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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갈치를 주니까 중매가 온다

중매라는 선물을 받게 해줄지도 모를 갈치. 층간소음 갈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다. 바닥과 천장이, 벽과 벽이 맞붙은 아파트나 연립주택에서는 이웃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사르트르가 말한대로 ‘지옥’으로서의 타인만 남는다. 소음은 보복소음을 불러오고, 소음의 나비효과는 주먹과 발길질, 흉기가 되어 피를 보게까지 한다. 인터넷에 층간소음 복수법을 검색하면 온갖 방법들이 나온다. 천장에 설치하는 층간소음 보복 스피커가 품절 현상을 빚을 만큼 잘 팔린다. 스피커로 귀신 흐느끼는 소리, 불경, 찬송가, 아기 울음소리, 심지어 음란물 소리를 틀어두라는 조언이 넘쳐난다. 천장이나 벽을 두드리는 고무망치도 인기 상품이다. 이웃들을 마주칠 때마다 조현병 환자인 척했더니 층간소음이 사라졌다는 경험담까지 있다.나는 연립주택 4층에 사는데 5층의 생활소음이 잘 들린다. 샤워할 때마다 음정 박자가 엉망인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는 윗집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새 거주자가 이사 온 뒤론 그쪽은 평화롭다. 최근엔 층간소음보다 벽간소음이 문제다. 옆집 402호에 새로 이사 온 아주머니 아저씨께서 현관문을 너무 세게 닫는다. 문돌쩌귀가 잘 안 맞는 데가 있는지 여러 번 열었다가 닫았다가 한다. 하루에도 열댓 번, 늦은 밤에도 그 소리가 들리면 짜증이 나고 욕설이 뱉어진다. 가서 따져야지 하고 단단히 벼르는 와중에 복도에서 아주머니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인사하자 “저거 저렇게 두면 누가 안 가져가요?” 문 앞에 쌓여 있는 소포꾸러미를 걱정하신다. 집으로 책이 너무 많이 와 둘 곳이 없어 현관문 앞 구석에다 놓은 것들이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와는 서로 한 번씩 도운 일이 있다.하루는 거실서 음악 들으며 쉬는데 창밖에서 누가 큰소리로 “401호 아저씨! 도와줘요!” 외쳤다. 창을 열어보니 옆집 베란다에서 아주머니가 자동방범창이 잠기는 바람에 안으로 못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알려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402호에 들어가 방범창을 열어 아주머니를 구출했다. 옆집이 이사 온 지 며칠 안됐을 때다.지난 가을엔 제주 바다 위에서 열심히 낚시하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안양동 지구대 경찰이었다. 집 문은 열려 있고, 택배는 잔뜩 쌓여 있고, 혹시 무슨 변고가 생긴 건 아닌지 싶어 옆집에서 신고했단다. 낚시 가는 길이 얼마나 설렜으면 칠칠맞게 문단속도 안하고 헤벌레 나섰을까. 다행히 사라진 물건도 없고, 누가 들어온 흔적도 없다. 옆집서 대신 문단속을 해준 게 참 고마웠다.도움을 주고받으며 피어난 작은 따스함 따위는 쿵쿵거리는 소음에 묻혀 기억도 나지 않았나보다. 복도에서 마주친 아주머니는 “총각이 잘생겼네. 장가 안 갔어요?” 살갑게 말을 걸었다. 두세 마디 대화 나누자 문 닫는 소리 시끄럽다고 따지려던 마음이 사그라졌다. 널찍한 테라스가 있는 우리 집 내부 구조가 궁금하다기에 들어와 구경하시라 했다. 그리고 지난번 문단속해준 보답으로 그때 제주에서 잡아온 갈치를 몇 토막 드렸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말한다. “이방인에게 말 걸지 말라는 말은 정상적 삶을 사는 성인들의 전략적 교훈이 되어버렸다. 이 교훈은 이방인이 말 걸기의 거부 대상이 되는 삶의 현실을 하나의 신중한 규칙으로 만든다”라고. 말을 거는 순간 관계가 시작되고, 관계는 성가시고 불필요한 것이다. “타인은 지옥”이므로 지옥의 문을 굳이 열 이유는 없다. 혼밥과 혼술이 편하고, 타인의 곤경을 봐도 섣불리 도와선 안 된다. 코로나 시절 타인은 병균 덩어리였고, 전염병이 종식된 지금은 경쟁자, 귀찮은 오지랖쟁이, 또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사물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웃’이라는 이름을 잃어간다. 언젠가는 사전에서 단어가 사라질 것이다.“이렇게 잘생기고 훤칠한 총각이 왜 혼자 살아. 내가 주변에 좋은 아가씨 있으면 중매 서줄까?” 갈치를 주니까 중매가 온다. 이건 꽤나 남는 장사가 아닌가. 중매보다 더 값진 건 이웃의 탄생이다.이제 지옥으로서의 타인은 없다. 갈등을 갈치로 바꾸고 적대감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한 건 그저 “안녕하세요” 한마디로 시작된 소소한 대화다. 갈등과 혐오가 넘쳐나는 우리 사회에 지금 절실한 건 안녕을 묻는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이 한마디인지도 모른다. 그날 저녁 옆집서 갈치 굽는 냄새가 스멀스멀 흘러들어왔다. 이웃이 저녁밥을 짓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2024-01-08

가장 바깥쪽에 놓인 서점의 책처럼

근사한 삶은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언스플래쉬 지난 12월 31일엔 광화문 교보문고에 다녀왔다.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꼽으라 한다면 주저 없이 광화문과 덕수궁 그리고 서촌을 말할 수 있다. 그곳의 주변엔 취향을 가득 담은 카페와 음식점, 동네 서점, 각 종 소품을 파는 가게 그리고 특정 장소들이 있다. 세 곳 모두 많은 이야기와 사람과 감정이 얽혀 있다. 어느 계절에 누구와 가도 좋은, 애정이 가득 담긴 곳이다.2024년을 정말 잘 보내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지난해의 마지막엔 아침이 되자마자 광화문 교보문고로 향했다. 공들여 책을 골랐고 읽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다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기도 했다.그리고 베스트셀러 매대 앞에 서서 그곳에 반듯하게 세워져 있는 책의 모습을 바라봤다.매대위 같은 책일지라도 제일 바깥쪽에 있는 책과 가장 안쪽에 책은 컨디션 차이가 꽤 난다. 제일 바깥에 있는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탓인지 책 표지가 더 물렁물렁하고 모서리가 약간 닳아 있다. 종이를 넘길 때의 질감과 촉감도 다르다. 새 종이책 특유의 빳빳함을 잃고 훌렁훌렁 가볍게 넘어가며, 종이를 넘기며 생기는 미세한 자국이 새겨져 있다.반대로 가장 안쪽인 끝에 위치한 책은 진열된 지 얼마 안 된 듯 상처 없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새 책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어딘가 모서리는 더 날카로워 보이고 빳빳하며 유연해 보이지 못한다. 읽는 이의 손아귀에 잡혀 꼿꼿하게 서있는 모습이 왠지 근래의 안절부절 못하는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달까.나는 사람이 어렵다. 특히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선 그들이 말을 모두 경청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내가 느끼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보단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상대를 존중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이 말이 무례하진 않은지 조금은 생각해보고 단어와 문장을 골라 말을 건네는 편이다. 그러니 대화의 흐름은 무언가 매끄럽지 못하고 어색하다. 만약 누군가 나와의 대화가 어색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날 유독 더 공을 들였기 때문이고 아마 집에 가자마자 타이레놀을 입에 털어 놓고 잠에 들기 바빴을 것이다.처음 보거나 그리 친하지 않은 사이어도 자신의 아픈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가 겪은 상처나 아픔을 들여다보며 나도 모르게 감정이 동요되고 전이되어 마음이 불편하고 괴롭다.하지만 의무적으로 그의 말을 잘 듣고 있다는 제스처와 뉘앙스를 충분히 드러낸다. 너무 반응을 하지 않으면 상대가 무안해질테고, 또 너무 지나치게 반응하면 그에게 가식이라는 무례를 범할 수 있으니까. 너무 과하지 않고 지나치지도 않도록, 나보다는 상대를 위한 너무 많은 고려와 생각에 빠진다.더 큰 문제인 건,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는 행동을 미덕으로 여기며 경청과 조언을 할 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내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상대에게 좋은 사람임을 인정받기 위해 타인의 의사를 의존했고 지나치게 수용했다. 상대가 평상시 자주 쓰는 말과 표현, 관심사를 익히 파악하여 주로 상대에 맞춰 주기 바빴을 정도였으니까.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은 판단이며, 판단을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타인의 의사를 수용하지 않는 것이 인간 정신의 정점이라 말했다.또한 인간의 나약한 정신은 자신의 이해와 통찰을 동원하기보단 타인이 떨어트린 몇 마디 말을 빠르게 주워 담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몰래 삼킨 후 배설하길 즐겨한다고도 했다. 스스로 통찰을 통해 독립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닌, 손쉽게 타인의 그럴듯한 판단을 마치 제 것인양 행한다는 것이다.그간 내가 생각했던 ‘좋은 사람’은 애매했다. 그래서 올해엔 서점 매대의 가장 바깥에 놓인 책처럼 자유롭고 유연한 형태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보려 한다. 타인의 인정과 판단보단 주체적이고 독립적이고 인간성을 지닌 사람이 더 근사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니까.

