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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평범함에 대한 존경

지난달에 아들이 태어났으니 이제 약 50일 정도를 함께 한 셈이다. 그 중 아내의 회복을 위한 입원 기간과 산후조리원에 있던 기간을 제외하면 내 손으로 육아라는 것을 하게 된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육아는 고단하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프리랜서 형태로 일을 하기 때문에 아내와 둘이 함께 아기를 돌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생아 육아는 쉽지 않다. 세 시간 반에 한 번 아기는 분유를 먹는다. 분유를 타고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고 잠투정을 받아주다 다시 잠을 재우는 과정은 아무리 빨리 해도 한 시간 이상이 걸린다. 두 시간 쉬고 다시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 것인데, 체감적으로는 물 한 번 마시고 나면 또 아기가 깨어나 밥을 달라고 보채는 기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백일의 기적’을 우리는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정말 그 무렵이면 아기가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백일까지 우리를 버티게 해 주는 것은 두 가지 정도가 있다. 하나는 그래도 우리의 아기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과정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육아 선배들이 이미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만 존재하는 고단함이 아니라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겨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사실은 때로는 위로가 되고 때로는 오기가 되어 다시 마음을 다잡게 만들기도 한다. 육아는 평범한 행위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어려움을 극복해내었고 누구에게나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평범하다고 해서 위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강한 책임감으로 한 생명을 끌어안고 고단한 시절을 보낸다는 것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걸 해내었거나 해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육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일들이 아주 많고 매일같이 그것을 해내며 살아가는 위대한 사람들도 아주 많다. 나는 살면서 ‘나인 투 식스’라고 이야기하는 고정된 출퇴근 시간에 맞추어 살아본 일이 많지 않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부터 그런 삶을 가까이서 바라볼 기회가 생겼다. 매일 아침 이른 시각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늦지 않게 회사에 출근한다는 것은, 그것을 언제나 해 나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별 것 아닌 것이라 느껴질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보기에는 매우 대단한 일이다. 처음 결혼생활을 시작할 때는 나도 함께 아침 일찍 일어나 웃는 얼굴로 아내의 출근을 배웅한 뒤 힘차게 하루를 시작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는 침대에서 간신히 손만 뻗어 아내에게 인사를 건넸고, 또 언제부터는 아내의 출근을 보지 못한 채 홀로 아침을 맞이하는 날들이 많아졌다.회사에 출근해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한 하루는 계속된다. 회사에 책상이 있다는 것, 아니면 근로 현장에 자신만의 포지션이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책임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출근 하지 않는 프리랜서 예술인인 나 역시 책임감을 느끼며 내 직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책임감이 있는 것과 책임이 주어지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이다. 나는 필요한 시간만큼 책임감의 스위치를 켰다가 다시 끌 수 있지만, 조직에 속한 사람들은 최소한 그 조직의 업무시간 만큼은 지속적으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일상성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사실은 매우 무거운 일이며 대단한 일이다. 자신이 놓여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속한 조직이 원활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분명 위대한 일이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퇴근해서는 어떤가. 우리는 또 다른 호칭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시간을 맞이하곤 한다. 부모, 자식, 때로는 친구라는 호칭조차도 책임감을 요할 때가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역할 또한 잘 해내며 살아가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나의 경우처럼 육아 전선에 뛰어들기도 하고 부모님을 챙기기도 하며 외로운 친구들에게 어깨를 내어주기도 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다. 그 과정마저 해내고 나면 진정한 자유시간이 잠시 주어지기도 하는데, 그런 순간에마저 다음 날을 또다시 위대하게 보내기 위해 절제력을 발휘하곤 한다.평범한 이들의 평범한 하루는 사실 이토록 위대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에 모든 평범한 사람들은 존중받아야 하고 더 나아가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 남들이 그렇게 해 주지 않더라도 스스로부터 자신을 존중하고 칭찬하며 매일을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위대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2024-08-19

그렇게 있어 줘, 빛나는 별처럼

‘킹 오브 프리즘’이 개봉할 것이라는 소식(이 글이 지면에 실릴 때면 이미 개봉한 뒤겠다)을 들었다. 평소라면 무심히 지나쳤겠지만 어쩐지 관련 내용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애니메이션은 내게 ‘응원상영’이라는 흥미로운 문화를 알려준, 일종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극장에 모인 사람들이 응원봉을 흔들며 함께 호흡하는 모습. 스크린에 명시되는 배급사를 향해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엔딩곡이 끝나면 “앵콜!”을 외치는 장면을 보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저런 식의 관람도 가능하구나. 저렇게 즐거울 수도 있구나, 하고.극장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정숙을 요구해 왔다. 나 또한 예민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으로 극장의 침묵을 중요시 생각한다. 이러한 뾰족함은 영화가 시작하면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는데, 옆자리 사람이 팝콘을 먹기 위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거슬리고 타인의 불규칙한 호흡 때문에 작품에 몰입하는 것이 힘겨울 정도다. 가끔은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고 싶다. 이봐요. 당신의 숨소리가 매우 크다는 걸 알고 있어요?응원상영은 다르다.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소리를 지르고 응원봉을 흔들면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당연하다. 작품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물론,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권하기까지 한다. ‘킹 오브 프리즘’에는 여자 캐릭터의 대사를 관객에게 넘겨주는 부분이 있으니. 남자 캐릭터가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면 목소리 높여(그리고 진심을 가득 담아) “좋아!”하고 대답하면 되는 것이다.나는 오랫동안 이 애니메이션이 인기가 많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찾아온 꿀 같은 공휴일, 나는 마음먹고 이 작품을 정주행하기로 했다. 전작인 ‘꿈의 라이브 프리즘 스톤’을 감상하는 것부터 시작, ‘킹 오브 프리즘’의 극장판과 애니메이션을 차례로 독파했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들의 서사가 어찌나 감동적이던지. 어떤 부분에서는 눈물을 찔끔 흘리기까지 했다.한동안 나는 ‘프리즘 스타’들에게 빠져 지냈다. 방 청소를 하다가 “작사, 작곡은? 신도하!”라고 외친다든지, 강아지가 나를 향해 폴짝 뛰어들면 “미안, 난 모두의 것이니까” 하고 너스레를 떨고, 운전 중에 채우리의 ‘Blowin’ in the Mind’를 튼 뒤에 신명나게 따라 부르기도 했다. “양자택일 극단적이야 넌 너무 긴장하지 마라, 냥냥 냥냥냥 냥냥!” 이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정말이지 수치스럽겠지만, 나도 나를 제어할 수 없었다.내가 이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지자 가장 기뻐한 사람은 또한 내 동생이었다. 그녀의 2D 사랑은 아주 오래되었는데, 국적 불문, 장르 불문, 모조리 섭렵해 내는 2D계의 척척박사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나를 앉혀 놓고 ‘킹 오브 프리즘’의 역사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내가 감흥 없이 건성으로 듣자 맥 빠진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언니는 이 장르를 진심으로 즐기는 게 아니잖아. 다만 신기한 것뿐 아니야?”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럴지도. 오랜 기간 나에게 있어 2차원의 존재는 ‘진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현실보다 더 현실다움을 느끼고 그 안의 인물이 떠나갈 때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하나의 캐릭터가 빚어지는 데는 무엇보다 정교하고 섬세한 조물주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오히려 너무나 완벽하게 거기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와 “좋아하는 2D 캐릭터가 생겼어”는 충분히 같은 층위에 놓일 수 있다. 좋아하는 마음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무어라 형용하거나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만 같다. 그것은 ‘나’를 넘어서 ‘너’로 향하는 일. ‘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나’의 하루가 맑아지는 일. 마음이 멀리 뻗어나갈수록 세계는 확장되고 혼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영역까지 가닿을 수 있다.어쩌면 나는 그러한 마음을 동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언가에 흠뻑 빠져 하루를 보내고 자신 있게 “좋아해!” 하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그 힘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그것은 불행을 피하기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행복을 향해 걸어가는 태도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 ‘덕질’은 삶을 윤택하게 하지. 좋아하는 마음은 함께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고. 물론 그 세상이 늘 기쁘기만 할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애호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며, 계속 그렇게 있어 주면 좋겠다. 빛나는 별처럼.

2024-08-19

‘낚시꾼적’ 사고

낚시꾼만큼 핑계가 많은 사람도 없다. 지난 주말 부안 격포에 다녀왔다. 낚시용 레저보트를 장만한 후 처음으로 멀리까지 가 낚시를 했다. 농어를 노리고 배를 띄웠는데, 결과부터 말하자면 꽝이다. 같이 간 일행이 장대와 어름돔을 잡았지만 대상어종인 농어가 아니므로 꽝이나 마찬가지다. 어름돔의 경우 제주도와 남해에 주로 서식하는데, 서해 격포에서 잡히는 걸 보니 수온이 오르긴 오른 모양이다.그렇다. 수온이 문제다. 기온이 32도인데 수온도 32도였다. 바람도 없고 파도도 없는 날씨에 뙤약볕을 그대로 빨아들인 해표면은 사우나 온탕이나 다름없다. 수온이 높으니 농어들도 깊은 자리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또 핑계를 대본다.낚시만큼 시도 대비 실패가 잦은 행위도 없다. 강에만 가면, 바다에만 가면, 배만 타면 물고기를 잡을 것 같지만 막상 쉽지 않다. 내가 가입한 레저보트 동호회 카페에 어느 회원이 글을 올렸다. 보트 구입 후 자신이 저지른 초보적인 실수들을 나열하면서 마지막 열 번째, 보트를 산 지 1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했다. 거기 다 적진 않았지만 매번 다채로운 실패의 변이 있을 것이다.낚시꾼만큼 핑계가 많은 사람도 없다. 수온이 높아서 안 잡힌다. 반대로 수온이 낮아서 안 잡힌다. 냉수대가 유입돼서, 일본에 지진이 나서, 적조가 발생해서, 돌고래가 날뛰어서 낚시가 안 된다. 바람이 불어서, 바람이 안 불어서, 비가 와서, 비가 안 와서, 기압이 높아서, 기압이 낮아서, 너무 환해서, 너무 어두워서, 수량이 많아서, 수량이 적어서, 물색이 맑아서, 물색이 탁해서 꽝이다. 그럼 도대체 언제 잡는가?낚싯배를 타거나 고기가 잘 잡힌다는 지역에 가 낚시를 하면 선장이나 현지의 고수들이 하는 말이 있다. 1번 “있으면 잡혀요”, 2번 “물 때 되면 물어요” 뻔하고 당연한 이야기. 고기가 있겠거니, 곧 물겠거니 집중해도 입질은 전혀 없다. 그때 압권의 3번 “어제까지 잘 나왔는데”가 나온다. 낚시꾼 속은 뒤집어진다.물고기는 기억력이 아예 없다던가. 낚시꾼도 물고기 못지않다. 한 마리도 못 잡고 씩씩대며 집에 와서는 낚시장비를 정리해두자마자 다시 물가로 가고 싶은 게 낚시꾼이다.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한다던데, 실패로부터 학습하는 게 없는 어리석은 자만 낚시꾼이 될 수 있다. 아니다. 실패 따위 아랑곳하지 않아야 낚시꾼이다. 낚시꾼이야말로 긍정적 사고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온라인에서 ‘럭키비키’라는 말이 유행이다. 아이돌 가수 장원영이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로 자신에게 닥친 불운마저 행운으로 여기며 예컨대 “앞사람이 빵을 다 사가는 바람에 새로 갓 나오는 빵을 살 수 있게 됐어. 완전 럭키비키잖아”를 외치는 데서 유래했다. 비키는 장원영의 영어 이름이고 ‘럭키비키’는 이른바 ‘원영적 사고’로 불리기도 한다. 지난주 농어낚시의 아픔을 잊은 나는 어제 서천 마량진항으로 백조기 낚시를 다녀왔다. 낚시 도중 예보에 없던 폭우와 풍랑, 낙뢰에 급히 항구로 들어와 정박한 다른 배에 배를 묶어두고 화장실에서 비를 피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팬티까지 다 젖었지만 선크림을 안 챙겨 왔는데 얼굴 안 타서 럭키비키잖아!’ 긍정적 사고에 힘입어 만선으로 입항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낚시꾼적 사고’를 가졌으면 좋겠다. 낚시꾼은 스스로를 탓하지 않는다. 살면서 자책하는 낚시꾼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낚시꾼에겐 다 핑계가 있고 변명이 있다. 주변을 탓하고 상황을 탓하고 초자연적인 운을 탓한다. 그러면서 실패쯤은 웃어 넘긴다. 못 잡으면 사 먹으면 된다며 ‘카드채비’(신용카드와 낚시채비의 합성어)를 필살기를 꺼내든다. 어시장에 가 고기를 사서는 직접 낚시로 잡은 거라며 집에다 뻥을 친다.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불행과 불운과 좌절과 패배와 실패에는 다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원인에서 자신은 쏙 빼는 낚시꾼의 뻔뻔함이야말로 ‘팍팍한 인생살이 다 나 때문’이라고 자책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마음가짐 아닐까. 어제 실패한 낚시꾼은 오늘 다시 바다로 간다. 오늘 실패하고 내일 또 간다. 실패 따위 적당한 핑계로 둘러대고 새 마음으로 다시 도전하는 것이다. ‘수온이 높아 한 마리도 못 잡은 덕분에 다음번 잡을 농어들을 두 배로 남겨뒀어. 완전 럭키비키잖아!’

