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어린 날의 글쓰기

최근 SNS에서 학교생활 기록부를 인증하는 열풍이 불었다. 그간 생활기록부 발급 절차가 조금 복잡했던 것에 비해, 최근부터는 정부 24 홈페이지 또는 앱을 통해 간단한 인증 절차만으로 발급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SNS에서 주로 자신의 생활 기록부를 캡쳐해서 업로드 하는 부분은 ‘행동 특성 및 종합 의견’항목이다. 학창시절 ‘생활 태도’와 ‘장점’, ‘성장 가능성’등 담임선생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개인적인 평가를 적어 놓는 문항인데, 이 부분을 통해 자신이 학창시절 어떤 사람으로 비춰졌는지 대략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다.성적은 물론 수상내역, 봉사 활동, 생활 태도 등 학교생활의 전반에 대해 디테일하게 알 수 있어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재미도 있을뿐더러 SNS에선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걸 인증하고 공유하기 위해 더욱 주목을 받았던 듯싶다. 그도 그럴게 생활기록부 발급 유행이 시작되었던 지난 9월엔 이용자 증가로 정부 24 홈페이지가 마비되기도 했었고, 작년 7~9월 발급 건수 대비 올해 발급 건수는 3배 이상 달했을 정도라 한다.하지만 내겐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을 다시 꺼내어 본다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소멸을 향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들을 보면 어쩐지 낯선 객지에서 홀로 서 있는 듯한 쓸쓸한 기분이 든다. 내 과거의 기억이 아닌, 타인의 과거를 어렴풋이 훔쳐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하지만 과거의 ‘나’는 어쩐지 궁금해지는 법, 점심을 먹으며 휴대폰으로 몇 번 간단한 인증을 했더니 정말 바로 발급받아 볼 수 있었다. 조심스레 열어보니 의외로 나는 학창시절에 공부하라는 선생님의 말을 안 듣는 소심한 말썽꾸러기가 아닌, 이타적이고 논리적이며 감수성이 발달하여 글쓰기에 소질 있는 아이로 비춰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나의 학창시절 모습이라 그런지 조금은 낯설어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나의 학창시절을 잠시 되돌아본다면, 나는 다소 조용했으나 웃음소리가 크고 밝은 친구들을 좋아해서 주변엔 재미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공부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주로 교과서 속에 책을 숨겨 읽었고, 담임선생님이 책을 그만 읽으라고 하면 외려 더 숨어서 책을 읽곤 했다.도서관에 숨어 만났던 책들은 주로 신경숙, 박민규, 이성복, 기형도의 책들이었고 그때 처음 문장 속에서 자유로이 유영하는 법을 배웠다. 마음먹은 대로 무엇이든 쉽게 할 수 없었던 환경에서 글이 주는 자유로움과 날 것으로 드러나는 타인의 세계와 삶의 형태가 얼마나 놀랍던지. 그래서 읽기에 빠져 들었고, 자연스레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도 쓴다는 말이 어색하게 여겨져서 늘 ‘메모 한다’, ‘일기를 쓴다’라고만 글쓰기를 표현하고 정의했다. 쓴다는 것은 어딘가 부끄럽고 멋쩍기도 하고 또, 소중해서 타인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고 해야 할까.읽고 쓰는 것 외엔 흥미도 없고 잘 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 문예창작학과를 택했고, 글을 읽고 쓰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러면서 어린 나는 쓰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참 많았던 듯싶다. 글쓰기로 충만감도 느꼈고, 성취감도 얻었고, 화도 났고, 무력함도 느꼈으니 말이다.꽤 열정적이었던 것에 비해 현재의 나는 어딘가 정말 중요한 중심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과거의 열정을 부정하면 할수록 현실적인 부분에 있어 더 생산적인 역할과 몫을 해내고 있다고 스스로 여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눈은 퀭하고, 자주 화가 나 있으며, 복잡한 사유는 멈추고, 작은 스트레스에도 민감하며, 나쁜 식습관으로 몸은 엉망이다. 어린 날의 나에 비해, 생의 의문과 더불어 따라오는 몇 가지 질문에 점점 더 비겁해지며 미성숙한 사고를 택하기에 따라오는 씁쓸함은 부정할 수 없다.최근 이사를 하며 아직 미처 정리 하지 못한 책들이 쌓여 있다. 이사 오기 전 많은 책들을 처분한 탓에 이제 내가 가진 책들은 100여 권도 안 된다. 멋대로 쌓인 책의 형태를 바라볼 때면 허무함이 느껴져 외면하곤 했으나, 이젠 이 쓸쓸한 부채감이 아주 어린 날부터 쭉 시작되어 왔으며 쉽게 끝나지 않음을 안다. 그렇기에 슬슬 책의 자리를 찾아주려 굳게 닫힌 옷장 문을 열어 본다.

2023-10-03

사랑이라는 서투름

명절이면 아버지 계신 서산에 간다. 동문동 동부시장 가서 장 보고, 미리 해온 음식 데우고, 전 부치고, 저녁에 한 상 차려 먹는다. 갈비찜, 잡채 등에다 설에는 새조개와 굴, 추석에는 꽃게와 대하가 함께 오른다. 거창한 밥상이지만 식사는 30분 안 돼 끝난다. 상 치우고 동생네는 안방에, 엄마는 작은 방에 들어가고, 아버지는 거실에서 종편을 본다. 살가운 대화 같은 건 딱히 없다. 가족애라는 것을 다들 가지고는 있는데, 표현에 서투른 탓이다. 어색하고 민망하다. 사랑은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한지도 모른다.할아버지는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처자식을 버렸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 후 공장 다니며 장애인인 할머니와 삼촌들을 먹여 살렸다. 먹고 살 만해지니까 할아버지가 돌아왔는데, 응어리가 져 평생 용서하지 못했다. 미워하면서도 모시고 살았다. 장남은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내 유년을 돌아보면, 퇴근한 아버지가 거실의 할아버지는 본체만체 안방으로 서둘러 들어가 버리던 냉랭함이 먼저 떠오른다. 아버지는 사랑 받지 못해서 사랑 주는 법을 몰랐다. 무뚝뚝하고 엄했다. 게임기 사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도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 삼켰다.바캉스를 가고 외식을 해도 행위만 있지 그 안에 다정함 같은 건 희미했다. 가장의 의무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마저도 아버지 공장이 부도를 맞고 나서는 추억이 됐다. 지방을 전전하는 아버지를 사춘기 지나 성인이 될 때까지 보기 힘들었다. 그 10년은 참 괴로운 시절이었다. 더 작은 집으로 여러 번 이사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박스를 줍고, 엄마는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다. 어쩌다 아버지가 집에 오면 나는 컴퓨터 게임만 하고, 아버지는 내 등 뒤에서 무슨 말 하고 싶지만 못한 채 가만 서 있곤 했다. 내가 장교 임관훈련을 받던 여름 내내 아버지는 교육대 인터넷에 편지를 썼다. 10년 동안 못한 말들을 거기 열심히 적었다. 말로는 못하는, “아빠는 병철이가 자랑스럽다” 같은 문장들.이런 내력 때문에 나는 남들이 가족 여행을 가고, 동영상 속에서 함께 장난치며 웃고, 각종 기념일을 챙기는 화목함이 신기하고 낯설다. 가족은 다 우리 같은 줄 알았다. 오래전 애인의 아버지가 매년 10월 31일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연주되는 라이브카페에 가족들을 데리고 가 시월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는 걸 보면서 놀랐다.지난 설, 서산 바닷가 가서 비싸고 좋은 음식 먹자고 했다. 해가 갈수록 아들 마음은 조급해진다. 억지로라도 화목한 그림 하나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다들 내 맘 같지 않아서 그냥 동네에서 먹기로 했다. 앞장 선 아버지가 시장 좁은 골목 백반집 문을 열었다. 다 앉기도 전에 아버지는 6천원짜리 백반 여섯 개를 시켰다. 한 자리에 못 앉아 두 테이블로 나눈 것을 내가 주인아주머니께 몽니를 부려 합쳤다. 나물, 파래, 김치, 된장국에 나는 거의 손도 안 댔다. 그 사이 아버지는 밥을 다 드시고 일어났다. 혼자 빨리 걷고 빨리 먹는 아버지한테 짜증이 났다. 눈치 챘는지 아버지는 집에 가 새조개 먹겠느냐면서 5만원 지폐를 내밀었지만, 뿌리쳤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평생 미워했다. 할아버지는 늘 복덕방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평생 부끄러워했다. 할머니는 보청기 없이는 듣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더러 “닭띠니까 곡식을 먹고 살아라” 했다. 유언이었다. “아빠가 할아버지 무덤에 갔대” 귀에 대고 소리치자 할머니는 “죽을 때가 됐나보다” 했다. 아버지는 출포리로 매일 마실을 간다. 보청기를 끼고 부동산에 가 한나절 앉아 있다 온다. 뒤란에서 닭들이 벌레를 쪼고 메주가 푹푹 삭을 동안 평생 미워한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아무것도,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 나는 그러면 안 되는데, 아버지가 돼선 안 되는데….나이 들수록 후회가 많아진다. 동부시장 ‘지곡밥집’에서 짜증 부렸던 일이 속상하다. 이번 추석 또 서산에 간다. 다시 그 밥집에 가 밥 두 공기 먹고 싶다. 아버지는 제철 꽃게를 잔뜩 사는 것으로 아버지 노릇을 하려 할 테고, 나는 무엇으로 아들 노릇을 할까. 가끔 하는 통화도 30초를 안 넘는데, 살가운 말 몇 마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어려운 마음도, 백반 여섯 개를 서둘러 시키는 급한 성미도, 밥 한 끼 먹으러 일 년에 두 번 모이는 수고로움도 다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2023-10-03