2024-01-08

새해에는 꿈과 희망을

어린 시절, 나는 ‘세일러문’이나 ‘웨딩피치’ 같이 마법 소녀가 등장하는 만화를 좋아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에 정의롭고 강한 힘까지 가지고 있다니. 그야말로 동경할 수밖에 없는 세계가 아닌가.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마트 한복판에 배 깔고 누워 엉엉 울기 신공으로 마법 소녀 변신 장난감을 얻어내는데 성공. 손에 넣은 요술봉을 힘차게 휘두르면서 외쳤다. 악의 무리는 내가 처단한다! 앙큼하게 포즈를 취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나는 무력한 아이였으니. 정해진 학교에 가고 학원을 다녀와서 숙제를 마치고 다시 학교에 가기 위해 잠자리에 드는 삶을 반복해야만 했다. 허탈한 마음을 달래주는 건 역시 텔레비전에서 등장하는 소녀들의 달콤한 목소리였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일이 잔뜩 있어. 그러니 어린이 여러분, 우리 모두 희망을 꿈꿔요.어느덧 나는 어른이 되었고 악의 무리를 처단하기는커녕 허리 통증으로 골골대는 슬픈 육체를 지니게 되었다. 내게 숨겨진 힘이라곤 종일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무적의 게으름과 동네의 숨은 맛집을 발견해 내는 신묘한 레이더가 전부다. 어렸을 때 꿈꾸던 미래는 이보다 훨씬 극적이었던 것 같은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빠진 만화처럼 내 삶도 맹숭맹숭한 느낌이다. 희망을 꿈꾸며 신나는 모험을 떠나는 것까진 기대하지 않지만 축 처진 일상에 낙관이라는 마법의 가루 한 스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이런 이야기를 하면 주변 사람들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와하하 웃는다. 언제부터 꿈과 희망을 말하는 것이 유치한 일이 되었을까? 가족과의 대화는 늘 답답하게 끝이 나고 친구들을 만나면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만 나누게 된다. 아무래도 다들 낭만 없이 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무턱대고 꿈만 꾸면서 사는 사람을 이기적인 몽상가로 보는 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 참 현실감각이 없네, 하고 혀를 차면서 답답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꿈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돈에 대해 말하는 게 더 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어쩌면 꿈과 희망이라는 관념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너무나 무거운 것이기에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마법 소녀를 꿈꾸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소설가라는 또 다른 꿈을 품게 되었다.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문학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읽고 쓰는 일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글 쓰는 일 외에 다른 일들은 다 우습게만 보였다. 누가 쿡 찌르면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공기가 과도하게 주입된 풍선 같았다. 저는 소설만 쓸 수 있으면 제 인생이 어떻게 되어도 괜찮아요. 그런 이야기를 버릇처럼 하곤 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포기한 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그때의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을 만나면 세계를 구하려는 마법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기 자신을 내던져서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겠다는 어떤 결연함을 품고 있는 소녀들. 나는 이제 그들이 안쓰럽다. 어깨 위에 얹힌 짐이 너무나 거대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늘을 짊어지고 사는 아틀라스의 형벌을 스스로 경험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마법 소녀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건 어른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건 세상을 구한다든가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겼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어느덧 새해가 밝았다. 정말이지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모래 같다. 내 삶에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돌아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같다. 시간이라는 파도를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오랫동안 꼭 붙잡고 있는 꿈은 잘 살고 싶다는 마음. 잘 살고 싶다는 건 작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건 세상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우치는 중이다.거짓말처럼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보다 운전 걱정부터 들고 가슴 아픈 사건을 보고서도 숨 한 번 길게 내쉰 뒤 다시 할 일에 몰두하는 새해 아침이다. 강력한 마법에 걸린 것처럼 내 삶이 완전히 뒤바뀔 거라고 믿지 않지만 좋은 세상을 바라며 요술봉을 휘두르던 그때 그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다. 각자가 품은 아주 작은 꿈, 그거면 한 해를 살아낼 충분한 동력이 될 것이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일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작년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기길 기대해도 좋겠다. 그러니 어른 여러분, 새해에는 우리 모두 희망을 꿈꿔요.

2024-01-02

너의 절망을 바라는

EBS에서 제작한 ‘대학입시의 진실’은 한국의 대학입시 제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교육다큐멘터리이다. 총 6부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에서는 종종 다른 나라의 제도와 문화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5부에서 일본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방식이 흥미롭다. 해당 장면에서는 일본의 사회적 문제로 급부상한 ‘격차사회’라는 현상을 다룬다. 2008년 리먼 사태 이후 회자되기 시작한 이 용어는 부모의 학력과 연수입이 자녀에게 유전되는 상관관계를 표현한 단어이다. 평균적으로는 사립대학 루트를 밟은 부잣집 아이와 공립교육 루트를 밟은 가난한 아이의 교육비가 3배 가까운 차이가 나는데, 이는 부모의 경제적 계층이 아이에게 세습되는 현상으로 직결된다.계층 이동의 통로가 막히면 사회의 역동성이 감소하고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다. 이는 자녀의 인식 수준에서 보다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성공에 대한 자신감에 있어 상속부자 자녀의 경우 47.3%가 긍정 응답을 한 반면, 비정규직2세의 자녀들은 9.4%만이 긍정 응답을 하였으며, 노력의 보상에 대한 믿음 역시 계층에 따라 각기 61.4%와 26.8%로 집계되었다. 가난의 책임에 대해서도 상속부자 자녀들은 52.2%가 개인의 책임이라 응답한 반면, 비정규직2세의 자녀들은 9.8%만이 개인의 책임이라 응답하였다. 기회의 평등에 대해서도 상속부자의 74.1%는 긍정응답을 한 반면, 비정규직2세의 자녀들은 단지 23.2%만이 긍정응답을 하였다. 조금의 추상화를 거쳐 말하자면, 계층에 따라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흥미롭다고 느낀 건 이와 같은 부분만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사회가 불평등할 수밖에 없으며, 어떤 제도도 모두에게 공정하게 작동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흥미를 느낀 건,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택한 일본 니트족의 사례이다. 프로그램에서는 나다 요시후미라는 자발적 니트족의 사례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수입이 없음에도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한 달 100만원 가량의 생활비로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최소한의 생활을 하는 그는 미래 대신 지금의 행복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낮에는 파친코, 밤에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하는 그는 남는 시간에는 자신이 가보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을 해보며 시간을 보낸다.비록 수입도 없고 생활도 궁핍하지만 자신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그가 말하는 행복의 비결은 ‘3주 이후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기에 그 이상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싫은 일이나 힘든 일은 하나도 하지 않기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꽤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저렇게 사는 것이 정말 좋은 삶인가? 불안하진 않은가? 그런 여러 종류의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놨기 때문이다. 만약 중병에 걸린다면? 혹은 사고를 당한다면? 그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신에게 불쑥 찾아든 불행에 그는 과연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어떤 재난과 불행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을 그의 삶을 바라보며 나는 그가 내심 한심하다고, 혹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어쩌면 그는 자신의 현실에 가장 책임감 있는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먼 미래에 찾아올지 모르는 불행을 막기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 책임감 있는 삶인 것일까? 어쩌면 내심 나는 나의 삶의 상시적인 불행에 대한 보상을 그의 삶에 대한 힐난으로부터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내심 그의 삶이 나보다 불행해지길 바라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라도 나의 삶을,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솔직해지자면, 나는 어느새 그에게 재난과 불행이 닥쳐오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현재를 긍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상하지, 그의 삶이 불행해지는 것과 나의 삶이 행복해지는 건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는 행복의 조건을 찾아낸 것이고 그것에 맞춰 삶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나는 왜 그의 불행을 바라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문제는 행복의 조건도 삶의 방향도 선택하지 못한 ‘나’의 문제인 건 아닐까?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불행을 바라는 나의 모습이 문득 씁쓸하기만 하다.

2024-01-02

크리스마스 기도

내년 크리스마스엔 나를 포함, 모두가 행복했으면. 세상 돌아가는 데 무심한 나도 크리스마스에는 저절로 들썩인다. 산타클로스, 오색찬란한 트리, 흥겨운 캐럴, 코미디 영화, 외식, 선물, 데이트 등 동화적인 축제 분위기가 사람을 괜히 들뜨게 한다. 밖에 나가고 싶고, 누구라도 만나고 싶고, 맛있는 거 먹고 싶다. 놀이공원이나 백화점에 가고 싶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만30대의 마지막 성탄절에 약속 없이 집에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크리스마스이브 점심이다. 늦게 일어나서 고춧가루 팍팍 넣고 짜파게티 끓여 먹었다. 창문을 여니 간밤에 눈이 내렸다. 곱게 쌓인 눈을 보니 짜증부터 난다. 집단축제를 싫어하면서도 축제에 끼고 싶은 아웃사이더의 양가감정은, 낄 곳이 없다는 걸 아는 순간 비틀린 심술이 된다. 눈 대신 비나 실컷 와서 거리가 온통 질척거리면 좋겠다. 미세먼지가 가득하면 좋겠다. 건물 외벽을 통째로 성탄 특집 디지털 아트로 만들어 구경꾼이 넘쳐 나는 명동 백화점에 정전이나 되면 좋겠다. 그냥 다 망했으면 좋겠다.연휴의 나른함에 원고 마감을 깜박하고 있다가 급히 책상에 앉았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재재작년에도 나 홀로 집에서 보냈다. 30대를 돌아보니 크리스마스에 데이트 같은 걸 해본 기억이 없다. 낚시를 가거나 혼자 포장마차에서 허파볶음에 소주를 마시거나 티브이 보다 쓰러져 잠들었다. 대학 강사가 되면서부터는 성적 입력하느라 자체 가택연금이었다. 20대 때는 나가 놀기라도 했는데, 그래봐야 같은 공기 마시는 것조차 짜증나는 친구들이랑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술 들이부은 게 전부다. 오늘 저녁엔 뭐 할까. 그래도 성탄전야인데 소고기 구워서 와인이라도 마실까? 혼자라고 생각 말기, 힘들다고 울지 말기. 눈물이 앞을 가린다.몇 해 전 방영된 ‘공부의 배신’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종종 생각난다. 공부 열심히 하고 스펙을 아무리 쌓아도 처음부터 저만치 뒤쳐진 채 출발한 흙수저라서 꿈을 포기해야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서울 명문대 국문학과에 다니는 선혜씨는 학업과 알바를 병행한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방세 치르고 공과금 내고 독서실 끊고 하면 생활비도 안 남는다. 근사한 외식이나 쇼핑은 사치다. 그런데도 그 빠듯한 용돈으로 엄마 선물부터 고른다. 착한 친구들은 이렇게 답답하도록 착하다. 자신을 위해선 한 푼도 쓰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 많고 멋 부리고 싶은 20대에 포기부터 배운다. 그래서 아예 밖에 안 나간다. 나가면 보이고, 보면 사고 싶어지니까. 유진목의 시 ‘누란’은 떠올릴 때마다 눈물 난다. “엄마 엄마는 맛있는 것 다 먹었어? 가고 싶은 곳 다 갔어? 하고 싶은 것 다 했어? 나는 못했어”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심리적 문제, 취업 실패 등 여러 이유로 외출 없이 방 안에서만 생활하는 ‘은둔 청년’이 서울에서만 13만 명이라고 한다. 전국적으로는 6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적 빈곤에 의해 비생산적 활동인 사교 모임, 여행, 외식, 문화생활 등을 금지당하고, 그저 ‘살아 있음’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활비만 움켜 쥔 채 좁은 방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다. 무기력함이 임계점을 돌파하는 순간 마침내 너무 많은 결핍들은 아예 결핍을 무화시켜서 주체로 하여금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욕망 불구의 상태에 머무르게 한다. 그것만이 돈 안 드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가슴 설레는 축제가 아니라 찬란한 빛에 더욱 짙어지는 유폐, 춥고 초라한 그늘의 감정일 뿐이다.한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가장 좋아한 복음성가에 이런 노랫말이 있다. “가난한 영혼 억눌린 영혼 지극히 작은 영혼까지 주의 사랑을 전하리라. 아름다운 그 사랑을…. 주님 사랑 그들에게 전하리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주님 사랑 온 세상에 가득하리라. 온 세상에 가득히.” 앞에서 몽니를 부렸지만 진심이 아니다. 주님 사랑은 됐고 축제의 흥겨움이나 온 세상이 함께 나누면 좋겠다. 수많은 선혜씨들은 왜 크리스마스의 들뜸까지 포기해야 하나. 그들은 가난한 영혼도 억눌린 영혼도 아니고 지극히 작은 자도 아니다. 크리스마스이브 하루만이라도 돈 걱정, 사치라는 죄의식 다 집어던지고 즐겁게 보내면 좋겠는데, 산타할아버지 가능해요? 안 울면 소원 들어준다면서요. 안 울게. 제발, 제발 좀 모두 행복하게 해줘요.