2024-08-12

처음이라는 이름의 탈피

처음, 이라는 말처럼 마음을 조여오는 말이 또 있을까. 처음이라는 단어는 어딘가 덜 익은 풋사과처럼 입 안 가득 잔뜩 떫은맛이 맴돈다. 설렘과 서투름, 민망함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질서 없이 섞여 ‘첫’이란 단어에 모두 응축되어 괴상한 맛을 띠고 있는 것 같달까.나는 모든 처음을 싫어한다. 처음은 능숙하지 않고 어딘가 어리숙하고 부족하고 부끄러움이 많고 미성숙한 상태로 느껴진다. 게다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막연한 공포심이 들게 한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대비해 신체에서 위험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게 되고, 이는 은근한 긴장 상태에 빠져 입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게다가 ‘처음’이라는 말에 기대어 잘못을 고백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내가 이 일이 처음이라 그래’, ‘처음이라 어쩔 수 없었어’ 등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을 두 번째로 미루고 처음이란 단어에 기대어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는 사람의 유형이 제일 난감하고 대하기 멋쩍다. ‘이렇게 황당한 사과를 받는 나의 감정도 처음이야!’ 라고 되받고 싶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화를 삭히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이란 단어와 정을 붙이기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하지만 누구나 처음은 있기 마련이고, 그러므로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을 정도로 누구나 서툴 수 있단 사실은 인정한다. 처음이란 어딘가 삐뚤삐뚤한 서툰 마음이 당연히 들기 마련이니까. 그러므로 이성적으로 처음이란 단어를 다시금 생각해보자면 ‘첫’은 단 한 번밖에 없어 애틋한 것이기도 하다. 첫 등교, 첫 키스, 첫 출근, 첫 해외여행 등등 처음은 낯선 대상으로부터 오는 설레임과 두려움이 오묘하게 섞여, 딱 한 번밖에 느껴볼 수 없으므로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지기도 한다.최근 회사를 그만 두면서 다시 처음이란 관문 앞에 서 있다. 하루에 두 시간씩 내 경력을 증명하는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한 시간 정도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다시금 다듬고 많은 회사들 중 조건에 맞는 곳을 찾아 고심히 지원한다. 그렇게 지원한 여러 회사들 중 서류 단계부터 불합격 통보가 날아올 때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시작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단 열패감이 어지러이 맴돌아, 시작조차 쉽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그러니 언제나 처음이 두렵답시고 언제나 구석에 숨어 피하고만 있을 순 없다. 한자 으뜸원(元)은 처음, 시초(始初)라는 뜻도 지니고 있지만, 우두머리, 두목 또는 임금을 나타낼 때 쓰이기도 한다. 처음이 없다면 사건이 발생하지 않듯 무엇이 진행되거나 생기기 위해선 처음은 필수불가결로 일어나야만 한다. 처음은 곧 발판의 도약이 되어 최고 또는 일등이란 결과물로 나아가게도 하니까.최근 한 다큐멘터리에서 뱀이 탈피하는 영상을 봤다. 탈피하는 과정은 꽤 힘겨워 보였고, 느렸고,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태 가지고 있던 몸의 껍질을 버려내는 이유는 뭘까 싶어 검색해 보았더니 탈피는 생물에게도 매우 힘겨운 과정이지만 탈피를 하지 않으면 몸의 크기를 불릴 수 없기에 필수로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탈피는 성장과 관련이 있어 성장주기에 따라 탈피 시기도 달라진다고 하는데, 파충류의 경우 대부분 1년에 1번 계절의 환경이 변하고 생물의 내분비계가 탈피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호르몬을 분비했을 때 몸이 탈피 준비를 하게 된다고 한다.외골격을 두른 곤충이나 갑각류는 탈피 후 더 큰 갑각을 만들어 내고, 파충류는 내골격의 성장에 맞추기 위해 피부를 크게 늘려 주기적으로 탈피를 한다. 파충류, 양서류 등은 탈피로 인해 피부에 기생하는 기생충이나 세균들을 떨쳐내기도 한다고 한다. 탈피를 하는 동물은 모두 고통을 동반하면서까지 전의 모습을 버리고 다음으로 나아간다.전에 있던 상황이나 무언가에서 많이 달라졌거나, 과거의 인식을 벗어난 경우, ‘탈피’ 또는 ‘탈바꿈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실은 내가 처음이란 단어를 낯설게만 느껴졌던 것도 첫 시작점 앞에서의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낯선 것에서의 두려움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해야 할 일을 찾아낸다면 처음이란 혼란에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가져야 할 것은 탈피라는 용기다.

2024-08-12

나는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 ‘예술가는 돈을 밝히면 안 된다’고… /ideogram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한 업체로부터 공연 섭외 요청 연락을 하나 받았는데 돈 얘기가 빠져있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책정된 출연료가 있나요?”하고 물었다. 그 이후로 답변은 오지 않고 있다. 이런 일은 종종 있는 일이라 당황스럽지도 않고 화도 나지 않는다. 그저 조금 성가실 뿐이다.나는 창작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글과 음악을 팔아 돈을 벌고 그것으로 나와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간다. 갈빗집 사장님이 갈비를 팔고 휴대폰 대리점 사장님이 휴대폰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나의 창작물을 파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파는 것들을 공짜로 내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갈비나 휴대폰을 공짜로 달라고 점포 문을 여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이다. 내 창작물이 갈비나 휴대폰 보다 위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값이 공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누군가는 ‘예술인은 돈을 밝히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돈 주는 게 제일 좋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좋은 사람, 자아실현, 화목한 가정, 건강 등등. 다양한 유무형의 자원 중에 내게 가장 넉넉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돈이다. 예술인들은 흔히 이런 상황에 놓인다. 차고 넘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중 무엇을 먼저 추구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면 예술인은 당연히 돈을 밝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물론 그런 논리와 무관하게 선심을 쓰는 차원에서 공짜로 노래도 부르고 글도 쓸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칫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짜로 쓰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것이 유료화 되면 성을 내곤 한다. 대표적인 것이 음악이다. 한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법다운로드 프로그램으로 음악을 다운받거나 무료 스트리밍 사이트를 통해 음악을 듣던 시절이 있었다. 그게 너무 당연해져서 음악을 유료로 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대중들이 반발했던 기억이 선명하다.그럼에도 내가 비영리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먼저 사회를 향해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때, 같은 생각으로 기획된 무대가 있다면 금전적인 부분과 관계없이 달려가기도 한다. 사회적인 올바름을 추구하는데 나의 창작물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내가 가진 무형의 재산을 빌려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간혹 이런 경우들이 있다. 내가 공연을 함으로써 발생되는 수익을 기부 할테니 와 달라는 것인데 그 수익 기부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하겠다는 것. 이건 반칙이라고 생각한다.내가 신세를 진 사람이나 가까운 지인들의 부탁으로 나의 능력을 무료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식으로라도 신세를 갚을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기쁜 일이다. 가까운 지인들 같은 경우 나의 호의를 기억해두고 밥이나 술이라도 살 테니 여건이 되고 상황이 맞으면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간혹 모르는 사람이 밥을 살 테니 도와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내가 모르는 사람과 밥을 왜 먹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돌려주고 싶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그외 너무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 일이라거나, 나에게 커다란 영광인 일 같은 경우에는 무료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가급적 무료로 나를 사용하도록 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나의 원칙이다. 간혹 재능을 기부하게 되는 경우이더라도 가급적 거마비 수준의 돈은 받으려고 한다. 재능 기부는 말 그대로 재능을 기부하는 일. 재능 기부를 바라면서 거기에 드는 비용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재능에 금전까지 얹어서 기부하라는 말이 된다. 나는 재능 외에 차비나 식대 같은 비용까지 기부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예전에 라디오에서 한 연예인 진행자가 어느 청취자와 전화 통화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비영리 단체에 있다는 청취자가 진행자에게 기회 되면 재능기부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자 진행자는 말했다. “재능이 너무 커서 기부할 수가 없어요.” 나는 무릎을 탁 치며 공감했다. 나 역시 내가 가진 재능으로 십수 년째 먹고 사는 사람이다. 결코 그 재능이 작다고는 할 수 없다.기다리던 답장이 왔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신생 업체라 책정된 출연료는 없습니다. 하지만 향후…’ 나는 이런 상황에 향후를 기약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 나를 존중한다면 여건 안에서 적은 금액이라도 제안했어야 했다. 보수가 적은 것과 없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에. 나는 공짜가 아니다.

