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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거짓말은 이불처럼

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에 훨씬 능한 아이였다. 현실과 멀리 떨어진 이야기,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장면으로 다가오곤 했다. 그러니까 어젯밤 무시무시한 괴물이 침대 밑에 숨어 있었다든지 방에 난 창으로 요정이 찾아왔다고 떠드는 것. 어떤 면에서 그것은 거짓말이라기보다 내 안에서 만들어진 왜곡된 형상을 믿는 것에 가까웠다. 간밤에 느꼈던 두려움이나 이질감을 나만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자라면서 나는 거짓말의 무시무시함을 체득하게 되었다. 특히 악의를 가지고 내뱉는 거짓말이 얼마나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 깨달았다. 상황을 모면하고자 꺼낸 말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았으며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도 경험했다. 나를 둘러싼 오해가 커지는 과정, 사실이 아닌 것들이 나의 영혼에 덕지덕지 붙는 순간도 있었다. 거짓말은 짓궂은 악마처럼 나를 괴롭혔으나 동시에 나 자신도 거짓말이라는 무기를 들고 타인을 향해 얼마든지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거짓말의 세계에서 안온함을 느끼는 경우도 존재했다. 괜찮지 않은 상황에서 괜찮다며 스스로를 속이는 일, 그 사람이 나쁜 의도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일, 누추한 현실을 외면하고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그리는 일이 그러했다. 그럴 때의 거짓말은 한 줌으로 남은 희망이자 미지의 세계를 긍정하는 힘이었다. 거짓말이 있기에 현실을 버틸 수 있었고 헛된 상상의 영역으로 인해 삶의 부피가 한껏 풍부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소설을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일지도 모른다. 소설은 필연적인 거짓말이니까. 얼마나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가에 따라 이야기의 완성도가 결정된다. 작가와 독자는 서로의 거짓말을 믿기로 합의한 모종의 협력 관계다. 잘 구축된 거짓말을 통해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애란의 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이러한 지점을 유려하게 풀어 놓는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소설 속 선생님이 고안한 자기소개 게임이다. 다섯 문장으로 자기를 소개하는데 그중에는 반드시 거짓말이 들어가야만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안에 감추고 있는, 누구에게도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은 진실을 거짓말의 형태로 발화할 수 있다. 거짓말이라는 형식 안에서 놀라울 정도로 솔직해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자기 자신조차 몰랐던 진실을 확인하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청소년들이다. 세상의 모든 인물이 그렇듯 그들 역시 각자의 상황에서 감내해야만 할 것들이 존재한다. 가정 환경이나 좌절된 꿈과 같은. 그들의 시간은 어떤 것보다 뜨겁고 생생하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무궁무진한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무언가 발설하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린다. “누가 들어도 명백한 거짓 같아서 모두 웃어넘길 수 있는 진짜 이야기를.”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러나 삶은 거짓말처럼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현실에서 도망치는 법을 상상한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캄캄한 어둠 안에서 숨을 죽이다 보면 고통이 모두 지나가게 될까. 상황이 끔찍하다는 것을 두 눈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다. 결국 우리는 이불 밖으로 나와야만 하고 꼿꼿이 서서 차가운 현실을 통과해야 한다. 외롭고 두려울지라도. 그것은 소설 속 주인공이 종국에 “꿈에서 나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돌아왔다”는 문장을 떠올린 이유기도 하다. 꿈과 현실을 구분할 힘이 생긴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간다는 뜻이다. 더 나은 쪽으로 발을 디디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김애란 작가가 ‘작가의 말’에 “삶은 가차없고 우리에게 계속 상처를 입힐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 마지막에 좋은 이야기를 남기고, 의미 있는 이야기 속에 머물다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적은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그러니까 거짓말은 마치 이불 같은 것. 추운 날 다정하게 덮어주면서 마음이 약해지면 꼼짝없이 붙들리는 것. 바람이 차갑게 불수록, 그로 인해 나 자신이 속절없이 흔들릴수록 절실히 생각나는 것. 이불 속으로 숨어드는 것은 어떤 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확실한 위로로 작동할 수 있다.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불도 거짓말도.

2025-01-20

인생, 아무도 모른다

아내는 휴대폰으로 내 모습을 촬영했고... 아내는 일주일에 한 번 미술 레슨을 받으러 간다. 왔다 갔다 하는 시간과 레슨 시간을 합하면 두 시간 반 정도가 걸리는데, 그동안 육아는 온전히 내 몫이 된다. 평소 둘이 함께 하는 육아가 한 사람의 몫이 되면 체감적으로 서너 배 정도 힘이 드는 느낌이 들곤 하지만 그날은 유독 쉽지 않았던 날이었다. 잘 자던 아기가 배가 고파 깨서 분유를 먹였고, 먹자마자 아기는 큰 볼일을 봤고, 아기를 씻기고 바닥에 잠시 눕히고 기저귀를 가지러 간 사이 아기는 거실 바닥에 작은 볼일을 보고 있었고, 다시 아기를 씻겨야 했고, 이번에는 딸꾹질을 시작했고, 그것을 멈추기 위해 또 분유를 먹이는 길고 긴 과정을 수행해야 했다.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다시 아이를 안아 재우고 있을 때 아내가 집에 돌아왔다. 두 눈이 퀭해진 나를 보고 아내가 힘이 들었는지 물었고, 나는 세상 가장 초췌한 표정으로 짧은 시간동안 우리에게 있었던 일들을 하소연했다. 별 것 아닌 이 장면이 우스웠는지 아내는 휴대폰으로 내 모습을 촬영했고, 이것을 살짝 편집해서 SNS에 숏폼 영상으로 올려 보면 어떨까 제안했다. 나는 휘뚜루마뚜루 편집을 해서 대충 나의 SNS계정에 올려두었는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이 영상이 SNS의 알고리즘을 타고 무섭게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영상을 업로드한지 48시간 정도가 지난 현재 이 영상의 조회수는 14만을 돌파했고 지금 현재도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당연히 반갑다. 내 본업으로 얼굴을 알리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내 SNS가 노출되는 것은 내 창작물들을 홍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조금은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작년 하반기, 나는 내가 그동안 발표했던 음악들과 시편들을 갖고 수십 편의 숏폼 영상을 제작했다. 작품을 고르고, 자막을 달고, 그와 어울리는 영상을 편집해서 업로드 하는 수고로운 과정을 매일 반복했는데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피땀 흘려 노래와 시를 창작한 시간까지 더하면 정말 공을 많이 들인 것인 셈인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많이 아쉬웠던 참이다. 그런데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올린 일상 영상이 빵 하고 터져버리다니.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다. 이틀만에 14만이라는 숫자는 그야말로 내게 있어서는 대단한 수치이다. 유튜브에 올려둔 내 뮤직비디오 중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영상은 ‘집에 가고 싶다’라는 곡의 뮤직비디오이다. 이 영상의 현재 조회수는 39만. 그러나 그것은 업로드 한 지 5년 만에 달성한 결과이다. 그냥 육아가 힘들었다고 아내에게 푸념하는 영상이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다니, 실소를 참기가 어려운 일이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어떤 일이 이런 식으로 예상을 벗어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은 내 삶에 종종 있는 일이었다. 앞서 말한 ‘집에 가고 싶다’라는 곡 역시 아무런 기대감 없이 내어 놓은 곡이다. 이 노래가 알려지게 된 사정이 아주 뜬금없었다. 야근하는 직장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었던 이 노래가 군 복무를 하고 있는 현역 장병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게 되었던 것이다. 요즘 생활관에는 스마트 스피커가 하나씩 있다는데, 장병들이 무심코 ‘집에 가고 싶다’고 외치면 스피커가 내 노래를 재생해주곤 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내가 쓴 일곱 권의 책 중 가장 잘 팔린 것은 ‘사축일기’라는 책이었다. 이 역시 출판사의 제안으로 아무런 기대 없이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앞서 야심차게 내어 놓았던 나의 첫 산문집이 상업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해 의기소침했던 터라 받았던 계약금이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팔려줘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글을 썼다. 출판사에서 요청한 것은 가벼운 글이었는데, 나는 그 요청에 맞는 글을 쓰면서도 속으로 ‘이런 글이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책은 내가 쓴 첫 번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증쇄를 찍으며 유명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차트에 오르는 결과를 내어 주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맞는 말이고, 성공하기 위해 가져야 하는 아주 기본적인 태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매번 똑같은 야심과 기대감으로 프로젝트를 마주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은 그야말로 영혼을 갈아 넣었는데 실패하기도 하고, 어떤 일은 가볍게 툭툭 해냈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행한 일 앞에서 우쭐해져서도 안되고 함부로 의기소침해져서도 안 된다. 결과는 알 수 없는 것이니 그저 매번 담담하게 계속 해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25-01-20

조명가게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조명가게’는 코마 상태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느 날 시내버스가 다리 아래로 추락하면서 탑승자들은 죽거나 중상을 입는다. 중환자실에 실려 온 생존자들은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의료기기에 겨우 의존해 목숨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혼수상태에서 그들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묘한 체험을 한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 펼쳐지는 가운데 마주치는 사람들이 어딘지 이상하다. 사람이지만 사람 같지 않은 이질감을 눈치 채는 순간, 바로 그 자신 또한 이상한 세계에 속해 있는 이상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이상한 세계에는 어두운 골목이 있고, 그 골목의 끝에는 조명가게가 있다. 현실에도 존재하고 환상에도 존재하는 이 수상한 가게는 사람의 생사를 관장한다는 북두칠성처럼 환하게 불 켜진 전구들로 가득하다. 전구들은 모두 누군가의 생명 빛이다. 전구가 깨지거나 불이 꺼지면 그 사람은 죽는다. 반대로 죽음의 문턱에서 자기 전구를 찾아 간직하게 되면 삶으로 다시 건너갈 수 있게 된다. 조명가게는 불교의 삼도천이나 가톨릭의 연옥과 비슷한 개념의 장소인 셈이다.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건 죽은 자들이다. 조명가게가 있는 골목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은 장례를 치르고 발인이 마쳐지기까지 사흘 동안 산 사람들의 영혼과 교류할 수 있다. 죽은 자들은 사랑하는 이를 어떻게든 삶 쪽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한다. 스포일러가 될 테니 다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코마 상태의 현민(엄태구)을 살리기 위한 죽은 지영(김설현)의 헌신이다. 살아서는 농아라는 이유로 현민의 부모로부터 외면 받은 지영이 버스 사고로 허리가 끊어진 남자친구를 붙들고 처절한 바느질을 한다. 이때 힘껏 바늘을 꿰는 팔의 운동이 환자의 심박그래프와 겹쳐지는 장면은 뭉클함의 최대치를 느끼게 한다. 내 의지로 살아가지만 삶은 내 의지만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나를 살게 하는 것 같아도 어느 모르는 시공간에서 누군가가 나를 살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교회에 안 나간 지 오래됐지만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던 복음성가를 지금도 가끔 흥얼거리는 것은 누군가가 나를 살게 한다는 믿음, 또 내가 당신을 살게 하리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주보고 누웠을 때/ 당신의 심장은 아래로 쏟아지고/ 내 심장은 쏟아지는 세상을 받아냈는데/ 내 팔베개에서 자꾸만 강물이 흘러/ 당신 귀는 깊이 잠들지 못했네/ 내 피가 실어 나르는 복숭아 꽃말을/ 다 듣고 있었네 그때 나는/ 벌써 죽은 사람이었고/ 당신은 살아서는 다시 못 꿀/ 꿈처럼 가엾이 아름다웠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몇 년 전에 쓴 ‘몽유도원’이라는 졸시다. ‘조명가게’를 보고 나서 시를 다시 읽어보니 시가 어딘지 달라져 있다. 여러 번 읽어봐도 시는 그대로인데 뭐가 달라진 걸까. 드라마의 내용이 겹쳐지면서 내 시지만 애틋해진 것 같다. 죽은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살리고 저승으로 간다. 저승으로 가면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은 “다시 못 꿀 꿈”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산 사람은 떠난 이와의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때로는 존재보다 부재가 더 환한 빛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사람을 살리는 건 사람이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루고 있어 드라마에 전경화되지는 않지만 망자를 대하는 장례지도사들의 품격 있는 태도와 환자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헌신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면 안팎에서 동시에 두드리는 줄탁동시(啐啄同時)가 필요한 것처럼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힘을 합치는 것은 물론 그 자신의 의지까지 다 동원되어야 한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쉬운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의 전구가 될 수 있다. 얼마 전 조현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시창작 수업 첫날,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한 남자분이 활짝 웃으며 “잘생기셨어요. 키도 크고” 대뜸 두 손을 덥석 잡았다. 내 손이 차다며 나를 이끌고 온풍기 앞으로 가더니 따뜻한 바람에 손을 녹이게 했다. 연말부터 쭉 지치고 어두웠던 마음에 뭉클한 빛이 번졌다. 내가 그들에게, 또 그들이 내게 전구가 되어주는 조명가게의 문이 열렸다.

