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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천년의 소리

APEC을 한 달 앞둔 지난주 경주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국보 29호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인 성덕대왕신종의 안전 여부를 조사하는 타종행사가 있었다. 771년 통일신라 혜공왕 7년에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은 1254년의 역사를 가진 종이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종으로선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이라 말한다. 높이 3.66m, 무게 18.9t이다. 신라 35대 성덕왕의 공을 기리고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아들인 경덕왕이 제작을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혜공왕 때 완성한 종이다. 범종이란 불교 용어다. 불경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글로 표현한 것이라면 불상은 부처님의 모습이고, 범종은 부처님의 목소리로 해석한다. 청정한 절에서 울리는 맑은 종소리는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우치라고 하는 것이다. 성덕대왕신종은 에밀레종이란 별명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황동 12만근이 소요되는 대형 종을 만들고자 갓은 시도를 다했으나 번번이 종이 깨지고 소리가 나지 않는 실패를 했다. 어린아이를 넣어야 소리가 난다는 말에 어린아이를 쇳물에 바치고 나니 완성됐다는 것이다. 종을 칠 때마다 “에밀레”라는 어린아이의 소리가 들려 붙여진 이름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1992년까지 매년 재야의 종으로 타종 행사를 벌였으나 그 이후는 조사 목적 외에는 타종을 금했다. 지난주 실시한 조사목적의 타종행사에는 제작연도를 상징하는 771명을 초청해 타종식을 가졌다. 천년 전 신라인이 듣던 종소리를 오늘 이 시대에 사는 이들이 직접 듣는 행사다. 천년을 거슬러 간 시간여행의 신비로움에 빠져든 순간이었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9-28

농촌발전을 위한 구미의 농업혁신

최근 기후위기와 국제분쟁, 보호무역의 확산 속에서 농산물은 국가와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핵심자원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콩과 옥수수는 미-중 무역분쟁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되고, 유럽은 탄소중립 농업에 사활을 거는 등 세계 각국이 농업의 가치에 주목한다. 하지만 우리 농업은 매우 심각한 위기다. 2023년 기준 곡물자급률은 22.2%, 식량자급률은 49%에 머무르는 수준이고, 1%에 그치는 밀자급률 때문에 전 국민이 즐기는 라면과 빵의 주재료는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한다. 국제시장의 곡물시세 급등은 전국적으로 대혼란을 초래하고 식량주권을 위협할 수 있다. 농촌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농가 및 농업인구 감소와 농민 고령화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고, 2024년 농가경제조사에 따르면 농업소득이 967만 6천 원에 불과한데 청년들이 과연 농촌을 선택할 수 있을까. 감불생심(敢不生心)이다. 백척간두에 놓인 농업위기를 타개하고 식량안보를 확립코자 구미시는 농업혁신을 통한 새로운 돌파구 모색에 전념하고 있다. 그동안 뚜렷한 산업도시 이미지 탓에 중앙부처와 경북도의 농업 분야 공모에서 후순위로 밀리기 일쑤였지만, 사실 구미는 농업에 깊은 저력을 지니고 있다. 세종의 권농교서(勸農敎書) 초안을 작성한 하위지(河緯地)와 ‘농사직설’ 편찬에 참여한 정초(鄭招)는 구미에서 태어났고, 세종에게 수차와 물레방아 도입을 건의한 박서생(朴瑞生)은 도량동 밤실마을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구미는 조선 초 농업혁신을 주도한 선각자들의 산실이었다. 또한 낙동강을 따라 형성된 선산들, 해평들, 고아들, 지산들 등 넓은 평야를 품고 있는 구미는 예로부터 이름난 곡창지대였다. 최근 구미시는 지역의 농업 DNA를 계승해 농업혁신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첫째, 디지털화, 스마트화, 규모화를 통해 최첨단 농업 인프라를 구축했다. 도개면의 밀밸리특구에서는 밀·콩 이모작으로 농가소득을 높였고, 도내 최초 밀제분공장을 건립해 ‘구미밀가리’라는 브랜드의 우리밀을 생산한다. 선산읍의 농산물가공기술지원센터는 농산물 가공기술 보급과 창업지원의 거점으로 발돋움했고, 구미통합RPC(미곡종합처리장) 가동으로 고품질 쌀 생산체계를 확립했다. 무을면의 디지털혁신농업타운은 드론과 대형 농기계를 투입한 공동영농 모델을 정착시켰다. 한편, 미래 농식품산업의 구심점으로 거듭나고자 국가푸드테크클러스터 구축을 추진한다. 둘째, 유통망 확장과 해외시장 개척에 집중했다. 구미로컬푸드직매장은 개장 2년 만에 누적 매출 100억 원을 달성하며 지역 농가들의 판로에 숨통을 틔웠다. 지난해 서울광장에서 판매한 ‘구미한우’와 지역 농산물은 올해 국회에서 열린 판촉전에서 수도권 소비자들에게 더욱 큰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내달 서울에서 열리는 ‘제2회 구미 로컬푸드페스타’를 앞두고 사전 예약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또한, 안전한 지역 농산물 공급을 위한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괌 정부와 농식품교류협력MOU를 체결해 구미 농산물의 해외시장 진출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2024년 구미 농식품 수출액은 9,4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47% 증가하며 경북 도내 최고의 성과를 달성했다. 셋째, 청년농을 육성하고 농촌 정주여건을 개선했다. 구미시는 농식품부와 농촌협약을 체결해 농촌지역 생활여건 개선과 도농격차 해소를 통한 살기 좋은 농촌 만들기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청년농업인에게는 자금과 장비 지원 및 교육을 통해 농업 관련 창업기회를 제공하고, 농가소득 증대를 위한 아열대작물 재배기술 보급 등 청년들이 농업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구미는 그동안 전자산업과 휴대폰, 디스플레이를 중심으로 300억 달러 수출을 기록하며 국가 발전을 견인했다. 이제 구미시는 농업혁신과 K-농산물 수출을 바탕으로 농업의 르네상스를 주도하면서 국가 경제에 더 크게 기여하는 재도약을 꿈꾼다. 구미시의 농업혁신을 발판으로 대한민국이 농업 강국으로 우뚝 서고 전국 농촌들의 고른 발전으로 청년들이 농부를 꿈꾸며 농촌으로 몰려오는 시대의 도래를 기원한다. /김장호 구미시장

