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기절초풍의 똘똘한 한 채

KB부동산이 밝힌 9월 중 통계에 의하면 전용면적 84㎡ 아파트 기준으로 전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는 서울 서초구 반포동 ㄹ아파트다. 지난 6월 거래된 가격이 72억원이다. 반면에 비슷한 규모로서 전국에서 가장 낮게 거래된 아파트는 경북 김천시의 ㅅ아파트다. 지난 5월 거래 가격이 7000만원이다. 이 아파트 102채와 서울 ㄹ아파트 한 채가 맞먹는 가격이다. 서울 인기 아파트단지의 똘똘한 한 채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통계다. 똘똘한 한 채란 시세상승 가능성이 높고 환금성이 좋으며 실 거주와 투자 가치가 모두 뛰어난 부동산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서울 강남·서초 일대의 인기 아파트단지로서 교통, 학군, 생활 인프라 등이 뛰어난 알짜배기 부동산이다. 똘똘한 한 채가 투자 대상으로 등장한 것은 다주택 소유자에 대한 정부의 세금규제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여러 채를 구입하는 것보다 확실한 한 채를 보유하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똘똘한 한 채에 대한 투자가 집중됐다. 세금 부담도 피하고 자산의 안정적 가치상승도 기대할 수 있으니 투자자 입장에서는 일거양득 효과를 본 것이다. 지방의 아파트 102채를 팔아 서울의 아파트 한 채를 겨우 살 수 있다는 가정에 기절초풍하지 않을 사람 있을까. 아파트 값만으로 본다면 지방의 아파트는 처참할 지경이라 할 수 있다. 서울과 지방의 양극화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를 보는 젊은층이 지방에 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이같은 양극화 현상이 결국은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데, 과거의 정부 정책은 늘 헛발질만 한 것 아닌가. 지방에서는 똘똘한 한 채보다 똘똘한 정책을 바라고 있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9-11

AI와 상담한 소년이 죽었다

요즘 의뢰인들이 챗지피티로 검색한 자료를 갖다 주곤 한다. 얼마 전엔 소송을 하면서 법리적으로 풀리지 않은 쟁점이 있어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해당 사건의 의뢰인이 “변호사님, 우리에게 딱 맞는 판례를 찾아냈어요”라며 챗지피티로 검색한 자료를 보냈다. 적혀있는 판례들은 정말 이 사건에 딱 맞으면서도 유리한 판례들이었다. 판례 번호까지 적혀 있길래 당장 판례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을 해보았지만 그런 판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사한 내용의 하급심 판례조차 없는 상태였다. 우리 법의 법리나 판례 면에서 AI의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법률전문가가 AI 정보의 오류를 잡아낼 수 있지만 AI 가 99% 정확해지는 세상이 되면 오히려 1%의 잘못된 정보는 누가 찾아낼 수 있을까 싶었다. 누군가 그 1%의 오류를 찾아내도 사람들은 AI의 허위 정보를 더 신뢰하지는 않을까. AI의 잘못된 정보는 그 수요자의 인지 수준이 낮은 경우 더 큰 문제가 된다. 지난 대선기간 한 학습지 업체의 태블릿 패드의 질문란에 대선후보 한 명의 이름을 입력하니 ‘사형입니다’ 라는 답변이 나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언론에 이를 보도한 제보자는 “저 같은 경우 (아이에게) ‘이건 잘못된 거다’라고 얘기해 줬지만, 이건 저희 아이들만 쓰는 게 아니라 많은 아이가 쓰고 있고 그중에는 이걸 그냥 받아들이는 아이도 있을 것”이라며 우려했다. AI의 위험성이 객관적 정보에 대한 진위를 따지는 수준에서 끝나면 다행인데, 이제는 AI가 사람의 심리와 행동을 지배하는 단계까지 간 것 같아 문제다. 작년 미국 플로리다주의 한 14세 소년이 AI 챗봇과 대화를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다. 소년은 챗봇과 주로 성적인 대화를 나누었는데 챗봇은 마지막으로 소년에게 “사랑한다, 가능한 빨리 내게로 와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얼마 뒤 소년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소년의 부모는 챗봇 개발사를 상대로 불법행위에 의한 사망 소송을 제기했고 플로리다 중부 연방지방법원은 “이러한 해로운 상호작용은 AI챗봇의 설계 결함 때문에만 가능하다”라고 판단하며 AI 개발사 측의 책임 가능성을 인정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도 16세 소년이 챗지피티와 대화하며 자살 계획을 구체화하고 실행에 옮기는 일이 있었다. 이렇게 심리 상담과 관련한 부작용 사례가 계속해서 발생하며 미국은 심리 치료를 목적으로 한 AI 사용을 제한하거나 사용자의 위험 징후를 감지하면 AI가 전문적 정신건강 서비스를 권고하도록 의무화하는 등 관련 제도 마련을 시작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AI 윤리에 관한 규제는 아직 무방비 상태다. AI챗봇과의 대화는 개인 간 통신에 해당해 이용자의 신고 없이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 규제기관이 감독하기도 어렵다. 새 정부가 한국을 ‘세계 3대 AI 강국’으로 도약시키겠다는 목표 아래 다양한 AI 발전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어떤 분야든 발전과 성장은 안전· 보호와 함께 가야 오래갈 수 있는 법이다. AI 윤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아이들이 AI 친구와 대화하다 목숨을 잃는 일이 우리나라에선 없었으면 한다. /김세라 변호사

2025-09-11

‘공공재생에너지’

9월에 들어서며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지만, 한낮의 폭염은 여전히 우리를 지치게 한다. 이제 ‘역대급’이라는 수식어조차 무색해진 극한기후는 우리에게 기후위기가 먼 미래가 아닌 오늘의 문제임을 알려준다. 그 해답이 ‘탄소중립’에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탄소중립을 위한 가장 큰 과제는 바로 ‘에너지 전환’, 즉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당장 2036년까지 전국 28기의 석탄화력발전소가 문을 닫을 예정이어서, 수많은 발전소 노동자들의 생계와 발전소 주변 지역 경제가 큰 위기에 놓여있다. 이 거대한 전환의 과정에서 우리는 ‘누가,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위해’ 에너지를 만들 것인지 물어야 한다. 그에 대한 가장 희망적인 대안이 바로 ‘공공재생에너지’이다. 낯선 이 단어는, 말 그대로 국가나 지자체 같은 공공기관이 주도하여 시민과 함께 만들고, 그 이익을 모든 시민이 함께 나누는 재생에너지를 뜻한다. 왜 ‘공공’이 중요할까? 민간기업은 이윤을 최우선으로 하기에 전기요금 인상, 환경 파괴, 지역 갈등과 같은 문제를 낳기 쉽다. 반면 ‘공공재생에너지’는 발전소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전환·승계하고, 개발 이익을 지역 공동체에 환원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핵심 가치로 삼는다. 우리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일부 민간 풍력발전 사업이 극심한 주민 갈등을 겪는 사례를 볼 때 ‘공공재생에너지’는 더 나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까? 이미 국내·외에는 훌륭한 성공 사례가 많다. 제주도는 조례를 통해 바람을 ‘공공의 자원’으로 선포하고, 제주에너지공사가 풍력 개발을 주도하며, 그 이익을 모든 도민과 나누고 있다. 우리 가까이에도 시민들이 십시일반 출자해 협동조합을 만들고 공공기관 옥상에 ‘햇빛발전소’를 세워 수익을 나누는 사례들이 있다. 이 모델들을 대구·경북에 적용해 볼 수 있다. 대구의 도심에서는 각 구청이나 공공기관 옥상, 주차장 부지를 활용해 시민 누구나 주주로 참여하는 ‘시민햇빛발전소’를 늘려나가고, 넓은 농촌 지역이 있는 경북에서는 지자체가 주도하고 지역 주민이 지분을 참여하는 ‘마을 풍력발전’를 통해 안정적인 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계획 단계부터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주민이 사업의 주체로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후위기 대응과 지역 소멸 위기 극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다. 대구시와 경상북도는 ‘공공재생에너지’를 체계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조례를 제정하고, 지방정부와 공기업이 안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공공기관의 유휴부지를 적극적으로 발굴하며, 시민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금융 지원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에너지 전환은 단순히 낡은 발전소를 새것으로 바꾸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일자리와 지역 경제, 그리고 미래 세대의 삶이 걸린 ‘정의’의 문제이다. 우리 모두가 주인이 되는 ‘공공재생에너지’로 지속가능한 대구·경북의 미래를 함께 열어가길 기대한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5-09-11

정리 일순위

또 새벽에 잠을 깼다. 최근에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소변이 마려운 것도 아니고 더워서 그런 것도 아니다. 밤에 잠 깨는 것을 이해를 못 하고 불면증이 무슨 병인지 모를 정도로 밤에 누가 안아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자는 인간이 새벽에 잠을 깬다는 것이 노인들의 잠 성향과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섬찟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땐 책을 읽거나 OTT에서 영화 한 편을 보다 보면 이내 잠이 다시 몰려와 잠이 들곤 했는데, 책을 보니 눈이 자꾸 충혈되는 것 같고 영화를 보다 잠이 들면 아침까지 텔레비전이 켜져 있어 늘 잔소리 대상이 되는지라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밖에 나가서 조용한 새벽 운동을 해 볼까도 생각해 보고 고양이가 흩어놓은 모래 정리나 할까 생각하다 괜히 자는 사람에게 피해가 되겠다 싶어 포기했다. 억지로 잠을 청하다가 갑자기 뭔가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한순간에 ‘바보 도 터지는 소리’를 지른다. 언제부터인지 한번은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시간도 나지 않고 꼭 지금 바로 해야 하는 급한 일도 아니라 차일피일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미뤘는데 이 기회에 하기로 했다. 그 일은 다름이 아니라 휴대폰 안에 저장되어있는 오래된 전화번호 정리이다. 확인하니 놀랄 정도다. 거의 3000건의 전화번호가 비좁은 전화기 안에 쑤셔박혀 있었다. 이 정도로 내가 대인관계가 넓었나 싶을 정도로 놀랄 정도다. 하나 하나 지우기 시작했다. 011로 시작하는 번호는 생각할 것도 없이 지웠다. 심지어 016도 나왔다. 이런 전화번호는 이미 잊혀진 사람이기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 거래가 끊어진 업체 사장들도 다 지워버렸다. 운동하면서 만난 친구들 전화도 지웠다. 동호회 활동을 하지 않은지 10년이 넘었는데 전화번호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당시엔 참 활발하게 활동을 하면서 친분을 쌓아왔는데 언제부터인지 소원해져 연락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얼굴이 어렴풋 기억이 나는 사람도 있고 얼굴조차 잊혀진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름만으로는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도 다 지워버렸다. 직장도 단체도 적혀있지 않고 이름만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그래도 알만한 사람이었을 텐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게 여자일 땐 더 궁금하다. 쭉 연락을 주고 받다가 몇 년간 소식은 없지만 나름 당시에는 친분이 있었던 사람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지웠다. 생각나면 연락이 오겠지 싶어서다. 연락이 오면 휴대폰을 잊어버렸다는 궁색한 변명을 하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해 본다. 갑자기 알람 소리가 울린다. 새벽 2시부터 시작해서 장장 4시간 동안 휴대폰 번호 지우기를 한 것이다. 그래도 아직 지울 전화번호가 남았다. 전화번호가 1천7백 개까지 떨어졌다. 약 1500명의 사람이 나와 단절이 된 것이다. 내 삶에 한 부분을 같이 한 사람이었건만 이제 연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제 그분들 카톡에 뜬금없이 내 생일이 뜨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지조차 별로 궁금하지 않을 사람들을 내 손으로 풀어주었다. 다음엔 그동안 찍어서 보관만 하는 사진 정리를 할 차례이다. 이건 전화번호 지우는 것보다 더 머리 아플 듯하다. /노병철 수필가

2025-09-11

“물부족 포항시, 이제는 지하댐을 고민할 때다”