2025-01-13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운명이라는 게 정해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그냥 인간은 주어진 것 없이 바람처럼 떠다니는 건지, 두 가지 중 어떤 것인지 의문이 들 때에 보는 영화. 새로운 해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포레스트 검프’를 꺼내어 봤다. 극중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는 IQ75의 경계선 지능장애로 척추가 굽어 다리에 보조장치를 달고 다니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을 사람들이 검프를 무례하게 쳐다보아도, 다른 아이들과 달리 지능이 현저히 낮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교장 선생님의 말에도 그의 어머니는 포레스트는 남들과 다르지 않음을 상기시키고, 늘 좋은 교육을 시키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포레스트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또래 친구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그런 포레스트에게 처음 손을 내민 것은 또래 여자아이 ‘제니’뿐이었다. 성인이 돼 제니와 길을 걷던 어느 날, 마을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포레스트. 그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내달렸을 뿐인데 너무 빠르게 달린 나머지 미식 축구 감독 눈에 띄게 된다. 포레스트의 달리기 실력을 보고 감동을 받은 축구 감독은 그를 대학으로 이끌게 되고, 입학 이후에도 달리기 실력 덕분에 엄청난 활약을 하게 된다. 결국 전미 대표팀 선발, 대통령상까지 받으며 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졸업식에선 우연히 군 입대 팸플릿을 받게 되고, 그 길로 군대에 입대하게 된 포레스트. 그곳에서 친구 버바를 만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트남 전쟁에 참가하게 되고, 정글 속 격투에서 친구 버바를 놓치게 된다. 버바를 구하기 위해 정글을 헤매보지만 다른 전우들을 구출할 뿐, 너무 늦게 버바를 구한 탓인지 그의 목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끊어지고 만다. 버바를 잃어 슬픔을 겪는 포레스트지만, 그 와중에 여러 전우의 목숨을 구한 공로로 대통령 명예훈장을 받게 된다. 그 와중 또다시 우연히 탁구를 하게 되는데, 신기하게도 탁구에도 소질이 있던 포레스트는 전국을 돌며 위문공연을 다닌다. 머지않아 미국 탁구 대표팀까지 들어가 실력을 인정받으며, 탁구로 중국에 간 첫 미국인이라는 기록마저 세우게 된다. 우연히 발길 가는 대로 뻗을 뿐인데, 모든 것을 타고난 능력 마냥 뛰어나게 소화하는 포레스트지만 언제나 운이 따라주진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은 포레스트는 급히 고향으로 가지만, 어머니의 병은 매우 심각해졌고 살 날이 많지 않다는 말을 듣고 만다. 포레스트는 예기치 못한 이별을 준비하게 되고, 어머니는 포레스트에게 신이 주신 능력으로 최선을 다할 것을 이야기한다. 포레스트가 신이 준 운명이 무엇이냐고 묻자, 어머니는 그것은 자신이 개척해나가는 것이라며 “인생은 하나의 초콜릿 상자와도 같아, 무엇이 들어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거든”이란 말을 남기며 죽음에 이른다. 어머니의 죽음, 제니와의 거듭되는 이별로 지친 포레스트는 결국 어느 날 갑자기 무작정 집을 나서 달리기 시작한다. 앨라베마주를 횡단하고 또다른 목적지, 더 나아가 더 멀리 있는 목적지를 향해 뛰며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며 이별의 슬픔을 묵묵히 견딘다. 포레스트의 이유 없는 달리기는 뉴스에 보도되기 시작했고 그의 행동에 영감 받은 추종자들이 늘지만 포레스트는 꿋꿋하게 3년 2개월 간 꾸준히 달린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견딜 수 없는 슬픔의 순간이 조금 물러났을까. 3년이 지나고 나서야 포레스트는 이제 집에 가야겠다며 달리기를 문득 멈춘다.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간 포레스트는 자신을 만나러 오라는 제니의 편지를 받고 제니에게로 향한다. 영화 속 포레스트는 제니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준다. 제니는 삶을 이리저리 방황하지만 그런 제니 곁을 맴돌며 포레스트는 묵묵히 기다린다. 그 와중에 초콜릿 상자 속 초콜릿을 하나씩 꺼내어 먹듯, 주어진 삶을 착실하게 살아낸다. 어떠한 불만도 없이, 하나의 길을 착실하게 개척해나가며 늘 좋은 성과를 낸다. 물론 성과가 좋다고 해서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는다. 총알이 빗발치는 베트남 전쟁에서 별을 보았던 것. 바다에서 지는 태양, 사막에서 떠오르는 태양 등 그는 외로움과 공허의 시간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이었고,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결국 그가 갖고 싶었던 모든 사랑의 형태는 자신을 떠나갔지만 그럼에도 포레스트는 운명이 주어진 것처럼, 또는 바람처럼 떠다니며 살아간다. 새해가 밝았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 화면을 멈추고선 새로운 해의 태양을 맞이해본다. 올해의 내가 바람 같은 일들에서 씩씩히 살아냈으면 좋겠다.

2025-01-13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세상

묵은 한 해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였다. 떠나보낸 어떤 것에 대한 인상은 마지막 모습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2024년은 많은 이들에게 아름답게 기억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둘러싼 정치권의 갈등과 혼란, 그에 따른 심각한 경제적 타격,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었을 끔찍한 참사. 2024년은 분노와 슬픔으로 얼룩진 한 해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 같다. 그러나 나라는 한 개인에게는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가진 해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2024년은 내가 나의 아들을 처음 품에 안은 해이고, 아빠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 해이기 때문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기분은 이전과 다르다. 나의 세상을 화려하게 만들어가는 일보다 아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열어주는 일 쪽에 삶의 비중을 더 두기로 결심한 터라 이전과는 조금 다른 염원을 가슴에 품게 되는 것이다. 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며 빠른 속도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소망한다. 아들이 만날 세상이 부디 험하고 추운 곳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뜻한 곳이기를. 내가 물려줄 세상이 한 번 살아볼 만한 아름다운 곳이기를. 그런 세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먼저, 나는 아들의 세상에 희망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장은 힘겹더라도 버텨내고 나면 지금보다는 분명히 나아지리라는 확신을 갖고 살 수 있는 세상이길 바란다. 나는 이 사회와 국가에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곤 한다. 1%대까지 떨어져버린 경제 성장률, 국가의 존폐를 걱정하게 만드는 인구 지표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대책을 내어놓기는커녕 이미 이 나라를 지키며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마저 맥 빠지게 만들고 급기야는 떠나고 싶은 마음을 품게 만드는 정치권의 행태. 개개인이 노력한다면 정말로 다시 좋았던 시절을 회복하고 다음 세대에게 지난 세대가 살았던 세상보다 풍요로운 세상을 물려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이제는 아무런 확신도 가질 수가 없다. 언젠가 아들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를 설명해 주어야 할 텐데, 그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더 늦기 전에 정신 차려야 할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이 나라를 포기하지 않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또한, 서로에 대한 믿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 누군가가 나를 해할 것이란 의심 없이,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불행한 사건이 내게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 없이 살 수 있는 세상 말이다. 우리는 이미 이웃의 SNS 게시물을 이용하여 딥페이크 성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을 목격한 바 있다. 부동산 전세 사기를 당해 괴로워하는 모습도 주변에서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규칙을 어기는 것을 넘어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에게 신체적·정서적 위해를 가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것을 빼앗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 너무나 작고 연약한 나의 아들을 지켜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할 정도로 괴롭고 두렵다. 내 아들을 그러지 않는 인간으로 길러내야 하는 것으로 충분했으면 좋겠다. 내가 타인을 해하지 않는다면 타인도 나를 해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르치고 싶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의가 승리하는 공정한 세상이다. 그것은 악행을 저지르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이라면 지위의 고하나 재산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똑같이 처벌 받는 세상이다. 다른 이들을 두렵게 만든 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에 피해를 끼친 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이가 권력으로부터 비호 받지 않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 소중한 내 아들에게 바르게,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는 동화책에는 선한 자는 상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을 것이다. 그것이 진리라고 가르치고 싶다.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품고 있는 새해 소망이 대단한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 허황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인가. 누가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것인가. 나는 내 세대가 안타까운 세대로 기록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혼란을 겪은 세대, 비록 자신들은 한 때 불안과 절망 속에서 살았을지언정 다음 세대에게는 평화와 희망을 물려준 세대라고 평가받길 간절히 바란다. 나의 아들은 부디 내가 살았던 것보다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 모두 작년보다는 나은 올해를 살 수 있다면 좋겠다.

