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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어느 나라에나 국민들이 애독하는 첫사랑 소설이 있기 마련입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을 텐데요.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하고 정감 가는 한 편의 첫사랑 소설을 꼽으라면, 그것은 아마도 황순원의 ‘소나기’일 겁니다. 일본에도 국민 첫사랑 소설이 있는데요. 그것은 일본 최초의 근대여성작가로 꼽히는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의 ‘타케쿠라베(키재기)’(1895-1896)입니다. 놀랍게도 일본판 ‘소나기’에 해당하는 ‘타케쿠라베’는 요시와라 유곽과 그 주변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히구치 이치요만큼 평생을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다간 문인도 드물 겁니다. 소설가가 된 계기부터가 소설 발표를 통해 원고료를 받는 친구에게 자극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본래 하급 무사의 딸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이치요는, 오빠와 아버지가 연이어 병사하면서 집안의 가장이 되어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지게 됩니다. 그녀는 24년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늘 빈곤에 시달렸으며, 흡족한 연애도 해볼 수 없었습니다. 정혼까지 했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파혼당한 시부야 사부로, 마음속 짝사랑에 머물렀던 문학선생 나카라이 도스이와의 관계만을 남겼을 뿐이니까요. 이치요는 그 모든 현실적 불우를 오직 붓 한 자루에 의지해 헤쳐 나간 여성입니다. 1890년 9월 이치요는 혼고기쿠사카초(本鄕菊坂町)로 이사하여 빨래나 바느질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꾸려나갑니다. 1892년부터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치요는 1893년 7월에는 지금의 이치요기념관이 있는 시타야류센지초(下谷龍泉寺町)로 이사하여 완구나 과자를 파는 잡화점을 여는데요. 이 곳은 유곽 요시와라의 뒷골목에 해당하는 동네로서, 이 곳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바로 ‘타케쿠라베’입니다. 잡화점에서 별다른 수익을 얻지 못한 이치요는, 문학에 전념할 생각으로 1894년 5월 최후의 거처인 혼고마루야마후쿠야마초(本鄕丸山福山町)로 이사를 하는데요, 이 곳 역시 겉으로는 술과 요리를 팔고, 속으로는 매춘 행위를 하는 사창가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곳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바로 ‘니고리에’(1895)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임 그리워 돌아본다는 오몬(大門) 옆에 서 있는 버드나무에 이르는 길은 멀지만 오하구로 도랑에 등불이 비치는 유곽 삼 층에서 벌어지는 소란은 손에 잡힐 듯 들리고 밤낮없이 오가는 인력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번영을 상기시킨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타케쿠라베’는 요시와라 유곽과 주변 동네의 풍경과 분위기를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명작입니다. 요시와라의 잘 나가는 유녀를 언니로 둔 미도리는 승려의 아들 신뇨를 좋아하는데요. 동네 아이들이 골목파와 큰길파로 나뉘어 대립을 하는 가운데, 센조쿠 신사의 여름 축제가 열리는 저녁 무렵, 골목파 패거리가 들이닥쳐 미도리의 이마에 진흙이 묻은 짚신을 내던집니다. 배후에 신뇨가 있다고 오해한 미도리는 다음 날 아침부터 학교에도 가지 않울 정도로 큰 충격을 받는데요. 신뇨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미도리지만, “정말로 저렇게 싫은 녀석은 없을거야.”라고 침이 마르도록 욕을 해대면서도, 신뇨의 뒷모습을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바라보는” 애틋한 마음만은 변화가 없습니다. ‘타케쿠라베’에서 미도리와 신뇨의 여린 마음이 가장 문학적으로 표현된 것은 심부름을 가다가 미도리의 집 앞을 지나던 신뇨의 나막신 코 끈이 끊어지는 장면에서입니다. 고생을 모르고 곱게만 자란 도련님인 신뇨는 코 끈이 끊어져 허둥대기만 하는데요. 이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미도리는 격자문 사이로 손에 든 빨간색 천조각을 가만히 신뇨에게 던집니다. 그러나 천성이 소심하기만 한 신뇨는 고마운 생각이 들면서도, 천조각을 줍지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다 간신히 그 자리를 벗어나고 마네요. 드디어 둘 사이에도 이별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존경받는 승려의 아들인 신뇨와, 유녀의 운영이 예정된 미도리의 해피엔딩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나 봅니다. 미도리는 언니를 따라 요시와라 유곽의 유녀가 되고, 그 이후로는 거리에서 아이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절을 이어받아야 하는 신뇨 역시 승려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동네를 떠나는데요. 신뇨는 승려학교로 떠나는 날 아침에 미도리 방의 격자문에 조화 수선화를 꽂아 놓습니다. 미도리와 신뇨의 사랑 이야기는 요시와라 유곽이라는 환락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더욱 애잔하고 순수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케쿠라베’로 이치요는 일본 문단의 최고 권위였던 모리 오가이의 격찬을 받으며, 일약 문단의 스타로 떠오르는데요. 안타깝게도 그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은 차가운 가을날 폐결핵으로 요절하고 맙니다. 다행스럽게도, 불운했던 이치요의 사후는 참으로 화려한데요. 수많은 문인들의 기념관이 있는 도쿄지만, 이치요기념관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2004년부터는 국가적 영웅들에게만 허락되는 지폐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는데요. 여성이 일본 지폐에 등장한 것은 신공황후 이후, 무려 123년 만이라고 합니다. 평생 가난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히구치 이치요가 100년이 훨씬 지난 후에 고액권의 주인공이 됐다는 사실은 조금 얄궂게 느껴집니다. 이치요의 불우했던 삶과 사후의 영광을 떠올릴 때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아주 오래된 말이,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오고는 합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5-27

약속

아버지 나이 마흔에 나는 태어났다. 아버지는 깊은 병환에서 회복하는 단계였고 내 시작의 환경은 어려웠다.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애 늙은이 같았고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내 나이 세 살부터 아버지는 내게 약속을 했다. “아빠는 막내딸 시집 갈 때까지 꼭 살거야.” 그 말은 마치 주문처럼 반복되었고 나는 그 약속을 믿고 자랐다. 아버지는 키가 작고 마른 편이었다. 걸음걸이는 늘 분주했고 어깨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새벽에 나가 땀을 흘리고 들어와도 나를 보면 피곤한 기색보다 웃음이 먼저였다. “너무 늦게 낳아서 너 크는 걸 오래 보고 싶어.” 그 말이 어린 마음에 자꾸 남아 나는 아버지가 늙어 가는 게 싫었다. 어느 날 아버지의 흰 머리카락을 보며 “아빠, 늙지마.” 그랬더니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늙어야 오래 살지 하시며 내가 시집 가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까지 보겠다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날까지 아버지는 내 곁에 계셨다. 나보다 내 아이를 더 귀여워했고 아이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것 뿐 아니라 자전거도 가르쳐 주고 토끼도 함께 키우며 자연을 배우게 했다. 아버지의 약속은 시집갈 때였지만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지켜졌다. 아버지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것 같다. 아침부터 엄마의 전화가 잠을 깨웠다. 일주일 전부터 아버지의 컨디션이 떨어지고 집 앞 의원에서 약을 먹고 수액을 맞아도 차도가 없어 아버지는 이전보다 훨씬 살이 빠져 있었다. 무조건 나를 불러라고 해서 엄마가 전화를 하였고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 입원수속을 밟았다. 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으며 아버지는 내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제 약속 다 지켰으니 편안하게 기도 되겠제?”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아버지는 단순히 오래 사신 것이 아니라 약속을 위해살아내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요, 손주 결혼식도 보셔야죠.” 아버지는 웃었다. 그 웃음 속에 긴 시간 동안 묵묵히 약속을 지켜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약속이란 말은 단순한 언약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약속은 현재 진행형이다. 입원실 천장에 매달린 링거 줄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손주 결혼식까지는 내가 봐야지라며. 그것은 병을 이기겠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늙고 아프고 작아져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고 싶다는 다짐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부모의 약속인지도 모른다. 자식보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 괜찮은 이별을 남기고 싶은 그 마음. 약속은 거창하지 않다. 한 줌의 흙 속에서도, 흰 종이 위의 주문서에도 병원 위의 다짐 속에도 있다. 그것은 곧 희망이다. 누군가 나를 믿는다는 증거이고, 내가 누군가를 위해 살아간다는 표식이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마음속 약속 하나를 꺼내어 다시 접는다. 아버지의 약속은 단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를 향한 다짐이고 기다림이며 때로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아버지는 병을 이겨내겠다는 말 너머에 우리와 더 오래 머물고 싶은 간절함이 담긴 마음이었다. 삶은 예기치 못한 변수로 가득하지만 그 안에서 약속은 우리를 붙드는 끈이 된다. 나는 오늘도 나만의 약속을 되새긴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다시 한 번 약속을 꺼내어 본다. 언젠가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우리는 그 약속을 품고 살아온 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진심으로 한 약속은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든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약속을 기다리며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김경아 작가

2025-05-27

Clean 작업장, Clean 마인드

사람의 변화는 쉽지 않다. 교육을 한다고 행동의 변화까지는 어렵다. 특히, 지식과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치관이 강한 사람일수록 변화는 쉽지 않다. 사람은 교육을 받으면 생각이 열리고, 실행하면서 진짜로 변한다. 즉, 교육은 변화의 시작이고 실행은 변화의 완성이다. 교육은 사고의 틀을 넓히고,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삶을 바꾸는 것 사이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아무리 좋은 강의, 책, 워크숍을 통해 들어도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는 인식에 그친다. ‘운동해야 건강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적다. 실행은 실제 변화를 만든다. 실행을 통해서 사람은 몸으로 배우고, 경험으로 내면화한다. 시행착오, 피드백, 반복 속에서 진짜 변화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가치관, 신념까지 바뀐다. 실행 없는 교육은 조리법만 배우고 요리는 안 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실행하고 변화하려면, 혼자 힘만으로 어렵다. 주변 분위기, 시스템, 문화가 실행을 끌어내고 유지시킨다. 가령, 모두가 청소하는 회사에선 청소가 습관이 된다. 문제를 솔직히 공유하는 문화에선 감추기 보다 개선을 선택하게 된다. 교육, 실행, 환경이 새로운 이해와 실행 속에 습관화 되고 변화하게 된다. 즉 ‘Learning by doing’ 을 실행하면서 배우고 변화된 결과에 비로소 학습이 되는 것이다. ‘Clean 작업장, Clean 마인드’는 청소나 정리 수준을 넘어 조직문화와 업무 방식의 핵심 가치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특히, 제조업, 생산 현장, 또는 혁신 지향형 조직에서는 이 두 개념이 성과와 안전, 품질, 효율을 동시에 향상시키는 기초 역할이다. Clean 작업장은 단순히 깨끗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정돈된 시스템과 규율이 살아 있는 작업환경을 의미한다. 즉, 언제나 누구나 문제없이 일할 수 있는 시작과 끝이 있는 표준화 된 상태를 말한다. Clean 작업장을 만들기 위한 핵심 조건은 5S 활동의 철저한 실행이다. 필요 없는 것을 버리고, 필요한 것을 정돈하고, 청소를 해서 깨끗한 작업장을 만드는 일이다. 도구의 위치, 작업 절차, VM(Visual Management) 등이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하는 표준화된 작업환경이다. 낭비를 줄이는 ‘Lean Thinking’ 사상으로 불필요한 물건, 불필요한 공정 제거로 생산 라인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Clean 마인드는 명확하고 건전한 사고 방식, 즉, 책임감 있고 긍정적이며 자기통제력이 있는 마음가짐을 뜻한다. ‘내가 하는 일에 애정을 갖고 남 탓보다 나부터 돌아보는 태도’ 라고 할 수 있다. 실행 조건은 첫째, 책임의식과 자기관리이다. 실수나 문제를 숨기지 않고, 스스로 개선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둘째, 긍정과 존중의 소통이다. 불필요한 비난 대신 건설적인 피드백을 주고 받는 문화를 말한다. 셋째, 자기 성찰과 개선 지향이다. ‘왜?’ 라고 묻고, 더 나은 방법을 찾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넷째, 타인과 조직을 위한 행동이다. 이기심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한 행동을 말한다. 다섯째, 감정 관리와 일의 집중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목적 중심으로 일하는 것이다. 교육은 마음을 열게 하고, 실행은 몸이 익게 만들고, 환경과 문화는 그 변화를 굳게 만든다. Clean 작업장과 Clean 마인드는 조직 변화의 시작이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05-27