2024-08-05

김치찌개와 파스타

인간에겐 누구나 영혼을 울리는 음식이 있다. /언스플래쉬 ‘오늘 뭐 먹지?’많으면 세 끼, 못해도 두 끼는 꼭 챙겨 먹어야 하는 내게 이것은 꽤 중요한 문제다. 이른 아침부터 고열량의 음식을 섭취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인간으로 내가 가진 지론은 바쁜 날엔 더욱 든든하게 챙겨 먹어야 한다는 것. 이렇게 욕심을 부리다간 속이 더부룩해 종일 끙끙거릴 게 분명하지만, 힘이 빠지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보다야 낫다. 피치 못할 이유로 한 끼라도 거르게 되는 날엔 회의감에 빠진다. 나를 잘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먹는다는 행위는 우리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일이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혹은 ‘먹고 살기 참 힘들다.’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는 단순히 영양가 있는 덩어리를 위장에다 모으는 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얼마든지 문학적인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다.생각해 보면 매 끼니를 그렇게 잘 챙겨 먹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세끼를 근사하게 차려 우아하게 먹는 호사스러운 시간은 우리의 일상에 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음식으로 허겁지겁 주린 배만 채우는 것처럼 슬픈 일은 또 없다. 식사 자리에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자리한다. 그런 면에서 위장과 영혼은 서로 맞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각자에게 영혼을 울리는 음식이 있을 것이다. 나의 소울 푸드는 김치찌개와 파스타다. 살면서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을 꼽자면 이 두 가지다. 전국 방방곡곡의 김치찌개 맛집을 찾는다든가, 새로운 파스타 조리법을 유튜브 영상으로 시청하는 것 또한 나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내가 가장 즐겨하는 요리 또한 이것인데,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자신 있게 내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필살기이기도 하다.김치찌개는 김치가 맛있는 것이 핵심. 앞다리살 대신 등갈비를 넣으면 조금 더 고급스럽게 변하고 참치나 스팸을 넣으면 더 캐주얼한 맛이 난다. 새우젓과 두부만 넣어 칼칼하게 끓이는 것도 일품이다. 육수도 중요하다. 멸치로 내느냐 사골로 내느냐에 따라서 맛이 천차만별이다. 무엇보다 김치찌개는 오래 끓이면 끓일수록 맛이 깊어진다. 한 솥 가득 끓여놨다가 다음 날 아침에 비척비척 일어나 후루룩 떠먹는 김치찌개야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파스타는 말해 뭐하겠는가. 오일, 토마토, 크림을 베이스로 두는 이 요리는 무엇을 넣고 어떤 식으로 조리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음식이 된다. 봄에는 제철 나물로, 여름은 방울토마토와 치즈로 산뜻하게 만들면 한 계절이 내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오는 기분이다. 날이 쌀쌀해지면 여러 가지 해물로 육수를 만든 다음 토마토소스에 고추장을 섞어 맛을 내는데, 한 입 떠먹으면 혈관에 뜨거운 기운이 돌면서 몸이 따뜻해진다. 이것은 해장에도 제격인데, 숙취로 괴로워하는 나를 몇 번이나 구원해 준 아주 고마운 녀석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음식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과 닿아 있다. 밥을 먹으려고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이 어쩐지 민망해지는 것처럼. 이에 관해 구태여 말하는 게 머쓱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우리를 쉽게 감동하게 한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한식당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떠올려보자. 고된 여행에 지쳤을 때 먹는 김치찌개 한 입처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묘하게 달짝지근하고 심심한 것이 아쉬워도, 이 정도면 괜찮아, 얼추 비슷한 맛이야, 하며 관대해진다. 은은한 감동이 뭉근하게 퍼지면서 마음 어딘가가 풀어지는 기분이다.유럽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것도 본토의 파스타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맛있긴 했지만 내 입맛에 딱 맞진 않았다. 마늘과 페페론치노가 넘치도록 들어갔으면 좋겠고, 고춧가루 팍팍 넣어 느끼한 맛을 잡고 싶고, 아니 여기에 굴소스 한 스푼을 넣으면 감칠맛이 더 돌 것인데… 그런 불온한 생각을 하는 손님이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업원은 음식이 맛있느냐고 물어왔고 나는 엄지를 척 내밀며 거짓 웃음을 지었다.그러니까 내 부엌에서 내가 만든 음식이 내 입에는 가장 맛있다는 결론이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땡초도 실컷 넣고 짠맛도 단맛도 마음껏 조절해 가면서 내 맘대로 만드는 김치찌개와 파스타. 여기에 시원한 맥주 한 잔 곁들이면,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소리가 절로 나온다. 누군가가 먹고 너무 싱겁다고, 맵고 달다고 미간을 찌푸려도 뭐 어떠한가. 내가 만들고 내가 먹는 것인데. 다른 곳에선 몰라도 식탁의 주도권만큼은 내가 쥐고 있다. 그게 중요한 거다.

2024-08-05

아침 이슬

‘아침 이슬’이 수록된 음반. 몇 해 전 문예창작과 시창작 수업에서 대학생들에게 노래 하나를 알려줬다. 자꾸만 길어지고 사변적인 근래 한국시의 경향이 마뜩잖아 짧은 문장만으로 아름다움은 물론 울림과 감동까지 빚어내는 글들을 읽히면서 노랫말을 예로 들었는데, “가을이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동요 ‘노을’)에 이어 소개한 게 김민기의 ‘아침 이슬’이다. 칠판에 가사를 적었다. 아느냐 물으니 모른다 했다. ‘이 노래를 모른다고?’ 놀랐지만 나도 아침 이슬 세대는 아니다.“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알게 된 노래, 가사를 외우지 않았는데 저절로 외워진 노래다. 유신과 신군부, 민주화운동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음에도 부르면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는 노래다. 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소년기를 보낸 나는 앞 세대가 엄혹한 시절에 피워낸 불씨의 열기를 자연스레 감각하며 자랐다. 정치의식이라는 게 생길 즈음엔 광화문에 가 “효순이 미선이를 살려내라”고 외쳤는데, 그해 겨울엔 통기타를 치며 김민기의 ‘상록수’를 부른 대통령이 당선됐다. 투표권 없는 고3이지만 감격했다.이전 세대의 확고한 신념 뒤에도, 이후 세대의 막연한 의식 뒤에도 김민기의 노래가 흐른다. 본강의 큰 물줄기가 아닌 바위틈으로 숨어 흐르며 길을 만드는 발원지의 고요한 물처럼, 그 자신은 뒤로 남겨지고 양희은의 목소리를 앞세웠다. “작은 미소를 배운다”는 대목에서는 욕심 없는 겸양이 나타나고, “붉게 타오르고”라는 비유 대신 “붉게 떠오르고”로 덤덤히 묘사한 부분에서는 삿됨 없는 우직함이 나타난다. 노래를 직접 부른 영상이 딱 하나 있는데, 무대 뒤에서 음향기기를 만지다가 그 자리서 기타를 잡았다.스스로 ‘뒷것’을 자처하며 철저하게 뒤에서만 그림자로 살았다. 공단에서 동료 노동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야학을 열어 달동네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공공 유아원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자 권력의 감시 속에서 목숨 걸고 노래했다. 소극장 ‘학전’을 만들어 가난한 예술가들이 맘껏 연주하고 연기할 수 있는 무대를 차렸다. 뒷것인 그가 객석에 나와 있을 때는 늘 아동극이 상연될 때였다. 아이들 웃음소리를 듣는 게 참 행복했다고 한다.소외된 공단 노동자와 달동네 아이들이 배움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고, 학전을 거친 예술가들이 한국 문화예술계의 주역이 됐다. 아동극을 보며 꿈을 키운 아이들은 지금 30대가 되어 사회에 진출했다. 성숙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열정과 노력을 발휘하며 자기 삶을 가꾸고, 나아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자리마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기원에 김민기가 있다. 아침 이슬은 정말 발원지의 투명한 한 방울 물인 것이다.앞에서 소리치지 않고 뒤에서 읊조렸을 뿐인데 저항의 상징이 됐다. 1975년 ‘아침 이슬’은 시답잖은 이유로 금지곡이 됐고, 김민기의 삶에도 시련과 서러움이 알알이 맺혔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부정한 권력자들은 노래가 가진 힘이 민중을 고취시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스페인 내전 당시 파시스트들이 로르카를 살해한 것도 그의 시가 피눈물 밴 안달루시아의 민중정서를 노래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100만 명의 민중이 ‘아침 이슬’을 합창했다. 노래가 만든 거대한 파도에 마침내 독재자가 물러났다. 앞에 나선 그 어떤 사상가, 운동가, 정치가, 지도자도 하지 못한 일을 뒷것의 삶을 통해, 삶을 담아낸 노래를 통해, 노래에 실은 고결한 정신을 통해 김민기는 해냈다.노래가 생소해 멀뚱거리는 학생들에게 ‘아침 이슬’을 불러줬다. 미성으로 꽤 잘 불렀다. 아무래도 나는 뒷것은 못 되는 모양이다. 그때 노래를 들은 학생들이 지금 20대 후반쯤 됐다. 자기 자리서 열심히들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노래엔 신비한 힘이 있다. 그날의 노래를 기억한다면, 각자도생의 비정한 세상에서도 타인과 나누며, 약자를 도우며, 정의로운 쪽에 서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2024년 7월 21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광야로 간 김민기는 아침 이슬로 언제나 함께 있다. 이제 산 사람들의 뒷것으로 우리 마음과 정신을 떠받치면서.

