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전 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문예창작과에 왔다. 원태연, 용혜원의 글과 판타지 소설 몇 권이 문학인줄 알았다. 첫 수업에서 교수님으로부터 시를 배웠다. 너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이런 세상이 있구나! 살면서 아무것도 되어본 적 없는 너는 시 안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너는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동기들이 술 마시러 가자고 해도 학교 옥상으로 도망가 노을과 별의 시간까지 홀로 시를 썼다. 그러면 교수님도 너를 기다렸다. 어둑한 복도에 홀로 불 밝힌 연구실에 가 시를 보여드리면 애써 쓴 문장들에 빨간 줄이 사정없이 그어졌다. 할퀸 상처처럼 아팠지만 너는 그 상처가 좋았다. 그렇게 찢어진 마음에서 돋은 새살이 시가 됐다.
매년 겨울이면 ‘신춘병’을 앓았다. 우체국도 믿을 수 없어 원고를 품에 안고 추운 광화문 거리를 돌아다니며 신문사에 직접 투고했다. 원고를 내고 나면 가슴에 품어 키우던 새가 날아간 것 같았다. 새의 온기가 사라진 자리엔 뼛속까지 아린 추위가 파고들었다. 심사평과 본심진출 명단에 이름이 없다는 건 너라는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불 뒤집어쓰고 있으면 눈물이 흘렀다. 너는 그걸 10년 넘게 했다.
너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갔다. 사랑하면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공부를 더 하면 혹시 시를 잘 쓸까봐,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 외롭게 쓰면 결국 손에서 시를 놓칠까봐. 그렇게 계속 쓰다 보니 재주가 없는데도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문예지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시를 잘 쓰고 싶어 평론을 썼더니 운 좋게 평론으로도 등단했다.
이십대에는 시가 돈이 되지 않아도 행복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오솔길의 왕이 된 것만 같았으니까. 서른 살이 되자 너는 돈이 되지 않는 시를 계속 붙잡을 수 없어 달아났다. 달아날수록 시는 너를 더 잡아당겼다.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돈보다 시가 좋았다. 그래서 결국 돌아왔다.
집안 어른이 네게 말했다. 요리학원에 가서 음식을 배워 장사라도 하라고. 친구가 말했다. 문학이 돈이 되냐고, 너도 이제 네 앞가림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후배가 말했다. 형도 하상욱처럼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선배가 말했다. 시는 아무도 안 읽으니까 맛집 소개하는 글이나 쓰라고. 시인이라고 하니 모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환호하며 요청했다. 시 한 수 읊어달라고, 삼행시 좀 지어달라고. 그때마다 너는 문학을 한다는 게 괜히 죄스럽게 느껴졌다. 문학을 무용한 일이나 음풍농월쯤으로 여기는 세상의 무지와 폄하, 냉대와 오해에 마음을 다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너는 문학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졌다. 뭘 이룰 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뭐라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너는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시집과 평론집 등 열 권의 책을 낸 너는 문학연구자이자 시인, 평론가로서 쌓은 나름의 경력보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문학을 향유하는 삶이 훨씬, 확실히 ‘이룬 것’이라고 믿는다. 비록 비전임 계약직 교원이지만 상관없다. 문학이라는 캄캄한 동굴 안에서 네가 더듬거리며 지나 온 시간들이 이제야 조금씩 환해진다. 저 멀리서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들이 걸어 나갈 길을 밝히면서, 네가 걸어 온 길에도 빛을 비춰주는 까닭이다. 세대는 달라도 문학이라는 영원 안에서 모두 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수업 시간을 너는 사랑한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날, 오전에 너는 한 고등학교에서 윤동주의 시와 삶에 대해 강연했다. 수상 소식을 들은 저녁에 너는 네가 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한강 작가와 일면식도 없으면서 마음의 균형이 무너져 어쩔 줄 몰랐다.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지 너도 모른다. 고작 삼류 시인이자 무명 평론가지만 지금껏 문학을 놓지 않고 해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붙들고 온몸으로 나아가리라는 것, 너보다 더 문학을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문학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뭉클했겠지.
감격에 겨운 너는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에서 구사한 독특한 2인칭 화법을 빌려 이 글을 쓴다. 너는 이제 더 이상 ‘문학’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 오해 받지 않고 무시당하지도 않는 문학이 온다. 이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