동해안 기차여행

오월의 신록 속으로 질주하는 기차에 몸을 맡긴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짙어 가는 산과 모내기 준비가 한창인 들판을 지나 이내 탁 트인 동해바다와 마주하며 미끄러지듯이 내달린다. 몇 개의 교량과 터널을 지나니 차창 밖으로 지난 3월의 대형산불로 산림과 농가에 극심한 피해를 준 처참함이 푸른 산의 검버섯처럼 드러나는 영덕 일대가 스치듯이 지나간다. 간간이 농촌ㆍ산촌ㆍ어촌마을이 나타나고 바다와 산을 접하며 동해안 7번 국도와 나란히 강릉까지 이어지는 동해선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 것이다. 올해 1월 1일부터 개통된 동해선 고속철도는 한반도의 등줄기로 불리는 동해안을 따라 강릉~동해~삼척~포항~경주~울산~부산(부전)을 이어주는 약 370km 구간이다. 작년 말 포항~삼척 구간의 고속전철화 사업이 완공됨에 따라 올해부터 이른바 ‘동해안 철도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랜 염원의 동해선 개통으로 강릉~부산 간은 3시간 50분대에 주파 가능해져 동해안과 강원 북부권의 물류ㆍ산업ㆍ관광 등의 분야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특히 강원 동해안과 인구 300만의 부산과 경북ㆍ경남 동해안이 직선으로 연결되어 관광수요의 폭발적 증가는 물론 산업적인 측면의 시너지 효과도 상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과연 항간에 명성(?)이 자자한 기차를 설렘 속에 직접 타보니 운행 내내 열차의 쾌적함과 편리함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평소 자동차로 제법 시간이 걸려야 가던 월포나 영덕, 울진 등지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낯선 풍경 담기를 즐기다 보니 어느새 다음 역에 다다를 정도로 빠른 속도감이 들었다. 마치 수도권의 전철을 타고 가다가 얼핏하는 사이 금세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는 것처럼 먼 거리가 짧게만 여겨졌다. 다만 예전의 완행열차 특유의 쇠바퀴 굴림의 덜컹거림이나 희미한 기적 속에 또렷하게 들려오던 “오징어 땅콩 카라멜~ 삶은 계란 있어요~”라고 외치며 기차 안에서 간식을 팔던 ‘홍익회’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없어져서 수십년 전과는 사뭇 격세지감이 드는 듯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다 가까이에 기차역이 있는 정동진역에 기차가 섰을 때는 잠시 추억과 낭만에 젖어 들기도 했었다. 어린 애들과 함께 정동진 해변 모래밭에서 사발이 오토바이를 신나게 타기도 했었고, 가족들과 함께 커다란 모래시계를 보면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한 것 같았다. 또한 5~6년 전 아들과 함께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동해안자전거도로를 따라 종주 중 정동진 고개 넘어 아들 자전거의 뒷바퀴 펑크로 때우는데 엄청 고생스러웠던 기억 등이 철썩이는 파도 결에 오버랩되기도 했었다. 차창에 어리는 풍경 감상과 아련한 회억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강릉역에 도착했다. 비가 와서 한결 구미가 당긴 초당순두부전골, 환상적인 미디어아트에 몰입되는 강릉아르테뮤지엄,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선교장(船橋莊) 고택에서의 보기 드문 파이프오르간 연주, 허균ㆍ허난설헌기념공원과 경포대 산책로, 카페거리 안목해변 등 어디 하나 둘러봐도 발길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처럼 동해안 기차여행은 축지(縮地)로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먹고 즐길 거리를 무한정 가능케 해주는 묘미가 있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5-27

대선승패는 ‘사전투표’와 함수관계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사전투표 첫날인 내일(29일) 광주에서 가장 먼저(오전 6시) 투표를 하겠다고 했다. 사전투표에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일부 보수진영 유권자에게 충분히 자극을 줄 수 있는 캠페인이다. 한 전 대표는 지난해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부정선거 음모론과 단호하게 선을 긋지 못하면 ‘민주당은 3일간, 우리는 하루만’ 투표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전투표는 젊은층의 투표참여를 높이는 경향이 있어 진보진영에 유리하다는 분석이 많다. 지난해 4월 치러진 22대 총선에서 사전투표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호남과 수도권이었다. 투표율 1위는 전남(41.19%)이 차지했고, 그다음 전북(38.46%), 광주(38%) 순이었다. 꼴찌는 대구(25.6%)였다. 당시 민주당은 “하루라도 빨리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민심이 확인됐다”고 했다. 실제 이 총선에서 사전투표 결과로 당락이 바뀐 지역구가 52곳에 달했으며, 민주당이 압승했다. 이번 대선의 승부를 가를 최대변수도 사전투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대선에서는 사전투표율이 본 투표율과 거의 차이가 없다. 3년 전 20대 대선 때 사전투표율은 36.9%로 본투표율 40.2%와 비슷했다. 지난해 22대 총선 때도 사전투표율(31.28%)이 본투표율(35.7%)에 근접했다. 사전투표가 사실상 보편적 투표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선거는 본 투표일(6월 3일)이 휴일과의 간격이 좁아져 투표율이 낮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 많다. 직장인의 경우, 월요일인 2일 휴가를 내면 5월 31일부터 나흘간 쉴 수 있다. 한국지방신문협회가 지난 24~25일 에이스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3028명) 결과, 응답자의 34.5%는 ‘사전투표를 하겠다’는 의사를 보였고, 63.3%는 ‘본투표를 하겠다’고 했다. 다만 보수 성향 응답자 가운데 75.4%는 본투표 참여 의사를 밝힌 반면, 진보 성향 유권자들은 사전투표(50.3%)를 하겠다는 응답자가 본투표(47.6%) 응답자보다 오히려 많았다. 중앙선관위는 사전투표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불안이 생기지 않도록 이번 대선에는 투·개표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고 발표했다. 우선 이번 사전 투표에서는 ‘투표소별’로 투표자 수를 1시간 단위로 공개하기로 했다. 종전에는 ‘선거인 주소지’를 기준으로 사전 투표자 수를 시간대별로 공개했다. 사전 투표자 수를 부풀려 투표를 조작한다는 의혹을 불식하려는 조치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는 ‘공정선거참관단’도 운영한다. 공정선거참관단은 투·개표 과정뿐 아니라 후보자 등록, 선거인 명부 작성, 투표지 회송용 봉투 우체국 접수 절차 및 투표함 이송 등 사전 투표 전 과정을 현장에서 참관한다. 이번 대선도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주요 후보 간 지지도 격차가 좁혀져 박빙의 승부전이 예상된다. 이 때문에 각 정당과 대선 후보들도 경쟁적으로 사전투표를 독려하는 메시지를 내고 있다. 유권자들은 내일, 모레 사전투표일에는 아무런 부정선거 의심 없이 투표장에 나와 주권을 행사하길 바란다. /심충택 논설위원

2025-05-27

포항이 크루즈관광 명소라면

크루즈 관광이란 단순히 배를 타고 이동하는 개념의 관광 서비스 산업이 아니다. 지금은 숙박, 교통, 관광, 엔터테인먼트를 종합적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형태의 리조트 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바다 위의 호텔에서 숙박을 하지만 배 안에서 제공되는 즐길거리로 여행의 재미는 배가 된다. 갖가지 세계 요리를 맛볼 수 있는가 하면 수영장, 놀이시설, 스파, 카지노, 영화관, 피트니스 등 다양한 위락시설은 크로스만이 가지는 장점이다. 또 특급호텔 서비스를 여행 기간 내내 누릴 수 있다는 것도 크루즈 여행의 매력이라 하겠다. 그래서 크루즈 여행을 찾는 인구는 매년 늘어난다. 작년 12월 포항 영일만항에서는 관광객 1100명을 태운 대형 크루즈 코스타 세레나호가 일본 오루타항으로 출항했다. 이 배는 오루타, 삿포로, 하코다테 등을 거쳐 5박6일 일정을 소화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탈리아 선사 소속의 코스타 세레나호는 11만4000톤급 선박으로 길이만 290m에 이른다. 포항은 동해안 유일의 항만인 영일만항이 있는 곳이다. 영일만항을 모항이나 기항으로 하는 크루즈관광 산업이 활성화된다면 포항은 동해안 최대의 관광명소는 물론 환태평양 관문 역할도 가능하다. 포항시는 2019년부터 크루즈관광 유치에 많은 공을 들여왔지만 아직은 크루즈의 불모지다. 대형 국제 크루즈 선박을 몇 채 띄운 적은 있으나 영일만항이 크루즈항이라고 아는 이는 드물다. 경주 APEC을 맞아 영일만항에 크루즈선을 띄우는 것이 검토되고 있다. APEC 경주를 찾는 관광객의 부족한 객실을 크루즈선으로 대체한다는 아이디어다. 포항을 크루즈 명소로 만들 좋은 기회 아닌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27

산림 가치의 재발견

국토의 약 63%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산림은 기후 위기와 도시화가 심화되는 이때, 다기능적 가치가 더욱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월 발생한 대형 산불로 의성, 산청, 울산 등 영남권 10만4000 ha의 산림이 소실되었다. 산림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 회복된다는 인식이 있지만, 이는 실질적인 재난 대응책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보다 효과적인 산불 대응은 무엇일까. 산림의 생태적 대응으로 ‘수종 전환’이 있다. 산림의 약 37%는 침엽수로, 특히 소나무는 산불에 매우 취약하다. 소나무재선충병과 같은 병해충 피해 저지를 위해서도 수종 다변화가 요구된다. 굴참·상수리나무 등 내화성 강한 활엽수 위주의 ‘내화 수림대’를 조성하면 산불 확산을 늦추는 자연 소화제 역할을 할 수 있다. 호주는 2019~2020년 대형 산불 이후 유칼립투스 대신 다양한 활엽수를 혼합 조림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미국은 서부 산악지역에 폭 30~50m의 산불 차단 구역과 방화 도로 조성 및 AI 산불 감시 시스템 도입하고 있다. 산불 초기 대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임도’다. 산불 진화 인력의 접근성을 높일 뿐 아니라, 트레킹과 산악자전거(MTB) 코스 활용이나 양떼목장 같은 산지형 관광과도 연계할 수 있어 산악레포츠 자원으로도 가치가 크다. 산불 감시용 카메라 설치, 산림 인접 주택가와 사찰의 비상소화 시설 구축이 병행된다면 산불 대응과 예방 효과 모두 향상될 것이다. 산림의 경제·문화적 가치도 확대되고 있다. 지난 4월 방문한 포항시산림조합은 임산물 산지종합유통센터 건립, 로컬푸드 직매장 운영 등 임산물 시장 확대를 위한 다양한 사업으로 일자리 창출과 임가 소득 증대에 기여하고 있으며, 특히 ‘숲마을’이라는 산림 테마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하여 주목받고 있다. 연간 100만 명이 찾는 이 공간은 생태학습장, 숲 카페, 임산물 판매장, 명상쉼터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수목원을 옮겨놓은 듯한 자연친화적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울산숲’과 국제정원박람회장 주변에 조성될 ‘미세먼지 저감숲’은 도시열섬 완화와 탄소 흡수 등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자연친화적 공간으로, 도시와 산림을 잇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최근 울산기업인 롯데정밀화학이 스마트 묘목장을 건립해 주었다. 도심 내 숲과 정원이 많이 만들어지면 더 많은 나무와 꽃이 필요해지고 묘목 재배와 화훼산업도 활성화될 것이다. 나무 의사, 식물 병원도 만들어져 현대인의 아픈 마음까지 치유해 줄 수도 있다. 결국, 산림은 단순한 휴식공간을 넘어 기후 위기 대응, 삶의 질 향상,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자산이다. 이제는 산림의 생산성과 재해 대응력을 높이고 정원문화를 확산해 산림정책을 고도화할 때이며, 이는 산림청을 산림부로 승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어머니 나무가 있는 숲은 인류가 탄생하고 오랜 기간 자라온 삶의 터전이었다. 도시화로 인해 망각해 온 에덴동산을 새롭게 다시 찾아 만들어가는 것은 어떨까. /안승대 울산광역시 행정부시장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단체장 출마 희망자의 기고문을 받습니다. 후보자의 현안 진단과 정책 비전 등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7.5∼8.5장 이내로 보내주시면 지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기고문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hjyun@kbmaeil.com)로 보내주세요.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05-26