2025-01-06

보통의 날

슬픔과 분노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언스플래쉬 그날은 참 이상했다. 2월에 출산 예정이던 새언니가 조산 기운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제 17개월 된 첫째 조카를 돌봐줄 사람을 찾지 못해 부모님이 급하게 아이를 데리고 본가로 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감기 기운과 잡다한 일 처리를 요구하는 연락 때문에 괴로워하던 중이었다. 나의 몸 상태가 실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체크리스트를 정리했다. 급한 것부터 차근차근 처리하자 싶었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수시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본 뉴스,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소식 때문이었다. 어떤 기적을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던. 그러나 끝내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던. 그렇게 되었구나, 하고 중얼거리던 날. 다음 날 강의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본가로 향했다. 잠깐이라도 조카의 얼굴을 보고 오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엉망인 컨디션에 장거리 운전까지 더하니 몸이 금방이라도 두 동강 날 것만 같았다. 조카의 상태는 나보다 훨씬 심각했다. 고열에 시달리며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부모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심리적 압박이 육체적 형태로 발현된 것 같았다. 부모님은 회사로 출퇴근해야 했으므로 아이를 돌보는 손이 턱 없이 부족했다. 결국 내가 본가에 일주일을 머무르며 함께 조카를 돌보기로 했다. 조카의 상태는 호전되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제대로 쉬질 못하니 감기 기운은 점점 더 심해졌고 끝내야 할 일은 줄어들기는커녕 쌓여만 갔다. 약기운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조카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서 달려가 보니 주위가 엉망이었다. 손이 닿는 곳은 물론이고 서랍장 안의 모든 물건을 꺼내서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있던 것이다. 조카가 양손에 쥔 뾰족한 물건을 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익숙한 공간에 당연하게 놓인 것들이 무시무시한 흉기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평소였다면 그런 조카의 행동에 이토록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왕성한 호기심 정도로 치부하고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인형이나 소리가 나는 장난감처럼 무해한 것들로 유인하며 아이의 관심을 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엉엉 우는 아이를 뒤로한 채 위험한 구석이 있는 것들을 모조리 숨겼다. 절대 다쳐서는 안 돼. 조그만 생채기라도 나선 안 돼. 그런 마음으로 억척스럽게 조카를 안았다. 그렇게 새해가 밝았다. 덕담을 건네는 연락이 없었다면 새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 새해였다.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쉽게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좋은 일 가득한 새해 되세요. 그런 상투적인 답장을 쓰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건강히 지내라는 말,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 머릿속은 어두운 형체가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혼돈과 혼란, 죽음에 관한 것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다음 주에 예정된 수업을 위해 다시 집으로 올라오면서 나는 조금 울었다. 하나의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소한 일에도 덜컥 겁이 났다. 평범한 하루가 큰 불행으로 확장될 것만 같았다. 와중에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느슨해졌다. 도로 위로 가벼운 눈이 흩날렸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감정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세상의 나쁜 일들이 하나도 해결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불안에 잠식당하는 중이다. 슬픔과 분노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상황에 체념하게 되고 허무와 냉소로 나아간다. 나는 그런 마음을 경계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인데 둔탁한 손이 내 무릎을 툭 꺾는 기분이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황망한 비극은 우리 삶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가.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 반복되고 있다. 따져 보니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아득한 터널을 지나는 기분은 여전하다. 뉴스를 통해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소식을 본다. 자신의 일상을 위해, 기꺼이 도움의 손을 내밀기 위해. 그런 면에서 연재 중인 지면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변명의 여지없이 마감이라는 책임을 지켜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나는 순식간에 보통의 날로 돌아온다. 어쩌면 우리를 슬픔의 한복판으로 데려가는 것도, 일상으로 되돌려놓는 것도, 이 가냘픈 책임감의 몫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원위치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도, 궤도가 포물선을 그리며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보통의 날을 향해.

2025-01-06

왼발과 오른발의 마음으로

초조함과 불안에게서 쫓기고 있다면 주로 가장 먼저 택하는 행위는 명상이다. 하지만 유독 초조함이 많이 발현되는 날엔 명상에 빠져드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그럴 때 내가 가장 택하는 방법은 산책하며 걷기다. 산책은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천천히 내딛으며 숨을 천천히 고른다. 딛는 발의 뿌리가 지구의 땅 속 깊이 존재하는 내핵까지 뻗는다는 생각으로 느릿하게 나아간다. 왼발 다음은 오른발 그리고 또다시 왼발, 그렇게 천천히 내딛다보면 나는 어느새 내가 지정해둔 산책로까지 무사히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놀랍도록 머릿속에서 내내 괴롭히던 무수한 잡념들이 조금은 잠잠해진 채로 얌전해져 있는 걸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도착지의 방향이나 걷는 시간, 도착을 해야 한다는 어떠한 목적 보다는 그저 발을 내딛는 방향 그리고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호흡이다. 내 몸이 어딘가 한 곳에 긴장이 집중되어 있는 건 아닌지, 혹시 불필요하게 고인 몸의 불편함을 호흡과 의지를 통해 풀어볼 수 있는지 생각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매번 밖에 나가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땐 방 한가운데서 좁은 보폭으로 조금씩 발을 떼어 걷는 방법도 있고, 이마저도 어려운 컨디션이라면 앉은 상태에서 발을 지면에서 올렸다 내렸다하며 명상에 빠지는 방법도 있다. 가만히 정좌로 ‘무’에 다다르는 명상에 빠지는 것이 어렵다면 이렇게 걷는 행위를 통해 발의 감각을 느끼고 집중하며 현재에 머무르는 방법을 추천한다.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 도와주고 해결해줄 수 없는 부분이니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 걷는 행위를 통해 기분을 환기시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도착지까지 무사히 걸어온 작은 성취감마저 느끼면서 조금씩 늪을 벗어나 다음으로 펼쳐질 꽃밭으로 향한다. 며칠 전 받은 심리 상담에서는 인생은 늘 꽃밭만 펼쳐질 수는 없는 것이라며, 삶은 늪과 꽃밭으로 번갈아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 들었다. 잡념과 불안에서 발버둥 칠수록 늪에 점점 스스로를 고립시키지만 머지않아 펼쳐질 꽃밭이 있음을 기억하고 힘을 뺀다면 늪에서 빠져나올 만한 힘을 얻게 된다. 그렇게 조금씩 차분히 몸을 움직이다보면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고 선물처럼 꽃밭이 펼쳐진다. 삶은 당연히 그런 것이라고, 늪이 또 등장하여 허무하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든다 한들 삶이 내어주는 꽃밭을 그려야 하는 것이라고. 한 해의 마지막에 서서 올 해 나는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다시금 돌아보니, 좋았던 순간과 좋지 않았던 순간들이 정확히 반반씩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평온하게 펼쳐진 꽃밭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건 어떻게든 늪에서 빠져 나오려는 온갖 안간힘의 흔적이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부당한 것에 대한 혼란스러움, 선택지 앞에서의 주저함, 포기라는 선택, 잠을 오랫동안 자고, 다시금 일어서려는 도약, 마음을 열고 나를 다시금 살펴본 용기 등.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나를 방치시키지 않으려는 발버둥을 볼 수 있었고 그 흔적들이 짙고 거친 흔적으로 여기저기 남아 있음을, 그리고 그 장면은 꽤나 묵직하고 뭉클하게 다가왔다. 한 해를 살아온 나를 돌아보는 것은 실은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고 은근히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그래도 내가 지나온 늪과 꽃밭의 행적을 바라볼수록 나는 앞으로 더 늪을 헤쳐 나올 수 있는 힘을, 그리고 꽃밭을 마주했을 때 기쁨과 환희를 더욱 잘 누리며 더욱 잘 살아갈 수 있음을 믿는다.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가며 골고루 내딛는 마음, 삶의 행운과 불운을 잘 맞이하기 위해 다가오는 2025년에도 균형을 잘 잡아본다. 생각해보니 정말 다행인 점은 늪지가 곧장 시작되거나 기약 없이 계속 된다한들 나는 계속해서 나아갈 힘이 조금 생겼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온 몸의 힘을 빼고 천천히 왼발과 오른발의 마음을 살피는 것, 내년 내가 가장 잘 해내고 싶은 마음가짐이다.

2024-12-30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어린 시절 필자 남매와 함께 한 할머니. 집에 아픈 사람이 있는 건 괴로운 일이다. 즐거운 순간에도 온전히 즐거울 수 없고, 여행을 가더라도 갑작스런 복귀를 늘 생각해야 한다. “할머니 안 좋아” 엄마의 전화를 받고, 삶도 죽음도 아닌 시간에 걸쳐 있는 사람을 사랑한 내 12월은 춥고 어두웠다. 윤석열의 계엄으로 보름 동안 피곤했는데 나머지 보름마저 고통스러웠다. 폐렴 합병증으로 승압제를 쓰고 호흡기를 댔다. 보기에 오늘 내일 하는지라 장례식장을 알아봤다. 삼일장 대신 가족장 이틀만 치르자, 영정사진은 준비해뒀으니 다행이다, 호국원에 전화해 할아버지 옆에 봉안하는 절차를 물어봐야지… 산 사람을 두고 죽음의 형식을 생각하려니 내키지가 않는다. 살 만큼 사셨지만 살아도 산 게 아니니 나는 내 할머니가 마냥 불쌍하다. 어려서 일본군 비행장 가까이 살아 청력을 거의 상실하고 자라서는 시력을 또 거의 잃었다. 근대 교육의 세례를 받지 못한 채 평생 장애인으로 살았다. 그래도 장남이 모시고는 살았다. 환갑잔치도 해주고, 손주들 재롱도 보게 하고. 그때 베란다에서 할머니를 도와 톱질하고 망치질 해 닭장을 만들던 일은 참 재밌었다. 유년의 기억이 생생한 나는 아침빛에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릴 때면 찡그린 내 얼굴과 겹쳐지는 할머니 얼굴을 감각한다. 안 보이고 안 들려서 늘 일그러져 있는 그 얼굴을. 내가 처음 노래를 배울 때에도, 개가 새끼를 낳는 경이로운 순간을 목격할 때에도, 참외의 단맛을 처음 알 때에도 할머니와 있었기에 그저께도 노래를 부르면 ‘고향의 봄’을 흥얼거리는 할머니가, 어제도 공원을 산책하는 개들을 보면 분홍색 플라스틱 화분받침에 개밥을 담던 할머니가, 저번에 과일가게를 지나면 참외를 깎던 할머니가 자꾸 보인다. 잠깐 좋은 시절도 있었지만 IMF때 집안이 망하면서 박스 주웠다. 잘 듣지도 보지도 못하면서 리어카를 끌고 고철과 폐지를 주워 내게 교복을 사 입히고 용돈을 줬다. 그래 나는 한 때 신을 사랑했으나 지금은 원망한다. 신이 주어야 할 사랑을 인간의 몸으로 내게 준 할머니에게서 신은 처음엔 귀를, 다음엔 눈을 앗아갔다. 보청기는 무용지물이고 완전실명한지 10여년 됐다. 그러더니 고관절을 부러뜨려 다리를 빼앗아갔다. 듣지도 보지도 걷지도 못하는 이에게서 빼앗을 게 더 있는지 입으로 못 먹게 했다. 장에 연결된 호스로 물과 죽을 받는 식물로 만들었다. 요양병원에서 조금 큰 병원으로, 거기서 다시 요양병원으로 전원과 퇴원과 입원을 반복할 때마다 벌써 몇 번 연명치료중단 동의서에 엄마와 함께 서명을 한다. 요양병원에 8년째 누워 있는 할머니를 며느리인 엄마가 수발하는 집안 내력이 수치스럽다. 아버지와 그 형제들이 밉지만 나는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 애써 미워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엄마인 할머니를 보면서, 저 고통스런 육체로부터 할머니의 해방을 위해, 그리고 엄마의 자유를 위해 이제 돌아가셨으면 하다가도 마른 흙을 움켜쥔 앙상한 나무뿌리처럼 오그라든 저 손이 자꾸 살고 싶다고 꿈틀대는 것 같아서, 살 수 있을 때까진 사시길 다시 바란다. 식물처럼 누워서도 생각을 하고 꿈을 꿀 수도 있잖아, 아니야 저렇게 숨만 붙어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도 사셔야지. 일부러 불온한 생각을 했다. 신은 간절할 때 배신하니까, 기도하면 거꾸로 들어주니까. ‘온라인 부고장에 가족들 각자 계좌번호를 넣는다더라’, ‘이미 잡힌 연말 약속은 어떻게 취소하지’… 그러면 신이 어디 네 생각대로 되나 보자며 할머니를 좀 낫게 해줄까봐서. 그게 통했는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그러자 이번엔 제대로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날 밤에는 십여 년 만에 무릎 꿇고 기도했다. 좀 더 살게 해달라고. 너무 불쌍하지 않느냐고. 엄마랑 매달 의료기기점에서 기저귀와 패드를 사 병원에 갖다 주는 걸 나도 8년 했다. 돌아가시면 슬프겠지만 그 슬픔마저 건천이 되도록 사람을 쥐어짜서는 무덤덤해졌을 때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하게 될 때에 사랑하는 이를 데려가는 신은 잔인하다. 아니 어쩌면 감정을 탈진시키는 게 배려인지도 모르지. 할머니는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뭘 할 수 있나. 그저 일상을 살다가 이별의 순간 무섭지 않게, 외롭지 않게 손이나 꼭 잡아주는 것밖에는. 고작 그것만으로 전해지는 사랑이 있을까. 내가 받은 사랑은 온 세상인데…

