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가 다가오니 뉴스 보기가 괴롭다. 정치적 비전이나 지역 현안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모색돼야 할 자리에서 네거티브와 마타도어, 음해와 흑색선전 만이 판을 치니 피로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나. 본래 자기 콘텐츠가 없는 자들이 남의 흉이나 보며 표를 구(걸)하기 마련이다. 안타까운 건 이런 전략(?)이 꽤 먹히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선거라는 제도로 표현되는 민의에 일정한 왜곡이 동반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계급배반투표라는 개념이 있다. 자기의 계층적 이해와 맞지 않는 투표 성향을 의미한다. 노동자가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든, 반대로 자본가가 노동자의 편에 선 후보를 선택하는 행위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전자인 노동자의 사례는 무지의 결과로 파악되고, 후자인 자본가의 경우는 지적 성숙의 지표로 여겨진다. 따라서 배반의 주체는 언제나 노동자를 비롯한 하위 주체들만 지목되곤 한다. 그렇게 보는 이유가 없진 않겠으나, 그조차 계급에 대한 편향적 이해에 기초해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가치에 투표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을 테니 말이다.
애초 하위 주체가 바로 그 자신의 이해나 욕망을 알고 있거나 혹은 알 수 있다고 가정하는 발상이야말로 엘리트적인 사고일 수 있다. 계급적 위치와 계급·사회의식은 투명하게 연결되지 않는다. 그 사이(間)에는 적지 않은 물질적·정서적·이념적 매개 장치들이 작동한다. 이런 과정을 무시하고, 하위 주체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언설들이야말로 무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대의제의 역사란 항상 신분, 계급, 재력 등이 우선적으로 대표성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하여 대의제는 공공영역을 담당할 권한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소수가 전체를 대표하는 ‘과두제’에 다름 아니며, 선거는 체제를 민주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선거에 기초한 대의적인 통치 체제로 한정해서 보게 된 것도 역사적으로 최근의 일이다. 그런 만큼 선거의 한계를 직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
가령 전통적으로 진보적 의제가 선거제도를 매개로 전체의 의견이라는 외양을 갖추고 재력에 기초한 소수에 의해 어떻게 대표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항시 의문이 있었다. 따라서 그 정치적 불가능성을 마주하며 차라리 셈해지지 않거나 대의되지 못하는 민의의 여분을 포착하는 과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와 선거의 간극을 살피는 여전히 유효한 착목 지점이다.
여론만으로 민주주의에 접근하면 셈해지지 못한 민의를 상실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자신의 정치적 의사가 대의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당장 사회적·성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대변해 줄 정당이 너무 부족하거나 힘에 부치고 있는 것 아닌가. 차별금지법을 관철시키지 못하는 거대 양당의 행태만 봐도 알 수 있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당위를 구실로 실은 그런 합의를 이끌어 낼 만한 별다른 대책 없이 언제까지 도망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거를 앞두고 투표할 만한 곳이 없는 사람들의 사정에도 한 번쯤 귀를 기울여 봤으면 좋겠다.
/허민 문학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