2025-09-28

포항 보경사 계곡, 관광산업으로 100년 먹거리 창출해야

기암괴석이 비탈마다 우뚝 선 푸른 소나무, 굽이치는 물길을 따라 옥빛으로 흐르는 계곡의 절경. “이런 숨겨진 비경이 있었다니···” 처음 찾은 이들은 탄성을 내뱉는다. 포항 보경사 계곡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여전히 포항의 대표 명소로서 손색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러나 방문할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다. 50년 전 고등학생 시절 찾았던 모습과 지금의 풍경은 별반 다르지 않다. 주변에는 변변한 숙박시설 하나 없어, 다른 지역의 관광지와 비교하면 개발이 지지부진하다. 지자체들이 작은 자원으로도 관광지 조성에 힘쓰는 현실을 떠올리면, 포항이 지닌 천혜의 자원을 방치하는 듯한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위성지도를 펼치며 상상에 잠겨본다. 내연산 정상에서 청송 주왕산까지 직선거리 20km 남짓. 그 사이에는 향로봉과 경북수목원, 하옥계곡이 자리하고, 북서쪽으로는 ‘남한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주왕산 국립공원이 연결된다. 여기서 하나의 청사진을 그려본다. 송라 보경사에서 주왕산까지 잇는 대규모 관광벨트를 구축하는 것이다. 구체적 방안은 이렇다. 첫째, 향로봉 정상에 주차장을 설치하고 경북수목원과 내연산을 케이블카와 모노레일로 연결해 접근성을 높인다. 둘째, 경북수목원 인근 국유지를 활용해 생태공원, 짚라인, 패러글라이딩 체험장을 조성한다. 셋째, 장기적으로는 주왕산까지 케이블카를 확장해 국내 최대 규모의 산악 관광 네트워크를 완성한다. 이는 단순한 관광지 개발을 넘어, 지역 경제 활성화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경북수목원 역시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 용인 에버랜드를 벤치마킹해 테마파크와 동물원을 결합한 복합시설을 구축한다면, 국내외 관광객 유치에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이다. 특히 수목원 인근 국유지는 부지 확보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 최적의 조건이다. 향로봉 정상에서의 액티비티 체험장은 학생 수학여행 코스로도 주목받을 것이며, 해외 트레킹 마니아들의 버킷리스트에 오를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지자체의 역량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중앙정부와 경북도가 협력해 광역개발 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 다행히 윤석열 대통령의 영일만 대교 건설 공약이 실현되면, 동해고속도로와 포항-영덕 간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교통 인프라가 획기적으로 개선된다. 여기에 부산 가덕도 신공항과 대구국제공항과의 접근성까지 고려하면, 포항은 부산·울산과 함께 동해안 관광의 허브로 도약할 수 있다. 호텔, 리조트 등 숙박시설 수요 증가도 뒤따를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포항은 포항제철을 기반으로 성장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인구 50만 명선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으며, 여기에 더해 미국의 50%에 달하는 고율 관세 부과로 철강업계가 심각한 타격을 입으면서 지역 경제의 불확실성이 심화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대규모 관광단지가 조성된다면 일자리 창출과 관광 수입 증대는 물론, 향후 100년 이상 관광산업이 지역 경제의 핵심 축이 될 것이다. 하루빨리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이병우 포항시 남구청 건축신고팀장

2025-09-25

치매가 유죄?

사례 1) 60대 여성이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에게 접근해 평생을 돌봐 주겠다고 속인 뒤 2억5000만원 상당의 상가 등기를 자신의 앞으로 이전한 사건. 경찰 조사에서 사기행각을 벌인 60대 여성은 법률상 남편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고의에 의한 사기로 인정돼 법원으로부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사례 2) 100억원에 가까운 재산을 가진 치매 노인과 위장 결혼한 60대 여성이 공범들과 짜고 재산을 강탈한 사건. 60대 여성은 재산 범죄에서 친족은 처벌을 면할 수 있다는 규정을 적용받기 위해 위장결혼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치매 환자 가족에게는 “그저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혼인 사실을 숨겨 왔다고 한다. 사례 3) 80대 치매 노인을 간병하던 간병인이 노인이 치매 환자인 것을 알고 그가 소유한 땅을 매도하려다 덜미가 잡힌 사건. 일본에서도 인지능력이 떨어진 고령자를 상대로 한 부동산 사기 사건이 빈발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임대 수입 보장이나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팔아주겠다고 속여 중간에서 돈을 가로채는 수법을 쓴다. 일본은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2040년이면 치매 환자가 무려 584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이 소유한 자산 규모만 197조엔 우리 돈으로 1900조원이 넘는다. 우리도 노인인구 증가와 더불어 치매 환자 100만명 시대를 맞고 있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리비용도 천문학적 수치다. 게다가 곳곳에서 벌어지는 치매노인 상대 사기 범죄까지 극성을 부려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사기 피해를 입은 치매 환자 중에는 사기 사실을 뒤늦게 알고 비통해하다 숨진 일도 있다고 한다. 치매 사기 범죄를 막을 특단 대책은 없을까. /우정구(논설위원)

2025-09-25

울릉공항, 1200m 활주로에 묶인 ‘안전과 수익성의 딜레마’...감사원, 울릉도 주민요구 객관적 증명

울릉도 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인 울릉공항 건설이 속도를 내고 있다. 2027년 완공, 2028년 상반기 개항을 목표로 현재 공정률은 70%에 육박하고 있다. 그러나 감사원의 감사 결과는 차갑다. “여객수요 과다 산정, 활주로 길이 안전 취약, 관리·감독 부실” 세 가지 키워드로 울릉공항 건설사업이 도마에 올렸다. 국토교통부는 울릉공항의 향후 수요를 GDP 성장률을 기준으로 수요가 일정 비율로 증가한다고 가정했다. 이에 따라 2040년 울릉공항 여객수요를 111만 명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해양수산부는 과거 해운 여객 추세를 반영, 101만명으로 보다 보수적인 예측을 내놨다. 국토부 수요가 10만 명 과다하게 산정된 셈이다. 여객수요는 공항 건설의 근거이자 명분이다. 이 숫자가 왜곡될 경우, 수천억 원의 예산이 허공으로 흩어질 위험이 있다. 이번 감사원 지적은 국토부의 수요 산정 방식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 심각한 문제는 활주로 길이다. 울릉공항은 당초 50석급 항공기(2C 등급)를 기준으로 설계돼 활주로가 1200m이지만 단거리 항공기 단종 추세와 소형항공운송사업자 수익성을 이유로, 2023년 울릉공항 등급을 80석 급 항공기가 취항 가능한 3C로 상향했다. 하지만 활주로 길이는 그대로 였다. 설계 항공기 두 기종의 최소 이륙거리는 각각 1289m와 1615m. 이미 활주로 길이를 초과한다. 부산항공청은 이 문제를 ‘승객 수와 화물량 제한’으로 보완했다. 하지만 제한 기준 산정 과정에서 구형 모델의 운항중량(1만2800㎏)을 적용해 실제보다 700㎏ 가볍게 잡았다. 그 결과 이륙 가능 승객 수가 최대 7명이나 과다 산정됐다. 더 심각한 건 우천 시 상황이다. 미국 연방항공청(FAA) 기준에 따르면 활주로가 젖어 있으면 착륙거리는 15% 늘어난다. 설계 항공기 중 한 기종은 승객이 한 명도 타지 않은 상태에서도 착륙이 불가능한 것으로 확인됐다. 감사원이 민간 조종사 20명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70%가 “현 활주로 길이에서 운항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고, 95%는 “안전을 위해 활주로 연장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전문가의 경고를 외면한 채 ‘1200m 고수’라는 편의적 선택을 한 국토부의 책임이 무겁다. 소형항공기가 울릉공항에 취항하려면 최소 72명의 승객을 태워야 한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안전 확보를 위해 탑승 인원이 줄면 항공사는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감사원 조사에서 소형항공사 전문경영인 3명 모두가 “72명 이하라면 수익성이 없다”고 답했다. 수익성 없는 공항은 곧 유휴시설로 전락한다. 울릉공항은 단순한 SOC 사업이 아니다. 주민의 이동권 보장, 관광산업 육성, 안보, 그리고 독도와 맞닿은 전략적 상징성까지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진행 방식은 불안하다. 주민들은 이미 활주로 연장 추진위원회를 꾸려 범국민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감사원의 지적은 주민들의 우려를 객관적으로 확인해준 셈이다. 이제 남은 건 국토부와 정부의 결단이다. 울릉공항이 진정으로 ‘안전한 하늘길’이 되려면, 활주로 연장과 수요 재 산정이라는 근본적 처방이 더는 미뤄져서는 안 된다. /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25-09-25

