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병’이라는 말이 있다. 서울의 홍대 앞을 중심으로 한 비주류 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을 비꼬는 말이다. 항상 주류보다는 비주류를 선호하고 자신이 선호하던 비주류 문화가 주류문화로 떠오르면 가차없이 버리고 떠나곤 하는 이들, 주류 문화를 환멸하고 비주류를 선호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 나도 오랫동안 이 홍대병에 빠져 살았다. 남들이 모르는 음악을 듣고, 남들이 모르는 영화를 보고, 남들이 입지 않는 옷을 입으며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어쩌면 시인이 되고 인디뮤지션이 된 것도 남들이 흔히 택하지 않는 길을 택하려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이십 대 내내 내가 앓고 있던 수준의 과도한 홍대병은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자신이 비주류 문화를 향유하는 것은 취향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바탕이 되곤 하지만 주류문화를 깔보는 것은 사회 전체가 좋은 것이라고 합의한 많은 것들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태도가 되기도 한다. 대중은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대다수의 개인보다 대중이 옳은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세상에는 고평가된 것들이 수도 없이 존재하지만 그것들 중 대부분은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배워가는 것도 어른이 되는 과정 중 하나이다.
나도 이제는 흔히 ‘정답’이라고 말하는 주류적 선택을 하게 되는 일들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내가 차는 시계가 딱 그렇다. 내가 매일 차는 시계는 당시 시계 구입을 위해 마련된 예산 안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취향을 타지 않는 모델이었다. 시계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었던 나는 주변에서 시계에 대해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친구에게 가장 안전하고 무난한 선택지를 달라고 부탁했고, 친구는 주저 없이 지금 내가 차고 있는 시계의 브랜드와 모델명을 추천해 주었다. 휴대폰이나 컴퓨터 같은 전자제품들을 살 때도 나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제품을 선택하는 편이고, 다음에 구매하려고 눈여겨보고 있는 자동차도 나와 비슷한 여건에 놓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것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답이라고 합의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편리하다. 그 선택에 대해 나무라는 사람도 없고 귀찮은 질문을 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딱히 후회할 만 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도 좋은 점이고, 무엇보다 무언가를 고민할 때 소모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해야 하는 선택이 얼마나 많은가. 일일이 자신만의 취향을 고집하는 것은 피곤하고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주류를 선택하는 행위가 가진 효율성이 점점 나를 개성 없는 인간으로 만들고 내 삶을 삭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인플루언서들이 만들어 놓은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며 더 이상 음악을 집중해서 듣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 옛날 음반가게에 가서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씨디를 고르고, 한 트랙 한 트랙을 소중하게 듣던 시절에 비하면 음악 듣는 재미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느낀다. 플레이리스트는 수십 곡의 히트곡들을 들려주지만 기억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멀티플렉스에 대기업이 걸어 둔 천편일률적인 흥행작을 아무런 고민 없이 예매하고, 서점에 들러 습관적으로 베스트셀러코너 최상단에 놓여 있는 책을 고른다. 심지어 식사 메뉴마저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고민하기보다는 인근에 별점 높은 식당의 주력 메뉴가 무엇인지를 우선순위에 놓고 선택한다.
내내 정답만을 선택하다보니 정작 내가 주도적으로 내린 결정이 하나도 없는데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매일 매일이 흘러간다. 편리함에 속아 자신의 취향은 실종되어버리고 그러는 사이에 나는 천편일률적인 인간군상 중 한 명이 되어있는 것이다. 섬뜩한 기분이 들지만 지금도 세상은 더욱 편리한 선택을 제시한다. 개개인의 취향과 의견이 하나하나 빅데이터로 대체되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취향의 실종은 곧 자아의 실종이다. 나의 자아가 사라져버리기 전에 나는 나의 취향을 회복해야 한다. 물론 모든 분야에 있어 능동적인 선택만을 할 수는 없다. 나는 여전히 시계나 전자제품, 자동차로까지 나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에너지가 허락하는 선 안에서는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무엇이 먹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읽고 보고 듣고 싶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또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