2024-12-30

슬픔의 형식

열 살 무렵, 친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에 관해 특별한 추억이 있지 않다. 다만 할아버지 댁에 가면 씁쓸한 약 냄새가 났다는 것, 칭얼대는 나를 두고 ‘어른들 말을 안 들으면 아주 커다란 주사를 놓겠다’고 으름장 놓던 것, 돌처럼 단단한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던 눈과 그 시선의 방향이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쯤이 기억날 뿐이다. 그는 강한 인상을 가졌으나 한편으론 무척이나 약해 보였다. 마른기침을 하다가 파리한 안색으로 방에 들어가 쉬겠다고 말하곤 했으니. 그런 할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혼자 방에 있는 것은 외롭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쓰는 일의 전부였다. 나는 외증조할머니의 손에서 자랐고 그녀에 대한 애틋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런 내게 친할아버지는 너무나 멀리 놓인 사람이었으며 나아가 완벽한 타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부고를 들었을 때 놀라울 만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나는 해맑은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뛰어다녔다. 하관을 위해 온 가족이 선산에 모였을 땐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사촌 동생과 나눠 먹기도 했다. 오빠는 불같이 화를 냈다. 넌 슬프지도 않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잖아. 그제야 나는 내가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행동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배가 시작되었고 다 함께 입을 모아 찬송가를 불렀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 곁에서 평온히 쉴 것이라는 고모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아 속절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허전하고 슬펐다. 이제 좀 쉬겠다고 말하고 방문을 닫는 할아버지의 등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금 울었던 것도 같다. 슬픔 안에 빠져 있는데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놓였던 밤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기현 소설 ‘슬픈 마음 있는 사람’에는 어디론가 끊임없이 걷는 화자가 등장한다. 그녀의 하루는 능숙하지 않은 사람 둘이 탁구하는 것처럼 일정하고 따분하게 이뤄진다. 그녀는 주로 평일 오후 교회에서 시간을 죽인다. 교회에서는 몇 번의 장례가 이루어지는데 그녀는 그 의식에 건조하게 참석한다. “슬픈 사람은 슬픈 한가운데 서 있었고 실은 슬프지 않은 사람들은 슬픈 얼굴을 하고 슬픔 한가운데 선 사람들의 기색을 살피다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다가 권사님의 또렷한 슬픈 눈동자를 마주하고 당황하기도 한다. 슬픔의 형식을 부주의하게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소설 속 화자는 알고 있다. 자신이 어떤 마음을 느끼고 있는지 발설하는 순간, 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모종의 질서가 상태가 깨질 것임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유일하게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은 함께 탁구를 치는 이뿐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목사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힘으로 유대도 깨지고 만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소설 속 화자는 세계 속으로 편입하고자 균형을 깨뜨린다. 그의 은밀한 취미, 고가도로 밑 낙서의 기원을 상상하는 일에 관한 진실을 말해버린 것이다. 진실을 공유하였으니 더욱 친밀한 관계로 나아갈 것이라고 예상하나 타인에 의해 순식간에 결말을 봐 버린 그의 반응은 기대와 다르다. 화자의 마음에 슬픔이 깃든다. 결국 “자신이 비로소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 된 것에 아늑함을 느끼면서도 슬픈 마음을 가지게 된 덕분에 슬픔 속에 한참을 머물” 수 있게 된다. 자라면서 나는 몇 번의 죽음을 더 경험했다. 사랑했던 사람, 가까운 가족과 친구의 죽음 앞에서 나는 어렵지 않게 슬픈 마음을 토해낼 수 있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이제 나는 애도의 절차를 훌륭히 소화해 낼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그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때때로 슬픔이 찾아오곤 한다. 찬송가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의 가사 구조는 단순하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라는 구절은 누구에게나 슬픈 마음이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슬픈 마음을 발견하는 것은 몹시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모종의 안도를 느낀다. 슬픔의 형식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누군가와 더 깊은 유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소설 속 화자처럼 그것이 실패로 돌아갈지라도. 슬픔의 한복판에 들어가 오랫동안 머무르고 나왔다는 사실, 언젠간 그것이 다른 마음으로 치환될 것이라는 환상이 현실을 지탱하는 것이다.

2024-12-23

느슨하고 끈끈한 사람들, 낯선대학C

3월, 오랜 친구인 기훈이형이 내게 제안을 하나 했다. 자신이 속해 있는 모임의 새 멤버를 모집할 예정인데 함께 하지 않겠냐고. 모임의 이름은 ‘낯선대학’이었다. 재미있고 설레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낯선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즐기는 성격이기에 ‘낯선’이라는 말이 좋았고, 대학 시절을 워낙 즐겁게 보냈던 기억이 있기에 ‘대학’이라는 말이 모임 이름에 들어가는 것도 좋았다. 낯선대학은 일 년 동안 운영되는 일종의 친목 모임이다. 특이한 점은 ‘느슨한 연결’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강한 연결보다 서로 얼굴 정도 아는 지인과 같은 약한 연결의 관계가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기도 하고 새로운 자극을 주어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는 ‘낯선 사람 효과’로부터 착안하여 만들어진 모임이라고 한다. 본가라고 할 수 있는 낯선대학, 크리에이티브한 직군에 있거나 그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낯선대학C, 비교적 젊은 연령대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낯선대학Y로 나뉘어 운영된다. 기훈이형은 낯선대학C의 운영진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총장’이었고 나에게 낯선대학C의 5기 멤버로 활동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모든 구성원은 이처럼 지난 기수의 구성원이나 운영진의 추천으로 선발된다고 했다. 재미있을 것 같았고, 유익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솔깃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망설여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하나는 이미 내 대인관계가 포화상태가 아닌가 하는 고민이었다. 감당할 수 있는 수 이상의 사람들이 주변에 머물고 있는데 굳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 나를 망설이게 만든 또 다른 이유는 아내의 출산이 7월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아내와 태어날 아이를 돌보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하는 처지에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는 모임에 참석한다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인관계의 양에 대한 걱정은 느슨한 연결이라는 키워드가 해결해 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관계라면 조금 더 확장시켜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한 번 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아내의 독려도 있었다. 고단한 육아생활 중에 한 번씩 참신하고 재미있는 모임에 다녀오는 것은 한 숨 돌릴 수 있는 숨구멍 같은 기능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나는 낯선대학C의 5기 멤버가 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우리 서른다섯 명은 월요일 저녁마다 모여 돌아가며 각자의 삶, 커리어, 관심사, 인사이트 등을 담아낸 셀프스토리텔링 발표를 했다.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군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단편소설 한 편 씩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때로는 어떤 가르침으로, 때로는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이따금 번개 모임이 열리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함께 한강에 모여 낮술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울릉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나는 주제에 맞게 각자 선곡한 음악을 나누어 듣는 번개를 열었다. 모두가 하루 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음악과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선명하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느슨한 관계를 지향했기에 모두가 친해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어서 좋았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서로에 대한 애정과 유대감 같은 것들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 감정들이 꼭 끈끈한 관계에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되었다. 단체톡방이나 모임자리가 아니면 따로 연락도 거의 하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서로의 삶을 향해 진심어린 응원을 주고받는 것이 참 정겹게 느껴졌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책이 출간되고 신곡이 발매되었을 때 쏟아지던 축하와 응원의 말들이 기억 속에 따뜻하게 남아있다. 모든 관계가 느슨하기만 했는가 하면 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친구들은 그 안에서 조금 더 각별해지기도 했다. 느슨한 관계는 느슨하게 두고 끈끈해지고 싶을 때는 또 끈끈해질 수도 있다는 건 이상적인 일이었다. 며칠 전 졸업장을 받으며 낯선대학C 5기 활동에 마침표를 찍었지만 여전히 우리가 모여 있는 단체톡방은 시끌시끌하다. ‘낯선대학원’을 만들어달라, 유급을 시켜달라고 아우성치기도 한다. 많은 관계가 그렇듯 어떤 관계는 희미해질 것이고 또 어떤 관계는 오래도록 남아있겠지만 어차피 우리는 애초에 느슨하게 만나기로 한 사람들. 아주 많이 느슨해지더라도 연결은 되어 있을 것이니 아쉬워 할 필요는 없겠다. 2024년을 알록달록하게 만들어 준, 느슨하고도 끈끈한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과 우정을 보내며 글을 맺는다.

