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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돌파!

경북매일
등록일 2025-06-08 19:43 게재일 2025-06-09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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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돌파! 마침표로 끝나선 안 된다./언스플래쉬

요즘 이상할 정도로 자주 중얼거린다. 정면 돌파! 마침표로 끝나선 안 된다. 느낌표까지 꼭 넣어야 제맛이다. 단호한 어조로 짧고 굵게, 주먹까지 쥐고 흔들어주면 훨씬 좋다. ‘정면’과 ‘돌파’를 연달아 발음하면 한층 더 씩씩해진 기분이 든다. 장애물을 격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태권 소녀의 앙다문 입술이 생각난달까. 물론 나는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발만 동동 구르는 쪽에 더 가깝지만.

뭐, 엄밀히 말하면 돌파해야만 하는 대단한 일이 있는 건 아니다. 답신이 껄끄러워 뒤로 미뤄놓았던 메일이나 옷장 한편에 수북하게 쌓인 옷가지처럼, 별일 아닌데 왠지 자꾸만 피하게 되는 일들. 은근히 마음의 짐이 되는 청구서며 세금 처리, 원고 마감까지… 물론 고작 이 정도를 앞에 두고 돌파를 운운하는 것이 퍽 우스워 보일지도 모른다. 나약한 인간의 조악한 외침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오늘도 외친다. 정면 돌파!

어쩌면 미루는 방식은 내가 가장 능숙하게 익힌 생존 기술일지도 모른다.  ‘안 읽음’으로 표시된 채 쌓여가는 메시지, 몇 번이고 넘기며 무시하는 아침 알람, 내일의 내가 처리해 줄 것이라는 허울로 덮어둔 일들. 때때로 나를 마주하는 일은 거대한 벽을 넘는 것만큼이나 큰 용기가 필요하다. 간단한 일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정면 돌파는 불편하다. 가끔은 낯 뜨겁기까지 하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무대 한가운데에 나 혼자 덜컥 올라선 장면처럼 느껴진다. 어설픈 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야만 하는 심정이랄까. 정면으로 돌파한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믿겠다는 선언인데 나는 나 자신을 누구보다 신뢰하지 않는다. 방문을 닫고서 몸을 웅크리는 쪽이 훨씬 편하다. 아직 아니야. 더 완벽한 때가 올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다 보면 시간은 모래알처럼 손에서 빠져나가 버린다.

어렸을 때 태권도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조른 적이 있었다. 울고 떼쓰고 길거리에 드러눕기 신공까지 펼쳤건만, 끝내 등록은 하지 못했다. 아마 엄마는 태권도가 여자아이가 하기에 과격한 운동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나는 도복을 입고 놀이터를 돌아다니는 친구들을 질투와 시기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유년에 힘차게 뛰어노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게 아쉬워. 술자리에서 푸념처럼 늘어놓던 말에 언젠가 한 친구가 너무나도 맑고 천진한 얼굴로 답을 내어놓았다. 지금부터라도 배우면 되잖아?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겐 어떤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과거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작년 새해 목표에 태권도 학원 등록하기도 슬쩍 넣어두었다. 물론 미루고 미루다 해가 바뀌어 버렸지만. 이따금 녹슨 관절을 이끌고 스트레칭하며 변명한다. 괜히 다치기라도 하면 이제 뼈도 잘 안 붙어. 암, 그렇고말고.

나 자신을 설득하는 목소리는 해가 갈수록 강해지는 것 같다. 언제나 그럴듯한 도피처를 만들어낸다. 내가 뭔가를 피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면 육상경기 도중 허들이 무서워 되돌아서는 선수를 떠올려 본다. 연습이 부족해 허들을 넘지 못하는 것은 괜찮다. 경기 도중 허들을 피하는 것이 더 문제다. 그런 면에서 정면 돌파는 해결의 기술이 아니라 회피하지 않겠다는 자세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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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나는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측면을 노리거나 슬쩍 방향을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식이라고 생각해 왔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고 가성비와 효율성을 따지는 세상에서 정면으로만 돌진하는 태도는 오히려 바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삶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순간은 외면하면 얼굴을 바꿔 다시 찾아온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았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순간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타협의 영역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는 세련된 기술이다. 나 자신을 덜 다치게 하고 타인을 더 이해하려는 시도를 통해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는 사실 또한 이해한다. 이러한 균형을 유지하며 나와 주변을 돌보는 것이 인생의 과업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이러나저러나 발은 한 번 디뎌보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본다. 거기가 푹신한 잔디밭이든 낭떠러지든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주먹을 쥐고 외쳐보는 것이다. 

 

그래, 까짓것 한번 해보지 뭐. 쉼표 뒤에는 느낌표. 느낌표 뒤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쁘지 않을 것이다. 부딪치고 깨지고 산산이 부서진 모양 또한 나름의 멋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기에.

 

/문은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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