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토론의 자격

등록일 2026-03-05 17:20 게재일 2026-03-06 18면
스크랩버튼
Second alt text
허민 문학연구자

부정선거를 주창하는 극우 인사들과 군소 정당 대표의 토론이 화제가 된 모양이다. 실시간 접속자 30만 명, 누적 조회수는 60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솔직히 한심하다.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 부정선거 따위를 외치며 정치 선동을 일삼는 자들에게 공론장에서의 발언권을 주면 어쩌자는 건가? 토론을 성립시킨 그 저의 역시 의심스럽다. 서로가 서로를 정쟁의 수단쯤으로 생각한 것 아니겠나.

토론은 민주주의의 미덕으로 자주 찬양되지만 모든 주장이 토론의 자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토론에도 최소한의 요건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가령 토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사실 기반을 인정해야 하고, 합리적 근거와 증거를 제시할 의무를 수용해야 한다. 또한 반박될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두어야 하는데, 이 조건이 무너지면 토론은 ‘공적 숙의’가 아니라 ‘선동의 무대’로 전락하게 된다.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는 ‘관용의 역설’에 관해 논한 바 있다. 민주주의는 관용을 요하지만 그 관용은 무제한적일 수 없다는 논의였다. 한 사회의 관용이 불관용에 대한 관용까지 포함하게 되면 결국 불관용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어 관용적인 사람들과 실천마저 제거된다는 것이다. 관용의 역설이란 관용적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관용에 대해 불관용할 권리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토론은 단지 말의 교환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가 동일한 규칙을 공유한다는 암묵적 합의 위에서만 가능하다. 예컨대 선거관리기관의 절차, 사법부의 판결, 검증 가능한 통계 자료 등은 논쟁의 전제가 돼야 한다. 만약 어떤 집단이 이러한 공적 장치 전체를 불신하며, 그 불신을 증명할 책임조차 지지 않는다면, 그들과의 토론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경우 토론은 진실을 가리는 과정이 아니라, 허위 주장에 공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효과를 낳는다. “양쪽 의견이 있다”는 형식적 균형은, 사실과 허위를 동일한 수준에 놓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

부정선거와 같은 근거 없는 음모론을 공적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순간, 민주주의는 두 가지 위험에 직면한다. 하나는 허위 정보의 확산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에 대한 신뢰의 붕괴다. 제도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그 제도의 보호 아래에서 발언권을 행사하는 태도는 자기모순이다. 이런 모순을 비판 없이 수용하거나 자기 정치를 위해 동원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공허해지기 마련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말을 허용하는 체제가 아니라, 공통의 규칙을 존중하는 말만이 정치적 힘을 갖는 체제다. 그 규칙을 인정하지 않는 주장과의 토론은 숙의가 아니라 소모일 뿐이며, 때로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잠식하는 정치적 이벤트에 불과하다.

그런 와중, 거대 야당 대표는 부정선거 토론을 통해 “선거 관리 부실에 대한 공감대”가 이뤄졌다며 ‘선거시스템TF’를 구성하겠단다. 봐라, 이런 토론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의 반증이 여기 있다. 토론에 참여한 자나 그를 이용하려는 자나 매한가지 아니겠나. 자기 정치를 위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을 도구화할 뿐인 자들을 어찌해야 할까. 한국 보수의 현재와 미래가 이렇다.

/허민 문학연구자

플랜B의 철학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