종교적 가스라이팅에 의한 의사표시 취소

경기도 가평 신천지 평화의 궁전 앞엔 매주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71세의 김태순씨가 있다. 지인 소개로 1989년 신천지에 들어간 김씨는 30년간 노역에 시달리다 2020년 신천지를 탈퇴했다. 사역이라는 명분 하에 전도, 밥 짓기, 전단지 붙이기 등 온갖 일을 했지만 30년 믿음 생활의 결과는 헌금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남은 수천만 원의 빚과 풍비박산 난 가정이었다. 그는 신천지의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에 세뇌당해 벌어진 일이라며 신천지 교단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30년 세월이 원통해요. 지금도 젊음 사람들이 세뇌당해 인생을 낭비당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김씨를 보면 늦게라도 세뇌에서 벗어나게 된 그가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탈을 쓴 악덕 교주의 세뇌에 빠져 가정과 재산을 잃고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니 말이다. 민간인 폭도들이 법원을 부수고 침탈한 전대미문의 서울서부지법 폭동 사건도 종교적 가스라이팅과 연관되어 있다. 전광훈 목사는 폭동 사태가 일어나기 하루 전 집회에서 마이크에 대고 “만약 구속영장이 발부된다면 초헌법적 권리인 국민저항권을 통해 국가기관이나 그 기능에 대해 물리적 타격을 가하는 것도 정당하다”, “서부지방법원 주소를 한 번 띄워주세요. 빨리 이동해야 되니까 오늘 내로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을 찾아와야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실제 그 법원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사건이 커지자 목사가 한 말이 참 씁쓸했다. 그는 “나는 국민저항권 밖에 말한 게 없다, 법원에 들어간 애들은 우리 단체가 아니다. 우리하고는 관계가 없다”라고 했다. 내 말은 진리이지만, 내 말로 인해 벌어진 일과 아픔들에 대해 책임질 생각은 없다. 이런 수준의 교주들이 참 많은 세상이고, 결국 책임은 약자인 신도 개인의 몫이 된다. 2018년 신천지를 탈퇴한 사람들이 신천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2심 법원은 “신도로 포섭된 이후 친절과 호의가 순식간에 사라져 외톨이가 될 수 있다는 불안 심리 등을 이용했다”라며 피해 일부를 인정했지만 대법원이 이를 뒤집었다. 대법원은 종교적 가스라이팅에 대해 “종교를 선택하기 전·후 태도나 생활변화 등 여러 가정을 고려해 개별적·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이 사건에서는 피해 행위들이 “강압적으로 이뤄졌다고 볼 만한 여지가 없다”고 했다. 이처럼 종교적 가스라이팅은 뒤늦게 스스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더라도 협박과 폭행 같은 명백한 강압이 없었던 이상 법적으로 배상을 인정받기가 힘들다. 그나마 이런 심리적 지배에 따른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도록 법률 개정이 추진된다고 하니 다행이다. 법무부는 지난 2월 ‘부당한 간섭에 의한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한 민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지금까지는 민법상 사기와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만이 취소 대상이었지만, 부당한 간섭에 의한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게 되면 교주와 신도 같은 심리적 지배가 이루어지기 쉬운 관계에서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내린 의사표시도 취소할 수 있게 된다. 다른 건 몰라도 종교적 가스라이팅에 의한 재산 피해는 돌려받을 길이 열리게 될까? 지켜봐야 겠다. /김세라 변호사

2025-09-25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개만 보면 질색하는 사람이 있다. 개 몰고 나오는 사람에게 과한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다. 이런 사람은 십중팔구가 개에게 물린 쓰라린 경험이 있어 그 공포감이 작은 개만 봐도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이건 제대로 물려 본 사람은 안다. 이걸 개 주인은 이렇게 귀여운 개가 무슨 죄가 있냐며 항변하는데 남의 집 개한테 얼굴 한번 물려서 살가죽이 뜯겨나가 보면 왜 그러는지를 알 것이다. 개만 보면 이상하게 과격한 언사를 내뱉은 사람을 보고 나도 처음에는 과민반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원인을 알고는 무조건 이해하게 됐다. 물린 트라우마가 얼마나 한 사람 인생에 악영향을 주는지 분명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큰딸이 등산하다가 인근 농가 닭에게 쪼여 얼굴에 큰 상처가 난 적이 있다. 119에 실려 종합병원 응급실에 가서 치료받았고 그 공포로 인해 며칠을 앓아야 했다. 그 뒤로는 새만 보면 무서워한다. 그 농가에 가서 항의했더니 닭 주인 영감은 난 모른다는 식으로 능청스럽게 대하기에 오랫동안 애를 먹였다. 모르면 알도록 해줘야 앞으로 조심하겠다 싶어서다. 사과부터 하고 닭을 앞으로 단속을 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왜 닭이 있는 곳으로 왔냐는 억지 주장만 되풀이했었다. 40년도 훨씬 넘은 대구 ‘초원의집’ 화재 사고로 25명의 젊은 친구들이 목숨을 달리했다. 당시 근처에 있다 달려가 좁은 문에서 깔려 죽은 애들을 봤다. 그 뒤 그 트라우마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소방관이 구조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 나를 보고 소리쳤다. 평생 괴롭게 살기 싫으면 나가라고. 40년 전에 소방관도 알고 있던 일을 40년 지난 지금에도 아직 해결이 안 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꼭 필요한 소방 물품조차 지원이 되지 않아 개인적으로 사서 사용한다는 뉴스를 들은 것도 최근 이야기다.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은 이와 눈 마주치지 마라’ 한 소방관이 신고를 받고 창문을 깨고 들어간 현장에서 목을 매고 죽은 이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모습이 각인되어 두고두고 괴롭혔다는 증언이 나온다. 그만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조현병보다 더 심각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이태원 참사 구조활동 후 그 트라우마로 인해 우울증으로 자살한 소방관의 이야기가 화재다. 소방청의 지원을 받아 9번, 개인적으로 3번, 총 12차례의 심리 치료를 받았지만, 그날의 트라우마는 해결되지 않았고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만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란 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에 대한 보완 조치이다. 그런데 이게 실효성 있게 다가가려면 인원 보충과 장비 개선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여기에 대한 보완책이 턱없이 부족하다. 또한 치료 시스템을 정비해서 보다 세세한 부분까지 챙겨야 할 부분이다. 소방관이 검사받은 지 세 달이 지났는데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심리 치료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편안하게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가능은 한지, 언제쯤 이루어지는 건지 묻고 싶다. /노병철 수필가