2024-07-29

여름의 책

눅눅히 마음이 무성해지는 여름, 비가 계속 내리는 날씨 탓에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는다면, 저자 무루의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를 꺼내게 된다. 이 책은 생의 충직함, 성실함, 유연함, 지혜로움을 말끔히 엮어 만든, 깨끗한 옷 같은 에세이다. 올곧게 객관화되어 있는 사람의 다정하고도 신비로운 이야기로, 묘하고도 신비로운 활력을 준달까.스무 살 무렵 늦은 성장통을 겪었다는 저자 무루(박서영)는 세상에 이해받지 못하는 소외감으로 그림책을 읽었다. 그림책에서 기쁨과 슬픔의 여러 이름을 발견하며 세상의 부조리와 간극, 소외되는 대상과 존재를 인지한다.비혼, 여성, 집사, 프리랜서, 채식주의자. 이토록 확고하게 자신을 나열함과 동시에 낯선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가보지 않은 길로 가기 위해 용기를 낸다. ‘몸의 고립이 마음의 고립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는 절박한 마음’으로 세상 밖을 걷고 머무른다. 외로운 날들이 모두 지나간 어느 때에, 그녀는 관계에 대해 ‘가끔은 한 사람의 손을 잡거나 나란히 걸을 수 있겠지만, 기왕이면 혼자서도 잘 걷고, 두 발로 씩씩하게 걷고 싶다’고 말한다.자신의 결정이 어디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책으로 도망쳤지만, 결국 그녀는 책 안에서 보고, 듣고, 사유한 것으로 자신을 이루어 타인을 공감하고 포용한다. 세상의 틈마다 그어 놓은 안과 밖의 경계는 극명하게 나누어져 있고, 가장자리의 존재는 쉽게 배척된다. 하지만 저자는 사이에 놓인 경계를 허무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바로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우리가 믿고, 사랑하고, 그래서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할 것들은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이다.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은 것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믿는 마음이란 실체와 효용, 현실과 확신을 넘어서는 지점에 있다. 현실에서조차 세상은 언제나 한 사람의 세계를 거뜬히 넘어서기 때문이다. 유연한 사고와 타인에 대한 공감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질 터다.”저자는 그림책을 읽으며 자신의 과오를 인지하며 한계를 정하기도 하고, 계획과 좋은 습관을 세우기도 한다. 이러한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자신을 쌓는 어른이라니. 어떤 직업을 삼고,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 낼지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지 그렇게 어떤 노인이 되고 싶은지 떠올려 보게 된다. 저자는 ‘작은 기쁨을 풍요롭게 누리는 사람’,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리듬을 가진 노래 같은 삶을 사는 사람’, ‘농부의 손처럼 투박하지만 다정한 사람’ 등, 자신의 모습을 또렷하게 그려내며 먼 미래의 얼굴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앞자리가 바뀐 나이 때문일까. 나는 올해 유독 가만히 있어도 옅게 보이는 입주름이나 안으로 말린 어깨의 모양, 여유로워 보이는 걸음걸이나 손짓 등에 신경 쓰고 있다. 동시에 10년, 20년 뒤 어떤 모습일지 자주 상상해본다. 그럴 때마다 어쩐지 아득한 기분이 든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더 오랜 세월이 지나면 지금처럼 뛰어다닐 수 없을 테고,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지겠지. 몸과 같이 기분마저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없다면? 생각은 꼬리를 물어 어느새 울적해진 노년의 내가 그려지는 것이다.하지만 이 책을 다시금 꺼내어 읽다 보면 힘없이 늙은 몸을 가진 내가 아닌. 여유를 가진 채 그토록 되고 싶었던 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된다. 당연히 내 옆에 자리했던 모든 것들을 한 번 씩 돌아보며 감사할 줄 아는 삶, 나와 타인의 건강한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빌어주는 삶, 진실로 거짓을 가려내며 거짓 없이 사랑하는 삶 등등. 깊은 내면의 모습을 그러다보면 놀랍게도 미래를 기대하며 기다려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일렁이는 내면을 가꾸어온 섬세한 손길이 책의 마지막 부분까지 묻어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조금 더 구체적인 한 사람이 펼쳐진다. 타인의 변덕에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 많은 사람. 요상하고 재미있는 유행어를 많이 알아 젊은이들과도 유쾌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 차와 주전자 색색의 실과 뜨개바늘에 둘러싸여 평온하고도 고요한 할머니의 모습. 나의 먼 미래를 웃으며 상상하는 자유로움은 이토록 신비롭고 견고하며 근사하다.세 시간 만에 단숨에 읽어버린 책은 이제 등을 내보이며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다. 이럴 때마다 무언가 듬직하게 기댈 수 있는 단단한 벽을 얻은 것만 같아 마음이 평온해진다. 괴괴한 날씨에 영향을 받아 변덕스런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방법은 이렇게 나와 전혀 다른 타인의 세계를 잠시 엿보는 것이 제일 좋다. 책은 그런 걸 늘 가능하게 한다.

2024-07-29

여름의 맛

여름은 이상하게도 뜨거운 동시에 서늘하다. /언스플래쉬 어제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자 잘하는 일이니까.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나 뉴스를 정독하다가 뉴진스의 무대 영상을 찾아보고 단체 카톡방에서 친구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키득거렸다. 함께 사는 강아지가 불만스러운 몸짓으로 내 손등을 긁었다. 산책하러 나가자는 것이었다.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폭우였다.비 오는 날은 몸이 무겁다. 어깨도 골반도 뻐근하다. 비가 오면 강아지 산책은 나갈 수 없다. 육체의 문제가 아니다. 날씨의 문제다. 올해 장마는 유독 지난할 것이라는 기사를 보면서 ‘산책은 어떡하지’하는 염려부터 들었다. 요즘 나의 고민은 이렇게 실존적이고 얕다.본심을 고백하자면, 장마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산책 안 가고 침대에 있는 것 너무 좋으니까! 알량한 소망을 들킨 것일까. 나의 강아지는 언짢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내가 괘씸하다는 듯 침대 시트를 맹렬하게 긁어댔고 양발로 등허리를 난타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성질 나쁜 동물을 납득시키기 위해선 직접 보여줘야 했다. 악천후의 무서움을 모르는 강아지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생각보다 강한 비바람에 우리는 오피스텔 로비를 빠져나가지도 못했다. 공동 현관 앞에 서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우개로 문지른 듯 희뿌연 공기 중으로 비 냄새가 훅 끼쳤다. 동시에 높다란 나무의 출렁이는 잎사귀가 보였다. 거센 비를 맞으면서 유연하게 흔들리는 가지를 존경 어린 눈빛으로 응시했다. 어때? 나는 강아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냉혹한 바깥 세계야. 내 뜻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강아지는 집을 향해 네발로 삐걱삐걱 걸었다. 헤엄치는 법을 잊어버린 물고기처럼.집으로 돌아와 미뤄둔 빨래며 부엌 청소를 했다. 집안일을 마치고 나니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하고 나와 시원한 보리차를 들이켰다.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선풍기에 대고 아아, 소리를 냈다. 오늘은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구나.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그런 생각이 들자 어쩐지 난처해졌다. 돌아보면 나는 무수한 여름을 이런 식으로 지나 보냈다. 너무 한가해서 혹은 그럭저럭 바빠서. 흘러갔다는 것조차 모르고 흘려보내기도 했다. 여름은 한눈팔면 썩어버리는 과일 같은 것. 나중에 먹어야지 하고 대강대강 생각하다간 입도 대지 못한 채 버려야 한다. 뭐든 알맞게 달 때가 있어서 딱 그 시기를 즐겨야 하는데. 살다 보면 그런 게 잘 안된다.여름에 더욱 맛있는 맛을 떠올려본다. 무더운 날씨에 들이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살얼음 낀 맥주,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수박이나 밍밍하면서 감칠맛 도는 냉면. 그래, 역시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정수리가 뜨거워지는 감각도 팔뚝이나 발가락을 다 내놓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도 즐겁다.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은 간질간질한 마음이나 경쾌한 음악으로 가득 채운 플레이리스트도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여름은 꽃무늬 원피스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이 아닌가. 마음껏 화려해져도 괜찮은 날들. 동시에 한없이 가라앉아도 이상하지 않은 날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어떤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여름이었다’는 문장으로 끝나면 그럴듯해진다는 말이 있다. 그 또한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무엇이든 마지막을 맺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또 없는데, 단 한 문장으로 그것이 마법처럼 가능해진다니. 그러고 보면 여름은 참 이상하다. 뜨거운 동시에 서늘하다. 불같이 타오르는 날과 물같이 축축한 날이 공존한다. 시작부터 클라이맥스까지 모두 다 가능할 것만 같다. 여름엔 아무래도 열정적인 기세가 더 어울리지만, 잔잔하게 흐르며 대단한 일이 벌어지지 않아도 그 또한 훌륭한 서사가 될 수 있겠다. 어쨌든 여름이었으니까.오늘은 새벽부터 바람이 세게 분다. 역시나 어제처럼 침대에서 꼼지락대다가 겨우 책상 앞에 앉았다. 여름에 관해 쓰려고 했던 것뿐인데 어느덧 해가 다 졌다. 창밖을 본다. 비에 젖은 도로를 가르는 자동차 불빛이 물감처럼 번져나가는 것이 보인다.물기로 출 늘어진 여름은 곧 빳빳하게 마를 것이고 서랍장으로 들어가 다시 꺼내질 날을 기약할 것이다. 이 순간을 열렬하게 살아낼 자신이 없지만 그저 몽롱하게 바라만 보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 무엇이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문장이 내 손에 있으니.

2024-07-22

노래 잘 부르는 방법

첫 앨범을 낸지도 어느덧 14년. 긴 시간 동안 가수로 활동한 것치고 나는 노래를 그다지 잘 부르지는 못한다. 많은 가수들처럼 노래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피나는 연습을 하고 데뷔를 한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모른 채 데뷔하여 지금까지도 부족한 실력을 조금씩 채워나가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어떻게 하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냐고 묻는 친구들이 많이 있다. 그래도 음악을 해온 세월이 있으니 당장 실력은 부족하더라도 나아질 수 있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보통 대충 얼버무리거나 “담배 끊으면 돼.” 정도로 성의 없게 대답을 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적절한 대답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부족하게나마 첫 앨범을 녹음할 때보다는 나은 가창력을 가지게 된 것에는 나름의 비결이 있다. 대단히 획기적인 꿀팁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나의 비결은 고민과 반성이다.노래를 잘 하기 위해서는 노래를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봐야 한다. 끝을 알 수 없는 고음을 가진 가수, 현란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가수, 개성 넘치는 발성을 구사하는 가수 등등. 모두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만이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비유하자면 그런 것들은 피겨스케이팅의 트리플악셀이나 야구의 불같은 강속구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구사하지 않고도 최고의 반열에 오른 이들을 본 적 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기본에 충실한 선수들인지도 알고 있다. 가수의 기본은 창작자의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다. 작곡가의 의도대로 정확한 음정과 박자를 구사하고, 작사가의 의도대로 감정을 표현하며 노래를 부르는 가수야말로 좋은 가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 나름 음악을 많이 듣고 분석하며 내린, 노래를 잘한다는 것에 대한 결론이다.또한 내가 어떻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 없이는 절대로 실력이 늘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부른 노래를 녹음해서 들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과연 나는 고민을 통해서 알게 된,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에 대한 정의에 부합하는 노래를 불렀는가. 음정과 박자는 정확한가와 감정 표현은 어떠하였는가에 대해 평가해야 한다. 스스로 평가가 힘들다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고 그것을 참고해 반성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나는 이미 세 장의 정규앨범을 냈다. 그밖에 싱글들과 EP를 합치면 50곡이 넘는 곡을 녹음한 셈이다. 녹음을 할 때마다 나는 내가 부른 노래를 마주해야 하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서 다시 부르는 일을 몇 시간씩이고 반복해야 한다. 그야말로 형편없었던 실력을 지금만큼이라도 향상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이러한 고민과 반성의 과정 없이 많은 친구들이 노래를 잘 부르고 싶어서 코인노래방을 찾는다. 자신이 잘 부르고 싶은 노래를 몇 번이고 고래고래 불러보지만 실력은 늘지 않는 까닭은 앞서 말한 것들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민과 반성 없는 연습은 아까운 성대만 혹사시키는 일이 된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고민과 반성의 필요성은 꼭 노래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도 좋은 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고, 나의 글이 어떠한가를 살피고 반성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종이와 전기세만 낭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화를 잘 하기 위해서도 좋은 대화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내가 했던 말들을 복기하며 반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이러한 생각의 범위를 확장하여 인생을 살아가는 것 전반에도 적용시켜볼 수 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 고민하고, 지금 내 삶은 어떠한 것을 지향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 없이 살아간다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실없는 사람이 될 수 있고, 풍요로운 삶이 아니라 허무한 삶을 살게 될 수 있다.세상은 빠르게 돌아가고 삶은 점점 바빠진다. 적극적이고 민첩한 행동이 미덕으로 여겨지다 보니 고민과 반성은 생략해도 좋은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나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하고,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빠뜨려서는 안 될 과정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24-07-22

