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늦여름의 카레

등록일 2024-09-09 19:36 게재일 2024-09-10 17면
스크랩버튼
입맛이 없거나 요리하기 귀찮은 날엔 카레를 떠올린다. /언스플래쉬
입맛이 없거나 요리하기 귀찮은 날엔 카레를 떠올린다. /언스플래쉬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여름의 끝자락. 이맘때에 부엌 앞에 서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몸이 지글지글 익는 더위에 불 앞에 서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 게다가 음식이 겹치지 않게 매 끼니 다른 음식을 먹어야 하는 안 좋은 습관도 있는 지라 여름날의 요리는 스스로를 너무나도 귀찮게 만든다.

하지만 내가 매 끼니 같은 음식을 먹어도 질려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각종 채소 재료를 둥그렇게 썰고 강황 가루를 듬뿍 넣은 카레다. 특히 대용량으로 만들어두고 먹기에 좋은데다 끓일수록 눅진하고 진득해지는 국물 덕분에 오래 둘수록 오히려 맛있어지는 고마운 요리다.

커리는 3000년 전 인더스 문명에서 시작됐다는 발견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음식이다. 인도는 커리의 핵심재료인 코리앤더, 클로브, 생강, 마늘 등 여러 향신료를 사용하여 각 지역이나 취향에 따라 배합하여 만들어 내는 것을 ‘마살라’라고 칭했다. 이 마살라에 고기나 생선, 요거트 등의 재료를 추가로 넣어 조리한 여러 스튜를 큰 범주로 커리라 불렀다.

18세기가 되자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인도 현지의 커리를 영국에 들여오게 되는데, 기존 인도에서 커리와 주로 먹던 난이나 빵이 아닌 쌀과 먹는 형태로 변하게 된다. 또한 이 때 물만 부으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커리 가루가 생겨나며 간단한 요리법 덕분에 군대 식량으로 보급되기 시작된다. 덕분에 점차 세계 곳곳에 커리라는 음식이 퍼지게 된다.

커리하면 또 생각나는 대표적인 나라, 일본이 있다. 카레 스튜, 카레빵, 카레 라면 등 커리를 다양하게 이용한 요리가 참 많은데, 여기에도 재미있는 배경이 있다. 20세기 초 근대에 이르자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군사적 동맹을 맺게 된다.

당시 영국 해군은 여전히 커리를 즐겨 먹고 있었고, 당시 동맹을 맺었던 일본 해군 또한 영향을 받아 커리가 점차 인기 음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빵과 같이 커리를 즐겨 먹었던 영국 해군의 식단과는 달리 밥과 곁들여 먹는 카레라이스가 탄생하게 된다. 해군 뿐만 아닌 일반인도 카레라이스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레토르트화 되면서 점차 일본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한국은 일제시대 일본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카레를 접하게 되고, 각종 야채와 마늘 등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향신료에 강황 중심의 가루를 넣어 만드는 카레가 유행하게 된다. 이 또한 일반 서민도 쉽고 간편하게 즐겨먹을 수 있는 레토르트화 되며 현재에 이르러선 쌀밥에 올려먹는 형태로 변하게 된다.

종류 또한 다양하다. 토마토와 마늘, 돼지고기를 넣어 푹 끓이는 토마토 카레. 버섯, 토마토, 양파, 소고기를 넣어 만드는 실패 없는 맛의 소고기 카레, 버터와 우유, 치즈를 넣어 만드는 버터치킨 카레 등 넣는 재료에 따라 무궁무진한 요리를 만들 수 있다.

채소만 충분히 손질한다면 누구나 만들기 쉬운 카레는 고형이나 분말 등 제품이 잘 나오기 때문에 식당에서 사 먹는 것만큼 높은 퀄리티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게다가 카레는 아주 어렸을 적, 어쩔 수 없이 장기간 집을 비우는 엄마의 필살기 요리법 중 하나였다. 어린 내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냄비 안에 냉장고에 있는 온갖 재료를 투박하게 썰어 놓고 가루를 물에 푼 후 짧은 시간 내에 만들어 내는 카레. 냉장고에 잔뜩 얼려둔 쌀밥을 전자레인지에 해동한 후 냄비 속 카레를 그저 붓기만 하면 그럴 듯하게 한 상이 만들어졌었다.

오랜 자취 생활 중 이젠 엄마가 만들어내는 투박한 카레의 맛은 없지만, 이제는 요리할 기력이 없다거나 왜인지 카레가 먹고 싶어지는 날이면 엄마가 했던 것처럼 큰 냄비 가득 카레를 끓여내는 내 모습이 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내가 먹고 싶은 재료를 듬뿍 넣어 내 입맛 맞춤용 카레를 잔뜩 끓여낸다는 것. 고기를 많이 먹고 싶은 날엔 고기 걱정이 없도록 듬뿍 썰어 넣고, 어느 날엔 제철 토마토를 넣기도 하고 어느 날엔 계란 후라이를 잔뜩 올려 그날의 입맛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그러니 오늘처럼 무언가 입맛이 없거나 요리를 하기 귀찮은 날엔 수많은 요리 중 카레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냄비 바닥에 카레가 타지 않도록 수저로 깊숙한 냄비 속을 휘휘 젓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른다. 어느덧 더위가 조금 가신 주방, 늦게나마 늦여름을 감각해본다.

2030, 우리가 만난 세상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