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시간강사입니다 배민 합니다’를 낸 지 1년이 됐다. 책과 관련한 여러 일들이 있었다.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고, 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크고 작은 서점들에서 낭독회를 했다. 책은 우수출판콘텐츠, 문학나눔 도서, 오디오북 지원 사업에 잇따라 선정됐다.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다.제목 그대로 대학교 시간강사가 배달 라이더로 ‘투잡’ 하는 얘기다. 자기연민이나 과도한 페이소스 대신 유쾌함과 활달함, 성실한 노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군불 냄새 같은 걸 담고 싶었다. 다행히 독자들이 그걸 읽어주셨다. 감동적이라고, 위로 받았다고,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됐다고 말해주는 분들 덕분에 힘을 얻었다.“이 일은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책에 썼다. 생활에 위기가 닥친 2021년, 글을 더 쓰거나 강의를 더 할 수도 있었지만 그땐 몸으로 하는 정직한 노동이 필요했다. 인생에 그런 시기가 있다. 복잡함보다 단순함으로 기울어야 하는 때, 머리 쓰기보다 몸을 써야 하는 때, 아무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 때. 그때 내가 선택한 게 배달 라이더였다.나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그 일로 나는 나를 지켰다. 문학도, 대학 강의도, 낚시와 여행, 음악회 관람 같은 취미도, 당당한 자존감도 다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가 몰랐던 세상살이를 배우고, 길 위에서가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보람도 맛봤다. 큰돈은 아니지만 경제적 소득은 물론이고, 소득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들을 보너스로 챙겼다. 그렇게 캄캄한 한 시절을 통과할 수 있었다.사람들이 묻는다. “요즘도 배달하세요?”라고. 안 한다. 책을 내고 나서 조금씩 빈도가 줄더니 이제는 완전히 그만 뒀다. 스쿠터는 장보러 갈 때나 탄다. 글 쓰는 지면이 더 생기고, 강의 시수가 늘고, 도서관과 서점에서 강연하는 등 배달을 대체할 돈벌이가 마련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배달 라이더의 삶을 충분히 살아냈고, 책으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시절을 단정하게 정리한 까닭이다. ‘나’를 지켜 다시 ‘나’로 돌아온 것이다.사람들은 나를 ‘배달하는 시인’으로 부른다. ‘배달’에 찍힌 방점을 ‘시인’으로 옮겨야 한다.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만 배달이 아니라 시여야 한다. 나는 시인이다. 배달을 하면 배달하는 시인이고, 운동을 하면 운동하는 시인이다. 때로는 요리하는 시인, 노래하는 시인이다. 나중엔 밸리댄스 추는 시인, 낙타 타고 사막을 건너는 시인, 화성 탐사하는 시인일 수도 있다. 무얼 하느냐가 아니라 무얼 쓰느냐가 중요한 게 나란 사람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어느 한 가지로 규정되고 싶지 않다. 최대한 많은 삶을 살고 싶다. 내게 세상은 다채로운 경험들로 가득한 무한우주다. 얼마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배달하는 시인’ 얘기를 들려달라고 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제는 삶의 다음 혹은 다른 단계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배달 라이더는 누구나 하는 부업으로 유행하지만 보편적 인식에선 아직도 혀를 차며 연민하는 데가 있다. 가난 때문에 문학을 내려두고 육체노동을 하는 시인이라는 서사는 책을 쓰면서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전직이 아닌 현직 시인이고, 얼마나 벌어야 가난이 아닌지는 모르지만, 가난하지도 않다.중고 스쿠터를 장만해서 배달통을 달아야 했던 2년 전에 비해 지금 형편은 많이 낫다. 그럼에도 힘든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힘든 내색은 하지 않는다. 배달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그 일을 계속 하면 사람들은 내 시보다 생활을, 생활을 위한 노동을, 노동현장에서의 땀을 먼저 읽기 때문이다. 시에서도 구체적 현실의 핍진함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시는 주로 현실과 동떨어진 장면을 그린다. 현실 너머에서 현실을 꿈꾸듯 보는 사람의 마음을 그린다. 내 시는 세계보다 아름답다.여름방학 동안 꽤 여러 편의 시를 썼다. 학술논문도 한 편 썼다. 도서관과 책방에서 대중 강연도 했다. 그러면서 잘 먹고 잘 놀았다. 전세사기 당한 것도 현명하게 대처해 잘 해결되는 중이고, 차를 바꿨고, 2학기에는 대학교 한 곳에 더 강의를 나간다. 나는 나를 지켰다. 배달 스쿠터 덕분에. 고맙다! 배달했던 시인의 뜨거운 작별 인사다.
2023-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