2023-12-26

마음의 서랍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서랍은 조금씩 깊어진다. /언스플래쉬 2023년도 끝나간다. 올 해는 조금 특별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경험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예기치 못한 과거를 마주했을 땐 쓸쓸함이 감돈다.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과 방문했던 미술관 앞을 우연히 지난다거나 이제는 연락이 끊긴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나누었던 카페를 예기치 못하게 들리는 등 과거의 시간과 현재가 불쑥 겹쳐질 땐 해독할 수 없는 암호를 마주한 듯 난처해진다.A는 여전히 시를 쓸까? 늘 퀭한 얼굴로 유령처럼 미끄러지듯이 걷던 사람이었다. 말을 걸기 전까진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아서 처음엔 다가가기 참 어려웠는데, 알고 보니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늘 피곤한 얼굴로 다니던 거였다. 강의도 자주 빠져서 게으름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밤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읽으며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나와 A는 대학 졸업 이후 더 가까워졌지만 모종의 이유로 마음도, 거리도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따금 A의 안부가 궁금해지지만 연락은 하지 않는다.어떤 일은 그대로 묻어두어 침묵으로 용서를 구하는 편이 나으니까. 그래서 나의 서랍 한 칸엔 미안한 사람들이 몇 있다. 미성숙함으로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 잘 지내고 있길 바라며, 그들의 건강을 조심스레 빌어본다.올 해의 나는 병원을 꾸준히 다니고 있고 주기적인 상담도 받고 있다. 이런 변화를 소중한 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알리며 조금 더 변화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나를 스스로 마주하는 횟수도 점차 늘고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 미성숙한 것들, 강박에 가까운 것과 나의 취약점, 그리고 동시에 나의 장점 나만이 가진 특징, 나의 능력도 살펴보게 됐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다채롭고 특징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설렜다. 머릿속의 안개가 차차 걷히며 실체가 드러나는 기분이었고 그 실체는 생각보다 끔찍하지 않았으며 그 실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어떻게 미래를 그려나가야 하는지 기대 되기 시작했다.물론 그날그날의 사정에 따라 머릿속의 안개는 포악한 뭉게구름이 되기도 하고, 소나기가 되어 급작스레 온 몸을 젖게도 한다. 눅눅하고 축축한 기분이 들 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시금 비가 멈추고 안개가 걷히길 기다린다. 그 시간 동안은 조급해하지 않는다. 감사하게도 시간은 당연하다는 듯 흐르고 변화하니까.이 시간들이 반복되며 여유를 보관할 마음의 서랍이 칸칸이 생겼다. 이젠 과거를 상기하며 불편한 외로움을 끄집어 내지 않을 수 있고, 지난 사람들의 안부를 죄책감 없이 빌어볼 수 있으며 나에 대해 조금 더 관대해지고, 좋고 싫음을 구분할 수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리곤 타인에 대한 사랑의 정의도 다시금 바라보고 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이해 받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고 해서 공허함을 느끼지 않는 것, 서로 다른 생각 앞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 물론 내가 너무 다치지 않을 만큼 건강할 정도로만.설날과 추석, 일 년에 두 번 나는 본가로 향한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그리고 더 들어가서 영암까지 3시간 반 정도 걸린다. 집에 가면 부엌 식탁 위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차려져 있다. 나를 기다리며 삼일 내내 장을 봤다는 엄마. 본가 왔을 때 많이 먹어두라며 툴툴거리는 아빠, 그리고 다섯 여섯 살 차이 나는 동생들까지 모여 가족의 형태를 이룬다.우리 가족이 만난 한 시간 정도는 늘 평화롭다. 하지만 그 이상이 넘어가면 우리의 대화는 또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라는 걸 인지할 때마다 나는 늘 커다랗게 자리한 화를 누르기 바쁘다. 하지만 곧 무력해진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가족을 이루고, 이는 아주 평범한 모습이라는 걸 아니까. 사랑의 형태는 서툴고 어설프고 그래서 곧 깨어질 듯 불안정하다. 그래서 나는 자주 화를 내며 도망치지만, 이젠 이 또한 보통의 사랑의 형태임을 안다. 그러니 눈을 감고 호흡을 하며 저 멀리 있는 사랑을 불러본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마음의 서랍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2023-12-26

정의롭지 못한 희생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Pixabay 그런 상상을 해보자.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 납치당했다. 납치범들은 인질을 무사히 돌려받고 싶다면 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공개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당신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만큼 수치스러운 내용의 영상을 인터넷에 올릴 것을 요구한다. 제한 시간은 앞으로 12시간. 당신은 순순히 납치범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까?이와 같은 상상이 너무 손쉽다고 느껴진다면, 몇 가지의 가정을 더 덧붙여보자. 당신은 영국의 총리이며, 인질로 잡힌 사람은 공주이다. 납치범이 협박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버린 탓에 전 세계의 시민들마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왕가에서는 ‘총리가 공주를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라 믿는다’는 언질이 전해온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당신은 영원히 당신의 치부가 될 영상을 인터넷에 올릴 수 있을까?어쩌면 당신은 ‘사람을 살린다’는 명제로 인해 이와 같은 순간에 대해 손쉬운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영상’인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시민들 또한 상황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므로, 시민들 또한 당신에게 그리 심한 인격모독을 저지르진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생각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사실 이와 같은 가정은 실제 상황이 결코 아니다. 이건 그저 영국의 TV쇼인 ‘블랙 미러’의 한 장면일 뿐이다. 하지만 이 TV쇼는 우리에게 흥미롭고 불쾌한 통찰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이다. 그건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가정 속에서, 당신은 자신의 생각을 통해 상황에 대해 판단하고 옳은 결정을 하고자 시도하리라 생각하지만, 그건 당신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잠시 TV쇼의 내용을 살펴보자. 물론 총리는 현명한 사람이므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총리는 최후의 순간에 영원토록 자신의 치부가 될 영상을 촬영해 대중에게 공개하길 선택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그의 선택이 결코 사람을 살린다는 대의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실업률을 비롯한 경제적 문제로 인해 하락하는 국민들의 지지도와 왕가의 압력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문제들이 대의보다 더 큰 압력이 되어 총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그렇기에 그가 자신의 부끄러운 영상을 찍기에 앞서 국민들을 향해 ‘하지만 저는 아내를 정말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에게서 보이는 것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결함이 아니다. 거기에서 엿보이는 것은 압력에 휘말려 자신도 모르는 선택을 해버린 순진한 희생양의 모습만이 화면을 가득 채울 뿐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어쩌면 단지 불쾌할 따름인 이 TV쇼가 현실에 전달하는 메시지는 단순하고도 강력하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다이버즘(Godivaism)과 같은 정치 역학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사람들은 모두 대의를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는 것. 어쩌면 이러한 수사들마저 철지난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 현재라는 시대라는 것이다.하지만 과연 이게 다일까? 어쩌면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은 한 걸음을 디뎌야 하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대의가 타자의 논리를 수용하기 위한 포장에 불과해져버린 시대에서, 우리는 다시금 삶의 이유를 재발견해야 한다는 것. 예컨대 주류 언론과 인터넷에 넘쳐나는 ‘주류 의견’에 대한 지향성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의 논리에 대해 성찰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리는 그 대가로 선택의 자유를 지불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희생양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물론 이 말은 결코 반지성주의·반계몽주의적 입장에 서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입장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내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존재라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의 사유는 정녕 우리의 것일까? 우리는 단지 ‘주류 의견’에 스스로의 사유마저 내맡겨버린 껍데기에 불과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삶을 선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그로부터 선택을 감행하며 결과마저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예컨대, 자기에 대한 책임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2023-12-19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무엇인가요? 이따금 받는 질문만큼 난감한 것은 없다. 백과사전식 답을 구한다기보다 문학에 관한 생각을 묻는다는 걸 알기에 괜히 더 어렵게 느껴진다. 나는 쓰는 사람이면서 읽는 사람이고 소설은 오랜 시간 내 옆에서 특별한 의미로 존재했다. 사적인 감상을 넘어 소설이라는 거대한 장르가 쌓아온 역사와 의미가 여타의 장르와 확연히 구분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대체 소설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 것일까?문학은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만들어지는 장르다. 영상이나 이미지로는 구현해 낼 수 없는 언어적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이 문학 작품의 묘미다. 소설은 언어로 ‘이야기’를 쓴다. 소설에는 필연적으로 이야기를 내어놓는 사람, 즉 화자가 등장한다. 화자는 자기만의 목소리로 어떤 사건이나 생각 등을 내어놓는다. 독자는 화자를 따라가며 소설의 세계를 이해한다. 일련의 흐름 끝에 작품은 결론에 닿고 독자는 당연하게 누군가(등장인물 혹은, 작가)의 이야기를 읽었다고 생각하게 된다.그러나 소설을 이야기라고만 규정한다면, 놓치게 되는 것들이 많다. 줄거리만 두고 보자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작품도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사회에서 공존하는 무수한 서사 장르는 소설보다 더욱 명확하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야기’ 앞에 ‘시의성을 가진’ 혹은 ‘징후를 짚어내는’ 정도의 수식어를 붙이면 어떨까? 물론 그런 것들이 좋은 글을 만드는 데 필요한 요소임을 부정할 순 없으나 소설의 본질을 설명하기에 완벽한 것 같진 않다.여기 소설은 ‘사고’라고 말하는 작가가 있다.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무의미의 축제’ 등의 작품을 썼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작가, 밀란 쿤데라다. 그의 작품을 따라가노라면 어째서 소설을 ‘사고’라고 말하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한 편의 이야기를 감상한다기보다 철학적 논고 혹은 독특한 형태의 에세이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응당, 소설이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쓰는 사람, 그러니까 작가가 전면으로 등장한다. 전통적인 방식의 소설에서 작가는 완벽하게 숨어야 하는 존재다. 작가가 보이는 순간 독자는 그 이야기가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쿤데라는 소설 속 인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건 어리석다고 말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등장인물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몇몇 문장, 혹은 핵심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고, 작가는 작품 속에서 직접 기술한다. 이들은 실존하지 않는다. 테레자는 꾸르륵 소리로부터 탄생했으며 토마시는 “한 번은 중요치 않다”는 문장에서부터 시작됐을 뿐이다.이제 소설은 모두 가짜이며, 이야기는 작가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인물을 통제하지 않으며, 단지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은 모두 각자의 독특한 서사를 지니고 있다. 이들이 충돌하며 벌이는 사건과 그에 따른 결과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롭다. 거기서 작가는 또다시 인물과 세계의 해설자 역할을 자처한다. 작가가 만든 등장인물과 등장인물이 만드는 이야기, 다시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 이 모든 것이 합쳐지면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훌륭한 소설임에는 이러한 내막이 자리하고 있다. 기존의 소설과 다른 낯선 형식을 통해 도리어 소설이 가진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소설이 ‘사고’라는 쿤데라의 선언은 다만 형식적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작품에는 작가 고유의 논리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뜻임을 이해할 수 있다.그런 면에서 독자가 한 작가를 사랑하고 그의 작품을 따라 읽는 행위는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 것 그 이상이 될 수밖에 없다. 작품이 나아갈수록 작가의 발화가 영글어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독자는 작품 내부의 서사와 더불어 또 하나의 세계를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을 읽어내는 순간 소설의 이야기는 이야기 너머의 이야기로 확장된다.소설이 무엇인지 묻는 것. 이것은 요즘 같은 시대에 소설이 왜 필요한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답을 내린다. 그것을 읽어내는 것 또한 문학이 주는 모종의 재미다. 끝나지 않는 질문과 완전한 답이 될 수 없는 답이 섞여 매력적인 소설의 세계가 된다. 이 모든 것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다.

