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말. 창문 밖 폭설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을 마주하고 있다. 신년부터 시간에 쫓기며 조급하게 지냈고, 덩달아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 외부 자극에 쉽게 흔들리고 말았다. 출근하는 평일엔 무력하게 흔들렸지만 주말이 찾아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 바로 조용한 골목 어귀에서 오래된 흔적들을 찾는 일, 마음의 여유를 느끼지 못할 땐 연남동의 골목으로 향한다.
연남동은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동네다. 조선 초기의 3대 이궁이었던 연희궁이 있던 지역으로 조선 세종 당시 서쪽 모악에 수시로 왕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라 한다. 현재 지리적으론 사람이 많이 붐비는 홍익대학교 거리와 가까워 경의선 숲길 쪽은 늘 시끄럽고 혼잡한 편이다.
하지만 연남동의 묘미는 경의선 숲길 안쪽으로 들어가 골목 곳곳에 숨은 보물 같은 가게들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지하의 작은 식당들, 간판 없는 카페, 생일 책이 있는 동네서점, 공방, 잡화 상점 등.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그림자 같은 가게들이 골목 곳곳에 숨어 있다.
좁은 골목을 누비는 동안엔 마치 모험을 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대로변처럼 한 눈에 보이지 않는데다 그 길을 가봐야만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골목을 쏘다니며 담벼락에 새겨진 낡은 시간의 흔적을 살펴 걷기도 하고, 벽 너머 오랜 시간 살아왔을 사람들이 가꾸는 생활을 조심스레 엿보기도 한다.
분명 전에 왔던 곳임에도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매번 새롭게 느껴진다. 커다란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뚜벅뚜벅 걸어 나가다 보면 빠르게 흐르던 시간이 느리게 감기며 마음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골목을 지키는 존재는 조용하고도 묵직한 힘을 지니고 있다. 불필요하게 과장되어 있다거나 지나치게 스스로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오랜 시간 그 자리 그대로 풍경을 착실히 유지하고 있다.
또한 골목은 어딘가 믿음직하다. 비행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눈 감아 주기도 하고, 연인들에게 마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한적한 모퉁이를 내어주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수많은 비밀을 감싸 안으며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골목에게선 배울 수 있는 삶의 자세가 많다.
학부 시절 사진 관련 교양 강의를 들은 적 있다. 강의에선 골목 사진을 찍을 때, 골목 모퉁이 사진을 찍어야 잘 찍은 사진이라 배웠다. 골목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어야만 사진을 보는 사람이 그곳에 어떤 게 있을지 상상할 수 있어 호기심을 불러온다는 거였다.
최근 나의 일상도 그랬던 듯싶다. 쉽게 가늠할 수 있는 넓은 대로변 속에서 목표와 결과만 추구하며 달렸으나 쉽게 무너졌고 길을 잃었다. 하지만 현재 나에게 필요한 건 천천히 골목을 누비며 길을 파악하고 숨은 재미와 의미를 찾는 것이다.
연남동의 골목은 생각보다 더 좁아서,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덧 경의선 철길에 다다른다. 경의선은 서울역-능곡-일산-문산-장단군-개성시-사리원시-평양-신의주까지 이어지던 철도로, 1905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목적으로 부설되었다고 한다.
이후 1950년 남북 분단으로 인해 운행이 종료되었고, 2009년이 되어서야 용산-문산까지 운행을 시작하며 경의중앙선으로 바뀌었다. 경의선이 다니던 철길은 현재 땡땡거리, 책거리, 전망테크, 기찻길 옆 예술마을 등 각각의 테마를 지닌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길 따라 볼거리가 있어 좋다.
철길을 따라 출판사별로 큐레이션한 작은 서점도 방문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이곳도 아기자기한 작은 상점들이 많아 골목길 산책과 더불어 여행을 오는 듯한 경험과 새로운 재미를 준다.
연남동 곳곳의 이런 힘과 여유로움이 숨어 있다. 잦은 공사로 땅이 고르지 못하고, 좁고, 고생스럽지만 언제 어느 때나 조용하고 여유로운 마음의 여유를 주는 곳. 동맥처럼 선명히 퍼진 골목길과 그 속에서 언제나 빛을 받아 반짝이는 존재들 속에서, 이번 주말에도 여행을 즐기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