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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를 넘어

등록일 2026-01-01 15:56 게재일 2026-01-02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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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문학연구자

해마다 자기에 대한 기대로부터 한발 물러나게 되는 것 같다. 미래에의 가능성보다는 한계를 직시하며,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성숙으로 가장하며 살아온 것 아니겠나. 주어진 운명과 맞서 싸우는 영웅들을 동경했던 시대는 아득하고, 앞길에 대한 모색보다는 현상 유지를 기도하며 하루를 소진하는 삶이 반복되고 있다. 어쩌면 강제된 이러한 사고 정지 속에서 새해의 소망을 품는다는 게 얼마나 망령된 일인지 요맘때면 새삼 깨닫게 되곤 한다.

일본의 서브컬처 비평가 우노 츠네히로는 ‘무언가를 했다’라는 사회적 자아실현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을 승인하는 방식의 자의식 형성에 관해 논한 바 있다. ‘~을 하다/했다’라는 행위가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면, ‘~이다/~이 아니다’라는 자기 형상에 대한 인지는 데이터베이스화된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기를 살피지 못하고, 주어진 조건을 수용할 뿐인 자세로 자아를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청년들이 세계로부터의 고립을 자처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행위를 통해 아이덴티티를 찾기보다는 현재의 처지를 스스로가 납득하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규정해 가는 타입의 인간들이 늘어가는 시기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상’에 대한 설정이 행위를 압도케 되는 사회적 조건이 구축되고 있다. 요즘의 한국이 그렇지 않나. 이제는 ‘영포티’가 된 ‘N포세대’ 출신의 ‘영끌’을 바라보며, 도무지 물려받을 게 없는 ‘젠지세대’의 원망이 사회를 뒤덮고 있는 형국이기에 그렇다. 나아가 그 원망의 방향이 시대의 모순을 사유케 하기보다는 단순한 피해의식으로만 점철되고 있으니, 대체 어떤 미래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미래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고루한 표현이 그리워지곤 한다. 그러한 시대의 환멸로부터 나 역시 자유로울 리 없다. 그래서일까? 요새는 ‘팔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된다. 지인이나 동료가 잘 되거나 잘 안되거나, 그게 ‘그 사람의 팔자 아니겠나’라는 식의 어법이다. 팔자란 게 ‘일생의 운수’를 뜻하니 나 역시 숙명론적 인생관 따위에 함몰돼 버렸다고 해도 좋다.

진정 타고난 운명이란 게 있는 걸까? 살다 보니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것 같다. 죽어도 안 되는,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란 게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달성될 수 없는 목표라면 차라리 그 실패에 매달려 괴로워하지 않고, 외려 이를 일종의 팔자로 받아들이자는 태도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자기의 한계에 대한 이러한 순응이야말로 내가 나 자신을 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구실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과거 도지사 시절부터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소신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안다. 2026년 병오년부터는 진정 그러한 시대가 오길 바란다. 자기에 대한 체념을 성숙의 조건으로 가장하는 그러한 세계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사회가 막다른 길에 몰렸다.

/허민 문학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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