삶이라는 한 알의 구슬

요즘 비즈발 만들기에 푹 빠졌다. 최근 들어 만나는 지인들에게 새로운 비즈 만들기 취미에 대해 이야기하면 모두 비즈발이 대체 무엇이냐고 물어온다. ‘옛날 주택 현관문이나 가게 출입구에 많이 걸려 있던 것 있잖아요!’ 라고 말하면 모두가 그제야 알아챈다.비즈발은 햇빛 차단용 또는 통풍 그리고 가림막 형태로 많이 사용된다. 문이나 창문을 가릴 정도의 크기라 어느 정도 사이즈가 있지만, 요즘 내가 푹 빠진 비즈발은 창문가나 벽에 거는 손바닥 남짓한 크기의 비즈발이다.한참 유행중인 비즈발 만들기는 이렇게 작은 사이즈 크기로 원하는 그림을 도안으로 그려 만드는 캐릭터 비즈발이 트렌드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도안으로 그려, 형형색색의 구슬을 사용하여 미니 비즈발을 만드는 것이다.만드는 방법 또한 쉽다. 늘어나지 않는 실과 색색의 구슬들만 있으면 충분하다. 실 끝이 풀리지 않도록 잘 묶어준 뒤 그림을 그린 도안을 따라 구슬을 색에 맞춰 끼워주면 된다. 한 줄씩 완성된 비즈들을 모아보면 꽤 그럴듯한 비즈발이 완성된다. 실 한 줄에 구슬을 차례대로 꿰는 단순 작업 반복임에도 묘하게 중독되는 것은 손을 움직이면서 머릿속의 잡생각을 비우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특성 덕분일 것이다.포털 사이트 검색어 트렌드에 비즈발을 검색했을 경우 지난 4월 중순부터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7월인 현재에는 약 2배가량 증가된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유튜브에 비즈발 만들기 키워드를 검색했을 경우 가장 많은 콘텐츠의 조회수는 87만 회를 기록하고 있으며, 인스타그램의 경우엔 #비즈발 해시태그가 포함된 콘텐츠 수가 약 1000개 정도 노출되어 있을 정도다.가만 보면 비즈 꿰기는 참 재밌다. 구슬 하나라도 잘못 꿰게 되면 전체적인 그림에 묘하게 티가 나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집중하고 보면 어디에 구슬이 잘못 꿰어졌는지 표가 나긴 하지만 멀리서 본다면 그저 하나의 근사한 작품으로 보인다. 여기서, 지난 밤 또다시 돌려보았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스터츠, 마음을 다스리는 마스터’ 속의 스터츠 박사의 말을 떠올려 본다.삶의 고통과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이 고통 속에서 인간이 해볼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다. 이 의지를 갖기 위해서 해볼 수 있는 것은 ‘진주 목걸이 기법’이다. 여기서 진주는 행동이고 목걸이는 행동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행위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차려 먹는 행위도 진주알 하나이고, 내 삶에 깊게 각인될만한 업적 하나도 진주알 하나다. 결론은 진주알에는 더 훌륭하거나 반대로 훌륭하지 않다는 가치가 없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진주알로 대입해 그저 계속 행동하며 나아가는 것이다.진주와 비슷한 모양새의 비즈는 어떤가. 비즈알을 명주실에 꿸 때의 집중력, 하나하나 꿰어갈 때의 느릿해지는 호흡과 비즈알끼리 부딪혀 나는 귀를 자극하는 소리까지 비즈알 꿰기는 삶의 진주 목걸이를 만드는 기법과 동일한 면이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비즈의 표면이 매끄러운 것이 있는 반면 어딘가 깨져있거나 금이 가 있거나 또는 구멍이 너무 작아 실에 잘 꿰어지지 않는 구슬도 있다. 진주알에 대입했던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루는 엉망진창 일수도, 또 다른 하루는 삶의 가장 큰 기뻤던 하루로 남아있을 수 있겠으나 ‘나의 일상’이라는 본질엔 변함이 없다. 그러니 유독 그 하루가 일이 풀리지 않는다 한들, 또는 실패의 연속인 나날이라며 주눅 들어 있든 일상은 나의 삶이므로. 멋진 비즈발이라는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삶은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지, 성공과 실패라는 결론이 중요하지 않으므로.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비즈를 실에 꿰어 하나씩 모으다 보면 어느새 멋진 비즈발이 완성되어 있다. 세상에, 이렇게나 빨리 내 손으로 이걸 만들었다고? 벽에 걸어 두었더니 여름의 토마토가 그려진 작품이 하나 완성되었다.물론 가까이서 보면 작은 티끌 하나로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부분이 있고, 본드 자국도 난무하지만 뭐 어떤가. 서툴지만 사랑스럽고 때론 너무 진지해서 픽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이 평소 나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러니 오늘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비즈를 뒤적이며 하나의 작품을 준비해본다. 평소 같았다면 불만투성이인 여름의 초입일 테지만, 좋아하는 일을 손으로 하며 그럭저럭 여름을 잘 나볼 마음의 준비를 해본다.

2024-07-15

기억의 낚시, 망각의 낚시

“Some dance to remember, Some dance to forget” 밴드 Eagles(이글스)의 ‘Hotel California(호텔 캘리포니아)’의 한 소절이다. 어떤 춤은 기억하기 위해 추고, 또 어떤 춤은 잊기 위해 춘다니, 이렇게 시적인 노랫말이 또 있을까? 때때로 노래는 시보다 더 위대한 시가 된다. 물론 음악보다 더 위대한 음악이 되는 시도 있다. 나는 낚시할 때 가끔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리고 저 대목에서 가사를 바꿔 부른다. “Some fishing to remember, Some fishing to forget”이라고.기억하기 위해 하는 낚시가 있고, 잊기 위해 하는 낚시가 있다. 또 한 번 장마가 오고, 단풍이 들고, 첫눈이 내리고, 다시 꽃이 피고, 매미가 울고, 얼음이 얼고, 계절이 돌아오고 돌아올수록 사랑하던 이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나간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추억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삶이라는 지독한 경주는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게 우리를 채찍질한다. 그나마 낚시가 나로 하여금 그 각박한 트랙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낚시를 통해 나는 잠시라도 힘겨운 세상살이를 잊는다. 그게 잊기 위한 낚시다.복잡한 세상살이를 잊는 순간, 그동안 기억 구석에 방치됐던 풍경들이 하나 둘 뿌연 먼지를 털어낸다. 물론 낚시가 잘 되면 낚시에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할 여유도 없다. 입질은 없는데 석양은 환장하도록 아름답게 저물고, 찌는 말뚝인데 케미라이트 불빛이 강물 위를 은하수처럼 흐를 때가 문제다. 찌 대신 온갖 추억들이 올라오기 때문이다.“이제 젊은 시절 내가 사랑했던 거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제시마저도. 하지만 여전히 난 그들과 함께 있다. 물론 이제 너무 늙어 훌륭한 낚시꾼이 될 수는 없지만 난 지금도 이 강가에서 홀로 낚시를 한다. 이렇게 날이 저물어가는 계곡에 혼자 있을 때면 모든 존재가 내 영혼과 추억 속으로 스며든다. 빅블랙풋 강의 소리와 4박자의 리듬, 그리고 송어가 뛰어오를 거란 기대감… 결국 모든 것들이 하나로 합쳐진다. 흐르는 강물처럼.”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오는 주인공 노먼 맥클레인의 독백이다. 팔순의 노조사는 강물에 몸을 담근 채 낚시 매듭을 묶으며 젊은 시절 자신이 사랑했던 목사 아버지, 자애로운 어머니,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 폴, 마을 축제에서 만나 결혼해 일생을 함께 산 아내 제시를 추억한다. 모두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제는 사라진 사람들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다 사라지고 오직 강물만 남았다. 평생의 추억이 흐르는 빅블랙풋 강에서 낚시를 할 때면 강물 소리와 바람, 무지개송어 입질, 후회, 상처,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음성과 눈빛이 하나로 합쳐져 영혼 속으로 스며든다. 노인은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낚시를 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렇게 말했다.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고. 내가 살아 있는 한, 살아서 기억하는 한 내가 사랑했던 이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오직 잊기 위해 하는 낚시도 있다. 그런데 이 낚시는 정말 어렵다. 오래 사랑한 연인과 헤어지고서 그녀를 잊기 위해 뙤약볕 쏟아지는 갯바위에 올랐다. 발밑으로 파도가 부서지고, 거품 되어 사라지는 하얀 포말이 마치 부질없는 인연처럼 느껴졌다. 잊어야지, 잊어야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루어를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런데 젠장, 입질이라도 좀 있어야 잊을 게 아닌가? 깻잎만한 광어, 손바닥만 한 우럭조차 물지 않으니 빈 바늘에 딸려 오는 건 오직 그녀 얼굴뿐이었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 선명해진다. 낚시를 하면 마음이 정리되기는커녕 더 심란해진다.그래서 어느 시인은 “어느 날인가는 앞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오래 당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또 어떻게 저 별의 시간을 건너가게 되는지”(강경보, ‘우주 물고기’)라고 묻기도 한다.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결코 저 별로 건너가지 못하고 이 별에 머문다. 갯바위, 좌대, 갑판, 강물 속, 방파제가 낚시꾼의 별이다.