2024-12-23

연어 이야기

매년 10월에서 11월이면 북태평양을 회유하던 연어 떼가 산란을 위해 강원도 양양 남대천, 삼척 오십천 등으로 돌아온다. 10월 1일부터 10일까지 단 열흘간 내수면에서의 연어 포획이 허용되는데, 이 기간 동안 남대천에서는 연어를 만나려는 플라이낚시인들과 루어낚시인들이 강물에 몸을 담근 채 길게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인터넷에 올라온 연어 낚시 사진을 보면서 연어를 다룬 두 문학 작품을 떠올렸다. 고형렬의 에세이 ‘은빛 물고기’와 안도현의 ‘연어‘가 그것이다. 두 작품 모두 시인이 쓴 산문으로 연어의 생애를 소재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연어는 모천회귀(母川回歸) 한다. 하천에서 부화한 물고기가 바다로 가서 성어로 자란 다음 산란을 하러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회귀하는 현상을 말한다. 모천(母川)은 말 그대로 ‘어머니 강’이라는 뜻이다. 연어는 먼 바다로 떠났다가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서 산란 후 죽는다. 남대천, 오십천뿐만 아니라 최근엔 울산 태화강, 낙동강 하구에서도 연어가 발견됐는데, 낙동강에는 30여년 만에 연어가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은빛 물고기’는 시인인 저자가 “남대천에 연어가 돌아왔다”는 신문 기사 한 토막을 읽고는 10년 넘게 연어의 일생을 추적하며 쓴 장편 산문이다. 장편 산문이라는 겉 형식은 물론 한 편의 문학작품 안에 픽션과 논픽션이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시적 은유와 잠언, 소설적 서사, 자전적 에세이, 자연과학적 사실이 공존하는 속 구조는 무척 보기 드문 것이다. 강원도 양양에서부터 캄차카반도, 아무르 강, 오호츠크 해, 베링 해로 이어지는 대자연에 대한 시적 묘사, 탄생과 성장, 죽음 등 인간의 실존적 고뇌에 대한 깊은 성찰의 언어는 우리말이 지닌 아름다움의 놀라운 진경을 보여준다. ‘연어‘ 역시 시인인 저자가 쓴 작품으로, 한 낚시전문잡지에 연어에 대한 글을 기고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집필한 소설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어른’과 ‘동화’가 서로 충돌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동화적 내용을 지닌 소설로 보는 편이 마땅하다. 연어를 의인화하여 사랑, 연민, 외로움, 슬픔, 자기존재의 주체성 모색 등 인간 보편의 감정과 존재론적 성찰을 담아낸 ’연어‘는 1996년 초판 발행 후 지금껏 무려 100만부가 팔린 스테디셀러다. 시적인 문체와 연어의 생태에 기초한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스토리 전개로 대중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지난 2019년, 러시아 아무르강으로 ‘타이멘’이라는 물고기를 잡으러 2주 동안 낚시를 다녀왔다. 하바롭스크에서 차로 비포장도로를 10시간, 보트로 물길을 2시간 달려 도착한 아무르강 정글에서 러시아 낚시꾼들과 생활하면서 ‘지구상 모든 연어의 아버지’라는, 현지인들에게 신령한 물고기로 여겨지는 타이멘 낚시에 도전했고, 성공했다. 내 생애 첫 번째 타이멘은 1m 10cm였는데, 그 녀석을 품에 안고서는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렸다. 나를 만나기 위해 이 친구가 강물처럼 노을처럼 수천만 년을 헤엄쳐 왔다는 생각이 들어 뭉클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때 2주간 전화, 인터넷 등 문명과 완전히 차단된 정글에서 지낸 시간이 마치 한 평생 같았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문명 세계에서 2주는 그저 찰나에 불과했다. 내가 살던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고, 거짓말처럼 아무 일도 없고, 가족들은 전화를 심드렁하게 받고, 공백을 염려한 일터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내게는 까마득하고 느리게만 흐르던 시간이 문명 세계에서는 쏜살 같이 흐른 것이다. 시간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고, 모험의 세계와 일상의 세계에는 서로 다른 중력이 작용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 나는 낚시를 다녀온 게 아니라 아무르강이라는 영원의 풍경, 저 너머의 한 세상을 살다 왔구나’ 낚시를 다녀와서는 잠꼬대 같은 혼잣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연어의 생태를 다룬 문학 작품이 또 나온다면 저자는 아마 내가 될 것이다. 치어일 때 자신이 태어난 강을 떠나 드넓은 대양에서 성어로 성장하여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뒤 산란을 위해 모천으로 돌아오는 연어의 생태에 관해서는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 많다. 미지란 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므로, 연어의 탄생부터 이동, 그리고 모천회귀와 산란, 죽음으로 이어지는 신비한 생태적 습성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훌륭한 문학적 소재이기 때문이다.

2024-12-16

어둠을 밝히는 사람들

나약한 인간으로 놓여 무엇을 읽고 쓰고... /언스플래쉬 고통은 묵히면 묵힐수록 그 크기가 배가 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먹기 싫은 알약을 억지로 삼키는 것처럼 몸과 마음 모두가 불편한 그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나를 지배했고 그것이 결국 죄책감이란 이름을 가진 불편함이란 걸 너무나 잘 알았다. 문제를 인식하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일은 참 어렵다. 마음이 불편하고 신경을 쓰는 것이 괴롭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여 남는 일들이 혹여나 후회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밤마다 눈을 감고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애썼으나 쉽지 않았다. 무언가 써야만 할 것 같은 데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을 때 나의 연약함이 드러났고 그 연약함 속에서 무력하게 몸을 묻으며 나날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단 감각을 도무지 지울 수 없었다. 씻겨지지 않는 오랜 얼룩, 피부 깊숙이 자리 잡은 점처럼 고통에도 무뎌지지만 어느날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결심은 선다. 그 근처를 배회하고 있을 때쯤 뒷목이 뻐근해지기 시작하더니 일종의 신호처럼 확고한 결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 길로 버스를 탔고 버스는 중간에 서울대교에 진입하진 못했지만 비교적 사람이 적은 한적한 곳에 나를 내려주었다. 이 길로 쭉 가면 서울대교를 건널 수 있을 것이란 버스 기사의 말을 되뇌이며 이미 대교를 빠져나오는 수많은 인파를 거슬러 나는 여의도로 향했다. 그곳은 축제 분위기였다. 깃발이 나부끼고 형형색색의 조명은 어둠을 밝히며 빠르게 흔들렸다. 누군가는 아이돌 응원봉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고, 흘러나오는 최신 유행곡에 맞추어 춤을 추는 이들도 있었다. 깃발을 흔드는 사람,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 셀카를 찍는 가족, 질서 유지하는 사람들, 쓰레기를 아무렇지 않게 땅에 버리는 사람,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 쓰레기를 주워 한 곳에 차곡차곡 모으는 사람들 등. 인간이라는 모습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무리 속에서 나는 얼어붙은 몸과 가빠지는 호흡을 붙잡으려 애썼고, 그때 불현 듯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감을 떠올렸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져온 질문이자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그 질문과 수많은 의미들. 나는 어떤 언어를 쓰고 상상하며 세계와 연결되고 있는지. 나아가 나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떤 나약한 인간으로 놓여 무엇을 읽고 쓰고 있는지. 가파르게 오르던 호흡을 잠잠히 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8살 때 처마 밑에 비를 피하며 다른 사람을 보았고 또 다른 나를 보며 연결됨을 느꼈다면, 근래의 나는 그 환함 속에서 나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같은 노래를 들으며 연결되고 있음을 느꼈다. 이어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다는 그녀의 음성을 거듭 떠올리며 무엇을 위해 읽고 어떤 것에 시선을 맞추어야 하는지 미지의 길을 밝히는 작은 호롱불이 켜지는 장면을 포착했다.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돌아선 길, 수많은 인파 탓에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이 꽉 막혀 빠르게 걸을 수 없었다, 아주 천천히 앞사람의 보폭에 맞추어 걷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릿하게 집으로 향해 걸어왔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집으로 돌아와 깨끗한 물로 씻고 훈훈한 공기로 몸을 덥히며, 내 등 뒤를 밝히던 수많은 조명들을 떠올렸다. 뒤에서 길을 밝히던 색색의 응원봉들. 누군가가 뒤따라오며 그 응원봉을 흔들었는진 알 순 없지만, 불명확했던 모든 불안과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들이 선명해지는 동시에 조금씩 소멸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이었다. 생각을 마치자 근래 극도로 높아져갔던 초조함을 잠재울 수 있었다. 18살, 점심시간마다 도서관 문학 코너 책장에 숨던 그때를 기억한다. 활자 속에 있으면 현재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물러가는 것 같아 계속해서 손이 가는 대로 책 속에 고개를 묻던 그때. 아무도 나를 알아채지 못하고 스쳐지나가던 그 때에, 책장 맨 아래에 꽂혀 있던 소년이 온다를 기억한다. 그때의 나를 거울로 자세히 살피지 않아 어떤 모습인진 영영 알 순 없으나 환희와 열망과 결이 다른 슬픔에 사로잡혔던 감각은 생생히 기억한다. 한 사람이 가진 문을 두드려 그 속을 기어코 들어가 사건과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내가 문학을 택한 이유인 동시에 계속해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음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금 떠올려보는 감각이었다.

2024-12-16

깨진 유리창 앞에서

산산조각 난 유리창 앞에 서 있는 기분을 아는가.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대학교 일 학년 때의 일이다. 한 남학생과 싸움이 붙었다. 시작은 사소했으나 과격한 말다툼이 이어졌다. 순간 그의 주먹이 내 얼굴 쪽으로 날아왔다. 나는 꼼짝없이 저 커다란 주먹에 맞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머릿속에는 별생각이 다 들었다. 아, 남자애의 주먹이란 정말 단단하고 크구나. 저기에 볼이 닿으면 만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뭉개질지도 몰라. 오래된 시멘트벽처럼 후드둑 부스러질 수도 있고. 맞은 후에는 곧장 경찰에게 신고해야겠지. 그러면 저 아이는 감옥에 가게 되는 걸까. 그나저나 나 괜찮은 거야? 숨 쉬지 못할 정도로 아플 거야.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좋겠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남학생의 주먹은 내 얼굴을 피해 창문으로 가 닿았다. 유리창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났다. 남학생의 주먹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수업을 듣던 선배들이 뛰쳐나왔다. 너희 미쳤느냐고, 제 정신이냐고 불같이 화를 냈다. 남학생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널브러진 유리 파편, 바닥에 묻은 핏자국과 그것을 수습하려는 사람들. 주변이 바쁘게 돌아가는 가운데 나는 현실감각을 잃은 사람처럼 깨진 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그 일은 한동안 나와 친구들의 안줏거리였다. 우리는 그날의 사건이 정말 별것 아니었던 것처럼 웃어넘겼다. 내가 얼마나 무력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날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는 행위는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으니까. 학과 복도를 오갈 때마다 깨진 상태로 봉합되지 못한 유리창이 보였다. 새로운 유리창으로 고쳐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그의 주먹을 상기해야만 했다. 그때 나는 폭력이란 아주 복잡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을 대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결론적으로 그 아이는 팔이 부러졌고 나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다친 사람은 그 아이 하나였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너는 입으로 남자애의 팔을 부러뜨렸네. 나는 정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던가? 그날을 떠올리면 가슴이 조일 듯하고 숨이 막혀 온다. 두꺼운 손이 내 눈 앞을 스쳐 지나가던 그날의 공포. 폭력은 필연적으로 흔적을 남긴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매우 선명하게 일상을 맴돈다. 어느 식사 자리에서 가족이 모여 유년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빠와 자라면서 크고 작은 싸움이 잦았는데, 부모님은 그때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꺼냈다. 그때 말이지, 얘가 얼마나 유난이었느냐면, 오빠가 아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세상이 떠나갈 듯 울었던 거야. 그러면 얘 오빠는 얼마나 억울해. 조금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 맨날 혼나는 거지. 모두가 동시에 웃는 식탁 위로 나는 들고 있던 유리컵을 깨뜨리는 상상을 했다. 유리컵이 깨지고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는 가족들. 유리컵 하나 깨뜨렸을 뿐인데 왜 세상이 떠나갈 듯 소리를 질러요? 그 앞에서 와하하 웃는 내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들의 말이 나를 아프게 하고 있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또 다른 생채기를 내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폭력을 낳기 마련이다. 뾰족한 마음을 억지로 삼키며 식사를 재개했다. 식도가 따끔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지난 3일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했다. 내 귓가에서 무언가가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났고 그간 겪어온 폭력의 기억이 몰려왔다. 네가 다친 곳이 어디 있다고 그래… 살짝 건드렸다고 울었어… 그와 비슷한 말이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이들의 입을 통해 들려온다. 그 말은 오묘한 형식으로 재생산된다. 한밤의 해프닝으로 일축한다. 심정은 이해하지만,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그래요.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과거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누가 다쳤습니까? 온몸이 따끔하다. 이 고통은, 이 상실감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내가 겪어온 폭력의 경험, 선배들에게 무수히 들어왔던 과거의 역사, 그간 읽고 보았던 처절한 기록이 내 안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주먹은 날아왔고 등 뒤의 유리창은 깨졌다. 우리는 깨진 유리창 앞에 서서 외친다. 어서 빨리 이것을 복구하라고. 틈 사이로 닥쳐오는 찬바람이 얼마나 매서운 것인지, 상흔을 가진 이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쓰라리게 다가오는지 느끼라고. 이 일에 손실을 따지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이들을 본다. 이제 나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기분 또한 알 것 같다. 겨울이 끝나기엔 멀었다는 실감이 난다.