정치와 문화

20세기 초까지 독일은 인류사상 유례없는 인문학적 성취를 이룬 나라였다. 칸트를 비롯하여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같은 쟁쟁한 철학자들과 괴테, 실러, 토마스 만, 헤세 등 굴지의 문호들이 독일의 정신세계를 이끌었고, 음악 분야에서도 바흐, 베토벤, 바그너, 브람스, 슈만 등 불멸의 작곡가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런 문화적 자산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에 열광하며 나치즘의 길로 나아갔다. 그 결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과 대량 학살, 그리고 국가의 파멸로 치달았다. 러시아와 그 주변 국가들이 소비에트연방으로 공산화 되는 과정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같은 세기의 문호들과 차이콥스키, 무소르그스키, 라흐마니노프 같은 천재적인 음악가들이 있었고, 정신적 지평을 떠받치는 철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도 많았지만, 공산주의혁명이라는 이념의 광풍 앞에서는 그런 문화적 축적도 한낱 가랑잎에 불과했다. 그 결과 스탈린 집권기에는 수천만 명이 숙청·강제노역·기근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이념적 폭력은, 나치즘의 잔혹성과 견줄 만큼이나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짓밟는 참상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우리는 인문학적인 축적이 사회 전체의 이성과 양심을 보장하지 않을뿐더러 정치적 광기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문화적 지성이 오히려 선동과 조장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인류가 소중히 받들어 온 인문학적 가치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마저 든다. 작금의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현상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 불안감을 더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심각한 진영대립 가운데 대선 정국을 맞고 있다.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대다수 식자층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이념적 편향성이다. 자신의 이념 성향을 이유로 특정 진영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보내는 행태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조차 외면하는 처사이다. 소위 의식이 깨었다는 미명하에 대다수 식자층이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특정 정치세력 옹호의 도구를 자청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상대 진영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적대감과 비방과 서슴지 않으면서 자기 진영 후보의 범죄 혐의나 도덕적 결함에 대해선 비호하고 정당화하기에 급급한 비양심적이고 반이성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념은 사유의 출발점이지 판단의 종착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식자층의 역할은 권력의 감시와 공공성의 수호이지, 특정 진영의 정치적 방패막이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지성인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자기 성찰의 거울 앞에 서야 한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 상황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어느 편이 정권을 잡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지난 수년간 우리나라는 편향된 정치적 광풍에 휩쓸렸다. 그리고 지금은 절체절명의 고비를 맞고 있다. 국민 각자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묻기 전에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5-05-26

인간이 그리는 무늬, 침촌 인문학당

인문이란 무엇일까. 그 정의는 어렵지만, ‘인간이 그리는 무늬’ 정도로 하자. 인류 탄생 이후로, 인간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수많은 무늬를 그려왔다. 그 무늬는 다양하다. 문학·철학·역사·종교· 언어· 예술 등등. 우리의 조상이 그렸고, 당신과 내가 그리고 있으며, 우리의 후손들이 그릴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어떤 무늬의 그림을 그렸는가. 자신의 과거· 현재·미래의 그림을 감상하고 통찰하는 것. 이것이 인문학이다. 우리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또 본다. 인류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좋은 그림을 그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예술을 사랑하였으며,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명상하였다. 2014년 봄, 포항시 북구 장성동 소재 침촌문화회관 1층 70여 평의 공간에 퀘렌시아를 개설하였다. 틈틈이 공부하여 쌓은 나름의 결실을 나누고, 나 자신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마음을 내었다. ‘인문학당 침촌 싸띠스쿨’ 10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명상, 차와 음악, 그리고 인문학의 순서로 세 시간 동안 노는 곳이다. 변호사가 무슨 저런 일을? 곁눈질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좋은 일이니 그냥 가면 될 것이었다. 첫 시간은 ‘명상의 시간’이다. M.O.S.T.(mindscience origin sati technic) 풀이 하자면, ‘알아차림에 기반한 마음과학 기술’ 정도이겠다. 명상은, 과학이라는 근거에서 출발한다. 시냅스 가소성(synaptic plasticity)에 기반한 내면 소통 과정이다. 걷기 명상과 호흡명상으로 ‘알아차림 기술’을 연마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외형적 조건들에 도전장을 내밀고, 자신과 끊임없는 내면 소통을 하는 시간이다. 둘째 시간은 ‘차와 음악’의 시간이다. 정갈한 차 한잔과 음악 속에서 침묵과 담소로 힐링의 시간을 가진다. 마음 편하게 차 한잔 나눌 수 있으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리라. 셋째 시간은 ‘인문학 강의’ 시간이다. 학당의 기본 교재는, ‘MOST’(붓다빠라 반테 저), ‘뇌 생각의 출현’(박문호 저), ‘축의 시대’(카렌 암스트롱 저), ‘거의 모든것의 역사’(빌브라이슨 저), ‘빅 히스토리’(데이비드크리스천 저)로 출발하였으며, 이 이외에도 많은 교재를 도반들이 돌아가면서 강의하는 형식으로 공부하였다. 학생이 스승이요 스승이 학생인 학당, 최고의 학생이 최고의 스승인 곳. 가르침은 없다. 스승이 된 자는 자신의 무늬를 보여주고, 학생이 된 자는 그저 감상할 뿐이다, 학당이 위치한 건물은 전통을 자랑하는 수원백씨 참판공 종회 건물이다. 5층의 대규모 건물로 이쁜 정원, 주차장 시설까지 완벽하다. 평소 건물관리가 매우 잘 되어 있는 건물이다. 학당이 지금까지 잘 운영되어 온 것은 종회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내공을 닦는 곳이요, 쉬는 곳이요, 지식을 쌓는 곳이다. 오늘도 자유롭고 행복한 사유 여행은 계속된다. 잘랄루딘 루미의 ‘봄의 정원으로 오라’가 생각난다. “여기 명상과 차, 음악과 지혜가 흐르는 아름다운 학당이 있다. 하지만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리고 당신이 온다 한들 또한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는 숨 쉰다. 고로, 존재한다.’ /공봉학 변호사

2025-05-26

국민의 근심이 된 정치

국민의 ‘희망’이 되어야 할 정치가 ‘근심’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막장 권력투쟁, 사리사욕 정치, 아사리판 선거는 한국 정치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국민은 대선 때마다 ‘이번에는 혹시’하고 기대해보지만 결과는 언제나 ‘이번에도 역시’였다. 정치인들의 생각이 구태의연한데 정치가 달라질 수 있겠는가? 권력투쟁에 일그러진 정치인들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집권을 위한 감언이설(甘言利說)은 갈수록 교활하다. 평소에는 편 가르기를 일삼다가 선거 때는 통합의 화신처럼 말하고, 평소에는 독선을 고집하다가 선거 때는 민주주의자로 둔갑한다. 카멜레온 같은 변신 정치는 노회(老獪)한 정치꾼들에게 식은 죽 먹기다. 이들의 선거유세는 마치 공자가 부활한 것 같은데, 지금까지의 정치행태를 불 때 가소롭기 짝이 없다. 후보들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잘못된 과거’부터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민주당과 이재명 후보에 대한 우려는 무엇인가? 민주당은 이재명 일극 체제이며 정당민주주의는 죽었다. 민주당은 이재명을 구하기 위해 탄핵과 특검으로 행정부를 무력화하고, 사법부를 겁박해서 삼권분립을 형해화(形骸化)했다. 대법원이 이재명 사건에 유죄취지의 파기환송을 하자, 민주당은 대법관 청문회와 대법원장 특검으로 사법부를 협박하는 한편, 이재명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입법들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깨끗한 법정’과 ‘사법 정의’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이런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가 ‘절대 반지의 제왕’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는 합리적 추론이 아닌가? 액튼 경(Lord Acton)이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경고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한편 국민의힘과 김문수 후보는 어떤가? 당명은 ‘국민의 힘’이지만 현실은 ‘국민의 짐’이 되고 있다. 권력에 줄 서는 ‘웰빙 보수’는 민심을 모른다. 친윤이 주도한 후보 교체 쿠데타의 실패로 당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정치경험이 전혀 없는 윤석열을 영입해서 위기를 자초하더니 또다시 한덕수를 영입하려다가 사분오열되었으니 도대체 당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김문수 후보는 보수혁신과 중도 확장에 소극적이고, 헌법재판소의 만장일치 탄핵을 공산국가에 비유하는 등 여전히 극우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도층과 개혁보수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대선은 필패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가? 낡은 보수에 둘러싸여 악전고투하고 있는 개혁보수의 젊은 비대위원장 김용태의 모습이 처연하다. 이처럼 거대 양당과 후보들의 정치행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권력에 눈이 멀어 정의를 말하면서 정의를 짓밟고, 국민을 말하면서 국민을 배신하는 표리부동의 정치는 대선 이후가 더 걱정이다. 부디 차기 대통령은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괴물 같은 권력’이 되지 않으려면 목에 힘을 빼고 겸허한 자세로 비판과 고언(苦言)을 경청해야 한다.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한 종말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기를 바란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2025-05-26

자랑할 건 ‘여권 파워’가 아니다

외국을 여행하는 사람의 국적과 신분을 증명하고, 방문하는 국가에 자국민의 보호를 당부하는 문서. 여권(旅券)이다. 그 여권으로 비자 없이 여행할 수 있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지를 가늠해 이른바 ‘여권 파워’라고 부르는 모양. 최근 한국 여권의 ‘힘’을 보여주는 조사 결과가 하나 나왔다. 영국 런던에 자리한 글로벌 시민권 및 거주 자문회사 헨리&파트너스는 ‘2025 헨리 여권 지수’를 발표하며 한국과 일본이 공동 2위에 올랐다고 밝혔다. ‘헨리 여권 지수’는 여권 소지자가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는 국가의 수가 많을수록 높은 순위를 준다. 국제항공운송기구의 데이터가 조사의 토대다. 이 조사에서 여권 파워가 가장 강한 국가는 싱가포르로 드러났다. 싱가포르 여권 소지자는 비자 없이 193개 나라를 방문하는 게 가능하다. 한국과 일본의 여권으로는 190개 나라를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다. 해외 관광이 보편화된 시대이기에 나쁜 소식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한국 여권 파워는 세계 2위”라고 외치고 다니는 건 좀 낯 뜨거운 일인 듯하다. 왜냐고? 이어지는 ‘헨리 여권 지수’ 순위를 보자.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여권으로도 비자 없이 189개 나라를 여행할 수 있고, 오스트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스웨덴 여권도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는 나라가 188개다. 한국과 겨우 1~2개 국가 차이. 무엇이건 자화자찬이 과하면 웃음거리가 된다.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국가가 많은 걸 자랑할 게 아니라, 여행자로서의 매너를 잘 지키는 게 진정한 자랑거리가 아닐지.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5-26