물은 도시의 혈관이다. 포항은 바닷가에 기대어 성장해온 대표적인 해안도시다. 철강산업으로 성장했고, 최근엔 2차전지와 수소산업 등 신산업의 중심지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도시 성장의 발목을 잡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물’이다. 포항은 연평균 강수량이 1100mm 안팎으로 전국 평균(약 1300mm)과 큰 차이가 없다. 문제는 지형이다. 내륙처럼 산과 계곡이 깊어 물을 가둬둘 곳이 거의 없다. 하천은 짧고, 빗물은 순식간에 바다로 흘러간다. 현재 포항은 공업용수의 80% 이상을 인근 댐 등에서 끌어다 쓴다. 연간 공업용수 사용량은 1억 4000만 톤에 달한다. 신산업단지 조성과 기업 유치로 수요는 매년 늘고 있지만, 외부 수원에 의존하는 방식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기후 변화로 극심한 가뭄과 불규칙한 강수량이 반복되면서 불안은 더 커졌다. 대안으로 거론되는 해수담수화는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초기 건설비만 수천억 원대, 생산된 물값은 기존 육상댐보다 5배 이상 비싸다. 농축염수 처리 등 환경 문제도 풀기 쉽지 않다. 결국 포항만의 물그릇이 필요하다. 그 대안이 바로 지하댐이다. 지하댐은 땅속에 흐르는 지하수를 막아 저장하는 구조다. 평소에는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고이게 하고, 필요할 때만 취수해 쓸 수 있다. 특히 포항처럼 하천이 짧고 해안에 인접한 도시는 빗물이 금방 바다로 흘러가 버리기 때문에, 지하에서 이를 붙잡아 두면 물부족 문제를 크게 덜 수 있다. 실제 일본 오키나와, 대만 등에서는 이미 지하댐이 가뭄 극복의 실질적 대안이 됐다. 제주도 역시 육상댐 건설이 어려운 지형적 한계를 지하댐으로 해결해 연간 800만 톤 이상을 안정적으로 확보한다. 한국수자원공사 관계자는 “지하댐은 육상댐 대비 건설비는 30~40% 수준이면서도 홍수와 가뭄을 함께 잡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최근 강원도 사례는 포항에 주는 교훈이 크다. 요즘 강릉시는 국가재난에 버금가는 심각한 가뭄으로 생활용수까지 부족해 시민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반면 인근 속초시는 상황이 다르다. 속초시는 일찍이 지하댐을 건설해 하루 63만t 규모의 수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면서,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여유 있게 물을 공급하고 있다. 불과 수십 킬로미터 차이지만, 지하댐을 선제적으로 준비했느냐의 차이가 도시의 운명을 가른 것이다. 포항에도 지하댐은 물부족 해소 이상의 의미가 있다. 포항 도심은 해수면과 높이 차가 거의 없는 저지대다. 우수기마다 불어난 빗물이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해 도심에 고인다. 이를 막기 위해 해마다 대형 배수펌프장을 돌려야 한다. 펌프 가동과 유지에만 연간 수십억 원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매년 반복되는 침수 피해는 여전히 시민의 몫이다. 지하댐이 들어서면 사정이 달라진다. 강우기에 넘치는 빗물을 지하로 흡수해 임시 저류조 역할을 하고, 평소에는 저장된 지하수를 취수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도심 침수 위험과 배수펌프장 운영 비용을 줄이고, 가뭄에도 안정적인 물 공급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하댐은 대규모 토지 수용이나 주민 이주가 필요 없다. 하천 하류나 평야 지하 등 여러 곳에 소규모로 나눠 지을 수 있어 현실성도 높다. 필요한 만큼 물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 뽑아 쓰는 ‘작은 물그릇’이 여러 개 만들어지는 셈이다. 물부족과 침수방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발상의 전환이다. 한 지역 물관리 전문가는 “포항은 물을 남이 가져다주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스스로 물을 모으고 지킬 방안을 찾아야 한다. 지하댐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물은 도시의 생명이다. 더 이상 다른 지역에서 가져다 쓰거나 비싼 담수화 기술에만 기대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이 어렵다. 기후위기 시대, 물을 지키는 일은 도시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강릉과 속초의 대비된 현실은 포항에 던지는 경고다. 이제 포항이 ‘땅속 물그릇’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임창희 부국장

2025-09-11

자녀 특채, 노조의 해괴한 요구

취직이 어려운 시대다. 대학을 졸업하고, 검증된 영어 실력을 갖추고, 거기에 학점까지 높아도 일자리를 얻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청년들의 가장 큰 희망 가운데 하나가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아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것’이란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고군분투 중이다. 학교 다닐 땐 전공과 외국어 공부에 매달리고, 졸업 이전에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을 갖추기 위해 인턴활동과 사회봉사에도 열심이다. 그래도 취직은 쉽지 않다. 그런데,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자리를 얻는 과정에서 특별한 혜택을 받는다면? 이건 ‘공정의 붕괴’라 불러 마땅한 심각한 문제다. 지난 9일 이와 관련된 사안이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언급됐다. 이날 이 대통령은 “최근 노동조합원 자녀에게 우선 채용권을 부여하자는 것과 관련된 논란을 보도를 통해 봤다”며 “취업시장은 어느 분야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이 필수”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는 KG모빌리티 노동조합이 퇴직 희망자 자녀를 특별채용해달라고 사측에 요구했고, 회사가 이를 추진하다가 논란 끝에 재검토한다는 뉴스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인다. 봉건시대엔 아버지가 높은 벼슬에 있으면 그의 자녀를 선발과정 생략하고 관리로 발탁해 쓰는 제도가 실재했다. 세칭 음서(蔭敍)다. 능력과 무관하게 부모가 가진 지위나 권력에 의해 자식의 미래가 결정되는 이 제도는 불합리성 탓에 오래전 폐지됐다. 혈통에 의해 결정되는 신분제가 사라진 21세기 현대사회에서 음서와 유사한 방식으로 제 자식에게 일자리를 대물림하겠다는 노조는 대체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건가?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9-10

눈 먼 자들의 도시

직시(直視)보다 왜곡(歪曲)에 편승하기 신념은 깡다구의 결과물 최고의 날라리가 되어 볼까 생각을 멈출까 눈 먼 사람은 밤과 낮이 없거든 그렇게 굳히기 한판의 삶 앞니에 끼인 고춧가루처럼 찬란하지 않더라도 기어코 개겨볼까, 몰라, 젠장 덩달아 짖는 개떼들의 공허한 하울링이 난무한다 그러나 사랑이 독약(毒藥)이라 해도, 그럼에도 결국엔 사람이 해독제인 걸, 나라 사랑 말고 사람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제목. .................................................................................................... ‘눈 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이 있다. 내용은 차치하고라고 그 제목만으로도 충분한 상징성으로 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나의, 어설픈, 차용이다. 나는 좀 비겁하다. 모든 것을 외면하고 회피한다. 다만 글 몇 줄 읽은 것이 다행이다. 그러나 찌그러진 바퀴 위에 올라탄 한 수레에 미치지 못하는 독서였다. 포항에서 다시 살면서 아쉬운 것은, 자기의 의사가 통용되지 않는다고 상대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며 저주하는 것은, 시대정신을 x도 모르는 똥개들의 하소연에 불구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하고 또한 비열한 정의는 결국 결과에 있다. 승복과 복종과 체제의 인정을 강요하고, 거기에는 당연한 반동이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이기적이고 분열적인 가역반응이다. 덩달아 짖는 개떼들의 공허한 하울링이 난무한다. 변방과 소외를 말하지만 그전에 누렸던 영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가장 비열하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물고 물린다. 개들의 습성이다. 달을 보고도 짖는다, 집을, 내 밥그릇을 지켜야지, 나의 밖에 무엇이 존재하리란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몰염치는 두렵고, 또한 훨씬 가소롭다. 깽판이나 치자는 시정잡배 수준의 시민의식으로 어떻게 시대정신에, 온전한 시민으로 살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시간과 시대를 좀먹는 비루한 존재들인 비정치적이고 비시민적이며 공감능력이 현저히 결여된 좀비들이 버젓이 활개하고 헐떡이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붕가붕가한다. 특별한 능력, 부여받지 않은 특권을 상시적으로, 상식적으로 내면화하여, 시대적 감각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감각하거나 회복불능이다. 시대의 탕진이 아니라 내면의 충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눈 먼 자들의 도시에 사는 시민들은 도무지 성찰하지 않는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빌린다.‘애국심은 사악한 자들의 미덕이다.’ 제발, 똥이나 제대로 누라!/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9-10

성주군은 왜 이토록 ‘청렴’을 외치는가?

이달 초 성주군청의 아침 출근길은 잠시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이병환 군수를 비롯한 직원들이 출근하는 동료들에게 ‘청렴 포춘쿠키’를 나눠주며 청렴한 하루를 응원하는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며칠 뒤에는 전 부서장들이 모여 ‘직장 내 갑질’과 같은 예민한 주제를 놓고 소통 간담회를 열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연초부터 계속된 ‘공직 부패행위 집중신고기간’ 운영은 이제 정례화된 모습이다. 일련의 행사들을 보며 문득 질문이 들었다. 성주군은 왜 이토록 끊임없이,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청렴’을 외치는 것일까? 단순히 정부가 주관하는 청렴도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형식적인 노력은 아닐까? 며칠 간의 취재를 통해 내린 결론은, 성주군이 강조하는 ‘청렴’은 단순히 ‘부패하지 않는 것’을 넘어, 지역의 생존과 미래를 위한 행정철학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이었다. 요약하면 첫째, 청렴이 군민의 ‘신뢰’를 얻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인구 5만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지역 공동체에서 행정에 대한 불신이 싹트는 순간, 모든 정책은 동력을 잃고 만다. 내가 낸 세금이 투명하게 쓰이고, 모든 행정 절차가 공정하게 처리될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군민들이 지역에 애착을 갖고, 군정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다. 성주군이 벌이는 청렴 캠페인들은 결국 이 신뢰의 자본을 쌓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인 셈이다. 둘째, 청렴이 가장 효율적인 ‘지역 발전’ 전략이라는 것이다. 불공정한 특혜나 불필요한 관행이 사라진 자리에는 효율성이 싹트기 마련이다. 공정한 절차는 건실한 기업 유치와 투자 촉진의 첫걸음이 되고, 투명한 예산 집행은 한정된 재원을 군민들에게 꼭 필요한 도로, 복지, 문화 시설에 집중하게 만든다. 특히 성주는 ‘참외’라는 강력한 브랜드를 갖고 있다. 청렴한 성주 행정은 대내외적으로 이 브랜드 가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보호막과도 같다. 세째, 청렴은 ‘자부심’의 원천이다. 공직자에게는 깨끗한 조직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군민에게는 공정한 지역사회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심어준다. 이병환 군수가 간담회에서 “자부심이 넘치는 공직사회를 만들자”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우리 군은 깨끗하다’는 공통의 자부심은 지역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청렴 행정은 자치단체들이 입모아 외치는 구호다. 그러나 지키기가 쉽잖다. 유혹도 있고 과거 관성 또한 있어서다. 그러나 성주군은 이병환 군수 이후 직원들이 지겹도록 청렴을 외치고 교육하며 토론해 왔다. 이제 그 노력들이 켜켜히 쌓여 군민들이 믿음과 신뢰를 보내는 단계에까지 다다랐다. 어떻게 보면 이는 매우 소중한 성주의 자산이다. 더욱 잘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 그것이 성주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군민들이 청령 군 행정에 신뢰를 보내면서도 혹여 흐트러지지나 않을까, 늘 지켜보고 평가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전병휴기자 kr5835@kbmaeil.com

2025-09-10

꺼지지 않는 불

눈이 자꾸만 우리 집 맞은편에 있는 창으로 간다. 한 달도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전등불이 켜져 있다. 빤히 보이는 불빛 때문에 나의 여름밤이 더 덥다. 에어컨을 켜려면 실외기실 창을 열어야 한다. 아마 집 주인은 창을 열면서 전깃불 끄는 건 잊었나 보다. 가로등 불빛만이 아파트 마당을 밝히는 시간에 그 불빛은 마치 달처럼 떠 있다. 나는 빛 하나 없는 방에 누워 남의 집 전깃불 걱정하고 있다. 날씨가 추워져야 꺼지려나. 실외기실 창을 닫아야 하니 그제야 불이 켜져 있었다는 것을 알겠지? 그때까지 눈 감아야 하나? 관리실에라도 얘기해야 하나. 생각의 꼬리를 물다, 필요하지 않은 전깃불에 내가 유독 예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원인을 따라가 보니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그때로 돌아간다. 아버님 어머님과 형님네 식구들 시누이까지 대식구였다. 시끌벅적한 식구들 틈에서 나는 새로운 환경을 익히려고 온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그 많은 것 중에 전깃불 끄는 것이었다. 저녁 설거지가 끝나고 부엌을 나오기도 전에 잊지 않고 불을 껐다. 욕실에서 세수하다 방에 뭔가를 가지러 갔다 오면, 불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꺼져있었다. 마루의 작은 등이 꺼지는 날은 식구들이 일찍 다 들어온 날이었다. 방의 창마다 텔레비전 불빛만이 새어 나왔다. 여름날이었다. 안방에 늦은 저녁상을 차렸다. 땅거미가 방에도 내려앉았다. 컵을 들고 들어오다, 전원스위치로 가던 손이 멈칫했다. 반찬이 보이지 않을 만큼은 어둡지 않았다. 아무도 어둡다고 하지 않아 나는 그냥 내 자리에 앉았다. 방 안은 숟가락 움직이는 소리 속에 어린 조카들의 말소리가 간간이 건너다녔다. 늦게 밥상머리에 앉은 나는 주위에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앞에 놓인 반찬만으로 밥을 먹기 바빴다. 고요 속에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방안에 있는 스무 개도 넘는 눈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뭐지? 왜? 내가 뭘 잘못했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퍼뜩 남편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남편의 눈에 불이 켜진 것 같았다. 늑대의 눈빛이 그러했을까. 그 눈빛을 본 순간, 나는 마치 낯선 방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숟가락을 든 손에 힘이 빠졌다. “숙모, 불” 일곱 살배기 조카가 손가락으로 내 머리 위를 가리켰다. 그제야 내 뒤에 전원 스위치가 있어서라는 것을 알았다. 그 밤, 나는 숨죽여 울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어이없어했고, 나는 무엇보다 부드러운 말 대신 눈 화살을 쏜 남편이 야속했다. 불 켜라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모두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는 사실에 괜히 억울했다. 내 마음대로 불도 못 켜고, 세탁기를 두고도 뻣뻣한 청바지까지 손으로 빨아야 하는 날들이 서러웠다. 어머님의 눈을 피해 재바르게 세탁기를 돌려야 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 싶어 울다 잠들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가 불을 끄고 다닌다. 얼마 전, 딸이 손자들을 데리고 왔다. 꼬맹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초토화가 된다. 욕실에 들어갈 때면 전원스위치를 있는 대로 다 켠다. 변기 쪽과 환풍기만 켜면 된다는 생각은 아예 없다. 딸도 아들도 마찬가지다. 낮에도 식탁에 앉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등부터 켠다. 밤에도 등 하나만 켜곤 하는 거실에 낮에도 등이란 등은 다 켜 놓는다. 따라다니며 불을 끄다 내뱉는 내 말은 언제나 잔소리가 되고 만다. 어둠 속에 있어 본 사람만이 밝은 빛의 소중함을 안다. 호롱불 밑에서 자란 할머니가 아껴두었던 전기가 아쉬운 게 없는 아이들 손에서 흘러넘친다. 맞은편 창의 불빛처럼 꺼지지 않는 아이들의 전깃불. 지금 있다고 마냥 있는 것은 아니다. 끄지 않아 다시는 켜지지 않는 날이 올까 두렵다. 나도 한때는 전깃불 하나 켜는 일에도 눈치를 보며 살았으니, 아이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날씨가 추워지면 창의 불도 꺼지고, 아이들도 언젠가는 스스로 스위치를 내리기를 기대한다. 나는 애써 맞은편 창을 보지 않으려고 안막 커튼을 친다. 내일 관리실에 얘기해야 하나 다시 고민하면서. /윤명희 수필가