어떤 답은 듬뿍듬뿍

최근 나를 골치 아프게 하는 한 가지가 있다. 다름 아닌 작업실에서 돌보는 식물에 관한 것. 이 생명력 넘치는 푸릇푸릇한 존재는 작업실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다. 보고만 있어도 숲에 온 것처럼 충만해지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매일 부지런해진다. 작업실에 들르지 않는 날이면 화분들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정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무엇보다 역동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인초는 하룻밤에 거대한 잎을 피워 내고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잎이 다음 날이면 누렇게 변해 우수수 떨어지기도 한다. 너희들, 정말 묘하게 예민하고 조용히 강인하구나. 여린 잎사귀를 매만지면서 생각한다. 식물 키우기는 정말이지 어렵다고.작업실에는 꽤 많은 식물이 있다. 키가 나를 훌쩍 넘어서는 여인초부터 고무나무, 홍콩야자와 크로톤, 고려담쟁이, 선인장, 다육식물까지. 작업실을 함께 꾸려가는 시인과 의기투합하여 하나씩 들여놓은 것이다. 식물에 대해 잘 알아서 들였다기보다 앞으로 알아가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사실 나는 뭔가를 키우는데 능한 사람은 아니다. 혼자 산 지 십 년이 넘어가지만, 여전히 나 자신을 돌보는 것에도 서투르다. 나의 반려견도 제대로 살피는 건지 알 수 없다. 식물도 내버려두면 알아서 큰다고 생각했다. 생명과 공생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관심과 관찰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 누군가가 나를 본다면 혀를 쯧쯧 찰지도 모른다. 뭔가를 키울 자격이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얼마 전부터 해피트리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에 놓여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자라던 녀석이라 미안한 마음이 너무나 컸다. 나는 해피트리를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햇볕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에 놓아도 보고, 통풍을 위해 창가에 두고, 비 오는 날 밖에 내어놓아도 딱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식물 고수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에 사진을 찍어서 올렸다. ‘해피트리가 갑자기 이렇게 시들시들해졌는데,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였다. ‘과습인 것 같습니다.’아, 그렇다. 식물을 키우는데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물의 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동생의 작업실에서 키우는 율마가 시들시들하다고 했을 때, 나는 ‘비 오는 날 내어 놓아라’는 답을 준 적이 있었다. 나의 식물들도 그렇게 해서 몇 번 살려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조언대로 동생의 율마는 비를 흠뻑 맞았고, 다음 날 완전히 죽어버렸다고 했다. 뿌리까지 모조리 썩었다는 것이었다. 너무 신경 써서 물을 줬던 것이 문제였던 걸까. 해피트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 온 마음을 쏟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녀석은 죽어버리고 말았다.그렇게 한 식물을 보내고, 나는 다른 식물들에 물을 주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흙을 만져서 완전히 마르지 않으면 절대 물을 주지 않았고 분무도 조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크로톤이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번 주 비 오는 날에 밖에 내어놓았던 게 문제였나. 작업실의 공기가 너무 습한 걸까.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돌 하나를 얹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토요일 아침, 작업실 문을 여니 내가 그렇게나 고민했던 크로톤이 잎을 활짝 펴고 살아나 있었다. 함께 작업실을 쓰는 친애하는 시인이 간밤 다녀간 모양이었다. 살펴보니 작업실 모든 식물에 듬뿍듬뿍 물을 준 흔적이 있었다. 식물들은 파릇파릇해졌고 잎사귀는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답은 물이었다. 물을 아끼는 게 아니라 더 줘야 했다. 그간 엉뚱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허무했다. 물을 넘치게 주면 죽는다. 그러나 물을 주는 것을 두려워해도 안 된다. 식물을 키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그것은 비단 식물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나를 지나쳐 간 무수한 관계들을 떠올렸다. 사랑을 아끼고 상대가 메마르지 않을 정도만 관심을 표했던 지난날의 나를 상기했다. 마음을 모두 쏟아 부으면 상대가 떠나갈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로가 시들해진 것을 발견하면 당황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듬뿍듬뿍 물을 주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나는 상대를 떠나보내야만 했다.여전히 나는 식물을 키우는 것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도 잘하지 못한다. 실패할까 봐 쉽게 겁을 먹고 해결 방식이랍시고 엉뚱한 대책을 내어놓는다. 어떤 순간은 일상적이지만 새삼스럽다. 식물로 인해 골치가 아프고 거기에서 뭔가를 배운다. 햇볕과 물과 바람을 듬뿍듬뿍 맞고 나도 식물들도 자라나는 중이다.

2023-09-19

‘나’의 영향력

개강이다. 시간 강사라는 특성상 한 여름을 일 없이 지내다 간만에 강의를 했더니 몸과 마음이 무척 피곤하다. 처음 보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유창한 척 말을 하자면 내가 마치 약장수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첨단 기술이 나날이 눈부시게 발전해가는 세상 속에서도 글쓰기는 여전히 필요한 역량이라고 그러니 수업에 집중해서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말을 하고 있자면, 정말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한다.아마 이 피로감에는 한동안 하지 않았던 강의를 다시 재개하면서 느끼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처음 보는 학생들과 새롭게 한 학기를 시작하려니 느끼는 피로감도 있을 것이고, 이전에 했던 강의 자료를 새로 배정받은 학과에 맞게 다듬고 고치는 과정에서 느끼는 피로감도 있을 것이다. 사실 시간 강사를 하기 전에는 선생이라는 직업이 꽤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을 학생들에 맞춰 설명하는 게 다라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수업이라는 게 얼마나 많은 사전 작업을 요구하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누군가 나에게 선생이라는 직업이 어떠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나는 어떤 대답을 해주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서로 서먹서먹하기만 하고, 별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던 아이가 학기가 끝날 즈음 밝은 얼굴로 인사하며 자신이 노력한 결과물을 보여줄 때면 꽤 큰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학생이 그렇지는 않아서, 간혹 수업에 관심이 없거나 노력에 비해 성취도가 낮은 학생들을 마주할 때면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내가 만약에 조금만 더 재밌게 수업을 했더라면, 혹은 조금만 더 잘 설명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이 아이에게 지금 이 순간의 의미가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혹은, 이 아이의 미래가 조금은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책임감. 혹은 사명감. 아마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느낄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나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는 좋은 선생도 많이 만났지만, 나쁜 선생도 많이 만났던 것 같다. 개중에는 폭력을 가하는 사람도 있었고, 말도 안 되는 욕설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해할 수 없다. 왜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욕을 하고 폭력을 가하고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려 안달이었던 걸까.하지만 그런 사람들보다는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던 게 내 인생에는 더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 참 다행이라고 느낀다. 나에게 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하면 안 되는 일에 대해 알려주고, 귀찮은 질문들에도 꼬박꼬박 웃으며 대답해준 좋은 선생님들. 내가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를 계속 가다듬으려 애쓰는 건 그분들의 영향이 클 것이다. 만약 그때 그 순간 그 사람들이 해준 말과 행동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 또한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그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자꾸만 돌이켜보게 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물론 나는 아직 완벽한 선생님은 아니다. 그냥 조금 친절하고, 조금은 유머러스한 그런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이 적어도 나로 인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은 믿을 수 있고, 때로는 기댈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실 이건 내가 선생이라서,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내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은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그게 지금의 내가 가진 소박한 꿈이 아닐까 싶다.세상엔 나쁜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나쁜 선생도 있고 좋은 선생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이 경험한 소수의 사람들을 전체로 오해하곤 한다. 어떤 직업이든 직업윤리에 충실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닌 사람도 있는 것임에도,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잣대 삼아 타인에 대해 판단하길 즐긴다. 당장 인터넷 뉴스의 댓글만 보더라도,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알까. 자신들의 인식이,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행동을 미치게 될지. 인간은 모두 사회적 동물이기에, 크건 적건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그걸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쯤 선해질 수 있지 않을까. 삭막해진 세상에서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이야기를 적어본다.

2023-09-19

일요일과 토마토 수프

주말 아침, 깨끗이 씻은 복숭아를 잘라 그릇 가장자리에 담는다. 금요일 퇴근길에 사온 그릭 요거트를 수저로 크게 퍼서 가운데에 담고 그 위에 메이플 시럽을 뿌린다. 요즘 다시 식이 조절 중이라 과자를 먹지 않으려 하지만 오늘은 주말이니까, 괜스레 너스레를 떨며 달달한 과자 조각도 듬뿍 올린다.빠른 손놀림으로 그릭 요거트를 만들어 냈다면 미리 끓여 두었던 뜨거운 물로 녹차를 우린다. 투명한 물에 연둣빛 분말이 점차 퍼지는 걸 지켜보며 아침의 부산스러움을 조금 낮추어 본다.식사를 마치면 그간 애써 흐린 눈으로 외면하곤 했던 집안의 상태를 살핀다.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 정돈되지 못한 각종 생활용품들, 한가득 쌓인 설거지, 밀린 빨래들, 비에 젖어 퀘퀘한 냄새를 풍기는 운동화까지 그야말로 무질서와 대혼란의 종결지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잠깐 딴청을 부려보지만 마음 속 깊이 어서 움직여야 한다는 조급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우선 암막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그 후 다 먹은 그릇을 설거지통에 갖다 놓으며 밀린 설거지를 처리하고, 그 다음은 가스레인지와 그 주변부에 베이킹소다와 식초를 섞은 주방 세제를 뿌려 기름때를 불린다. 음식물을 처리하면서 냉장고 안도 비우고, 마찬가지로 만들어둔 세제를 뿌린 후 마른 걸레로 닦아낸다. 주방이 얼추 마무리 되었다면 다음은 바닥을 청소한다. 바닥 다음은 책상 위, 그 다음은 빨래, 그 다음은 각종 쓰레기 정리 등등 7평 남짓한 좁은 원룸이지만 발길 닿는 대로 청소하다보면 두세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꾸준한 속도로 달려 나가는 마라토너처럼 길고 묵묵한 수행을 꾹 참으며 나아가다 보면, 다행히 저 멀리 결승선이 보이기 시작한다,청소가 마무리되어갈 때쯤이면 다시금 배가 고파진다. 이제는 가을을 앞두고 꼭 생각나는 음식인 토마토 수프를 만들 차례다. 냉장고에서 금요일 저녁에 사둔 버섯과 양파, 당근, 브로콜리, 토마토, 소고기를 차례대로 꺼낸다.양파와 토마토를 손에 쥘 때면, 언제나 듬직한 모양새로 안정감 있게 자리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당근과 브로콜리도 차례대로 찬 물에 깨끗이 씻어내며 몸의 열기는 물론, 반복되는 일상 위로 쌓인 무료함도 탈탈 털어낸다.청소는 숨이 가쁘게 정신없이 움직였다면, 칼질하는 시간만큼은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빠른 속도와 효율성만 보고 움직였다간 다치기 쉽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도마를 두드리는 칼질 소리와 함께 주방을 채우다보면 다시금 집 안의 온기가 훈훈히 도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안정된다.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나면 브로콜리의 머리 부분을 30초 정도 데쳐둔 후 작게 손으로 떼어내어 큰 그릇에 손질한 재료를 한 데 담는다. 여기까지 마쳤다면 큼지막한 프라이팬에 동물성 버터를 한조각 올리고, 버터가 녹으면 지방이 적은 부위의 소고기를 굽는다. 어느 정도 고기의 핏기가 가시면 당근, 버섯, 양파, 브로콜리, 그리고 큼지막하게 썰은 토마토 7~8개 정도 차례대로 넣어준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다음은 재료가 잠길 만큼 물을 넣어준 후 월계수 잎, 카레 가루 2스푼 정도 넣어 향과 감칠맛을 더한다. 냄비 뚜껑을 닫고 2~3시간 정도 푹 끓여주면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이맘때 딱 먹기 좋은 토마토 수프가 완성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다른 재료보다 토마토의 양을 훨씬 많이 넣어야 한다는 점이다. 토마토의 갯수를 더 늘려도 되고, 시중에 파는 토마토 퓨레를 4~5 수저 더 넣어 토마토의 맛과 향을 강하게 내면 더욱 좋다.준비한 재료를 썰어 넣어 푹 끓이기만 하면 돼서 그리 복잡한 요리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보며 끓여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많은 주말 오후에 시도해야 하는 요리다. 대량으로 만들어 놓고 소분 후 냉동실에 넣어두면 원하는 때마다 꺼내어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기도 좋고, 무엇보다 소화가 빠르고 속이 편해서 기운 없을 때 먹으면 좋은 음식이기도 하다.아직 대낮의 태양은 뜨겁지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퇴근 후 창문을 열고서 선선한 바람과 함께 토마토 수프를 먹다 보면 여름 내내 끈적하게 쥐고 있던 지난 미련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사소하지만 부지런히 가꾸어 나가는 일상의 습관으로 다시금 보통의 월요일로 나아가 본다.