비호감은 뒤로 숨는 게 후보를 돕는다

선거는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고르는 일이다. 그런데 모두 마음에 안 들어, 그나마 덜 미운 이를 고를 때도 있다. 최근 우리는 그런 선거를 많이 했다. 비호감 선거다. 지난 대통령 선거가 그랬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민 주당 이재명 후보 모두 호감도보다 비호감도가 컸다. 이재명 후보는 지난 10일 유세에서 “정치는 우리가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상대방이 자빠진다. 그러면 우리가 이긴다”라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했다. 국민의힘 당권파가 마음대로 후보를 만들려다 실패한 일을 꼬집었다. 과거에도 이런 사례는 무수하다. 2004년 열린우리당(현 민주당) 정동영 의장 은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아요…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되 고…”라는 말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전멸 위기였던 한나라당이 121석으로 살아났고, 200석을 넘보던 열린우리당은 152석에 그쳤다. 그 뒤 대통령 선거에서도 정동영 후보는 참패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두 번이나 다 이겼다고 생각한 대선을 망쳤다. 나중에 김대업이라는 사기꾼의 공작으로 결론이 났지만, 아들의 병역 회피 의혹이 만든 ‘비호감’ 탓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자유한국당은 ‘국정 농단’ 사건에 대한 국민의 분노 속에서 선거를 치렀다. 제대로 끊어내지 못하고, 정권을 갖다 바쳤다. 이재명 후보가 24일 비법조인도 대법관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추 진하는 데 대해 “섣부르다”라며 제동을 걸었다. 자신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한 대법원을 공격하던 이 후보도 여론의 반발을 의식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수 있다. 최근 여론 흐름이 심상찮기 때문이다. 50%를 넘어서던 지지율이 내려앉고, 김문수·이준석 후보가 상승세를 탔다. 이 후보의 방탄복이 테러에 대한 동정심보다 ‘방탄 입법’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만 부각했다. 삼권 장악과 독재 위험을 경고했다. 차기 요직을 둘러싼 입소문이 오만함으로 비쳤다. 그러자 이 후보도 긴장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지난 21일 ‘부정선거, 신의 작품인가’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관람했다. 탄핵 이후 첫 공개 행보다. 그는 비상계엄의 명분 중 하나로 ‘부정선거’를 꼽았다. 이날 행보는 비상계엄이 정당하다는 무언의 시위로 비쳤 다. 그의 옆에 이영돈PD와 비상계엄을 ‘계몽령’이라 주장하던 전한길 전 역사 강사가 앉은 사진을 공개했다. 윤 전 대통령에 대해 엉거주춤한 국민의힘의 대선 전략에 비상계엄이라는 부담을 다시 한번 더해줬다. 그는 지난 11일 SNS에 “이제는 마음을 모아 주시라”면서 지지층 결집을 호소했다. 그가 움직이는 게 김문수 후보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탄핵에 반대하던 시위대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정치적 팬덤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윤 전 대통령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들이 이재명 후보를 찍을까. 그가 입을 열수록, 대중 앞에 나설수록, 비상계엄의 트라우마만 생생해진다. 민주당 측에 선 방송 패널들이 이재명 후보의 문제가 지적될 때마다 “그래도 비상계엄, 내란 세력만큼 나쁘겠느냐”라고 방어막을 친다. 윤 전 대통령 측의 착각이다. 지난 총선에서도 그랬다. 윤 전 대통령을 찍은 유권자라고 그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게 아니다. 강서구청장 후보를 마음대로 뒤집어도, 국민의힘 후보를 마음대로 조작해도, 수사받고 있는 피의자를 대 사로 임명해 출국시켜도, 선거 직전에 의정(醫政) 갈등에 기름을 부어도, 자기 표를 얹어준다고 착각했다. 표를 깎아 먹으면서 지원한다고 착각했다. 이재명 후보는 계산이 빠르다. 여론조사를 믿는다. 대법원 선고 직후 분개했던 마음도 스스로 자제할 줄 안다. 당내 충성 경쟁이 오히려 표를 깎아 먹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윤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여전히 착각 속에 산다. 어차피 보수 후보를 찍을 유권자를 자기 표라 착각한다. 어쩌면 알면서도 선거 이후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비호감인 사람은 뒤로 숨는 게 후보를 돕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5-25

자동차 키 실종 사건

이것은 지난주에 벌어진 사건이다. 비공식 사건기록, 일명 ‘차 키 실종 사건’. 출근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자동차 키를 찾아 거실을 헤매는 중이었다. 차 키를 책상 위에 올려둔 사실에 대한 기억은 명확하다. 위증할 이유도 없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기어다니는 모습은 흡사 나의 반려견 보리의 포즈와 비슷했다. 고개를 숙이고 코끝을 들이밀며 테이블 밑, 가방 안, 옷더미 속을 거의 킁킁대다시피 하며 뒤지던 찰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네 짓이야?” 나는 기억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보리를 향해 쏘아붙였다. 그러나 보리의 눈빛은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내가 이 집에서 가장 무고한 존재라는 걸 기억하라!’ 그제야 나는 사태의 심각함을 직감했다. 이건 단순한 분실이 아니라 존재론적 혼란에 가깝다. 그 순간 나는 차 키도, 존엄도 잃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 결국 차 키는 이불 밑에서 발견되었다. 도대체 왜 거기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쿨쿨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차 키를 손에 쥐고 다시 누운 것도 아닐 텐데.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바로 인간이라는 종의 불가사의인 것이다. 비단 차 키만이 아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꽤 중요한 것들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해야 할 일을 깜빡하고, 약속을 놓치고, 심지어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어째서 그러한 말을 했는지조차 잊는다. 기억은 언제나 정교하지 않다. 우리가 스스로 기억을 선택하고 있다고 믿는 건 사실상 착각에 가깝다. 뇌과학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망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뇌 안에는 기억을 지우는 메커니즘이 존재하며 이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이를테면 수업 시간에 분명 열심히 들었던 내용이 하루만 지나도 흐릿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24시간 이내에 학습한 정보의 70%가 사라진다는 망각 곡선은 뇌가 불필요한 정보를 선별적으로 지워버린다는 사실을 잘 알려준다. 그러니 ‘내 머리는 왜 이리 좋지 않은가?’ 하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뇌가 만든 아주 정교한 생존 전략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찾는 행위나, 가스레인지를 끄지 않고 외출하는 일, 눈앞의 사람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민망한 웃음으로 위기를 넘기는 순간 같은 행위를 뇌의 합리적 메커니즘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도 괜찮은 걸까? 종종 엉뚱한 일을 벌이는 우리 뇌를 두고 자연스럽다고 여기며 삶의 허점을 덮는 건 어쩐지 위험해 보인다. 마치 사고를 쳐도 당당한 사춘기 자녀를 보는 기분. 형편없는 시험 성적을 보고서 “왜 열심히 암기하지 않았느냐”고 혼내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쏘아붙이는 것이다. “이건 제 문제가 아닙니다. 저의 뇌가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라고요.” 문제는 이러한 영역이 아니다. ‘실종 사건’의 본질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살면서 정말 소중한 것을 놓칠 때가 잦다. 소중한 사람과의 약속, 미처 전하지 못한 말, 놓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어떤 마음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또다시 한탄하게 된다. 도대체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을 허술하게 다루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붙잡으려 애쓰지 않으면 모든 것은 아주 쉽게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 존재는 기억을 기록하고 감정을 박제하기 위해 애쓴다. 사진을 찍고 부지런히 문장을 쓰는 일도 분투의 과정 중 하나다. 책상 앞에 앉아 문장을 고민하는 나를 보고 보리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손에 쥐지 못할 것을 붙잡으려 애쓰는군. 참으로 안타까운 존재로다….’ 그렇다. 이토록 애처로운 노력 덕분에 우리는 사라지는 마음을 한순간이라도 더 붙잡을 수 있고 흐릿한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차 키를 아무 곳에나 두는 나의 뇌를 더는 탓하지 않기로 한다. 어쩌면 이것은 정말 나를 시험에 들게 하려는 보리의 은밀한 소행일지도 모르니. 내가 정말 오래 기억하고 싶은 건 녀석의 쫑긋거리는 귀와 움찔대는 작은 콧구멍,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빛 같은 것. 차 키를 어디에 두었는지 아는 것보다 이 장면을 자주 떠올리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안다. 그것이 바로 차 키 실종 사건을 해결하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문은강(소설가)

2025-05-25

통통족의 패션, 그리고 스페셜리스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내가 아주 신경 써서 옷을 입는 편이라는 사실. 실제로 옷을 잘 입거나 못 입거나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내 딴에는 나름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항상 뚱뚱한 체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옷 태가 안 나서 그렇지, 그리고 추구하는 방향이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여서 그렇지, 나름 옷을 구입하는 과정부터 매칭 하는 과정까지 허투루 하지 않는 편이다. 이십대 때는 패션 매거진도 정기구독해서 꼬박꼬박 챙겨 봤고, 요즘도 여러 쇼핑몰이나 인터넷 사이트들을 살피며 트렌드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내 스타일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패션을 다루는 유튜브 채널을 자주 본다. 그런데 대부분의 채널들은 모델 같은 핏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적어도 표준 정도의 체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기에 다소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들에게 어울리는 옷이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저들이 추천하는 브랜드에 내 사이즈가 없기도 하기 때문에. 그래도 그 중에 나 같은 체형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나마 유용한 채널이 종종 있기는 한데, 그 중에 하나가 어느 배우가 운영하는 채널이다. 통통한 체구를 가진 그는 우리 같은 체형을 가진 이들을 ‘통통족’이라고 칭하며 우리에게 유용한 패션 정보를 제공한다. 얼마 전, 그 채널의 콘텐츠들을 탐독하다가 재미난 기획 하나를 발견했다. 통통하거나 그 이상의 체형을 가진 패셔니스타 두 명을 초대하여 세 남자가 자신들의 패션 노하우를 공유하는 기획이었다. 내용 중에는 다른 유튜버들이 통통족 남성들에게 패션 지식을 설파하는 콘텐츠들에 대해 실제 통통족들이 의견을 내는 코너가 있었다. 나는 여기서 재미난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었다. 많은 패션 유튜버들이 통통족들을 위한 패션 조언을 할 때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바로 ‘뚱뚱하지 않게 보이기’였다. 이를테면 몸을 작아 보이게 하기 위해서 어두운 컬러를 선택한다거나, 세로로 된 줄무늬 옷을 입는다거나, 셔츠의 윗 단추를 몇 개 풀어 목을 길어보이게 하는 것 등. 그런데 이들은 여기에 대해 다른 의견들을 냈다. 꼭 뚱뚱하지 않게 보이는 것만이 멋이 아니라는 것이다. 뚱뚱해 보이건 말건 밝은 색상의 옷을 입어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도 있고, 예쁘지 않으면 세로 줄무늬 옷을 기피하기도 하고, 셔츠의 단추를 끝까지 채워 단정하고 귀여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뚱뚱하지 않게 보이는 것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예쁜 옷을 예쁘게 입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안 뚱뚱하면 좋겠지만, 당장 뚱뚱한 것을 어쩌겠나. 단점을 가리는데 급급해서 예쁜 옷을 입지 못하고 칙칙하고 일관된 것들만 선택해야 한다면 센스 있는 패션을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차라리 자신의 단점은 시원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장점을 개발하는 것이 훨씬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옷을 입는 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빠른 발이 장점인 축구선수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 대신 그는 몸싸움이 약하다. 그래서 체중을 비약적으로 불려서 보통 수준의 몸싸움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 인해 빨랐던 발 역시 보통 수준이 된다면 감독이 그를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필요한 만큼의 웨이트 트레이닝과 더불어 자신의 빠른 발을 살려 단점을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옳은 길이 아닐까? 반대로 홈런을 펑펑 때리는 거대한 체구의 야구선수가 있다. 그는 발이 느려서 도루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처지이다. 그래서 그가 체중을 확 줄이고 리그 평균 수준의 주력을 갖게 된다면? 홈런을 때리던 그 힘을 잃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지만 특출난 점도 없는 선수가 된다는 것. 그것이 과연 긍정적인 일일까? 한 때 모두에게 모든 면에서 능력을 갖춘 제네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스페셜리스트도 필요한 시대이다. 부족한 점은 또 새로운 분야의 스페셜리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극복하고,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여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이다. 물론 단점도 극복하고 장점도 개발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 중에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무엇을 앞세워야 할 것인가? 나는 당연히 장점을 개발하는 쪽이라고 생각한다. 단점을 가리는데 급급해서 다른 장점들을 챙기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강백수(시인)