2025-09-25

‘정의로운 전환’

올해 여름 더위는 이제 한풀 꺾였지만, 지난해 추석까지 이어진 극심한 폭염을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다. 매년 반복되는 기록적인 폭염과 집중호우는 이제 기후위기가 일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해법은 결국 탄소중립이다. 하지만 단순히 석탄발전소를 줄이고, 자동차를 전기차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또 누군가는 전기요금이나 생활비 부담을 크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요즘 세계 곳곳에서 강조되는 것이 바로 ‘정의로운 전환’이다. ‘정의로운 전환’이란 기후위기 대응 과정에서 누구도 뒤처지지 않게 하자는 약속이다. 예를 들어 달서구 성서산업단지처럼 제조업과 에너지 다소비 기업이 많은 지역은 탈탄소 압력이 높다. 이런 곳에서 단순히 규제만 강화하면 중소기업과 노동자가 직격탄을 맞게 된다. 따라서 노동자에게는 새로운 직무훈련과 전환 일자리를, 기업에는 사업 전환 컨설팅과 금융지원을 연계해야 한다. 또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면 저소득 가정에는 에너지 바우처, 노후 주거지에는 단열·효율화 지원을 통해 부담을 줄여야 한다. 이처럼 ‘정의로운 전환’은 단순한 환경정책이 아니라 생활 속 문제해결과 연결된다. “탄소중립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라는 질문이, “내 집 전기요금과 일자리 문제이구나”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순간이 바로 ‘정의로운 전환’의 시작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다양한 실천이 진행되고 있다. 독일은 루르 지역 석탄광산을 닫으며 철도·대학·문화시설을 세워 지역경제를 살렸고, 스페인은 광산노동자에게 재생에너지 교육을 제공했다. 미국은 청정에너지 투자 혜택의 40%를 취약지역에 배정한다. 국내에서도 충남 보령과 태안은 석탄발전소 폐지 이후 특별법을 요구했고, 전남 신안군은 풍력·태양광 발전에 주민 지분 참여 제도를 도입했다. 대구·경북 역시 준비가 필요하다. 대구의 성서산단, 칠곡3지구, 신서혁신도시, 경북의 구미 국가산단, 포항 철강벨트, 경주 원자력, 영천 자동차부품 단지는 대표적인 전환 대상이다. 농촌 지역인 청도·의성·군위는 주민 참여형 재생에너지 모델 도입이 적합하다. ‘정의로운 전환’은 결국 우리 삶의 문제다. 대구시와 경북도가 성서·구미·포항 같은 산업지대와 농촌 마을을 특별지구로 지정해 맞춤형 지원에 나서야 한다. 중앙정부는 기금과 제도를 뒷받침하고, 지방정부는 에너지 효율 리모델링, 마을 태양광, 전환 직업훈련 같은 구체적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이 과정은 쉽지 않지만, 제대로 준비한다면 대구·경북은 기후위기 대응의 모범 지역이자 지역경제 재도약의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다. ‘정의로운 전환’은 위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다. 더 나아가 대구·경북이 먼저 길을 열어간다면 대한민국 전체가 참고할 수 있는 성공 모델이 될 것이다. 산업단지의 전환, 농촌의 에너지 자립, 시민 참여와 이익 공유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시도가 바로 ‘정의로운 전환’의 표준이 될 수 있다. 이제 대구·경북이 앞장서서 대한민국 ‘정의로운 전환’의 선도 모델이자, 탄소중립 시대의 새로운 희망지역으로 도약할 때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5-09-25

나경원과 추미애의 전쟁

국민의힘이 나경원 의원을 국회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간사로 보낼 때부터 불화는 이미 예고됐다. 왜냐? 법사위엔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위원장으로 앉아있었기 때문. 둘은 양당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다선의 여성 의원이다. 나경원 의원은 판사 출신으로 2002년 당시 이회창 대통령후보 여성특별보좌관으로 정치계에 들어와 원내대표까지 지낸 5선의 중진급 국회의원. 추미애 의원 역시 판사로 생활하다가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6선인 추미애 의원은 현재 더불어민주당 최다선 국회의원이다.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때부터 세칭 ‘추-나 대전(추미애와 나경원의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 예측했다. 아니나 다를까. 추 위원장이 주도하는 법사위에서 나 의원의 간사 선임은 불발됐고, 그 과정에서 여야 의원들의 고성과 막말로 국회는 또 한 번 눈총을 받았다. 추 위원장과 나 의원의 불화는 이후로도 지속됐다. 지난 22일에도 위태위태하던 법사위에서 다시 한 번 폭탄이 터졌다. 국민의힘 의원의 의사진행발언을 막는 추 위원장에게 나 의원이 “야당 의원 입틀막 하는 게 국회인가”라고 쏘아붙이자, 추 위원장이 “왜 회의 진행을 방해하느냐. 이렇게 하는 게 윤석열 오빠에게 도움이 되느냐”라고 되받은 것. 그날 ‘추-나 대전’ 이후 국민의힘 여성 의원들은 추 위원장의 발언이 여성 모욕이라며 반발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은 “그럼 윤석열이 오빠지, 언니냐?”라며 추 위원장을 감쌌고. “법사위가 이전투구(泥田鬪狗)의 현장이 돼버렸다”며 우려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추 위원장과 나 의원, 여야 법사위원들은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9-24