2023-12-19

온몸의 사랑

성현아 문학평론가가 경향신문 11월 22일자에 기고한 글 ‘무해함에 햇살 비추기’를 감명 깊게 읽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비폭력적이고 잔잔한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현상을 짚으면서 “무해함을 요구하는 독자 및 시청자에 맞춰 고통당하는 이들의 비명을 말끔히 도려낸 고요한 진공 공간만을 전시하는 작품들이 쏟아진다는 점”을 우려하는 내용이다.성 평론가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의미의 소극적인 무해함보다 나의 유해함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개선해 나가는 적극적인 무해함”의 예로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언급했다. 정신병동 환자들을 편견 없이 사랑으로 보살피던 간호사 ‘다은’이 우울증에 걸려 정신병동에 입원한 후 “나는 여기 있는 사람들하곤 다르다”고 호소하며 그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기 내부의 편견과 마주하는 장면에다 “편견이란 우리 몸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어둠 속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에 스스로 밝힌 소박한 내면의 촛불로는 결코 찾아낼 수 없다. 외부의 무엇과 부딪쳐 깨어질 때 비로소 번뜩이며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아름다운 문장을 겹쳤다.“무해하기만 한 서사보다는 무해함의 허상에서 벗어나 다종다양한 해로움을 조명하되, 그것에 잠식되지 않고 덜 해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독려하는 서사가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는 김초엽의 단편소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떠올렸다. 가까운 미래에 ‘인간배아디자인’이 상용화돼 부모들은 태어날 자녀의 신체, 성격 등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게 된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이 기술을 활용해 성격의 결함이나 신체적 장애가 없이 탁월한 두뇌능력과 예술적 감성과 피지컬을 갖추고 태어난 이들은 ‘개조인’, 돈 없는 부모에게서 자연적으로 태어난 이들은 ‘비개조인’이 된다. 개조인들은 지구 밖에 그들만의 완전무결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비개조인들은 가난과 질병과 전쟁으로 얼룩진 디스토피아 지구에 남는다.무해한 유토피아에서 성년이 된 개조인들은 일종의 성년식으로 조상들의 행성인 지구에 순례 여행을 다녀와야 한다. 그런데 지구에 견학을 간 개조인들 중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있고, 주인공인 데이지는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추적해나간다. 그리고 알게 된다. 평화롭기만 한 유토피아엔 오히려 사랑이 없다는 것을, 지구에 남기로 결정한 순례자들은 사랑 없는 유토피아보다 사랑이 있는 디스토피아를 택했다는 사실을 말이다.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사랑의 조건으로 ‘비대칭 관계’를 제시한다. 비대칭 관계란 타인에 대한 조건 없는 희생과 책임을 말하지만 상호 보완의 의미에 더 가깝다. 결핍이 없으면 채움도 없다. 나의 부족함을 당신이, 당신의 해로움을 내가 서로 감당하면서 끌어안는 것이다. 완벽하기만 한 사람들 사이에선 연민이라는 감정이 생길 수 없다. 연민과 사랑은 타인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순간에 불꽃이 튄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구정물 한 방울,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새하얀 옷을 입고 현실이라는 땅에서 발을 뗀 채 마치 천사처럼 환하고 가볍고 평화롭기만 한 사랑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나의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8년째 누워 계신다. 이젠 눈이 보이지 않고 귀는 원래 들리지 않았으며 걸을 수도 없어 침상과 한 몸으로 지낸다. 나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 침대 위에 스마트폰을 던져두고 조명을 끈다. 그러면 방금 던진 스마트폰을 찾지 못해 어둠을 더듬는데, 그때마다 ‘할머니는 이런 세계에 계속 갇혀 있구나’ 생각에 울컥한다. 감성이 풍부한 밤에 베개를 눈물로 적시며 할머니를 생각한다. 꼬옥 안아드려야지. 그런데 면회를 가면 이상한 국면이 펼쳐진다.생각 속에서 작고 연약하고 불쌍하던 할머니가 만져지는 눈앞의 현실에서는 작고 연약하고 불쌍하고 냄새가 나고 끈적거리는 할머니인 것이다. 나는 할머니 몸에서 나는 악취와 분비물에 얼굴을 찡그리며 안는 것도 놓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다. 그 냄새와 타액은 내게 유해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냄새와 끈적거림을 참으면서 기어이, 끝까지 할머니를 끌어안는 것.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 멀찌감치 떨어져서만 애틋하고 순정한 관념의 사랑이 아닌, 가까이 가 만지고 껴안고 견뎌대는 온몸의 사랑.

2023-12-12

나는 완벽하지 않아

최근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내가 완벽주의자임을 깨달았다. 스스로 완벽한 상태가 존재하다고 믿으며, 달성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기준을 세워 그것을 실패할 때마다 번번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했다. 나는 검사지를 보며 이정도 스트레스는 현대인들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 수준이 아니냐며 반문했지만 선생님은 그 정도가 다르며, 노력이 실패할 때마다 자기 비난으로 이어지며 우울감으로 빠져 들기 쉽다며 짚어 주셨다.사실 내가 자주 느끼는 감정적 공허함은 기질적인 문제가 아닐까 많은 생각을 해봤지만 실은 내 스스로 만든 완벽한 기준치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에서 온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정말 내가 완벽주의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많은 사람들이 내게 칭찬을 할 때마다 그들이 하는 말을 인정하기 쉽지 않았음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칭찬을 하는 이유는 그저 예의상 건네거나 또는 분위기상 듣기 좋은 말을 골라 건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들이 말하는 칭찬의 정도까지 내 스스로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아직 부족한 게 참 많다고 늘 스스로 여겨왔으며 어떠한 성과를 보여도 남들 하는 만큼 했을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최근에서야 점점 깨닫고 있는 건, 완벽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면 결국은 받아들이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많은 의사들이 권하는 방법은 바로 완벽주의를 인정부터 하는 것이다. 완벽주의는 일의 효율을 높이고 좋은 성과를 이끌어 오는 긍정적인 성격도 있기에 건강한 완벽주의의 장점을 바라보고 오히려 이를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그리곤 건강이나 외모, 성공이나 행복에 관한 기준을 적어보고 지금 조금씩 이룰 수 있는 목표만을 놔두고 과감히 지워버려야 한다고 한다. 실현 가능한 목표만 지향하여 성공 확률을 높여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계속해서 심어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수가 있어도 되고 실패해도 된다.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선 실수는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므로 새로운 시도 앞에서 실패는 반드시 따른다.두려움의 뿌리는 과연 내 깊은 곳 어디까지 침범했을까 생각하다보면 아득해진다. 나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완벽을 추구하며 노력했을 뿐인데 친구관계도 사회생활도 늘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늘 실패에 가닿을 때마다 나의 노력과 운이 부족했을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며 실패의 이유는 나 자신에게서 더는 찾을 수 없다.요즘 일을 할 때에도 나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었다. 그래서인지 늘 목표를 내 기준치보다 훨씬 더 높게 잡곤 했다. 높게 잡은 목표를 어떻게든 혼자서 잘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애썼으나 일의 경험이 적은 내가 혼자 잘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일이 잘 안 풀리는 시점부턴 주위 타인들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민망하고 부끄럽던지.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자책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듯싶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하지만 이번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내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자각하게 되었고, 실은 내가 지금 당장 해낼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 직시를 해야 함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알자마자 왜 그토록 일을 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는지, 왜 해결할 수 없는 일의 굴레에 갇혀 있었던 것만 같은지, 집에 돌아가자마자 온 기력이 빠져서 잠에 들기 바빴는지 이 모든 게 차차 이해되기 시작했다.나는 완벽할 수 없다. 특히 혼자서는 더욱 완벽해질 수 없다. 스스로 지금 당장 해낼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만을 세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때론 실패할 수 있고 실패에 가까워지더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에게 손을 뻗으면 된다. 좋은 사람이라면 분명 도와줄 것이고 나 또한 그 도움을 받아 일을 잘 해결하면 된다. 서로 간의 도움을 통해 우리 사이의 신뢰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일과 사람이지만 점차 조금씩 나와 타인을 믿으며 나아가다보면 점차 더 나은 변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완벽한 상태는 존재 하지 않지만 스스로 만족할만한 온전한 상태는 존재할 것이다.