2024-07-15

등장인물을 사랑하기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를 사랑하는 일은 영화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인물의 감정을 다채롭게 보여줄 수 있으며 얼마간의 사건을 만들어내기 적격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마음이 변화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동시에 삶은 우리를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두 가지 상반된 진실이 섞이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고 결말을 알면서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유쾌한 함정에 빠지게 된다.사실 누구에게나 이런 식의 경험이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드라마틱한 일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아이들이 앙앙 우는 소리가 지구상에서 가장 괴로운 소음이라던 친구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놀랍도록 어른스럽고도 다정한 면모를 보여준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며 싸우던 단짝 친구와 결혼식을 올린 지인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내 경우엔 반려견을 들 수 있겠다. 내가 동물과 함께 산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었는데, 어느 순간 내 삶에 틈입한 이 존재는 나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강아지는 사랑하기에 너무 쉬운 존재가 아닌가. 동그란 코와 부드러운 털, 무엇보다 녀석은 먼저 마음을 주는 쪽에 가깝다. 온 힘을 다해 나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존재에게 냉담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곤히 잠든 강아지를 바라보고 있자면 이런 생각을 든다. 언젠가는 정말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게 정말 가능한 영역일까?최근 나는 의외의 인물을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했다. 미국 드라마 ‘오피스’를 보면서였다. 몇 번이나 보고 또 봤던 시리즈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건 아마 내가 일련의 사회생활을 경험하게 되면서 겪은 일들과 겹치는 지점이 많아서일 것이다. ‘오피스’는 던더 미플린이라는 제지회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화를 다룬다. 마치 실제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진행되는 것이 큰 특징인데 덕분에 카메라 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나 인물의 숨겨진 감정까지도 세세하게 드러나게 된다.나는 항상 지점장인 마이클 스콧이나 지점장 보조를 자처하는 드와이트 슈르트 같은 괴짜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로맨스를 담당하는 짐과 팸 커플의 서사도 꽤 좋아했다. 어쨌든 이들은 주인공 격에 속하고 카메라에 자주 비추어졌으니까. 이번에 다시 ‘오피스’를 시청하면서 의외의 인물이 내 마음 안에 들어왔으니, 다름 아닌 영업사원인 필리스다.필리스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후덕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다. 극 내부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기에 길게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하는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더 많았다. 일을 처리할 때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성차별적인 발언을 내뱉으면서도 자기 잘못을 알지 못하는 여자. 타인의 소문에 쉽게 키득거리고 가끔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짓궂게 구는 사람. 그러나 새롭게 포착된 모습은 조금 달랐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누구보다 행복해하며 타인을 위해 손수 뜨개질을 하는 마음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술에 취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모습마저 귀엽게 느껴졌으니.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실제로 그녀가 나의 삶에 끼어든대도 이런 애틋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필리스를 같은 동료를 직장에서 만난다면 나는 그녀의 오지랖 넓은 태도에 기가 질려버릴 것이다. 아주 괴로운 사람으로 여기면서 누군가가 그녀를 두고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면 단박에 고개를 저을 것이 분명하다.그러나 그것은 내가 타인의 일면을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가지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내가 든 카메라가 찍을 수 있는 건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어떤 사람이 되는지, 절친한 친구들과 나누는 농담이 얼마나 유쾌한지 나는 알지 못한다. 카메라 밖에서 짓는 눈물의 의미나 긴 시간 혼자만이 품고 있던 비밀 같은 것도 모른다. 등장인물의 뒷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엉켜있던 오해도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순간 조금씩 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래서일까. 요즘 나는 내 주변의 인물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그저 지나쳤던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친구에게 오랜만의 연락을 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식의 마음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반가운 일이다. 내 삶에 등장하는 인물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아주 쉽게 해피엔딩으로 가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2024-07-08

결혼은 미친 짓인가?

지난 주 경북매일에 실린 이병철 시인·평론가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글을 잘 읽었다. 그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자, 불과 몇 해 전까지 그의 의견에 동조하며 결혼 이후의 삶에 대해 상상조차 하려 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여러모로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며 읽어 내려갔다. 또한 아직 결혼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신혼으로서 그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이 글은 물론 결혼을 옹호하는 글이지만 결코 병철에게 결혼을 강권하는 글이 아니다. 그냥 이런 삶도 있으니 참고 정도 해 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적어보는 글이다.결혼은 미친 짓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부 맞는 말이다. 약간은 미쳐야 가능한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에 한 친구가 물었다. 결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인데, 정확히 말하면 돌이킬 수는 있지만 그러지 않기로 하는 것인데 그것을 감히 실행에 옮기는 용기는 어디서 나는 것이냐고. 나는 그냥 번지점프 같은 것이라 대답했다. 뛰어들어 보기 전에는 어떤 감각인지 알 수 없으니 눈 한 번 질끈 감고 생각하며 새로운 삶으로 뛰어드는 것이 결혼이라 생각한다고. 일시적으로 이성의 끈을 내려놓아야 이 어려운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이야기 해주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상대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그런 상대를 발견한 나의 안목에 대한 믿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큰마음을 먹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미치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미치건 조금은 미쳐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그래서 그 미친 결정에 대해 나는 후회하는가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물론 총각끼리 김삿갓 계곡에 가서 물놀이를 하는 모습과 시원하게 낮술을 하는 모습을 SNS를 통해 보며 부러움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결혼을 한 이후로 가정 밖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시간 나는 나대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집 앞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서 입에 무는 일, 집에 와서는 보드게임을 하며 아이스커피 타오기나 설거지 내기를 하는 일,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말도 안 되는 춤을 추며 깔깔대는 일, 우리에게 못나게 구는 사람들에 대해 시원하게 흉을 보는 일처럼 별 것도 아닌 것들이 전부 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소박하지만 신나는 일들이 된다.이런 일들은 꼭 결혼을 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배우자에게는 연인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나의 나약하거나 부족하거나 못난 모습들을 얼마든지 보여주고 그에 대해 위로도 받을 수 있다는 것. 가수 이적의 노랫말처럼 힘이 들 땐 눈물 흘릴 수가 있고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다는 것. 연인이란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는 님이지만, 배우자란 온전히 평생 내 편이 되기로 한 사람이기에.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결혼을 선택하고 나면 또 한 가지 선택지가 생긴다. 바로 출산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나의 아내는 만삭이고 며칠 내로 출산을 할 예정이다. 아직 육아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이를 갖고 낳기까지의 지난 10개월간 우리 부부가 느꼈던 경이와 감동은 한두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것이었다. 자식은 아기였던 시절 잘 자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평생의 효도를 다 한다고 했던가. 우리 아기 ‘코코’는 이미 어느 정도 효도를 해낸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이란 그래도 해 볼만 한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망설이는 마음도 이해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미혼, 비혼 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 중 28.7%가 결혼 자금 부족이고, 14.6%가 고용 상태 불안정이다. 12.8%를 차지하는 출산 및 양육 부담 역시 경제적인 부분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였을 때 56.1%정도가 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결혼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경제적인 문제는 단지 개인의 잘못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사회의 구조를 설계하고 유지, 보수해 나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그렇지만 마음 맞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처럼 결혼하기 어려운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황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한 번 시작해 볼 마음이 있는 사람끼리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이병철을 응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가 나의 결혼식에서 멋들어지게 축시를 읽어준 것처럼 말이다.

2024-07-08

불안을 다루는 법

디즈니·픽사의 대표작 ‘인사이드 아웃2’를 보고 왔다. 9년 만에 돌아온 2편 속 주인공 라일리는 13살이 되어 사춘기를 맞이한다. 행복을 위해 매일 바쁘게 머릿속 감정 컨트롤 본부를 운영하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5인방에 의해 본부는 평화롭게 흘러갔으나 라일리가 사춘기를 맞이한 어느 날부터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가 본부에 나타난다.새롭게 등장한 감정인 당황은 많은 사람들 앞에 발표를 할 때나 잘 보이고 싶은 친구들에게 이목이 집중될 때 얼굴이 빨개지며 나타난다. 따분은 어딘가 심드렁해져 스마트폰을 볼 때나 침대 위에 하루종일 누워 뒤굴 거릴 때에 등장하고, 부러움은 멋지게 꾸민 학교 선배들을 볼 때나 근사한 학교 시설을 둘러 볼때 나타난다. 2편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감정인 불안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여러 가지의 경우의 수를 세어본다. 불안은 라일리의 행동을 지나치게 제어하며 안정감을 돕고, 이를 지켜보며 불만에 휩싸인 기존 감정들은 새롭게 등장한 감정들과 싸움이 일어난다. 결국 기존 감정들이 본부에서 쫓겨나게 되고, 다시 본부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며 이야기는 진행된다.라일리의 의식의 흐름을 타고 흘러가다 보면 신념 저장소라 불리는 아주 깊은 곳에 다다른다. 의식의 끝인 신념 저장소는 경험으로 만들어진 감정 구슬이 자리하고 있으며, 여기서 중요한 감정 구슬은 신념이라는 끈이 된다. 신념의 끈은 라일리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신조가 되어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잠재의식을 지니게 한다.이러한 잠재의식은 결국 자아가 되고, 라일리를 움직이게 한다. 사춘기를 맞이한 라일리는 변화를 앞둔 성장기의 불안감, 그리고 정체성 혼란이 찾아온다. 타인에 의해 자신의 선호도가 바뀌고 기분 또한 타인에 의해 제어된다. 사춘기와 함께 나타난 불안이는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의 정도가 점점 심해져만 가고 결국 라일리의 ‘나는 좋은 사람이야’라는 신념과는 대비되게 절친이었던 친구들을 외면하고, 거짓말과 그릇된 행동을 하며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여태 자신의 신념이었던 ‘나는 좋은 사람이야’가 무너지게 되고, 내면의 모든 감정과 신념이 한꺼번에 뒤엉키고 폭발하며 자아를 잃게 된다.자아가 파괴된 라일리는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괴로워한다. 자신 스스로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 불안이라는 감정이 자신의 신념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라일리를 제어하던 불안이도 길을 잃는다. 불안이는 오로지 라일리를 나쁜 환경과 선택에서 지켜주고 싶었으나, 지나친 욕심 탓에 라일리의 자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본부로 돌아온 기쁨이는 불안이를 안아주며 이 모든 걸 다시 돌려보자고 말한다. 때마침 패닉에 빠져 있던 라일리에게 오랜 친구들이 다가와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 그 순간 라일리는 자신의 혼란스러운 환경과 감정을 받아들인다. 그간 멀리 하려던 불안이란 감정이 받아들여질 때, 불안을 벗어날 수 있고 불안은 금새 기쁨과 슬픔, 우울, 소심, 부끄러움 등 여러 감점을 뒤섞인 페르소나의 형태를 보여주며 무너졌던 라일리의 자아가 회복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 후 라일리에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다. 그녀의 자아는 ‘나는 선한 사람’이지만, ‘때로는 부족한 사람’일 수도 있고 ‘때로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 변한다. 또한 감정은 자아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줄 뿐, 결국 자아와 신념을 만들어가는 것은 라일리 자신임을 인정하고 깨닫고 나서야 사춘기를 넘어 어른으로 성장해 간다.신념에 의해 인간은 움직이고 살아간다.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신념 한 가지가 있다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행동을 하고 노력을 한다. 하지만 나는 어딘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신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면 매사에 자신 없는 행동을 보이거나 금방 불안과 우울에 휩싸여 무엇이든 회피 행동을 보이고 만다. 라일리는 기쁨과 슬픔, 불안 등의 여러 감정 중 그 어떤 것 하나도 내세우지 않고, 여러 감정이 뒤섞인 신념을 가지며, 하나의 자아가 아닌 다채로운 자아를 지닌 사람으로 변하는 성장을 택한다.‘인사이드 아웃 2’에서 불안이는 라일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몰아세운다. 그 때문에 커다란 위기가 왔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현재엔 지나치게 불안감이 들 때면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불안을 잠재운다. 여태껏 나를 몰아세웠던 건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섰던 불안이었다는 점과 라일리처럼 불안은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만 존재한단 점에서, 불안을 단순히 다루는 법에 대해 오래토록 생각하게 했다.