2025-09-10

우리 정부의 당당한 대응을 기대한다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이 미국에 대규모로 투자하며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배터리공장에서 충격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던 300여 한국인 전문기술자들이 미 이민당국에 의해 불법체류자로 분류되어 체포 구금되었다. 중범자 체포 작전을 방불케 하며 거칠고 폭력적으로 진행되었고 전 장면이 전 세계 미디어를 통해 여과 없이 노출되었다. 우리 국민들의 안전과 존엄이 매우 부적절하게 무참히 짓밟힌 순간이었다. 사건의 본질은 분명하다. 워낙 대규모 첨단 프로젝트여서 한국에서 축적된 유사 건설 경험을 가진 인력이 필요했다. 미국 현장에 수백 명의 숙련고도 기술자들이 파견되어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까다로운 미국이민제도가 이런 상황을 배려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민 당국은 이들을 불법체류자라 규정하고 일괄 구금하고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이것이 단순한 행정적 착오였는가, 아니면 정치적 배경을 가진 노골적인 과잉단속이었는가. 트럼프 대통령은 벌어진 사태를 두고 ‘공장 건설에 필요한 전문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둘러대었다. 이번 사건에 미국 정부 내부에 일부 책임이 있었음을 우회적으로 인정한 발언으로 여겨진다. 그런 정도 언급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단순한 실수였다고 치부하고 넘어갈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 미국 이민당국의 성급한 결정과 폭력적인 집행은 명백히 한국 시민들의 정당한 권익을 침해했다. 한국 정부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외교채널을 통해 구속된 기술자들이 조속히 풀려나 귀국길에 오르게 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 정부로부터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내야 하며 향후 유사한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적 완비와 안전장치를 요구해야 한다. 이는 동맹국 국민의 권익과 안전을 담보하는 최소한의 책무가 아닌가. 가장 큰 상처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던 우리 기술자들이 입었다. 이들은 미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기초를 놓으며 땀을 흘리던 중이었다. 하루아침에 불법체류자로 낙인찍혀 수갑과 쇠사슬을 차고 끌려갔다. 구금과정에서 겪었을 모욕감과 심리적 트라우마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이들이 미국을 다시 방문할 때 불이익이 없도록 정부가 전방위적으로 세심하게 지원해야 한다. 한국 사회 일반에도 깊은 상흔이 남았다. 자국민이 해외에서 폭력적으로 체포되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했다. 자존감의 손상이 깊고 대미감정의 흔들림도 만만치 않다. 한미관계가 긴요하지만, 동맹국의 국민을 이토록 무리하게 대하는 일은 용인하기 어렵다. 미국이 진정한 우호적 파트너십을 원한다면, 상처 입은 한국의 국격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우리 정부도 미국에게 주저하거나 미온적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신속한 봉합을 넘어 원칙과 신뢰에 기초한 단호한 외교가 있어야 한다. 국민이 해외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정부가 당당하게 나서서 안전하게 보호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비로소 국격은 지켜진다. 동맹이란 이름으로 불평등을 감내하는 시대는 끝났다. 한미관계는 대등한 파트너십이어야 한다. 주권 국가다운 면모를 지켜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9-10

‘대만과 함께, 평화와 번영을’

대만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요한 구성원이자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로서, 세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을 지키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인도·태평양 제1도련(第一島鏈)’의 전선에 위치한 대만은 민주와 자유의 가치를 굳건히 지켜내며, 권위주의 확장을 저지하고 있다. 아울러 강건한 경제력과 완전한 반도체 산업 공급망을 바탕으로 세계의 안정과 번영에 중대한 기여를 해왔다. 대만은 세계 21위의 경제체로서 인공지능과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전 세계 반도체의 60% 이상, 그리고 첨단 반도체 생산의 90% 담당하면서 글로벌 성장을 견인할 뿐만 아니라 각 분야 발전의 핵심적인 동반자가 되고 있다. 대만은 국내외에서 민주적 가치를 수호할 것을 굳게 다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라이칭더 총통은 ‘4대 평화 기둥 행동 방침’을 추진하며, 국방 예산 증액과 사회 전반의 회복력 강화를 약속했다. 대만은 결코 중국과의 충돌을 원하지 않으며, 또한 스스로 도발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대만은 베이징이 평등과 존엄을 바탕으로 양자 간 대화를 재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대만은 또한 ‘글로벌 민주 가치 사슬’을 통해 민주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며, 불확실한 지정학적 위험에 공동 대응하고, 권위주의적 영향력을 저지하며, 인권 증진과 디지털 거버넌스를 추진하고 있다. 나아가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굳건히 지켜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만이 보여준 회복력은 권위주의 체제의 위협에 직면하더라도 민주 제도가 압력 속에서 더욱 성장하고 굳건해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대만은 ‘경제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 반도체와 첨단 기술 공정을 선도하며, 이를 기반으로 인공지능·디지털화·의료 등 다양한 분야의 혁신과 발전을 촉진하고 있다. 또한 ‘비(非) 홍색 공급망’을 핵심으로 한 경제·무역 전략을 추진하여, 신뢰할 수 있고 투명한 산업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권위주의 체제에 의해 핵심 산업이 좌우되는 것을 막고자 한다. 그러나 세계 발전에 대한 큰 기여도에도 대만은 국제 사회로부터 정당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유엔 체계에도 참여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다. 대만은 국제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국제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이미 많은 나라들이 양자 및 다자 무대, 예컨대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등에서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여러 국가의 행정부와 입법부 역시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며, 유엔 총회 제2758호 결의가 대만의 지위를 결정하지 않았고, 대만의 국제기구-유엔 체계를 포함한-참여를 배제하지도 않았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엔 창립 80주년을 맞이하고 ‘2030 지속 가능 발전목표’ 달성까지 불과 5년밖에 남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대만을 국제 사회에 포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래야만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함께 나아가자”는 비전을 실현할 수 있다. 대만은 국제무대에서 정당한 지위를 인정받고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가치와 기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기를 호소한다. 오직 손을 맞잡고 협력할 때에만, 인도·태평양 지역은 물론 전 세계가 더욱 아름답고 밝은 미래를 함께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린자룽 대만 외교부 장관

2025-09-10

찐 옥수수를 먹으며

여름이 되면 먹거리들이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찐 옥수수다. 요즘이야 사철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간식거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쫀득쫀득하고 부드럽고 찰진 옥수수는 아무래도 여름에 나는 제철 옥수수다. 남편도 좋아해서 한 봉다리씩 사서 자주 먹곤 한다. 옥수수를 좋아한다는 내 말을 듣고 유 선생님께서는 풍각장에서 파는 찐 옥수수가 참 맛있던데 하시며 사다 줄 걸 하셨다. 그러고 한참이 지난 며칠 전 저녁 유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선생님 내일 풍각장날인데 찐 옥수수 사다 드릴게요.“ 아이고 언뜻 지나가는 말처럼 했던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새기셨던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장터까지 가서 사오신 뜨거운 찐 옥수수를 넘치게 가져다 주셨다. 선생님의 뜨거운 사랑같은 찐 옥수수를 먹으며 옥수수에 대한 몇 가지 기억을 소환해 낸다. 초등학교 땐 학교급식으로 옥수수죽, 옥수수빵을 나눠주었다. 요즘같이 모든 학생들이 먹는 급식이 아니라 가난해서 도시락을 못 싸오는 아이들에게만 주는 급식이었다. 나는 무슨 연유인진 모르겠는데, 4학년부터 6학년까지 줄곧 급식당번을 했다. 4학년 때는 옥수수죽이었다. 점심 시간이 되면 양호실로 달려가 큰 양동이에 받아온 옥수수죽을 빈 도시락을 들고 온 아이들에게 펴 담아 주었다. 가난했던 시절, 70명이 넘는 학생 중 유독 더 가난하여 도시락도 챙겨오지 못한 아이들이 꽤 되었다. 제법 커다란 양동이 가득 받아온 옥수수죽을 한 도시락씩 담아 주면 금세 바닥을 보이곤 했다. 옥수수죽을 배급하는 사이 도시락을 싸온 아이들은 이미 거의 도시락을 먹은 상태였고, 그동안 이 아이들은 쫄쫄 굶은 배를 움켜쥐고 밥 먹는 아이들을 지켜만 보고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싸온 도시락을 먹지 못한 채 급식 배급이라는 중요한 임무 수행 중이었다. 그 당시 내가 맡은 일이 하나는 더 있었다. 소소한 학급 일상을 적는 학습일지를 쓰는 것이었다. 매일의 학급일지에는 ‘착한 일 한 사람’, ‘나쁜 짓 한 사람’을 적는 난도 있었다. 이따금 나는 ‘착한 일 한 사람’ 난에 내 이름을 적고 싶어,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 친구에게 내 도시락을 주고, 대신 나는 옥수수죽을 떠먹기도 하는 앙큼한 짓을 하곤 했다. 가끔은 친한 친구에게 도시락과 옥수수죽을 바꿔 먹으면 이름을 올려주겠다며 꼬드기기도 했다. 옥수수 급식은 해마다 바뀌었다. 5학년 때는 옥수수로 만든 찐빵이었고, 6학년 때는 빵틀에 구운 옥수수빵이었다. 해마다 조금씩 나아진 것 같기도 하지만 가장 맛있었던 것은 옥수수죽이었고, 찐빵은 별로였다. 내가 3년을 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양호실 선생님과 꽤나 친해졌나 보았다. 가끔 양호 선생님께서는 수업 후에 양호실에 들르라고 말씀하셨고, 집에 가지고 가 식구들과 나눠 먹으라시며 남은 빵을 가득 싸 주시기도 했다. 따로 넣을 곳이 마땅찮으면 책가방의 책을 빼내 신발주머니에 넣거나 끈으로 묶어 주시고, 가방 가득 빵을 넣어주셨다. 이렇게 받아온 빵은 엄마에겐 좋은 요깃거리였다며 엄마는 회상하곤 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9-10

