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갈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다. 바닥과 천장이, 벽과 벽이 맞붙은 아파트나 연립주택에서는 이웃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사르트르가 말한대로 ‘지옥’으로서의 타인만 남는다. 소음은 보복소음을 불러오고, 소음의 나비효과는 주먹과 발길질, 흉기가 되어 피를 보게까지 한다. 인터넷에 층간소음 복수법을 검색하면 온갖 방법들이 나온다. 천장에 설치하는 층간소음 보복 스피커가 품절 현상을 빚을 만큼 잘 팔린다. 스피커로 귀신 흐느끼는 소리, 불경, 찬송가, 아기 울음소리, 심지어 음란물 소리를 틀어두라는 조언이 넘쳐난다. 천장이나 벽을 두드리는 고무망치도 인기 상품이다. 이웃들을 마주칠 때마다 조현병 환자인 척했더니 층간소음이 사라졌다는 경험담까지 있다.
나는 연립주택 4층에 사는데 5층의 생활소음이 잘 들린다. 샤워할 때마다 음정 박자가 엉망인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는 윗집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새 거주자가 이사 온 뒤론 그쪽은 평화롭다. 최근엔 층간소음보다 벽간소음이 문제다. 옆집 402호에 새로 이사 온 아주머니 아저씨께서 현관문을 너무 세게 닫는다. 문돌쩌귀가 잘 안 맞는 데가 있는지 여러 번 열었다가 닫았다가 한다. 하루에도 열댓 번, 늦은 밤에도 그 소리가 들리면 짜증이 나고 욕설이 뱉어진다. 가서 따져야지 하고 단단히 벼르는 와중에 복도에서 아주머니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인사하자 “저거 저렇게 두면 누가 안 가져가요?” 문 앞에 쌓여 있는 소포꾸러미를 걱정하신다. 집으로 책이 너무 많이 와 둘 곳이 없어 현관문 앞 구석에다 놓은 것들이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와는 서로 한 번씩 도운 일이 있다.
하루는 거실서 음악 들으며 쉬는데 창밖에서 누가 큰소리로 “401호 아저씨! 도와줘요!” 외쳤다. 창을 열어보니 옆집 베란다에서 아주머니가 자동방범창이 잠기는 바람에 안으로 못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알려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402호에 들어가 방범창을 열어 아주머니를 구출했다. 옆집이 이사 온 지 며칠 안됐을 때다.
지난 가을엔 제주 바다 위에서 열심히 낚시하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안양동 지구대 경찰이었다. 집 문은 열려 있고, 택배는 잔뜩 쌓여 있고, 혹시 무슨 변고가 생긴 건 아닌지 싶어 옆집에서 신고했단다. 낚시 가는 길이 얼마나 설렜으면 칠칠맞게 문단속도 안하고 헤벌레 나섰을까. 다행히 사라진 물건도 없고, 누가 들어온 흔적도 없다. 옆집서 대신 문단속을 해준 게 참 고마웠다.
도움을 주고받으며 피어난 작은 따스함 따위는 쿵쿵거리는 소음에 묻혀 기억도 나지 않았나보다. 복도에서 마주친 아주머니는 “총각이 잘생겼네. 장가 안 갔어요?” 살갑게 말을 걸었다. 두세 마디 대화 나누자 문 닫는 소리 시끄럽다고 따지려던 마음이 사그라졌다. 널찍한 테라스가 있는 우리 집 내부 구조가 궁금하다기에 들어와 구경하시라 했다. 그리고 지난번 문단속해준 보답으로 그때 제주에서 잡아온 갈치를 몇 토막 드렸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말한다. “이방인에게 말 걸지 말라는 말은 정상적 삶을 사는 성인들의 전략적 교훈이 되어버렸다. 이 교훈은 이방인이 말 걸기의 거부 대상이 되는 삶의 현실을 하나의 신중한 규칙으로 만든다”라고. 말을 거는 순간 관계가 시작되고, 관계는 성가시고 불필요한 것이다. “타인은 지옥”이므로 지옥의 문을 굳이 열 이유는 없다. 혼밥과 혼술이 편하고, 타인의 곤경을 봐도 섣불리 도와선 안 된다. 코로나 시절 타인은 병균 덩어리였고, 전염병이 종식된 지금은 경쟁자, 귀찮은 오지랖쟁이, 또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사물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웃’이라는 이름을 잃어간다. 언젠가는 사전에서 단어가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잘생기고 훤칠한 총각이 왜 혼자 살아. 내가 주변에 좋은 아가씨 있으면 중매 서줄까?” 갈치를 주니까 중매가 온다. 이건 꽤나 남는 장사가 아닌가. 중매보다 더 값진 건 이웃의 탄생이다.
이제 지옥으로서의 타인은 없다. 갈등을 갈치로 바꾸고 적대감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한 건 그저 “안녕하세요” 한마디로 시작된 소소한 대화다. 갈등과 혐오가 넘쳐나는 우리 사회에 지금 절실한 건 안녕을 묻는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이 한마디인지도 모른다. 그날 저녁 옆집서 갈치 굽는 냄새가 스멀스멀 흘러들어왔다. 이웃이 저녁밥을 짓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