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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伴侶)의 의미

등록일 2025-08-07 16:34 게재일 2025-08-0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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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문학연구자

우리 집 고양이들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다. 첫째 ‘마루’는 어느 식당에 출몰한 쥐잡이용으로 용인5일장에서 삼천 원에 팔려 왔고, 둘째 ‘보리’는 꼬리가 잘려 피투성이가 된 채 길 한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셋째’ 용이는 내가 다니던 문학관 주변을 맴돌며 방문객들의 손길과 발길질을 번갈아 맞고 있었고, 넷째 ‘송이’는 구내염에 시달리며 아파트 단지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막내 ‘핑코’는 자기가 골목대장인 줄 알았지만 산책 나온 개들에게 종종 쫓겨 다니곤 했다.

마루, 보리, 용이, 송이, 핑코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나의 소중한 가족들이다. 나도 내가 고양이 다섯의 ‘집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도 가끔은 믿기지가 않는다. 사실 나는 동물을 좋아해 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이 아이들은 우연히 내게 찾아왔고, 각자를 마주한 순간들이 너무 절박했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첫째가 온 지 9년, 막내가 온 지도 벌써 4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나는 반려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됐다.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는 개를 키운 경험을 바탕으로 ‘반려종 선언(2003)’을 제시한 바 있다. 대체로 “우리는 서로를 위태롭게 만들고 남의 살점으로 존재하며 서로 먹고 먹히고 소화불량에 걸리며 살다 죽는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종이 서로 반려가 되어 살아가는 일은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창발적 실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반려종’은 당연히 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반려종이 존재하기 위해선 적어도 두 개의 종이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반려종은 관계가 존재론의 최소 단위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해러웨이는 자신과 반려견 사이의 대화와 훈련 경험을 통해 소통과 조율을 오가며 ‘서로 만들어가는 존재’가 됐다고 말한다. 개와 인간이 서로에게 의미 있는 타자로 존재할 수 있는 윤리를 알게 됐다는 것이고 이는 단순한 애정 관계가 아닌 정치적이고 철학적으로 사유되는 관계라고 말한다.

결국 ‘반려종 선언’은 인류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과 비인간 간의 관계를 재구성할 것을 요청하는 의제라 할 수 있다. ‘필멸’이라는 우리 삶의 조건에서는 ‘생명 우선’이 아닌 ‘지속 우선’의 태도가 수립돼야 하며, 다른 종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 맺기 만이 기후 위기와 생태적 재난 시대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죽여도 되는 종’을 끊임없이 지정해 왔다. 가령 ‘침략종’이 그렇다. 이들은 서식처나 생태 복원을 구실로 죽여도 되는 존재로 숨어 살게 된다. 이는 “특정 생명체를 위한 결정이지만 다른 생명체를 위한 것은 아니고 어떤 사람들을 위한 결정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리는 것은 아닌” 결정이라 할 수 있다. 근대의 생명정치가 살 가치가 있는 종과 그 외부의 타자를 구분하는 사고에 기초한다면, 그리하여 그러한 인식에 입각하여 나치의 ‘인종청소’가 시행된 것이라면, 특정한 국면에서는 우리 자신조차 ‘죽여도 되는 종’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반려란 지속가능한 생태를 함께 이루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해러웨이만큼이나 우리집 다섯 고양이가 그 사실을 내게 알려줬다. 

/허민 문학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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