2025-05-25

첫 투표, 더 나은 선택을 위한 준비

운전면허 학원에 처음 갔던 날, 강사가 가장 먼저 알려준 것은 “차에 타자마자 안전벨트를 매세요”였다. 그 덕분인지 나는 지금도 차에 타자마자 습관적으로 안전벨트를 맨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운 방식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 오랜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나는 생애 첫 공직선거를 앞둔 고등학생들을 위해 매년 새내기 유권자 연수를 진행하고 있다. 18세가 되면 우리는 매번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교육감, 지방의원과 정당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막상 투표를 하려 하면 ‘나는 누구를 뽑아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따라서 나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한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내가 살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 정당 정책과 후보자 공약에서 내 가치와 맞닿은 부분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정당과 후보자를 선택할 기준을 세워야 한다. 학생들이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하는 만큼, 신뢰할 만한 정보를 확인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 연수를 진행하며 다음과 같은 실천법을 강조한다. 정당과 후보자의 주요 공약 및 분야별 우선순위를 확인하기, 후보자의 경력·학력·납세·병역·전과와 전문성·공적·사회공헌 등을 점검하기, 우편으로 송달되는 선거공보 속 후보자 정보공개 자료를 꼼꼼히 읽어보기, 다양한 언론을 비교하며 후보자 정보가 어떻게 보도되고 있는지 분석하기. 이러한 습관을 들이면 선거 때마다 신중한 판단을 내리는 유권자로 성장할 수 있다. 연수에서는 선거의 의미뿐만 아니라 절차와 진행 과정 또한 중요한 부분으로 다룬다. 학생들에게 “투표소 및 기표소 안에서는 사진을 찍으면 안 되지만, 투표소 밖에서는 투표 인증샷을 찍어도 괜찮다”는 점도 알려준다. 아마 학생들은 이런 작은 팁만 기억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들이 첫 선거를 무사히 치르며 민주주의의 의미를 깨닫기를 바란다. 지난 총선에서 18번째 생일이 지나지 않아 참여하지 못했던 학생들도 이번 6월 3일 대통령 선거에서는 유권자로서 투표할 수 있게 됐다. 이제 각 가정으로 배달된 선거 공보를 펼쳐놓고, 후보자 공개 자료를 검토하고, 후보자들의 공약을 비교하고, 가족 또는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그들의 첫 선거를 멋지게 치르기를 바란다. /한국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 초빙교수

2025-05-25

“그렇지만 좋은 것들은 너무 많고”

오늘은 해가 떴다. 그러니까 오늘은 환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야구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나는 180도로 다른 얼굴이 되어가지. 모자 속에 눈이 묻히고 총에 맞아도 웃음이 살아남는 인형의 입술이 되고 그리고 진짜 아침을 먹으면 목 밑에 목이 이어지는 것처럼 오래도록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야. 마술사의 손을 가진 것처럼 피아노를 칠 수도 있을 거야. 그다음엔 하얀 장갑을 끼고 열 개의 손가락을 가져야지. 사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 ―신해욱,‘굿모닝’전문 (‘생물성’, 문학과지성사) ‘나’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일까. 신해욱의 시에는‘얼굴’,‘눈’,‘손’과 같은 신체에 관한 언술이 많다. 일본 애니메이션‘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는‘가오(얼굴)나시(없음)’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여기서 가오나시는 온갖 부정성과 이물질이 뒤섞여 과잉이거나 결핍인 현대인의 페르소나를 상징하는 듯하다. “야구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나는 180도로/다른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화자의 언술처럼 페르소나란 다른‘나’가 되는 것으로 “총에 맞아도 웃음이 살아남는/ 인형의 입술이 되”듯 그것은 자연인이 아니라 서정시의 내적 요구에 따라 배당된 일종의 배역적 존재인 셈이다. 하지만 “동양적 전통에서‘글’과 ‘사람’은 혼연일체를 이루는 한 몸의 결속체로 인지되어왔다. 하지만“글이 곧 사람이다.”라는 선언적 명제는 정작 페르소나를 품은 현대의 서정시에서는 시인과 페르소나가 두 개로 갈라지게 된다.”(유성호, ‘가히’ 2025년 봄호) 신해욱의 시에는 일인칭 화자가 고백하는 페르소나의 언술이 많다. 가령 이 시집에서 인용되지 않은“나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다/한 눈으로는 왼쪽을/한 눈으로는 오른쪽을 본다”라든지 “너는 좋아 보이는구나/나는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어”“쥐에게도 개에게도 얼굴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나는 터무니없이 부끄러워지고 풀이 죽는다.” 는 기표들처럼 화자는 미학적으로 가공된 목소리를 통해 다양한 전언을 들려주고 있다. 말하자면 페르소나는 독자나 청자에게 말을 건네는 존재이다. 이어지는 고백들에서는 시인과 좀 더 멀리 분리되거나 해체된 화자를 대면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수요일이 아닌 채로 수요일을 대신하며 옷을 벗게 된다/나는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 수요일이라 할 수 없는 나를 대신 끌어안고/수치를 견디는데/ 그런데 누군가 나보다 먼저 내 방을 사랑하고 있다/ 키가 크고 있다/사소한 훼손도 없이” 이처럼 화자는 시인과 세계, 시인과 작품, 작품과 대상과의 관계를 암시해 주지만 동시에 그 자신이 되기도 한다. 다시 처음의 얼굴로 돌아와서 이런 질문에 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문학을 혹은 예술을 하는 이유에 대해, 결국은‘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일상에서 되도록 멀리 가 보려는 것, 그래야 겨우 알 수 있을 법한‘나’란 존재에 대해 서른다섯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선택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140편의 단편 소설을 썼던 이유 또한 답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실은 이 질문은 나의 질문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은가. 쓰는 일과 그림을 보는 일이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런데“그림은 왜 그린 대요?”라는 그 질문의 질문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해서 배턴을 넘겼을 뿐. “하지만, 미안.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져서 너의 그림자를 건드렸다.” /이희정 시인

2025-05-25

예천군, 맨발걷기 특화도시 조성

땅은 곧 삶을 지탱하는 수단이었다. 주위에 조금만 터가 있어도 콩을 심고, 고춧대를 세우고, 호박과 옥수수를 기르던 풍경은 우리 세대에게 낯설지 않은 기억이다. 먹고사는 일이 최우선 과제였던 시절에는 아주 작은 터조차도 허투루 두지 않았다. 그만큼 한 평의 땅도 소중했고, 농작물은 생계와 직결된 생활의 일부였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경제적 안정과 생활 수준의 향상은 생활 양식을 크게 바꿔놓았다. 이제는 단순히 ‘무언가를 길러내는 땅’보다는 ‘머무르고 싶은 공간’, ‘눈길이 머무는 곳’, ‘마음을 쉬게 하는 장소’로서의 공간이 주목받고 있다. 조경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일부 고급 주택이나 특수 시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 삶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전국 각지의 도시들이 생활 환경 개선과 도시 이미지 제고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천군 또한 공원과 경관 조성, 건강 도시 환경 구축을 통해 ‘힐링 도시’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예천군 곳곳에서는 최근 몇 년간 작은 공원 조성과 공공 조경 사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마을 입구, 유휴지, 공공청사 주변, 그리고 개인 주택 앞까지 꽃과 나무로 꾸며진 아름다운 정원은 그 지역의 인상을 한층 부드럽고 따뜻하게 바꾸고 있다. 이러한 공원은 단순한 미관 향상을 넘어서 외부인의 발걸음을 이끄는 명소로 자리 잡고,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공간을 가꾸며, 관광객은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으며 자연스럽게 주변 식당이나 카페, 전통시장을 찾게 된다. 잘 조성된 공원 하나가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공원은 개인의 여유를 넘어 마을의 품격, 나아가 지역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자산이다. 도시개발에서 ‘경관’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공간이 주는 인상은 곧 도시의 정체성과 연결되며, 이는 주민의 자긍심은 물론 방문객의 만족도로 이어진다. 예천군은 최근 ‘맨발 걷기’에 최적화된 도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단순한 산책로 정비를 넘어 도시 전체를 하나의 치유 공간으로 조성하려는 시도는 지역 정책에서 보기 드문 접근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남산공원 정비사업, 예누리길 조성사업, 개심사지 역사공원 조성사업이다. 이 세 개의 거점 사업은 기존 한천 산책길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예천 전역을 하나의 대형 힐링 산책로로 엮고자 하는 구상이다. 도청신도시에서 예천읍으로 오다 보면 시가지 입구에서 맞이하는 개심사지는 고려 현종 2년(1010년)에 건립된 오층석탑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장소이다.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곳은 최근 역사공원으로 새롭게 조성되어 예천의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을 결합한 대표 치유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예천이 자랑하는 천년고찰 용문사, 명봉사, 장안사와 연계하여 불교 성지순례 코스로의 확대를 준비 중이며, 단순한 관람이 아닌 명상과 산책이 함께하는 정신적·신체적 치유의 장소로 주목받고 있다. 신도시 진입도로 개설로 기능을 잃은 경북선 폐철도(예천읍 구간) 부지도 새로운 도시재생의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 예천군은 이곳에 길이 1.2km, 면적 2만7천㎡ 규모의 ‘옛기찻길’을 조성했다. 이러한 형태의 공간 조성은 행정 주도가 아닌 주민과 행정이 함께 만드는 공동체적 공간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예천군은 이들 핵심 공간을 중심으로 기존의 한천 산책길과 예누리길 등을 연결해 도시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 걷기 코스로 재편할 계획이다. 건강, 역사, 자연, 치유가 어우러진 복합적 산책 환경을 통해 군민에게는 삶의 여유를, 외부 방문객에게는 여행 이상의 경험을 선사하고자 한다. 결국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도시의 대답이다. 예천군이 공원을 가꾸고, 산책로를 잇고, 치유 공간을 조성하는 일은 단순한 공간 정비를 넘어서 주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생계를 위한 땅이 전부였다면 이제는 마음을 쉬게 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작물을 심던 공터가 이제는 사람을 불러 모으고, 머물게 하며, 그 안에서 지역의 정체성과 미래를 함께 길러내고 있다. 예천의 이러한 변화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변화가 도시의 방향성을 바꾸고 있으며, ‘살고 싶은 도시’에서 ‘머물고 싶은 도시’로의 진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의 예천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2025-05-25

사람과 정책, 무엇이 중한가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온다. 유권자가 대통령 후보의 정책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은 오늘부터 딱 7일 남았다. 유권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회를 주관하고 있고, 이를 지상파 3사에서 분야별로 각 두 시간씩 방송하고 있다. 지난 18일에는 저성장 극복과 민생경제 활성화, 대외 통상 등 경제 분야를 주제로 1차 토론회가 열렸고, 23일에는 사회 갈등 통합 방안, 초고령 사회의 연금 및 의료개혁, 기후위기 대응 등 사회 분야 토론이 진행되었다. 마지막 3차는 27일에 정치개혁, 개헌, 외교안보 등 정치 분야를 토론할 예정이다. 토론회가 끝나면 지지율에 변동이 생기니 각당 후보들은 두 시간 동안 모든 정책을 펼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대선 토론회가 과연 얼마나 유권자의 기대에 부합했는지는 의문이 많이 남는다. 특히 2차 토론회에서는 인신공격과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가 난무했다. 이 두 가지는 대학에서 토론 수업을 할 때 강조하는 것이다. 인신공격이란 정책과 큰 관련 없는 개인 신상을 공격하는 것인데 토론의 본질을 흐린다. 아무래도 정책 평가는 어렵지만 사람 평가는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허수아비 공격이란 상대방 주장을 왜곡하거나 과장해놓고 비판하는 것인데 이것은 토론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현대의 문제를 분석하면서 고전을 인용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고전의 문장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고, 옳다 하더라도 아전인수격으로 적용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주장하는 가치가 지극한 정성인데, 말 자체는 흠잡기 어렵지만 지금 여기에서 순수한 진정성인지 무엇인지 판단하기는 자기이해가 반영될 여지가 많다. 그럼에도 고전은 짧은 경구는 갈등을 해소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된다. 공자는 ‘문왕이나 무왕 같은 위대한 정치가들의 정책이 책에 다 있지만, 그것을 실천할 사람이 있어야 제대로 시행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정책 자체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람이란 추상적이거나 사적인 인격이 아니고 그 정책을 실천할 공적이고 구체적인 역량을 말한다. 정책 실천 역량과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 신상을 비판하는 것은 정책토론만으로도 부족한 두 시간을 낭비하고 유권자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도자가 아무리 자신을 선하다고 주장해도 백성에게 실질적인 효과로 나타난 것이 없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는 대목에서는 무릎을 치게 된다. 대선 후보들이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국민에게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그동안 그들이 한 행동이 국민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가 대통령 자격을 판단하는 가늠자가 되어야 한다. 대선 후보를 선택하는 것은 이념으로 해서도 아니고 인상 비평으로 해서도 안 된다. 이제 남은 일주일 동안 우리 모두 부수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을 구분하고 어떤 정책이 국가와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지, 그 정책을 실천할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 냉철하게 분석해보자.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5-25