2023-12-12

누구를 위해

2030 엑스포 유치에 실패했다. 2030 엑스포는 경쟁 초기부터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로 꼽혔던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국제적 행사인 엑스포를 유치하는 데 실패하였다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엑스포 관련 주식으로 꼽히던 건설주, 항공주, 숙박 및 유통 관련 주식들이 일제히 하락세에 빠졌다는 소식마저 전해진다. 유치 실패의 파장이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작용하리라는 예측이 들려온다.그런데 궁금하다. 우리는 왜 엑스포를 유치해야 했던 걸까. 물론 전 세계적인 행사라는 점에서 엑스포 유치가 갖는 장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내외의 보도 자료를 살펴보자면 단순히 많은 관광객이 방문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추상적인 전망 외에는 별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다. 부산광역시는 엑스포 유치가 지역 개발 및 성장 동력이 되어줄 것이라 판단했다고 하지만, 그 또한 추상적으로 느껴지기는 매한가지이다. 오히려 지역 개발이 장기적인 발전 계획 없이 국제적 행사 유치 여부에만 달려있는 것이라면, 이 또한 이상한 이야기이다.그래서일까. 이번 2030 엑스포의 부산 유치와 관련된 PT 및 영상에서는 어떤 구체적인 설명을 찾기 어려웠다. 왜 엑스포를 부산에서 해야 하는지, 부산은 어떤 곳이고 어떤 강점이 있는지 등의 구체적인 정보 대신, 유명 배우와 아이돌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만 가득 차있을 뿐이었다. 배경음악으로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사용된 것도 의아하다. 미래를 지향하는 엑스포의 가치가 무색하게, 구태여 10년 전의 유행가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어야만 하는 걸까? 그것도 부산에 대한 노래도 아닌 서울 ‘강남’에 대한 노래를? 대체 왜?이처럼 부산 엑스포의 PT 영상에는 부산에 대한 로컬리티 대신 조악한 국뽕만이 가득하다. 그래서일까, 영상을 보고 있자면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영상인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 세계 각국의 투표자를 시청자로 가정하고 만들었다기에 이 영상은 너무나도 조악하다. 어떠한 설명도 서사도 없이 단지 유명 인사들이 ‘부산!’하고 외칠 뿐인 이 영상을 보고, 어느 누가 부산에 투표하겠는가.이것이 비단 PT 영상만의 문제는 아닐 듯 싶다. 관련 보도 또한 한심하긴 매한가지이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유력 신문에서는 이번 엑스포 유치 실패를 오일 머니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 평가하며, 아쉬운 석패처럼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아니다. 엑스포 유치 투표에서 부산은 2차 투표도 치르지 못했다. 리야드가 119표, 부산이 29표, 로마가 17표를 얻음에 따라, 전체 2/3의 득표를 얻은 리야드의 유치가 1차 투표만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걸 과연 아쉬운 패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런 구차한 워딩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유치 시도는 엑스포라는 행사에 대한 몰이해와 우리가 가진 역량과 장점에 대한 몰이해가 빚어낸 해프닝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엑스포의 취지에 걸맞는 홍보를 하지도 않았고, 부산이라는 도시의 강점을 세계에 알리지도 못했다. 필수적인 정보가 담겼어야 할 자리에는 유명 인사들의 해맑은 웃음만이 가득 찼을 따름이다. 하기사, 정작 같은 나라의 국민들마저 부산 엑스포 유치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세계의 어느 누가 그 당위성과 필요성을 알아준단 말인가.문제는 또 있다. 과연 우리나라에 지금 엑스포와 같은 국제적 행사를 유치할 역량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엑스포와 같은 국제적 행사는 단지 유치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가진 미래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다양한 행사 및 전시를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는 국제적 행사인 세계 잼버리 축제를 파행으로 마무리 지은 경력이 있지 않은가? 과연 우리가 세계 엑스포를 유치했더라도, 그런 국제적 행사를 잘 개최하고 마무리 지을 수 있었을까? 차라리 유치에 실패한 것이 다행인 것은 아닌지 하는 안 좋은 생각마저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이토록 엑스포 유치에 사활을 걸었던 이유는 뭘까. 어쩌면 세계 잼버리 축제 때와 마찬가지로, 국제 행사 유치라는 치적 쌓기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건 누구를 위한 치적 쌓기였던 걸까. 누구를 시청자로 가정한 것인지 모호했던 PT 영상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2023-12-05

목욕탕이라는 세계

평소처럼 하릴없이 동네를 배회하던 중이었다. 익숙한 카페와 음식점이 늘어진 구역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가슴을 뛰게 하는 문장 하나가 보였다. ‘목욕 됩니다.’ 세상에, 우리 동네에 목욕탕이 남아 있었잖아?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 이후로 대중목욕탕은 운영되는 곳보다 폐업한 곳이 더 많았으니까. 참 어려운 시기를 굳건하게 버텨주었구나.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그럴 수밖에. 나와 목욕탕 사이에는 오랜 시간 쌓아온 유대감이 있었다. 우리의 진득한 재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어린 시절, 주말이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집 앞에 있는 허름한 목욕탕은 물론이고 번화가에 들어선 신식 찜질방, 지리산 암반수가 흐른다는 온천까지. 그야말로 목욕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탕 포장지처럼 부스럭대는 옷은 벗어 던지고 얕은 탕에서 찰박찰박 물장구를 치면 얼마나 재미있던지. 목욕탕에서 만난 아주머니들이 귀여워해 주는 것도, 또래 친구들을 만나서 함께 노는 것도 마냥 즐거웠다. 몸을 오래 담그고 있으면 손끝이 쪼글쪼글해지는 것도 신기하고, 목욕이 다 끝나고 먹는 바나나 우유의 단맛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입안에 오래오래 머금고 있기도 했다.즐거움이 있으면 괴로움도 있는 법. 엄마의 손 위로 때타월이 씌워지면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공포의 때밀이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젊은 시절 엄마의 손은 맵기로 유명했으니, 나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엄마는 내 몸을 한 손으로 고정하고 다른 손으로는 팔다리가 벌게지도록 박박 때를 밀어주었다. 국수 가닥처럼 줄줄 밀려 나오는 때를 보면서 잘 좀 씻고 다니라고 등을 찰싹찰싹 때리기도 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다. 어린 나는 ‘시원하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목욕탕을 오기 위해 견뎌야만 하는 고행이라고 여기며 이를 꽉 깨물었다. 엄마가 때타월을 집어 들면 나를 찾지 못하도록 구석진 곳으로 후닥닥 도망가기도 했다.언제부터였을까. 목욕탕에 가는 게 꺼려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의 육체가 타인에게 보인다는 게 부끄럽다 못해 끔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옷을 벗은 여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도 껄끄러웠다. 그곳은 더 이상 재미있는 장소가 아니라 불편한 공간이 되어버렸다.그런데 이제 와서 목욕탕에 가고 싶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유난히 머리가 아프고 속이 시끄럽던 날, 나는 산책 중 우연히 발견한 목욕탕을 떠올렸다. 주택가 골목의 지하에 비밀스럽게 자리한 그 대중탕을. 카운터에서 수건 두 장을 받아 들고 여탕 문을 열기까지는 꽤 용기가 필요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 사람이 제법 있었다. 자리를 잡고 샤워기로 몸을 적시면서도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샤워를 마치고 열탕에 들어가자마자 불편한 기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휘발되었다. 온몸이 계란프라이처럼 주욱 퍼지는 것만 같았다. 내친김에 냉커피도 한 잔 시켰다. 투박한 물통에 담아 나온 커피를 한 입 들이키는 순간 여기가 극락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빨갛게 달아오른 양 볼을 하고 목욕탕 밖으로 나오는데 공기가 어찌나 상쾌하게 느껴지던지. 그때 알았다.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내 손을 잡아끌고 목욕탕으로 향하던 엄마의 기분을. 몸도 마음도 날아갈 것 같이 가볍다는 말의 의미를.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나는 한 달에 두 번, 꼬박꼬박 목욕탕에 출석 도장을 찍는다. 자연스럽게 목욕탕 아주머니들과 안면을 텄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왜 남들 출근하는 시간에 목욕탕에 와?’라고 물어보면 뭐라 대답하지. 혼자 고민했는데 그녀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말이지 경쾌한 것이었다. 동네에 숨은 맛집이 어디인지, 강아지 미용은 어디에서 시키는지, 아들보다 딸이 좋은 이유는 무엇인지. 뭔가를 질문하면 곧바로 답이 돌아온다. 어떤 고민거리도 순식간에 해결 가능한 마성의 사우나! 쭈뼛대는 내게 애정 어린 인사를 건네는 아주머니들을 보고 있노라면 동네 목욕탕을 누비던 꼬마가 된 기분이다.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고 돌아 다시 이 자리다.목욕탕에 가는 날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다. 욕장은 금방 사람들로 채워진다. 분주하게 자기 몸을 씻는 손짓. 사우나에 앉아 있으면 들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선풍기 앞에서 머리카락을 말리며 깔깔대는 여자들. 역시 나는 이런 세상이 좋다.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가 복잡해지는 때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목욕 바구니를 집어 든다. 수증기가 부옇게 피어오른 목욕탕에 입장하는 순간, 나를 한 겹 벗겨내는 신비한 세계로 발을 디딘 것만 같다.