2023-09-12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때 아닌 사상 논증이 한창이다.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앞 독립군·광복군 영웅 흉상 이전 논쟁이 그 주인공이다. 요지는 이러하다. 흉상의 인물이 현 대한민국의 정신에 맞지 않으며,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전력이 있던 사람도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더불어 국방부와 육사측은 독립운동보다는 창군 이후 군사적 분야에 대해서만 흉상을 비치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입장을 발표하며, 흉상 철거 사유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있다.여기까지만 보아서는 국방부와 육사의 발언은 꽤나 합당해 보인다. 여전히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 정권과 군사적 대립을 이어가는 상황이므로, 공산당 전력이 있는 사람을 육사의 정신을 표상하는 흉상으로 배치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것으로 들리기 때문. 하지만 그 대상이 홍범도 장군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의아한 구석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한다. 홍범도 장군은 심지어 2016년 박근혜 정부 시기 해군 97전대 소속의 손원일급 잠수함에도 명명된 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쟁은 단순히 육사의 흉상 이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잠수함 명칭 개변 및 국군사에서의 홍범도 장군은 흔적 지우기라는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물론 홍범도 장군이 레닌 시기 소련 공산당 인사였음은 의심할 바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보다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당대 세계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홍범도 장군이 북방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1920년대 당시 일본군은 러시아의 백군과 연합해 전선을 펼치고 있었기에, 만주 군벌 및 일본군과 대립하던 홍범도 장군으로서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해 전선을 구성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러시아 공산당은 향후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친 스탈린 시기 공산당과는 사실상 다른 집단이며, 2차대전 당시 연합국에 속해 있었다는 역사가 고려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심지어 일각에서는 이들이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것을 빨갱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 빨치산이라는 단어 자체가 비정규 유격 게릴라 부대를 통칭하는 파르티잔(Partisan)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하자면 아전인수 격의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국방부측은 여기에 덧붙여 홍범도 장군이 사할린 한인 부대가 러시아 인민혁명군에게 제압당한 자유시 참변에 개입하였기에 진성 공산당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사학계에서는 해당 사건에 홍범도 장군이 개입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역사 논쟁으로까지 확산될 전망이다.그럼에도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광복군 인사의 흉상 이전에 찬성하는 ‘제대군인자유노동조합’의 김영교 공동대표는 최근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에서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과 공동 진행한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 육사 공산주의자 흉상 존치 규탄대회’에서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며 그의 무덤을 파묘해 북한으로 보내야 한다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이러한 흉상 이전 찬성 측의 발언과 근거를 확인하고 있자면, 흡사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있었던 대한민국 정통성에 대한 논쟁과 임시 정부를 대한민국의 근간에서 부정하려했던 뉴라이트 계열의 논쟁이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육사와 국방부측에서 이와 같은 독립군·광복군 영웅 흉상의 자리에 백선엽 장군과 맥아더 장군, 밴플리트 장군의 흉상을 설치하려 계획 중이라는 사실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백선엽 장군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육군 소속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자서전에 직접 서술한 친일행위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인물이다. 더불어 맥아더 장군과 밴플리트 장군은 전쟁사와 한국사에 있어 많은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육사의 정통성을 기리는 충무관 흉상으로 제작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소의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우리의 역사에서는, 이 둘을 대체할 정도의 영웅이 없었다는 말인가?많은 부분에서 최근의 논란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있었던 역사 논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이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특정한 인물이나 역사적 단체의 위상을 상향하려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 역사를 부정하고, 없는 역사를 만들면서까지 무엇을 위해 이런 행동을 행하는 것일까. 가뜩이나 힘든 뉴스가 연일 보도되는 가운데, 없는 문제까지 만들어내는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2023-09-05

‘복세편살’이라는 주문

‘복세편살’이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을 때가 있었다. 그 신조어를 접했던 건 바야흐로 십 년 전, 친구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던 순간이었다.그녀는 “은강아, 복세편살하자. 복세편살.”하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고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친구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언뜻 들으면 복(福)을 비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심오한 뜻이 내포된 사자성어 같기도 한 묘한 단어. 대충 좋은 말이겠거니 하고 넘겼는데 나중에야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를 네 글자로 줄여 쓴 것이라는 걸 알았다. 요즘 애들은 별걸 다 줄여서 말하는구나. 애늙은이처럼 혀를 차는 것도 잠시, 그 말이 어찌나 중독성 있던지. 언제부턴가 나도 주문처럼 ‘복세편살’을 외치고 있었다.정말이지 그건 주문 같았다. 마음이 실타래처럼 엉키거나 중심을 잡지 못하고 기우뚱댈 때면 마음속으로 ‘복세편살’을 중얼거렸다. 그것은 정말 주술적 효과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어려운 상황이 단박에 해결되는 건 아니었지만 마음만은 순간적으로 잔잔해지는 것도 경험했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감정에 던진 작은 돌 하나가 생각지도 않은 도움을 주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세상은 복잡하다. 점점 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상상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것들이 자꾸자꾸 생겨난다. 변화의 속도는 따라가기 벅찰 정도다. 대면보다 비대면 방식이 많아지고 1분 내외의 숏폼 영상을 넘기고 있노라면 20분 내외의 유튜브 영상도 길다고 느껴진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소식을 듣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며 노동세계 또한 완벽하게 변화했다.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건 어떠한가. 타인의 마음은 나와 같지 않아서 어떤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선의로 건넨 진심이 난도질 되어 아무렇게나 버려질 때도 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이해하기도 전에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고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다.인간이 질서와 체계를 좋아하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자연법칙을 분석하여 미래를 예측한다. 책상이 뒤죽박죽 상태가 되면 말끔하게 정돈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자신의 의견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질서로 향한다. 이토록 복잡한 세상은 단 한 순간도 내가 원하는 상태로 있어 주지 않는다.스토아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단 하나, 자신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걱정을 멈추는 것이다.” 슈테판 클라인은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복합적인 문제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무시하는 것이 종종 성공의 열쇠가 되어준다. 단순한 사고만이 승산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모든 문제를 작은 걸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머리로는 알고 있다. 불필요한 생각을 멈추고 담백하게 살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그러나 그저 ‘편하게’라는 말로 넘기기에 눈앞의 문제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떤 일이 다가왔을 때 마냥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감히 겪어보지 못한 사건을 경험한 이들도 있다. 걱정을 멈추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 조언은 어떤 면에서 사치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이렇듯 또다시 마음이 복잡해지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복세편살’을 외치던 친구의 얼굴을 떠올린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매사가 불안했고 작은 일에도 쉽게 넘어졌다. 선택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고 누군가 내 진심을 곡해할까 전전긍긍했다. 그때의 나는 친구가 뱉은 그 ‘복세편살’이라는 말이 유치하다고 생각했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말간 얼굴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그 담백하고도 다정한 말은 내게로 향하는 분명한 위로였다.나는 결심한다. 상대의 저의를 파악하는 것보다 상대의 눈동자를 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자. 어려운 상황에도 밝고 쾌활하게 웃는 사람을 그 모습 자체로 사랑하자. 그러한 시선을 가지는 것이야 말로 ‘복잡한 세상을 편하게 사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내일은 편안해지리라고 중얼거리다 보면 생각지 못한 행운이 다가온다고도 믿는다. 알다시피, 세상은 너무나 복잡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니까. 그것이 꼭 불행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의 ‘복잡한 세상’이 ‘복(福) 가득한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2023-09-05

배달했던 시인

산문집 ‘시간강사입니다 배민 합니다’를 낸 지 1년이 됐다. 책과 관련한 여러 일들이 있었다.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고, 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크고 작은 서점들에서 낭독회를 했다. 책은 우수출판콘텐츠, 문학나눔 도서, 오디오북 지원 사업에 잇따라 선정됐다.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다.제목 그대로 대학교 시간강사가 배달 라이더로 ‘투잡’ 하는 얘기다. 자기연민이나 과도한 페이소스 대신 유쾌함과 활달함, 성실한 노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군불 냄새 같은 걸 담고 싶었다. 다행히 독자들이 그걸 읽어주셨다. 감동적이라고, 위로 받았다고,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됐다고 말해주는 분들 덕분에 힘을 얻었다.“이 일은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책에 썼다. 생활에 위기가 닥친 2021년, 글을 더 쓰거나 강의를 더 할 수도 있었지만 그땐 몸으로 하는 정직한 노동이 필요했다. 인생에 그런 시기가 있다. 복잡함보다 단순함으로 기울어야 하는 때, 머리 쓰기보다 몸을 써야 하는 때, 아무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 때. 그때 내가 선택한 게 배달 라이더였다.나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그 일로 나는 나를 지켰다. 문학도, 대학 강의도, 낚시와 여행, 음악회 관람 같은 취미도, 당당한 자존감도 다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가 몰랐던 세상살이를 배우고, 길 위에서가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보람도 맛봤다. 큰돈은 아니지만 경제적 소득은 물론이고, 소득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들을 보너스로 챙겼다. 그렇게 캄캄한 한 시절을 통과할 수 있었다.사람들이 묻는다. “요즘도 배달하세요?”라고. 안 한다. 책을 내고 나서 조금씩 빈도가 줄더니 이제는 완전히 그만 뒀다. 스쿠터는 장보러 갈 때나 탄다. 글 쓰는 지면이 더 생기고, 강의 시수가 늘고, 도서관과 서점에서 강연하는 등 배달을 대체할 돈벌이가 마련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배달 라이더의 삶을 충분히 살아냈고, 책으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시절을 단정하게 정리한 까닭이다. ‘나’를 지켜 다시 ‘나’로 돌아온 것이다.사람들은 나를 ‘배달하는 시인’으로 부른다. ‘배달’에 찍힌 방점을 ‘시인’으로 옮겨야 한다.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만 배달이 아니라 시여야 한다. 나는 시인이다. 배달을 하면 배달하는 시인이고, 운동을 하면 운동하는 시인이다. 때로는 요리하는 시인, 노래하는 시인이다. 나중엔 밸리댄스 추는 시인, 낙타 타고 사막을 건너는 시인, 화성 탐사하는 시인일 수도 있다. 무얼 하느냐가 아니라 무얼 쓰느냐가 중요한 게 나란 사람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어느 한 가지로 규정되고 싶지 않다. 최대한 많은 삶을 살고 싶다. 내게 세상은 다채로운 경험들로 가득한 무한우주다. 얼마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배달하는 시인’ 얘기를 들려달라고 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제는 삶의 다음 혹은 다른 단계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배달 라이더는 누구나 하는 부업으로 유행하지만 보편적 인식에선 아직도 혀를 차며 연민하는 데가 있다. 가난 때문에 문학을 내려두고 육체노동을 하는 시인이라는 서사는 책을 쓰면서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전직이 아닌 현직 시인이고, 얼마나 벌어야 가난이 아닌지는 모르지만, 가난하지도 않다.중고 스쿠터를 장만해서 배달통을 달아야 했던 2년 전에 비해 지금 형편은 많이 낫다. 그럼에도 힘든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힘든 내색은 하지 않는다. 배달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그 일을 계속 하면 사람들은 내 시보다 생활을, 생활을 위한 노동을, 노동현장에서의 땀을 먼저 읽기 때문이다. 시에서도 구체적 현실의 핍진함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시는 주로 현실과 동떨어진 장면을 그린다. 현실 너머에서 현실을 꿈꾸듯 보는 사람의 마음을 그린다. 내 시는 세계보다 아름답다.여름방학 동안 꽤 여러 편의 시를 썼다. 학술논문도 한 편 썼다. 도서관과 책방에서 대중 강연도 했다. 그러면서 잘 먹고 잘 놀았다. 전세사기 당한 것도 현명하게 대처해 잘 해결되는 중이고, 차를 바꿨고, 2학기에는 대학교 한 곳에 더 강의를 나간다. 나는 나를 지켰다. 배달 스쿠터 덕분에. 고맙다! 배달했던 시인의 뜨거운 작별 인사다.