‘이준석의 보수재편’ 성과낼 수 있을까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지난주 경북대와 영남대 교문 앞에서 안전모를 쓰고 직접 작업차에 올라 현수막을 설치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돼 눈길을 모았다. 정치성이 강한 연출이지만, ‘이준석 답다’는 생각은 든다. 이 대표는 지난 대선 때도 예비후보 등록을 하자마자 대구에 내려와 시민들에게 출퇴근 인사를 했다. 대선후보가 권위의식을 내려놓고 ‘나홀로’ 출퇴근 인사를 하는 모습을 대구시민들도 그때 처음 봤다. 이 대표가 TK대학가에서 현수막을 달며 언론과 접촉한 것은 얼마 전 대구를 다녀간 조국 전 혁신당 대표를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두 사람은 최근 ‘2030세대 극우화’ 논쟁으로 뜨거운 공방을 벌이고 있다. 정치권에선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감한 의제를 선점하면서 지지층 결집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대표가 대구에서 조 전 대표의 ‘2030 세대 극우론’을 쟁점으로 만들 경우 TK출신 젊은 층 외연확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대표는 최근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과 안철수 의원과도 ‘지방선거 연대’를 추진하고 있는 것 같다. 이미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이 서울에서 각각 ‘구청장 1곳 불출마’와 ‘서울시장 불출마’를 조건으로 연대하는 방식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거론되는 모양이다. 대구·경북을 비롯한 영남권에서도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의 이러한 딜(deal)이 가능할 것이다. 이 대표는 오 시장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에 대해 “정치적으로 인적 교류도 많고, 거의 한 팀이라고 보고 있다”고 했다. 이 대표는 한때 욕설까지 주고받았던 안철수 의원과도 화해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는 최근 BBS 라디오에 출연해 국민의힘 내 탄핵찬성파와의 연대 여부와 관련, “안철수 의원과는 여러 가지 해볼 수 있는 게 많다”고 했다. 두 사람은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개혁보수’라는 동일 노선을 취하고 있고, 둘 다 경기도에 지역구를 두고 있어 ‘선거 연대’가 가능하다는 분석이 유력하게 나온다. 지난 7일에는 두 사람이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 물빛무대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도 같이 참석했다. 이 대표는 지난 대선 당시 ‘안철수·오세훈·홍준표 정책 통합 전략’ 보고서를 공개한 적이 있다. 세 후보 캠프의 공약을 각각 정리한 뒤 이 대표가 공통 키워드를 찾아 통합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 보고서가 내년 지방선거에서도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이 대표의 이러한 행보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과의 관계를 변수로 개혁신당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만약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중수청’(중도·수도권·청년)을 향한 지지세 확장에 성공한다면 이 대표로서는 국민의힘과의 연대 수준을 올릴 수 있다. 반대로 국민의힘이 ‘극우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할 경우에도 이 대표의 개혁 보수 이미지는 더 주목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이 대표가 국민의힘 내 탄핵찬성파와의 접점을 넓히면서 보수진영 재편을 하는데 자신이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 대표의 ‘보수재편 시나리오’가 어떤 정치 지형을 만들어 낼지 주목된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09-09

정치인의 악수

악수란 세계적으로 가장 보편화된 인사 방법이다. 나라마다 문화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반가움이나 친근, 화해 등을 드러내는 인사법이다. 이런 악수에는 예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 윗사람이 먼저 청할 때 악수를 해야 한다. 악수를 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바로 쳐다보아야 한다거나 왼손잡이도 오른쪽 손으로 인사를 해야 한다는 등등이다. 2013년 미국의 빌게이츠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예방했을 때의 일화다. 빌게이츠는 박 전 대통령과 악수하면서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공개되자 미국의 한 언론은 그의 무례함을 비판한 적이 있다. 비록 사소한 악수일지라도 장소와 사람에 따라 격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정치인은 악수를 특별하게 해석할 때가 많다. 정치인이 사람을 만나 악수하는 것은 정치적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중국 전승절 기념행사 참석차 중국을 다녀왔던 우원식 국회의장은 귀국 후 “김정은 위원장과 악수를 했다”고 자랑하며 악수한 그 자체가 성과라고 말해 어리둥절케 했다. 그의 악수를 두고 남북 관계의 복원 가능성이나 한반도 정세에 작은 변화 가능성을 주었다는 정치적 해석을 따로 붙인 것이다. 김 위원장과 아주 잠깐 악수를 한 것에 불과한데 해석치고는 너무 거대해 보였다. “악수는 사람과 하는 것”이라며 국민의힘과는 죽어도 악수않을 것 같았던 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와 악수를 하자 언론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이 대통령의 제안으로 만나기조차 꺼렸던 양 대표의 첫 악수가 성사된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 화해일 수도 있고 대화의 시작일 수 있는 두 정치인의 악수 이후가 어떨지 기대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9-09

선택의 저울

어제 저녁, 가을 바람이 유난히 기분 좋게 불어왔다. 하루 종일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산책을 나섰다.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짐을 서둘렀고 저녁 바람은 초가을의 신선함과 여유를 가져왔다. 나는 오랜만에 뛰기도 했다. 호흡이 거칠어질수록 운동이 주는 해방감에 머리도 맑아지고 기분도 좋아졌다. 땀이 이마에 맺히자 몸 안에 쌓였던 무거움이 바람결에 흩어지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신호등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막 깜빡이고 있었지만 무리해서 건너기보다 잠시 더 기다리기로 했다. 저녁 운동을 마치고 많은 사람들이 건너고 있었다. 순간적인 조급함보다 한 박자 늦추는 선택이 나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다음 신호가 켜지자 천천히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눈끝에 무언가가 보였다. 고개를 내려다보니 접힌 지폐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보지 못했던 지폐가 내게 온 건 행운이지 않을까. 나는 멈칫했다. 지폐를 세어보니 칠만원이었다. 오만 원권 한 장이랑 만 원권 2장이 접힌 채 바닥에 놓여 있었다.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공(空)돈으로 맛있는 것을 사 먹을 수도 있고, 그간 미뤄온 책을 살 수도 있지 않을까?’욕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또 다른 생각이 뒤따랐다. ‘이건 누군가의 하루 일당일지도 몰라. 한 어르신이 힘겹게 모아둔 비상금일 수도 있고, 내일 병원에 가야 할 돈일 수도 있잖아.’ 지폐가 내 손에 쥐어져 있는 동안, 내 마음은 양쪽으로 기울다 다시 반대편으로 기울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다. 그러나 끝내 한 가지 생각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나에게는 칠만원이 특별한 행운처럼 다가올지 몰라도 잃어버린 누군가에게는 삶의 무게만큼 절실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내 발걸음을 가까운 지구대로 향하게 했다. 지구대 문을 열며 스스로 조금은 부끄러웠다. 내심 ‘누군가가 찾아올까? 그냥 돌아서서 내 주머니에 넣어둘까?’하는 흔들림이 있었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대 안의 경찰관에게 돈을 건네는 순간 마음 속에서 묘한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경찰관은 친절하게 분실물 접수 절차를 설명하며 내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넣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돌아 나오는 내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적갈등이 일렁이던 순간을 곱씹었다. 인간은 누구나 욕심과 양심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그 갈등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우리를 규정한다. 돈을 맡기며 내가 얻은 것은 단순히 ‘옳은 일을 했다’는 자기 만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욕심을 이겨낸 작은 경험이 나를 더 단단하게 해 주었다는 자각이었다. 집에 돌아와 창가에 앉았을 때 문득 바람이 커튼을 스치며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저녁의 공기에는 미묘한 신선함과 고요가 깃들어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조금 전의 일을 되새겼다. 바닥에서 우연히 주운 돈, 그 돈을 맡기기까지의 짧은 갈등, 내 손을 떠났지만 웃음이 났다. 그것은 ‘소유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묘한 충만감이었다. 생각해 보니 인생의 굽이마다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화려한 성취가 아니라 이러한 사소한 순간들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기엔 하찮아 보일 수 있는 선택이 스스로에게는 오래도록 등불이 되어 줄 수도 있다. 누군가는 ‘굳이 왜’라고 가볍게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의 작은 선택이 훗날 어느 위기 앞에서 다시 내 마음을 붙들어 줄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그 확신이 가을바람처럼 오늘 밤, 조용히 스며들었다. 인생은 예기치 못한 순간들의 연속이다. 길을 걷다 주운 돈 몇 장에서도 우리는 삶의 의미와 교훈을 얻는다. 욕망은 언제나 손쉬운 유혹처럼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소유한다. 돈은 사라졌다. 가을바람처럼 스쳐간 짧은 순간이었지만 ‘옳은 선택’이란 결국 자신을 지키는 선택이라는 명제를 새겨주었다. 선택의 무게는 나를 지켜내는 울타리임을 오늘 저녁 다시 일깨웠다. /김경아 작가

2025-09-09

대세르비아주의 독립투쟁사 ②세르비아, 피의 명가(名家) 탄생

러시아 알렉산더 1세. 나폴레옹 정복전쟁에 위협을 느끼던 러시아는 1812년 본국으로 철군해버렸다. 영국 역시 러시아가 돌아서자 터키를 제압하려던 초심은 간곳없이 슬그머니 발을 빼면서 터키와 휴전을 맺으며 관망 자세로 돌아섰다. 국제사회 냉혹함을 몸소 경험해야 했다. /퍼블릭 제공 세르비아인 최초 공식적인 피의 학살 서막이 열렸다. 역사는 위기 때 영웅을 탄생시킨다. 이제는 단순항쟁이 아니라 반란으로 확장이었다. 하우두크(Hauduk), 즉 튀르키예에 조직적으로 대항하는 반란군을 뜻하는 용어가 생겼다. 예니체리에 대항하는 첫 조직이다. 하지만 가장 큰 피해를 봤던 크네즈를 비롯해 성직자들까지도 농민들을 다독이는데 동참했다. 그러나 농민들 생각은 달랐다. 분노는 예상보다 강했다. 농민들은 그야말로 농기구를 들고 대항했다. 일찌감치 최정예 전투력으로 무장한 예니체리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면서 과거 전투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면 지도자로 뽑아 그를 중심으로 뭉쳤다. 농민들은 1804년 2월 블랙조지, 세르비아어로 페트로비치 카라조르지예(Petrovic Karadjordje)를 지도자로 뽑았다. 졸지에 블랙조지가 급부상하면서 농민군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오스트리아군 소속으로 터키와 맞서 싸운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산발적인 대항에 불과했던 세르비아 농민들을 똘똘 뭉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고, 무기 조달과 풍부한 전쟁 경험은 오스만터키에 대한 독립투쟁으로 확산하는 데 성공한다. 세르비아 무신정권이 시작된 지 4년 째, 블랙조지를 중심으로 한 농민군은 곳곳에서 예니체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다. 36세 블랙조지는 일약 스타로 떠오르면서 예니체리의 지도자 다이스 네 명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처량한 도망자 신세가 된 다이스를 끝까지 추적해 섬에 숨어 있던 예니체리 지휘관 다이스 목을 베는 데 성공한다. 블랙조지는 농민군 지도자로 우뚝 서며 술탄을 향해 예니체리 해체를 요구했다. 술탄으로서는 씨알도 안 먹히는 말이었다. 술탄으로서는 발칸반도 중앙에 위치한 세르비아의 지리적 이점은 매우 다양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비롯해 도이칠란트 등 서구열강들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반대로 국제사회가 바라보는 세르비아 땅은 매우 단순했다. 재빨리 발을 담그면 자신들 차지가 될 것처럼 보였을 법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군침 삼키며 발칸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된 터키제국으로선 도무지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러시아가 터키제국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게 된 시점이라고 보면 거의 정확할 것이다. 블랙조지는 러시아로 눈을 돌렸다. 때마침 오스만터키가 나폴레옹과의 외교적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가 내민 손을 뿌리치고 외교관계를 거절해버린다. 러시아로서도 방법은 단 하나, 세르비아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것뿐이었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더 1세로서는 닭 대신 꿩인 셈이다. 알렉산더 1세는 가장 먼저 농민군 지도자 블랙조지를 자신 편으로 만들었다. 1811년 러시아는 세르비아 농민군을 지원하면서 의회를 설립하고, 블랙조지를 의장으로 선출한다. 러시아와 영국의 뒷배를 믿은 블랙조지는 오스만제국과 전쟁에서 꾸준히 승리를 거두며 중부도시 니쉬를 손에 넣는다. 하지만 나폴레옹 정복전쟁에 위협을 느끼던 러시아는 1812년 본국으로 철군해버렸다. 영국 역시 러시아가 돌아서자 터키를 제압하려던 초심은 간곳없이 슬그머니 발을 빼면서 터키와 휴전을 맺으며 관망 자세로 돌아섰다. 국제사회 냉혹함을 몸소 경험해야 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된 블랙조지는 사면초가에 빠지고 말았다.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잔존 예니체리는 오스만제국의 힘을 뒷배로 몸을 돌려 재차 반격해오기 시작했다. 예니체리들이 반전에 성공하자, 블랙조지는 독립은커녕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힘에 겨웠다. 예니체리들은 일시에 도나우강을 건너 베오그라드를 점령해버렸다. 두 번째 입성이었다. 다시 권력을 잡은 무슬림과 예니체리의 악정은 이전보다 더욱 심했으며, 농민을 향한 폭력이 기승을 부렸다. 예니체리의 보복은 처절했다. 반란군을 뿌리 뽑겠다며 15세 이상 세르비아 남자들을 잔인하게 도륙한다. 여자와 어린이는 노예로 삼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혁명군 지도자 블랙조지와 수많은 세르비아인이 베오그라드 도나우강 서쪽지역 제먼이나 노비사드 인근지역으로 몸을 피해야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농민들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1815년 짠, 하고 등장한 인물이 세르비아 우쥐째 출신의 밀로쉬 오브레노비치였다. 그는 비록 농민 출신이었으나 전쟁보다 뛰어난 언변으로 타협에 능한, 외교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그 역시 농민항쟁에 몸을 담았던 경력이 있었지만, 재력과 세치 혀로 오스만제국에 충성을 맹세해 처형을 면한 인물이다. 민족의 미래보다 쥐꼬리 권력이 더 중요했던 까닭이다. 인간은 권력의 달콤함을 잊지 못한다. 욕망은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이때부터 세르비아는 블랙조지와 밀로쉬 두 가문과 지지자들이 나눠지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박필우 스토리텔링작가