2024-12-09

가야 할 때를 알고 가는 것

나는 서울 마포구의 홍대 앞을 중심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인디뮤지션이다. 처음 기타를 등에 짊어지고 홍대 앞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던 때가 스무 살이었고 이제 곧 서른아홉 살이 되니 거의 스무 해 가까이 그 동네의 골목골목을 누빈 셈이다. 저 모퉁이를 돌면 무슨 가게가 나오고 거기는 뭐가 맛있고 하는 정보들을 꿰고 있었고, 어딜 가든 아는 얼굴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곤 했다. 그 거리가 다 내 영토 같았고 나는 그곳을 지배하는 왕이라도 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나는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거리가 참 많이 변했다. 사랑했던 공연장들, 단골집들이 하나하나 문을 닫고 그 자리에 낯선 간판들이 내걸렸다. 여전히 북적북적한 메인 거리에는 언제부턴가 가기가 부담스럽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좀 더 바깥쪽으로, 좀 더 후미진 곳으로 밀려나 살아남은 몇몇 익숙한 공간들만이 나의 마지막 남은 피난처가 되었다. 내가 거느리던 그 영토에서는 그때의 나를 닮은 젊은 친구들이 취하고, 싸우고, 소리치고, 사랑하고 있다. 그것이 문득 파도처럼 내 마음을 덮친 밤 나는 노래 한 곡을 썼다. 지난주에 발매된 새 싱글 ‘퇴위’는 그렇게 만들어진 곡이다. 이제는 그 흥성거리는 거리를, 그리고 그곳을 누비던 한 시절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인정한다는 고백을 담았다. “난 이제 물려준다. 정들은 내 영토를. 새로운 인류에게로. 난 이제 떠나간다. 세월의 뒤안길로. 아무런 흔적도 없이.” 내가 사랑했던 공간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이제는 새로운 공간과 시절을 향해 새로운 여정을 떠나겠다고 노래해보았다. 한 시절이 저무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야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이제는 인생의 새로운 계절을 맞이해야 할 시기임이 분명하다. 그 공간과 그곳을 채우는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문장들 중에 아름다운 것을 꼽으라면 참 곤란한 일이 되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의 첫 문장만큼은 반드시 그 안에 포함시킬 것이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적절한 시기에 지키던 무언가를 내려놓고 떠나간다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지만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언제나 그 시기를 놓치곤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학교 앞 거리를 망령처럼 떠돌았고, 오히려 청소년기를 보냈던 오래된 동네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립기만 하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가야할 때를 알고 아름답게 떠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구차하게 추한 모습으로 내가 머물고 있는 공간과 시절에 들러붙어있지는 말아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가야할 때는 언제 오는가.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단지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떠나야 하는 공간도 있다. 학교가 그렇고 정년을 맞았을 경우 회사가 그럴 수 있다. 이렇게 남들이 정해준 시기에 떠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떠나야 할 시기를 스스로 정해야 하는 경우들이 늘 어려운 것이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때로는 더 소중한 가치가 내가 머무는 곳 바깥에 생겼을 때 떠나야 할 시기가 찾아오곤 한다. 이십대 청춘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 번화가를 떠난다는 선언이 그곳에 다시는 발길을 향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곳이 이제 내 삶의 중심을 둘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행위임은 분명하다. 나는 이제 그곳 바깥에 가정이 있고 책임져야 할 자식이 있는 사람이기에 이제는 미련 없이 떠나겠다는 노래를 만들게 된 것이다. 살다보면 더 이상 내가 자리를 감당할 수 없을 시간이 간혹 생긴다. 그때는 물러나야 할 순간이다. 내가 변했거나 내가 감당해야할 것이 커졌거나 예상치 못한 사정으로 인한 것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러선다면 그 시기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눈치라고 부른다. 눈치가 보이기 전에 눈치를 채는 것이 모두를 위하는 길일 수 있다. 어렵게 거머쥔 것이어서 내려놓는다는 것이 슬프기도 하겠지만 인정해버리면 속 시원해질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떠나야 하는 때가 오면 스스로 떠나는 것이 옳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말단 직원부터 기업대표나 국가 최고의 기관장을 비롯한 육해공군 장성이나, 심지어 국가 의전서열 1위 같은 그 어떠한 자리라고 할지라도…. 신곡 ‘퇴위’가 참 공교로운 때에 나왔다. 그런데 가만 보면 세상에 공교로운 일들에도 어떠한 의미가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2024-12-09

인생이 게임과 같다면

삶이 게임과 같다면 어떨까? 최근 one hour one life라는 PC 게임을 즐겁게 플레이했다. 게임 내용은 신생아부터 시작해서 노인이 될 때까지 병에 걸리거나 굶어 죽지 않고 60살까지 무사히 살아남아야 한다. 게임 세계관 중 독특한 점은 현실 세계에서의 1분이 게임 시간 상 1년으로 계산된다는 것이고, 실제 게임을 플레이하는 한 시간 동안 게임 속 한 사람의 인생을 무사히 살아내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게임을 처음 접속하면 나는 갓 태어나게 되고, 나의 엄마를 마주하게 된다. 엄마는 나의 이름을 지어주고 지어준 이름대로 한 가문의 계보에 등록된다. 3세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생아 상태이기 때문에 엄마의 돌봄이 전적으로 필요하다. 엄마 품에 안겨 옷도 입고 따뜻한 불 옆에서 체온을 올리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현실 세계에서의 3분, 게임에서 3살이 되면 나는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된다. 3살이 되면 영문 채팅도 3글자 이상으로 칠 수 있게 되어 엄마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정 내부의 일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흙을 나누는 법, 땅을 고르게 펴는 법, 베리 씨앗을 심는 등을 배우게 되고 한 가족의 일원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리 잡아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게임의 재미있는 점은 바로 계보를 잇는다는 것인데 엄마 외에도 이모, 할머니, 사촌 등 다른 플레이 유저들이 집 내부에 존재해서 여러 어른의 도움을 받아 성장할 수 있다. 생각보다 게임은 꽤나 디테일해서 제때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하고, 밥을 먹기 위해선 여러 종류의 농작물을 심고, 동물을 기르고, 요리를 하며 집 안 내부를 청소하고 정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연대가 중요하기에 유저끼리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소통을 하며 각자의 구역에서 성실히 임무를 다해야만 한다. 그렇게 부지런히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나는 성인 여성이 되어 있고, 문득 밭을 갈다 아이가 태어났다는 메시지 창이 뜨며 품에 신생아가 안긴다. 이제 막 게임에 접속한 사람이 나의 자식이 된 것이다. 그 시점부터 또 다른 미션이 주어진다. 새로운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새로운 옷을 지어 입히고, 불가에 다가가 아이의 체온을 높여주고 굶어 죽지 않도록 신경 써서 음식을 먹여 주어야 한다. 그렇게 3분, 게임상 아이가 3살이 되면 내가 처음 엄마에게 배웠던 것처럼 아이에게 거름을 만드는 법,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법, 밭에 당근을 심어 자라게 하는 법, 꽃을 기르는 법 등을 알려준다. 잠깐 아이에게 생존법과 생의 노하우를 가르쳐 줄 뿐인데 나의 머리는 빠지고 등은 구부러지고 얼굴 주름이 눈에 띄게 깊어져 간다. 벌써 게임을 플레이한 지 한 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이다. 스무 명이 넘어가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는 동안 결국 게임오버 창이 뜨고,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 냈다는 엔딩을 마침내 보게 된다. 게임은 참 쉽고 단순하다. 그저 게임 나이로 60살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보면 어쨌든 엔딩을 보게 된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요리를 먹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사히 게임의 엔딩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목적이나 방향성이 없어 꽤나 심심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게임은 접속 유저들과 가족을 이루고 구조를 만들며 그 안에서 생존의 의미와 성장의 기쁨을 찾는 편이 훨씬 재미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검은 엔딩 화면 아래에 있는 다시 태어나기 버튼을 누르면 다시 게임에 처음 접속했을 때처럼 누군가의 신생아로 태어나게 된다. 이렇게 계속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며 한 가문의 계보를 잇는 게임으로, 플레이마다 달라지는 가문과 인종, 부모 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결이 조금씩은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생활을 유지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고, 배운 것을 또 후손들에게 가르치며 게임 플레이에 더욱 능숙해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내 캐릭터의 삶은 단순해진다. 처음이라 어색하고 허둥댔던 것들이 이제는 익숙하게 전보다 더 잘해낼 수 있게 되고, 가진 생의 노하우로 더 나은 선택지의 길을 낼 수 있게 된다. 그렇담 삶도 게임과 같지 않을까. 나는 요즘 가보지 않은 길이 두렵다.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와 나이를 생각하다 보면 자꾸만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막연히 망설이기보단 현재 생의 노하우를 업그레이드 하고 있단 생각으로 내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을 충실하게, 동시에 즐겁게 여기다 보면 어느새 능숙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2024-12-02