트럼프의 압박과 대한민국의 선택

트럼프 대통령의 통상정책은 언제나 강압과 거래의 언어로 특징지어져 왔다. 미국산업을 살린다는 명분이지만 실제로는 동맹국들에게 일방적인 금전적 요구를 던지며 ‘수용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식의 협상방식을 고수한다. 미국이 한국에게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내놓으라며 압박한다는 보도는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으로 읽힌다. 일본이 미국의 요구를 수락했으나, 한국은 일단 ’협상의 가치조차 없다‘며 거부했다. 그런 결과, 굵직한 한국 대기업들이 미국 내 공장건설을 중단하고 투자계획을 철회했으며 기술자와 전문인력을 본국으로 철수시키는 초강수를 두었다. 문제는 트럼프식 통상정책이 오히려 미국 산업을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대량실업의 지속과 인력공백의 연장, 생산기반의 붕괴 등 미국 산업계는 다면적인 충격을 만나고 있다. 한국 기업의 철수는 첨단기술과 숙련된 노동력이 빠져나가는 구조적 공백을 의미한다. 한국이 스스로 과대평가하거나 섣부른 승리감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 자본과 기술을 국경을 넘어 이동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신뢰, 노동환경 협조와 국제적 연대 없이는 ‘기술강국’의 지위도 한순간에 취약해질 수 있다. 이번 사태는 두 가지를 드러낸다. 첫째, 트럼프식 일방주의가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준다. 초강대국이라도 동맹을 협력 파트너가 아닌 ‘강탈 대상’으로 대하면 서로 간에 신뢰를 잃고 표류할 수밖에 없다. 둘째, 한국 기업들이 보여준 ‘NO’는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글로벌 경제질서가 일방적 압력에 쉽게 흔들리지 않음을 상징한다. 이에 더해 유엔을 방문 중인 이 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한국은 일방적 압력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내며 동맹도 대등한 파트너십 위에 서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국제무대에서의 이러한 태도는 기업의 결정과 맞물려, 한국이 더 이상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는 인식을 국제적으로 드러내며 강화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우려스러운 부분은 미국 스스로 ‘신뢰 자산’을 잃어가고 있는 점이다. 초강대국의 힘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국제 사회가 미국을 믿고 따를 수 있다는 신뢰, 그 무형자산이야말로 패권의 핵심이었다. 동맹을 압박하고 거래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방식이 이어진다면, 미국의 리더십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나아가 세계질서 자체가 불안정해지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이번 상황의 의미는 승리가 아니라 강압적 산업정책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자존심에 있다. 새로운 국제 질서를 향해 어떤 가치와 원칙을 세워나갈 것인가에 달려 있다. 트럼프의 무리한 일방적 요구를 거부하는 장면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겠지만, 앞으로 대한민국과 세계가 함께 만들어 갈 신뢰와 연대의 체계야말로 국제 사회가 주목해야 할 진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유엔 무대에서 드러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태도 또한 그 출발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나라의 이익을 위한 국가의 결정에는 국민의 평온한 일상을 지키려는 정부의 노력이 배어있어야 한다. 느닷없는 경제위기를 불러올지도 모를 미국의 부당한 압박에는 지혜롭게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게 맞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9-24

농심천심(農心天心)의 황금 혼문이 펼쳐지기를 바라며

최근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헌터스’가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면 백범 김구 선생이 떠오른다. 김구 선생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며 ‘높은 문화의 힘’을 갈망했었다. 그런 김구 선생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지켜본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실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높은 경제적·문화적 위상은 일제강점기를 힘겹게 버텨내고 해방 이후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오로지 국가 공동체의 경제발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의 희생 덕분일 것이다. 또한 국가 산업의 측면에서 짧은 기간 눈부신 성장의 바탕에는 저렴한 가치로 토지와 노동력을 제공하였던 대한민국 농업·농촌의 희생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농협은 지난 8월 창립 64주년을 맞아 인류 생존에 필수적인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업의 가치를 재조명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농민이 존경받으며 지속가능한 농업과 농촌 구현을 위해 ‘농민의 마음이 하늘의 뜻’이라는 농심천심(農心天心)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필자는 경북 시골에서 태어나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농협에 입사하여 어느덧 퇴직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다. 그동안 농업·농촌의 발전을 위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던 내 자신은 과연 농업의 가치와 중요성을 얼마나 이웃들과 공감하며 살아왔었는지 다시 한 번 뒤돌아보게 되었다. 농업은 인간 활동과 자연생태계 기능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생산물 수확과 더불어 그 외부효과로 경관 보전, 사회·문화 보존, 환경개선 등 다원적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정부, 지자체, 많은 농업 유관기관과 단체들이 국가 생명산업인 농업을 지켜나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024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과 미래전략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도시민들의 농업·농촌문제에 대한 관심도는 과거 10년간 13.8% 하락하였으며, 농업·농촌의 공익적 기능에 대한 인지도 조사에서는 “잘 모른다”라는 답변이 응답자의 66.7%나 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하니 농협에 근무하는 직원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다. 계속되는 가뭄, 폭설과 폭우, 저온 현상 등 해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변화와 보호무역주의, 국제분쟁은 식량 위기를 초래하고 우리의 식량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농업의 지속가능성은 우리의 생존과 연결되기에 우리 농업을 지키기 위한 관심과 지원은 다른 어느 산업 분야 보다 우선되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농심천심’의 근본은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농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24절기를 알아야 하고, 계절과 자연의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 농업은 자연과 더불어 생명을 탄생시키고 수확의 기쁨을 느끼게 하며, 인간의 생존과 삶의 질을 결정한다. 앞으로 전 국민이 우리 농업의 소중함을 알고 지속가능한 농업과 농촌 구현을 위해 ‘농심천심’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당부드리며, 오늘도 우리 농업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200만 농민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전경수 농협중앙회 대구본부장