2023-12-05

정의의 탈을 쓴 희롱과 저주

교사와 여고생이 실랑이하는 영상이 뒤늦게 화제가 됐다. 지난해 3월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다. 수업 시간에 매점에 가려는 학생을 제지하려 교사가 가방을 붙잡는 과정에서 머리칼이 함께 잡힌 게 발단이 됐다. 학생은 “저도 남의 집 귀한 딸”이라며 따졌다. 선생님에게 대드는 여고생의 까랑까랑한 목소리와 영상을 찍는 친구의 킥킥대는 웃음소리 속에서 교사의 훈계는 맥 빠진 듯 들렸다.난리가 났다. 댓글창엔 “교권 추락의 현주소”라며 서이초, 호원초 사건과 묶어 탄식하는 글, 학생인권조례와 촉법소년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 가정교육을 질타하는 글이 넘쳐났다. 다수 언론에서 보도했는데 거의 모든 기사에 백여 개에서 천 개 넘는 댓글이 달렸다. 그만큼 사회적 공분을 산 것이다. 특이한 건 다른 이슈들은 기사마다 ‘베댓’(공감수가 많은 댓글)이 다양한 데 비해 이 사건 기사들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댓글은 한결 같다. “꼬락서니 보니 어떤 인생을 살지 뻔하다”는 것.영상 속 학생은 짧고 타이트한 교복 치마를 입고 있다. 모범생처럼 보이진 않는다. 학생답지 않은 옷차림과 선생님에게 대드는 ‘버르장머리 없음’이 합해지면서 물어뜯기 좋은 빵이 됐다. 피라냐 떼처럼 달려든 어른들은 정의감과 도덕심에 불타올라 말했다. “룸망주”(룸살롱 유망주), “귀한 딸 밤마다 어디 출근하는지 알면 어머니 가슴 찢어질 듯”, “자퇴하고 술집 취업?”, “노래방 도우미”, “교복 보면 수준 보임. 앞으로 막 살겠군”, “탬버린 흔들고~”, “나가요”(성매매 여성을 일컫는 은어)라고.정의라는 가면을 썼지만 혐오의 민낯이 고스란히 보인다. 저열한 인상비평과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천박한 성희롱이다. 성별 및 세대별 댓글 비율을 보면 40대 남성이 압도적이다. 교복 치마 줄여 입었다고, 선생님한테 대들었다고 딸뻘 여학생더러 “나가요” 운운하는 게 과연 올바른 훈육인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을 하면 찔리는 데가 있을 것이다. 아니다. 이 또한 인상비평이니 관두겠다.치마가 문제인가 행실이 문제인가? 이미지와 행실이 짝을 이뤄 확증편향에 박차를 가했겠으나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면 점집을 차려라.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상황 안에서만 판단한다지만 지금 보이는 것으로 장차 보이지 않는 것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교사에게 대든 걸 나무라면 된다. 교복이 불량한 걸 지적하면 그만이다. 하나를 보면 하나만 봐라. 고작 한 순간 인상으로 어린 소녀의 남은 인생 전체를 폄하하고 저주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단정한 옷차림으로 대들었다면? 짧은 치마를 입고 예의바르게 행동했다면? 교복 치마는 상대적 조건일 뿐 절대적 근거가 아니다. 댓글을 단 이들은 “모든 룸살롱 여종업원은 짧은 치마를 입는다. 여고생은 짧은 치마를 입었다. 그러므로 여고생은 룸살롱 여종업원이 될 것이다”라는 유치한 삼단논법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솔직해지자. 훈육이 아니라 희롱하고 싶었다고, 걱정이 아니라 저주하고 싶었다고.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유행에 휩쓸리기 쉬운 나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 에고가 강하고 별 이유 없이 기성세대에 피해의식을 가질 때다. 당신들은 안 그랬나? 1990~200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오토바이 폭주하고, 교복을 ‘쫄바지’, ‘항아리바지’로 줄여 입거나 아예 ‘똥 싼 바지’로 늘여서 “온 동네 다 쓸고 다닌다”며 등짝 맞던 세대가 지금의 40대다. 선생님한테 대드는 일이야 흔했다. 그러고 보니 근래의 교권 추락은 학부모들이 교사들을 낭떠러지로 몬 결과가 아닌가? 정작 ‘내 새끼 지상주의’에 빠져 남의 자식 귀한 걸 모르는 학부모들 대부분이 40대다.사진과 영상은 많은 걸 말하지만 파편이자 단면일 뿐이다. 이미지는 실재를 왜곡하고, 나중엔 실재와 무관하게 자립한다. 영상 하나가 한 소녀의 미래에 ‘막장 인생’ 낙인을 찍은 것처럼. 해당 학생과 영상을 촬영한 학생 모두 선생님과 오해를 풀고 잘 지내다가 개인 사정으로 자퇴했다고 한다. 온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지금 얼마나 두려울까. 잘한 건 없으니 반성해야지. 그 반성을 통해 성숙해야지. 검정고시든 취업이든 꿈을 향해 나아가야지. 한 번의 잘못으로 인생 전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과연 얼마나 바르게 사는지 모르겠다만 가치 있고 행복한 삶으로 그들이 틀렸음을 보여주렴. 너는 귀한 딸이다.

2023-11-28

삶의 진주 목걸이 꿰기

급작스레 떨어진 기온 탓에 몸을 움츠리게 되는 겨울날. 느릿느릿 산책하던 거리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게 되었고, 캄캄한 어둠으로 잠긴 아침은 평소보다 더 눈을 뜨기 힘들게 되었다. 급작스런 계절의 변화와 함께 나의 기분도 하루에 몇 번씩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나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몇 날 며칠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스터츠, 마음을 다스리는 마스터’ 속의 스터츠 박사는 ‘나약함을 드러내라’며 말을 건네 왔다.영화는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 필 스터츠(Phil Stutz)와 ‘머니볼’, ‘더 울프 오브 윌 스트리트’로 얼굴을 알린 배우 조나 힐(Jonah Hill)이 등장한다. 조나 힐은 스터츠 박사와 만나 습득한 심리 치료 기술을 소개하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취약성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불가능을 상징하는 목소리를 스터츠 박사는 X-파트로 명명한다. X-파트는 비판하는 자아이다. 반사화적이며 불가능을 상징한다. 스터츠는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X-파트를 없앨 수는 있지만 완전한 삭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X-파트를 제거하면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삭제가 불가능하다면 이것을 똑바로 마주할 수는 있어야 한다. 이를 마주하면서 인정하게 된다면 성장을 이끌어오기 때문이다. 삶은 고통, 불확실성, 끝없는 노력의 3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3가지 측면을 인정하고 극복하는 과정이 비로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삶의 고통과 불확실성, 끝없는 노력을 인정하고 행하기 위해선 어떤 게 필요할까? 그럴 때 스터츠는 ‘진주 목걸이 기법’을 이용하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진주는 행동이고 목걸이는 행동을 계속 이어가는 행위다. 아침에 일어나는 행위도 진주알 하나이고, 훌륭한 일을 하는 것도 진주알 하나다. 진주알 하나하나에 일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 아닌,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진주알로 대입해 계속 행동하며 나아가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어찌저찌 진주알을 실에 꿰었지만 진주알 속에 이물질이 섞여 있을 수 있다. 이물질 탓에 진주알은 매끄럽지도 못하고 거무튀튀한 탓에 유독 튀어 보인다. 하지만 이를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진주알 꿰기는 성공과 실패라는 결론이 중요하지 않다. 진주알 속엔 이물질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진주알은 진주알이라는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진주알 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계속 진주알을 꿰어 나아갈 수 있다는 의지다. 그 의지를 발판 삼아 진주알 꿰기에 의미를 찾고 스스로의 믿음만 있다면 삶이라는 진주 목걸이는 꽤 그럴 듯 해 보일 것이다.2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급격하게 변화는 환경 탓에 혼란스러웠고, 현재까지 삶의 어떤 부분에서 성공했고 실패했느냐의 초점에 맞추어 오랜 고민을 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삶은 계속되었고 빠른 흐름에 맞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X-파트에 가두어 더욱 나약해지기만 했다. 다행히 이 시점에서 습득한 ‘진주알 꿰기’ 기술은 X-파트를 마주하는 데에 진취적인 태도를 지니게끔 도와주고 있다.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아가기 위해선, 외면했던 과거의 나 자신과 화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 했다. 숨기고 싶은 과거의 나는 그림자 속에 잠겨 있다. 거의 대부분 수치스러운 기억이거나 타인은 물론 나 스스로에게도 숨기고 싶은 과거의 기억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내가 저 그림자를 꺼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보면 다시 뒷걸음치게 된다. 스터츠 박사는 그림자는 결국 ‘나’이기에 그때의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과거의 수치가 현재까지 이어져 스스로 파괴적인 성향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스터츠 박사 또한 외면하고 싶은 나 자신과의 화해가 어렵다. 그 또한 어린 스터츠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X-파트가 있었고 그 속에선 그저 힘없이 나약한 인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스터츠 박사 또한 이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취약성을 더 세밀하게 마주한다. 그는 취약성을 마주하며 마치 기분이 하늘을 나는 것만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며 느끼는 감정을 쉽게 가늠할 수 없지만 내가 발견한 건, 그는 그림자를 드러내어 인정하였다는 것이고 거듭 진주 목걸이를 꿰어가며 고통을 극복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찰나의 장면에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을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용기가 생겼고 동시에 삶의 방향이 묵직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23-11-28

Long live the King

그는 자신의 직감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직감을 다시 되찾을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정상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고, 다른 선수들이 자신을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는 세간의 평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6년 ‘플레이어 트리뷴’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부담감에 대해 토로했다. 그의 이름은 이상혁, 본명보다는 페이커라는 닉네임으로 더 유명한 리그 오브 레전드의 프로게이머이다.사실 나에게 페이커는 동시대의 스타는 아니다. 삼십대 중반의 아저씨에게 이상혁은 왠지 다음 세대의 스타 같다는 느낌이다. 내가 한창 리그 오브 레전드를 보던 2013년 무렵, 페이커는 갓 데뷔한 신인이었다. 다만 좀 남다른 신인. 데뷔 첫 해에 리그와 롤드컵을 모두 재패하고 리그 MVP를 석권한 천재 신인의 등장. 하지만 페이커의 등장이 나에게 썩 달갑지만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의 등장은 세대교체의 순간과도 같았고, 이 게임의 판도는 완전히 바뀔 거라는 선언과도 같았으니까. 실제로 페이커의 등장 이후 평균 데뷔 연령이 갈수록 낮아지기 시작했고 프로게이머들의 평균 연령 역시 급속도로 낮아지기 시작했다는 통계를 보자면 그 느낌이 마냥 느낌뿐이었던 건 아닌 것 같다.이후로 나에게 페이커는 단지 어린 나이에 전성기를 맞이한 프로게이머에 불과했다. 내가 좋아했던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이십 대 중반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정말 달랐다. 평균 연령이 극도로 낮아진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프로 씬에서 이제 그는 고령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며 SK T1이라는 강팀의 주장 겸 파트 오너로 활동하고 있다. 이제 그는 세계 최초의 첫 30대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를 바라보고 있다.이쯤에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가 더 이상 평범한 선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명실상부한, 리그 오브 레전드를 비롯한 모든 E스포츠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다. 진정한 프랜차이즈 스타는 종목에 국한되지도, 자신에 대한 호불호에도 국한되지 않는다. 마치 조던이 시카고 불스의 프렌차이즈 스타이면서 NBA를 대표하고, 궁극적으로는 농구라는 종목 자체를 대표하는 스타였던 것처럼, 그리고 그걸 넘어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전해준 사람이었던 것처럼.내가 그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자신의 말을 증명하고자 항상 노력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의 선수 생활이 항상 탄탄대로였던 건 아니다. 매년 그는 슬럼프 설에 시달려야 했고, 이제는 퇴물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으며, 모든 선수가 그를 노리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가 항상 승리했던 건 아니다. 그는 때때로 패배했고, 눈물을 흘려야만 했으며, 때로는 길을 잃기도 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시 시작했다. 자신의 직감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순간에도, 정상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순간에도, 다른 선수들이 자신을 앞질러 가고 있다는 평가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했다. 부담감에 시달리고 자신을 향한 부정적 평가와 의견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매순간 노력할 뿐이다. 그렇기에 2016년에 그가 쓴 기고문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여전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건 그가 단지 천재 선수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진짜 이유는 그가 여전히 최선을 다한다는 것, 우리와 똑같은 부담감과 고뇌 속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번민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컴퓨터 게임에 국한된 스타가 아니다. 그는 세대를 대표하고, 시대를 대표하고, 어쩌면 지금 모든 시련에 빠진 모든 사람들조차 대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메시지이다. 우리를 둘러싼 부정적인 메시지에 결코 휘둘리지 말라고, 너는 너에게 주어진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고, 지금의 패배가 너를 규정짓는 게 결코 아니라고.잠시 후면 그의 통산 여섯 번째 롤드컵 결승 경기가 펼쳐진다. 아마 이 글이 게재될 무렵에는 우리 모두 결과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가 패배하더라도 혹은 승리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그의 마지막이 아니니까. 그는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고, 그의 행보는 계속될 것이다. Long live the king. 언제까지고 그의 삶을 응원한다.

