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라는 말처럼 마음을 조여오는 말이 또 있을까. 처음이라는 단어는 어딘가 덜 익은 풋사과처럼 입 안 가득 잔뜩 떫은맛이 맴돈다. 설렘과 서투름, 민망함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질서 없이 섞여 ‘첫’이란 단어에 모두 응축되어 괴상한 맛을 띠고 있는 것 같달까.
나는 모든 처음을 싫어한다. 처음은 능숙하지 않고 어딘가 어리숙하고 부족하고 부끄러움이 많고 미성숙한 상태로 느껴진다. 게다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막연한 공포심이 들게 한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대비해 신체에서 위험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게 되고, 이는 은근한 긴장 상태에 빠져 입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게다가 ‘처음’이라는 말에 기대어 잘못을 고백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내가 이 일이 처음이라 그래’, ‘처음이라 어쩔 수 없었어’ 등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을 두 번째로 미루고 처음이란 단어에 기대어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는 사람의 유형이 제일 난감하고 대하기 멋쩍다. ‘이렇게 황당한 사과를 받는 나의 감정도 처음이야!’ 라고 되받고 싶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화를 삭히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이란 단어와 정을 붙이기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처음은 있기 마련이고, 그러므로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을 정도로 누구나 서툴 수 있단 사실은 인정한다. 처음이란 어딘가 삐뚤삐뚤한 서툰 마음이 당연히 들기 마련이니까. 그러므로 이성적으로 처음이란 단어를 다시금 생각해보자면 ‘첫’은 단 한 번밖에 없어 애틋한 것이기도 하다. 첫 등교, 첫 키스, 첫 출근, 첫 해외여행 등등 처음은 낯선 대상으로부터 오는 설레임과 두려움이 오묘하게 섞여, 딱 한 번밖에 느껴볼 수 없으므로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최근 회사를 그만 두면서 다시 처음이란 관문 앞에 서 있다. 하루에 두 시간씩 내 경력을 증명하는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한 시간 정도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다시금 다듬고 많은 회사들 중 조건에 맞는 곳을 찾아 고심히 지원한다. 그렇게 지원한 여러 회사들 중 서류 단계부터 불합격 통보가 날아올 때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시작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단 열패감이 어지러이 맴돌아, 시작조차 쉽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그러니 언제나 처음이 두렵답시고 언제나 구석에 숨어 피하고만 있을 순 없다. 한자 으뜸원(元)은 처음, 시초(始初)라는 뜻도 지니고 있지만, 우두머리, 두목 또는 임금을 나타낼 때 쓰이기도 한다. 처음이 없다면 사건이 발생하지 않듯 무엇이 진행되거나 생기기 위해선 처음은 필수불가결로 일어나야만 한다. 처음은 곧 발판의 도약이 되어 최고 또는 일등이란 결과물로 나아가게도 하니까.
최근 한 다큐멘터리에서 뱀이 탈피하는 영상을 봤다. 탈피하는 과정은 꽤 힘겨워 보였고, 느렸고,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태 가지고 있던 몸의 껍질을 버려내는 이유는 뭘까 싶어 검색해 보았더니 탈피는 생물에게도 매우 힘겨운 과정이지만 탈피를 하지 않으면 몸의 크기를 불릴 수 없기에 필수로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탈피는 성장과 관련이 있어 성장주기에 따라 탈피 시기도 달라진다고 하는데, 파충류의 경우 대부분 1년에 1번 계절의 환경이 변하고 생물의 내분비계가 탈피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호르몬을 분비했을 때 몸이 탈피 준비를 하게 된다고 한다.
외골격을 두른 곤충이나 갑각류는 탈피 후 더 큰 갑각을 만들어 내고, 파충류는 내골격의 성장에 맞추기 위해 피부를 크게 늘려 주기적으로 탈피를 한다. 파충류, 양서류 등은 탈피로 인해 피부에 기생하는 기생충이나 세균들을 떨쳐내기도 한다고 한다. 탈피를 하는 동물은 모두 고통을 동반하면서까지 전의 모습을 버리고 다음으로 나아간다.
전에 있던 상황이나 무언가에서 많이 달라졌거나, 과거의 인식을 벗어난 경우, ‘탈피’ 또는 ‘탈바꿈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실은 내가 처음이란 단어를 낯설게만 느껴졌던 것도 첫 시작점 앞에서의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낯선 것에서의 두려움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해야 할 일을 찾아낸다면 처음이란 혼란에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가져야 할 것은 탈피라는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