2023-08-29

방 한 칸의 고독

월급날 오전, 월급 명세서가 이메일로 날아오면 곧장 계산기를 두드린다. 월급에서 가장 큰 부분은 월세로 나가고 다음은 고정 생활비와 지난달의 각종 경조사비 또는 기타 비용이 빠져 나간다. 마지막으론 월에 정해둔 일정 금액을 저축에 넣는다. 이 모든 게 단 이십 분 만에 빠르게 이어진다. 남은 금액으로 또 한 달을 살아가야 한다니, 조금 허무하다.전에 살던 방의 계약이 만료되고 나는 모아둔 돈으로 조금 더 큰 집이나 조금 더 깨끗한 집으로 이사를 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직까지도 7평 남짓한 원룸에서 생활하고 있다. 달라지는 것이라곤 방의 컨디션이 깨끗한지 또는 창문이 있는지 없는지, 햇빛은 얼마만큼 드는지 정도의 차이일 뿐. 아직까지도 머나먼 미래를 위해 현재의 많은 부분을 타협하며 생활해야 한다.최근 유튜브에서 청년 고독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통계청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2년까지 청년 고독사는 약 1100명, 한 해 평균 200명 정도다. 계속 되는 취업난과 경제적 빈곤이 원인으로 관계 단절과 사회적인 죄책감이 고립감으로 이어져 고독사를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독사를 택한 청년들은 노력해도 희망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고 어떠한 기대도 없이 현실을 포기하고 만다. 도와줄 곳도 도움을 요청할 방법도, 도움을 청해도 되는 건지 헷갈렸다는 한 청년의 말은 머리를 멍하게 했다.희망조차 꿈꿀 수 없게 포기해버리게 만드는 현실적인 벽은 분명히 존재한다. 대학생들 사이에선 0원으로 하루를 사는 ‘무지출 챌린지’ 또는 오픈 채팅방을 통해 서로의 절약을 독촉하는 ‘거지방’의 유행이 돌고 있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소비자 물가 탓에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대학생들의 생활이 급격히 위태로워진 탓이다.졸업 이후에도 미취업 상태인 청년 백수는 126만명.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1분기 임금근로 일자리동향’의 자료를 보면, 전체 임금근로 일자리는 2020만7000개로 1년 전보다 45만7000개 증가했으나 20대 연령층의 일자리는 6만1000개가 감소했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이 제시한 20대 고용률 또한 하락세를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취업을 하면 금전적인 고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 온 지 어느덧 5년 차가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5년 동안 약 9개월 정도 일을 쉬었을 뿐 아르바이트, 취업사관학교, 인턴 등 여러 군데를 거치며 현재 작은 중소기업에서 원하던 직무의 정직원이 되었다. 젊은 날의 노력과 시간을 담아 지금의 내가 되었건만 나는 아직도 방 한 칸을 못 벗어나고 있다. 미래를 위해 현실에서 타협해야 하는 게 아직까지도 많기 때문이다. 넓고 큰 집, 여유롭게 갖추고 사는 살림살이, 여러 값진 경험과 물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 이후의 삶 등을 위해 청춘의 시절에서 계속 희생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곧 원룸의 문을 열어 더 큰 세계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방 한 칸짜리의 크기에서 강요되는 고립과 고독의 벽은 너무나 높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기에 괴로운데 아무도 그 답을 쉽게 내리지 못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오늘도 출근 버스를 급히 오른다. 재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어 30분이 넘는 거리를 서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신속함과 운이 따라 의자에 앉아갈 수 있다면 모자란 잠을 자거나 보기만 해도 기운이 빠지는 만원 버스의 광경을 모른 척 눈감을 수도 있다. 그날 하루의 컨디션이 달라질 정도로 출근길 버스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면서도, 또 꽤나 무의미한 일이라 쉽게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원하는 직종의 업무를 시작 하게 되어 좋은 성과가 나면 기쁘고 뿌듯하지만, 때론 집에 들어와 방 한 칸에 앉아 있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외면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밤이 저물고 또다시 아침, 입을 앙다물고 힘없이 버스에 실려 가는 이 사람들은 모두 미래를 위해 감내하고 있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이 버스 안에서 나만 이렇게 고립된 것일까? 생각하며 창가에 비친 나를 마주해 본다. 불투명한 유리창 탓에 이목구비가 잘 보이진 않아 나의 눈은 젊음으로 빛나고 있는지 생각하다보면 정말이지 더 미궁에 빠지고 만다.

2023-08-29

광복절 기념史

광복.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빛(光)을 되찾다’의 의미에로 해석하곤 하는데, 실제 ‘광복(光復)’에서의 ‘광’은 빛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영예롭게’라는 뜻의 부사이다. ‘광복’이라는 말은 빛을 되찾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예롭게 되찾다’라는 의미. 여기에는 2017년 김영민 교수가 칼럼을 통해 지목한 바와 같이 무엇을 회복하는가를 알려주는 목적어가 빠져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목적어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자결권, 자신에 대해 결정한 권리이다.우리가 지닌 정체성과 자결권이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언제든 타자에 의해 위협될 수 있는 것, 그것이 정체성과 자결권이다. 모든 인간에게 당연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정의를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20세기의 관습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생각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의 여러 국가와 민족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결권을 확립하고 지키기 위해 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헌데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국민학교 시절만 해도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단군의 자식이라는 단일한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배워왔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한 정체성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적용할 수 있을까. 2010년을 전후하여 사학계에서 제기된 단일민족의 허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자면, 한반도는 상고시대 이래로 무수한 이방인의 방문을 받아왔다. 여기에는 ‘왜’로 대표되는 해양세력에서부터 북방 유목민족, 중국인, 인도네시아인, 심지어는 아랍인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인종이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우리가 단일 민족이라는 것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국가 성립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설계된 기획일 뿐, 실제 현실과는 다르다는 의미이다.그러니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단일 민족과 같은 허구의 환상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란 타자에 의한 위협 속에서 스스로의 결정권을 지켜내 왔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말이다. 그러니 ‘광복’이란 단지 식민 지배로부터의 해방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으로부터 국가적 역량의 문제와 전 세계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두 개의 나라로 갈라졌다는 사실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정체성에 뿌리 깊게 새겨진 상처로서 부각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난 8월 15일 있었던 윤석열 대통령의 경축사에 대해 다소 의아한 충격을 받았다.이날 대통령은 “일본은 우리의 파트너”임을 강조하며,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 세력”에 대한 언급을 반복하며, 광복절의 의의와는 다소 거리가 먼 연설을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광복절이라는 것이 외부세력으로부터 국가의 정체성과 자결권을 되찾았다는 근본적인 의미를 되새겨보자면 대통령의 이와 같은 발언이 전혀 이해 못할 성질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하지만 광복이라는 단어에 있어 그 대상이 일본 제국이었으며, 그리고 그러한 과정으로부터 하나의 국가가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는 역사적 비극을 상기하자면, 이러한 대통령의 연설은 지나친 감이 있다. 대통령으로서 우리가 누구로부터 무엇을 광복하였는가에 대한 고려가 지나치게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더욱 의아한 기분이 드는 것은, 이러한 대통령의 이어진 연사 때문이다. 여기에서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공산주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이들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 등으로 위장하고 있다고 말했다.명확한 대상 없이 이루어진 이와 같은 발언은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진보라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위해 활동해온 사람들을 순식간에 반국가 세력으로 매도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단지 반국가세력의 위장에 불과한 것이라면, 윤석열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무엇을 통해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진보라는 가치가 사라진 자유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다시 한 번 이야기하자면 광복절은 우리가 잃어버린 자결권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자,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여기에서 필요한 말은 국민을 두 편으로 갈라 세우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지닌 자결권과 정체성의 의의에 대해 강조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반국가 세력을 운운하고, 일본과의 파트너십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2023-08-22

