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미국, 이민의 나라

미국은 이민의 나라다. 극소수 본토 인디언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미국인은 이민자들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조차 그들의 뿌리는 다른 나라에 있다. 그런 미국이 불법체류 외국인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주위군을 투입한 데 이어 급기야 해병대까지 동원하겠다는 위협을 쏟아낸다. ‘불법체류자’라는 용어가 쉽게 사용되지만 사실 ‘서류가 미비한(undocumented)’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까다로운 조건을 갖추지 못했을 뿐 대부분은 열심히 일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시민들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 미국경제는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이민자의 희생과 노동 위에 세워진 나라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미국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 덕분에 미국은 산업과 경제를 일구었고 성장과 발전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의 대륙횡단 철도건설, 멕시코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농업 현장 점유율, 실리콘밸리의 이민자 출신 기업가들, 의료계를 지탱하는 이주 의료진, 건설현장과 서비스업계에서 이주노동자들 없이는 미국이 경제적 위기를 견디기 어려웠을 터이다. 정부와 극우 보수층이 몰아세우는 이들은 오늘도 직장에서 농장에서 가정에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하게 일하고 있다. 그들을 몰아세우는 일이다.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는 ‘우리는 모두 이민자의 후예다’라 자랑스럽게 적는다. 미국 정부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불법체류자들을 범죄자로 낙인찍는다. 미국의 근본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불법체류자 강제추방정책에 맞선 저항이 거세다. 미국 각지 법원은 행정부의 과잉단속에 법적제동을 건다. 미국의 진보는 인종주의와 배타주의에 맞선 투쟁을 거듭해 왔다. 미국이 더 넓은 포용과 정의를 향해 나아가면서 진정한 힘을 발휘해 왔다.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군을 동원하는 모습은 6개월 전 대한민국에서 목격했던 부끄러운 광경을 떠올리게 한다. 정부는 이민자들을 미국의 위협으로 간주하며 백인 중심주의로 회귀하려 한다. 그들은 엄연한 역사적 진실을 애써 외면한다. 선량한 시민들의 합법적인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시도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한다. 군대는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미국 사회는 정부의 강경책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낸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수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미국이 여전히 ‘이민의 나라’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미국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미국이 이민자의 기여를 부정하고 백인 중심의 폐쇄적인 사회로 돌아선다면 스스로 택하여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목소리를 내며 행동하는 미국인들은 그들의 저항과 노력이 정부의 독주를 막는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민자로 살면서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열심히 살아가는 ‘서류미비체류자’들을 범죄자로 낙인찍으며 추방하려는 일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이 스스로 뿌리를 부정하는 일이며 오늘 사회공동체를 훼손하는 일이다. 미국이 ‘자유의 여신상’ 아래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 갈림길에 섰다. 이민의 나라 미국이 위기에 빠졌다. /장규열 고문

2025-06-11

글로벌 우경화와 ‘나쁜 남자들’

불안정한 시대, 인류는 ‘나쁜 지도자’를 찾는다? 침팬지, 고릴라는 위기나 외부 위협이 있을 때, 무리는 더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알파 수컷(Alpha Male)을 따른다고 한다. 미중 패권 경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글로벌 공급망 붕괴, 기후 위기까지 겹친 지금 국제 정세는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사람들을 본능적으로 보수로 이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보수, 우경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독일에서는 극우정당 AFD가 제2당으로 부상했고, 영국 지방선거에서는 영국 개혁당이 돌풍을 일으켰다. 이탈리아의 멜로니 총리는 아예 무솔리니의 후예로 불릴 정도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스트롱맨 리더십’이다. 혼돈의 시대에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도자보다는, 근육질의 ‘나쁜 남자’가 국민의 지지를 얻는다. 푸틴은 걸핏하면 밀리터리룩을 입고 나온다.(언제나 일전을 불사할 것처럼) 튀르키예 에르도안은 오스만 제국 의장대 의전(儀典)을 가장 즐긴다고 한다. 트럼프의 막말, 아베의 대규모 군비 증강도 모두 스트롱맨의 전형이다. ‘사상의 편향은 역사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격언처럼 이런 사조가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이 흐름을 낳은 시대의 불안을 무시한 채, 도덕에 안주할 수도 없다. 이제 한국도 6·3대선을 치르면서 새 지도자가 선출되었다. 한미일 동맹이 한반도 외교, 안보의 가장 최우선 가치가 되어야겠지만 베트남, 인도, 중국의 거대한 시장과 그들의 정치, 경제적 동향도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지도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큰 관심사다. ‘나쁜 남자’. ‘스트롱맨’이 되어 주변 강국들과 까칠한 외교를 펼칠 지, 합리적인 리더십을 바탕으로 균형, 실리(實利) 리더십을 펼칠 지. /한상갑 경북부 에디터 arira6@kbmaeil.com

2025-06-11

시모다에서 생각한 현대인의 원죄

항구도시에서 태어나서인지 바다를 오랫동안 보지 못하면, 바다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일본에 머믈면서 오랫동안 바다를 보지 못한 저는 K대학의 A선생과 함께 이즈반도에 있는 시모다 답사를 떠나기로 했는데요. 숙소 근처의 고마바도다이마에역에서 만난 우리는 열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180km 떨어진 시모다로 향했습니다. 이즈반도에 들어설 때부터, 차창 밖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바다가 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시모다(下田)는 일본 시즈오카현의 이즈(伊豆)반도 남부에 위치한 조그만 항구도시입니다. 남북 길이 50㎞ 정도의 이즈반도는 도쿄의 남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온난하고 풍광이 좋은 데다가, 아타미나 이토 등의 온천까지 발달하여 휴양지로 유명한데요. 시모다가 일본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시모다역의 간판에도 써있는 것처럼 ‘개국(開國)의 땅’으로서입니다. 시모다는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이 조인된 곳이며, 하코다테와 함께 일본에서 최초로 개항된 곳입니다. 무려 4시간이나 열차를 타고 달려온 우리가 주로 둘러본 것도 개국과 관련한 흔적들이었는데요. 미국의 페리 제독이 행진하였다는 페리 로드, 일본의 첫 미국 영사관이 개설되었던 교쿠센지, 일본과 미국이 미일 수호 통상조약을 맺었던 료센지, 일본과 러시아가 러일 화친 조약을 맺었던 조라쿠지 등이 바로 개항의 흔적들입니다. 제가 시모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시인 백석을 통해서입니다. 백석은 아오야마 학원을 다니던 시절 도쿄에서 기선을 타고 시모다항에 도착한 후에, 근처의 작은 어촌인 가키사키에 머물기도 했는데요. 이 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바로 시 ‘가키사키(柿崎)의 바다’(1936)와 ‘이즈노쿠니노미나토카이도(伊豆國湊街道)’(1936), 산문 ‘해빈수첩’(1934)입니다. 시모다는 요즘 어디 가나 외국인이 넘쳐 나는 일본의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한적하고 평화로운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시모다항에는 페리 제독의 동상과 함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었는데요. 우리는 야스나리 하면 자동으로 ‘설국’만 떠올리지만, ‘이즈의 무희’(1926) 역시 일본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소설입니다. ‘이즈의 무희’는 제일고등학교 학생인 ‘나’가 유랑 가무단과 함께 이즈반도를 다니다가 시모다항에서 헤어지고 도쿄로 돌아오는 일종의 여로형 소설인데요. 그 여로는 ‘오늘날 ’오도리코보도(踊子歩道)’라 불리고 있으며, 길 주위에는 ‘이즈의 무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정표나 문학비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즈의 무희’는 야스나리의 초기 작품으로서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인데요. 야스나리도 제일고등학교에 다니던 1918년 이즈반도를 여행했으며, 그때 유랑 가무단과 동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작품 속의 ‘나’는 “고아 근성”과 “우울”을 견디지 못하고 이즈로 여행을 온 것이라 고백하는데요. 야스나리도 두 살과 세 살 때 연이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열 살 때는 누나를 잃었으며, 열다섯 살에는 조부마저 잃은 고아였습니다. ‘나’는 유랑 가무단, 그중에서도 소녀(무희)와 깊은 교감을 나누는데요. 주인공이 소녀가 속한 유랑 가무단과 맺는 관계는, ‘나’의 머리에 씌어진 모자가 ‘학생 제모(制帽)’에서 ‘사냥모’로, 그리고 다시 ‘학생 제모’로 변하는 것을 통해 압축적으로 드러납니다. 이 시절 고등학교는 오늘날의 대학교에 해당하며, 주인공이 다니던 제일고등학교는 오늘날의 도쿄대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주인공이 쓰고 있는 학생 제모는 주인공이 일본 최고학부에 다니는 엘리트임을 알려주는 증표인데요. 그렇기에 한 숙소에서 만난 노파는 유랑 가무단 사람들에 대해서는 “심한 경멸”을 담아 “저런 것들이야 어디서 묵을지 알 게 뭡니까요. 아무 데서나 자면 그뿐이죠.”라고 말하면서도, 손자뻘인 ‘나’에게는 극존칭을 씁니다. 그러나 ‘내’가 소녀를 비롯한 유랑 가무단과 친밀해지자,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가게에서 산 사냥모를 쓰고, 일고 제모는 가방 안에 쑤셔 넣어 버립니다. ‘나’는 우월의식에서 벗어나 유랑 가무단과 동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유랑 가무단은 ‘내’가 자신들이 사는 오시마에까지 함께 갈 것이라 기대하기도 하고, 소녀는 ‘나’를 가리켜, “정말로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우월감을 버리고 유랑 가무단과 하나로 연결된 그 순간, 안타깝게도 일고생으로서의 알량한 자의식은 강하게 고개를 쳐듭니다. 이즈의 곳곳에 있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거지와 유랑 가무단은 마을에 들어오지 말 것.”이라는 푯말이 눈에 들어온 겁니다. 결국 ‘나’는 유랑 중 죽은 아기의 49재를 위해 출발을 하루만 미뤄달라는 유랑 가무단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도쿄행 배를 타기로 결심합니다. 배를 타기 전에, ‘나’는 사냥모를 벗어 버리고, 다시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일고 제모를 꺼내 쓰는데요. 아무래도 ‘나’에게 이즈반도와 유랑 가무단, 그리고 “꽃과 같이 웃는” 무희는 한때의 바람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배에 오른 ‘나’는 가방이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눈물 속에서 “달콤한 상쾌함”을 느끼는데요. 이 ‘달콤한 상쾌함’이야말로 현대인이 지닌 원죄의 정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6-10