2024-07-01

결혼은 미친 짓이다

1985년생 남성 중 절반이 미혼이라고 한다. 1984년생인 나는 또래 열 명 중 아직 장가 못 간 네댓 가운데 하나니 서러울 것 없다. 주변에서 여자 좀 만나라고 한다. 그러면 대답한다. 만나고 싶어도 여자가 없다고. 말도 안 된다며 너스레 떨지 말라고들 하는데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여아와 남아의 자연적 성비는 100대 104~107 정도다. 한국에서는 이 성비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심각하게 한쪽으로만 치우쳤다. 남아선호사상 때문이다.초음파로 태아의 성별을 감식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1990년 100대 116.5까지 성비 불균형이 치솟더니 급기야 1994년에는 셋째 아이 이상 성비가 206.9에 달했다고 한다. 딸 하나 태어날 때 아들 둘이 태어난 셈이다.30년에 걸친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오늘날 한국은 합계 출산율 0.66명의 초저출생 사회가 됐다. 나 같이 훤칠한 쾌남마저 여태 짝을 못 찾은 걸 보면 과연 성비 불균형의 영향이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건 경력 단절, 양육비 부담, 주거 불안, 돌봄 시설 부족 등 사회 제반의 문제다. 젊은 남녀가 결혼과 출산에 회의적인 것은 서로 싫어서가 아니라 서로 좋아 합쳤더니 “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황인숙, ‘움찔, 아찔’)어 버리는 사회 현실 탓이다.엊그제 죽마고우와 영월 김삿갓계곡에 갔다 왔다. 1984년생 노총각 둘이서 물장구치고 백숙 삶아먹고 민물장어와 한우 갈비꽃살 구워먹고 산메기 잡아 매운탕 끓여먹고 진탕 술 마시고는 한 침대에 등 돌리고 누워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코골며 잤다. 그렇게 2박3일 잘 놀았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계곡물에 발 담그고 낮술 먹다가 “애인이랑 왔으면 재미없었을 것”이라는 의견 일치를 이뤘다.결혼을 생각할 때면 친구나 나나 막막해진다. 막막하고 자신 없는 걸 할 바에야 그냥 이렇게 둘이 놀러나 다니자며 낮술에 취한 채 진시몬의 ‘보약 같은 친구’를 합창했다. “자식보다 자네가 좋고 돈보다 자네가 좋아…” 통계화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라는 게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의 미혼 사유는 구체화되며 가정을 꾸리지 않겠다는 의지 또한 굳건해진다. 내가 결혼하지 않는(이라고 쓰지만 사실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첫째, 남들처럼 살 자신이 없다. 이상과 현실에 괴리가 있다지만 주변 결혼한 이들을 보면 전부 이상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화려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다들 수면 아래서는 처절한 물갈퀴질 중일까? 나는 아무리 해도 저렇게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발버둥 쳐봐야 안 될 것 같고, 근사하게 살자고 발버둥 치기도 싫다. 남들처럼 살 자신이 없다는 말을 “남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로 고쳐본다. 이 가치관이 비슷한 상대를 만나면 좋겠지만 100대 116.5다. 되겠나?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둘째, 아이에 대한 애착이 걱정된다. 교권 간섭, 음식점 추태, 차량 뒤에 붙인 ‘까칠한 아이가 타고 있어요’ 문구 따위 아이에 대한 지나친 애착과 과보호, 이른바 ‘내 새끼 지상주의’의 사례들을 보며 혀를 차다가도 ‘내가 아빠가 되면 더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에서, 이태원에서, 군대에서 자식들이 죽었다. 음주운전에 관대하고 아동 성범죄에 자비를 베풀며 밀양 여중생 성폭행 가해자들이 잘 사는 나라에서 어떻게 아이를 키울까? 고슴도치 부모가 되는 건 당연하다. 나는 아이 걱정에 밤잠 설치고 늘 어딘가 곤두선 채로 살게 될까봐, 그리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자식에게 정작 뭐 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할까봐 결혼이 생경하기만 하다.셋째, 혼자서 충분히 행복하다! 이 행복의 울타리 안에 누가 들어오면 함께 더 행복할까? 결혼한 사람들은 왜 결혼하지 말라고 하나. 왜 혼자 살라고 하나. 자기들은 결혼했으면서, 웃긴다 정말. 왜 연예인들은 방송에 나오기만 하면 결혼 생활을 푸념하며 배우자 험담을 하나. 결혼한 친구들 전부 이구동성 “네가 부럽다”고 말한다. 그럴 거면 대체 왜 했느냔 말이다. 내밀한 사정들은 모르지만 어쨌든 결혼한 사람들의 말과 글과 눈물과 한숨과 자기비하와 방황과 가출과 종교에 귀의와 이혼소송 등을 종합해보면 결혼은 고통이자 만병의 근원이며 악의 축인 동시에 생지옥이다.얼마 전 나는 꿈에 그리던 낚시용 레저보트를 장만했다. 한 선배가 말했다. “이제 보트 같이 탈 여자만 있으면 되겠다”라고. 내가 답했다. “보트를 샀다는 건 평생 독신선언 아니겠습니까?”

2024-07-01

분노의 국가, 분노의 계절

날이 덥다. 그래서 주차 문제로 시비가 있었다. 날이 더운 것과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은 것 사이에 인과관계는 성립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가능하다. 날이 더우면 불쾌지수가 올라가고 자기 안에 내재된 어떠한 화가 치밀어 오를 수 있다. 그것을 참아내는 것은 이성인데 가끔 이성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성미를 가진 사람이 지나치게 높은 기온에 놓이게 되면 이성의 만류를 뿌리치고 덜컥 화부터 내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공동주택에 유난히 그런 사람이 한 명 살고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주민 단체 대화방에서도 공개적으로 누군가에게 마구 화를 쏟아내더니, 오늘은 주차를 다시 해달라는 나의 요청에 분노를 쏟아내었다. 누가 주차를 잘했고 잘 못했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같은 말이라도 화를 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자신의 불쾌함을 타인에게 무례하게 쏟아내는 태도이다. 장담컨대 그의 화의 원인이 전적으로 나였을 리가 없다. 일상에 내재된 어떤 화가 분명 그의 명치 언저리에서 들끓고 있었을 것이다.특정인에게 이러한 문제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분노가 지나치게 짙게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이미 화가 나 있고, 누군가 자신에게 불을 붙여주기만을 기다렸다가 뻥 하고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미처 안내문을 보지 못하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의 문고리를 붙잡았다고 상상해보자. 관계자가 달려와서 정중하게 ‘거기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라고 말하는 상황보다는 ‘어이! 거기 써놓은 것 안보여요? 출입금지라고요!’ 하며 성내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영화관에서 누군가의 휴대폰이 빛날 때도 ‘휴대폰 사용 좀 자제 부탁합니다.’ 하면 해결 될 문제를 화로 해결하는 경우를 빈번히 볼 수 있다. 그런 명백한 실수나 실책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분노는 너무나도 쉽게 표출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던가. 실제로 옷깃이 스쳤다는 이유로 서로 눈을 흘기는 상황, 아니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뭘 보냐며 성을 내는 상황이 우리 주변에는 분명히 존재한다.인터넷 뉴스의 댓글 창을 봐도 온통 분노 투성이. 물론 화가 날 만한 기사에 분노의 댓글이 달리는 것이야 자연스런 일이겠지만 나와 생각이 다른 이를 만났을 때, 내가 좋아하지 않는 연예인이 땅을 사고 집을 샀을 때, 응원하던 스포츠 팀이 원하는 만큼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할 때,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스포츠 팀이 좋은 성적을 낼 때, 그냥 뭔가 마음에 안 들 때 사람들은 손가락 끝으로 온갖 분노를 터뜨려대곤 한다.나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나라의 현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가경제, 기업경제, 가정경제 어느 하나 잘 풀리고 있는 것이 없는 나라라는 것은 이미 온 국민이 짜증거리 하나를 끌어안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이 술술 풀리고 좋은 일만 가득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분명히 조금은 더 마음의 여유를 쓸 수 있고, 너그러운 태도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적인 우환이라 할 수 있는 경기침체 속의 우리 국민들의 여건상 모두의 가슴 속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도 할 수 있고 이해도 할 수 있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노를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조금 답답하고 짜증나더라도 이성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를 줄도 아는 존재들이다. 그게 불가능한 상태를 ‘분노조절장애’라고 한다. 자신이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사실은 선택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일 뿐일 것이라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면 배우 마동석 씨나 드웨인 존슨 같은 사람 앞에서도 조절되지 않는 분노여야 진정한 분노조절장애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자 앞에서는 조절되고 약자 앞에서는 조절되지 않는 분노는 분노조절장애의 증상이 아니라 단지 추태일 뿐이다.다시 날씨 이야기로 돌아와서, 참 무더운 요즘인데 앞으로는 장마와 함께 습도도 올라갈 것이라고 한다. 올 여름은 지난 어떤 여름보다 더울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들의 불쾌지수는 더 올라갈 것이고 더 많은 분노가 펑펑 터져 나올 것이다. 그 분노로 다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꼭 그런 극단적 상황에 놓이지 않더라도 불필요한 분노가 우리의 삶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터질 것 같지만 터뜨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사실 그런 존재들이다.