2025-09-24

파크시티와 로버트 레드포드

지연씨와 두현씨는 내가 미국 유타주 프로보에 있을 때 가장 친했던 부부였다. 자주 안부를 묻고,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 주는 다정하고 상냥한 부부였다. 어느날 지연씨가 한 시간만 가면 예쁜 도시가 있는데 놀러 가자고 했다. 무조건 좋다며 채비없이 나섰다. 프로보는 높은 워새치산맥이 도시의 북쪽에 버티는 도시였는데, 그 산맥을 가로질러 갔다. 가을날의 빛 좋은 산 풍경도 예뻤고, 가는 길 도로에서 마주치는 험한 산줄기, 깊은 계곡, 그 어디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떨어지는 폭포가 있는 참 재미있는 드라이브 코스였다. 내내 감탄하면서 도착한 파크시티는 예상 밖의 별천지였다. 알록달록, 아기자기한 상점과 집들이 중심도로를 따라 즐비해 있었다. 집 모양은 거의 비슷한데 색깔만 달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형형색색의 집들은 모두 리조트였다. 곧 겨울이 닥치면 이 도시는 스키어들로 북적댈 거라고 했다. 아직 겨울이 아닌 평일 도시의 오후는 한산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중심가를 천천히 오르내리면서 도시 구경을 했다. 대부분 기념품 상점이었고, 곳곳에 동상이 있었다. 벤치 옆에 곰이 있고, 조금 더 가면 기념품 가게 옆에 광부의 동상, 또 조금 더 오르면 인디언 추장의 동상이 무심하게 있었다. 박물관이라 적혀 있는 곳을 들어갔다. 원래 이곳이 원주민이 있던 곳이었고, 개척 시대에 은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스키 경기가 여기에서 열렸다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과연 가게에서 나와 눈을 위로 둘러보니 도시를 둘러싼 산에는 온통 스키슬로프가 마치 혈관 같이 드러나 있었고 도시 위로 스키리프트가 전선처럼 빼곡하였다. 지연씨가 더 예쁜 데가 있다며 안내한 곳은 한 리조트였다. 자연친화적인 외관은 전혀 리조트 같지 않았다. 실내를 구경하면서 복도에 걸린 사진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선댄스영화제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었다. 선댄스 영화제라면 그 유명한 미국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창립한 독립영화제인데? 그때부터 나는 지연씨에게 영화배우인 그에 대해 신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실로 지연씨 부부는 탈북해서 미국에 정착하게 된 케이스였기에 할리우드 영화에 대해선 잘 모를 것이었다. 내가 그 배우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의 영화 중에서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몇 번이나 봤는지, ‘업 클로즈 앤 퍼스널’은 매년 학생들에게 영화감상을 시켰다는 둥, 그가 감독으로도 유명해서, ‘흐르는 강물처럼’은 아카데미상도 받았다는 얘기를 쉴 새없이 지껄였다. 그 로버트 레드포드의 유서 깊은 장소에 이렇게 와 있다는 나의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지연씨는 깔깔 웃으면서 나를 숲속의 한 바위 앞으로 안내했다. “그래서 여기 선댄스(SUNDANCE)라고 적혀있군요.” 나는 그 돌 옆에서 감개무량한 포즈를 취했다. 며칠 전 로버트 레드포드가 유타주 선댄스 그의 집에서 영면했다는 뉴스를 들으니 8년 전 그날이 문득 생각났다. 그를 추모하고 싶어 넷플릭스로 ‘흐르는 강물처럼’과 ‘밤에 우리 영혼은’을 다시 보았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9-24

사탕부케

여자는 족히 칠십은 되어 보였다. 옷은 스키니에 반짝이 스팡클이 달린 치마를 입었고 구두는 현란한 빨강색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며 갈아 신은 실내화 사이로 보이는 발톱에도 빨강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다. “정자”라고 하면 노인이 알 거라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이 그녀를 만나자 “오라버니, 오라버니 저예요. 정자” 라고 방문객이 큰소리로 말하자 어르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정자네. 우예 알고 왔노” 거의 이삼 십 분이 지나도록 호호 하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가 들고 온 사탕부케를 든 노인이 같이 나가서 식사를 하고 오겠다며 외출을 신청했다. 날이 날인만큼 잘 다녀오시라는 말과 보호자가 어르신을 다시 잘 모시고 오셔야한다는 규칙을 설명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차에 올랐다. 서너 시간 후에 돌아온 노인은 신이 나 있었다. 내가 누구냐고 묻자 “옛날 내가 젤 좋아하던 동생인데 오랜만에 만나니 너무 좋네. 같이 맛난 밥도 묵고, 묵혀두었던 이야기도 좀 풀어놓으니 이제 좀 살 것 같다.”라는 말을 던지고는 휘파람을 불며 자신의 방으로 가볍게 걸어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서 조차 그 동생과 한참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 날 온나, 같이 나가보자 하하하” 노인은 젊은 날 부동산을 통해 큰 부를 이루었다고 했다. 건물과 땅들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고 며느리가 불편해 할까봐 본인이 스스로 원해서 요양원을 찾아온 사람이었다. 그래도 남은 건물 하나에서 집세가 꼬박 꼬박 나오는 모양이었다. 칠년 전만 해도 그다지 상노인은 아니었기에 무료하고 지겨운 시간을 억지로 보내며 적응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TV를 켜두었다. 스케줄 따라 색종이로 무엇을 만들고 때론 떡을, 피자를 만들어도 그는 함께 하지 않았다. “머스마가 무슨 그런 일을 하냐” 고 도리어 짜증을 냈다. 다행히 하루 두 번 담배를 피우는 것이 그에게 큰 낙이었다. 밖으로 나가는 탈출구였으나 젊은 날 핀 담배로 인해 폐의 기능이 이삼십 프로밖에 안 남았다는 닥터의 진단에 삶에 낙이 없다고 낙담했다. 이틀 후 다시 정자씨가 찾아왔다. 옷은 첫날보다 더 대담해져 있었다. 이후 그녀는 자주 요양원을 찾았고 일상이 지겨웠던 노인에게는 봄날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겹고 지겨운 나날에 벚꽃엔딩 노래 같은. 주보호자께 외출 소식을 전하자 외출을 자제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그 여자 옛날부터 아버지랑 한때 어울렸는데 걱정된다고 했다. 하지만 거의 며칠이 멀다하고 둘은 땅을 본다며 외출했다. 자식들이 부탁한 사정을 이야기하자 버럭 화를 내며 “지그가 뭘 안다꼬. 내가 우째 지내는데 쓸데 없이. 내가 지그 살만큼 해줬으면 됐지” 그의 목소리는 노기로 가득했다. 오랜 시간 충족되지 않던 자유가 상황을 업그레이드 시킨 것인지 아프다거나 숨이 차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늘 ‘부동산을 보는데 내가 잘 보니까 데리고 가는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자신이 외출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어느 날부터 그들은 자주 만나지 않았다. 오라버니를 수시로 외치던 여인이 약속을 하고는 자꾸 어기는 모양이었다. 그녀를 못 만나며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헛헛한 마음을 이해하기도 했지만 전화기를 붙들고 “여보세요, 여보세요”라는 소리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자 화를 내며 전화기를 침대에 던지기도 했다. 어느 날 어르신을 뵈며 “건물의 세는 잘 나오고 있지요?”라고 묻자 “그거 정자한테 이전했다” 그 말에 놀라서 “파셨어요?”라고 묻자 “그냥 정자 앞으로 서류를 이전만 하고 당장 돈이 없다고 해서 돈 받을 곳이 있는데 그때 준다고 하더라” 는 믿기지 않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돈을 받고 팔아야지, 이전부터 하면 어떡해요“ 라고 얘기하자 어르신은 “괜찮다 걱정 안 해도 된다. 믿을 만하다”라고 했다. 하지만 뒤돌아서며 보니 자신의 머리를 치면서 “내가 미쳤지, 미쳤어” 라고 연신 같은 소리를 혼잣말로 하고 있었다. 걸어둔 사탕부케를 바라보는 노인을 슬쩍 지나치며 보았다. /배문경 수필가