2025-09-09

삶의 내려놓기와 새로운 도전

내려놓을 줄 알아야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잠재력을 발현할 수 있다. 사회 첫 발을 내디뎠을 때는 더 올라가기 위해 손에 쥔 것을 포기하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 또 다른 기회만 잡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은 포기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륜이 된 당신은 좋아하는 일, 후한 봉급, 안락한 집,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 등을 갖추게 되었을 때 당신 안의 잠재력을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그것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겠는가. 가진 것을 과감히 내려놓고 새로운 삶으로 보여준 한 사업가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고학으로 수학과를 졸업한 그는 처음으로 선택한 곳은 아버지가 운전기사로 있던 코카콜라였다. 관리직으로 들어갔으나 운전기사의 아들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과소평가를 받고 승진에도 한계가 있을 것 같아 필스베리(Pillsbury)의 본사로 이직했다. 상사는 코카콜라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는데, 회사에 큰 고비가 있다며 모두가 일자리를 알아봐야 할 판이라고 했다. 그는 두렵지 않았다. ‘언제나 실패의 두려움보다 성공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마흔 살까지 부사장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필스베리에 들어갈 때 팀장이었던 그는 곧 부장이 되고, 국장을 거쳐 부사장이 되었다. 36층의 전망 좋은 집무실에서 일했고, 초라한 시절을 뒤로 하고 급상승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현재의 자리에서는 사장이 될 수 없었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최고 경영자와 상의를 한 후 필스베리의 한 사업부인 버거킹의 직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모든 조건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처음 접하는 일에 밑바닥부터 배워야 한다. 신입사원들과 함께 그릴 작동법, 와퍼 조리법, 손님 응대법 등을 비롯한 매장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 교육과정이 끝나고 매장 부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꿈을 향한 도전은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점장, 지역 본부장, 필라델피아 치즈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물론 평탄하지 않았고, 시련도 많았지만 꿋꿋이 이겨냈고, 마침내 망해가던 갓파더 피자을 인수한 곳에 사장으로 승진해갔고, 꿈을 실현하게 된다. 그가 바로 허먼 케인(Herman Cain)이다. 그는 내려놓음의 법칙을 알고 손에 쥔 것을 포기한 덕분에 새로운 선택과 도전, 그리고 큰 성공이 주어졌다. 이것은 한 인생이 성공한 것이고 피자 사업에 새로운 이정표를 찍게 된 것이다. 내려놓기는 새로운 성장의 기회다. 성장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선택에 있다. 인생의 갈림길에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아예 선택을 포기하는 바람에 인생이 더 힘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주변에 ‘내 처지가 바뀌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있다. 변하지 않으면 지금 있는 곳에 머물 뿐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다. 제2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평소 하고 싶었던 일, 살고 싶었던 곳으로 과감히 이동하라. 기대하던 행복한 삶의 이정표를 그려갈 수 있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09-09

문경관광공사 노사 갈등, 시민 눈높이에서 보라

문경관광공사의 노사 갈등이 결국 고용노동부와 경북지방노동위원회의 손에 맡겨졌다. 공공기관의 내부 문제를 지역사회 안에서 풀지 못하고 국가기관의 중재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 참담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노조는 부당노동행위와 불공정한 인사관리, 소통 부재를 문제 삼고 있다. 사측은 징계권과 채용 권한을 앞세워 맞서고 있다. 하지만 정작 시민들이 느끼는 것은 관광공사의 본분을 잊은 듯한 소모적 대립뿐이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속담처럼,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내는 싸움이 자신들에게도 해가 되고 있음을 왜 모르는가. 더 큰 문제는 이 갈등을 지켜본 문경시와 시의회의 태도다. 공공기관을 감독하고 지도해야 할 책무가 있음에도 적극적인 중재는 보이지 않았다. ‘시민의 기관’을 표방한 공사가 시민의 눈 밖으로 나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다’는 말은 지금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물론 책임은 한쪽에만 있지 않다. 사측은 강압적 조치로 문제를 덮으려 해서는 안 되고, 노조 역시 모든 갈등을 법적 투쟁으로만 끌고 가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서로를 파고드는 싸움을 계속하다 보면, 결국 ‘자승자박(自繩自縛)’, 스스로의 올가미에 발이 묶이는 꼴이 된다. 문경관광공사의 갈등은 단순한 노사 문제를 넘어 문경시 공공기관 운영의 투명성과 리더십을 시험하는 무대가 됐다. 본래 공공기관의 목적은 시민을 위한 봉사와 관광산업의 발전이다. 이제는 양측 모두 ‘화이부동(和而不同)’, 조화 속의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로 대화와 협력에 나설 때다. 시민은 더 이상 노사 갈등의 구경꾼이 아니다. 시민의 눈높이에서,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답을 내놓아야 할 시간이다. /고성환기자 hihero2025@kbmaeil.com

2025-09-09

철강산업 특별법, ‘K-스틸법’ 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포항은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심장이자 산업화의 출발점이다. 뜨거운 화로와 쉴 새 없는 압연기의 굉음 속에서 이 나라는 성장했고, 포항은 늘 그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심장이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 공급과잉, 미국의 50% 고관세, 중국 저가 철강의 공세, 유럽연합(EU)의 탄소 국경 조정제도(CBAM)까지. 철강산업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격랑에 휩싸여 있다. 철강은 국내총생산(GDP)의 4.8%를 차지하며 자동차, 조선, 반도체, 국방산업까지 대한민국 산업 전반을 떠받쳐 왔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법적·제도적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 국회에 발의된 ‘K-스틸법’은 단순한 구조조정 법안이 아니라 수소 환원 제철 같은 핵심 기술 개발 가속화, 탄소중립 대응 인프라 확충, 국제 무역환경 변화에 선제 대응, 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까지 아우르는 종합 패키지다. 대통령 직속위원회 설치, 장기전략 수립, 녹색 철강 투자 인센티브, 특별구역 지정과 무역 방어 확대 권한은 이 법의 뼈대다. 이는 포항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제조업 전체의 미래를 위한 안전망이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해 자국 철강을 보호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탄소 국경 조정제도로 국경세를 부과하며, 일본도 ‘그린 철강 특별법’을 제정했다. 세계 주요국들이 앞다퉈 철강산업 보호와 지원에 나서고 있는 지금, 우리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뒤처지는 순간, 글로벌시장에서 우리 철강의 입지는 급격히 축소될 것이다. 포항은 최근 ‘산업위기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이는 당장에 응급처치이지만 근본적 처방은 아니다. 수많은 협력업체와 노동자들이 일감 감소와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등진다. 지역 상권은 매출을 잃고, 소상공인은 생계를 걱정한다. 철강의 위기는 곧 포항시민 한 사람 한 사람 삶의 위기다. ‘K-스틸법’은 철강산업의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수소 환원 제철을 비롯한 저탄소 기술은 글로벌 탄소중립 전환 시대의 생존 전략이다. 이 법이 제정되면 포항은 연구개발 거점이 되고, 청년들에게는 양질의 일자리가 제공된다. 지역경제는 다시 활기를 찾고, 대한민국은 철강을 발판으로 제조업의 버팀목을 지킬 수 있다. 여야는 모두 철강산업 특별법 제정 필요성에 공감했다. 이제 남은 것은 속도다. 더 늦기 전에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K-스틸법’을 통과시켜야 한다. 이 법안은 특정 지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제조업 전체의 존립을 위한 국가적 과제다. 국회의 결단은 국민의 삶과 직결된 책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철강은 정쟁의 도구가 아니라 국가 경제의 뼈대다. 철강을 지키는 일은 특정 기업을 위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이다. 포항의 외침은 결코 지역 이기주의가 아니다. 이는 우리 아이들과 청년,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한 절박한 외침이다. 철강산업이 무너지면 대한민국 제조업 전체가 무너진다. 국회와 정부는 이제 응답해야 한다. 시민은 하나로 연대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K-스틸법’ 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철강을 살리는 길이 곧 가정을 살리고, 지역을 살리며, 나라를 살리는 길이다. /김일만 포항시의회의장

2025-09-09

성희롱 수렁에 빠진 조국혁신당

이걸 내홍(內訌)이라 불러야 할까, 자중지란(自中之亂)이라 해야 할까? 조국혁신당이 ‘성비위’라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형국이다. 지난 4일 그 당 강미정 대변인이 당내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건의 처리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탈당 기자회견을 열었다. 심각한 사안이 제기됐음에도 이규원 사무부총장은 “성희롱은, 언어폭력은 범죄는 아니다”라는 상황 파악 못한 발언으로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사회적 파장과 논란이 커지자 7일 황현선 사무총장이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어 김선민 조국혁신당 대표 권한대행도 물러났다. 이로써 조국혁신당은 자의 반 타의 반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됐다. 조국혁신당에서 시작된 불길은 더불어민주당 최강욱 교육연수원장에게까지 옮겨 붙었다. 성희롱을 당하고 이에 문제를 제기한 피해자를 비난하는 듯한 최 원장의 발언은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고, 결국 최 원장도 스스로 자리를 버렸다. 그럼에도 조국혁신당 성비위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왜냐? 그 당에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고, 실질적인 소유주라 할 수 있는 조국 전 법무장관이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지켜봐야 하는 게 남았기 때문. 이른바 진보 진영의 성희롱과 성폭력 스캔들은 잊을만하면 터져 나오는 고질적인 악재 가운데 하나다. 현재도 보수 진영은 ‘때는 지금’이라는 듯 목소리 높여 조국혁신당에 돌을 던지고 있다. 그 돌팔매를 피해가기가 쉽지 않다. 조국 전 장관은 자신의 책을 홍보하고, 향후 다가올 선거를 위한 정치적 입지 다지기에 앞서 조국혁신당 내부 문제부터 명쾌하게 해결해야 마땅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9-08

평창 봉평, 이효석문학관의 가을

새벽 5시. 겨우 눈이 떠졌다. 알람을 5시부터 6시까지 대여섯 개를 설정해 놓았었다. 대충 준비하고 나서자 벌써 여섯 시에 가깝다. 동서울버스터미널까지, 지하철로 한 시간 계산, 7시 10분까지 모이기로 했다. 6호선에서 3호선으로, 다시 2호선으로 갈아탄다. 택시보다 마음 편한 지하철이다. 가면서 무념이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평화롭다. 평창까지 아침 일찍 출발하면 2시간 남짓이다. 춘원학회를 같이하시는 전순영 시인, 이자성 선생께서 와 계시다. 발표자들, 토론자들도 모두 제때 도착이다. 우등버스 같은 버스 안, 편안하다. 예산이 없어 쩔쩔매다 어렵게 후원을 얻어 준비할 수 있었다. 버스는 휴게소에도 들르지 않고 아침 길을 달린다. 모두 고단한 아침 잠에 빠져든 듯. 나는 장문석 선생을 붙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청한다. 그는 최근에 오무라 마쓰오 선생에 관한 책을 냈다. 오무라 마쓰오, 사에구사 도시카스, 김윤식, 1970년, 일본 좌파, 윤동주, 김지하···. 이야기는 멀리, 깊은 곳까지 흘러간다. 전순영 시인은 그 사이에 근 십 년 가까이 힘든 병을 치러내셨다 했다. 아제르바이잔 유학생 레일라는 새벽에 인천에서 출발했다. 목하, 고단한 잠에 빠져 있다. 진우동, 린커쉬도 모두 유학생, 이번 준비에 대단한 활약을 했다. 먼저 문학관에 가 플래카드도 걸고 줌 장비로 점검했다. 그러고 보니, 신주희, 김산아, 장제희, 작가들이 동승했다. 오늘 세미나에서 연구자들 발표에 질의를 해주기로 했다. 9시 반 넘어 버스는 이효석문학관 밑에 제대로 당도한다. 10시부터 시작이다. 이효석 아드님 이우현 선생과 이주리 재단 실장님이 반겨 주신다. 봉평의 이효석 문학 선양회 분들도 나오셨다. 지금은 이효석 문화제 축제 기간. 일요일인데도 문학관의 내방객이 많다. 실무를 총괄한 구자연 선생, 몹시 바쁘다. 올해의 학술행사 주제는 이효석의 문제작을 다시 해부하는 것. 발표자만 모두 여덟 명에, 질의자도 여덟, 토론자가 넷이다. 하루 행사치고는 많다. 다섯 시까지 강행군이다. 단편소설 ‘하얼빈’의 주석적 연구를 발표한 부용은 바다 건너에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야 비자가 만료된 걸 았았다던가. 줌으로 발표를 해주기로 했다. 첫 창작집 ‘노령근해’(동지사, 1931)부터 ‘해바라기’(학예사, 1939)까지, 또 장편소설 ‘화분’(인문사, 1939)과 ‘벽공무한’(박문서관, 1941)까지, 또 희곡 ‘역사’('문장', 1939년 12월)까지 발표들을 했다. 특별한 것은, 평창 작가 김도연 씨가 자신이 읽은 이효석 작품들에 나타난 평창, 진부, 봉평, 대화, 월정 같은 곳들에 대해 아주 상세하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해준 것, 그리고 정선의 시인 전윤호 씨가 와서 유머러스하고도 평온한 토론을 펼친 것. 올해 세미나 준비하면서 각별히 신경 쓴 것은 평창 분들, 내방객들까지 함께 할 수 있는 학술토론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작가와 시인들의 역할이다. 발표자들도 빠짐없이 PPT까지 준비했다. 이제 겨우 다 마쳤다. 끝나고 저녁식사하러 내려오면서, 문학관 전망대에 섰다. 낮은 산들에 둘러싸인 봉평의 푸른 들, 녹 빛들이 한눈에 너무나 시원스럽다. 학술도 학술이지만, 이 빛을 만나려고 여기 왔던 것인가. 바로 그러했을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9-08