그늘

무더위가 막 시작되던 초여름 어느 날이었다. 간단히 점심을 때우려고 컵라면을 먹었는데 좀처럼 소화가 되지 않아 산책을 나섰다. 자동차로 다닐 땐 보이지 않던 많은 풍경들이 걸음을 늦추었고 기온이 많이 오른 탓에 자신을 돋보이려 강렬하게 빛을 뿜어대는 햇빛 덕분에 걸음은 더욱 더뎌졌다. 차들이 다니는 길목에서 지인 부부를 만났다. 딱히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만나지 못하던 지인이었는데 산책길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정형적인 약속이 아니라 우연한 만남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고 말문이 트이자 금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의 일상을 쏟아냈다. 무심히 서 있던 그 자리는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곳이었다. 그곳에 서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건강은 어떠한지, 지난번 만남에서 들었던 직장에서의 힘든 부분은 잘 해결되었는지, 왜 이 시간에 걷고 있는지, 가족은 잘 있는지 같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몇 마디로 그칠 줄 알았지만,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박수를 치며 웃기도 하다가 심각한 이야기도 하다 보니 두 시간 가까이 서서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오래 서 있었던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지친 줄도 몰랐고,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고, 햇살이 따가운 줄도 몰랐다. 그들과 함께 서 있었던 자리가 그늘 덕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름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그늘을 찾는다. 태양이 너무 뜨겁고 강렬해서 그늘 아래서야 숨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햇볕은 생명을 키우는 존재다.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자라듯 우리도 햇볕 아래서 활기를 얻는다. 하지만 햇볕은 오래 머무르면 탈이 나기도 한다. 너무 강한 햇볕은 자라게도 하지만 시들게도 한다. 그래서 그늘이 필요하다. 그늘은 빛이 없는 곳이 아니라 빛이 닿지 않아도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다. 생명을 직접적으로 키우지는 않지만 지친 생명이 회복될 수 있도록 숨을 고르게 해준다. 햇볕과 그늘은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을 균형있게 만들어 주는 두 개의 축이다. 햇볕이 생명을 키우는 존재라면 그늘은 생명을 쉬게 해주는 공간이다. 햇볕이 ‘살게 하는 힘’이라면 그늘은 ‘살아낼 수 있는 숨’이다. 나는 스스로 햇볕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왔다. 환하고 따뜻하고 삶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으니까.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햇볕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걸. 때로는 그늘에서 머무르며 숨을 고르고 내 안의 조용한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날 만난 지인 부부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내 안의 답답함이 말 한마디에 풀리는 그냥 그늘 같은 사람들이었다. 말에 말을 더하지 않고 듣고 웃어주는 그들은 마치 더위에 지쳐 찾아간 여름날 나무 그늘 같았다. 강하지 않지만 깊었고 말없이 서 있어도 충분했다. 요즘은 그늘 같은 사람이 그립다. 함께 있으면 내 마음이 쉴 수 있는 사람,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론 말이 없어도 괜찮은 사람. 세상은 빛나는 것에만 주목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빛나지 않아도 좋은 그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가 잠시라도 기대어 숨을 돌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그들 부부같은. 산책길에서의 그 짧은 만남이 나에게는 긴 여운으로 남았다. 그날의 햇볕도, 그늘도, 그리고 그늘처럼 나에게 다가와 준 지인도. 사람 사이에도 그런 그늘 하나씩 있었으면 좋겠다. 벤치처럼 앉을 수 있는, 나무처럼 기대설 수 있는, 쉼표 같은 존재 말이다. 그늘은 단지 햇빛을 피하는 공간이 아니다. 마음이 머무는 자리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 마음도 잠시 그곳에 쉬어 갔음을 알았다. /작가

2025-06-10

詩書畵 깃발이 나부끼는 포항철길숲

6월의 바람은 싱그럽다. 연록의 잎새들은 날로 짙어져 꿈결처럼 암록이 흐르고, 풋보리가 익어가는 들판엔 초록의 바람이 분다. 화사한 꽃들이 져버리자 초목은 더욱 무성해지며 생명력을 드러내는 때, 그래서 우거진 그늘과 향기로운 풀들이 꽃필 때 보다 낫다(綠陰芳草勝花時)고 했던가. 거기에 도심 속을 길게 가로지르는 숲길 한 켠에는 녹음방초 보다 더 진하고 그윽하게 묵향(墨香)을 피우며 지나가는 시민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올해 14회째를 맞은 ‘포항서예연합전’이 걸개 형태로 만든 다양한 깃발작품들을 길거리에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100여 년 동안 열차가 다니던 옛 철길을 획기적으로 개선, 복원하여 시민들이 즐겨 찾는 열린 공간인 ‘포항철길숲’ 한 켠에서 형형색색의 깃발 서예작품들이 유월의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도심 속의 복합 힐링공간으로 탈바꿈하여 전국적인 명소가 된 포항철길숲 모퉁이에서 피어나는 은은한 묵향이 푸른 초목과 어우러져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산책하거나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바로 곁에서 깃발 서예작품을 만날 수 있다니, 일상과 접목되는 ‘거리예술’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서예작품이 전시장이나 갤러리가 아닌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쉽고 편하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서예가 일반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자연이나 일상 속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사람과 자연, 예술과 삶을 어우러지게 하는 새로운 문화적 향유를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통을 살리면서 자연 속에서 예술과 생활을 이어주는 문화적인 소통으로 ‘문화도시’의 품격과 기치를 한층 높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도 여겨진다. 특히 이번 연합전은 서예 동호인이나 서예작가·출향작가 뿐만 아니라 포항시민이면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열린 문화행사로서, 유치원생에서부터 100세 어르신까지 남녀노소의 시민들이 참여해 눈길을 끌고 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붓을 잡고 한 점 한 획 또박또박 꿈과 희망을 쓰거나,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거북등 같은 손으로 떨리는 붓을 진정시키며 자손들에게 사랑과 염원의 글귀를 쓴 작품 속에서 순수하고 진솔함이 느껴져 눈시울을 붉게 만들기도 한다. 연령과 세대, 계층과 지역을 아우르는 문화 예술적인 소통과 어울림으로 전통문화예술의 현대적인 계승 발전과 서예인구의 저변확대를 꾀하기도 한다. ‘도심을 넘나들며/만남과 이음으로//소통이 숨을 쉬고/여유가 살아나네//가뿐한 몸놀림 속에/활기참이 묻어나네//테마가 어리고/예술이 피어나는//철길숲 둘레마다/쉼과 삶이 어우러져//깃들고 품어주는 뜻/공생의 문화 흐르네’ -拙시조 ‘선로의 변신’ 중 구체적인 의미 표현의 수단이나 상징성을 드러내는 깃발에 곱게 스며든 350여점의 시서화(詩書畵) 작품들이 창공에 휘날리며 한결같이 문화예술을 외치는 것 같다. 묵향으로 수놓아진 아름다운 철길숲을 마실 가듯이 거닐며, 길가에서 환호하듯이 반기는 깃발 서예작품으로 잠시 풍요롭고 품격 있는 문화생활을 즐겨보면 어떨까? 철길숲과 예술작품이 조화를 이루고 시민들이 공감하며 상생하는 포항에는 문화의 향기가 피어난다. 예술과 문화는 시대를 초월하여 융화와 공감, 감동의 울림으로 도시의 활력과 지속가능성을 담보해준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6-10

장애인이 웃는 작업장

우리나라 인구의 5.1%가 장애인으로 등록되어 있고, 현재 264만 정도 된다고 한다. 공공기관이든 민간 기업이든 일정 비율 장애인을 고용해야 한다. 장애인 사업장의 일의 조건은 아직 좋은 환경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 단순 법적인 인원 비율만 채용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 상황에 맞춰 일을 쉽게 할 수 있어야 하고 행복한 일터가 되어야 한다. 장애인이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조건은 첫째, 물리적 환경 개선이다.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작업대의 높이 조절이나 휠체어, 보행기 등 이동을 고려한 충분한 공간과 통로가 있어야 한다. 경사로, 자동문, 시각, 청각 알림 시스템 등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 둘째, 작업 방식의 단순화이다. 반복 작업, 조립 작업, 포장, 검사, 데이터 입력 등 단순 저강도 작업으로 분류하여 배치하고 불필요한 동작은 제거한다. 셋째, 보조 기구나 자동화 기기 도입이다. 무겁고 난해한 작업은 자동화하거나 간단한 도구, 지그 사용, 음성 안내시스템 등을 도입하여 불편함이 없도록 한다. 넷째, 작업 분할과 협업 구조로 한다. 1인 완결 방식이 아닌 작업 공정 분할 및 팀 기반 서로 협업하는 체계가 좋다. 제철소의 작업복을 세탁하는 일을 맡고 있는 포스위드는 직원의 반이 장애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장애인의 반은 중증 장애인(1~3등급)이다. 필자는 광양 포스위드 사업장을 진단할 때, 장애인 작업자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세탁물이 입고 되면 분류하고, 세탁기에 넣고 세탁이 되면 건조기로 이동한다. 건조기에서 다림질 공정으로 이동, 완료 된 세탁물은 박스에 담겨 창고로 이동한다. 하루 이동 거리는 개인당 평균 11.2km 정도로 작업자의 피로도가 높은 작업 환경이고, 세탁 공정 Layout 배치가 효율적이지 못했다. 세탁기 11대가 왼쪽 벽에 있고, 건조기는 반대편 오른쪽 벽에 있었다. 그 사이는 거리가 있고 불필요하게 넓어 이동 동작이 많았다. 다리미질 작업장과 출고장이 반대편에 있어 세탁 물류 흐름이 좋지 않았고, 작업자 동선이 지그재그였다. 장애인의 일하기 쉬운 조건으로는 많은 개선이 필요했고, 또한 중증 장애인은 1시간 일하고 2시간 쉬어야 하는 요건이고 쉬는 공간이 거리가 있고 환경 개선이 필요했다. 사람과 물(物)의 이동을 최소화하고, 일이 쉽고 편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여러 차례의 작업자 의견수렴과 최적 레이아웃 설정을 위한 포석을 두었다. ‘최소의 동작으로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조건’ 만들기였다. 세탁업의 특성상 물, 스팀 배관 등 유틸리티 공사를 하고, 세탁기 근거리에 건조기, 다리미질 작업장을 배치했다. 화단을 개간하여 중증 장애인의 쉼터를 만들며, 동작 낭비를 25% 수준으로 줄였고, 작업자의 하루 이동 거리는 4.1km로 크게 줄어들었다. 세탁 작업 조건과 프로세스의 최적화로 일은 편리해지고 생산성은 높아졌다. 작업자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와 답은 보인다. 장애인이 가능한 일의 조건과 일하기 쉬운 작업장으로 직원이 웃는 일터를 이룰 수 있었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06-10

사라지는 남아선호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부모들이 여아를 축복으로 여기는 시대가 열린다”는 보도를 했다. 선진국일수록 남아보다 여아 선호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는 인류사에서 처음 있는 변화라는 해석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코노미스트는 여아 선호의 대표적 사례로 한국을 꼽았다. 1990년대 한국은 여아 100명당 남아 116명이 태어난 것으로 조사됐으며, 특히 셋째 자녀부터는 여아 100명당 남아 200~25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자연 출생 성비가 여아 100명당 남아 105명 정도라고 볼 때 성비 불균형 정도가 매우 심각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여아 100당 남아 105.1명으로 자연 성비에 가까운 수준으로 낮아졌다. 중국과 인도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했는데, 사회인식의 변화, 여성 지위 향상, 문화적 반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으로 풀이했다. 우리 속담에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이 있다. 남아 선호 사상의 사회 분위기에서 생겨난 말이다. 딸을 낳은 여성이나 가정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이다. 이코노미스트 지적이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남아선호 사상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사조다. 한 결혼정보회사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절반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자녀를 낳겠다고 답했고, 만약 가린다면 남아보다 여아를 선호하는 비율이 5배나 높았다고 하니 놀라운 대답이다. 여아선호가 높은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노후에 부모를 부양할 가능성이 높은 때문으로 풀이도 하나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다만 남아선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우정구 (논설위원)

2025-06-10

국힘 친윤 세력, 지금 헤게모니 싸움할 때냐

‘소수야당’으로 전락한 국민의힘이 당권경쟁에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대선 패배 1주일이 지났지만 누구 하나 수습에 나서기는커녕, 다들 내년 지방선거 공천권을 장악하기 위해 혈안이 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나오는 국민 반응이다. 지난 9일 열린 의원총회에서도 당내 계파싸움의 핵심인 ‘김용태 비대위원장 거취’ 문제를 두고 5시간 넘게 격론을 벌였지만 아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당내 주류인 친윤계 의원들은 당권장악의 장애물로 여겨지는 김 위원장의 즉각 사퇴를 요구했고, 비윤계 의원들은 “당내 개혁을 주도하기 위해 김 위원장이 다음 전당대회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양쪽 다 당권을 차지해 지방선거 공천권을 행사하겠다는 욕심뿐인 것 같다. 친윤계 핵심들이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고 있으니, ‘당 해체 수준의 혁신’을 주문하는 외부 목소리가 당 운영에 반영될 수가 없다. 오는 16일 선출되는 원내대표도 친윤계가 맡게 될 경우, 국민의힘 혁신은 요원해진다. 국민의힘이 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다수당인 민주당은 거리낌 없이 입법 독주를 하고 있다. 지난 5일 국회 본회의에서 ‘3대 특검법안(채상병·내란·김건희 특검법)’을 처리할 때도 주진우 의원 혼자 반대토론을 한 것 외에는 모든 국민의힘 의원들이 남의 일처럼 구경만 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이유에서다. 어제(10일) 공포된 특검법이 로드맵대로 시행되면, 국민의힘 의원들은 대거 특검 사정권에 놓이게 된다. 특검은 늦어도 한달 뒤인 7월 11일쯤 본격 수사에 들어간다. 특검의 주요 타깃은 윤석열·김건희 부부지만, 국민의힘 인사들도 상당수 수사를 피하기 어렵다. 우선 내란 특검법 수사 대상(11개)에는 ‘국회 표결 방해 시도 행위’가 적시돼 있다. 여권에선 비상계엄 선포 다음날인 지난해 12월4일 새벽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 표결에 국민의힘 의원 다수가 불참한 이유를 ‘핵심 친윤계의 의도적인 표결방해행위’로 의심하고 있다. 만약 국민의힘 지도부가 윤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국회 표결에 불참했다는 증거가 나오면 내란 방조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는 게 법조계의 분석이다. 김건희 특검법(김건희와 명태균·건진법사 관련 국정농단 및 불법 선거 개입 사건 등 진상규명을 위한 특검법)도 국민의힘에겐 저승사자가 될 수 있다. 15개 의혹사건으로 구성된 이 특검법에는 ‘명태균 게이트’ 수사도 포함돼 있어 국민의힘에는 뇌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국민의힘으로선 그야말로 사면초가 상태다. 특검 수사 진행 상황에 따라 당이 해산 위기에 몰릴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문제는 민주당이 특검법으로 사실상의 적폐 청산에 들어갔지만, 국민의힘으로선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국회 의석이 여권은 민주당 167석을 포함해 184석인 반면, 국민의힘은 107석밖에 안 된다. 개혁신당과 합치더라도 110석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헤게모니 싸움이나 벌이고 있는 국민의힘을 보며 국민이 혀를 찰 수밖에 없다. /심충택 논설위원