2024-06-24

독서의 기쁨과 슬픔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일종의 안부 인사라 할 수 있겠으나 가끔은 난감하다. 뭔가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 같아서다. ‘그 작가의 작품을 읽어봤느냐’는 질문에 ‘당연하지’라는 답을 내놓고 싶다는 허영심 때문에 괴로울 때도 있다. 간단한 문제를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는가 싶지만, 이를 통해 내밀한 부분을 들키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설령 질문한 상대는 별생각 없더라도 말이다.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요즘의 나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고 있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고전을 읽는 건 어쩐지 멋이 없어 보인다. 특히 톨스토이 같은 작가가 그렇다. 크롭티와 마이크로쇼츠가 유행하는 와중에 체크무늬 셔츠를 목 끝까지 잠그고 홍대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랄까.한국 사회는 트렌드에 민감하다. 동시대적 감각을 기민하게 따라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가올 유행을 분석하고 한발 앞서 가는 것을 훌륭한 역량으로 평가한다. 그것은 독서의 영역도 마찬가지라서 어떤 상을 받았다든가 화제의 인물이 적극 추천했다는 작품을 읽지 않으면 어떤 흐름에 뒤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지만, 최근엔 그다지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고전 작품을 꺼내 드는 빈도가 잦아진다.‘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의 러시아를 무대로 삼기 때문에 기본적인 역사 지식이 필요하다. 덕분에 나는 그와 관련된 역사 서적부터 찾아 읽었다. 본 여행을 위한 준비 과정이 꽤 길었으나 지평을 넓히는 것 또한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이윽고 페이지를 펼치자 톨스토이다운 유려한 진행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인물의 이름이 헷갈려 스토리 라인을 놓치는 그야말로 고전적인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2024년에 사는 문명인답게 유튜브를 켜고 톨스토이를 검색했다. ‘10분 안에 톨스토이 끝내기’ 혹은 ‘톨스토이 작품 읽은 척하는 법’과 같은 영상이 우르르 쏟아졌다. 벽돌처럼 두꺼운 4권의 책을 완독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유튜브에선 클릭 한 번으로 작품의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 체험을 대리하는 것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독서의 영역까지 넘어오다니.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나는 같은 책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는 것을 좋아한다. ‘파우스트’와 ‘싯다르타’는 내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읽는다. 몇 번을 읽었는지 손가락으로 꼽지 못할 정도다.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이해하고 싶거든 꺼낸다. 특히 레빈의 풀베기 장면을 자주 찾아보는데 읽을 때마다 늘 비슷한 감동이 밀려온다. 나는 왜 이런 식의 독서를 하는 것일까. 어쩌면 두뇌 회전이 느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명석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해 에둘러 돌아가고 하나의 현상을 미련할 정도로 진득하게 바라본다.누군가에겐 굉장한 시간 낭비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러한 독서 습관을 교정할 생각이 없다. 같은 텍스트를 반복하면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불편함이 없고 좋은 문장을 찬찬히 곱씹을 수 있다. 어제는 분노로 읽혔던 것이 오늘은 슬픔으로 읽히기도 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무엇보다 작가가 자신만의 삶을 살며 구축한 생각이 내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몸을 직접 통과하지 않은 것들은 쉽게 휘발되기 마련이다. 어떤 슬픔을 직접 겪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말이다.독서는 대단할 필요가 없는 활동이다. 글자를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특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독서는 쇼츠를 넘기는 것보다 지루하다. 깨알 같은 글자 안에서 인생의 답을 찾아보려 노력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 순간이 더 많다.그런 면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독서에 접근하는 순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읽는 것을 통해 뭔가를 체화했다면, 그것은 독서 이후에 생기는 것이지 이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낯선 곳을 여행하며 생겨나는 일들을 떠올려도 좋겠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좌절과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기쁨 같은 것들. 직접 경험하면서 생기는 실감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은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며 타인의 침입이 불가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일 것이다.

2024-06-24

취해라 그리고 걸어라

“취해라,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 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무엇에 취하려는가? 포도주든, 시든, 덕이든, 그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니 어쨌든 취해라. (…) 이제 취할 시간이다. 시간에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쉬지 말고 취해라.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샤를 보들레르, ‘취해라’)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보들레르는 현대시의 시초로 불린다. 1830년대에 프랑스 정부는 포도주에 대한 새로운 과세법을 제정했는데, 이 과세는 도시민으로 하여금 값싼 포도주를 찾아 시외에 자리 잡은 상점으로 가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파는 세금 없는 포도주는 노동자와 하층민,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쾌락이었다. 보들레르에게도 술은 정신을 위안할 수 있는 기쁨이었는데, 대표 시집 ‘악의 꽃’에서 그는 ‘술의 넋’, ‘넝마주이들의 술’, ‘살인자의 술’, ‘외로운 자의 술’, ‘연인들의 술’ 등 술 연작을 통해 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보들레르는 포도주 뿐 아니라 흑맥주를 애호했다고 한다. 보들레르는 현대인들에게 “취해라”라고 말한다. 이는 무분별한 알콜릭이나 쾌락 추구, 방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파리는 전근대의 농경사회에서 근대 도시문명으로 전환한 시기다. 불문학자이자 평론가인 고 황현산 선생은 “농경사회에서 시간에 대해 얘기할 때 물처럼 흐른다고 표현하는데요. 보들레르한테 시간은 물 흐르듯, 바람 불어오듯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1분, 1초 분할된 시간, 시간 그 자체가 물체화 되어 계속해서 쫓아오고 있는, 이런 시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압박이 사라지면 마음이 편안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시간의 압박이 사라지면 권태 속에 들어가게 되죠. 바로 이게 산업사회의 시간, 자본주의 사회의 시간입니다.”라고 설명했다.보들레르가 취할 것을 권면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현대적 시간의 중력에서 벗어나라는 것!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고 초조함과 신경쇠약, 권태와 우울감으로 몰고 가는 도시적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그것이 술이든 아니면 음악이든 무엇이든 간에 몰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보들레르 문학과 근대성의 상관관계를 평생 연구한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위고가 현대 서사시의 영웅으로 대중을 예찬하는 순간, 보들레르는 영웅의 피난처를 대도시의 대중 속에서 찾고 있었다. 시민으로서 위고는 군중 속에 섞여 든다. 보들레르는 영웅으로서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다”라고.벤야민은 빅토르 위고의 작품들을 대중과 함께 호흡한 ‘민중문학’으로 읽은 반면 보들레르의 문학은 대중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홀로 솟아오르려는 영웅적 행위로 보았다. 보들레르가 대도시의 군중에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기 위해 채택한 방법은 바로 걷기다. 보들레르는 술만큼이나 걷는 걸 좋아한 ‘거리산보객(flanuer)’이었다. 산보객이란 대도시의 거리 곳곳을 정처 없이 거니는 사람을 뜻한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목적을 가지고 분주히 움직이는 군중과 완전히 대비된다. 일상은 지루하고, 현실원칙의 중력은 무겁기만 하다. 1분, 1초 단위로 등 뒤에서 달려드는 현대적 시간에 쫓기면서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만 간다. 현실에만 충실히 복종하면 강박주의자가 된다. 누군가와 교류하는 것이 피곤해지고, 타인에게 엄격해지기만 한다. 그렇게 점점 혐오와 갈등, 분리의 감각에 익숙해진다. 일상의 무게를 벗어나려면 꿈을 꿔야 한다. 꿈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현실의 속박이 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마음껏 취하고 걸어야 한다.취하는 사람은, 취해서 걷는 사람은 꿈의 파랑 속에서, 환상의 리듬 속에서 생을 긍정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보며, 타인들과 넉넉히 어울리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평범한 도시인으로 살 때, 시간에 쫓기며 압박당하는 군중의 한 사람으로 살 때 도시는 각박하고 권태로운 곳이지만, 무언가에 취해서 산보객으로 살 때 도시는 감동과 도취, 새로움으로 가득한 역동적 세계가 된다. 2024년을 사는 우리에게 1800년대 보들레르가 말한다. “취해라 그리고 걸어라!”

2024-06-17

새로운 시작 앞에서

오랜 기간 골치 아팠던 문제에서 드디어 벗어났다. 이럴 때 생각나는 두터운 책 한 권이 있다. 2년 만에 펼쳐들어 3번째 완독을 마친 소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다.스토너는 독서에도 시차가 있음을 알려준 책이다.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약 2년 전, 그 전에는 약 4년 전에 읽었다. 처음 읽은 스토너는 그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심심한 인간의 생애가 있는 건지? 특별한 사건 없이 밋밋하게 흘러가는 스토너의 생애 이야기를 몇 장 읽고 덮어두었다가 다시금 꺼내어 꾸역꾸역 읽어 내려갔었다. 어쩐지 심심한 그 감각이 계속 맴돌다가 2년이 지난 후, 두 번째로 꺼내 읽은 스토너는 어쩐지 새로웠다. 너무나 지루했던 그의 인생에서도 사건이라는 흐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중략)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략)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스토너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단순한 인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잊히는, 지극히 존재감 없는 사람.스토너는 1891년 미주리주 중부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고작 스물다섯 살, 어머니는 스무 살이었다. 스토너에게 부모는 늘 늙은 사람이었고, 고된 노동으로 삶을 버티고 인내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떠한 열망도 없이 살아가던 스토너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별 생각 없이 대학에 입학하지만 그 이후에도 어떠한 즐거움이나 괴로움도 없이, 삶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순간이라 여기며 지낸다.얼마 지나지 않아 스토너는 이디스와의 결혼을 하지만, 곧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디스는 계속해서 아픈 몸, 무기력함, 목적 없는 생의 지루함 때문에 자신의 딸아이인 그레이스를 방치한다. 대부분의 육아와 집안일을 스토너가 맡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부성애를 가지게 된다.스토너와 그레이스간의 사이가 친밀해질수록, 이디스는 질투에 사로잡히면서 히스테릭함이 더욱 극에 달한다. 그러나 스토너는 관조와 무조건적인 이해로만 그녀를 대하고 그녀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 폭풍 같은 현실 속에서 세 인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슬픔의 굴레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슬픔을 부정하거나 떠미지 않고, 괴로움을 안고 버티며 모든 것을 인내 한다. 처음에는 이 세 인물이 서로 원치 않는 방향으로 향하는 결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느릿느릿 문장을 읽다보면 세 인물은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당시 어떠한 시대적 혼란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모든 것을 인내하는 스토너로 보이지만, 그는 강단에 서서 문학을 가르칠 때만큼은 열정적이었고 자신의 수업을 듣던 ‘캐서린’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적절한 관계를 대학 내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결국, 그들은 사랑을 포기하게 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스토너는 캐서린과의 이별 이후 빠른 속도로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그는 죽음 끝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 결혼 생활, 캐서린과의 이별을 겪고 죽음을 앞둔 스토너. 얼핏 보면 그의 삶은 실패로 보일 수 있으나 실은 그의 생은 너무나 평범하다는 걸 알 수 있다.스토너의 죽음은 인간의 삶은 ‘성공’ 또는 ‘실패’라는 결과보다는 그가 얼마나 생을 살아보려 애썼는지, 어떤 시도를 했는지가 더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그는 죽음 앞에 서서 평온하다. 삶을 인내했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하루를 마무리 하며 나의 일상을 돌아볼 때에 나의 생은 왜 이렇게 지루하고 건조해 보이는 건지 고민될 때가 있다. 하지만 이 단조로움 또한 생의 불행과 운을 온 힘으로 버텨내는 안간힘임이 내재되어 있음을 안다. 성공 또는 실패라는 결과보다는 ‘삶을 살아보려는 시도’, 스토너라는 한 사람의 진득한 생애는 내게 새로운 시도의 힘을 갖게 한다.

2024-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