물 맛에 대하여

순수한 물(H2O) 자체는 사실상 아무런 맛이 없다. 실제 우리가 마시는 물은 다양한 무기질과 철 망간 등의 미량 성분이 용해되어 있어 맛이 달라진다. 여기에 물의 온도, 지역, 마실 때의 상황에 따라 물의 맛이 더 다양해진다. 오래전 어떤 드라마 장면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물맛을 아느냐’라고 물었던 장면이 아직 기억에 선명하다. 물맛이 그 맛이지 따로 무슨 맛이 있겠느냐는 식의 생각이 지배했던 30대쯤이었던 것 같다. 도시의 아파트를 떠나서 시골 산자락에 터를 잡은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정원에서 하루가 시작되고 정원에서 하루가 마감된다. 따로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노동량이다. 전원생활의 절반은 풀과의 전쟁이다. 깨끗한 정원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풀을 뽑아야 한다. 잔디를 깎는 것도 사실은 풀을 뽑는 것과 유사한 행위이다. 꽃과 나뭇가지들도 적당하게 정리하여 주지 않으면 금방 볼썽사나워진다. 마당은 나의 헬스클럽인 셈이다. 시골에 집을 지을 때 뒤뜰 황토방을 지어주신 어르신께서, ‘공 변호사는 따로 운동할 필요가 없겠구먼’ 하시면서 빙긋이 웃으셨던 한마디가 아직 귓전에 어른거린다. 그 말씀은 사실이 되었다. 마당 일을 마치고 생수병을 들이킬 때면 문득 어른의 말씀이 떠오른다. 운동이나 육체노동 이후에는 계절을 불문하고 몸에서 열이 난다. 추운 겨울에도 노동 후에는 시원한 물을 찾게 되는 것이다. 특히 여름의 마당 일은 많은 양의 물을 필요로 한다. 어떤 때에는 생수 몇 통을 들이킨 적도 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맛이 있었던 것은 갈증 날 때 마시는 시원한 물이었지 싶다. 같은 이유로 밥맛은 배고플 때가 최고이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그 뜻이리라. 현대는 물맛과 밥맛을 잊은 시대이다. 체내 수분 유지를 위해 갈증 나기 전에 물을 섭취하여야 하며, 위장에 부담을 주는 폭식을 피하기 위해 때 맞춰 밥을 먹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먹고 마신다. 갈증 나지 않고 배고프지 않으니 최고의 맛난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을 수가 없다. 밥상의 요리도 웬만해서는 맛나다는 칭찬을 듣기 어렵다. 시원한 물맛은 필요와 충족, 결핍과 해소의 원초적인 합일이다. 갈증이라는 결핍이 땀 흘린 노동 속에서 절정에 이르렀을 때, 물은 단순한 수분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그 무엇이다. 바야흐로 땀을 흘리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 아니 벌써 왔을지 모른다. 사람의 노동을 대체하는 인공지능 로봇들이 인간의 물맛까지 빼앗고 있지 않은가. “노동은 최고의 사랑.” 노동으로 흘린 땀방울이 일으킨 갈증을 추구하자. 최고의 물맛을 즐기고 싶은가, 그러면 갈증을 일으켜 보라. 최고의 식사를 하고 싶은가, 그러면 굶어 보라. 땀을 흘리지 않고 시원한 물맛을 기대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고 행복을 바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현대인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갈증이 나질 않고,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육체노동을 할 일이 없으면 운동이라도 하자. 최고의 물맛을 보기 위하여 시원한 생수 한 통 들고 운동장으로!! /공봉학 변호사

2025-09-08

길은, 디테일에 있다

처서를 지나 9월이 와도 기온이 33℃를 오르내린다. 열대야도 멈추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기후변화의 디테일이다. 기계음이 시끄럽다. 모서리를 돌자, 공원 나무 가지치기 광경이 펼쳐졌다. “저 사람들은 주민이 안중에도 없나?”하고 푸념이 난다. 하나, ‘당국이 시키니까 할 뿐인데.’란 속말로 마음을 추스른다. 주민편의, 기후변화대응 같은 디테일들을 민원 없이 당국이 챙기기는 어려울 터. 나뭇가지가 잘려 그늘이 적어진다. 준 그늘에 주민은 짜증 나겠다. 티끌 모아 태산이듯, 디테일이 쌓여 전체 되는 진리를 잊고 살기 일쑤다. 그렇다. 개인이나 가정, 사회, 국가, 지구촌의 사람 삶은 디테일이 요구된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교육, 국방, 기술 등 인간 활동은 언제, 어디서나 디테일이 함께해야 한다. ‘원죄’ 개념이 말하듯, 인간 본성은 디테일이 모자라 보인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을 포털에 검색했다. 맨 앞에, “‘신은 디테일에 있다’라는 표현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그 유래를 브리핑했다. 군 제대 뒤 제철소의 실험실에서 직장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수십 년 흐른 지금까지 줄곧 느꼈던 것이, ‘문제는, 디테일에 있다’였다. 많게는 수십 단계를 거쳐야 하는 까다로운 화학성분 정량분석(定量分析)실험도 했다. 만일 중간에 한 번만 실수 곧, 디테일하지 못하면 결과가 없거나 틀린 수치가 나온다. 이때는,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황당한 경험도 여러 번 했다. 개인이나 가정, 적은 공동체라면 디테일이 부족해도 악영향은 그만큼 적을 터다. 하지만, 국가나 지구촌으로 확대되면 결과도 온 인류에 미치는 사실을 인간은 지금도 보고, 당하며, 체험하고 살아낸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미국 주도 세계 관세문제, 우리의 남북관계 등 수없이 많다. 이강덕 포항시장이 9월 1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 앞에서, “동맹국 한국에 대한 철강 관세부과를 멈춰주세요”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관세 인하 요구 시위를 벌였다. 오죽하면 이 시장이 미국에 갔을까. 중국 저가품 공세로 어려운 한국 철강제품에 50% 관세는 살인적이다. 합의문 없이, 디테일하지 못한 8월 한미정상회담 때문이리라. 우리 사회엔 ‘총체적 불신’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운다. 여러 재판을 받는 후보가 부정선거 의혹 속에 대통령이 되자, 법원이 알아서 재판을 미루는 법치주의 디테일의 몰락을 국민은 멍하게 바라보았다. 여당, 정부가 전체주의 뺨치게 밀어붙인 특검이 휘두르는 직전 대통령 부부 구속 수사란 야만의 칼날이, 국민 가슴을 가른다. 불신의 근원은 ‘부정선거 의혹’의 디테일에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존폐와 결부될 이 중대한 사안을, 우리 사회 거의 전 부문의 힘 쥔 층들은 무조건 ‘음모론 프레임’을 씌워 외면해왔다. 선거결과에 진실을 감춘 디테일이 있다는 데도, 상당수 유권자도 공명선거에 무심했다. 우리는 눈앞의 작은 이익에 홀려 진‧선‧미, 지‧정‧의, 신‧망‧애 같은 인간 근본 가치들마저 장사지내버린 걸까. 길은 디테일에 있는데···. /강길수 수필가

2025-09-08

이재명, 의외로 잘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경선 후보 시절 “야당 대표를 가장 먼저 만나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 토론회에서 “대통령이 되면 가장 먼저 누구를 만나겠느냐”라는 질문을 받고서다. 그는 “여야 대화도 끊어지고 너무 적대화 돼 있다. 대통령이라도 시간 내고 설득해서 여야 대표, 특히 야당 대표와 주요 정치인을 만나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정치라는 게 혼자 잘 사는 게 아니라 나라가 잘되고, 국민이 잘되자고 하는 것”이라며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얘기하도록 하겠다”라고 강조했다. 그 말을 이제 실현하게 됐다. 이 대통령은 오늘(8일) 여야 대표를 대통령실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한다. 오찬 뒤에는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와 단독 회동도 할 예정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해외순방에서 돌아오면 야당 대표를 불러 설명하는 게 관례였다. 야당 대표와 단독회동을 하자는 국민의힘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양을 갖췄다. 의제도 국민의힘 주장대로 제한을 없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이재명 야당 대표와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이 대표가 ‘영수회담이든, 여야 지도부 면담이든 형식은 뭐라도 좋으니, 민생을 위해 일단 만나자’라고 여러 차례 반복해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영수회담을 제안하는 참모들에게 이 전 대표의 과거 이력을 들먹이며, “내가 왜 이런 사람과 만나야 하느냐” “범죄 피의자 아니냐”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참패하고 나서야 갑자기 영수 회담을 했다. 그러나 4월 29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수 회담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대화를 계속 이어가기는 어려웠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야당과 대화를 거부한다. 그는 지난달 말 페이스북에 “상식적으로 나를 죽이려 했던 자들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대화할 수 있을까?”라며 “나의 대답은 NO”라고 썼다. 야당 지도부를 만나면 악수는커녕 눈길도 피했다. 윤 전 대통령과 판박이다. 정 대표는 국회에서 독주한다. 무조건 다수결로 밀어붙인다. 모조건 다수결로 처리하면 국회가 왜 필요한가. 일방적인 정책을 당내는 물론 야당까지 찍어 누른다. 대통령이 다수표를 얻었다고 전횡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파시스트 정당이 써먹던 위험천만한 반민주적 발상이다. 법안 처리와 의사 진행뿐 아니다. 이제 야당의 견해를 대변해 협상하는 야당 간사마저 여당 입맛대로 정하겠다고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지나치면 부러진다. 지금 국민의힘은 동네북 처지다. 약장수 같은 유튜버들의 선동이 당대표를 결정할 정도로 줏대 없이 휘둘린다. 보수 지지자들의 마음도 당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유일한 응원군이 민주당이다. 절제라고는 모르는 민주당의 강성 모드가 극우세력에게 명분을 제공한다. 민주당의 유치한 선명 경쟁 탓에 말도 안 되는 극우적 주장이 합리적 근거를 얻고 있다. “오죽하면…”이라거나 “그래도 정청래를 응원할 수는 없지 않으냐”라는 주장이 떠나던 보수 지지층의 발목을 잡고 있다. 야당의 극우화가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에 유리할지도 모른다. 강성모드로 서로 자기 표를 깎아 먹어도, 전국적인 판세에서는 그래도 불리한 게 ‘윤 어게인’이다.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긴개긴 극우화에 명분을 주고, 불씨를 지피는 언행은 역사에 죄를 짓는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스스로 무너질 ‘윤 어게인’이나 극우적 주장이다. 그런데 “민주당 하는 것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라는 말이 나오게 만든다. 극우 주장이 먹혀들도록 명분을 제공하는 것 역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공범이다. 이 대통령은 양대 노총을 만난 자리에서 “내가 편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민주당의 성공도 중요하겠지만, 대한민국의 성공이 더 중요하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그로 인해 더 발전했느냐, 후퇴했느냐가 역사에 기록된다. 두려울 게 없다. 지난 정부를 따라 할 이유가 없다. 보수 인사들 사이에서도 이 대통령이 “의외로 잘하고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조금 더 포용과 관용을 발휘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바란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9-07