2025-06-10

믿는다는 것에 대하여

믿음에 관한 뇌과학적 통찰이 있다. 모든 믿음은 뇌가 지어낸 이야기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본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보는 존재이며. 무엇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믿는다는 것이다. 믿음의 대상이 실재한다는 것은 그냥 환상이요, 착각인 셈이다. 믿음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뇌에 대하여 알아보자. 재생되지 않는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 1.5 키로그램의 무게, 1.500cc의 부피, 인체 에너지의 20% 가량을 소비, 전기적 신호와 뇌 신경전달물질에 의하여 작동, 캄캄한 두개골 속 존재, 산소와 포도당으로 생존. 이것이 뇌의 대략적 구성표이다. 주요 뇌 신경 전달 물질은, 글루탐산, 가바, 아세틸콜린,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엔돌핀, 옥시토신, 바소프레신, 히스타민 등이며, 이들 중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탐산이 80~90%,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인 가바는 10~15%로 대부분을 차지하며,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나머지는 의외로 전부 1% 정도로 분포한다. 뇌 신경 전달 물질은 호르몬과는 유사하기는 하나 다른 물질이다. 인슐린, 코르티졸, 에스트로겐, 아드레날린 등은 호르몬 종류다. 뇌 신경전달물질은, 신경세포 말단에서 분비되며, 매우 짧은 간극과 전달시간이 매우 빠른 것에 비하여, 호르몬은, 부신, 갑상선, 췌장 등 내분비샘에서 분비되어 혈류를 통해 전신으로 전달되고 간극은 매우 길며, 전달 속도도 느린 편이다. 신경전달물질 중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은 호르몬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작용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마음은 물질이다’라고 정의하더라도 별다른 반박을 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뇌가 사실이라고 가정하는 지각, 인지 또는 감정 작용이다. 믿음은 보는 것보다 먼저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념이 먼저이고, 논증은 나중이다. 믿음은 패턴의 인식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바람에 흔들리는 풀을 보고 ‘호랑이다’라고 잘못 믿더라도 생존 확률은 높아진다. 이러한 패턴성 탐지는 종종 음모론과 미신으로 연결된다, 나아가 믿음은 도파민과 뇌 보상체계에 의존한다. 뇌의 도파민 시스템은 신념이 강화될 때 보상을 제공한다. 새로운 정보를 접할 때, 기존의 신념과 부합하면 긍정적인 감각을, 그렇지 않을 때는 거부반응을 느낀다. 이러한 믿음은 개인의 뇌에서 시작되지만, 사회적 집단과 문화적 분위기를 통해 고착화 된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들을 심각하게 통찰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믿음이 우리네 삶을 힘들게 하거나, 심지어 파괴하는 경우가 있다. 신앙, 정치적 신념, 역사관, 내세관 등등. 여기에 믿음이 개입되지 않은 부분이 단 한 곳이라도 있는가? 서두에 언급한 믿음의 대상은 전부 환상이요 착각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너와 내가 믿기 때문에 믿을 뿐이다. 그 믿음이 삶을 행복하고 자유롭게 한다면야 무슨 말이 필요할까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공봉학 변호사

2025-06-09

판도라의 상자

그리스 신화의 주신 제우스의 지시에 따라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토스가 ‘판도라’라는 최초의 여자를 만들었다. 인간의 수호신인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가 판도라에게 반하여 결혼을 하자, 제우스가 선물로 상자 하나를 주면서 절대로 열어보지는 말라는 경고를 하였다. 하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한 판도라는 몰래 상자를 열고 말았다. 그러자 그 속에선 증오, 질투, 잔인성, 분노, 가난, 고통, 질병 등 온갖 재앙들이 쏟아져 나왔다. 깜짝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상자를 닫았지만 이미 모든 재앙들은 다 나온 뒤였다. 하지만 그 상자의 밑바닥에는 아직 하나가 남아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반수가 찬성하여 이 시대의 판도라상자가 열렸다.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도 계몽하고 경고하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 그 상자 안에서는 입법독재, 법치파괴, 외교·안보 파탄, 경제폭망, 윤리의식 실종, 자유민주주의체제 붕괴 같은 나라를 위태롭게 할 온갖 재앙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우선으로 여당이 된 다수 의석의 국회는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악법들을 마구잡이로 남발할 것이고, 한통속인 행정부는 기꺼이 그것을 수용할 것이다. 반대를 하거나 저항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탄핵을 하거나 특검으로 처벌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법치파괴’라는 재앙이 횡행할 것이다. 검·경은 물론 사법부까지 양심이나 사법정의 따윈 다 팽개치고 알아서 기는 자들로 법치는 무너지고 삼권분립은 완전히 실종될 것이다. 권력의 주구가 된 사법부는 그들의 정적이나 반대파들은 잔인하게 보복하고 파멸시킬 것이다. 이미 기소되었거나 재판 중인 권력자의 수많은 혐의에 대해서는 원천무효 판결이 속출할 것이고, 이전 정권이나 우파정당의 인사들은 내란동조 세력으로 몰아서 사법처리 등의 족쇄를 채울 것이다. 따라서 사회 전반에 윤리의식은 실종되고 선악의 가치관이 전도되는 혼란과 불법이 만연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나올 것은 ‘경제폭망’이라는 재앙이다. 자유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포퓰리즘성 정책으로 경제는 악화일로로 곤두박질 칠 것이다. 퍼주기식 포퓰리즘의 단맛에 취하고 조작된 통계에 현혹되어 서서히 끓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대다수 국민들은 저도 모르게 삶겨져 갈 것이다.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그러하듯, 쓰레기통을 뒤지면서도 권력자를 더욱 의지하게 되는 패망의 악순환을 답습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은 ‘체제전복’아라는 재앙이다.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의 바탕이었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심각하게 훼손되거나 아예 사회주의 체제로 뒤집히게 될 것이다. 동시에 굳건한 방패막이였던 한미동맹은 균열이 가고 대신 친북·친중 정책이 노골화 될 것이다. 그것은 곧 국격의 추락과 국익의 손실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판도라상자 밑바닥에도 마지막 희망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양심과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각계 각층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내고 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5-06-09

이재명 정부에 드리는 고언(苦言)

정권교체로 절대권력이 탄생했다. 입법권력의 폭주를 지켜본 국민들은 집행권력까지 장악한 이재명 정부가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지 걱정이다. 착한 권력은 없으며,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사실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괴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가 성공하려면 ‘마약 같은 권력’의 속성을 깨닫고, ‘괴물 같은 권력’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고언을 드린다. 첫째, 권력 행사의 절제이다. 집행권과 입법권을 모두 장악한 절대권력이 위험한 이유는 절제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권력은 마약과 같아서 스스로 절제하기 쉽지 않다. 권력에 직언하는 충신은 없고, 아부하는 간신들이 많아서 이성을 잃기 때문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니 야당·언론·지식인들의 비판과 고언을 경청해야 한다. 물론 민주당도 대통령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의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처럼 자신에게 비판과 고언을 해줄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을 가까이 둔다면 권력의 오판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공익과 사익의 구별이다. 대통령이 개인적·당파적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한다면 나라는 어떻게 되겠는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Hugo R. Chávez)정권이 대법관 수를 늘린 후 자기편으로 채워서 독재체제를 완성했던 것처럼, 민주당은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대법관 수를 14명에서 30명으로 늘리는 개정안을 법사위 소위에서 단독 처리했다. 또한 민주당이 추진하고 있는 형사소송법·공직선거법·헌법재판소법 개정안 등은 이른바 ‘이재명 방탄법’으로 의심받고 있다. 국민은 정부·여당이 민주주의의 최후보루인 사법부의 독립성을 어떻게 훼손하는지 지켜보고 있다. 공익을 빙자하여 사익을 추구하는 권력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국민통합의 정치다. 통합의 상징인 대통령은 ‘진정한 공화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통합을 약속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하나같이 통합을 약속했지만 오히려 갈등과 분열이 심화된 이유는 말뿐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프랑스의 앙리 4세(Henri Ⅳ)는 국민통합을 위해 자신의 종교를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까지 하면서 ‘낭트칙령’을 통해 화해와 포용을 호소함으로써 30년 종교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말만 하는 권력’과 ‘실천하는 권력’의 차이다.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고 양보하지 않으면 여야 협치도 국민통합도 불가능하다. 이상과 같은 고언을 명심하여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물론 권력의 속성상 그 실천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권력을 남용하여 괴물이 되기는 쉽지만, 권력을 절제하고 비판을 수용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부디 이재명 정부는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한 전철을 밟지 말고 바른 정치로 국민의 희망이 되어주기 바란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2025-06-09

초여름 떠올린 백석의 시 1편

이제 겨우 6월 중순에 들어섰을 뿐이지만, 기온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벌써 여름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끔찍했던 폭염과 게릴라성 폭우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2024년 더위는 무시무시했다. 올해는 어떨지 궁금해진다. 초여름. 후텁지근한 도시를 벗어나 그늘 드리운 산과 시원한 바람을 만나러 교외를 향했다. 잠시 후 눈앞에 펼쳐진 시골 풍경이 자연스럽게 많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백석 시인의 시 한 편을 떠올리게 했다. ‘하답’(夏沓)이다. ‘짝새가 발부리에서 날은 논두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워먹었다/게구멍을 쑤시다 물큰하고 배암을 잡은 눞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가웠다/돌다리에 앉아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이 논두렁과 개울에서 헤엄치고 뛰노는 모습을 정겨운 풍경화처럼 노래한 시. 인간에게 과거란 대부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다. 백석은 1950년 이전에 주로 작품 활동을 했던 시인이다. 그러니, 이 시는 아마도 1930~1940년대쯤 쓰인 것일 터. 그로부터 100년이 채 못 되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경상북도 어떤 시골마을에 가도 아이들을 보는 게 쉽지 않아졌다. 백발의 노인들만이 마을 입구 당산나무처럼 쓸쓸한 표정으로 고향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비단 경북만이 아니다. 전라도와 충청도, 경기도와 강원도의 대부분 농촌이 대동소이한 풍경이 돼버렸다. 사람은 줄고 빈집은 늘어간다. 어떤 특단의 처방을 써야 초여름 더위에 윗옷을 벗고 깔깔대며 물장구치는 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뾰족한 방법이 없을 듯해 더 서글프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6-09

울릉도~강릉 15년간 이용한 여객선 어항 사용 불허…왜 하필 강릉해양경찰서 개청 직후에 이런 일이?

