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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전집

등록일 2024-01-22 19:46 게재일 2024-01-2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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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저출산 대책은 사랑을 장려하는 일이 아닐까. /언스플래쉬
가장 좋은 저출산 대책은 사랑을 장려하는 일이 아닐까. /언스플래쉬

“그 집의 천장은 낮았다./ 천장이 높으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그 집에 사는 목수는 키가 작았다./ 그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죽은 나무를 마름질했다./ 목수보다 키가 큰 목수의 연인은 붉은 노끈으로 묶인 릴케 전집을 양손에 들고 목수를 찾아갔다/ 책장을 만들려고 했는데 커다란 관이 돼버렸다고/ 목수는 자신을 찾아온 연인에게 말했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지도 모르겠다고 연인은 답했다./ 해가 가장 높게 떴을 때 마을의 무덤들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목수는 연인이 가져온 책 더미를 밟고 올라서 연인과 키스를 했다./ 목수의 입에서 고무나무 냄새가 났다.”(김건홍, ‘릴케의 전집’)

철학자 마틴 부버는 “나는 너와의 만남을 통해 내가 된다”고 말했다. 관계가 자아의 성숙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다. ‘나’라는 인격체는 타자와 교감하고 상응할 때, 타자의 본질적인 이질성을 수용하고 인정하면서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성장할 수 있다. 위 시는 사랑의 힘이 한 사람을 살리는 과정을 낭만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가장 좋은 저출산 대책은 사랑을 장려하는 일이 아닐까. 이 시를 읽으면 연애하고 싶어진다. 결혼하고 싶어진다.

천장이 낮은 집에 키가 작은 목수가 살고 있다. 키 작은 목수는 자신의 키에 맞춰 협소한 공간에서 살아간다. “천장이 높으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천장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천장이 높아봤자 목수는 자기 키만 한 물건밖에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사다리를 타거나 줄에 매달리는 방식의 작업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목수가 자기한계를 인정하고 운명을 받아들일수록 천장이 낮은 집은 자폐적 고립의 세계로 점차 봉쇄되어 간다.

목수에게는 애인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죽은 나무를 마름질”한다. ‘죽은 나무’는 목수가 매일 만지는 것이고, 목수의 삶은 죽은 나무에 예속되어 있다. 연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나무로 무언가를 만들어주는 것뿐이다.

그런데 “키가 큰 목수의 연인”은 목수가 필요로 할 망치나 톱 대신 엉뚱하게도 “붉은 노끈으로 묶인 릴케 전집을 양손에 들고 목수를 찾아”온다. 유용성만을 추구해온 목수의 보수적 세계관을 연인은 책이라는 ‘무용한’ 선물을 통해 새롭게 전환시키려 하는 것이다. ‘죽은 나무’로 상징되는 물질의 세계에 고립되었던 목수는 대뜸 ‘릴케 전집’이라는 정신의 연장을 받아들게 된다.

연인이 책을 들고 목수의 집에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닐 것이다. “책장을 만들려 했는데 커다란 관이 돼버렸다”는 목수의 고백이 힌트를 준다. 목수는 책이, 책으로 함의된 정신성의 세계가 낯설고 어색하지만 익숙해지려는 노력을 조금씩 해나가는 중이다. 사랑이란 서로 다른 두 존재가 타자의 본질적인 이질성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목수는 이제 “천장에 머리가 닿을지도 모르겠다”는 연인을 위해 지붕을 높일 게 분명하다. 세계와 불화하던 한 존재가 마침내 세계와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존재의 근원적 한계인 죽음마저 두렵지 않게 한다. 목수가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볼 때, “마을의 무덤들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린”다. 시인은 오후의 눈부신 햇빛에 무덤들이 하얗게 지워지는 풍경을 감각적 비유로 묘사하고 있다.

“목수는 연인이 가져 온 책 더미를 밟고 올라서 연인과 키스를 한”다. 이 과감한 행동이 시를 읽는 이들을 미소 짓게 한다. 책은 꼭 읽는 데만 그 효용이 있는 것이 아니다. 냄비받침이 될 수도 있고, 파리채나 망치로 쓸 수도 있다. 하물며 키스를 위한 계단이라니, 얼마나 유용하고 낭만적인가? 목수의 연인은 책을 사랑하지만 책에 함몰된 고리타분한 인간이 아니다. 목수가 책 더미를 밟고 올라 입술을 내미는 것을 기꺼이 허락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것도 무려 릴케의 전집을 말이다. 둘이 키스를 나누자 “목수의 입에서 고무나무 냄새가 난”다. 평생 ‘죽은 나무’를 만지고 살던 목수에게서 살아 있는 나무의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연인의 사랑이 ‘죽은 나무’의 우울에 갇혀 지내던 한 사람을 살렸다. 목수는 나무로 만든 가장 아름다운 것이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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