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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방향을 의심하기

등록일 2025-07-27 19:22 게재일 2025-07-2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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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익숙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하길 원한다./언스플래쉬

오키나와로 여름 휴가를 다녀왔다. 지난하고 숨 가쁜 일상에 너무도 지쳐있던 터라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휴가를 구상하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주 빤한 이미지였다. 맑은 바다, 따뜻한 햇살, 해안가에 나 있는 도로를 타고 창문을 연 채 선선히 들어오는 바닷바람을 마시며 드라이브하는 내 모습. 머릿속에서는 정말 완벽한 그림이 그려졌다. 문제는 그 낭만을 만끽하려면 내가 직접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모든 방향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렌터카 업체 직원의 겁 주기 기술은 실로 대단했다. “사고가 얼마나 자주 나는지 몰라요.” 말끝마다 ‘진짜예요’를 붙이며, 친히 사고 현장의 사진까지 보여주었다. 부서진 범퍼와 찌그러진 번호판을 보기만 해도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일본 운전 실전판!’ 제목을 단 유튜브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본 성과가 빛을 발하길 바라며, 야심 차게 시동을 걸었다. 운전대는 오른쪽에 있고 차는 왼쪽 차선으로 달려야 하는 상황. 좌회전을 하기 위해 숨을 길게 내쉰 순간, 내가 켠 건 방향 지시등이 아니라 와이퍼였다.

 

비는 오지 않았다. 오키나와의 맑은 하늘 아래, 내 차 앞 유리엔 와이퍼가 분노에 찬 듯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렁뚱땅 좌회전을 마치고 와이퍼를 끄려는데 이번에는 방향 지시등이 켜졌다. 닦을 것도 없는 유리를 열심히 닦아대고 회전할 일 없는 도로 위에서 차는 홀로 신호를 남발하는 중이었다. 문득 직원이 사고 현장을 보여주며 덧붙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출발하는 순간 각이 다 나와요. 아, 저 사람 큰일 나겠구나.” 그의 눈에 나는 어떤 각을 그리는 사람이었을까. 나는 허둥지둥 도시를 헤쳐 나갔다.

 

목적지에는 도착했다. 물론 와이퍼는 그날 하루 종일 내 방향지시등 노릇을 했지만. 도착한 뒤 본 차는 출발했을 때보다 어쩐지 더 반짝반짝해 보였다. 처음엔 우습기만 했던 그 실수가 시간이 지나자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 한국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관성적으로 운전을 하던 나는 낯선 도로에서 맨 처음 운전대를 잡고 연수를 받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 끊임없이 “오른쪽 어깨를 중앙선에, 오른쪽 어깨를 중앙선에...” 하며 중얼대고, 신호등도 제대로 보지 못해 급정거하기 일쑤. 아마 이날의 운전대로 면허 시험을 봤다면 나는 초고속으로 탈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늘 익숙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하길 원한다. 몸이 기억한 방향과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은 분명한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모든 익숙함이 도무지 통하지 않는 날이 있다. 그럴 때 두려움에 움츠러드는 것도 사실이다. 살면서 그런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어쩌면 그건 낭패라기보단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얼마나 익숙함에 의존하며 살아왔는지, 감각에만 기대어 방향을 정해왔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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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익숙한 것들이 흔들릴 때 비로소 나 자신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당황하고 머뭇거리고 엉뚱한 버튼을 누르며 실수하는 나. 더 잘하고 싶어서 안달 내고 그러다가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남발하는 평소의 내 모습을 사랑하는 일은 아무래도 쉽지 않다. 

 

그러나 운전에서만은 나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기로 했다. 수없이 머뭇거렸지만 결국 전진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와이퍼와 방향 지시등을 헷갈리는 모습이 멀리서 봤을 때는 조금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어쨌든 가고 있으니까. 핸들을 쥐고 힘차게 엑셀레이터를 밟는 마음은 스스로 분명하게 아는 것이니까.

 

말은 이렇게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여행 내내 긴장과 조마조마함의 연속이었다. 역주행을 간발의 차로 피한 순간이 몇 번 있었고 위험천만한 길로 들어 굉장한 사고를 낼 뻔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점차 새로운 운전법에 익숙해지게 됐다. 결국 어떤 사고도 내지 않고 제시간에 무사히 렌터카 업체에 차를 반납할 수 있었다. 자동차 키를 직원에게 건네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은 것은 덤. 손을 번쩍 치켜들고 속으로 외쳤다. 해냈다!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은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이 아슬아슬 위험천만했던 순간이리라. 

 

그렇게 나는 익숙한 방향을 의심하며 그 속에 숨어 있던 무심함과 안일함을 깨트릴 수 있었다. 그래,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용기를 얻은 것을 이번 휴가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해 두자. 그렇게 뿌듯함을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한 채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공항 주차장에 주차된 그리운 나의 차에 올라타며, 나는 또다시 깜빡이 대신 와이퍼를 켰다.
/문은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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