로제와 윤수일의 예상 표절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피에르 바야르는 ‘예상 표절’이라는 개념을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표절은 후대의 작품이 선대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인데 비해 예상 표절은 앞선 시대의 작품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예지적인 직관을 가진 작가가 시간의 질서를 초월해 미래를 엿보기라도 한다는 걸까? 꿈에서 훗날의 일을 미리 보는 데자뷰 현상을 말하는 건 아닐까? 헛소리도 자꾸 듣다보면 묘하게 설득되듯 과거가 미래를 훔친다는 이 황당한 주장에도 그럴듯한 근거는 있다. 피에르 바야르가 제시하는 예상 표절의 첫 번째 원리는 ‘불일치’다. 문학과 문학의 영향관계에서 예상 표절을 의심해볼 수 있는 상황은 두 작품이 공유하고 있는 특징이 앞선 작품에서는 불완전하게 나타나는 반면 후대의 작품에는 풍부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다. 앞선 작품에서는 그것이 작품의 나머지 전체와 심히 어울리지 않거나 그 작가의 다른 작품들, 나아가 당시의 시대상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희소한 장면인데 비해 후대의 작품에서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특징이자 작가를 대표하는 독자적 개성으로 완성된다면, 과거의 작품이 미래의 작품을 예상 표절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것이 모파상과 프루스트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한 텍스트이고 부차적인 텍스트인지를 먼저 살펴야 하는데, 모파상의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인 ‘죽음처럼 강한’에는 여인의 옷자락에 희미하게 묻은 향수 냄새로부터 과거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기억 작용이 파편적이고 미숙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모파상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인데 비해 30년 뒤 등장해 20세기 최고의 소설이 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아주 능숙하고 풍부하게 나타나면서 이른바 ‘마들렌 효과’ 혹은 ‘프루스트 현상’으로 불리게 된다. 두 번째 원리는 ‘소급성’이다. 독자들은 프루스트의 대표작에서 모파상을 감각할 수 없지만 모파상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에서 프루스트의 울림은 들을 수 있다. 프루스트를 읽으면서 “이건 모파상 같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도 모파상을 읽으며 “이건 프루스트 같은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프루스트가 이미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훗날 프루스트가 등장한 이후 프루스트를 읽은 독자들의 독서 경험에 의해 모파상은 비로소 프루스트의 예상 표절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프루스트를 읽고 난 뒤 모파상의 텍스트는 프루스트적으로 변화한다. 뜬금없이 예상 표절이라는 개념이 생각난 건 요즘 전 세계를 흥겨운 난리판으로 만든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아파트(APT.)’ 때문이다. 사람들은 로제의 아파트를 신축으로, 윤수일의 아파트를 구축으로 부르는데 피에르 바야르의 논리를 단순 적용하자면 윤수일이 로제를 예상 표절했다고 할 수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로제의 아파트를 듣고 난 뒤 변화한 윤수일의 ‘아파트’를 생각해보라.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라는 첫 소절 다음에 “으쌰라 으쌰 으쌰라 으쌰”라는 추임새를 넣는 게 윤수일의 아파트를 즐기는 대중적 향유방식인데, 로제의 아파트를 듣고 나서부터는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다음에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가 입에서 자동으로 발사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수험생도 아닌데 수능금지곡처럼 귀에 맴돌아 큰일 났다. 프랑스 문학비평가의 기묘한 이론까지 떠오르게 할 만큼 노래의 인기가 대단하다. 물론 로제와 윤수일의 사례는 예상 표절이 아니다. 예상 표절의 중요한 두 원리인 불일치와 소급성 중에서 소급성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윤수일이 로제를 예상 표절했다는 가설이 근거를 얻으려면 윤수일의 ‘아파트’가 그의 다른 음악들과 불일치해야 한다. 하지만 ‘아파트’는 윤수일의 음악적 정체성인 록 사운드와 도시적 감수성을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으니 불일치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어느 것이 중요한 노래이고 어느 것이 부차적인 노래인지를 따져 봐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로제의 시대지만 로제의 등장 전까지 ‘아파트’는 오직 윤수일이었다. 어느 아파트가 더 중요한 아파트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나에게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아파트는 무조건 윤수일이다. 노래방에서 로제는 43681번이고 윤수일은 340번이다.

2024-12-02

취향 실종의 시대

‘홍대병’이라는 말이 있다. 서울의 홍대 앞을 중심으로 한 비주류 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을 비꼬는 말이다. 항상 주류보다는 비주류를 선호하고 자신이 선호하던 비주류 문화가 주류문화로 떠오르면 가차없이 버리고 떠나곤 하는 이들, 주류 문화를 환멸하고 비주류를 선호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 나도 오랫동안 이 홍대병에 빠져 살았다. 남들이 모르는 음악을 듣고, 남들이 모르는 영화를 보고, 남들이 입지 않는 옷을 입으며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어쩌면 시인이 되고 인디뮤지션이 된 것도 남들이 흔히 택하지 않는 길을 택하려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이십 대 내내 내가 앓고 있던 수준의 과도한 홍대병은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자신이 비주류 문화를 향유하는 것은 취향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바탕이 되곤 하지만 주류문화를 깔보는 것은 사회 전체가 좋은 것이라고 합의한 많은 것들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태도가 되기도 한다. 대중은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대다수의 개인보다 대중이 옳은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세상에는 고평가된 것들이 수도 없이 존재하지만 그것들 중 대부분은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배워가는 것도 어른이 되는 과정 중 하나이다. 나도 이제는 흔히 ‘정답’이라고 말하는 주류적 선택을 하게 되는 일들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내가 차는 시계가 딱 그렇다. 내가 매일 차는 시계는 당시 시계 구입을 위해 마련된 예산 안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취향을 타지 않는 모델이었다. 시계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었던 나는 주변에서 시계에 대해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친구에게 가장 안전하고 무난한 선택지를 달라고 부탁했고, 친구는 주저 없이 지금 내가 차고 있는 시계의 브랜드와 모델명을 추천해 주었다. 휴대폰이나 컴퓨터 같은 전자제품들을 살 때도 나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제품을 선택하는 편이고, 다음에 구매하려고 눈여겨보고 있는 자동차도 나와 비슷한 여건에 놓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것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답이라고 합의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편리하다. 그 선택에 대해 나무라는 사람도 없고 귀찮은 질문을 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딱히 후회할 만 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도 좋은 점이고, 무엇보다 무언가를 고민할 때 소모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해야 하는 선택이 얼마나 많은가. 일일이 자신만의 취향을 고집하는 것은 피곤하고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주류를 선택하는 행위가 가진 효율성이 점점 나를 개성 없는 인간으로 만들고 내 삶을 삭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인플루언서들이 만들어 놓은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며 더 이상 음악을 집중해서 듣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 옛날 음반가게에 가서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씨디를 고르고, 한 트랙 한 트랙을 소중하게 듣던 시절에 비하면 음악 듣는 재미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느낀다. 플레이리스트는 수십 곡의 히트곡들을 들려주지만 기억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멀티플렉스에 대기업이 걸어 둔 천편일률적인 흥행작을 아무런 고민 없이 예매하고, 서점에 들러 습관적으로 베스트셀러코너 최상단에 놓여 있는 책을 고른다. 심지어 식사 메뉴마저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고민하기보다는 인근에 별점 높은 식당의 주력 메뉴가 무엇인지를 우선순위에 놓고 선택한다. 내내 정답만을 선택하다보니 정작 내가 주도적으로 내린 결정이 하나도 없는데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매일 매일이 흘러간다. 편리함에 속아 자신의 취향은 실종되어버리고 그러는 사이에 나는 천편일률적인 인간군상 중 한 명이 되어있는 것이다. 섬뜩한 기분이 들지만 지금도 세상은 더욱 편리한 선택을 제시한다. 개개인의 취향과 의견이 하나하나 빅데이터로 대체되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취향의 실종은 곧 자아의 실종이다. 나의 자아가 사라져버리기 전에 나는 나의 취향을 회복해야 한다. 물론 모든 분야에 있어 능동적인 선택만을 할 수는 없다. 나는 여전히 시계나 전자제품, 자동차로까지 나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에너지가 허락하는 선 안에서는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무엇이 먹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읽고 보고 듣고 싶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또 무엇인가.

2024-11-25

도움받는 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어시장 근처다. 어쩌다 그곳에 살게 되었어요? 나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의아하다는 듯 묻는데 구구절절 설명하기가 어려워 부모님 집이에요, 하고 얼버무린다. 장성한 청년이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하기가 참 머쓱하지만 그것이 또 사실이기도 하여서 머리를 긁적이는 순간이 잦다. 온전히 자립하게 되었다는 감각은 대체 언제 느끼게 될까? 애초에 그런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어쨌든 지금의 나로서는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처지다. 이곳에 관해 말해 보자면, 펄떡거리는 생명력으로 가득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밖을 나서면 관광객들의 흥성거림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고 주말에는 지하철역에서 파도처럼 밀려 나오는 인파를 마주하기 일쑤다. 여기서 살며 두드러지게 발달한 감각은 취객을 알아보는 능력이다. 적당히들 마시고 들어가세요, 하는 눈짓으로 맨정신이 아닌 사람들을 요령껏 피해 가는 재주가 꽤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이러한 동네의 분위기가 달갑지만은 않다. 내가 살고 싶은 동네는 느리고 조용한 곳이다. 인적이 드물수록 좋다.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는 일은 내게 항상 큰 부담이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지금의 동네는 어딘지 모르게 나와 어긋나 있다. 언제부터일까. 나는 이곳에 묘한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시장의 상인에게서 기인한 것이다. 작업실을 가기 위해선 시장을 꼭 지나쳐야 하는데, 자연스레 그들을 자세히 바라볼 기회가 생겼다. 거기에 더해서 내가 다니는 사우나에서도 자주 마주치는데, 그들이 서로 나누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주 가까운 사람을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요즘 그들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는 ‘김장’이다. 절인 배추가 얼마고 양념에 무엇을 넣으면 맛있다는 정보, 그럼 다음 주에 내가 언니네로 갈게, 하는 대화 같은 것을 사우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훔쳐 들었다. 얼마 전, 시장을 지나면서 매대 뒤편에 커다란 대야를 놓고 네댓 명이 둘러앉아 김장을 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혹시 사우나에서 본 사람이 이 사람인가 저 사람인가 하는데 “왜요? 뭐 줄까?”하고 여자 중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아니에요, 하는 내 등 뒤로 “우리 여기 집 도와주는 거야.”하며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내게 상황을 설명한다기보다 저들끼리 웃고 떠들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도와주긴 뭘 도와줘, 염병!” 그 말이 끝나자마자 웃음이 와르르 쏟아졌다. 바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이들을 뒤로한 채 시장을 빠져나왔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활기가 늘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또 막상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킥킥 웃었다. 이런 식의 우스갯소리를 목격하고 정색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여자들의 삿된 소리만큼 재미있는 것은 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최근이다. 그 어느 때보다 집 안에 갇혀 혼자 있는 시간이 가장 편안하다.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면 끙끙 앓으며 악몽까지 꿀 정도다. 내가 실수를 한 것이 아닐까. 거기서 그 말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끝이 없다. 무엇보다 타인과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 괴롭다. ‘나를 도와줄 수 있나요?’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일 처리를 못한 날도 있고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다가 엉뚱한 결과를 낳은 적도 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생각해 보면 용기를 그러모아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을 때 명쾌하게 해결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나는 나의 무능을 들키고 싶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손을 내미는 일을 자꾸 꺼리게 된다. 타인에게 도움받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자고 결심해 본다. 조금은 뻔뻔해져도 된다고. 사실 나는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선 이미 뻔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뻔뻔하고 무능한 사람. 그게 뭐 나쁜가 싶기도 하다. 인생이 관성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단순하게 해결될 것이다. 슬픈 일이 있다면 곧 기쁜 일이 찾아올 것. 도움받는 일이 있으면 응당 도움을 주는 상황도 생길 것. 둘러앉아 빨갛게 김치를 버무리는 상인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은 꽤 즐거워 보였고 덕분에 나는 이 동네가 한 뼘 더 좋아졌고 우리는 함께 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사실이 실감 나곤 한다.