풍요와 빈곤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 건 사소한 일상이 아닐까. /언스플래쉬 요즘 나의 일상은 단출하다. 오전 9시에 작업실로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 대부분은 소설을 쓴다. 수업 준비를 하거나 책을 읽고 공부를 하기도 한다. 점심은 집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해결, 식사를 마치면 강아지와 함께 작업실 인근 공원을 산책한다.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로 저녁을 만들고 영화나 만화책을 보며 빈둥거린다. 청소나 빨래 같은 집안일을 하고 다음 날 먹을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나는 이런 일상을 간절히 원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창작을 위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소설 마감을 위해 새벽 5시에 책상 앞에 앉았고 개인적인 작업보다 그쪽에서 원하는 일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은 영화와 책은 매일같이 쏟아졌으나 그것을 누린다는 건 사치에 가까웠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호교환, 그러니까 저쪽에선 월급을 주고 이쪽에선 내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는 행위를 충실하게 이행해야 했다. 주말에 늦잠을 자면 죄책감을 느꼈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자꾸만 감겨오는 눈을 부릅뜨면서 생각했다. 글만 쓰고 싶어. 그럼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아.그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완벽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삶의 모양이 이제야 완성되었다며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누벼야 옳았다. 안온한 공간에서 오롯이 글쓰기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또 다른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내가 더없이 가난해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매달 통장에 일정하게 들어오던 월급이 사라졌다. 모아둔 돈을 차곡차곡 까먹는 날이 늘어난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모든 직장인이 부르짖는 ‘자유’는 결국 ‘경제적 자유’임을. 통장에 찍힌 숫자에 따라 마음의 크기가 커졌다가 작아지기도 한다는 것을.오랜만의 외식비가 과하지 않았나 안절부절못한다. 온라인 쇼핑몰의 결제 버튼 하나 누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해지기도 한다. 특히 친구들을 만나면 보풀이 일어난 속주머니만 만지작거리는 사람의 마음이 된다. 누구는 강남에 몇 평짜리 집을 샀고 누구는 보통의 연봉을 몇 주간의 여행에 썼다는 소식.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되는 부와 명예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세상이 너무나 불공평한 것만 같다. 내 삶의 규모가 남들보다 터무니없이 작다는 게 실감 나는 날에는 누구보다 가난한 마음으로 귀가하게 된다.우리 사회가 이전과 비할 수 없이 풍요로워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의 할머니는 일제강점기를 경험했고 나의 부모는 한국전쟁 이후의 지리멸렬한 가난을 겪었다. 이러한 과거를 딛고 우리 사회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의 의식 수준 또한 그만큼 높아졌다.그러나 여전히 청년들은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실제적 가난을 견디는 무수한 이들도 있으나 절대적 빈곤이 아닌 상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있다. 타인의 일상을 쉽게 볼 수 있게 된 세상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고등학교 동창이 어느 동네 아파트에 사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 아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삶이 화려할수록 나 자신의 초라한 삶이 도드라져 보인다. 더 잘 살고 싶어서 힘차게 발을 굴러도 늘 같은 자리만 맴도는 것 같다.그렇지만 풍요와 빈곤의 뜻을 자본의 논리에서 찾는 순간 많은 것이 무너지게 된다. ‘잘 산다’라는 개념의 동의어를 ‘돈이 많다’로 두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다. 많은 물질을 소유한 사람도 마음이 가난할 수 있고, 손에 쥔 것이 없더라도 그 안에서의 풍요를 찾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되묻는 일이다. 무엇을 추구하고 또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구해야 한다.작업실에 앉아 있노라면 창밖으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팔월의 빛과 비를 맞고 자란 나무는 높고 푸르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햇빛이 나뭇잎 사이를 지나 방사형으로 퍼지는 것을 목격한다. 세상의 그 무엇도 낚지 않는 그물 같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름, 내 옆을 지키는 작가들의 문장과 부모님이 텃밭에서 가꾼 채소로 만든 도시락 반찬, 반려견의 고요한 낮잠과 내 손으로 직접 써 내려가는 낯선 이야기. 이 모든 게 나를 풍요롭게 하는 사소하고도 중요한 일상이다. 불투명한 내일에 관한 불안도 끌어안아야 한다. 풍요도 빈곤도 내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2023-08-22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강박과 불안을 저 멀리로 보내고 싶어진다. /언스플래쉬 태풍 카눈이 몰려오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 있기도 힘든 강풍이 불었지만 나는 인천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렸다. 우산을 썼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옷이 잔뜩 젖어 버스 가죽 시트에 앉는 것이 민망할 정도였다.버스 안에선 실시간으로 태풍으로 인한 피해 뉴스 기사를 읽었다. 안타까웠다. 왜 절망은 이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와 안그래도 고통 속에 머무는 인간의 삶을 휘저어 놓는 걸까. 아직 읽지 못한 피해 기사가 수두룩했지만 휴대폰을 끄고 눈을 감았다. 태풍의 절정에 다가서는 듯 버스는 바람에 거세게 흔들렸고 차창에 부딪히는 물방울은 소란스러웠으며, 두통이 또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버스 2개를 마저 갈아타고 인천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작은 섬 영종도에 도착했다. 숙소에 들어가 간단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새하얗고 보드라운 흰색 이불을 몸에 덮고선 거센 바람과 빗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바깥과 달리 방 안의 낯선 적막이 온몸을 휘감아 소름이 돋았다. 시계를 보니 대략 한 시 반. 평소 이 시간에는 오후 업무를 다시 해내기 위해 억지로 커피를 들이켜고 있을 시간이었다.휴대폰의 전원을 끄고선 안개가 내려 앉아 먹먹히 젖은 바다와 빗소리로 부산스러운 영종도의 풍경에 귀를 기울였다. 현실의 고단함을 이렇게 외면하는 것이 정말 맞는 걸까 싶지만, 어떤 상황은 정면 돌파보다 가만히 눈을 감고 인내하는 것에서부터 해결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겨우 떠올려보았다.낯선 공간이 조금씩 익숙해질 때쯤, 집에서부터 챙겨온 김영민 저자의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꺼내들었다. 손길이 가는대로 아무 장이나 펼쳐 보았더니 시시포스 신화 이야기로 글이 시작된다.꾀가 많고 교활한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저승에 가게 된다. 하지만 시시포스는 자신의 못된 지혜를 이용해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이고 장수를 누린다. 곧이어 속임수가 발각되었고, 신을 속인 벌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김영민 저자는 이 신화의 이야기를 꺼내오며 ‘시시포스와는 달리 권태를 이기기 위해 인간은 스스로 돌을 아래로 굴린다’고 말한다. 생은 본래 허무하며, 외려 인간은 허무함을 잊기 위해 반복되는 노동을 자처한다는 것이다.이어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 아닌 즐기는 노동이 되어야 그나마 노동은 삶의 구원이 될 수 있다. 서둘러 판단하지 않고 구체적인 양상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것은 신산한 삶을 견디게 하는 레시피다. 슬픔이 닥칠 때는 절망으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지금 언덕을 오르는 중이라 생각하라’고 말한다.너무 당연한 이야기일까. 하지만 생의 허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겠을 땐 ‘구체적인 양상을 집요하게 응시하라’는 말이 듣고 싶어진다. 김영민 저자의 말처럼 ‘쉬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리곤 그가 말하는 ‘소극적으로 쉬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쉬어야 쉬어진다. 악착같이 쉬고 최선을 다해 설렁설렁 살아야 한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허무를 받아들이는 여유와 마음의 탄력을 상기해보는 것이다.스멀스멀 밀려오는 강박과 불안을 파도 소리에 실어 저 멀리, 도무지 내가 떠올릴 수 없는 곳까지 밀려 보내본다. 하지만 그럴수록 역설적이게도 나를 괴롭힌 허무와 어떻게 하면 더 잘 지낼 수 있는지, 허무를 어떻게 더 길들이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열렬한 고민에 빠져드는 것이다.왜 나는 어제의 나보다 더 행복해져야 하는가? 일상의 허무를 잊고 마음의 안정을 위해 낯선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왔으나 실은 막연한 행복에 기대지 않고 구체적으로 허무를 대하는 법에 골똘해지기 위해 이곳에 당도한 것임을 깨닫는다.사방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고 비는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그쳤다. 풍경이 조금 더 선명히 보이고 해변가에는 폭죽을 터뜨리는 이들이 보인다. 발코니에 앉아 그들이 만들어 내는 작은 소음을 지켜본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생의 의문들이 싸구려 폭죽처럼 낮게 솟아오르다 힘없이 꺼진다.그 풍경을 오랫동안 지켜보기 위해 얇은 겉옷을 걸치고 의자를 고쳐 앉았다. 쉼이 시작되고 있다.

2023-08-15

이것이 K잼버리다

서울 시내에서 본 스카우트 대원들. 지난주 월요일, 을지로에 나왔다가 영국 스카우트 대원들이 폭염의 광장시장 앞에 퍼질러져 있는 광경을 보고 측은했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스카우트 스카프를 매고, 배지를 달고 있었지만 영락없는 난민 꼴이었다. ‘엑소더스’에 성공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티고 있었다간 태풍에 풍비박산 났을 테니 말이다.새만금 잼버리가 종료됐다. 153개국 4만3천여 명 청소년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 행사는 다른 의미로 ‘역대급’이 됐다. 천억 원 넘는 예산을 어떻게 사용한 건지 뭐 하나 제대로 준비된 게 없었다. 기록적인 폭염 가운데 그늘 하나 없는 풀밭에서 잼버리 대원들은 온열 질환과 모기, 개미 등에 시달렸다. 열사병 환자들이 속출했지만 의료 지원은 미비했고, 열악한 야영 환경에서 세계 청소년들의 종아리에는 벌레 물린 수포 자국이 가득했다. 청소가 이뤄지지 않은 화장실에서는 악취가 나고, 인원수 대비 턱없이 부족한 샤워장은 비좁은 데다 수압까지 약했다. 비위생적인 시설에서 전염병이 창궐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만큼 후진적이었다. 그 와중에 단독 입점한 GS25 편의점은 바가지 상술까지 부렸다. 총체적 엉망진창. 전체 예산 1170억 원 중 야영장 시설 조성에 쓴 돈은 129억 원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날카로운 감사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새만금에서 잼버리를 개최한 것부터 난센스다. 새만금은 끔찍한 생태 학살의 현장이지 않은가? 자연의 보고인 갯벌에 시멘트를 들이부어 바다 숨구멍을 막아버린 곳이다. 자연과 인간의 상생을 주장하는 잼버리 정신을 완벽하게 위반한다. 뉴스에 보도된 현장 영상과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황량하기 그지없는 사막 같은 데다 천막을 쳐놨다. 애초에 장소 선정부터가 틀려먹었다. 이 파행을 예상 못했을까? 게으른 관료주의는 아마 ‘들판에서 텐트치고 애들 놀다 가는 거’ 정도로 잼버리를 얕잡아봤을 것이다. 돈 잔치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전 세계적인 개망신을 당했다.정부가 부랴부랴 수습에 나섰다. 조기 퇴영한 대원들을 서울로 불러 시티투어 버스 태워주고, 경복궁 구경시켜주고, 홍대 기숙사에서 재우고, K팝 콘서트를 보여줬다. 다른 지자체들도 거들었다. 잼버리 대원들은 악몽 같은 새만금을 잊고 부산 광안리에서 해수욕하고, 드론쇼 보고, 보령 대천해수욕장에서 머드 축제 즐기고, 전국 각지에서 템플스테이, 레고랜드, 민속촌 관광 등 다채롭게 놀았다. 정부와 지자체의 위기 대응은 ‘K스러움’이 뭔지 제대로 보여줬다. 인간성이 결여된 디지털 콘텐츠, 규격화된 관광 자원, 자연과의 불화, 자본이 급조해낸 문화 양식 등이다. 나는 새만금 잼버리보다 ‘폭망’한 잼버리를 수습하기 위한 ‘K관광’이 더 큰 실패라고 생각한다. 잼버리를 고작 단체 패키지 관광, 애들 수학여행으로 전락시켰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급히 대책을 마련하느라 정신없었겠지만. 다른 나라 대원들과 함께 교류하며 협동심과 이타심을 발휘하고, 도시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불편함을 낭만으로 바꾸는 씩씩함이 잼버리 정신임을 떠올린다면 실내 체험 행사와 도시 투어, K팝만을 내세운 대응은 아쉽다. 국가별로 뿔뿔이 흩어져 노느라 ‘잼버리 공동체’는 조각나고, 대자적 기억 대신 개개인의 즉자적 추억만 남았다. 캠핑 인구가 700만 명이나 되고, 육군이 사계절 야영 훈련을 하는 ‘야영 강국’ 대한민국인데, 잼버리의 취지에 보다 부합한 대책은 없었을까?“여러분은 시련에 맞서 이것을 오히려 더 특별한 경험으로 맞바꾸었습니다. ‘여행하는 잼버리’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아흐메드 알헨다위 세계스카우트연맹 사무총장의 폐영식 발언에는 뼈가 있다. ‘시련’, ‘특별한 경험’, ‘여행하는 잼버리’에 밑줄치고 싶다. ‘K잼버리’의 가장 큰 문제는 그늘 없는 새만금이 아니라 관료주의의 빈곤한 상상력이다. 한국사회 특유의 효율과 가성비 지상주의다. 호방하고 장쾌한 데가 없이 모든 문화가 비좁고 답답하다. 땡볕의 간척지로 상징되는 산업화의 난개발은 우리에게서 자연을, 자연과 어울리는 낭만을, 숲과 반딧불을, 맑은 공기를, 조화와 연대의 감각을 앗아가고 협소한 생활과 작위적인 문화만 남겨뒀다. 여기저기서 발생하는 칼부림 사건과 잼버리의 파국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기원이 가까울 것이다.

