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자 잘하는 일이니까.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나 뉴스를 정독하다가 뉴진스의 무대 영상을 찾아보고 단체 카톡방에서 친구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키득거렸다. 함께 사는 강아지가 불만스러운 몸짓으로 내 손등을 긁었다. 산책하러 나가자는 것이었다.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폭우였다.
비 오는 날은 몸이 무겁다. 어깨도 골반도 뻐근하다. 비가 오면 강아지 산책은 나갈 수 없다. 육체의 문제가 아니다. 날씨의 문제다. 올해 장마는 유독 지난할 것이라는 기사를 보면서 ‘산책은 어떡하지’하는 염려부터 들었다. 요즘 나의 고민은 이렇게 실존적이고 얕다.
본심을 고백하자면, 장마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산책 안 가고 침대에 있는 것 너무 좋으니까! 알량한 소망을 들킨 것일까. 나의 강아지는 언짢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내가 괘씸하다는 듯 침대 시트를 맹렬하게 긁어댔고 양발로 등허리를 난타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성질 나쁜 동물을 납득시키기 위해선 직접 보여줘야 했다. 악천후의 무서움을 모르는 강아지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강한 비바람에 우리는 오피스텔 로비를 빠져나가지도 못했다. 공동 현관 앞에 서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우개로 문지른 듯 희뿌연 공기 중으로 비 냄새가 훅 끼쳤다. 동시에 높다란 나무의 출렁이는 잎사귀가 보였다. 거센 비를 맞으면서 유연하게 흔들리는 가지를 존경 어린 눈빛으로 응시했다. 어때? 나는 강아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냉혹한 바깥 세계야. 내 뜻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강아지는 집을 향해 네발로 삐걱삐걱 걸었다. 헤엄치는 법을 잊어버린 물고기처럼.
집으로 돌아와 미뤄둔 빨래며 부엌 청소를 했다. 집안일을 마치고 나니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하고 나와 시원한 보리차를 들이켰다.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선풍기에 대고 아아, 소리를 냈다. 오늘은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구나.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그런 생각이 들자 어쩐지 난처해졌다. 돌아보면 나는 무수한 여름을 이런 식으로 지나 보냈다. 너무 한가해서 혹은 그럭저럭 바빠서. 흘러갔다는 것조차 모르고 흘려보내기도 했다. 여름은 한눈팔면 썩어버리는 과일 같은 것. 나중에 먹어야지 하고 대강대강 생각하다간 입도 대지 못한 채 버려야 한다. 뭐든 알맞게 달 때가 있어서 딱 그 시기를 즐겨야 하는데. 살다 보면 그런 게 잘 안된다.
여름에 더욱 맛있는 맛을 떠올려본다. 무더운 날씨에 들이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살얼음 낀 맥주,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수박이나 밍밍하면서 감칠맛 도는 냉면. 그래, 역시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정수리가 뜨거워지는 감각도 팔뚝이나 발가락을 다 내놓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도 즐겁다.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은 간질간질한 마음이나 경쾌한 음악으로 가득 채운 플레이리스트도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여름은 꽃무늬 원피스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이 아닌가. 마음껏 화려해져도 괜찮은 날들. 동시에 한없이 가라앉아도 이상하지 않은 날들.
어떤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여름이었다’는 문장으로 끝나면 그럴듯해진다는 말이 있다. 그 또한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무엇이든 마지막을 맺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또 없는데, 단 한 문장으로 그것이 마법처럼 가능해진다니. 그러고 보면 여름은 참 이상하다. 뜨거운 동시에 서늘하다. 불같이 타오르는 날과 물같이 축축한 날이 공존한다. 시작부터 클라이맥스까지 모두 다 가능할 것만 같다. 여름엔 아무래도 열정적인 기세가 더 어울리지만, 잔잔하게 흐르며 대단한 일이 벌어지지 않아도 그 또한 훌륭한 서사가 될 수 있겠다. 어쨌든 여름이었으니까.
오늘은 새벽부터 바람이 세게 분다. 역시나 어제처럼 침대에서 꼼지락대다가 겨우 책상 앞에 앉았다. 여름에 관해 쓰려고 했던 것뿐인데 어느덧 해가 다 졌다. 창밖을 본다. 비에 젖은 도로를 가르는 자동차 불빛이 물감처럼 번져나가는 것이 보인다.
물기로 출 늘어진 여름은 곧 빳빳하게 마를 것이고 서랍장으로 들어가 다시 꺼내질 날을 기약할 것이다. 이 순간을 열렬하게 살아낼 자신이 없지만 그저 몽롱하게 바라만 보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 무엇이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문장이 내 손에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