그저 사사로운 나날들

그 시절 나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아버지 없는 아이가 참으로 부러웠다 안팎이 그저 고요한 사사로운 나날들이 ​ 노름판의 아버지를 찾아다니지 않고 근심으로 잠 못 드는 어매도 없고 맥없이 서성이기만 하는 할배도 없는 ​ 그토록 사소하게 지나가는 나날들이 소원이었다고, 팔순이 목전인 오라비는 아버지 산소 뒤에서 때늦은 고백을 했다 ​ 평생 지나간 일을 내어 말한 적 없는 그 뜻밖의 사건은 이를테면 누수였는데 그때는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권규미, ‘누수’ 전문 (시조21, 2025, 가을호) 권규미 시인의 ‘누수’는 그림으로 보자면 사실화이면서 내면화된 울림 또한 깊다. 담담하게 고백되는 과거의 기억은 겉만 보아서는 한없이 고요하게 서술되는 것 같지만, 내부에는 격렬한 감정의 급류가 있다. 이때 기억에 대한 모든 언술은 결국 시간에 대한 언술일 것이다. 기억이란 흘러간 시간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경험이든 순간에 깊이 파인 후 시간의 흐름 속으로 말려 들어간다. 그러니 경험을 소환해 기억하려는 자는 곧 시간과 맞서는 자일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가족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운명의 공동체다. 같은 맥락에서 한 작가는 “사랑은 폭력과 동의어”라고 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언술에 대입해 보지 않더라도 ‘가족’이란 기표는 가장 내밀한 관계어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감싸는 껍질이 된다. 시인과 가족들에게는 ‘누수’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 시절’이 있었다. 가령 “노름판의 아버지”가 있는 유년의 장소에는 드러내 놓지 못할 비밀이 함께 산다. 그 비밀은 평화롭지도 고요하지도 않은 경험으로 기억된다. 시인은 그 시절을 “아버지 없는 아이가 참으로 부러웠”고 “근심으로 잠 못 드는 어매도”“맥없이 서성이기만 하는 할배도 없는” 공간이 부러웠다고 서술한다. 시인의 파편적인 시점으로 가족을 기억하는 데 있어 “팔순이 목전인 오라비”의 “때늦은 고백”의 접목은 이러한 기억의 서사를 극화한다. 시인이 누수라고 정의한 이 “뜻밖의 사건”은 “아버지 산소 뒤”에서 일어나는데 “평생 지나간 일을 내어 말한 적 없는” 오라비의 고백은 누수로 인식된다. 이때 사건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아버지의 산소는 팔순이 목전인 오라비의 시간을 병치하며 단절되었던 그간의 시간을 복원한다. 그들에게 아버지와 함께한 날들은 장대한 시간을 경유한 불안한 경험이다. 그 시절 조각난 기억은 파편처럼 가족의 집은 실로 위태하게 직조된다. 발터 벤야민은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삶에서의 실제 체험이 아니라, 그런 체험의 기억을 짜는 일이라고 했으며, 낮 동안 짠 실을 밤이면 풀어헤치는 텍스트라는 개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작가는 프루스트였다고 했다. 바로 그 기억의 서사가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면 권규미의 시편 또한 그 지점에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시인의 시집 ‘누가 나를 놓쳤을까’(가히, 2025)에는 체화된 기억이 순장된 신화적 공간과 접목하는 정황이 두루 포착된다. 기억은 사랑이었든 폭력이었든 돌이킬 수 없다. 이때 그들이 바라는 건 ‘대화’다. 그것이 뜻밖의 누수이었건 고백이었건 말이다. 시인이 기억을 시로 복기하기 위해 선택한 오라비의 나이는 팔순이 목전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아버지와 오라비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난 때늦은 고백은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끝내 멈추어 설 것 같지 않다. “그때는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럴 때 기억은 어떻게 깃드는 것일까.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가장 비극적인 순간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고를 것인가. 이것이 시인의 선택이었다. “그토록 사소하게 지나가는 나날들이 소원이었다고” /이희정 시인

2025-09-07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 철강이 다시 뜨겁게 뛸 수 있도록

철강 도시 포항은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끌며 국가 경제 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왔다. 세계적인 기업 포스코, 철강공단 협력기업들과 함께 성장한 포항의 철강산업은 자동차, 조선, 건설, 방산 등 ‘K-제조업’을 든든히 받치며 국가 경제를 견인했다. 하지만, 포항은 지금 생존이 달린 고립무원의 벼랑 끝에 서 있다. 글로벌 철강 공급 과잉과 보호무역주의 심화, 탄소중립 강화 등 악재가 겹친 전례 없는 위기가 지속되고 있어서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내수 부진으로 철강 수요가 줄고, 과잉 생산된 저가의 중국산 제품과 엔저 현상으로 가격 경쟁력까지 갖춘 일본산 제품들이 몰려들며 국내외 철강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50% 고율 관세 부과는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 철강 산업의 생존을 직접 위협한다. 내년 시행 예정인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탄소 감축 없이는 철강의 생산과 수출이 어려운 새 도전도 앞두고 있다. 산업용 전기료도 2022년 대비 지난해 75.8%나 급등해 전력 다소비 산업인 철강기업들의 부담도 커지고 있다. 지역 경제 충격도 심각하다. ‘포항 빅4’ 철강사의 법인 지방소득세는 2022년 967억 원에서 지난해 154억 원으로 급감해 현저하게 악화한 상황을 반영했다. 철강 기업의 생산 축소와 투자 위축, 고용 불안은 소상공인 매출 감소 등 민생 경제 전반의 불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철강이 무너지면 국가 산업 전반과 관련 일자리까지 위협할 수 있다. 대한민국 생존이 달린 철강 위기 극복은 기업이나 지자체만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들다. 정부와 지자체, 기업 간 유기적인 협력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중앙정부의 강력하고 전방위적인 지원 정책이 가장 중요하다. 이에 우리시는 정부 지원의 두 축으로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과 ‘철강산업 지원 특별법(K-스틸법)’ 제정을 계속 호소해 왔다. 다행히 경북도, 정치권, 정부와 긴밀하게 협의한 끝에 8월 말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돼 기업 경영과 고용 안정,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지원 사업이 2년간 진행될 예정이다. 이를 기반으로 철강 재도약의 계기를 확실히 마련할 실효성 있는 정책 추진을 위해 총 5734억 원 규모의 23개 세부 사업을 정부에 건의했다.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철강 산업의 친환경 대전환과 법적 지원이 필요하다. 철강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고 녹색철강기술로 전환하기 위한 ‘K-스틸법’ 제정이 시급한 이유다. 이 법은 철강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재정립하고, 수소환원제철 등 탈탄소 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내용과 더불어 불공정 무역에 대응하는 방안 등을 담았다. 1970년에 제정된 ‘철강공업육성법’이 우리나라 산업화의 길을 열었다면, ‘K-스틸법’은 위기에 빠진 철강 산업을 살리는 대전환점이 될 것이다. 철강 산업용 전기료 인하 등 에너지 비용 절감 대책을 비롯해 전력망 확충과 수소환원제철 인프라 확보를 위한 울진~포항 에너지고속도로, 수소 배관망 구축 등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국가 차원의 추가적인 지원 정책도 지속 건의할 계획이다. 여기에다 포스코와 지역 주민, 지역 국회의원 등 정치권과의 소통을 통해 포스코 직원 기숙사를 시내 지역으로 이전할 부지를 확정했다. 800명의 청년이 거주하며 소비와 문화생활을 통해 지역의 경제 활성화와 도심 회복에 상당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무엇보다 철강 관세로 더는 물러설 곳 없는 포항의 절박한 현실을 미국 사회에 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다는 각오로 9월초 워싱턴 D.C.를 찾았다.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앞에서 한국 철강 제품에 부과된 관세의 재검토를 호소하는 캠페인을 현지 한인회와 함께 진행한 데 이어 관세 인하를 호소하는 공식 건의서를 전달했다. 이를 통해 동맹국에 부과된 50%에 이르는 과도한 관세를 영국과 같은 수준인 25%로 조정하거나 제한적 쿼터 예외 적용을 건의하며, 동맹국에 대한 상생과 공존의 지혜를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했다. 포항의 용광로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단순히 철을 녹이는 불이 아니다.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을 뛰게 하는 원동력이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갈 희망의 불씨다. 시민, 기업, 정부와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 산업의 심장인 철강 산업이 다시 뜨겁게 뛰어 대한민국 경제 재도약을 이끌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계속하겠다. /이강덕 포항시장

2025-09-07

인생의 위기에서 만난 ‘몰라 몰라’

죽도시장에는 ‘포항의 명물 개복치’라는 간판이 큼지막하게 붙은 수산물 가게가 있다. 2대에 걸쳐 76년간 개복치를 유통해온 태영수산이다. 그곳에는 개복치에 평생을 바쳐온 이영태(70), 박정자(69) 부부가 있다. 그들을 만나 개복치와 죽도시장 그리고 그에 얽힌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영태 대표의 할아버지는 포스코가 세워진 곳에서 살았다. 170여 가구가 살았던 동네에서 제법 땅이 많았고 집에는 일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배도 소유하고 있어서 영일만에 나가 조업했는데 가자미와 아귀가 많이 잡혔다. 할아버지가 가져온 어패류를 할머니가 시장에 나가 팔았는데 어머니도 그 일을 물려받았다. 아버지도 돛단배 두 척을 가지고 영일만에서 어업에 종사했다. 1970년대 포항제철이 들어서자 지금 포항운하가 들어선 자리로 옮겨와 어로 작업을 하며 살았다. 올해 92세인 이 대표의 어머니는 20대부터 시어머니와 남편이 잡아온 조개, 멍게, 고등어, 대게 등을 팔아서 생계를 꾸렸다. 그 시절, 노점상 이름을 ‘태영수산’이라고 지었다. 대개 장사하는 사람들은 상호(商號)를 맏아들이나 맏딸 이름으로 정한다. 처음에는 3남 1녀 중 장남인 영태의 이름을 따와 ‘영태수산’으로 하려고 했는데 손을 댄 사업마다 실패하니 주변에서 ‘영태’를 거꾸로 해 지어보라고 권했다. 그 바람에 상호를 ‘태영수산’이라 했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태영수산의 역사는 100년이 넘었다. 죽도시장에 터 잡고 2대에 걸쳐 76년간 개복치에 평생바친 이영태·박정자 부부 바다일 시키지않으려는 아버지 만류로 오랫동안 떠났다 운명처럼 다시 돌아와 고등어·갈치 등 생선 파는 일에 점점 한계 죽도다리 지나다 개복치 잡는 장면 보며 “남이 안하는 것 하자” 품목 바꿔서 판매 점차 개복치를 포항의 명물로 만들어가 1998년 태영수산으로 등록 후 만든 간판 2006년 마침내 가건물 짓고 당당히 걸어 포항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다 이 대표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집안의 일손이 부족할 때면 아버지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일을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몰래 혼자서 배를 타고 노를 저어 호미곶까지 갔다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헤엄을 쳐서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도 그 경험을 밑천 삼아 며칠 뒤, 이번에는 친구 여섯 명을 배에 태우고 바다에 나갔다. 무사히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일행이 돌아올 때까지 학교와 집을 포함한 온 동네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이 대표의 아버지는 “다시는 배를 타지 마라”며 크게 화를 내셨다. 또한 할아버지를 비롯해 집안 어른들은 이 대표가 바다에 나가 사고라도 당할까 봐 감시를 했다. 중학교 진학도 내륙인 대구에 보낼 정도로 바다로 이어지는 끈을 차단했다. 그 바람에 이 대표는 오랫동안 바다와 멀어진 삶을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동차 부품 공장에 다니기도 했고, 결혼 후에는 울산에서 한국타이어 대리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 잘못되어 사업이 망하고 말았다. 운명은 그를 다시 바다로 불러들였다. 살아갈 길이 막막해 여러 방도를 찾고 있을 때 포항 본가에서 부부를 불렀다. 이 대표의 아내 박정자 씨는 시어머니와 죽도다리 옆에서 상자에 생선을 올려놓고 팔기 시작했다. 죽도시장은 1950년대에 갈대밭이 무성한 동빈내항의 늪지대에 노점상들이 모여들어 축축한 바닥에 비닐이나 두꺼운 종이를 깔고, 그 위에 수산물을 놓고 팔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곳에서 박정자 씨는 어린 두 딸을 위해서라도 ‘내가 이걸 안 하면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악착같이 생선을 팔았다. 개복치와의 특별한 인연 이 대표의 아내 박정자 씨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생선을 파는 일에 서서히 한계를 느꼈다. 시어머니는 주로 고등어, 갈치, 멸치 같은 유통이 빠른 생선을 취급했다. 그 품목들은 빨리 팔리는 대신에 목돈이 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팔아도 그 수입으로는 두 집이 살아가기가 빠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죽도다리를 지나다가 다리 위에서 큰 물고기를 잡는 장면을 보았다. 사람 몸집보다 큰 대물(大物), 개복치였다. 아직 복개하지 않은 때여서 어시장 사거리에서 죽도시장으로 들어가려면 죽도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그 위에서 개복치 잡는 것을 본 것이다. 개복치는 포항수협에서 직접 경매로 받거나, 부산과 강구 수협을 거쳐 경매된 것을 상인들에게 공급받기도 했다. 개복치는 워낙에 커서 죽도시장 안으로 옮기기가 힘들어 죽도다리 위에서 바닥에 비닐을 깔고 팔 때가 많았다. 개복치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하는데, 그때 박정자 씨의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많은 노점상이 취급하는 생선을 팔아봐야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남들이 안 하는 걸 해야 한다. 개복치를 팔아보자.’ 박정자 씨는 그렇게 유통 품목을 개복치로 바꿨다. “빨리 팔리지만 돈 안 되는 생선보다 내 손으로 정성을 들여 다룰 수 있는 생선에 집중하고 싶었지요.” 시어머니와 본격적으로 분리한 뒤, 죽도다리 위에서 개복치를 팔았다. 생선의 신선도를 물고기 눈알로 확인하는 법, 물 온도에 대한 감각, 생물을 다룰 때의 손 압력 조절, 계절별 유통 시점 등 부모에게 배운 수산물을 다루는 체화된 노동 기술과 지식을 기반으로 부부는 점차 개복치를 전문으로 판매해 포항의 명물로 만들어갔다. ‘태영수산’ 간판을 점포에 걸다 이 대표의 어머니는 30대 중반인 1968년에 포항 수산중매인 1호가 되었다. 포항수협에서 중매인을 모집했는데 본격적으로 수산물 중매를 하고 싶어 신청했다. 당시 중매인 1호는 다섯 명이었는데 그중 한 사람으로, 중매인 59번이었다. 이 대표는 부모님이 35년간 운영해온 중개업을 1984년에 승계받았다. 예전부터 태영수산이라는 상호는 있었어도 간판 없이 시장 한쪽에서 생선을 팔았는데, 1998년 태영수산으로 등록한 뒤에는 간판을 만들었다. 아직 건물이 없을 때라 파라솔 두 개를 가지고 20여 년 가까이 장사하는 동안 간판은 좌판 옆에 세워져 있었다. 2006년 이영태 대표가 수산중매인으로 등록하고 난 후 ㈜태양수산을 설립하면서 개미수산 옆에 가건물을 지어 그토록 원하던 간판을 점포 위에 당당하게 걸었다. 죽도다리 옆에서 시작한 시어머니의 노점상 ‘태영수산’이, 죽도다리 건너편에 가건물을 짓고 난 뒤 비로소 간판에 새겨진 것이다. 개복치는? 예부터 조상들이 사계절 선호하는 수산물로, 포항에서는 결혼식, 잔칫집, 돌잔치, 장례식 등의 경조사에 빼놓을 수 없는 바닷물고기다. 복어목 개복치과로, 비늘이 없고 길이 약 2~4미터, 몸무게 약 1∼2톤에 이르는 거대한 물고기다. 한 번 산란에 2억∼3억 개의 알을 낳지만, 성체가 되는 것은 한두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개복치’라는 이름은 머리만 뚝 잘라놓은 것 같은 특이한 생김새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학명인 ‘몰라 몰라’(Mola mola)는 맷돌을 닮은 개복치의 형상을 딴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영어 이름은 ‘오션 선피쉬’(Ocean sunfish)다. 납작하고 둥근 몸체를 가지고 파도가 없는 고요한 날에는 수면에 등지느러미를 보이면서 헤엄치거나 누워 뜨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데, 태양 아래에서 일광욕을 하는 것처럼 보여서 붙여졌다. 개복치는 먹이를 씹지 않고 삼키는데 내장을 열어보면 오징어, 해파리, 멸치 등이 살아 있는 경우가 많다. 피부 점액질에는 독이 있어 일종의 항생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상처 입은 물고기들이 개복치 주위를 헤엄치기도 하는데 ‘바다 의사’ 노릇을 하는 셈이다. 개복치 껍질은 마치 하얀 묵 같은데, 껍질을 삶으면 우무나 곤약처럼 투명해진다. 회로 먹기도 하는 개복치살은 참치와 비슷하고 그 맛이 일품이다. 콜라겐이 풍부하고 단백질, 비타민 등이 풍부하며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춘다. 빈혈에 좋은 타우린도 함유하고 있다. 바다의 육류라고 불릴 만큼 육질이 쫄깃하고 고혈압, 당뇨병, 신경통 등 성인병에 좋으며 동맥경화 예방, 근육경화 방지, 뇌기능 향상에도 효과가 있다. /정미영(수필가)