2023-11-21

자신에게 안녕을 고할 때

요즘 아버지는 자주 마지막에 관해 말한다. 멀게만 느껴졌던 퇴직이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반평생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온 힘을 다해 일궈왔던 세계에 안녕을 고하는 마음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나에게는 헤쳐 나가야 할 것들이 많다.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기보단 주변부를 두리번거리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손에 쥔 것이 없기에 놓을 것도 없다. 나는 시작을, 아버지는 끝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아버지는 후련해 보이기도 아쉬워 보이기도 한다. 어떤 면에선 떠나는 것을 은근히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해 일했고 매시간 후회 없이 보냈다는 아버지. 그렇기에 일터를 벗어나는 것이 섭섭하지만 귀하고 기쁘다고 했다. 그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미래의 나 역시 그와 같은 마음으로 나의 세계에 안녕을 고할 수 있을까?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면서 나는 나름대로의 답을 찾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번복하고 내놓은 마지막 작품으로 개봉 전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마케팅을 하지 않는 마케팅으로 관객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다. 영화 개봉 이후에 평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도 꽤 흥미롭다. 은퇴작이라는 표제를 내어놓은 만큼 자기의 세계관을 정리하는 태도에 감명 받기도 하고, 이전 작품들만큼 난해하고 매력적이지 않다든가 전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영화라는 평도 있다.미야자키 하야오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는 이번 작품을 무척이나 애틋하게 감상했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 아쉬운 점은 분명 있었지만, 이제 정말 그를 보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마지막을 준비하고 정리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전쟁 중인 일본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전개된다.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마히토는 아버지와 함께 도쿄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으로 오게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을 하게 된 것이다. 현실이 탐탁치 않은 마히토는 정체불명의 왜가리 한 마리를 만나고, 탑에 관한 신비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던 중 사라진 새어머니를 찾아 탑으로 향하게 된 마히토는 새로운 세계에서 일련의 놀라운 사건을 겪는다.작품에서는 전반적으로 죽음에 관한 기조가 흐른다. 어머니의 죽음을 보여주는 도입부터 주인공인 마히토가 향하는 낯선 세계 역시 시공간이 완전히 뒤엉킨, 죽음 너머의 세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죽음의 이미지는 조금 더 거시적으로 느껴졌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개인의 실존적인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것은 마히토가 빠져나온 탑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그 세계로 갈 수 없다는 전언과도 같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서서히 잊어갈 것이라는 왜가리의 말 역시 의미심장하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어떤 세계가 닫히면 또 다른 세계는 열리게 되어 있다. 탑의 이야기는 끝났고 마히토는 다시 도쿄로 돌아가게 된다. 앞으로 소년이 만나게 될 세계는 결코 이상적이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계속될 것이며 도처에 악의의 흔적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마히토에겐 그 모든 것을 극복해나갈 힘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친구를 사귀는 일이라는, 소년의 외침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늘 ‘함께 있음’을 생각하게 했다. 우리는 모두 이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원이며 그렇기에 모두는 특별하고 소중하다. 동시에 내 옆에 있는 누군가도 역시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다. 서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이것은 자신의 마지막이 누군가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마지막이 있기에 시작도 있다. 이 모든 것은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나의 아버지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청년 시절 소진하지 못한 열망의 불씨가 조금씩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일터를 떠나는 일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아버지처럼, 또 마히토처럼 언젠간 나 역시 나의 세계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나 역시 스스로가 어떻게 살았고 또 어떻게 마무리를 할 것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2023-11-21

한 번 더 질풍 같은 용기를, 싱어게인!

JTBC 예능 프로그램 ‘싱어게인 3’의 인기가 뜨겁다. 과거에 활동을 했지만 무대에서 멀어져 잊혀진 가수들,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를 불러 목소리는 익숙한데 이름과 얼굴은 알려지지 않은 이른바 ‘얼굴 없는 가수’들, 그리고 대중의 주목과 관심이 없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묵묵히 자기 음악을 해온 무명 뮤지션들이 싱 어게인(sing again), 다시 노래 부를 기회를 얻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신인을 발굴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재기를 위한 무대라는 점에서 일종의 패자부활전인 셈이다.화제가 된 참가자들이 있다. 우선 1회에 출연한 참가번호 5번 가수다.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깊고 묵직한 허스키 음색으로 주목을 끌더니 전설적인 블루스 아티스트 B.B.킹을 연상시키는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블루지 기타 연주로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을 자신만의 색채로 완벽하게 소화한 그는 경연 최초 ‘올 어게인’(모든 심사위원의 합격표)을 받으며 2라운드로 진출했다.그의 정체는 실력파 뮤지션 김마스타다. 홍대를 중심으로, 또 전국을 돌며 노래를 부르는 방랑가객이다. 무대에서 보여준 뛰어난 음악성, 가을에 어울리는 짙은 음색도 여운을 남겼지만 무대 전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은 큰 울림을 줬다.“다들 요즘 음악을 너무 목숨을 걸고 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목숨 걸고 안 합니다. 인생을 걸고 하는 거지. 목숨은 하나지만 인생은 기니까.”꿈을 위해, 성공을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다 실패했을 때, 다시 도전할 의지를 잃은 채 꿈에서 멀어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속적 성공을 못 이루면 인생이 다 끝난 것처럼 절망하는 이들 또한 많다. 그런 세태 가운데 인생을 걸고 온전히 노래 한 곡을 부르는 게 최종 목표라는 김마스타의 말은 아름다운 잠언, “speaking words of wisdom”(비틀즈, ‘Let it be’)으로 들린다.며칠 전 방영된 3회에서는 2030세대의 애국가나 마찬가지인 만화 주제가를 부른 가수가 등장했다. 참가번호 74호. 1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서는 것이라고 했다. 몹시 긴장한 그는 호흡도 제대로 못하고 몸을 떨었지만 전주와 함께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대한민국 전체를 전율시켰다. 그가 부른 노래는 바로 응원가로 익숙한 ‘질풍가도’. 특히 2030세대는 청소년기와 사회초년생 시절 이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면서 용기와 위로를 얻었다.“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드넓은 대지에 다시 새길 희망을 안고 달려갈 거야 너에게. 그래 이런 내 모습 게을러 보이고 우습게도 보일 거야. 하지만 내게 주어진 무거운 운명에 나는 다시 태어나 싸울 거야. 세상에 도전하는 게 외로울지라도 함께해 줄 우정을 믿고 있어.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15년 만에 다시 잡은 마이크임에도 엄청난 성량과 단단한 고음으로 완벽한 무대를 선보였다. 결과는 올 어게인. 심사위원 선미, 코드쿤스트, 규현, 사회자 이승기 등 ‘질풍가도’와 함께 성장한 세대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유튜브에 공개된 방송 영상은 하루만에 370만 조회수가 넘고, 댓글 1만개가 달렸다. 하나 같이 “신나고 힘이 나는 노래인데 왜 눈물이 나는 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누군가에게는 자살하려는 마음을 되돌려준 노래, 또 누군가에게는 실패를 극복하게 해준 노래, 힘겨운 시절에 많은 이들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준 노래가 다시 울려 퍼졌다. 코드쿤스트는 “이 노래로 저희에게 용기를 주셨으니, 이젠 용기를 받으실 차례”라며 74호 가수를 격려했다.유정석. 애니메이션 주제가 외에 별다른 활동을 못한 무명가수다. 만화 방영 후 7년이 지나 노래가 인기를 끌면서 유명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식도암에 걸린 누나를 간병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누나도 세상을 떠나고, 그 자신도 루게릭병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중 전신마비와 우울증을 앓다 겨우 회복했다. 그 슬프고 아픈 시절을 지나 15년 만에 “질풍 같은 용기”를 우리에게 외친 그의 무대야말로 ‘싱 어게인’이다. 최종 우승자를 가릴 때까지 경연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 희망의 노래를 다시 들려준 것만으로도 이 프로그램은 이미 ‘올해의 방송’이다. 오랜 어둠을 딛고 일어나 다시 노래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 질풍 같은 용기 있기를!

2023-11-14

삶의 틈 속에서

수요일 오후 반차를 쓰고 집 근처 카페에 앉아있다. 한참 마무리 지어야 하는 일이 많은 수요일 오후에 왜 한가롭게 이곳에 앉아 있느냐 하면, 오늘따라 유독 하루를 버텨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요즘 들어선 잠을 도통 잘 못자고 있다. 어떤 꿈을 꾸고 일어나는 것도 같은데 일어나면 그 꿈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기분 나쁜 찝찝함이 남아 있을 뿐. 오후 반차를 쓴 김에 밀린 잠을 자볼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날씨가 너무 좋기도 하고 햇빛을 좀 쐬어야 할 것도 같아 집 근처 카페에 와 있다. 이 카페는 5년 전부터 자주 찾는 곳으로, 통유리창이 있는 고층 카페에 커피도 맛있어서 꽤 좋아하는 곳이다.수많은 버스,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짧은 주기로 바뀌는 신호등과 흔들리는 나무, 형형색색 커다란 간판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얼마나 적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북적이는 대도시의 거리를 동경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다가도 어느 날은 내가 얼마나 작은 인간인지 지나치게 화려하게 비춰지는 탓에 씁쓸해지기도 했었다.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다보니 일순간 유리창에 스무 살 중반의 내 모습이 어른거린다. 일하느라 더러워진 흰티를 두터운 외투 속에 꽁꽁 숨겨 놓고 시집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 줄 씩 읽어 내려갔던 오기의 순간이.그리곤 지금 다시 멍하니 내가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 벌써 이곳에 자리 잡은 지 5년이 흘러가고 있었고, 20대 중반이던 나는 이제 서른을 앞두고 있다. 서른을 앞둔 지금, 나는 조금 더 성숙해지고 어른스러워졌을까? 생각하다보면 잘 모르겠다. 그저 기차 탑승 시간을 자꾸만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반복적으로 나의 어떤 부분이 변화했는지, 또 어떤 게 변하지 않은 것인지 거듭 생각하며 초조해지고 있는 것이다.지금 카페 테이블 위엔 최지은 시인의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가 놓여 있다. 빛 속에 잠긴 활자들은 슬프고 아름답다. 내가 감히 흉내 낼 수도 없고 들어갈 수 없는 뜨겁고 후덥지근한 세계. 몇 편 읽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딴청을 피우고 만다.어린 날 내가 꿈꾸었던 글쓰기의 열망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당혹스럽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바뀐 건 어떠한 희열도 바람도 없이 지내고 있다는 것, 두 번째로는 무거운 뒷목과 굽은 등, 자꾸만 앞으로 말리는 어깨 등 못난 몸의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최근 5년 전 친하게 지냈던 사람에게 오랜만에 안부를 물었다. 추억을 이야기하는 동안은 잠시 반갑고 기쁘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 사이의 큰 공백이 생기며 아주 많은 부분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사이의 변하지 않은 신뢰나 배려, 특유의 말버릇 같은 것에 대해 찾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고, 결국 머쓱하게 웃으며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른 다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다시금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이곳도 알게 모르게 많은 곳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지인이 일하던 휴대폰 매장은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바뀌었고, 눈물이 많던 친구와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 했던 호프집은 화려한 헬스장이 들어섰다. 조금씩 달라지는 이 풍경이 처음은 흥미롭다가도 과거가 지워지는 것만 같아 쓸쓸해진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앞자리가 바뀌는 나이 때문일까. 오늘은 왠지 잠이 오지 않아 벽에 기대어 멍하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내게 다가와 잠의 안부를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다. 근래 가장 크게 변화한 건 이렇게 다정하게 물어봐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고, 덕분에 성급한 불안감을 아무렇지 않게 잠잠히 눌러 볼 수 있다는 것이다.별다른 대화 없이 그가 좋아한다는 영화 한 편을 튼다. ‘우리도 사랑일까’의 마지막 장면엔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Life has a gap in it, it just does. You don‘t go crazy trying to fill it.”(인생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 사람처럼 일일이 다 메꿔가면서 살순 없어.) 삶의 권태를 느끼는 주인공 마고에게 언니 제럴딘은 삶은 본질적으로 결핍을 느끼기 마련이고, 허망하고 부족한 부분을 느끼면서도 감내하고 채워가는 게 인생이라는 걸 마고에게 알려 준다.지금 잠시 꿈과 이상, 그리고 열정을 잃어버렸다 한들 인생엔 틈이 있기 마련이니 더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심란해지지 않아도 된다. 삶은 완벽하지 않고 이 또한 작은 해프닝이 될 테니까.