‘진정성이 있어야’

요란한 선거 홍보 현수막에 질린다. 말끝마다 국민을 위한다는 데 나에게는 왜 와 닿지 않을까. 남을 위한 선행은 요란하지 않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데 정치인은 하지도 않는 일을 입만 가지고 말만 한다.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방송에 나오면 말없이 채널을 돌린다. 노점상으로 힘겹게 돈을 벌어 1억 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한 김정순 여사(80)의 기사가 나를 잡는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 편지를 읽고,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는 할머니의 기사를 읽는다. 우연히 본 기사인데도 오랜 시간 마음속에 남아 잊히지 않는다. 힘겨워 휘어진 손으로 장학금을 내밀 때의 마음이 전해진다. 금호타이어 광주공장에서 발생한 불을 끄느라 지친 소방대원과 주변 상황을 정리하는 경찰관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선물한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한 식당이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한다. 온전한 음식 대접을 위해 일반 손님을 받지도 않았다. 경기마저 나쁜 상황에서 선뜻 하기 힘든 일이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주인의 마음을 느낀다. 육군 이규탁 중사는 양평군 양서면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를 운행하던 중 사고가 난 차를 발견했다. 범퍼가 많이 부서지고 에어백이 터진 상태에서 운전자도 피를 흘린다. 이 중사는 가지고 다니던 구급낭을 꺼내 지혈하고 119구급대가 올 때까지 환자를 돌보며, 추가 사고를 막기 위해 교통정리도 하였다. 아이유 씨의 선행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펜클럽의 이름으로 불우한 이웃을 위해 거액을 기부한다. 돈이 있다고 하여 남을 위해 기부를 하는 건 아니다. 이 세상에 돈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들은 내어놓기보다 더 모으는 데 힘을 쏟는다. 남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돈을 내고 위로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러 번에 걸친 선행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배우 박보영도 그러하다. 2014년부터 물품과 금품을 후원하는 일을 꾸준히 한다.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쩌면 진정성은 평상시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보고 행동하는가의 문제이다. 행동과 생각이 다르거나 일시적으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건 선행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선행한 사람들이 자신을 알리는 현수막을 걸어놓은 걸 본 적이 없다. 그렇듯 남을 위하는 마음은 언제나 가슴 바닥 깊은 곳에서 조용히 뿜어나온다. 정치인들은 왜 모르는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밑바닥에 숨은 남을 위한 마음이 뿜어나오게 할 수는 없는가. 선거철만 되면 몸을 비틀어도 없는 진정성을 짜내느라 잠을 설치며 돌아다니기보다 평상시에 국민을 위한 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오늘도 거리를 나서면 나를 보라는 듯 정치인의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낀다. 주인을 닮은 가벼운 몸놀림이 눈을 어지럽힌다. 이 혼잡한 시간이 언제 지나가려나. 국민을 위한 진정성은 없으면서 말끝마다 내뱉는 국민이란 두 글자에 머리가 아프다. 박수를 보낸다. 이 시대를 함께 사는 말 없는 선행자들을 위해. /김규인 수필가

2025-05-25

담배 소송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흡연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공단 재정 누수 방지 등을 목적으로 담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500억원대의 담배소송이 11년만에 항소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2014년 소송을 시작한 이 사건은 2020년 1심 재판부가 원고 측인 공단 쪽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질병이 흡연 외 다른 요인에 의해서도 발병할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담배회사 측의 손을 들어 주었다. 공단 측은 즉각 항소하며 흡연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학술적 자료와 담배 퇴치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의견수렴을 증거 자료로 재판부에 제출했다. 소송이 11년을 끌어오는 과정에서 담배의 유해성에 대한 범국민적 인식이 크게 높아졌고, 시민단체의 호응도 커져 항소심에서의 판결이 1심의 결과를 뒤집을 수 있을 지 여부에 대해 세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 46개 주 정부가 담배회사를 상대로 의료비용 환수를 위한 소송을 제기해 우리 돈으로 약 280조원에 달하는 배상을 받아낸 바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1심과 다른 판결이 나올 수 있다는 견해가 조심스레 나오기도 한다. 미국의 담배 배상 판결 후 캐나다 등 세계 많은 나라에서는 영향을 받아 담배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11년을 끌어온 담배 소송은 재판부의 판결 결과를 떠나 담배판매 기업과 흡연자들에게 주는 사회적 메시지는 분명히 있다. 유해 물질을 파는 기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따지는 것과 판결이 국민의 건강권, 소비자 보호 등에 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점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25

남가일몽(南柯一夢)

교양 강의 ‘동서 고전의 만남’을 진행하면서 느끼는 소회가 적잖다. 학생들이 기초적인 한자마저 등한히 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프게 다가온다. 한자어는 상당수 한국어의 근간으로 작용하기에 문해력을 늘리려면 한자어 실력 배양이 필수다. 하지만 실상을 살피면, 상황은 정반대임을 알게 된다. 한자어를 영어가 대체하는 요지경이 펼쳐지고 있다.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에는 읽기와 쓰기, 말하기가 있다. 타인이 쓴 글을 올바르게 독서하는 능력이 읽기다. 필자의 생각과 느낌을 적절하게 전달함이 쓰기이며, 말하기는 화자의 생각을 구두(口頭)로 발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생활을 자연스럽고 윤택하게 해주는 세 가지 능력의 바탕에는 우리 고유어와 더불어 한자어가 자리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다. 우리 언어생활에 굳건하게 뿌리내린 한자어를 버리고 영어로 대체함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필요한 노릇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한자어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그야말로 불 보듯 뻔하다. 예전 세대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썼던 사자성어 혹은 고사성어를 알고 실생활에서 활용하는 청년 세대는 거의 멸종된 것 같다. 그런 연유로 ‘동서 고전의 만남’에서 일주일에 하나 정도 고사성어를 소개하고 있다. ‘남가일몽’도 그런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된 고사성어다. 남가일몽은 당나라 덕종 치세의 선비 순우분이 한바탕 꿈을 꾸고 일어나 확인해 보니 홰나무 남쪽 가지 아래 개미굴이 있었다는 얘기에서 나왔다. 꿈속에서 흘러간 20년 세월이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었던 셈이다. 나는 남가일몽을 고교 국어책에 실린 정비석 선생의 ‘산정무한’에서 만났다. 금강산을 두루 유람하고 소감을 글로 남긴 것이 ‘산정무한’이다. 글 끄트머리에서 선생은 쓴다. “천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경순왕 김부(金傅)가 935년 나라를 들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치고자 할 때 태자가 결연히 반대하지만, 김부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에 태자가 베옷(마의)을 걸치고 금강산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의 천년 사직도, 태자가 세상을 버린 뒤 흘러간 천년도 영겁의 세월에 비춰보면 잠시의 일 아니겠는가, 하며 선생은 쓸쓸해한다. 남가일몽과 비슷한 뜻을 가진 고사성어가 있으니 ‘한단지몽(邯鄲之夢)’이다. 인간이 영위하는 지상의 삶이 유한함을 가리키는 고사성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자명하다. 길지 아니한 덧없는 삶을 살면서도 우리는 진실로 가치 있고 아름다운 대상은 놓쳐버리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들에 몸과 마음을 탕진하고 있음은 아닌지, 돌아보라는 게 아닐까. 선거를 앞두고 내란 잔당의 해괴한 언사와 설익은 칼춤이 난무한다. 작은 권력과 돈푼에 육신과 영혼을 팔아넘기는 내란 잔당들을 본다면 지하의 마의태자는 무슨 말을 남길 것인가.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5-25

구미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작은 거인’ 구미의 선전 기대

이제 하루만 지나면 아시아 육상스타간 ‘별들의 전쟁’ 구미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가 구미일원에서 화려한 막을 올린다. 27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육상대회에는 세계 최고 높이뛰기 선수 우상혁을 포함해 한국남자육상 100m 유망주인 고교생 조엘진, 3000m 장애물경기 한국신기록 보유자 조하림, 우상혁 라이벌인 카타르의 바르심, 세계육상대회 장대높이뛰기 은메달리스트인 필리핀의 어니스트 존 오비에나 등 한국과 아시아 육상 스타들이 대거 출전한다. 이들 참가 선수들은 트랙과 필드, 도로를 아우르는 총 45개 세부 종목에서 210개의 메달을 놓고 불꽃 튀기는 명장면을 연출할 예정이다. 그러나 구미아시아육상대회는 당초 예정에도 없던 조기 대선으로 대회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당초 기대보다는 가라앉은 모양새다. 오죽하면 김장호 구미시장이 지난달 13일 한 행사장에서 우연히 만난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후보에게 “예기치 않게 대선 일정이 육상대회 일정과 겹쳐 국민들의 관심이 대선에만 쏠릴까 걱정”이라며 대회 홍보와 관심을 당부할 정도였다. 이러한 응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관심은 온통 대선에 쏠리고 있다. 이 때문에 구미시와 육상대회조직위는 글로벌 스포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마치 ‘거인 골리앗’과 같은 대선 열기가 상대적 약자인 ‘다윗’ 같은 육상대회 분위기간 대결 양상까지 연상되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에는 각 대선 후보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끊임없이 보도되고 중계되는 반면 구미아시아육상대회에 관한 소식은 ‘가뭄에 콩나듯’ 하고 있다. 구미아시아육상대회는 대형 국제도시에 비해 상대적 약자인 기초자치단체가 아시아 최초로 유치한 국제육상 대회란 점도 특이하다. 구미시는 2023년 12월24일 구미 보다 인구가 6배나 많은 중국 샤먼시를 물리치고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유치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금까지 이 대회는 베이징·도쿄· 뉴우델리· 도하· 방콕· 자카르타· 쿠알라룸프르 등 유명한 국제도시에서만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 인천 등 수도와 광역시에만 개최됐던 대회이다. 기초자치단체란 왜소한 체구로 ‘거구 도시’와의 외로운 싸움 끝에 대회를 열게된 구미시는 이제 또다시 예기치 않게 대선 이슈란 거대한 복병을 만나게 됐다. 그러나 우리는 늘 거인과 난장이 싸움에서 약자의 선전을 응원하듯 ‘작은 용사 다윗’의 활약을 상상한다. ‘다윗 같은 작은 거인’ 구미가 개최하는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 대구와 경북 시도민은 물론 전국민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 열기가 모아지길 기대한다. /류승완기자 ryusw@kbmaeil.com

