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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낚시, 망각의 낚시

등록일 2024-07-15 19:11 게재일 2024-07-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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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낚시는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잊기 위한 것이었을까?

“Some dance to remember, Some dance to forget” 밴드 Eagles(이글스)의 ‘Hotel California(호텔 캘리포니아)’의 한 소절이다. 어떤 춤은 기억하기 위해 추고, 또 어떤 춤은 잊기 위해 춘다니, 이렇게 시적인 노랫말이 또 있을까? 때때로 노래는 시보다 더 위대한 시가 된다. 물론 음악보다 더 위대한 음악이 되는 시도 있다. 나는 낚시할 때 가끔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리고 저 대목에서 가사를 바꿔 부른다. “Some fishing to remember, Some fishing to forget”이라고.

기억하기 위해 하는 낚시가 있고, 잊기 위해 하는 낚시가 있다. 또 한 번 장마가 오고, 단풍이 들고, 첫눈이 내리고, 다시 꽃이 피고, 매미가 울고, 얼음이 얼고, 계절이 돌아오고 돌아올수록 사랑하던 이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나간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추억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삶이라는 지독한 경주는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게 우리를 채찍질한다. 그나마 낚시가 나로 하여금 그 각박한 트랙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낚시를 통해 나는 잠시라도 힘겨운 세상살이를 잊는다. 그게 잊기 위한 낚시다.

복잡한 세상살이를 잊는 순간, 그동안 기억 구석에 방치됐던 풍경들이 하나 둘 뿌연 먼지를 털어낸다. 물론 낚시가 잘 되면 낚시에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할 여유도 없다. 입질은 없는데 석양은 환장하도록 아름답게 저물고, 찌는 말뚝인데 케미라이트 불빛이 강물 위를 은하수처럼 흐를 때가 문제다. 찌 대신 온갖 추억들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이제 젊은 시절 내가 사랑했던 거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제시마저도. 하지만 여전히 난 그들과 함께 있다. 물론 이제 너무 늙어 훌륭한 낚시꾼이 될 수는 없지만 난 지금도 이 강가에서 홀로 낚시를 한다. 이렇게 날이 저물어가는 계곡에 혼자 있을 때면 모든 존재가 내 영혼과 추억 속으로 스며든다. 빅블랙풋 강의 소리와 4박자의 리듬, 그리고 송어가 뛰어오를 거란 기대감… 결국 모든 것들이 하나로 합쳐진다. 흐르는 강물처럼.”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오는 주인공 노먼 맥클레인의 독백이다. 팔순의 노조사는 강물에 몸을 담근 채 낚시 매듭을 묶으며 젊은 시절 자신이 사랑했던 목사 아버지, 자애로운 어머니,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 폴, 마을 축제에서 만나 결혼해 일생을 함께 산 아내 제시를 추억한다. 모두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제는 사라진 사람들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다 사라지고 오직 강물만 남았다. 평생의 추억이 흐르는 빅블랙풋 강에서 낚시를 할 때면 강물 소리와 바람, 무지개송어 입질, 후회, 상처,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음성과 눈빛이 하나로 합쳐져 영혼 속으로 스며든다. 노인은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낚시를 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렇게 말했다.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고. 내가 살아 있는 한, 살아서 기억하는 한 내가 사랑했던 이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잊기 위해 하는 낚시도 있다. 그런데 이 낚시는 정말 어렵다. 오래 사랑한 연인과 헤어지고서 그녀를 잊기 위해 뙤약볕 쏟아지는 갯바위에 올랐다. 발밑으로 파도가 부서지고, 거품 되어 사라지는 하얀 포말이 마치 부질없는 인연처럼 느껴졌다. 잊어야지, 잊어야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루어를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런데 젠장, 입질이라도 좀 있어야 잊을 게 아닌가? 깻잎만한 광어, 손바닥만 한 우럭조차 물지 않으니 빈 바늘에 딸려 오는 건 오직 그녀 얼굴뿐이었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 선명해진다. 낚시를 하면 마음이 정리되기는커녕 더 심란해진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어느 날인가는 앞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오래 당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또 어떻게 저 별의 시간을 건너가게 되는지”(강경보, ‘우주 물고기’)라고 묻기도 한다.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결코 저 별로 건너가지 못하고 이 별에 머문다. 갯바위, 좌대, 갑판, 강물 속, 방파제가 낚시꾼의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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