2023-08-15

법대로 합시다?

며칠 전 산책을 하다가 어떤 사건을 목격했다. 오후 세 시, 초등학교 4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로 공원 놀이터는 북적였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한 아이가 혼자 벤치에 앉아 있었고, 동시에 저 멀리서 경찰이 오는 게 보였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상황을 종합해 보니 아이가 자신이 ‘학교 폭력’을 당하고 있다며 경찰에 신고한 것. 출동한 경찰은 아이들을 한 명씩 불러내어 상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육체적인 폭력은 없었고 놀다가 말다툼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한 아이가 배제된 것이었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 있던 할머니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친구들이 안 놀아준다고 경찰을 불러도 돼?” 옆에 앉은 다른 사람 역시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요즘 애들은 시도 때도 없이 경찰을 막 불러.” 나는 그들에게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로 공원을 떠나야 했다.세상이 달라졌구나. 나 역시도 그렇게 느꼈다. 아이들이 자기를 지키는 방식을 알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세상에 보호를 요청할 수 있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또한 아이의 신고였으나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조사하는 경찰의 모습 또한 대단하게 느껴졌다.동시에 당연한 우려가 따라왔다. 친구들끼리의 다툼, 물론 크다면 크고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이러한 일에 공권력을 소환한 것을 과연 올바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려지던 아이는 경찰의 등장으로 인해 가장 힘이 센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칼자루를 손에 쥐고 휘두르는 쪽이 되어 버린 것이다. 법과 제도는 약자를 지켜주는 장치이다. 하지만 이것을 잘못 사용하게 되면 상대를 상처 주고 크게 다치게 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법대로 하자”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 요즘이다. 규범을 어긴 사람이 처벌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당사자들끼리 소통하고 충분히 숙고해 볼 수 있었던 문제까지도 법의 영역으로 끌고 와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어떤 판결이 나는 순간, 누군가는 죄인이 되고 모든 것이 공정하게 처리되었다는 착각을 등에 진 채로 상황은 종결된다. 일련의 사건에서 많은 것이 묵살된 채로 일이 마무리되는 것이다.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웹툰 작가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자폐증을 앓는 자신의 아이를 담당하는 특수교사가 아이에게 정서적 학대를 했다는 이유로 교사를 고발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녹음기를 사용했고 특수교사에게 상담을 청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보다 고소를 하여 징계 받는 것을 우선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작가는 자신의 입장문에서 아이를 지키고 싶은 부모의 마음, 동시에 교사를 고소해야지만 아이와 분리될 수 있는 시스템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러한 일을 시행했다고 말했다. 제도적 문제 속에서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지점을 봐달라는 것이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럼에도 대중들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다. 설령 법정에서 교사가 사용한 언어가 학대의 영역이라고 판단한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하면서까지 그가 얻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지는 것이다.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다’와 ‘법대로 엄중하게 처벌해 달라’는 요청은 전혀 다르다. 그가 진심으로 교사에게 원하는 것이 반성과 개선이었다면, 이러한 선택은 완전히 잘못되었다.페터 비에리는 자신의 저서 ‘삶의 격’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우리에게 알면서도 고통을 가하는 경우 우리는 분노와 원망, 증오를 느낀다. 이러한 감정들은 고통의 상쇄를 갈망하는데, 그것이 원망을 잠재워주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쇄를 일컬어 복수 또는 보복이라고 한다. 피해자가 재판관에게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가해자를 감옥에 집어넣고 고통을 고통으로 되갚아주는 것이다.” 보복의 마음을 가지고 있게 되면 절대 화해의 결과가 나올 수 없다. 그날 오후, 놀이터의 아이들은 경찰의 등장으로 인해 사이좋은 친구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 학부모와 교사 사이의 법적 공방에 결론이 나면 그로 인해 모두가 존엄을 되찾을 수 있을까?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은 결코 단순하고 표면적이지 않다. 모든 것을 법대로 해결하는 세상은 결코 좋은 세상일리 없다. 하루가 머다 하고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서로의 상황을 더욱 이해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2023-08-08

‘우리’는 왜 악마가 되어가는가

무차별 흉기 난동 사건이 자꾸 발생하고 있다. 7월 21일에는 신림역 일대에서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고, 8월 3일에는 서현역 일대에서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다. 미수에 거친 사건도 8월 3일에서 4일까지 3건 가량이 있었고, 무차별 난동이 아닌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한 상해 사건도 많았다. 인터넷에서는 자신이 특정 지역에서 무차별 흉기 난동을 벌일 것이라는 예고 글도 끊이지 않고 올라왔다. 내가 자주 가는 왕십리역, 혜화역, 고속버스터미널역 등에도 예고글이 올라와 지인들과 소식을 공유하기도 했다.범죄 전문가들은 최근 추세를 범죄 감염 이론의 관점에서 해석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하나의 거대한 범죄가 발생하고, 이를 미디어에서 주목해 흥미 위주의 자극적인 보도를 계속하자, 예비 범죄자들이 자극을 받아 실행에 옮기면서, 이와 같은 범죄가 확산된다는 것이 범죄 감염 이론의 주된 골자이다. 실제로 흉기 난동 사건이 7월 말에서 8월 초 현재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범죄 감염 이론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실제로 모방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여러 전문가들의 경고가 있기도 했었다.현상 자체도 우려해야 할 일이겠지만, 한 가지 더 우려되는 것이 있다. 그건 미디어가 범죄자들을 보도하는 태도다. 범죄자들이 평소 금전 관계나 치정 관계, 혹은 정신병력이 있었다는 식의 보도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궁금하다. 지금의 한국에서 금전 관계나 치정 관계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신과 진료 기록을 가진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까닭을 금전 문제나 치정 관계 혹은 정신병의 문제로 일소시키는 것은 얼마나 단순한 일일까.내가 불만인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최근 미디어의 보도 태도를 보자면, 이와 같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특정한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축소하려 이를 악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특정한 개인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범죄의 확산에 취약한 특정한 계층 내지는 세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왜 국가는 범죄의 확산 자체를 문제시하고 고찰하는 대신 특정한 지역에 경비경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마치, 이 모든 문제가 구조적 결함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결사적으로 항변하듯.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특정한 범죄자 내지는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동일한 유형의 범죄가 계속 발생한다면, 그건 범죄자의 잘못일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범죄가 계속해서 일어나도록 방치하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뉴스나 인터넷 커뮤니티의 댓글에서 묻지마 범죄를 근거로 특정한 하위 집단을 악마화하는 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화가 난다. 그리고 그 악마화하는 대상에 2·30대 남성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다. 왜 2·30대 남성들은 갈수록 범죄자의 형상으로 그려져야만 하는 것인가. 실제 2022년에 발표된 범죄 연령 통계에 따르면 2·30대는 전 세대 가운데 가장 범죄율이 낮은 것으로 집계된다. 그럼에도 사실을 왜곡시켜가면서까지 2·30대 남성을 악마화 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 강력 범죄율이 20대에서 높다는 사실에만 주목하면서, 왜 그들이 분노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인가.이데올로기 연구자인 상탈 무페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적대 이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데올로기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미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그 사회와 불화하는 적대성을 내포한다. 그와 같은 적대는 한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통해 분출한다. 지금 터져나오는 분노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정말 특정한 악마의 소행일까. 악마를 키우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오늘도 여전히 정부의 무능에 대처하기 위해 20대 남성 군인 장병들이 동원되고 있다. 솔직해지자. 이 나라는, 이 정부는, 이 구조는, 자신들의 무능과 구조적 결함을 감추기 위해 특정 세대를 구멍 마개로 삼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기 위해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전체주의적 군 시스템을 구멍마개로 활용해 20대 남성들을 갈아 넣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들을 사회를 위협하는 잠재적 악마인 것처럼 묘사한다. 작금의 20대 남성들은 시스템의 구멍을 막기 위해 동원되는 이중의 희생양에 불과하다. 내가 과격하다고 느껴지는가? 아니, 정말로 과격한 것은 이같은 부조리에 질끈 눈을 감고자 하는 당신이다.

