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와 긴 통화를 했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다가 요즘 나를 성가시게 하는 일들에 대해 토로하게 됐다. 가만히 듣던 친구가 넌지시 물었다. 그게 너의 평화를 방해할 만큼 큰일이야?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그렇게 말하니 거추장스럽던 고민이 한순간에 사소한 것으로 변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통화를 마치면서 친구가 덧붙였다. 은강아, 괜히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가볍고 경쾌하게 지내자.
그 순간 내 안에 중요한 무언가가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마치 더운 여름날 살얼음이 낀 맥주를 들이켜는 감각과 비슷했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시원하면서 따끔한 기분. 친구는 오랫동안 내가 바라던 상태를 딱 들어맞는 언어로 짚어준 것이다.
사실 ‘경쾌하다’는 말은 내가 평소에도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러닝머신 위에서 경쾌하게 달려보겠다는 다짐으로 발을 구르고 학생들의 작품을 첨삭하며 조금 더 경쾌하게 진행해 보라는 조언을 내어놓는다. ‘경쾌하다’고 중얼거리면 어쩐지 꽉 막힌 것들이 시원하게 해결될 것만 같다. 그럭저럭 괜찮은 상태가 아니라 좀 더 상쾌하게 쭉 뻗어가는 느낌이랄까. 힘차게 전진하는 쾌속 열차처럼, 천진한 아이의 쾌활한 웃음처럼.
‘경쾌하게 지내기’란 언뜻 들었을 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꽤 어려운 일이다. 물속을 헤엄치는 사람과도 비슷하다. 수중에서 제대로 이동하기 위해선 몸의 정렬을 깨지 않고 올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적당하게 힘을 빼는 것도 중요하고 물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멀리서 보면 우아하고 민첩해 보이나 사실 상당한 체력과 노력이 요구된다. 어떤 준비도 없이 물에 뛰어드는 건 위험하다. 요동치는 감정에 휩쓸리는 순간 허우적대다 가라앉을 수도 있다.
부정적인 생각은 물먹은 솜과 같다.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그때 그 사람은 내게 왜 그런 말을 했지? 난 항상 최악의 선택만 하는 것 같아. 생각은 생각을 먹고 더욱 불어난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억지로 구겨서 폐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경쾌하게 나아가기 위해선 먼저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야 한다.
최근 나는 삶을 가볍게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 골몰하고 있다. ‘뭐 해 먹고살지?’보다 ‘어떤 자세가 편안하지?’라는 질문에 무게를 두고서. 물론 나는 아직 젊은 나이고 주렁주렁 매달린 고민과 불안이 당연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젊다고 해서 괜한 것을 짊어질 이유는 없다. 필요한 물건 대신 무거운 돌을 가방에 넣는 건 그야말로 무의미한 일이니까.
때론 복잡하고 부조리한 세계가 나의 다짐을 방해한다.
집 앞 새로 생긴 카페의 레몬 케이크, 너무 맛있어! 일상에서 즐거운 일이 생기면 호된 꾸짖음이 들려오는 것 같다. 네가 지금 케이크에 기뻐할 때니? 오늘도 혐오에 기반을 둔 끔찍한 범죄가 벌어졌고 지구 반대편에선 총성이 울려 퍼지고 있어. 그뿐이면 다행스럽게? 자본의 논리 속에 약자는 희생당하기 마련이고 환경오염으로 인한 이상 기온으로 생태계가 엉망이라고.
이것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마음을 주저앉히기에 효과적이다. 요즘처럼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고 흐뭇해하기가 무섭게 곧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올 것이라는 악담이 끼어드는 식이다. 이러한 속삭임은 타인의 언어라기보다 내 안에서 작동되는 장치에 가깝다. 그러니 해결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나의 괴로움이 세계의 운명을 바꾸는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가져야 할 사회적 책임을 방기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세상을 헤쳐 나가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인생이라는 바다를 헤엄쳐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난 우리 앞에 거친 파도는 다가오거나 다가오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것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경쾌하게 지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며 햇살과 바람을 느끼고 살랑대는 보사노바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니까. 진한 맥주 한 잔 곁들어도 좋겠지. 그렇게 태평하게 굴다간 무시무시한 태풍에 잡아먹힐지도 몰라. 그런 목소리가 들리면 이렇게 대꾸하고 싶다. 알겠어요. 우선 여기 이 레몬 케이크를 먹어봐요. 정말 맛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