2024-11-25

수카바티 안양!

인구 55만명의 위성도시 안양에는 프로스포츠 구단이 세 팀이나 있다. 농구의 정관장 레드부스터스, 아이스하키의 안양한라 아이스하키단, 그리고 축구의 FC안양이다. 스포츠에 대한 지역민들의 관심이 굉장히 뜨거운데, 특히 FC안양 향한 사랑은 애틋하고도 감동적이다. FC안양의 창단에는 눈물겨운 서사가 있기 때문이다. 안양에는 1996년부터 2004년까지 안양 LG 치타스 프로축구팀이 있었다. 지역민들의 자부심이라고 할 만큼 안양 LG를 응원하는 팬들의 함성은 굉장했다. 서포터즈 ‘RED’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큰북을 치면서 선수들을 응원했다. 하지만 2004년 안양 LG는 열성적인 서포터즈와 지역민들을 버리고 서울로 연고지를 옮겨 버렸다. 당시 지역에서 강한 반발이 일어 연고지 이전을 반대하는 삭발 투쟁과 가두행진, LG전자 불매운동 등이 펼쳐졌지만 소용없었다. 팬들은 하루아침에 그들이 사랑하는 팀을 빼앗겼고, 그때부터 무려 9년 동안 안양에는 축구팀이 없었다. 그 9년 동안은 눈물겨운 세월이었다. 지역민들을 배신하고 팀명을 바꾼 FC서울은 빅클럽으로 승승장구했다. 안양 축구팬들은 FC서울을 ‘북쪽 패륜아’로 부르며 야유했지만 그 야유는 공허한 마음을 더욱 시리게 만들었다. 안양에 다시 축구팀을 유치하기 위해 시민들이 나섰다. 공청회를 열고, 서명운동을 하고, 축구계에 호소하면서 다수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애썼다. 서포터즈를 비롯한 시민들의 갖은 노력에 안양시가 응답하면서 마침내 2013년, 시민이 주인인 시민구단 FC안양이 창단됐다. 우리나라 프로축구 K리그는 승강제로 운영된다. FC안양은 창단 이후 계속해서 2부 리그인 K리그2에 있었다. K리그2 우승팀은 K리그1로 자동 승격된다. 10년 동안 K리그1 승격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렸지만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2024년 11월, FC안양은 K리그2 우승을 확정지으며 꿈에 그리던 K리그1 무대를 내년부터 밟을 수 있게 됐다. 승격이 확정된 날 팬들과 선수단, 구단주인 최대호 시장까지 모두가 얼싸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2000년대 초반 안양 축구를 사랑하던 20대 청년들은 어느새 40대 중년이 됐지만 가슴속 붉은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승격을 확정하고 홈구장인 안양종합운동장 ‘아워네이션’으로 돌아오는 선수단을 위해 특별한 이벤트가 열렸다. 수백 명의 서포터즈가 안양 축구 응원의 상징인 홍염을 환하게 밝히고 응원가를 부르며 구단 버스를 맞이한 것이다. 선수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버스에서 내려 서포터즈와 함께 춤추고 노래했다. 시즌 최종전이 열린 지난 11월 9일에는 아예 시 차원에서 공식 축하 행사를 열었다. 구단주 하려고 시장 출마한다는 우스개가 있을 만큼 축구에 진심인 3선의 최대호 시장이 주장 이창용 선수와 함께 머리를 보라색으로 염색했다. 승격 공약을 지킨 것이다. 안양종합운동장에서 시청까지 2㎞ 도로를 안전하게 통제한 뒤 3000여 명의 시민과 서포터즈, 선수단이 함께 어깨를 부여잡고 행진했다. 거리 곳곳에 승격을 축하하는 보랏빛 현수막이 내걸렸다. 안양은 예로부터 포도 농사로 유명한데, 포도의 보랏빛이 안양 축구를 상징하는 색깔이 됐다. 시민들이 이룬 보랏빛 물결이 늦가을 노을과 어우러져 장관이었다. 축구 사랑이 뜨거운 독일이나 영국에서 볼 법한 광경이 경기도 안양에서 펼쳐진 것이다. 시민들과 선수단은 한 목소리로 ‘수카바티 안양!’을 외쳤다. ‘수카비티’는 산스크리트어로 ‘극락’을 뜻한다. 안양(安養)은 괴로움이 없고 지극히 안락한 불교의 ‘안양정토(安養淨土)’에서 온 지명이다. 시민들은 모처럼 걱정도 고민도 없이 마냥 기쁘고 평안한 주말을 보냈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전쟁이다. 안양 시민들은 FC서울을 안양종합운동장으로 불러들여 경기하는 날만을 기다려 왔다. 그 경기에서 승리한다면? 아마 도시 전체가 열광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이제 안양에 이사 온 지 5년이 된 나는 조금씩 안양시민이라는 지역적 정체성을 쌓아가고 있는데, FC안양의 감동적인 서사 덕분에 내가 사는 동네를 더 사랑하게 됐다. 내년 봄 나는 시즌입장권과 보랏빛 유니폼을 구입할 것이다. 그리고 외쳐야겠다. 수카바티 안양!

2024-11-18

2024년과 보통의 일상

2024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참 여러 일이 있었고 일도, 주변 사람도, 환경도, 사는 곳도 참 빠르게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좋은 영향을 주는 것들이 있어 올 해도 참 부지런히 행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배운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뜨개질이다. 뜨개질은 앞을 향해서만 나아간다는 점에서 달리기와 비슷하다. 달리기는 일정한 호흡과 함께 더 멀리, 더 빠르게 몸을 활용하여 나아가는 것이면, 뜨개질은 바늘과 실을 반복해서 통과하며 정신으로 집중해서 나아간다. 달리기가 온몸으로 하는 것이라면 뜨개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섬세하게 나아가는 일종의 정신 수련과도 같달까. 물론 달리기와 뜨개질이 크게 다른 점이 있는데, 앞으로 빠르게 뛰는 달리기와는 다르게 뜨개질은 다시 뒤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점이 있다. 안뜨기나 바깥뜨기만을 반복하는 대바늘 뜨기는 특별한 기법이 없어 단순하다. 쉬운 난이도 덕분에 뜨개를 처음 접할 때에 가장 먼저 배우는 기법 중 하나기도 하다. 단순히 반복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자칫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들기도 쉽다. 생각이 다른 길로 세는 순간 바늘은 기다렸다는 듯 엉뚱한 실의 구멍으로 들어가 버린다. 바늘코가 빠져 커다란 구멍이 생기거나 또는 패턴이 망가져 전체적인 편물의 모양에 흠이 나고 만다. 정갈하게 촘촘히 짜여있는 패턴에 흠 하나가 너무 잘 보일때의 스트레스란… 어느 때엔 화가 나서 씩씩거리게 되지만 그럴 땐 빨리 마음의 평화를 찾으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푸는 방법은 간단하다. 모조리 바늘에 걸린 실을 모두 빼어 그대로 쭉 풀면 된다. 어느 때엔 잘못 뜬 부분을 늦게 발견해서 한 두시간 뜬 결과물을 모조리 풀어야 할 때도 있다. 물론 실 특성마다 달라 풀자마자 끊어져 버리거나 눈에 띄게 상하는 실도 있어 되도록 실수는 안 하면 좋다. 다행히 두께가 어느 정도 있거나 비교적 튼튼한 실일 경우엔 어느 정도 부담을 덜고 풀 수 있다. 뜨개인들은 잘못 뜬 부분을 다시금 푸는 것을 ‘푸르시오 엔딩’이라고 하는데, 실수를 자책하는 시간에 어서 이 실패의 엔딩을 끝맺음하고 실을 다시금 모조리 풀으라는 뜻의 우스갯소리다. 푸르시오 엔딩이 유독 잦은 날은 화가 많이 나는 날이나 또는 과거의 사건에서 자꾸만 마음이 머물러 뜨개에 집중하지 못할 때다. 과거 내가 한 선택들로 현재까지 이어져 온 결과들, 어쩔 수 없는 상황과 나의 실수로 멀어진 사람들, 과거와 내가 크게 달라진 부분 등등. 왜 자꾸만 과거를 떠올렸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앞자리가 바뀌는 나이, 그에 따른 책임감, 어른으로서의 일인분의 몫은 무엇인지, 내가 과연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아함에 뒤숭숭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괜시리 그 답을 자꾸만 과거에서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아직도 어른으로서의 의문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젠 뜨던 편물에 구멍이 생겨도 조금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잔 실수로 구멍이 여기저기 얼룩덜룩 보이는 결과물일지라도 여전히 형태는 여전하고 가치 또한 그대로 유지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잔 실수가 보여도 조금 더 너그럽게 애정을 가지고 차분히 뜨개질을 하면서 겨울에 쓰일 유용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많이 만들고 있다. 뜨개를 좋아하는 이유 중 또다른 하나는 단순 반복 행위는 오히려 자칫 지루한 삶을 견디게 해준다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는 것,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것, 간단한 아침식사를 꼭 하고, 주 2회 정도는 되도록 저녁 일곱시쯤 운동 하기, 주말엔 정해 놓은 공부를 한 시간 정도 하는 것 등등. 일상에 정해 놓은 반복되는 일들은 자칫 지루할지라도 일정한 손놀림으로 만들어내는 손뜨개처럼 소박하고 정직하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하루하루이지만 결국 무탈한 한 해가 되면서, 생의 지루함에서 조금 물러나 충직하게 살아가게끔 한다. 하루하루 또는 매해가 영화 속 주인공처럼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 거대한 사건이나 이벤트가 생기지 않는 다소 심심한 일상이어도 그저 현재에 충실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딘가 심심하고 무언가 지루하지만 충실히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 뜨개질이 알려준 행복에 충실했던 올해가 빠른 속도로 가고 있다.

2024-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