하얀 뼈와 사막의 지평선으로 자맥질하는 별들과 황금처럼 빛나는 무거운 안개들을 보았다. 가장 캄캄한 밤부터 환한 아침까지, 깊은 물속의 소리부터 구름 위 하늘의 소리까지, 작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떨림부터 숲 전체가 일어서서 걸어오는 지진까지를 들으며 나는 말러 2번 ‘부활’에서 느끼던 것과 비슷한 장중함과 숭고미에 두 손을 모았다.

경기아트센터 1부에선 에어컨 기계음에 여린 소리와 잔향이 먹혔는데, 소매를 걷어붙인 주미 강의 바이올린은 공연장을 금세 장악했다. 공간도 시간도 무화되어 여기가 서울인지 수원인지 상관없었다. 에어컨 소리도 기침소리도 핸드폰 소리도 다 집어삼켜버렸다. 오직 바이올린만 있었다. 바이올린을 자유롭게 하는 주미 강만 있었다. 그녀는 3시간 내내 행복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보다 행복한 바이올리니스트이길 늘 바란다. 바흐의 음악은 매우 엄격하고, 수많은 규칙들이 존재한다고 들었다. 주미 강은 오히려 엄격함 속에서 자유로움을, 규칙들 가운데서 균형과 조화를, 교리에 충실함으로써 신에 닿는 날개를 얻은 듯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연주의 하이라이트인 파르티타 2번 d단조 5악장 ‘샤콘느’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는 그녀가 연주자로서 새로운 한 차원을 열었음을,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회색의 간달프가 죽음ㅡ부활 후 백색의 마법사로 거듭난 것처럼 젊은 마스터에서 거장으로 도약했음을 관객들에게 선언했다. 롯데콘서트홀 1층 C구역 15열쯤에서 정경화 선생이 “Brava!”를 외치며 기립박수를 친 순간도, 박수에 다소 인색하던 경기아트센터 객석이 무려 세 번이나 커튼콜을 요청한 순간도 다 샤콘느의 비장한 마지막 보잉이 멈춘 그때였다.

선덕여왕은 잠든 지귀에게 다가가 황금팔찌를 그의 가슴 위에 올려두었다. 잠에서 깬 지귀는 금팔찌를 품에 안고 기뻤다. 그런데 그 기쁨이 불꽃으로 타더니 급기야 온몸을 활활 사르는 불덩어리가 되었다. 주미 강의 샤콘느는 여왕의 팔찌처럼 나를 사로잡아, 나는 무반주 바이올린 선율에 갇힌 2021년 여름을 무한히 반복해서 살지도 모르겠다. 타는 줄도 모르고. 아니 타는 걸 기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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