2025-09-24

식어가는 아메리칸 드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뉴욕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자유의 여신상이다. 1886년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선물한 것으로 정식 명칭은 ‘세계를 비추는 자유’다.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의 상징이자 큰 희망을 품고 미국으로 오는 이민자들에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기도 하다. 미국의 정신이 담긴 자유와 기회 그리고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의 역사학자 애덤스가 1931년 출간한 ‘미국의 서사시’에서 처음 언급됐다. 그는 “미국인의 꿈은 모든 사람이 부유하고 풍족한 삶을 살고 개인의 능력과 성과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존재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미국으로 건너가는 많은 외국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곳으로 여기는 것이 곧 아메리칸 드림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민자들이 꿈꾸는 만큼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불평등, 인종차별, 이민자 소외, 계급의 고착화 등 미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탓이다. 최근 미국의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70%는 “성실히 일하면 성공한다”는 말에 대해 부정적 답변을 했다고 한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말은 이젠 옛말이 됐다는 미국 사회 분위기를 전하는 조사다. 트럼프 미국 정부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인 미국 전문직 취업 비자(H-1B) 수수료를 현행보다 100배를 올려 받기로 했다. “미국인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이유에서다. 트럼프발 자국 우선주의가 아메리칸의 꿈을 역사의 뒤안길로 몰아넣고 있는 모양으로 느껴진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9-23

위기의식 커지는 국힘, 기댈 곳은 민심뿐

권성동 의원을 시작으로 당 주요 인사들에 대한 강제 수사가 본격화될 것이란 위기의식이 확산하면서 국민의힘이 뒤숭숭한 분위기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23일 “의원들 두세 명만 모여도 어김없이 특검 수사 얘기가 나온다”고 했다. 최근에는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충돌’ 사건으로 기소된 송언석 원내대표를 비롯해, 나경원·김정재·윤한홍·이만희 의원에게 검찰이 의원직 상실형의 실형을 구형하자 당내 긴장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현재까지 내란·김건희·해병대 특검의 수사 대상에 오른 국민의힘 현직 의원만 10여 명에 이른다. 3대 특검이 이미 압수수색 등 강제 수사를 진행한 현역 의원은 권성동 의원 외에 TK 출신 추경호(달성)·임종득(영주·영양·봉화)·조지연(경산) 의원, 그리고 윤상현·이철규·김선교 의원 등이다. 이 중 이철규·조지연 의원은 참고인 신분으로 압수수색을 당했고, 나머지 의원들은 피의자 신분인 것으로 전해졌다. 내란특검은 추경호 전 원내대표(12·3 비상계엄 당시 윤석열 전 대통령과 통화한 뒤 의원총회 장소를 국회에서 당사로 바꿔 계엄 해제 표결을 방해했다는 의혹) 외에도 당시 국회 원내대표실 안에 있었던 의원 모두를 어떤 방식으로든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건희 특검은 지난 2022년 보궐선거 공천 개입과 관련해 당시 공천관리위원장이었던 윤상현 의원의 사무실과 자택 등을 압수수색했고, ‘양평고속도로 노선 변경 특혜 의혹’과 관련해선 김선교 의원을 출국 금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채 상병 특검은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의 ‘구명 로비’ 의혹으로 임종득 의원을 수사하고 있다. 특검에 더해 행정안전부는 서울·부산 등 국민의힘 소속 광역단체장에 대한 비상계엄 가담 의혹 진상 조사에도 착수한 상태다. 수사 향방에 따라 특검 칼날이 당 전반을 겨눌 수 있는 상황이다. 국민의힘으로선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21일 국회에서 열린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국민의힘과 민생은 함께하지만 내란 관련 세력에게 관용은 없다. 내란과 민생을 철저히 분리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21일 국민의힘이 동대구역 앞에서 개최한 ‘야당탄압·독재정치 국민 규탄대회’는 민주당의 사법부 압박(조희대 대법원장 사퇴요구)이 트리거가 됐겠지만, 특검 수사에 대한 불안감도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국민의힘의 산실인 대구에서 열린 장외집회는 ‘국민적 분노’로는 연결되지 못했지만 보수진영 지지자들을 결집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됐다. 앞으로 추석 연휴 전까지 대전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면서 강도 높은 장외투쟁을 이어간다니 어떤 성과로 귀결될지 주목된다. 다만, 국민의힘이 명심해야 할 부분은 장외투쟁이 오히려 민심에 마이너스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대구집회에서도 일부 드러났지만 성조기를 들고 ‘윤 어게인’을 외치는 극우세력이 집회에 섞여 들 경우, 국민 눈에 어떻게 비칠지도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국민의힘이 지금 기댈 곳은 민심밖에 없지 않는가.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09-23

茶馬古道를 거닐며

어딘가 떠나고 싶고 누군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비로소 가을이라 했던가. 풀벌레 소리 청아해지는 만큼 하늘은 더욱 높푸르러 가고 그야말로 덥지도 춥지도 않은 때, 서늘한 바람따라 자연을 벗삼거나 어디론가 훌쩍 길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어쩌면 옛적 차마고도(茶馬古道)의 마방들에게도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이 차(茶)를 팔기 위해 길 떠나기 최적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말이나 노새를 이용해 중국 운남성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사고파는 상인을 가리키는 ‘마방(馬幇)‘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온갖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기꺼이 고산준령으로 향하는 길을 떠났으리라. 짧게는 3개월, 길게는 수년 만에 되돌아오는 말몰이꾼들에게 있어서의 차마고도는 삶의 의지와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숙명적인 생계의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차마고도는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환하기 위해 개통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주요 교역로로 중국과 티베트, 네팔, 인도를 잇는 육상 무역로이기도 하다. 즉 차와 말을 교역하던 길로써 설산과 아찔한 협곡을 연결하는 이 길을 통해 운남의 명물인 차 이외 비단의 수출로였으며 말ㆍ소금ㆍ약재ㆍ곡식 등의 다양한 물품의 교역이 이뤄져 실크로드의 전성기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 고대의 무역로였다. 그러나 생존과 생계를 위해 단순히 차와 말을 사고파는 물물교환의 거래나 교역의 길만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도시와 나라가 연결되며 문화의 교류와 상업활동의 교역을 이뤄주는 차마(車馬) 무역의 역사적인 길이 되어 여러 이민족의 문화와 종교와 지식이 전파, 교류되면서 나라의 운명까지 바꿔 놓은 질곡의 길이기도 했다. 천 길 낭떠러지의 협곡과 5000미터 이상의 험준한 산을 넘어야 했기에 새나 쥐가 다니는 조로서도(鳥路鼠道)라고도 하는 차마고도는 세상에서 가장 좁고 가파르며 힘든 길이지만, 주변 풍광이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운 길로 드러나면서 세계 3대 트레킹 코스로 불릴 정도로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그러한 산길과 벼랑길로 이뤄진 차마고도를 직접 걸으며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느낌은 어떠할까? 코스모스와 산양이 반기는 해발 2500여 미터의 차마객잔~중도객잔~관음폭포까지의 차마고도 트레킹 내내 이어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은, 필설로 못다할 감흥으로 다가왔다. 병풍같이 둘러쳐진 옥룡설산 허리의 운무가 선계와 속세를 구분 짓는 듯 걷혔다 피어나기를 반복하고, 까마득한 발 아래의 산비탈에 다닥다닥 아찔하게 붙어 있는 집들과 구절양장으로 이어지는 비탈길 그 밑으로는, 깎아지른 호도협 협곡의 세찬 물굽이가 옥룡(玉龍)처럼 꿈틀대며 금사강의 유장함으로 흐르고 있었다. (사)일월문화원에서 주관한 해외문화탐방으로 올해는 중국 서남쪽 변경지역에 26개 소수민족의 다채로운 문화와 풍부한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색상으로 표현되는 칠채운남(七彩云南)의 길을 다녀온 것이다. 그 길 가운데 차마고도 행보는 그야말로 무한한 즐거움(樂無窮) 그 자체였다고나 할까? 차마고도낙무궁은 호도협 물굽이에 옥룡설산의 위용과 함께 오래도록 뇌리에 남을 것 같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9-23