2023-11-14

어른의 아지트, 순대국집

나의 취미는 요리다. 그렇다고 집에서 빵을 굽거나 파스타를 하는 건 아니다. 술안주를 직접 만들어먹는 게 좋달까. 코로나 시절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 어렵다보니 집에서 혼술을 하는 취미가 생겼는데, 매번 시켜먹기가 부담스러워 간단한 요리를 해먹다 보니 생긴 취미다. 처음에는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같은 간단한 찌개 종류부터 해먹기 시작했는데, 요즘엔 유튜브에 편리한 레시피가 많아 이것저것 해먹어보는 중이다.하지만 그런 나도 집에서 도저히 해먹기를 포기한 술안주(?)가 두 개 있는데, 감자탕과 순대국이다. 둘 다 30대 남자의 소울푸드 같은 요리인데, 집에서 하자니 손이 너무 많이 가기도 하고 냄새가 온 집안에 남다보니 집에서 해 먹는 건 아예 포기했다. 하지만 소주를 좋아하는 나에게 둘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음식인지라, 감자탕이나 순대국에 혼술이 땡기는 날이면 집 근처의 가게에서 포장을 해 먹곤 한다.그러다보니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사실 순대국밥은 집에서 먹으면 맛이 없다. 감자탕은 그래도 포장을 해서 먹어도 우거지며 고기며 참 맛있게 먹고 밥까지 뚝딱 볶아먹는데(배가 아무리 불러도 볶음밥은 못 참는다. 소주 안주로 볶음밥을 어떻게 참아) 이상하게 순대국은 집에서 먹으려면 손이 안 간다. 분명 가게에서 먹을 때랑 똑같이 해먹어도 도저히 그 맛이 나질 않는다. 희한한 일이다.사실 나에게는 좋은 순대국 집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맛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술을 마시고 할 때는 맛보다 중요한 요소가 몇 가지가 있다.하나는 냄새. 자고로 순대국 집은 돼지고기와 부속고기를 오래 삶은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색. 벽지며 천장에 살짝 누런 느낌이 있어야 한다. 세 번째로 주인이 너무 친절하지 않아야 한다. 가끔 말을 걸고 필요한 거 있냐고 묻거나 반찬을 아무 말 없이 리필해주는 경우들이 있는데 나는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친절이라면 친절일 테지만, 이상하게 부담스럽단 말이지. 게다가 반찬을 남기는 걸 싫어하는 나로썬, 그런 친절은 정말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어쩌면 순대국의 맛이라는 건 단지 음식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그런 부수적인 요소를 통해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적당히 허름해서 격식 차릴 필요 없는 그 느낌 속에서 평소엔 잘 보지도 않는 야구를 보며 순대국을 기다릴 때의 그 여유로움. 시게 익은 김치와 깍두기를 한 입씩 먹어보고, 양파와 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으면서 소주를 한 잔 따라 미리 마실 때의 그 알싸한 느낌. 펄펄 끓는 뚝배기에 담긴 순대국에 숟가락을 미리 담궈두고, 정구지와 새우젓, 다대기와 들깨가루, 모자란 간은 소금 살짝 넣고 고추기름과 마늘 다진 게 있는 집에선 그것들을 살짝 넣고,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재료들이 잘 섞이게 만들 때의 그 기분. 숟가락을 꺼내 입으로 슥 해주고, 그 맛에 소주를 한 잔 비우곤 국물을 마실 때의 그 따끈한 맛이란….그렇게 소주를 한 잔 한 잔 비우고 있으면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이 든다. 세상 일 따위 어찌되든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기분도 든다. 어쩌면 내가 순대국에 소주를 좋아하는 건 맛보다는 그런 일련의 느낌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 오늘 열심히 살았다, 이제 술도 한 잔 했으니까 오늘 하루는 그냥 쉬자하고, 뇌에서부터 발끝까지 늘어지는 그 기분이 너무나도 좋다. 그런 나에게 순대국집이란 지치고 힘들 때, 구석에 몰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찾는 나만의 작은 아지트인 셈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작년 이사를 했을 때에도 나는 제일 먼저 순대국 집부터 찾아다녔다. 맛과 적당한 친절과 적당한 허름함을 갖춘, 혼자를 위로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숨어들 수 있는 아지트 같은 곳. 신기하게 그렇게 마음에 드는 순대국 집을 하나 찾고 나면, 비로소 새로운 동네와 친해진 기분이 든다. 이곳에서도 나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도 들고. 여기서도 이런 저런 일이 많겠지만 그럴 때마다 여기 와서 순대국에 소주 한 병 뚝딱하면 또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오늘도 순대국 집에는 수많은 혼자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다.문득 그 모습들이 살아고자 힘껏 힘을 내는 모습들 같아 측은한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에겐 그런 장소가 하나쯤 필요한 것 아닐까?누구도 자신을 탓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따끈한 국물과 차가운 소주에 온 몸을 느슨하게 풀어줄 시간. 그래서 나는 우울할 때 순대국을 먹으러 간다. 당신에게도 그런 시간과 장소가 하나쯤 있기를 바란다.

2023-11-07

그림 밖에 있는 사람

얼마 전, 동생이 참여한 회화전이 벨기에에서 열렸다. 여러모로 기쁜 일이니만큼 나도 동행하여 행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오프닝이 끝나면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행할 계획도 세웠다. 나에게 있어 여행이란 모름지기 먹고 마시고 아무렇게나 늘어지는 시간에 가깝지만, 이번엔 달랐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다른 것보다 역시 가장 기대되는 건 미술관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명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을 모조리 섭렵해 주겠다는 마음으로 호기롭게 배낭을 짊어졌다. 다리가 퉁퉁 붓고 온몸이 지끈거려도 다음 날 아침이면 어떠한 미적거림도 없이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것들을 마주할까, 어떤 작품이 나를 놀라게 할까,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 덕분이었다.참 신기하다.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작품이 그 작가 자체를 명징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무엇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지 또 무엇을 감추고자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가는지. 작가는 작품 내부에서 어떤 말도 하지 않지만, 사실 모든 것을 발화하고 있다. 그 당연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이번 기회를 통해 또다시 느꼈다.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박물관과 미술관을 들락거리는 내내 우리는 가벼운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책에서만 봤던 작품들이 바로 앞에 놓여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었다. 그리스 조각부터 중세 회화, 르네상스를 거쳐 근현대 미술사를 빛낸 작가들의 작품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발길을 멈췄다. 작품을 한참을 보고, 또 들여다봐도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앞에서였다.고흐의 그림을 실제로 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의 작품에 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굉장한 감흥을 받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교과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매체에 이르기까지 고흐의 작품을 인용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고흐의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상했다. 넘치는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작품이 슬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아름다워서, 그림 밖에 서 있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만 그려졌기 때문이었다.‘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가 정신병동에 입원하기 일 년 전에 그린 작품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고흐는 미래에 관한 낙관을 꿈꿨다. 부서지는 햇빛이 아름다운 프로방스 지역으로 이사를 했던 것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실패만 거듭하던 예술가에게 희망적 예감은 얼마나 소중한가. 여전히 호기롭게 캔버스 앞에 서서 붓을 쥘 수 있었던 건, 캄캄한 어둠 속 저 멀리 보이는 한 줄기 빛의 존재 덕분이었으리라. 그림의 시간적 배경은 밤이다. 강변으로 늘어진 집을 밝히는 불빛이 있다. 하늘을 수놓는 별빛도 있다. 강의 표면에 빛이 눅진하게 번져간다. 멀리서 보면 강과 하늘이,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하늘의 별빛이 모두 하나인 것만 같다.고흐의 밤은 푸르다. 푸른 밤은 차갑다. 그리고 외롭다. 푸른 밤을 밝히는 무수한 빛이 있다. 그렇다고 쓸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극대화된다. 반짝이고 일렁이는 빛을 바라보는 관찰자는 밖에 있기 때문이다. 빛의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 채로 차갑고 외로운 공간 속에 서 있다. 그저 물감을 덧칠하고 또 덧칠하면서. 어둠이 있기에 빛은 더욱 강렬하게 빛나고, 슬픔이 있기에 강가의 풍경은 눈물겹게 아름답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의 오랜 후원자이자 동생인 테오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별들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나고 있지만 저 밝음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건지.” 이렇듯 그는 빛을 고통이라고 말한다. 밝고 매혹적이지만 그만큼 아프고 괴로운 것이라 생각한다. “고통스러운 것들은 저마다 빛을 뿜고 있네. 심장처럼 파닥거리는 별빛.” 고흐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야말로 그가 해석한 빛에 가까울 것이다. 아름다우나 고통스러운 것. 고통스럽기에 아름다운 것. 마침내 그는 자신을 끈덕지게 따라다니는 하나의 질문을 꺼내놓는다.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거기에는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흐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붓을 쥘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이렇게 덧붙인다. “나의 영혼이 물감처럼 하늘로 번져갈 수 있을까?”텅 빈 캔버스를 바라보는 한 사람의 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낙관과 무의미로 끝날 수 있다는 불안. 어쩌면 그건 삶과도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작가들의 작품을 본다. 그림 밖에 서서 그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캔버스가 채워지면서 어떤 이야기가 탄생하게 될지 말이다.

2023-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