2023-08-08

온실 속의 ‘금쪽이’들

서이초 교사 A씨가 학부모의 도 넘는 민원 제기와 폭언, 갑질, 교권 침해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A씨 담당 학급의 한 학생이 급우의 이마를 연필로 그어버리는 학교 폭력을 저질렀는데,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가해 학생의 학부모가 ‘금쪽 같은 내 새끼’를 싸고돌며 A씨를 몰아세운 게 원인으로 지목되는 중이다. 해당 건 외에도 그동안 얼마나 들들 볶아댔을까.지난 5개월간 서이초 교무실에 접수된 공식 민원은 11건인데, 내용이 기가 차다. “하교 시간에 솜사탕 상인이 있어 학생 통행이 위험하다고 항의함”, “담임교사의 생활지도와 교과지도, 수행평가에 6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함”, “방과 후 통기타 수업 중 아이가 기타 연습을 안 해와 강사에게 혼난 것을 항의함”, “교문 앞 교통 통제를 해달라고 함”, “교통 통제를 하지 말라고 함” 따위다.요즘 학부모들은 교사 개인 연락처로 시도때도 없이 전화하고 문자를 보낸다. “여행 가지 마라”, “SNS 하지 마라”, “어머니 장례는 3일인데 왜 5일이나 휴가를 내냐” 등 학부모들이 보낸 메시지를 보니 천박하기 그지없다.나는 미혼이다. “자식이 없으니까 모른다”고 하겠지만, 요즘 부모들 하는 걸 보니 자녀 양육은 경험의 차원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그러니 말하련다. 제발 작작 해라. 호들갑 좀 그만 떨고 오지랖도 적당히 펼쳐라. 언제까지 갓난아이 업어 키우듯 할 텐가? 당신들의 자녀는 애완동물이 아니고, 생각과 표정 없는 인형도 아니다. 저마다 하나의 독립된 우주이고, 개별적인 인격체다.물론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의 보호가 필요하지만 개입도 정도껏이다. 학교와 교사를 믿지 못하고, 아이 친구들을 믿지 못하겠으면 그냥 집에서 홈스쿨링을 해라. 세상이 삭막하고 위험해진 건 사실이나 요즘 부모들이 자식 키우며 벌이는 극성들을 보면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옛말이 떠오른다. 서이초 교사 A씨의 비극이 바로 그 경우다.도대체 왜 이럴까? 우리 부모 세대는 요즘처럼 극성맞지 않았지만, 일부 ‘맹모삼천지교’가 없진 않았으니 한번 따져보자면 ‘내 새끼만큼은 안 굶기겠다’는 오기로 그랬던 것 같다.그런데 요즘 내 또래 부모들은 결핍 없이 자라놓고는 왜 이 난리법석일까? 한국사회의 스노비즘이 가장 큰 병폐일 것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허영심과 속물근성이 풍요 속의 결핍을 과잉생산해내는 시대다. 높은 수준의 경제력을 지닌 고학력자 부모들은 자식을 의사, 판검사, 대기업 임원으로 만들어야만 상류사회에서 면이 서고, 풍족하지 않은 부모들은 빠듯한 형편에도 내 새끼 기죽지 않게 온갖 귀하고 좋은 건 다 먹이고 입힌다. 아이와 함께 100만원이 넘는 호텔에서 바캉스 하는 게 유행이다.인스타그램을 보면 내 또래 부모들의 일상에 ‘I(나)’는 없고 ‘아이’만 있다. 자신을 지워낸 자리에 자녀만 두는 헌신적 사랑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하지만 내 아이만 소중한 게 아니라 남의 아이도 소중하다. 서이초 교사 A씨는 교실에서는 선생님이었지만, 교실을 나서면 이제 스물세 살 된 꽃다운 청년이자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다행히 내 주변의 부모들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 배려를 가르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괴물이 되는 일부 극성 부모들이다. 제 자식은 제멋대로 날뛰어도 우쭈쭈 감싸면서, 그 미성숙한 ‘덩어리’를 사람 만들겠다고 애쓰는 교사들에게 폭언과 갑질을 일삼는다. 옳지 않은 짓이다.그래, 당신들이 학생일 땐 ‘미친개’라든가 ‘마귀’ 같은 별칭으로 불린, 선생 자격도 없는 교사들이 학교에 있었다. 그 시절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해도 이해불가다. 착하고 성실한 요즘 선생님들이 무슨 죄가 있나? 이제는 달라졌다. 교사들의 인식도 바뀌었고, 교육 현장의 분위기도 쇄신됐다. 제발 믿고 맡겨라.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자녀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개입, 지나친 집착이 비극적 결말로 이어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알아서 잘 자란다. 온실 속 화초는 자꾸 만지면 시든다. 열대어는 수온과 빛과 먹이와 산소 등을 섬세하게 관리해줘야 하지만, 그 관리가 필요 이상으로 과하면 스트레스로 죽는다. 당신들의 ‘금쪽이’도 마찬가지다.

2023-08-01

적절히 화를 표출하기

분노는 거듭 분노를 낳을 뿐이다. /언스플래쉬 대중교통을 탈 때 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마주한다. 2시간 40분 거리의 열차 이동 내내 큰 소리로 통화를 주고 받는 사람, 휴대폰으로 시끄러운 음악을 크게 틀어 놓는 사람, 어린 아이가 복도를 뛰어다녀도 가만히 지켜보는 부모 등 어느 곳을 가도 온갖 소란 속에서 아주 많은 피로를 느끼고 있다.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피로를 감당해 내느라 필요 이상의 너무 많은 분노를 느끼고 있다.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쉽게 낳기 마련이라서, 결국 어딜 가도 너무 많은 화가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여기저기서 얻은 스트레스 꾸러미를 집으로 돌아와 하나씩 풀 때, 건강한 사람들은 취미를 통해 푼다지만 나는 아주 가끔 스트레스를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몰라 난감할 때가 있다. 무작정 러닝머신에 올라가 걸어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 놓고 매운 음식을 먹으며 여유를 즐기려 하지만 스트레스 해소는 쉽지 않다. 결국 책상에 앉아 나는 무엇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조금씩 생각하다보면 무언가 명확해지는 지점이 있고, 어떠한 상황에서 화가 발생했는지 알게 된다.상황을 인지해서 종이 위로 그때의 감정과 상황을 부려놓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조금씩 해소된다. 하지만 내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성적으로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될 때에는 벽에 부딪힌 듯한 막막한 심정을 느낀다.때마침 ktx 열차에 앉아 수많은 소음에 둘러 쌓여 강현식, 최은혜 저자의 ‘그동안 나는 너무 많이 참아왔다’를 읽고 있다. 책은 오랜 기간 내제된 ‘화’로 인해, 마음이 병들고 아픈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집 바깥에서는 늘 친절한 사람이지만 유독 집에서만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 화를 내는 방법을 몰라 난처한 사람, 버림받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 파괴를 일삼는 사람, 상대가 화를 내면 마음이 돌아서 모든 관계를 끊는 이들의 일화가 차례대로 나온다.이들의 공통점은 화를 너무 폭발적으로 내거나, 또는 화를 지나치게 억압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유년 시절부터 시작된 결핍이 있었고, 치료받을 기회나 상황을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상처를 방치하며 자라와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유독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이 가지는 불만이나 화를 표출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무리의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 또는 불편한 감정을 한 개인이 참고 넘어가면 모든 상황이 다 해결된다고 여기며 상황을 무마시킨다. 유년시절부터 분노는 늘 숨겨야만 하고 적절히 화를 표출하여 해소하는 방법에 대해선 학습하지 않기에 더 큰 분노가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되고 만다.화를 참고 억누를수록 분노 표출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결국은 자기 자신을 해한다거나 타인에게 엉뚱한 방향으로 큰 분노를 표출하게 되어 상황을 계속해서 악화시킨다. 분노는 거듭 분노를 낳을 뿐이고 특히 타인에게 전염성이 높아 이성적으로 판단이 불가능한 분노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내가 지금 어떤 것에서 불편한 마음을 느끼는지 뚜렷하게 바라보며 상황을 인지해야 한다. 인지만으로도 화는 느닷없고, 마냥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알게 되고 내가 지속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책에서도 분노를 느낀다면 나의 의견을 전달한 후 해결책을 모색해야 함을 강조한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성적으로 이해해보며 무엇보다 나의 마음을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책은 계속해서 말한다.오래된 상처를 꺼내어놓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것은 아주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대개 트라우마 속에는 해소되지 못한 화가 감추어져 있고, 늘 화를 감추고 억누르며 살아왔기 때문에 화가 난 순간을 이성적으로 바라보기란 큰 어려움이 따른다.하지만 분노라는 실타래를 조금씩 풀게 되다보면 어느 순간 쉽게 풀리는 순간이 올 것이다. 화를 다스리기 위해 상담과 치료를 진행하던 이들이 점차 화를 적절히 표현하게 되는 부분을 읽다보면 나 또한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느꼈던 분노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나뿐만 아닌 타인에게도 조금 더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2023-08-01

자격을 결정할 자격

한 초등학교의 담임교사가 교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벌어졌다. 참담한 일이다. 그녀는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딘 새내기 교사였다. 학부모의 전화를 수십 통 받았으며 환청이 들릴 정도로 힘겨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교사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비통함을 표하고 있다. 나 역시도 얼마 전까지 교원으로 근무했었다. 교무실과 학부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모습과 어떻게든 잘해보겠다고 애썼으나 상실로만 남은 일련의 사건이 떠올랐다. 지금도 비슷한 고통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이 있음을 알기에 마음이 더욱 어렵다.학교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공간이다. 인간은 자라면서 필연적으로 이곳을 거치게 된다. 집과 부모라는 안온한 세계를 떠나 낯선 세계로 들어와 타인을 만나고 관계 맺는 방식을 배운다. 세상은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내키지 않더라도 규율과 법칙에 따를 필요도 있다. 학교에 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의 문을 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다시 단단해지면서 한 생명은 자란다. 그렇기에 학교는 마냥 편안한 공간이 될 수 없다.나의 학창 시절도 그랬다. 학교가 흡사 감옥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다. 교내에서의 차별과 냉대, 강압과 폭력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선생은 손목에 찬 시계를 벗으면서 학생을 향해 무차별적인 구타를 한다. 소설이나 드라마에도 학생을 향해 거리낌 없이 상처 주는 말을 내뱉는 선생이 자주 등장한다. 서사적 비약이 아니다. 그런 야만적인 시대가 우리에게 분명히 있었다. 교사로 일하게 되면서 아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눈이 바로 서 있지 못하고 위험한 미끼를 덥석 물어버리기도 했다. 폭력에 노출되어도 그것이 폭력인 줄 모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무조건 보호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미진함과 어리숙함으로 종종 실패로 끝나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잠이 오지 않고 괴로움에 몸서리쳤다. 출근 시간은 어김없이 돌아오고 나는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선생의 자리에 앉았다. 어떤 부분이 무뎌지는 기분이 들었고 진정성이라는 피상적인 단어가 무력하게 다가오기도 했다.감사한 점은 내게 사랑과 응원을 주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폭언에 가까운 전화나 문자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그러면 마음이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행간에서 나를 상처 주고 싶다는 명백한 의지가 읽혔다. “당신은 선생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간신히 붙잡고 있던 실 하나가 툭 끊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세상을 떠난 그녀 역시 그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자격이 없다’는 말은 상대를 모멸감에 빠지게 만들기에 아주 쉬운 문장이다. 악의적인 인간에게 내뱉기도 하지만 예기치 못한 실수나 부딪침에 있는 사람에게도 자각 없이 쓰인다. 누군가의 자격을 결정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원인이 어떠하든 그것은 분명히 상대의 마음을 훼손시키는 언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타인을 향한 적의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한 사람을 절대적 악인으로 상정하고 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교사가, 관리자가, 학부모가, 어떤 사람들은 학생이 나쁘다고 말한다.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고 한다. 개인에 고통이나 슬픔에 집중하기보단 누군가에게 책임을 덮어씌운 뒤에 무자비하게 돌을 던진다.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뿌리 깊은 냉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런 식의 책임 전가는 더 이상 해선 안 된다.육체만큼 다치기 쉬운 것이 영혼이다. 종이에 손이 베이는 것도 쓰라린데 보이지 않는 화살이 가슴에 박히면 회복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일하면서 매일 같이 느꼈다. 구시대적인 통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사회에서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살펴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존재가 한 교실에 모였다.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덧씌워선 안 된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고 모두가 그만큼 노력해야 한다.비와 무더위가 반복되는 한여름의 가운데 서서 다짐한다. 단 한 사람의 마음을 다른 무엇보다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마음처럼 상하기 쉬운 것은 없으니까. 마음 다해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학교 구성원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는 물론이고 교육 현장에서의 지속적 성찰과 개선을 통해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23-07-25