울릉도와 강릉을 오가는 여객선 항로가 오는 24일부터 운항이 중단된다. 15년간 별 어려움 없이 이용해 온 강릉항의 접안시설과 터미널 사용에 대해 강릉시가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사용 연장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는 울릉도 관광 성수기를 앞둔 시점에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행정 결정이다. 만약 안전이 우려된다면, 여객선 운항이 없는 겨울철을 활용해 보수하거나 정비를 시행하는 방식도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 속담에 ‘까마귀가 날자 배 떨어졌다’는 뜻의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는 말이 있다. 관계없는 두 사건이 공교롭게 겹쳐 의심을 사는 경우다. 하필이면 올해 3월 강릉해양경찰서가 신설된 직후, 15년간 아무 문제없이 사용되던 강릉항 여객선 시설이 돌연 사용 불허 처분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 고사(古事)가 떠오른다. 울릉~강릉 항로는 2022년 14만 7천 명, 2023년 10만 9천 명, 2024년에도 10만 6천 명이 이용할 정도로 수요가 높다. 과거 세월호 사고 이전에는 여객선 두 척이 연간 30만 명 이상을 실어 날랐다. 특히 2011년부터는 국내 최고급 초쾌속 여객선이 투입되며, 수도권과 강원 북부, 충청 지역 관광객들의 울릉도 접근성을 크게 높였다. 강릉항 주변의 상가, 횟집, 숙박업소, 택시 업계 등도 여객선 이용객 덕분에 직접적인 경제적 수혜를 입었다. 이 같은 혜택을 강릉시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객선 운항을 막는 결정을 내렸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상식적이라면 오히려 강릉시는 이 항로를 활용해 지역 관광과 연계한 상품을 개발하고, 관광객 유치에 나서야 한다. 그게 순리다. 그런데 이번에 영 딴판의 결정이 내려졌다. 강릉시의 처사는 인근한 양양군과는 너무나 대비된다. 강릉보다 항로가 길고 조건이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울릉도 여객선 유치를 위해 수년간 노력해온 양양군은 최근에는 연간 100억 원 이상을 투입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울릉군과 MOU까지 체결했다. 결국 강릉항에 이미 여객선이 운항 중이라는 이유로 사업 승인이 어려워 포기를 했지만, 강릉시는 주어진 기회마저 스스로 내던지며 지역 발전을 위해(危害)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해양경찰은 국민의 안전과 해상 교통을 책임지는 기관이다. 여객선 운항은 그 주요 업무 중 하나다. 해양경찰서 신설 직후 강릉시가 여객선 운항을 막는 결정을 내린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만 볼 수 있을까. 시중에는 온갖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이런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강릉시와 해양경찰은 이번 조치에 대해 보다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해명을 내놓아야 한다. 울릉도는 대한민국 국민의 ‘쉼’을 위한 소중한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강릉시가 연장을 불허한 이 항로는 강릉지역에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적극 활용할 경우 오히려 상생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행정의 본질은 국민 편익을 우선하는 것이다. 강릉시의 보다 책임 있는 대응을 기대한다. /김두한 기자 kimdh@kbmaeil.com

2025-06-09

정면 돌파!

요즘 이상할 정도로 자주 중얼거린다. 정면 돌파! 마침표로 끝나선 안 된다. 느낌표까지 꼭 넣어야 제맛이다. 단호한 어조로 짧고 굵게, 주먹까지 쥐고 흔들어주면 훨씬 좋다. ‘정면’과 ‘돌파’를 연달아 발음하면 한층 더 씩씩해진 기분이 든다. 장애물을 격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태권 소녀의 앙다문 입술이 생각난달까. 물론 나는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발만 동동 구르는 쪽에 더 가깝지만. 뭐, 엄밀히 말하면 돌파해야만 하는 대단한 일이 있는 건 아니다. 답신이 껄끄러워 뒤로 미뤄놓았던 메일이나 옷장 한편에 수북하게 쌓인 옷가지처럼, 별일 아닌데 왠지 자꾸만 피하게 되는 일들. 은근히 마음의 짐이 되는 청구서며 세금 처리, 원고 마감까지… 물론 고작 이 정도를 앞에 두고 돌파를 운운하는 것이 퍽 우스워 보일지도 모른다. 나약한 인간의 조악한 외침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오늘도 외친다. 정면 돌파! 어쩌면 미루는 방식은 내가 가장 능숙하게 익힌 생존 기술일지도 모른다. ‘안 읽음’으로 표시된 채 쌓여가는 메시지, 몇 번이고 넘기며 무시하는 아침 알람, 내일의 내가 처리해 줄 것이라는 허울로 덮어둔 일들. 때때로 나를 마주하는 일은 거대한 벽을 넘는 것만큼이나 큰 용기가 필요하다. 간단한 일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정면 돌파는 불편하다. 가끔은 낯 뜨겁기까지 하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무대 한가운데에 나 혼자 덜컥 올라선 장면처럼 느껴진다. 어설픈 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야만 하는 심정이랄까. 정면으로 돌파한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믿겠다는 선언인데 나는 나 자신을 누구보다 신뢰하지 않는다. 방문을 닫고서 몸을 웅크리는 쪽이 훨씬 편하다. 아직 아니야. 더 완벽한 때가 올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다 보면 시간은 모래알처럼 손에서 빠져나가 버린다. 어렸을 때 태권도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조른 적이 있었다. 울고 떼쓰고 길거리에 드러눕기 신공까지 펼쳤건만, 끝내 등록은 하지 못했다. 아마 엄마는 태권도가 여자아이가 하기에 과격한 운동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나는 도복을 입고 놀이터를 돌아다니는 친구들을 질투와 시기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유년에 힘차게 뛰어노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게 아쉬워. 술자리에서 푸념처럼 늘어놓던 말에 언젠가 한 친구가 너무나도 맑고 천진한 얼굴로 답을 내어놓았다. 지금부터라도 배우면 되잖아?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겐 어떤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과거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작년 새해 목표에 태권도 학원 등록하기도 슬쩍 넣어두었다. 물론 미루고 미루다 해가 바뀌어 버렸지만. 이따금 녹슨 관절을 이끌고 스트레칭하며 변명한다. 괜히 다치기라도 하면 이제 뼈도 잘 안 붙어. 암, 그렇고말고. 나 자신을 설득하는 목소리는 해가 갈수록 강해지는 것 같다. 언제나 그럴듯한 도피처를 만들어낸다. 내가 뭔가를 피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면 육상경기 도중 허들이 무서워 되돌아서는 선수를 떠올려 본다. 연습이 부족해 허들을 넘지 못하는 것은 괜찮다. 경기 도중 허들을 피하는 것이 더 문제다. 그런 면에서 정면 돌파는 해결의 기술이 아니라 회피하지 않겠다는 자세에 가깝다. 나는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측면을 노리거나 슬쩍 방향을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식이라고 생각해 왔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고 가성비와 효율성을 따지는 세상에서 정면으로만 돌진하는 태도는 오히려 바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삶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순간은 외면하면 얼굴을 바꿔 다시 찾아온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았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순간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타협의 영역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는 세련된 기술이다. 나 자신을 덜 다치게 하고 타인을 더 이해하려는 시도를 통해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는 사실 또한 이해한다. 이러한 균형을 유지하며 나와 주변을 돌보는 것이 인생의 과업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이러나저러나 발은 한 번 디뎌보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본다. 거기가 푹신한 잔디밭이든 낭떠러지든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주먹을 쥐고 외쳐보는 것이다. 그래, 까짓것 한번 해보지 뭐. 쉼표 뒤에는 느낌표. 느낌표 뒤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쁘지 않을 것이다. 부딪치고 깨지고 산산이 부서진 모양 또한 나름의 멋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기에. /문은강(소설가)

2025-06-08

빠른 생일의 비애

나는 1987년 2월 18일에 태어났다. 2월 18일이라는 날짜를 생일로 갖는다는 것은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몇 년이 흘러 나는 남들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취학통지서를 받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월 1일에 다 같이 한 살을 먹는 세는 나이를 흔히 사용하는데, 초등학교의 입학 대상은 이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3월 1일부터 2월 29일까지를 한 학년으로 정의하는 3월 학기제를 사용하는 대한민국 교육부는 학기의 시작인 3월 1일을 기준으로 만 6세에 해당하는 아이들에게 취학통지서를 발송했다. 그러다보니 3월부터 12월에 태어난 아이들은 세는 나이로 8세에 학교에 입학을 하고, 1월부터 2월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7세에 입학을 하는 기이한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2009년에 해소되었다고 하니 다행스런 일이지만 어쨌거나 1987년에 태어난 나는 1986년에 태어난 형, 누나들과 동창이 된 것이다. 내가 원해서 생긴 일이 아니다. 나로서도 1993년에 입학하는 것보다 1994년에 입학하는 편이 더 행복했을 것이 분명했다. 성인이 된 지금이야 몇 달 일찍 태어나고 늦게 태어나고 하는 문제가 신체적인 차이로 나타나지 않지만, 빠르게 성장할 시기인 만 6세 아이들에게 몇 달은 어마어마한 신체적 차이를 발생시키는 기간일 수 있다. 나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1993년 입학 어린이들 중 막내 축에 들에 되었다. 1986년 3월에 태어난 친구들과는 11개월이나 차이가 났으니 당연히 그들보다 키도 작고 머리도 덜 여물었을 터였다. 실제로 나는 지금 내 나이 대 남성의 평균 신장을 아주 조금 넘는 키를 가지고 있지만 초등학교때는 내내 스무 명 남짓한 남학생 중 키 순서로 3번에서 6번 사이를 왔다 갔다 했으니 상당히 왜소한 편이었다. 가장 늦게 태어난 아이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키가 작다고 걱정할 이유는 없었는데 학교를 한 해 일찍 가는 바람에 키 걱정을 달고 살 수밖에 없었다. 선택할 수 있었다면 1994년에 입학해서 1987년 생 중 맏이 노릇을 하는 것이 학교생활에 있어 여러모로 유리했을 것이 분명하다. 어릴 때 겪었던 성장 속도의 문제는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해결이 되었지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가끔씩 느끼곤 했었던 소외감이었다. 비록 한 살이 어리지만 함께 학교생활을 하는 동창들과는 친구로 지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가끔 나이 이야기가 나올 때 나만 머뭇거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다른 친구들보다 한 살 어리다는 사실을 꺼내 놓으면 누군가는 나더러 왜 자기한테 형이라고 부르지 않냐며 윽박지르기도 했다. 더군다나 나는 입춘마저 지나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모두에게 부여되는 12간지, 다시 말해 띠는 입춘을 기준으로 한다. 1987년 1,2월에 태어났더라도 입춘이었던 2월 4일 이전에 태어난 친구들은 1986년생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호랑이띠가 된다. 그러나 2월 중에서도 뒤쪽에 해당하는 18일에 태어난 나는 그 호랑이들 사이에서 홀로 토끼로 지내야만 했다. 하필 또 호랑이랑 토끼였다.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곤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문제는 발생한다. 학교 다닐 때야 ‘몇 살이야?’보다 ‘몇 학년이야?’를 물어보니 문제가 적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위아래를 가리기 위해 꼭 ‘몇 년 생이십니까?’ 혹은 ‘몇 살이십니까?’를 묻게 되니 간혹 난감해진다. 2025년 현재 세는나이로 1986년생은 마흔 살이고 1987년생은 서른아홉 살이다. 사실대로 1987년생, 서른아홉 살이라고 하면 ‘기어이 삼십 대에 붙어 있으려고 한 살을 깎느냐’고 핀잔을 주는 이들과 굳이 나에게 형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1986년생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1986년생 마흔 살이라고 하면 나중에 내가 1987년생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치사하게 나이를 속였다’며 파렴치한으로 몰리기도 한다. 이러나 저러나 족보가 꼬인다며 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정확하게 ‘빠른 87년생입니다’고 하면 굳이 ‘빠른’을 챙겨먹으려고 한다고 비웃는 이가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내가 서른아홉이어도 상관없고 마흔 살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단지 일관성 있게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어디 가서는 서른아홉으로 살고 어디 가서는 마흔으로 사는 것은 내가 피곤해서 싫다. 차라리 누가 정해주면 좋겠다. “당신은 1987년생이니 이제부터 1986년생을 만나거든 형님, 누님으로 대하세요.”, 혹은 “당신은 오늘부터 1986년생과 다름없이 마흔 살로 살아야 합니다.” 하고 말이다. /강백수(시인)

