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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받는 일

등록일 2024-11-25 18:30 게재일 2024-11-2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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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다. /언스플래쉬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어시장 근처다. 어쩌다 그곳에 살게 되었어요?

나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의아하다는 듯 묻는데 구구절절 설명하기가 어려워 부모님 집이에요, 하고 얼버무린다. 장성한 청년이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하기가 참 머쓱하지만 그것이 또 사실이기도 하여서 머리를 긁적이는 순간이 잦다.

온전히 자립하게 되었다는 감각은 대체 언제 느끼게 될까? 애초에 그런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어쨌든 지금의 나로서는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처지다. 이곳에 관해 말해 보자면, 펄떡거리는 생명력으로 가득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밖을 나서면 관광객들의 흥성거림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고 주말에는 지하철역에서 파도처럼 밀려 나오는 인파를 마주하기 일쑤다.

여기서 살며 두드러지게 발달한 감각은 취객을 알아보는 능력이다. 적당히들 마시고 들어가세요, 하는 눈짓으로 맨정신이 아닌 사람들을 요령껏 피해 가는 재주가 꽤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이러한 동네의 분위기가 달갑지만은 않다. 내가 살고 싶은 동네는 느리고 조용한 곳이다. 인적이 드물수록 좋다.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는 일은 내게 항상 큰 부담이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지금의 동네는 어딘지 모르게 나와 어긋나 있다.

언제부터일까. 나는 이곳에 묘한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시장의 상인에게서 기인한 것이다. 작업실을 가기 위해선 시장을 꼭 지나쳐야 하는데, 자연스레 그들을 자세히 바라볼 기회가 생겼다. 거기에 더해서 내가 다니는 사우나에서도 자주 마주치는데, 그들이 서로 나누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주 가까운 사람을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요즘 그들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는 ‘김장’이다. 절인 배추가 얼마고 양념에 무엇을 넣으면 맛있다는 정보, 그럼 다음 주에 내가 언니네로 갈게, 하는 대화 같은 것을 사우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훔쳐 들었다.

얼마 전, 시장을 지나면서 매대 뒤편에 커다란 대야를 놓고 네댓 명이 둘러앉아 김장을 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혹시 사우나에서 본 사람이 이 사람인가 저 사람인가 하는데 “왜요? 뭐 줄까?”하고 여자 중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아니에요, 하는 내 등 뒤로 “우리 여기 집 도와주는 거야.”하며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내게 상황을 설명한다기보다 저들끼리 웃고 떠들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도와주긴 뭘 도와줘, 염병!” 그 말이 끝나자마자 웃음이 와르르 쏟아졌다.

바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이들을 뒤로한 채 시장을 빠져나왔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활기가 늘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또 막상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킥킥 웃었다. 이런 식의 우스갯소리를 목격하고 정색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여자들의 삿된 소리만큼 재미있는 것은 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최근이다. 그 어느 때보다 집 안에 갇혀 혼자 있는 시간이 가장 편안하다.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면 끙끙 앓으며 악몽까지 꿀 정도다. 내가 실수를 한 것이 아닐까. 거기서 그 말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끝이 없다.

무엇보다 타인과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 괴롭다. ‘나를 도와줄 수 있나요?’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일 처리를 못한 날도 있고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다가 엉뚱한 결과를 낳은 적도 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생각해 보면 용기를 그러모아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을 때 명쾌하게 해결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나는 나의 무능을 들키고 싶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손을 내미는 일을 자꾸 꺼리게 된다.

타인에게 도움받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자고 결심해 본다. 조금은 뻔뻔해져도 된다고. 사실 나는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선 이미 뻔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뻔뻔하고 무능한 사람. 그게 뭐 나쁜가 싶기도 하다.

인생이 관성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단순하게 해결될 것이다. 슬픈 일이 있다면 곧 기쁜 일이 찾아올 것. 도움받는 일이 있으면 응당 도움을 주는 상황도 생길 것.

둘러앉아 빨갛게 김치를 버무리는 상인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은 꽤 즐거워 보였고 덕분에 나는 이 동네가 한 뼘 더 좋아졌고 우리는 함께 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사실이 실감 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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