인터스텔라, 더스트 볼, 분노의 포도…

영화 ‘인터스텔라’의 기억에 남는 한 장면. 아이들이 야구를 하는 운동장 너머로 거대한 모래 폭풍이 다가온다. 사람들은 모래 폭풍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황급히 집으로 대피한다. 이윽고 모래 폭풍은 마을과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어 옥수수 밭을 바라본다.SF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한 장면에 불과해보이지만, 사실 이 장면은 20세기 미국에서 벌어진 끔찍한 대재앙을 재현한 것이다. 1930년대 초 미국의 중부 곡창지대를 덮쳤던 더스트 볼(Dust Bowl)이 그것이다. 미국 중부의 대규모 곡창지대인 콜로라도, 캔자스, 오클라호마, 뉴텍사스를 덮친 모래폭풍은 하늘을 가릴 만큼 거대했고, 마차·자동차 따위에서부터 창고·집·우물·전신주와 같은 시설물마저 날려버릴 만큼 강력했다.더스트 볼은 직접적으로 휘말린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20만 명이 넘는 이재민 또한 발생시켰다. 모래폭풍은 1937년, 미국 중부에 많은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 근방을 떠돌며 토지를 더욱 황폐화시켜갔다. 경작도 생활도 불가능하게 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을 포기하고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대도시로 이주하였지만, 극단적인 가난과 주거의 불안정, ‘오키(Oki)’(뜨내기)라는 멸칭을 안은 채 살아가야만 했다.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는 바로 이 시기, 오클라호마를 비롯한 미국 중부의 서민과 노동자들이 겪은 극단적인 가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더스트 볼로 인해 황폐화된 고향을 버리고 대도시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이주할 돈이라도 마련하기 위해 자신들의 땅을 헐값에 팔아야만 하는 사람들. 그렇게 도착한 서부에서조차, 그들은 가난한 이방인이라는 멸시와 홀대에 직면한다. 모든 것을 잃고 설움에 가득 찬 그들의 모습을 존 스타인벡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놀란 감독이 이와 같은 더스트 볼의 모습과 그 후의 폐허를 영화 속에 차용했을 때, 영화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현실 속 더스트 볼도, 영화 속 모래폭풍도 모두 인간에 의해 빚어진 대재앙이라는 것. 사실 1930년대 초 미국 중부에 닥친 심각한 가뭄이 더스트 볼의 직접적인 방아쇠이기는 하지만, 방아쇠는 결코 총알 없이 발사되지 않는다.식량 증산을 위해 수십 년간 계속된 난개발은 숲과 습지를 비롯한 생태 환경을 심각하게 훼손시켰으며, 미숙한 건조농법의 영향으로 경작지 또한 빠르게 황폐화되었다. 대략 20년간의 난개발과 무리한 경작이 미국 중부를 쑥대밭으로 만든 더스트 볼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인간에 의해 자행된 자연 파괴가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데에는 채 반 세기도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그러한 인과를 눈치챈 것은, 이미 그것이 우리에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게 되었을 때였다.이처럼 우리는 거듭 자연 파괴로 인한 재난을 겪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무구한 표정으로 파괴되어가는 자연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 한 컨퍼런스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기후변화는 지구 단위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를 비롯한 일부 생물종에게만 치명적인 문제일 수 있다는 것. 기후 변화로 인해 상당수의 생물이 멸종하게 되겠지만, 지구에서의 생명활동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며 살아남은 생물들이 다시 번성하여 지구는 다시금 푸른 별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이야기였다.그럼에도 우리는 거듭 기후 변화를 ‘우리’의 일이 아닌 다른 희귀동물의 멸종 따위의 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이 모든 일이 나의 세대 이후에 발생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실 우린 이미 기후 변화로 인한 환란의 시대 속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올 여름에도 끔찍한 수준의 비가 내리고 있다. 기후학회에서는 ‘장마’라는 개념 대신 ‘우기’라는 개념으로 한국의 여름 기후를 바라봐야 한다는 논의가 한창이다. 올 해에도 예상된 호우에도 불구하고 인재가 겹쳐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생각보다 더 먼 미래까지 내다보며 살고 있지만, 보이는 것을 애써 흐린 눈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2023-07-25

드라마 같은 노래

요즘 대중가요 노랫말은 비문학적 말장난 투성이다. /언스플래쉬 “몰랐었어, 나를 용서해. 요즘 네가 술에 기대어 말 못하고 아파했던 이유가 나인 줄은 몰랐어. 한동안 넌 사랑을 하고 이별한 걸 알았기에 너를 떠난 그 사람이 그리운 그 탓인 줄 알았어. (…) 날 사랑한다고 지금까지 왜 말 못 했어. 나 얼마나 그 말을 기다려왔는데. 그래 늦지 않았어. 미안하단 말은 하지 마. 이제 시작해. 우리 사랑을 위해.”며칠 전 운전하며 집에 가는데 라디오에서 녹색지대의 옛 노래 ‘그래 늦지 않았어’가 흘러 나왔다.비도 자분자분 내리고, 비에 젖은 네온사인 불빛들이 알록달록 글썽거리는 밤의 낭만에 취해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노래를 목청껏 따라 불렀다. 그러다 문득 ‘요즘은 왜 이런 노래 가사가 없지?’하는 생각이 들었다.상호 호감이 있던 남녀가 바보 같이 서로의 마음을 모른 채 친구처럼 지내다가, 뒤늦게 사랑인 걸 알고 “그래 늦지 않았어” 외치는 노래다. 4분짜리 짧은 노래를 들었는데 16부작 미니시리즈 드라마 한 편을 본 것 같다. 가사 한 마디마다 서사가 있고 장면이 있다.“술에 취한 네 목소리, 문득 생각났다던 그 말. 슬픈 예감 가누면서 네게로 달려갔던 날 그 밤. 희미한 두 눈으로 날 반기며 넌 말했지. 헤어진 그를 위해선 남아있는 네 삶도 버릴 수 있다고. 며칠 사이 야윈 널 달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지막까지도 하지 못한 말 혼자서 되뇌었었지.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어. 나를 봐, 이렇게 곁에 있어도 널 갖지 못하잖아.”이 노래는 또 어떤가? 한국 대중가요 불후의 명곡이라고 생각하는 뱅크의 ‘가질 수 없는 너’다. 추운 겨울밤, 짝사랑의 대상인 ‘너’가 술에 취해 전화를 건다. 생각났다고, 보고 싶다고. 쿵쾅거리는 가슴 안고, 허연 입김을 뿜으며 술집으로 달려가 마주 앉았더니 그녀는 개차반인 전 남친 얘기만 한다. 우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이 찢어진다. 한 편의 멜로 영화다.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핸드폰을 가졌는데, 그때 대리점에서 뒷 번호 네 자리를 의미 있는 숫자로 하라고 해서, 자주 가서 부르던 우리 동네 만남노래방 금영코러스 ‘가질 수 없는 너’ 3668로 한 게 아직까지 내 전화번호다.“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어” 어릴 때부터 이 노래를 좋아했는데, 마흔이 되도록 이 노래대로 살줄은 몰랐다.“머리를 쓸어 올리는 너의 모습. 시간은 조금씩 우리를 갈라놓는데 어디서부턴지 무엇 때문인지 작은 너의 손을 잡기도 난 두려워. 어차피 헤어짐을 아는 나에겐 우리의 만남이 짧아도 미련은 없네.(…) 멈추고 싶던 순간들 행복한 기억,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던 너를 이젠 나의 눈물과 바꿔야 하나. 숨겨온 너의 진심을 알게 됐으니.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날 보는 너의 그 마음을 이젠 떠나리. 내 자신보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널 아끼던 내가 미워지네.”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있다 혹은 없다’는 영원한 화두를 우리에게 늘 던져주는 노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친구 사이지만 미묘한 긴장 관계에 있는 두 남녀가 사랑이 깊어져 연인이 되면, 언젠가 이별의 순간 친구로마저 지낼 수 없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는 내용이다. 2절에 “연인도 아닌 그렇게 친구도 아닌 어색한 사이가 싫어져 나는 떠나리”를 따라 부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단 몇 줄의 노래 가사인데도 가사에 없는 수많은 장면들, 벚꽃부터 첫눈까지 두 사람이 나눴을 우정 또는 사랑의 추억들, 서로를 바라보는 애틋한 표정이 그려진다.프랑스 철학자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서사가 사라지고 파편적인 작은 이야기들만 남는다고 말했다.장편소설이 점점 자취를 감추는 문학의 풍조도 시대적 현상이다. 현대사회는 찰나의 감각적 도취, 말초적 자극, 일회성 흥미로만 가득하다.그래도 90년대까지는 노랫말도 문학이었는데, 요즘 대중가요 노랫말을 보면 뜻을 알 수 없는 의성어, 조어, 외국어, 심지어 욕설까지 온갖 비문학적 말장난 투성이다. 내용을 정서적으로 ‘전달’하는 것보다 비트와 멜로디를 직관적으로 ‘투척’한다.아아, 영화 같은, 드라마 같은 노래 어디 없을까? 노래의 주인공이 되어, 애절한 발라드풍의 연애 한 번 해보고 싶다.

2023-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