2025-06-08

포항시 민자사업 줄줄이 표류… 근본적 대안 필요

포항시가 민간 자본 유치를 통해 추진하던 주요 관광개발 사업들이 잇따라 좌초되며 민자사업 전반에 비상이 걸렸다. 시의 계획 수립 미비에 따른 결과여서 비판이 나온다. 최근 포항시는 영일만 해상케이블카 사업 시행자인 포항영일만해양케이블카㈜에 대해 시행자 지정 취소와 실시협약 해지를 위한 행정 절차에 착수했다. 시는 관련 청문회 개최 후 책임 소재가 가려지면 시행자 지위를 해제한다는 계획이다.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은 데 따른 조치다. 사업자의 반발이 예상돼 법정 다툼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영일만 해상케이블카 사업은 2017년 대한엔지니어링(주)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 본격화됐고 시민들의 기대도 컸다. 3여 년에 걸친각종 인허가 완료 후 2020년 11월에는 실시계획 인가까지 받았다. 총 사업비 950억 원이 투입되는 사업으로, 여객선터미널 주차장과 환호공원을 잇는 1.8km 구간에 케이블카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딱 거기까지였다. 시중 금융기관으로부터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한 발짝도 나아기지 못했다. 한때 2019년에는 GS건설이 참여를 검토, 반전의 기회를 맞는 듯 하기도 했지만, 이 회사도 얼마 후 사업성이 부족하다고 판단, 발을 빼면서 백지화됐다. 시행사는 이후 시민 출자 형식의 ‘포항관광문화진흥조합’을 통해 자금 조달을 시도했으나, 조합원 참여가 저조해 이마저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지켜보던 시는 더 이상 현 시행자로는 진척이 어렵다고 보고, 조만간 지위 박탈에 나서기로 했다. 민자로 진행된 두호마리나 항만개발 사업도 제자리 상태다. 2016년 ㈜동양건업이 민간투자 사업자로 선정되면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사업비 1946억 원 규모로 진행됐다. 2018년까지 두호동 일원 22만㎡ 부지에 200척 규모의 계류시설과 클럽하우스를 조성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시행사는 사업성 문제를 이유로 대단위 공동주택 허가를 요구했고 시가 들어주지 않자 사업을 중단했고, 이후 더 이상 진전은 없다. 이 두 사례의 실패 책임은 전적으로 과도한 장밋빛 청사진으로 계획을 수립하고 인가를 받은 시행자에게 있다. 그러나 민자유치에 나선 포항시도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스럽지는 못하다. 따라서 이제라도 민간투자 유치 정책 전반에 대한 재점검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포항시가 민자사업을 유치하면서 적용하고 있는 ‘순수 민간투자 방식’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문제가 있다. 공익적 기능이 있을 경우 자치단체가 일부라도 직접 투자하거나 재정지원을 하는 것은 시대적 추세다. 그렇지 않으면 사업 추진 동력이 크게 약화되고 사업비 조달 또한 벽에 부딪히기 일쑤다. 최근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국‧도비 보조를 통한 인센티브 제공, 또는 민관이 공동 출자하는 제3섹터 방식 등을 활용하고 있는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포항시는 이런 대안적 접근엔 애써 외면해 왔다. 이는 포항시가 이차전지 관련 민간기업을 유치할 때 부여한 세제 혜택, 저렴한 부지 제공은 물론 공업용수 및 전력 공급 등 여러 방면에서 국비·도비·시비를 투입한 것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것이다. 이차전지가 성장산업이라면 케이블카 또는 마리나 개발도 포항의 관광지도를 바꿀만한 사업이다. 그런 점에서 민간투자 성공을 위해 공공이 일정 부분 리스크를 분담하고 뒷받침했어야 했다. 현재의 방식대로라면 앞으로도 주요 민자사업들이 줄줄이 난항을 겪을 것이 뻔하고, 포항시의 해양관광도시 육성 전략도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 포항시의 관광 분야 민간 투자 진행을 지켜본 전문가들은 “지속 가능한 민간투자 유치를 위해서는 민간의 수익 구조를 고려한 정책 설계와 더불어, 지자체의 일정한 역할 분담이 필수”라고 입을 모은다. 공공과 민간이 함께 책임을 지고 추진할 수 있는 구조로의 전환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임창희기자 lch8601@kbmaeil.com

2025-06-08

어정쩡한 개혁 흉내로는 어림도 없다

선거가 끝났다. 그렇지만 국민의힘은 그대로다. 변한 게 없다. 비상계엄이라는 기상천외한 바보짓으로 정권을 상납했다. 그것을 수습하고, 선거에 임하는 자세도 모두 헛발질이다. 선거에 이기겠다는 건지, ‘알량한’ 당권과 공천권에만 욕심을 내는 건지, 알 사람은 다 안다. 친한(한동훈)계와 친윤(윤석열)계가 다시 싸운다. 친한계가 친윤 지도부의 사 퇴를 요구했다. 결국 권성동 원내대표가 5일 사의를 표했다. 16일 차기 원내대 표를 새로 선출한다. 권 전 원내대표는 “책임을 회피할 생각도, 그리고 변명할 생각도 없다”라면서도 “선거 때 뒷짐 지고, 분열 행보에 나서고, 권력 투쟁을 위해 민주당 논리를 칼처럼 휘둘렀다”라며 친한계를 비난했다. 김문수 전 대통령 후보는 선대위 해단식에서 후보 교체 소동을 언급하며, “우리 당에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신념, 그걸 지키기 위한 투철한 사 명이 없다”라면서 “깊은 성찰과 개혁이 필요하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재원 전 최고위원이 SNS에 김 전 후보가 턱걸이하는 동영상을 올리자, 당 대표 출마설이 나왔다. 그렇지만 김 전 후보는 “대표(직)에 아 무 욕심이 없다. 누구든지 할 사람이 하고, 제대로 해야 한다”라고 부인했다. 그런데 그는 9일 현충원도 참배했다. 경쟁자들이 계속 의심하고, 견제한다. 이런 지경으로 만들어놓고도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꼴에 분노가 치민다. 김 전 후보는 대선에서 41.15%를 얻었다. 이재명 후보의 49.42%보다 적지 만, 비상계엄과 탄핵으로 치르는 선거치고는 매우 높은 득표다. 이준석 개혁 신당 후보가 얻은 8.34%를 합하면 아슬아슬하지만, 더 많다. 그렇지만 산술적 합이 무슨 의미가 있나. 김 전 후보를 찍었다고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게 아니 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반(反) 이재명 유권자도 많다. 이번 선거도 비호감 선거다. 윤석열과 이재명, 누가 더 싫은지 경쟁이었다. 지역구별로 국회의원 선거로 계산해 보면, 국민의힘 의석이 99석에 불과했다고 중앙일보가 분석했다. 개헌 저지선(100석)에도 못 미친다. 이 대통령이 얻은 표는 절반에 못 미친다. 그런데, 의석은 3분의 2다. 표의 등가성이 무시되는 이런 선거제도를 고집한 건 국민의힘이다. 정권보다 당권과 자신의 공천에 더 매달린 현역 의원들 탓이다. 윤 전 대통령의 행태는 더 기가 찼다. 탄핵 반대 시위대의 표를 자기가 만들 어줬다고 착각한다. 윤 전 대통령이 아니면 그 표가 이재명 대통령에게 갔을까. 오히려 영향받은 건 중간층이다. 윤석열과 이재명, 누가 더 싫은지 저울질하던 사람들이 돌아서게 했다. 보수 후보보다 윤 전 대통령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이, 이재명 후보는 우클릭해 산토끼 잡기에 열중했다. 친윤 당 지도부는 중도 확장보다 윤 전 대통령 보호에 매달렸다. 비상계엄과 탄핵으로 생긴 선거다. 그런데도 윤 전 대통령과 선을 긋지 못하게 막았다. 심 지어 정치권에 뿌리가 없어 조종하기 쉬운 후보로 교체하려 했다. 김문수 후보는 다른 후보들을 떨어뜨리는 수단으로만 써먹으려 했다. 그렇게 당선된 후보를 자진해서 사퇴할 수밖에 없는 형편없는 후보라고 낙인찍어 놓고,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했으니, 이미 지고 들어간 선거다. 그렇다고 비윤(非尹)은 잘했나. 오십보백보다. 보수의 미래는커녕 집안싸움에 날을 샌다. 그러고도 다음 선거를 치를 수 있겠나. 보수 지지층은 검은 고양이 건, 흰 고양이건, 쥐 잡는 고양이를 원한다. 친윤도, 비윤도 아니다. 지금 중진입네 하는 중견 정치인들을 모두 싹 물갈이하고 싶은 게 보수 지지층의 솔직한 심정이다. 이미 물러난 전임 대통령 체면이 무슨 문제인가. 그들 내외의 지저분한 과거를 방탄하는 일이 어떻게 최우선 원내 과제가 되나. 거기에 집중하기 위해 반 성도, 개혁도 미뤄야 한다는 건 무슨 소린가. 국민이 잘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더 가혹하게 반성하고, 잘라내야 한다. 반성하고, 바꿀 수 없는 사람은 차 라리 물러서라. 완전히 환골탈태(換骨奪胎)할 수 없다면, 차라리 해체하고 다 시 시작하는 게 답이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6-08

청년이 뿌리 내리는 곳, 스마트농업 도시 봉화

청년이 경쟁력인 시대다. 인구 구조의 변화는 사회와 경제 전반에서 청년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으며, 이로 인해 청년층의 역할과 가치가 날로 커지고 있다. 하지만 수도권으로의 청년 인구 유출이 가속화되면서 지방은 지속적인 인구 감소와 그에 따른 인구소멸 위험에 처해 있다. 경북도 내 22개 시군 가운데 15곳이 소멸 위기에 놓여 있어 지역 붕괴가 현실로 다가왔다. 봉화군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말 기준 봉화군의 인구는 약 2만 8천명으로, 출생아 수보다 사망자 수가 10배 이상 많은 등 자연적 인구감소가 가속화되고 있다. 다른 지방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봉화군 역시 저출생, 고령화에 따른 인구 문제 해결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인구감소는 지역사회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되는 핵심 문제로 지금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봉화의 미래는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화군은 지역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청년 유입에 주목하고 있다. 군민 다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지역 특성을 고려해, 청년농업인을 유치하고 농업 기반을 강화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특히 청년들이 안정적으로 귀농하고 정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다. 최근 미래 농업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스마트팜 역시 주요 전략 중 하나다. 정부와 여러 지자체에서 스마트팜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 봉화군도 이에 발맞춰 임대형 스마트팜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봉화 임대형 스마트팜은 봉성면 일원에 총공사비 235억원을 들여 총면적 5.3ha, 이 중 스마트팜 조성면적 3.5ha 규모로 조성 중이다. 지난해 11월 착공식을 개최한 이후 현재는 기반조성을 위한 토목공사와 스마트 온실공정 공사를 병행해 진행하고 있으며, 올해 하반기에는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공사 완료 후에는 A동 딸기 재배동에 4팀 12명, B동 토마토 재배동에는 3팀 9명 등 총 21명의 임대 농업인들이 입주해 본격적인 스마트 농업을 시작하게 된다. 봉화 임대형 스마트팜에는 우박 등 자연재해 예방과 자정 능력이 뛰어난 불소수지 필름이 적용되며, 임대 농업인의 편의를 고려해 팀별 환경제어실, 회의실, 휴게 공간 등도 마련된다. 청년 농업인을 위한 기반시설도 함께 확대하고 있다. 봉화군에서는 영농 경험이 부족한 청년들을 위한 청년 농업인 경영실습 임대농장을 운영 중이며, 지난 4월에는 봉성면 금봉리 일원에 위치한 스마트 온실에서 유럽계 토마토 품종인 레드칸(RED KHAN)을 식재해 첫 영농을 시작했다. 이 실습농장은 청년들에게 영농 기술과 시설농업 운영 경험을 제공하고, 창업 전 전반적인 기술지도를 통해 실패 가능성을 줄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바로 옆에 위치한 스마트농업 테스트베드 온실에서는 커피나무 시험 재배가 진행 중이다. 커피는 일반적으로 남위 25도에서 북위 25도 사이의 아열대 기후에서 자라기 때문에 국내 재배는 어렵지만, 스마트팜 기술을 활용해 봉화군에서도 시험 재배가 가능해졌다. 이번 커피나무 시험 외에도 새로운 소득 작목 도입을 위해 다양한 실험을 병행 중이다. 지난달에는 여름딸기를 식재했으며, 오는 6월에는 리시안셔스를 추가로 심었다. 커피처럼 기후 변화에 적응 가능한 작물을 지속적으로 시험 재배해 농가에 새로운 재배기술을 보급하고, 이곳을 스마트농업 실습 교육장으로도 활용해 차세대 농업 인재를 양성하며 지역 농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끌어갈 계획이다. 농업이 봉화지역 경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청년농업인들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첨단 농업 기술을 실현하며 자립할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힘 쏟을 예정이다. 많은 청년들이 스마트팜을 통해 농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경험하고, 봉화에서 꿈을 실현하며 정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25-06-08