2025-09-07

"전통시장 큰 위기⋯활성화 도모해야”

지난 7월 대구·경북지역 특성화시장 간담회를 통해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지원하는 특성화시장 상인회장님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대형 산불과 급변하는 유통 환경으로 지역 전통시장이 큰 어려움에 직면했음을 알게 됐다. 전통시장의 어려움은 대형마트와 온라인 쇼핑의 공세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산업통상자원부 통계(2024)를 보면 온라인 유통업 매출은 전년 대비 15% 증가해 전체 유통업 매출의 절반 이상(50.3%)을 차지할 정도로 구매 패턴이 급변하고 있다. 편리한 온라인 쇼핑과 대형마트의 원스톱 서비스 앞에서 전통시장의 경쟁력은 약화되고 있다. 또한, 대구를 비롯한 구미·포항·안동 등 지역도시 경제 기반 약화로 전반적인 구매력이 감소했고, 이는 지역 전통시장의 매출 감소로 이어졌다. 특히, 경북 북부지역은 산불로 인해 주민 생활 기반이 위협받고 관광객의 발길이 끊기면서 지역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렇다면 지역 전통시장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변화와 혁신, 그리고 소비자 중심의 사고가 필요하다. 첫째, 온라인 접목을 통한 편리성 강화가 필요하다. 온라인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전통시장도 카드 결제 시스템을 확대하고 배달 및 배송 서비스를 도입해야 한다. 또 전통시장의 정겨운 분위기나 상인들의 이야기가 담긴 온라인 콘텐츠를 개발해 홍보에 적극 활용하는 것도 필요하다. 둘째, 소비자 신뢰를 높이는 기본 서비스 개선이 필요하다. 일일이 가격을 물어 보고 흥정하는 소비자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가격표시제를 정착시키는 방안도 있다. 셋째, 전통시장의 다원적 가치 발견과 특성화 전략이다. 전통시장은 대형마트·이커머스와 경쟁하기보다 고유한 문화와 지역 특색을 활용한 차별화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서울 광장시장이나 통인시장처럼 관광 명소화해 체험 공간을 제공하거나, 지역 농부와 협력해 특색 있는 상품을 판매하는 전략이 효과적이다. 넷째, 젊은 세대 유입을 위한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야시장 활성화와 비어있는 점포를 청년몰이나 공방 등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전주 남부시장의 야시장은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음식을 개발하고 비어있는 공간을 청년몰로 활용해 성공적인 사례가 됐다. 마지막으로, 협동조합을 통한 상인 자생력 강화가 필요하다. 상인들이 협동조합을 결성해 공동의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전통시장의 주요한 해법이 될 것이며, 상인간의 유대감 및 활성화를 이끌 수 있다. 전통시장 활성화는 단기간에 달성되기 어렵다.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 상인들의 노력, 소비자의 참여가 조화를 이루어야 된다. 대구경북지방중소벤처기업청은 올해 특성화 시장(문광형 10곳, 디지털 5곳, 첫걸음 5곳) 지원 사업을 진행 중이며, 산불 피해가 컸던 경북 북부(안동·청송)는 국비 13억 원을 지원받는 지역상권 활력지원 사업에 선정됐다. 전통시장은 단순한 거래 공간을 넘어 지역의 역사와 공동체 정신이 깃든 소중한 공간이다. 지역민 여러분의 관심과 애정이 전통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이번 민생회복 소비쿠폰을 활용해 가족과 함께 가까운 전통시장을 방문해보는 것은 어떨까? 대구경북지방중소벤처기업청은 전통시장이 현대적 매력으로 재탄생할 수 있도록 적극 뒷받침하겠다. /정기환 대구경북지방중소벤처기업청장

2025-09-07

억울하면 출세해야 하나요?

지난 4일 조국혁신당 대변인의 탈당 기자회견이 있었다. 조국혁신당 고위 당직자들의 성추행 사건을 처리하는 조국혁신당의 늑장 대처에 실망을 넘어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는 내용이다. 조국 전 대표의 침묵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도 애절한 데다 눈물을 흘리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창당할 때 보여준 당찬 모습은 어디 가고, 배신감에 흐느끼는 모습을 보니 그이가 느낄 참담함에 절로 공감이 되었다. 기자회견 내용 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 내용은 ‘그래도 나는 기득권이 있어서 기자회견을 한다. 그러나 심한 성추행을 당한 어린 피해자들은 기자회견 할 기회도 없다.’는 말이었다. 기자회견 후 혁신당에서 바로 반박 기사를 내보낸 것 역시 강미정의 지위를 말해준다. 그렇다고 일부 언론에서 강미정 사태라고 하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강미정 대변인 탈당 기자회견이 있을 때까지 이 사건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타임라인을 따라가 보았다. 처음 언론 보도는 4월 30일인데, 피해자가 혁신당 내부에서 비위 신고를 한 것은 4월 14일과 17일이라고 한다. 혁신당에서는 바로 당 윤리위원회에 회부되었다고 밝혔지만 피해자들의 말은 다르다. “조사 개시와 외부기관 선정이 지체되고 번복되는 납득할 수 없는 과정이 있었고, 가해자와 업무상 분리 조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기사를 추적해보면 피해자 말에 신빙성이 더 많다. 혁신당은 5월 1일, 당이 이 문제를 인지한 지 약 2주 만에 가해자로 지목된 고위 당직자 ㄱ씨를 전날 직무 배제했다고 밝혔는데, 결국 4월 30일 언론보도가 나오고 나서야 이루어진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나서 접수 70여 일 만에야 가해자 1명은 제명(당적 박탈 및 출당), 다른 한 명은 당원자격정지 1년 처분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5월 2일 기사에서 더 황당한 소식을 접했다. 혁신당에서 이 가해자 말고도 다른 당직자에 대해서도 직장내괴롭힘과 성 비위 등으로 3건이 접수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추행은 신고하지 않는다는 관행을 볼 때 작은 당에서 신고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당내 성인지 감수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조국 전 대표의 태도다. 조국은 강민정 대변인의 탈당 기자회견이 있던 날 저녁에서야 입장을 밝혔다. 조국은 ‘비당원 처지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남 얘기 하듯 말했다. 그러자 혁신당 피해자 대리인은 ‘비당원이 의전 받으며 현충원 참배를 하느냐’며 조국 말의 모순을 지적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1969년 영화가 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높은 직급에 오른 남자 이야기다. 1965년에 나온 같은 제목의 고봉산 작곡의 열심히 일하라는 교훈적인 노래도 있다. 그러나 강미정 대변인의 탈당 기자회견을 보노라니 부당함을 시정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지위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직급 없는 사람의 억울함은 어떻게 풀 수 있을지 암담하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9-07

여로(旅路)의 끝

세상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생성과 소멸에 내재한 숙명 같은 것이다.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자연적인 대상이든 인위적인 존재든, 크든 작든,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자리한다. 안톤 체호프는 단편소설 ‘사랑에 관하여’에서 “세상에서 가장 적절하게 끝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쓴다. 최고로 적당한 시점에 세상일이 끝난다는 주장이다. 13박 14일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지 일주일이 흘러간다. 시차 적응도 문제려니와 언어로 형언하기 어려운 지나친 더위와 습기로 육신의 정기(精氣)가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다. 어느새 찾아온 노화(老化)의 위력을 절감하기도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솟구치는 아련한 우수(憂愁)가 일상의 순조로운 운용을 막아선다. 어쩌면 이것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의 유품인지도 모른다. 여정을 시작하면서 나는 휴대전화에 내장된 메모 기능을 활용하기로 작심한다. 그것의 대체재로 두툼한 필기용 공책을 가져갔는데, 무겁고도 쓸모없는 공책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지나친 준비는 때로 과도한 피로를 수반한다. 어느 때는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혹은 다음 날이나 그다음 날에 미진한 내용을 휴대전화에 기록하고, 사진을 동봉하기도 했다. 이번에 실현한 여행은 사실 오래전부터 기획된 것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경북대 노문학과 졸업생들의 유쾌한 성화(?)가 사건의 발단이다. 모스크바 한국문화원 원장으로 재직하는 94학번 졸업생은 청도 이서 출신 촌놈이다. 그는 틈나는 대로 내게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여행을 권하곤 했다. 연극과 오페라, 발레와 함께하는 문화 기행을 말하곤 했다. 그러다가 지난 7월 그가 잠시 들른 청도 이서의 허름한 식당에서 광복 80주년 기념행사를 설명한다. 모스크바가 아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구현하는 의미심장한 행사의 주빈(主賓)으로 나를 초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89 졸업생의 현황 파악에 따르면, 경색(梗塞)된 한러 관계 때문에 러시아 직항은 없었다. 그런 연유로 블라디보스토크 일정은 날려 보내야 했다. 그렇지만 일단 발화(發話)된 여행 기획은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짧지 않은 여정으로 실현되기에 이른다. 벌써 일주일 전에 종결된 일정의 후유증이 아직도 나의 몸과 나를 붙잡고 놔주지 않는다. 그 사이에 있은 두 차례의 학부 강의가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작년부터 시작한 대중 강연을 어떤 양상으로 마쳤는지도 알쏭달쏭할 지경이다. 저녁놀이 내릴 무렵이면 휴대전화기를 들고 허위단심 들길로 나서서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산과 들과 내 마음을 사진기에 담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상념은 날개를 타고 모스크바로 페테르부르크로 트빌리시로 소리 없이 날아가곤 하는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 함께했던 사람들과 풍광, 술과 음식 그리고 사는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나서 부드럽게 나를 감싼다. 이번 여정을 역순(逆順)으로 기록함으로써 기억을 환기하고자 한다. 기록의 핵심에 자리하는 것은 인간과 사건과 인연일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벌써 정신 차리고 치열한 일상의 모퉁이로 귀환했을 터다. 삶은 때로 순서가 무용(無用)할 수도 있는 법 아니겠는가!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