2025-05-25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우리는 송해 선생님을 참 부러워했다. 돌아가셨을 때 연세가 95세다. 우린 연세가 많은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돈을 버셨다는데 주안점을 두고 말한다. 그 연세에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경이로울 지경이다. 정말 부러웠다. 이제는 대상이 바뀌었다. 그동안 송해 선생님 때문에 가려졌던 분들이 하나둘 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시형 박사, 김동건 아나운서, 허영만 화백 등이 그분들이다. 게 중 맛있는 것을 전국 팔도를 다 돌아다니면서 섭렵하는 허명만 화백이 제일 부럽다. 돈 벌고 맛있는 것 먹고. 이제 겨우 육십이 넘어 정년퇴직한 햇병아리들이 세상 다 산 늙은이 흉내를 내는 것을 보고 답답함을 느낀다. 백세 시대에 아직 살날이 사십 년이 더 남았는데 얼마나 노후 준비를 충실히 해 놓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집 한 채 덜렁 남아 있고 국민연금에 목 빼고 살 지경이면 바로 재충전해서 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왕년에 내가 누구라는 것을 상기하며 자존심 세우다간 시대에 뒤처지는 인간으로 낙인찍힌다. 밥 세 끼를 제대로 다 먹고 사는 세대이자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세대, 손에 전화기 들고 다니는 첫 세대이고 주판 대신 전자계산기 두드리는 세대가 바로 지금 노인으로 분류되는 세대이다. 하루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급변하는 문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바로 ‘꼰대’ 소리 듣는다. 시대가 바뀌면 문화도 바뀐다. 며느리나 딸이 애 낳으면 산후조리원비를 포함한 생산 축하 자금을 내놔야 한다. 그냥 대충 재래시장에 가서 산모용 미역 한 다발 사 들고 가는 시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애 결혼 시켰다고 방심하다가 주위에 돌아가는 꼴을 보고 아연실색하게 된다. 산후조리원 동기끼리 자기 시부모가 뭘 해줬다는 것을 다 까발린다고 하지 않는가. 한참 떨어지는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되면 자신이 시댁에 처참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 아들을 쥐잡듯 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도대체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한숨만 나오고 이런 풍토를 확산시키는 요즘 잘나가는 부모들에게 한소리 질러주고 싶다. “제발 고마해라.” 딸을 시집보내고 이번엔 며느리를 맞이하는 지인이 있다. 사위 인사 올 땐 대충 밖에서 밥 먹고 들어오자는 딸 말만 믿고 대충했는데 며느리 될 애가 인사 온다고 하니 집안에 비상이 걸린단다. 제대로 며느리에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전화 받고 싶으면 대충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들리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 때 그렇게 착하고 순진하던 며느리가 차츰 애 낳고 살더니 주위에 듣는 소리가 있는지, 없는 시부모 괄시하는 게 눈에 보인단다. 하긴 몇백만 원씩 척척 내놓는 시부모가 있는가 하면 100만 원 가까이하는 애 유모차를 사주는 부모에게 더 정이 가기 마련일 것이다. 며느리가 자기 생일상 안 차려 준다고 툴툴거리는 사람을 봤다. 아마 상다리 부러질 정도를 기대한 모양인데 물려받은 시골 뒷산이 몇십억 한다면 모를까 꿈은 빨리 깨는 것이 좋다. 효도라는 단어가 곧 사라진다. 이웃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 정말 남의 일이 아니다. 사위가 차를 바꾼단다.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는 거지? 그냥 바꾼 다음 말하면 안 되나? /노병철 수필가

2025-05-22

‘쿨존’

최근 기후변화의 속도는 인류의 적응 능력을 뛰어넘고 있다. 유럽, 북미, 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폭염이 빈발하고 있으며, 사망자와 경제 피해도 함께 늘고 있다. 2025년 여름을 앞두고 기상청은 우리나라가 평년보다 높은 기온을 기록할 가능성이 60%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으며, 일부 기상 전문가는 올해 여름이 4월부터 11월까지 이어질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은 국내에서 여름철 최고기온이 가장 높은 곳으로 손꼽히며, 실제로 온열질환자 수도 전국 최고 수준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지역사회는 더 이상 ‘폭염을 견디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후재난 시대를 맞아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대응책으로 ‘쿨존(Cool Zone)’의 확대와 정착이 절실히 요구된다. ‘쿨존’이란 단순한 에어컨 공간이 아니라, 기후위기 속에서 시민들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는 생활형 안전망을 의미한다. 주로 공공도서관, 복지관, 지하철역, 정류장, 공공청사 등에 설치되며, 내부에는 에어컨, 냉풍기, 냉수대, 그늘막, 쿨링 미스트 등이 갖춰져 있다. 폭염특보 발효 시에는 무더위쉼터로 기능하며, 특히 노약자·야외근로자·취약계층에는 생명선 역할을 한다. 실제로 서울·부산·광주 등 주요 도시에서는 무더위쉼터를 중심으로 ‘쿨존’ 체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열지도(Heat map)를 바탕으로, 집중적으로 배치하거나 운영시간을 연장하는 식의 개선도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사각지대는 존재하며, ‘쿨존’ 간 정보 접근성, 시설 수준, 이용 편의성 등의 질적 차이 해소가 과제로 남아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쿨존’ 정책을 도시 인프라의 필수 전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 뉴욕시는 매년 폭염기간 동안 공공도서관과 노인센터를 쿨링센터로 지정하여 시민에게 냉방 공간을 제공한다. 애리조나 피닉스시는 교회, 카페, 쇼핑몰과 같은 민간공간도 ‘쿨존’으로 활용하고, 무료 교통수단과 연계해 접근성을 높였다. 호주 멜버른시는 도심 내 ‘쿨링 스테이션’을 촘촘히 배치하여 시민의 열 스트레스를 줄이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대구·경북 지역에도 여러 시사점을 준다. 특히 도심 열섬현상이 심한 대구 도심이나, 야외 작업자 비중이 높은 경북 농촌지역에는 ‘지역 맞춤형 쿨존 전략’이 요구된다. 행정기관 주도뿐만 아니라 민간 공간과의 연계, 에너지 효율 기술 접목, 시민참여 확대 등 다양한 방식이 함께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쿨존’은 단기 대책이 아니라, 기후 위기 적응의 핵심 기반이 되어야 한다. 대구·경북은 여름철 고온 위험도가 높은 만큼, ‘쿨존’의 ‘양적 확대’는 물론 ‘질적 고도화’가 필요하다. 각 자치단체는 생활권 중심으로 ‘쿨존’을 확대하고, 열지도 기반의 취약지역 우선 배치, 정보 접근을 위한 ‘쿨존’ 안내 시스템 정비, 에너지 절감형 냉방 장비 도입, 민관협력 운영모델 마련 등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더불어 지역 주민 스스로가 폭염 대비 행동 요령을 숙지하고 ‘쿨존’을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조금 더 친숙한 교육과 홍보도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쿨존’을 확대하는 일은 단지 무더위를 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심화하는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지속가능한 지역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함이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5-05-22

보이스피싱 경계령

전화를 통해 개인정보를 빼내 사기를 치는 수법의 보이스피싱은 영원히 근절이 되지 않는 범죄일까. 수많은 서민에게 억울한 피해를 안기고 있는 범죄지만 당국의 꾸준한 단속에도 최근 몇 년 사이 보이스피싱 사기는 오히려 더 늘었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올 1분기 보이스피싱 범죄는 전년 동기대비 건수는 17%, 피해 금액은 120% 증가했다. 사기 피해가 오히려 대형화되는 추세다. 피해자 연령은 정보기술 이용 수법에 취약한 50대가 가장 많았다. 50대 이상 피해자 비중은 2023년 32%, 2024년 47%, 올 1분기는 53%까지 높아졌다. 보이스피싱 피해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 때문이라 한다. 전화 통화를 통해 인증을 거치는 일들이 개인이나 공공기관에서 많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은 피해자 상당수가 피해를 입고도 피해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많은 피해가 발생한 뒤다. 대책도 없다. 금융감독원이 21일 고금리와 경기회복 지연 등으로 자금이 절박한 자영업자 등 서민층을 겨냥한 대출 빙자형 보이스피싱이 극성을 부린다고 경계령을 발령했다. 1분기 보이스피싱 피해자 중 42%가 대출 빙자형이라고 하니 나쁜 죄질에 분통이 저절로 터진다. 장사가 안돼 빚을 갚지 못해 쩔쩔매는 서민층을 상대로 금융사기를 치는 악질 보이스피싱 범죄에 강력한 철퇴를 내리는 방법은 없을까. 벼룩의 간을 빼먹는 세상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22

유발지진은 맞는데 인과관계는 없다니

필자처럼 숫자에 약한 사람도 이 날짜는 잊히지 않는다. 지진 났던 날. 2017년 11월 15일. 평소처럼 점심을 먹고 오후 재판이 있어 기록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법원 언덕길을 올라 법원에 들어섰다. 7호 법정에 들어가 재판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때 두둥하고 작은 울림이 느껴졌던 것 같다. 내 재판 순서가 되어 원고대리인 석에 앉았다. 판사님의 질문에 무언가 답변을 하려는 순간 5.4 규모의 지진이 났다. 법정이 크게 흔들리고 전산에 오류가 난 듯한 삐 하는 소리 속에서 법정에 있던 사람들은 3초 정도 침묵 속에서 서로를 쳐다보다가 얼음땡이라도 한 듯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외벽이 일부 무너져 내린 법원 건물 옆에서 넋이 나가 서 있는데 저 멀리 우리 직원이 울면서 뛰어오고 있었다. “변호사님, 저 지금 집에 가볼게요!” 당시 포항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자가 겪은 이런 일을 겪었을 것이다. 지진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후 공포와 트라우마가 더 무서웠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을 서울 시댁으로 일주일간 피난을 보냈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여진에 다른 가족들도 여차하면 바로 밖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한 상태로 잠을 자고 밥을 먹었다. 재판을 가면 법정 뒤엔 피난용 안전모가 놓여있고 집과 사무실 벽엔 금이 가 있었으며 한동안 깨진 화분과 액자들을 잔뜩 버렸다. 몇 달 뒤 가족여행으로 갔던 평창올림픽 폐회식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포항에서 왔다고 말하는 아홉 살 아들에게 대뜸 “아~ 거기 지진난 데?”라고 하는 것에선 무언가 모를 지역 비하까지 느껴졌다. 지진 때문에 우린 이렇게 힘들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 배우자가 외도하거나 누군가에게 맞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린 피해를 보았고 정신적 고통을 느꼈다.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금이 위자료라면 우린 잘못한 누군가에게 위자료를 받을 수 있어야 했다. 이런 고통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부가 밝혀내겠다고 나섰다. 1년이 넘는 조사를 거쳐 정부조사단은 2019년 3월 20일 포항 지진이 정부가 지은 지열발전소에 의해 유발된 촉발 지진이었다고 발표했다. 정부조사단의 공식 발표가 이러하니 피해자들 일부가 위자료 소송을 제기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4년 뒤 1심 법원도 지열발전소를 짓고 운영한 정부가 잘못한 것이 맞다며 포항 시민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했다. 법원까지 이렇게 판결을 내리니 포항 시민 45만 명이 소송에 참여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이번에 2심 법원인 대구고등법원은 포항 지진이 유발 지진이고 시민들이 정신적 고통 입은 것도 다 맞긴 한데 여기에 정부 과실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며 위자료를 몽땅 취소해 버렸다.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는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 · 법적 인과관계는 없어 보인단다. 나라가 세운 시설로 지진이 나서 국민이 고통을 입었고 나라가 나라 잘못이 있었다고 인정하길래 소송을 제기했더니 나라가 위자료를 주랬다가 다시 주지 말랬다가 한다. 포항 시민들은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가. 7년쯤 지났으니, 지진의 고통이 다 잊힌 줄 아는 것인가. 가해자는 원래 피해자의 아픔을 다 알 수 없는 법이다. △포항여자고등학교 고려대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현재)한동대 겸임교수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김세라 변호사