마음 없는 마음이 있어

새벽에 ㅁㅇ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그런 것보다는 자음(子音)만을 떠나보냈을 모음(母音)의 안부가 어쩐지 궁금했다 그게 마음이었다면 ㅁㅇ이 떠나가며 버린 자리엔 ㅏㅡ만 남아서 아으:[감탄사]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심하게 아플 때 나오는 소리. 명치 끝에 얹힌 녹을 닦으며 쭈그려 앉아 있지는 않을까 마음의 미안으로 미안의 마음으로 (···.) ㅁ과ㅇ의 뚫린 입을 텅 빈 중심을 허방을 실족을 부재를 낯설어하는 내가 낯설기만 한 나는 누구일까 (···.) 거꾸로 돌려봐도 무엇 하나 설명 못하는 막연은 그런 것보다는 살기 위해 한 숟갈 미음을 억지로 삼키는 것처럼 한 마음을 입가로 흘리며 떠먹은 적 있었던가 새벽에 ㅁㅇ이라는 말을 보냈는데 ㅇㅇ이라는 답장이 돌아온다 아으, 라는 말을 발음하려거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응응, 나도 잘 지내 ―이현호,‘ㅁㅇ’부분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문학동네) 초성 놀이를 해본 적 있는가. 이현호 시인의 시‘ㅁㅇ’을 무어라 읽어야 할까.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언표가 마음이라는 생각에‘마음’으로 읽어본다. 기실 저 뚫린 네모와 동그라미의 기표 속에는 퍽 많은 마음이 살았거나 다녀갔을 것이다.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이기에 마음에 들어서, 마음에 안 들어서 혹은 가지거나 버리거나 가졌다가도 버리고 버렸다가도 욕망하는 것일까.‘마음’한 단어에 수많은 변덕이 있다. 시인에게 마음은 빈집이며 부재 하는 사랑으로 볼 수 있겠다. 가령 에로스(Eros)는 애초에 하나의 둥근 원이었으나 둘로 쪼개어졌기에 언제나 부재의 형식이 된다. “그리스 항아리 그림의 관례가 시적 뉘앙스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항아리의 에로스적 장면들을 보면 승리한 에로스보다는 유예되거나 가로막힌 에로스가 선호되는 주제였음이 분명히 드러난다.”(앤카슨, 에로스; 달콤 씁쓸한) 무릇 사람의 생애는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다. 사랑이란 애초에 결함으로부터 시작하기에 소설가나 시인들이 쓰는 서사는 대개가 실패에 관한 것들이다. 삶의 복잡성을 알려주고 사람의 궤적이 우리의 마음만큼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 그것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문학이라고‘그 개와 혁명’을 통해 소설가 예소연은 말한다. 비인간인 존재가 인간 세상의 부조리와 차별의 질서를 훼방함으로써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시인 이현호의 인용되지 않은 시‘인간성’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이걸 또 하면 사람이 아니다/다짐하고, 다음 날/사람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없는 세상을 써 나가는 신이 있다면/필요 없는 글자를 뺄 때 쓰는 교정부호를 내게 그렸겠지요” 마음을 내어주는 일에 골몰해 본 적 있는가. 적어도 이현호 시인은 사람에 대하여, 마음에 대하여 진심인 시인이다. “자음만 떠나보냈을 모음의 안부가 궁금하다”는 언술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시인에게 마음은 헐하지 않다.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 누구에게 갔는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정들면 지옥이라고 했다. 시인의 인용되지 않은 언술“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의 지옥이 있어”처럼“살기 위해 한 숟갈 미음을 억지로 삼키는 것처럼 한 마음을 입가로 흘리며”시인에게 뚫린 마음은 “미안으로, 미움으로, 막연으로”게다가 남은 모음은 고통의 감탄사가 된다. “아으”

2025-06-08

모순의 역설

선거가 끝나자마자 SNS에서 21대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가 무엇인지 투표하라는 광고가 떴다. 나는 망설임 없이 경제 살리기를 선택했는데 투표 결과를 보니 2위였다. 대통령의 생각은 무엇일까 호기심을 가지고 취임식을 기다렸다. 대통령 선서의 시간, 취임사의 맨 앞에 ‘벼랑 끝에 몰린 민생을 되살리고, 성장을 회복해 모두가 행복한 내일을 만들자’는 말이 나온다. 뒤이어 ‘정쟁 수단으로 전락한 안보와 평화, 무관심과 무능 무책임으로 무너진 민생과 경제, 장갑차와 자동소총에 파괴된 우리의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울’ 시간이라면서 공존과 화해와 연대를 호소하며 모든 국민을 아우르고 섬기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중도 보수와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이재명에게 지나치게 우클릭 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과 불안의 눈초리를 보낸 사람들에게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선언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타당성은 검증되지 않았지만, SNS에서 국정운영 최우선 과제 투표 결과 1위가 내란 극복인 것을 보면, 민생을 최우선으로 강조하는 것이 불만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국민의 이해관계가 모두 다른데 모두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의회를 마비시키려 했던 20대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분명한 국헌 문란이므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과제이다. 당나라 때 시인 한유는 문장이란 모름지기 ‘진리’를 실어야 한다면서 ‘가장 좋은 문장은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문장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좋아하는 문장’이라고 일갈하였고,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공자 역시 마을 사람 모두에게 칭찬받고 싶어하는 사람을 ‘향원’이라고 하면서 그런 사람이야말로 ‘공동체를 살리는 진정한 사랑’을 해치는 도둑이라고 성토하였다. 공자는 심지어 공동체를 해치는 사람과는 같은 나라에서 살 수 없다며 멀리 유배 보내야 한다고 단호하게 내쳤다. 그러고 보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할 대통령이 모든 사람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통합과 화해를 강조하는 취임사 영상 댓글에는 조롱과 혐오의 표현이 달리고,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은 통합과 화해가 빛깔 좋은 수사일 뿐이라며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나 전 여당의 김문수 후보가 40% 이상의 득표율을 얻은 현실에서 국헌 문란에 대한 책임 규명을 제일 서두르는 것처럼 보인다면 야당 탄압이니 독재니 하면서 갈등이 증폭될 것이다. 그러나 경제 각료 인선을 가장 먼저 서두르는 이재명 대통령의 모습에 국민의 기대도 커지고 있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가능하면 더 많은 국민에게 지지받아야 내란 종식도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민생이 안정되면 국민은 지지한다. 내란 책임을 묻는 궁극적 목적도 국민 화합과 행복이다. 성별, 나이별, 지역별로 갈기갈기 찢어져 서로 괴물 취급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도움 되지 않는다. 국민주권 정부는 경청과 설득을 엔진으로 삼아 민생 살리기에 힘쓰면서 내란 종식에 힘써주기를 바란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6-08

산업계가 필요한 인력은 공급되어야

세계적으로 출생 인구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 대한민국의 합계출산율은 2024년 0.75명으로,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출생 인구 감소는 사회,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농촌도 도시도 인구 부족 문제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농촌에서는 농사지을 사람이 부족하고 도시에서는 학생이 부족하고 공장에서는 기계를 돌릴 사람을 찾느라 사업주는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수출해야만 먹고 살아가는 나라에서 노동력 부족은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광주시는 ‘외국인 유학생 종합 지원 계획’을 수립, 시행한다. 5년간 총사업비 258억 5,000만 원을 투입해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함으로써 지역대학에 학생을 충원하고 산업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나아가 지역경제 활성화까지 기대한다. 울산시는 우즈베키스탄에 ‘울산 글로벌 인력양성센터’를 열었다. 모자라는 산업인력을 지자체와 기업체가 나서서 외국에서 직접 필요한 인력을 교육하여 산업인력을 충당하겠다는 것이다. 지자체와 기업은 당면한 문제해결에 바쁜데 정부는 아직 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D-2 비자를 받은 외국인 유학생은 졸업 후 E-7의 전문인력 비자나 F-2의 거주 비자로 전환해야 국내에 머물며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2023년 D-2 유학생 15만2094명 가운데 E-7 비자 전환율은 576명의 0.38%에 그쳤다. 까다로운 전환 요건이 애써 키운 학생들의 국내 정착을 막는다. 까다로운 비자 조건은 외국인 유학생의 국내 정착을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심지어 외국인 박사 학위 취득자의 연간 근로소득도 대부분 2000만 원 미만이며, 5000만 원 이상을 받는 사람은 11.9% 정도이다. 외국인에게 제한되는 ‘연구 환경 개선’도 과제다. 승진 기회도 부족하고 이들을 위한 정보도 부족하다. 외국인 유학생이 필요해서 데려오고 교육까지 시킨 뒤에는 다른 나라로 다시 보내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이러한 문제가 거듭되니 다른 분야에 비해 이공대학 지원자도 줄어드는 추세다. 이제는 외국인에게 문을 더 열어줄 시간이 되었다. 법과 제도를 개선하여 우리 경제가 돌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정착을 도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지금 당면한 우리 산업 모든 분야의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업인력 부족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에 반도체 공장이 들어서도 필요한 인력이 모자란다고 보도한다. 수년간 돈과 시간을 들여 기른 기술 인력을 다른 나라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정부에서 비자 발급 조건 완화에 따른 문제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산업계가 필요한 인력은 공급되어야만 한다. 시간이 지나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먹지 못한다. 모든 건 때가 있다. 그 시기를 놓치면 더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입하고서도 더 나쁜 결과를 얻기 쉽다. 유연한 정부의 정책 변화가 시급하다. 지금까지 정부와 지자체에서 낸 정책을 잘 엮어내면 우리 산업은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김규인 수필가

2025-06-08

병가지상사의 교훈

승패병가지상사(勝敗兵家之常事)란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당나라 헌종이 반란군을 제압하러 간 진압군 장수가 패하고 돌아오자 “병가에서는 지고 이기는 일이 흔한 일”이라며 위로하고 다시 진압을 명했다. 이후 다시 출전한 장수가 반란군을 진압하고 돌아왔다는 것이 고사의 내용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병가지상사는 실패한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로 잘 쓰인다. 정치도 대통령이라는 핵심 권력을 두고 여야가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것을 보면 전쟁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한번 진 싸움에서 5년간 권력을 넘겨줘야 하는 패자 정당에게 병가지상사가 위로의 말이 될지는 모르겠다.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두 개의 큰 축은 여당과 야당이다. 여당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정책을 생산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역할을 한다. 야당은 여당의 정책을 살피고 잘못이 있다면 엄하게 비판하며 제동을 건다.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하는 것이 야당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민주주의 기본원리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이 존재 가치로 인정받을 때 야당은 다음 선거에서 승리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21대 대선에서 패한 국민의힘에 대해 “잘 싸웠다”는 말보다 ‘뼈속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뜻의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요구하는 비판 목소리가 더 컸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많은 지지자들의 눈에는 그들의 정치가 무능했고 나약했음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병가지상사가 위로를 뜻하는 의미도 있지만 본 뜻은 분발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는 교훈을 갖고 있다. 환골탈태 또한 그런 의미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6-08

