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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발과 오른발의 마음으로

등록일 2024-12-30 18:45 게재일 2024-12-3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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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늘 꽃밭만 펼쳐질 수 없는 것이고... /언스플래쉬

초조함과 불안에게서 쫓기고 있다면 주로 가장 먼저 택하는 행위는 명상이다. 하지만 유독 초조함이 많이 발현되는 날엔 명상에 빠져드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그럴 때 내가 가장 택하는 방법은 산책하며 걷기다.

산책은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천천히 내딛으며 숨을 천천히 고른다. 딛는 발의 뿌리가 지구의 땅 속 깊이 존재하는 내핵까지 뻗는다는 생각으로 느릿하게 나아간다. 왼발 다음은 오른발 그리고 또다시 왼발, 그렇게 천천히 내딛다보면 나는 어느새 내가 지정해둔 산책로까지 무사히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놀랍도록 머릿속에서 내내 괴롭히던 무수한 잡념들이 조금은 잠잠해진 채로 얌전해져 있는 걸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도착지의 방향이나 걷는 시간, 도착을 해야 한다는 어떠한 목적 보다는 그저 발을 내딛는 방향 그리고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호흡이다. 내 몸이 어딘가 한 곳에 긴장이 집중되어 있는 건 아닌지, 혹시 불필요하게 고인 몸의 불편함을 호흡과 의지를 통해 풀어볼 수 있는지 생각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매번 밖에 나가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땐 방 한가운데서 좁은 보폭으로 조금씩 발을 떼어 걷는 방법도 있고, 이마저도 어려운 컨디션이라면 앉은 상태에서 발을 지면에서 올렸다 내렸다하며 명상에 빠지는 방법도 있다.

가만히 정좌로 ‘무’에 다다르는 명상에 빠지는 것이 어렵다면 이렇게 걷는 행위를 통해 발의 감각을 느끼고 집중하며 현재에 머무르는 방법을 추천한다.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 도와주고 해결해줄 수 없는 부분이니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 걷는 행위를 통해 기분을 환기시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도착지까지 무사히 걸어온 작은 성취감마저 느끼면서 조금씩 늪을 벗어나 다음으로 펼쳐질 꽃밭으로 향한다.

며칠 전 받은 심리 상담에서는 인생은 늘 꽃밭만 펼쳐질 수는 없는 것이라며, 삶은 늪과 꽃밭으로 번갈아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 들었다. 잡념과 불안에서 발버둥 칠수록 늪에 점점 스스로를 고립시키지만 머지않아 펼쳐질 꽃밭이 있음을 기억하고 힘을 뺀다면 늪에서 빠져나올 만한 힘을 얻게 된다.

그렇게 조금씩 차분히 몸을 움직이다보면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고 선물처럼 꽃밭이 펼쳐진다. 삶은 당연히 그런 것이라고, 늪이 또 등장하여 허무하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든다 한들 삶이 내어주는 꽃밭을 그려야 하는 것이라고.

한 해의 마지막에 서서 올 해 나는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다시금 돌아보니, 좋았던 순간과 좋지 않았던 순간들이 정확히 반반씩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평온하게 펼쳐진 꽃밭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건 어떻게든 늪에서 빠져 나오려는 온갖 안간힘의 흔적이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부당한 것에 대한 혼란스러움, 선택지 앞에서의 주저함, 포기라는 선택, 잠을 오랫동안 자고, 다시금 일어서려는 도약, 마음을 열고 나를 다시금 살펴본 용기 등.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나를 방치시키지 않으려는 발버둥을 볼 수 있었고 그 흔적들이 짙고 거친 흔적으로 여기저기 남아 있음을, 그리고 그 장면은 꽤나 묵직하고 뭉클하게 다가왔다.

한 해를 살아온 나를 돌아보는 것은 실은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고 은근히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그래도 내가 지나온 늪과 꽃밭의 행적을 바라볼수록 나는 앞으로 더 늪을 헤쳐 나올 수 있는 힘을, 그리고 꽃밭을 마주했을 때 기쁨과 환희를 더욱 잘 누리며 더욱 잘 살아갈 수 있음을 믿는다.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가며 골고루 내딛는 마음, 삶의 행운과 불운을 잘 맞이하기 위해 다가오는 2025년에도 균형을 잘 잡아본다.

생각해보니 정말 다행인 점은 늪지가 곧장 시작되거나 기약 없이 계속 된다한들 나는 계속해서 나아갈 힘이 조금 생겼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온 몸의 힘을 빼고 천천히 왼발과 오른발의 마음을 살피는 것, 내년 내가 가장 잘 해내고 싶은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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