2025-05-22

새순의 향연

산이 아기 엉덩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오릅니다. 푸른 물을 머금은 나무들을 보면 마음부터 바빠집니다. 팝콘 터지듯 하는 꽃보다 연초록의 새잎에 마음을 뺏깁니다. 꿈틀거리는 새순의 옹알거림에 귀가 간지러운 날입니다. 스물 두어 살 즈음 4월의 그날, 내 눈에 비쳤던 그 연두 빛을 잊지 못합니다. 점심시간이면 으레 찾는 구내식당 밥이 싫었습니다. 친구와 나는 밥 대신 빵과 우유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뒷마당으로 가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멈췄습니다. 봄 햇살이 초록물감보다 노랑물감을 약간 더 섞어서 잔디밭에 훅 뿌린 것 같았습니다. 풋내가 확 덮쳤습니다. 새순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는 눈부심 속에 말없이 한참이나 앉아있었습니다. 봄이 오면 입이 먼저 엄마를 기억합니다. 가죽나무 순에서 엄마 냄새가 납니다. 친정 텃밭 한 귀퉁이에 가죽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가죽나무 순으로 김치를 담았습니다. 식구 누구도 아닌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봄 내내 엄마의 냄새를 즐겼습니다. 봄을 기다리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나의 봄도 사라졌습니다. 나는 이십여 년 동안 그 맛을 지어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경주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잠시 시골집에 살 때였습니다. 옆집 할머니가 엄나무 순을 한 소쿠리 가져오셨습니다. 도시에서 온 우리가 먹을 줄 아느냐며 먹는 방법을 여러 가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눈만 끔뻑거리던 나는 가장 쉽다는 방법을 택해, 끓는 물에 살짝 데쳤습니다. 초고추장을 찍어 입에 넣는 순간, 엄나무 새순이 내 입맛을 홀렸습니다. 그동안 최고의 봄나물인 줄만 알았던 두릅이 엄나무 순에 밀려났습니다. 올해도 텃밭 한 귀퉁이에 보랏빛 제비꽃이 핍니다. 논둑에 냉이 꽃이 피고, 달래가 지천입니다. 텃밭에는 하얗게 완두콩 꽃이 피고, 부추와 쪽파가 자리를 잡습니다. 된장찌개 끓일 때마다 넣을 냉이와 달래까지 냉동실에 저장해 두었습니다. 쑥에 생콩가루를 묻혀 봄을 저장합니다. 비 내리는 초 여름날 저녁, 쑥국으로 마음을 채울 것입니다. 모양이 비슷한 씀바귀와 고들빼기를 분류합니다. 씀바귀를 무치고, 고들빼기김치를 담습니다. 쌉싸래한 맛이 입안에 맴돕니다. 나는 이제 봄나물을 만지고 먹어야 봄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첫물인 부추로 김치를 담급니다. 양념 묻힌 쪽파를 통에 가지런히 담습니다. 김치 안 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살짝 데친 머위를 김치 담그듯 양념에 무쳐봅니다. 된장으로 맛을 낸 것과는 또 다른 맛입니다. 시골 장에서 가죽나무 순과 초피나무 순을 샀습니다. 초피나무 순으로 장아찌를 만들고, 가죽나무 순을 만집니다. 인터넷을 뒤져 엄마의 맛을 내는 방법을 찾아봅니다. 그 맛이 나지 않습니다. 다시 또 해 봅니다. 어지간히 따라간 것 같은데 엄마 냄새는 없습니다. 김치 통 하나 채우려면 얼마만큼의 가죽나무 순이 필요하고, 고추장 단지가 움푹 비어버린다는 것을 이제야 압니다. 나도 엄마처럼 김치 통에 가죽나무 한 그루 담습니다. 아들과 딸에게 반찬 한 번 변변히 보내지 못했습니다. 가죽 나물을 먹을 때마다 엄마가 떠오르는데, 내 자식들은 언제 내가 생각날까. 이제야 애들을 생각합니다. 쑥을 한 움큼 보내겠다고 하자, 전화기 너머 딸애의 목소리가 뜨악합니다. ‘어떻게 하라고’가 말끝에 들려옵니다. 조금이라도 먹여 볼 요량으로 저마다 고유의 향과 맛을 가진 봄나물을 나열합니다. 바로 먹을 수 있도록 해서 보내겠다고 해도 손사래 치는 딸이 보입니다. 봄나물은 긴 겨울을 이겨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맛이 그냥 생긴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세월도 그냥 지나온 게 아니 듯이요. 세파를 헤쳐 온 내 안의 세월이 봄나물을 끌어당깁니다. 겨우내 무뎌졌던 감각을 새순의 향기로 깨웁니다. 겨울을 이겨낸 쌉싸래한 맛으로 또 한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돌나물 물김치까지 곁들여 식탁 가득 차립니다. 새순의 향연을 함께 즐길 엄마가 없어 서러운 봄날이지만, 나는 새순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윤명희 수필가

2025-05-21

낮달-신광 법광사지 당간지주

그대, 떠돌이면서도 원주민인 사람 타인과의 경계가 그토록 마음에 걸렸을까 밤낮 없이 기웃거린 발걸음 나쁜 것을 먼저 배워 허무를 실천하는 사람 산에 가리고 강에 잠기면서 물음표 느낌표 다 깨물어먹고 맨발로 자기 속으로 숨는 사람 비겁함에 힘을 실어주고 웃는 사람 새털구름 잔주름 묻은 햇살을 녹인 소주 한 잔 마시고 그걸로 양치질하는 더러운 사람 보는 이 마음에 무혈입성하여 남긴 차가운 소인(消印) 그렇게 누구에게나 원죄는 있다고 다그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곧 사죄이며 소멸의 시작임을 가만히 지적하는 무기질의 비웃음 폴폴 날리며 걷는 사람 하늘엔 문이 없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문을 여는 마음이 예쁜 사람, 불치병이 없는 사람 그대 원주민이면서도 떠돌이인 사람. … 일상적 혹은 세속적인 것의 ‘장엄함’이란 말을 나는 자주 사용한다. 그보다 더한 철학은 없다고 믿는다. 평범해서 눈부시다. 모든 사람의 생애가 반드시 그러하다. /이우근 ..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5-21

알레르기 비염의 치료

알레르기 비염은 단순히 ‘코에 염증이 생겨 콧물이 흐르는 병’이 아니다. 코 점막의 과민반응은 전신 면역계의 불균형이 빚어낸 결과이며, 피로‧수면 부족‧스트레스 등 생활 리듬이 조금만 흔들려도 증세가 요동친다. 한방에서는 이처럼 과잉 흥분한 면역 시스템을 다시 균형점으로 돌려놓고, 차가워진 비강 내부의 기혈 순환을 회복시키는 것을 근본 치료의 목표로 삼는다. 실제 임상 현장에서 체력이 떨어지고 감기에 잘 걸리는 환자에게 먼저 쓰는 처방이 시호계지탕이다. 면역을 올려주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약으로 이 약을 복용하면 환자들은 ‘몸이 덜 찌뿌드드하다’ ‘야근 뒤에도 코가 덜 막힌다’는 변화를 가장 먼저 체감한다. 면역 토대가 어느 정도 다져졌는데도 아침 기상 직후 맑은 콧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재채기로 기침을 하면 면역과 함께 차가운 습기가 문제다. 몸이 마르고 약한 사람은 몸을 보하면서 한습을 제거 하는 소청룡탕을 사용한다. 약이 맞으면 재채기 횟수가 줄어들고 콧물이 더 이상 목뒤로 흘러내리지 않는다. 몸도 따뜻해지고 멍했던 정신이 맑아지는걸 느낄 수 있다. 동물실험에서는 소청룡탕이 비점막 내 히스타민, IL-4, IL-5 분비 자체를 억제해 재발 빈도를 낮춘다는 결과도 확인되어 약을 충분히 복용하면 먹을 때만 효과 나는 약과는 다르게 완치 가까이 된다. 약침 치료는 익구개신경절을 초음파로 정밀 타깃팅할 때 시너지가 극대화된다. 이 신경절은 코와 부비동 점막을 지배하는 교감 부교감 신경이 뒤엉킨 교차로라 이 부분에 직접 약침이 들어가면 부교감성 혈관확장을 억제하며 점막 충혈을 가라앉히고 교감성 섬유 흥분을 완충해 즉각적인 코 뚫림을 유도한다. 초음파 화면으로 내·외익돌근, 상악동, 내경동맥 위치를 실시간 확인하므로 시술 안전성도 높다. 2024년 발표된 무작위 대조 연구에서 4주 동안 주 1~2회 초음파 유도 SPG 약침을 받은 환자군의 총 비증상 점수가 대조군 대비 40% 이상 감소했고 뿐만 아니라 야간 수면 질 지표도 유의하게 향상되었다는 결과가 보고되었다. 침 치료와 부항요법은 이러한 약침 효과를 묶어주는 실타래다. 침으로 코 주변의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고 부항으로 등의 폐와 심장을 자극하는 신경에 사혈을 하면 약침 효과가 한층 더 증대된다. 집에선 37 ℃ 약염수로 하루 두 번 가볍게 비강을 세척하면 염증 매개물질이 빠르게 씻겨 나가 재발 곡선이 완만해진다. 수면 역시 방어막을 세우는 데 빠질 수 없다. 성인 기준 7시간 이하의 부족한 수면은 단 하루 만에 자연살해세포 활성을 30%나 떨어뜨린다는 보고가 있어, 충분한 숙면은 어떤 약물·약침보다 강력한 면역 조절제다. 시호계지탕으로 면역을 올리고 소청룡탕으로 급성 증상을 잡고, 익구개신경절 약침으로 신경·혈관 반응을 조정한 뒤 침·생활요법을 병행하면 대부분의 알러지 비염은 큰 효과를 본다. 제대로 치료가 되면 일시적인 증상의 개선이 아니라 몇 년이 지나도 큰 재발 없이 지낼 수 있다. 다만 체질과 동반 질환에 따라 약의 처방 구성이 달라지며 몸의 면역을 올리고 보하는 약재를 같이 처방을 해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있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5-21

손녀가 쓴 나의 이야기

몇 달 전 서울의 맏손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부모님의 삶을 인터뷰해서 글을 써야 하는 숙제가 있다고 했다. 5학년인 손녀는 매우 조신했다. 특유의 조곤조곤한 말투는 나지막하되 다정했으나 더러는 집요하기도 했다. 할아버지께 양해를 구해 달라는 당부를 먼저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귀가 좀 어두우시니까 제 말을 잘못 알아들으실 것 같아서 할머니 인터뷰할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서운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네 작은 전화 목소리를 어떻게 들으시겠니? 걱정말라는 나의 말을 듣고선 정해진 인터뷰 목록인지를 먼저 읽어주었다.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사회생활, 현재와 미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씀 등등이었다. 갑작스러운 전화였기에 준비할 겨를은 없었다. 약 20여 분 동안 손녀의 물음에 즉흥적이긴 했지만 성실히 답했다. 인터뷰를 다 마친 후 글로 적을 것이라면서 고맙습니다. 인사도 잊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니 더 나은 대답을 할 걸 생각했지만 다시 전화하진 않았다. 그러곤 잊었다. 며칠 전 아들이 바로 그 책(?)을 우편으로 보냈다. 분홍색 종이 두 장을 반 접어 표지까지 총 8쪽. 빨간색 실로 묶은 선장본(?)이었다. 표지엔 제목인 듯 “이정옥 교수님의 삶”이라 크게 쓰고 손녀 이 윤 지음. 목차도 적었다. 오른쪽 하단에 내 얼굴임이 확실시되는 파마머리에 안경 낀, 팔자 주름 선명한 노인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라고 떨리기까지 할까. 나를 어떻게 표현하여 썼을까 호기심, 설렘, 두려움 등등의 감정으로 책장을 넘겼다. 인터뷰한 내용을 거의 가감 없이 차례대로 적었다. 페이지마다 짧디짧은 글 아래 글의 내용에 꼭 맞는 삽화가 자그마하게 그려져 있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과수원에서 아침마다 토마토를 따 드셨다. 토마토즙 때문에 입술이 따끔거렸던 기억도 있다고 하셨다.”는 글 아래 토마토를 베어 물며 얼굴을 찡그린 어린 여자아이를 그려 둔 식이다. 학창 시절 가야금을 배운 에피소드 아래엔 가야금 타는 긴 머리의 여자아이와 음표. 현재와 미래 페이지에는 글 쓰는 할머니, 한국어를 가르치는 할머니 모습을 적고 그렸다. 표지의 목차에는 없는 내용도 있었다. 글쓴이인 나(손녀)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라는 제목엔 내가 꾼 손녀의 태몽 이야기를 적었다. “손녀인 나에게 나의 태몽-고래떼가 바다에서 춤추는 꿈-처럼 넓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라는 말씀을 하셨다.” ‘넓은 세상’은 ‘바다’요, ‘자유롭게’는 춤추는 고래라며 화살표로 표식해 둔 것이 놀라웠다. 내 말을 찰지게 이해해서 비유 풀이까지 한 것 아니겠는가. 그 페이지엔 바다에서 춤추는 고래와 지구 위에서 웃으며 춤추는 여자아이의 삽화가 있다. 마지막 페이지는 무려 “작가의 말”이었다. 흐뭇하고 대견하고 기특하고 감동적이어서 그대로 옮겨본다. “그렇다. 생각했듯이 나는 할머니의 손녀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의 작가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이정옥 할머니는 은퇴한 지금도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계신다. 여러분도 이정옥 할머니처럼 열심히 공부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작가인 손녀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만든 첫 책(?)의 주인공이 된 이 맘을 어찌 표현할 말이 없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