통합을 위하여

2024년 12월 3일 치욕적인 내란의 밤, 광란으로 촉발된 계엄의 밤에서 꼭 6개월 지나서야 제대로 된 정권과 정부가 탄생했다. 어찌 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다수 국민은 내란과 비상계엄 증후군 때문에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했다. 북풍한설을 견디며 부도덕한 공권력에 대항하여 민주 시민들은 거리에서 광장에서 사악한 권력자와 부역자들의 탄핵을 요구했다. 2025년 4월 4일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내란수괴의 파면이 선포됨으로써 대선이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재명 정부 혹은 ‘국민 주권 정부’에 막중한 시대적 책무가 부여되고 있다. 피폐(疲弊) 일로를 걷고 있는 경제 회생, 트럼프가 촉발한 자국중심주의 문제, 실추된 대한민국의 위상 제고, 국민 모두의 안전과 평안, 다자간 외교 무대의 복귀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최우선 순위로 꼽히는 사안은 사회통합이다. 예상보다 한참 늦어진 헌법재판소의 내란수괴 파면 선고와 얼빠진 재판부의 초법적인 수괴 석방, 수괴를 정점으로 하는 반민족적-반국가적 정당의 반역사적 저항 등으로 우리 사회는 분열 직전이다. 그래선지 적잖은 인사들이 사회통합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사회나 국가 혹은 문명의 성립과 발전에서 통합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구성원들의 생각이 어떤 방향을 취하는지에 따라 사회나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문명의 붕괴’에서 다이아몬드 교수는 기후변화, 환경파괴, 적대적인 이웃의 존재, 우호적인 이웃의 지원중단이나 지원감소와 함께 ‘구성원들의 생각’을 붕괴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제시한다. 누구나 사회통합을 바란다. 하지만 살 떨리는 12·3 내란 사태를 경험한 우리는 이 시점에서 통합을 위한 전제조건을 검토해야 한다. 친위 쿠데타를 통한 1인 독재와 장기 집권을 획책한 내란수괴와 그 하수인들을 철저하게 수사하여 법정에 세워야 한다. 치 떨리는 내란의 밤과 그 뒤를 이은 숱한 혼란과 엄혹한 상황의 조종자와 추종자들을 색출해야 한다. 그들이 지은 범죄에 준하는 형량으로 그자들을 단죄해야 한다. 내란수괴와 그 하수인들의 반헌법적이고 위법한 명령에 따르지 않은 충직한 군인과 경찰 그리고 관리들에게는 적절한 포상과 아울러 승진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죄를 지은 자에게는 형벌이, 위험을 무릅쓰고 의무를 다한 분에게는 포상이 있어야 국가와 공동체의 존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시점에 내란 특검, 김건희 특검, 채상병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다행한 일이다. 범죄로 얼룩진 전직 대통령 부부가 나란히 법정에 서는 희유(稀有)한 상황이 목전에 있다. 정치보복을 주장하는 일부 몰염치하고 몰지각한 자들은 사회통합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통합은 진정한 사과와 반성 그리고 관용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지난 6개월 동안 국민을 겁박하고, 국론을 분열시키고, 당리당략에 몰두해 온 자들은 통합 아닌 봉합을 요구한다. 내란 같은 중대범죄를 척결하지 않고 뭉개는 것은 우리 사회와 미래를 파괴하는 반인륜적 행위다. 통합은 책임자 처벌과 사죄 그리고 진정한 화해에서 출발한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6-08

쪽빛에 물들다

자신의 색깔을 찾아서 술래가 된 친구에게 간다. 쪽빛 바다를 감고 골짜기를 굽이도는 길에 설렘이 일렁인다. 푸른 산 기스락에 도착하자 어느새 서녘이 노을빛으로 물든다. 민낯으로 반기는 친구의 얼굴이 비 갠 하늘처럼 말갛다. 흙빛이며, 먹빛이며 밤 이슥하도록 나누는 이야기에 별빛이 반짝 내려앉는다. 별이 사그라진 무렵, 친구가 나를 깨운다. 눈 밑에 덕지덕지 붙은 잠을 새벽바람이 몰아낸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자 밤새 물을 빨아올린 쪽에 자줏빛이 촉촉이 올랐다. 연보라 꽃을 한 두 송이 물고 있는 쪽은 아침이슬까지 머금어 색깔이 절정에 이르렀다. 햇살이 꽃눈을 틔우는 봄부터 풀빛 바람이 산모롱이를 에도는 여름까지 오롯이 쪽에 담겼다. 친구가 두 계절을 낫으로 베어 내게 한 아름 안긴다. 풋풋한 풀냄새를 맡자 온몸에 쪽빛이 번지는 것 같다. 친구가 소매를 걷어붙인다. 쪽을 맑은 물로 헹군 다음 항아리에 반쯤 채운다. 항아리에 물을 붓고 그 위를 돌로 지그시 눌러둔다. 비닐로 덮고 숨구멍을 뚫어주면 다음은 기다림이다. 하안거(夏安居)에 들어간 쪽은 체액을 배출하고 물은 그것을 받아들이며 둘은 끊임없는 교감을 나눈다. 땅을 달구는 태양열에 쪽이 발효되면서 물은 그 빛을 온전히 수용한다. 어둠 속에서 쪽과 물이 하나가 되고 다시 빛이 들면 쪽은 색깔로 자신을 말할 것이다. 여유를 즐기는 것도 산골의 일상 가운데 하나다. 뜨거운 물을 다기에 부어 작년에 말려둔 국화차를 우려낸다. 친구가 산골에 들어와 해와 달의 주기에 맞추기까지 사계절이 세 번이나 순환했단다. 염료를 구하려면 때를 맞춰야 하고 그 색깔을 우려내려면 땀을 흘려야 했다. 그렇게 도시에서 묻은 때를 씻어내면서 시나브로 자연에 물들었다. 국화차 한 모금 머금자 정겨운 담소에 노란 향기가 더해진다. 며칠 묵힌 항아리를 연다. 쪽잎에서 녹색 기운이 사라질 즈음 한 번 뒤집는다. 첨벙첨벙 물이 흔들리면서 쪽은 바깥공기로 숨을 쉰다. 어둠에 싸여있던 쪽은 그제야 한 줄기 빛을 받아 물에게 자신의 빛을 내놓는다. 마지막까지 제 몸을 우려낸 쪽을 건져 항아리 위의 횃대에 걸친다. 늙은 부모의 속살처럼, 쪽은 이제 알갱이는 물에 내어주고 쪼그라든 껍질만 남았다. 자신의 가치를 빛깔로 남기면서 할 일을 다 한 쪽은 훨씬 자유로워졌다. 암녹색 물에서 풀냄새가 풍긴다. 패각회를 항아리에 넣고 대나무로 휘젓자 기포가 생긴다. 바가지로 퍼서 고운체에 거르자 찌꺼기가 물과 분리되면서 쪽빛은 본연의 색으로 서서히 드러난다. 심연의 색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듯 항아리 속의 물을 퍼 올린다. 잿물을 넣어 쪽 발을 세운 다음 미리 빨아놓은 천을 조금씩 담근다. 천으로 옮겨가는 물은 처음에는 녹색으로 보이다가 건져내면 청색으로 변하는 마법을 부린다. 적시고 말리기를 거듭할수록 쪽빛은 더욱 깊어진다. 둘이 마주서서 천을 길게 펼쳐든다. 친구와 나 사이에 쪽빛 길이 난다. 생명의 기원인 바다, 바다색에서 남색 그리고 감청색까지 점점이 깊어지는 색은 볼수록 신비롭다. 처음에는 하늘색이다가 바다색으로 변한다. 깊이를 더한 쪽빛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심연에 닿아 꿈의 색깔이 된다. 내 본연의 색깔은 무엇일까. 이십대를 지나면서 빛이 바래다가 엄마가 되면서 유년의 색깔은 흔적 밖에 남지 않았다. 가끔 내 속을 들여다보면 물색이기도 하다가 더러 사라진 꿈의 색깔이 희미하게 스치기도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쪽처럼 친구는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의 색을 펼치고 있다. 자신을 다 내 놓고 영혼을 우려내야 완성되는 빛,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진 쪽빛은 내일이면 더욱 짙어질 것이다. 천을 펴서 빨랫줄에 널고 바지랑대를 높이 세워 바람을 부른다. 천이 만장처럼 펄럭이자 바람조차 푸른빛을 머금는다. 바람에 실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으로 가면 나의 빛깔을 찾을 수 있을까. 바다로 뛰어들어 수면 아래로 유영하다가 심연에 닿으면 태곳적부터 내려온 그리움의 색을 만날 수 있으려나. 그리움에도 빛깔이 있다면 쪽빛이 아닐까. 오늘은 내 마음도 쪽빛으로 물든다. /배문경 수필가

2025-06-04

냉방병의 관리와 치료

여름이면 많은 이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하지만 시원함을 찾다 보면 몸의 면역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흔히 냉방병이라고도 불리는 질환에 걸릴 수 있는데 단순한 감기와는 다르다. 더운날 갑자기 그리고 장시간 너무 찬바람을 많이 맞아 일시적으로 몸의 균형이 깨지고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로 한의학에서 보면 체온조절 기능의 교란, 기혈의 순환 장애, 그리고 장부의 기능실조가 복합적으로 얽힌 상태다. 증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는 감기 증상과 비슷하다. 두통, 코막힘, 오한, 피로감 등이 주로 나타나고 증상이 심한 사람은 위장 장애, 생리불순, 관절통 등이 나타날 수 있다. 여름엔 외기에 맞춰 적당히 땀을 흘려주도록 인체 시스템이 형성되는데 에어컨은 아주 강력하게 피부 표면을 차갑게 해 이를 막아 버린다. 순환의 관점으로 보면 피부 밖으로 나가야할 땀이 못나가고 막힌 피부로 인해 소통되어야 할 기혈의 순환에 문제가 생긴다. 피부와 근육 표면은 차가운 기운에 노출되어 막히고 속은 오히려 열이 차서 체내 에너지가 원활히 순환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위장이 냉해져 소화력이 떨어지고, 어깨나 무릎 같은 관절 부위에 통증이 발생한다. 특히 평소 몸이 찬사람 혹은 비위가 약하거나, 한랭한 음식을 즐겨 먹는 체질의 사람들에게 이런 증상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치료는 피부를 따뜻하게 하는 약재를 사용해 냉기를 몸 밖으로 몰아내고 장부의 기능을 조화롭게 맞춰주는 것이 관건이다. 대표적인 처방으로는 계지탕 시호계지탕이 등이 있고 속에 열이 많으면 석고나 치자 등으로 가미를 한다. 습이 많이 끼어 있는 경우 오령산 같은 몸의 습과 물을 제거하는 처방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처방은 피부 쪽을 따듯하게 하면서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고 습기를 제거하며 기혈 순환을 도와 전신의 기능을 회복시킨다. 만약 관절 통증이 동반될 경우 독활이나 강활 같은 약재를 추가하는 처방을 사용할 수 있다. 한편, 여름철에는 “한약을 먹어봤자 땀으로 다 빠져나가서 효과가 없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한약의 유효 성분은 대부분 위장관을 통해 흡수되고 땀을 통해 배출되진 않는다. 오히려 여름처럼 체온조절과 수분, 기력 소비가 많은 시기에는 더더욱 장부를 보호하고 기를 보충해주는 한약이 도움이 된다. 여름철에는 기허로 인한 식욕저하, 과도한 땀 배출로 인한 탈진 소화장애 등이 흔히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는 보중익기탕, 생맥산, 사군자탕 계열의 처방이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방이다. 실내외 온도차는 5도 이하로 유지하고, 장시간 에어컨 아래에 있지 않도록 하며 특히 배와 허리를 덮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에어컨은 현대인의 여름을 견디게 해주는 훌륭한 도구이지만 그만큼 체온 조절이라는 생리적 부담을 우리 몸에 안겨준다. 한의학은 이 부담을 자연스럽게 해소해주는 조율의 의학이다. 차가운 바람 아래서 ‘괜찮겠지’ 하고 넘기지 말고, 여름철 몸의 신호에 귀 기울여야 한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6-04

