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눅히 마음이 무성해지는 여름, 비가 계속 내리는 날씨 탓에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는다면, 저자 무루의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를 꺼내게 된다. 이 책은 생의 충직함, 성실함, 유연함, 지혜로움을 말끔히 엮어 만든, 깨끗한 옷 같은 에세이다. 올곧게 객관화되어 있는 사람의 다정하고도 신비로운 이야기로, 묘하고도 신비로운 활력을 준달까.스무 살 무렵 늦은 성장통을 겪었다는 저자 무루(박서영)는 세상에 이해받지 못하는 소외감으로 그림책을 읽었다. 그림책에서 기쁨과 슬픔의 여러 이름을 발견하며 세상의 부조리와 간극, 소외되는 대상과 존재를 인지한다.비혼, 여성, 집사, 프리랜서, 채식주의자. 이토록 확고하게 자신을 나열함과 동시에 낯선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가보지 않은 길로 가기 위해 용기를 낸다. ‘몸의 고립이 마음의 고립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는 절박한 마음’으로 세상 밖을 걷고 머무른다. 외로운 날들이 모두 지나간 어느 때에, 그녀는 관계에 대해 ‘가끔은 한 사람의 손을 잡거나 나란히 걸을 수 있겠지만, 기왕이면 혼자서도 잘 걷고, 두 발로 씩씩하게 걷고 싶다’고 말한다.자신의 결정이 어디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책으로 도망쳤지만, 결국 그녀는 책 안에서 보고, 듣고, 사유한 것으로 자신을 이루어 타인을 공감하고 포용한다. 세상의 틈마다 그어 놓은 안과 밖의 경계는 극명하게 나누어져 있고, 가장자리의 존재는 쉽게 배척된다. 하지만 저자는 사이에 놓인 경계를 허무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바로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우리가 믿고, 사랑하고, 그래서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할 것들은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이다.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은 것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믿는 마음이란 실체와 효용, 현실과 확신을 넘어서는 지점에 있다. 현실에서조차 세상은 언제나 한 사람의 세계를 거뜬히 넘어서기 때문이다. 유연한 사고와 타인에 대한 공감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질 터다.”저자는 그림책을 읽으며 자신의 과오를 인지하며 한계를 정하기도 하고, 계획과 좋은 습관을 세우기도 한다. 이러한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자신을 쌓는 어른이라니. 어떤 직업을 삼고,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 낼지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지 그렇게 어떤 노인이 되고 싶은지 떠올려 보게 된다. 저자는 ‘작은 기쁨을 풍요롭게 누리는 사람’,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리듬을 가진 노래 같은 삶을 사는 사람’, ‘농부의 손처럼 투박하지만 다정한 사람’ 등, 자신의 모습을 또렷하게 그려내며 먼 미래의 얼굴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앞자리가 바뀐 나이 때문일까. 나는 올해 유독 가만히 있어도 옅게 보이는 입주름이나 안으로 말린 어깨의 모양, 여유로워 보이는 걸음걸이나 손짓 등에 신경 쓰고 있다. 동시에 10년, 20년 뒤 어떤 모습일지 자주 상상해본다. 그럴 때마다 어쩐지 아득한 기분이 든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더 오랜 세월이 지나면 지금처럼 뛰어다닐 수 없을 테고,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지겠지. 몸과 같이 기분마저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없다면? 생각은 꼬리를 물어 어느새 울적해진 노년의 내가 그려지는 것이다.하지만 이 책을 다시금 꺼내어 읽다 보면 힘없이 늙은 몸을 가진 내가 아닌. 여유를 가진 채 그토록 되고 싶었던 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된다. 당연히 내 옆에 자리했던 모든 것들을 한 번 씩 돌아보며 감사할 줄 아는 삶, 나와 타인의 건강한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빌어주는 삶, 진실로 거짓을 가려내며 거짓 없이 사랑하는 삶 등등. 깊은 내면의 모습을 그러다보면 놀랍게도 미래를 기대하며 기다려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일렁이는 내면을 가꾸어온 섬세한 손길이 책의 마지막 부분까지 묻어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조금 더 구체적인 한 사람이 펼쳐진다. 타인의 변덕에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 많은 사람. 요상하고 재미있는 유행어를 많이 알아 젊은이들과도 유쾌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 차와 주전자 색색의 실과 뜨개바늘에 둘러싸여 평온하고도 고요한 할머니의 모습. 나의 먼 미래를 웃으며 상상하는 자유로움은 이토록 신비롭고 견고하며 근사하다.세 시간 만에 단숨에 읽어버린 책은 이제 등을 내보이며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다. 이럴 때마다 무언가 듬직하게 기댈 수 있는 단단한 벽을 얻은 것만 같아 마음이 평온해진다. 괴괴한 날씨에 영향을 받아 변덕스런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방법은 이렇게 나와 전혀 다른 타인의 세계를 잠시 엿보는 것이 제일 좋다. 책은 그런 걸 늘 가능하게 한다.
2024-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