스페어(Spare)

스페어는 영어이지만 우리 일상에서도 종종 사용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있는 단어다. 급한 경우에 바꾸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예비로 준비하여 두는 같은 종류의 물품을 이른다. 볼링에서는 남은 핀을 그 다음에 모두 쓰러뜨리면 스페어 처리라고 한다. 스페어 타이어(spare tire)는 자동차의 펑크에 대비한 예비 타이어다. 어떤 단어이든 간에 여분이나 예비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외래어로 그대로 쓰고 있어 익숙한 말이다. 그런데 이 스페어라는 단어를 다소 생경한 의미로 사용한 책을 최근에 읽었다.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즐겨 본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지만, 특히 서양 왕실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일부러 찾아보고, 본 걸 또 볼 정도로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영국 왕실 배경 영화는 시대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즐긴다. 좋아하는 영화를 역사로 확인하려고 종종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기도 한다. 그러던 중에 포착된 책이 바로 영국의 둘째 왕자 해리가 쓴 ‘스페어(Spare)’였다. ‘예비용 왕자에서 내 삶의 주체가 되기까지’라는 부제가 붙어있었고 책 소개글에 이렇게 적혀있다. “형은 나보다 두 살 위인 데다 왕위 계승자였고, 반면에 나는 ‘예비용(spare)’이었으니까.” 스페어라는 말은 그가 태어난 날, 그의 아버지이자 현 영국의 국왕인 찰스가 한 말이기도 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그 자체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고 고결한 것이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심지어 미물이라 할지라도. 따라서 어느 누군가의 탄생도 여분일 수 없고, 예비용일 수는 없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예비용이라니, 그것도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정말 말이 되는 말인가. 아들의 탄생을 기뻐하고 아내의 수고로움에 대한 고마움을 표해야 할 그 순간 뱉은 말이라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충격이었다. 평소 찰스가 왕자였을 때도, 그의 결혼 전 갖가지 추문과 행실에도, 다이애나와의 결혼과 이혼, 다이애나비의 충격적 죽음 이후 지금의 왕비와의 연애사와 결혼에 이르는 온갖 뉴스를 접할 때도 밉상이었던 그였는데, 속물적 근성의 그를 철저히 경멸하기로 작정한 것은 바로 이 책 때문이었다. 책을 소개하면서 저자가 처음으로 전하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여실하고 주저없이 솔직한 태도로 삶의 여정을 기록한 기념비적인 책이며, 통찰과 고백, 자기성찰, 그리고 힘겨운 삶 속에서도 슬픔을 넘어서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으로 가득한 향연이라고 야단을 떨었지만 아직 40살도 채 되지 않은 남자의 삶이 뭐 그리 성찰적이겠는가. 단지 그가 특별한 신분의 왕자의 삶을 살아 세간의 관심이 힘들었고, 누구나 다 겪는 방황의 시기를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 특별히 겪었을 것이라는 정도의 내용은 뭐 그다지 감동을 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는 그가 태어나면서 규정된 ‘예비용(spare)’의 삶을 어찌 살아내었는지에만 관심이 쏠렸고, 그것이 안쓰러웠을 뿐이었다. 이 세상 그 누구의 삶도 예비용은 없다. 온전히 그만의 삶이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6-04

어쨌건 삶은 계속된다

6개월 전인 2024년 12월 3일 늦은 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그 이후 오늘까지 한국 사회엔 참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비상계엄은 그 즉시 국회에 의해 해제됐고, 계엄을 선포했던 전 대통령 윤석열은 탄핵된 후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이 결정됐다. 지금은 내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그의 아내 역시 검찰 소환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진통을 겪어야 했다. 선거운동 기간 주요 대선 후보들은 서로를 향해 비판과 비난의 말을 쏟아냈다. 후보와 가족의 도덕성 문제, 과거 적절치 못했던 발언과 행실, 후보 선출까지의 잡음 등이 질타의 대상이었다. 네거티브 선거전은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심해졌다. 이에 따라 국민들도 진보와 보수, 청년과 노년, 남성과 여성으로 갈려 상처가 될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6월 3일. 6개월의 혼란 끝에 21대 대선이 끝났다. 누구는 승리했고, 누구는 패배했다. 국민 10명 중 5명은 승리한 이재명 후보를 지지했고, 10명 중 4명은 패배한 김문수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결과가 어떻건 대선 과정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 피투성이 싸움이었다고 하면 과한 표현일까? 앞으로의 6개월, 아니 새 대통령의 임기 내내가 지난 6개월의 갈등과 상처를 봉합하는 화해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왜냐? 승리한 후보와 패배한 후보는 물론,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 모두에게 어쨌건 삶은 단절 없이 계속되는 것이니까.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 허니, 오늘. 국민은 과도한 환호나 비탄에 빠질 이유가 없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6-04

갈라진 지도를 보며 통합을 생각한다

새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선거는 끝이 났고 결과는 분명했다. 결과보다 깊이 헤아릴 것은 선거가 남긴 판세 지형도다. 투표 결과를 지도에 올려놓는 순간, 동과 서로 뚜렷하게 갈라진 색깔이 눈에 들어온다. 지역이 갈리고 민심이 나뉘었다. 선명한 분할이 남긴 건 승패라기 보다 어디까지 멀어져 있는 가 바로 그 현실이다. 경북은 이번에도 등을 돌렸다. 새 대통령을 밀지 않았다. 낯선 일도 아니다. 반복되어온 정치의 대립구조 속에서 경북은 늘 특정한 정치세력에 무게를 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예전과는 다르다. 경북의 선택은 단지 정치적 보수성이 아니라 오늘 정치가 흘러가는 방향에 대한 날카로운 거부로 보인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치는 민생과 동떨어졌고 정쟁이 일상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삶보다 진영을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지역은 소외되었고 정책은 공허했다. 경북이 보인 ‘등돌림’ 현상은 무력한 저항이자 마지막 자존심이다. 선거는 끝났다. 대통령은 결정됐고 정권은 교체됐다. 상황이 바뀌었으니 시선도 달라져야 한다. 대통령은 특정 진영의 대표가 아니라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어야 하듯, 유권자 역시 등을 돌린 채 그대로 있을 수는 없다. 무작정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지역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 마음을 닫은 채 냉소에 머무르면, 변화는 늘 우리를 스쳐만 갈 터이다. 화합은 인위적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통합은 선언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돌아선 마음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돌이켜야 한다. 대통령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화해를 말하기 전에 국민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 말보다 실천으로 증명해야 한다. 정치는 혐오의 무대가 아니라 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마당이다. 실증적인 변화가 느껴질 때 지역도 마음을 열기 시작할 것이다. 책임이 대통령에게만 있을까. 지역 역시 냉정한 눈으로 새로운 정부의 행보를 지켜보아야 한다. 못하면 비판하되 잘하면 지지해 주어야 한다. 중요한 기준은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일상을 중심에 둔 판단과 실천이다. 지역이 시민적 성숙을 이루어야 한다. 경북은 한때 한국 정치의 중심이었다. 산업화의 초석이었으며 보수정치의 심장이었다. 지금은 외면받고 있다는 자각이 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중심성을 회복해야 한다. ‘반대’ 일변도는 방법이 아니다. 정치의 방향성을 가늠하고 지역을 위한 비전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성숙한 정치 주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대통령은 5년마다 바뀌지만 국민은 오래 남는다. 지역의 생명 또한 길고 또 길다. 돌아앉은 마음이 돌아서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변화는, 새 대통령의 진정어린 실천과 시민의 준비된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가능하다. 그럴 때 비로소 오늘처럼 갈라진 지형도 위에도, 다리가 놓이고 새길이 열릴 터이다. 우리 모두는 나라와 국민이 잘되기를 바라는 같은 마음으로 한 배에 타고 있지 않은가. 차이를 극복하고 일상을 회복하며 자신 있게 미래를 열어가는 대한민국의 참모습을 다시 만나고 싶다. 어려운 시점에 5년을 책임질 새 대통령의 어깨에 온 나라와 모든 국민을 살피는 진심이 실리기를 기대한다.

2025-06-04

국민이 먹고사는 일, 이제 당신 손에 달렸습니다

오늘 새 대통령이 취임한다. 선거는 끝났다. 전임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 되면서 앞당겨 치른 선거다. 이런 헌정 중단 사태를 누가 책임을 져야 하나. 비상계엄이라는 터무니없는 조치를 내던진 윤 전 대통령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의 책임이 비교할 수 없게 크지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민주당을 포함해 정치권 전체가 져야 할 책임도 절대 가볍지 않다.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에 그 내용을 간결하게 잘 정리했다. 선고 요지는 “국회는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결론을 도 출하도록 노력하였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에게도 “국민의 대표인 국 회를 협치의 대상으로 존중하였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새 대통령이 누누이 강조하였듯이 비상계엄 사태의 정리가 시급하다. 비상계엄에 참여한 인사를 찾아내 징벌하는 것만 아니다. 사건 연루자는 검찰·경찰의 수사와 재판을 통해 정리될 것이다. 새 대통령이 할 일은 갈가리 찢어진 국민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헌재의 지적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정부와 국회의 충돌이 아니라, 두 가지 권력을 모두 장악했을 때의 독주에 대한 국민의 걱정도 덜어줘야 한다. 이제 선거는 끝났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진영의 논리로 돌진하던 시간은 지났다. 선거 동안 후보들은 “반쪽에 의지해서 나머지 반쪽을 탄압하고, 편 가르는 반(半)통령이 아니고,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모두의 대통령이 반드시 되겠다”라고 약속했다. 열성적인 지지자의 환호에 취하지 말고, 극단적인 진영 정치를 통해 훼손된 민주주의를 복원해야 한다. 일방적인 주장, 자극적이고, 편향된 가짜뉴스로 선동과 분열을 꾀하는 유튜버와 선동가, 음모론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졌던 윤 전 대통령의 사례가 증명해 준다. 민 주주의는 절제와 자제다. 특권을 포기하고, 자기 손에 든 것을 내놓고, 나눌 때 대화도, 타협도 가능해진다. 정권을 뒤흔드는 민심의 흐름은 먹고사는 일에 달렸다. 수출도, 일자리도 위 기다.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을 0.8%로 전망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촉발한 관세 전쟁은 우리 경제에 폭탄을 터뜨렸다. 5월 대미·대중 수출은 지난해 대비 각각 8% 이상 감소했다. 이재명 후보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민생” 이라며 “내수 경기 진작을 포함해 경제를 살리는 일부터 시작하겠다”라고 말했다. 선거용이 아니길 바란다. 새 정부도 탄핵 이후 정부다. 문재인 정부처럼 인수위도 거치지 않고 취임한다. 사전투표 직전에야 공약집을 내놨다. 구체성이 떨어지고, 급조된 흔적이 많다. 선거용으로 급조한 선심 공약이라면 다시 검토하는 게 옳다. 이제 후보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진 대통령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실용주의를 강조했다. “반미(反美)하면 안 됩니까”라 고 말했던 그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이라크 파병, 강정해군기지를 결정했다. 이재명 후보도 “김대중 정책이면 어떻고, 박정희 정책이면 어떻나. 유용하면 쓰고, 유용하지 않으면 버리면 된다”라고 말했다. 말에 그쳐서는 안 된다. 문재인·윤석열 전 대통령은 말과 행동이 달랐다.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한 축이 사법 체계다. 정치가 엉망이라도, 선출된 정치인이 부패해도, 법의 심판은 피할 수 없다는 믿음이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다. 사법의 정치화, 정치의 사법화가 만연하면서 법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 정치가 사법 질서에 개입하면, 당연한 결과도 특혜와 꼼수로 비친다. 이 역시 정치권력의 자제가 절대 필요하다. 선거는 끝났다. 패배한 정당은 선거 결과에 깨끗이 승복해야 한다.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다. 경쟁 정당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정 운영이고, 우리 자신의 생명과 재산이 걸린 문제다. 그래야 다음에 집권했을 때 경쟁 정당의 협조를 요구할 명분이 생긴다. 더구나 승자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스스로 패인을 분석하고, 반성하고, 고쳐야 패배 정당에게도 미래가 있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