“울릉도는 망하지 않았다"…울릉도 망치는 것은 삼겹살 아닌 왜곡된 프레임

“드디어 울릉도 망했다” 구독자 49만 명을 가진 한 유튜버가 내건 제목이다. 그는 제작 영상에서 바가지요금, 불친절, 삼겹살 논란을 이유로 관광객이 절반 가량 줄어들 것을 예고했다. 이 영상은 하루 만에 수십만 조회 수를 기록하며 확산됐다. 일부 언론도 “울릉도 이러다가 망한다”는 등 검증없이 잇따라 추측성 기사를 쓰면서 ‘울릉도 몰락’이라는 프레임을 덮어씌웠다. 과연 그럴까. 실제 울릉도의 관광통계를 들여다보면 그와 정반대의 현상이 확인된다. 지난 6월 말 삼겹살 파동이 일었지만 7월 울릉도 관광객은 3만9864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 보다 16.3% 늘었다. 울릉썬플라워크루즈 운항 중단도 과거의 적자 누적이 원인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더욱이 울릉썬플라워크루즈는 운항을 시작한 이후 올해 가장 많은 관광객을 수송하기까지 했고, 삼겹살 파동 이후 지난 여름 성수기 두 달(7~8월) 동안의 이용객은 지난해보다 19.2%나 증가했다. 이런 수치는 한때 논란이 된 주민의 바가지요금·불친절·비곗덩어리 삼겹살과는 전혀 상관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유트버들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울릉을 무차별 폭격해댔다. 마치 울릉 주민들 때문에 관광객이 줄어 들었고, 그로 인해 여객선이 경영난으로 운항을 멈춘 것 처럼 비치게 하려고 온갖 장난질을 했다. 물론 몇해 전 보다 전반적으로 관광객이 감소한 것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교통’과 ‘환경’이라는 요인으로 발생했다. 세계 최고 속력을 자랑하던 엘도라도 익스프레스호가 기관고장으로 운항을 중단했고, 코로나19 이후 폭발한 해외여행 수요가 결정적이었다. 이런 복합요인을 무시한 채 일부 유튜버와 언론은 ‘울릉도 주민 탓’으로 몰아갔다. 울릉 주민들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울릉도는 지질공원 팸투어, 문화·역사 체험, 해양관광 프로그램 등으로 관광 콘텐츠를 확장하며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 와중에 ‘망했다’는 자극적 제목 하나는 그간 쌓아온 울릉군과 주민들의 노력을 송두리째 흔든다. 왜곡된 프레임의 위험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자극적 콘텐츠가 낙인효과를 키운다. 부정적 이미지가 외부에 각인되면, 다시 회복하는 데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든다. 관광은 신뢰 산업이다. 울릉도는 ‘망했다’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다’는게 진실이다. /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25-09-23

허위신고엔 더 무거운 처벌을

학교나 백화점처럼 다중이 밀집된 곳에 폭탄이 설치됐다는 허위 신고를 하거나, 특정한 공간에서 사람을 죽이겠다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 공간에 게재하는 행위는 용서 받기 힘든 범죄다. 이런 악의적 거짓말은 필연적으로 공권력의 낭비를 부른다. 앞서 언급한 허위 신고나 거짓 게시글이 문제가 될 때면 사회 안전과 민생 치안에 집중해야 할 경찰 인력이 적지 않게 동원돼 수색과 검문에 나서야 한다. 아무 소득 없는 헛수고에 국민들의 귀한 세금이 낭비되고 있다. 반복되는 허위 신고와 인터넷 거짓 게시글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는 엄한 처벌이 필요하다. ‘화풀이나 재미로 한 행동이 폐가망신을 부를 수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하는 것. 최근 여러 사람이 반길만한 판결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2023년 신림역에서 여성들을 살해하겠다고 허위 살인 예고 글을 올린 최모(31)씨에게 ‘4300만원을 정부에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이번 소송은 법무부가 다중 살인사건 대비를 위해 투입된 인적·물적 손해에 대해 최씨의 책임을 물으며 시작됐다. 최씨가 사람을 죽이겠다는 글을 올린 후 체포될 때까지 703명의 경찰력이 동원됐다. 낭비된 시간과 인력을 감안하면 4300만원도 큰 배상액이라 보기 어렵다. 이번 사례는 정부가 살인 예고 글을 올린 범죄자를 상대로 민사 책임을 물은 소송에서 나온 첫 번째 판결이다. 이제 판례가 생겼으니 향후 열릴 유사 사건에 대한 재판도 이 판결에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국민은 허위 신고와 악의적 거짓 게시글엔 더 무거운 처벌이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다. 법원은 이런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9-22

선물과 뇌물의 경계, 마음속에 답이 있다

“선물을 잘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한 일이나 선물을 인정해 주고, 그 가치를 잘 살려 주고, 즐겨 주고, 좋아해 주는 것이다.”(최송목의 저서 ‘사장의 품격’ 중에서)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서 선물 문화에 대한 고민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누군가의 정성이 담긴 선물은 분명 마음을 따뜻하게 하지만, 그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선물은 뇌물로 변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그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해 갈등과 불편함을 반복해 왔다. 2016년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제정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했다. 공직 사회와 기업을 흔들던 ‘명절 선물세트 관행’은 이제 법의 테두리 속에서 사라졌다. 한우·굴비·상품권이 오가던 시대에는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늘 불편한 마음을 감췄다. 받는 이는 ‘대가를 치러야 하나’ 하는 부담을, 주는 이는 ‘관행이니 어쩔 수 없다’는 자기합리화를 반복했다. 이때 선물은 이미 뇌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김영란법은 선물과 뇌물 사이의 모호한 공간을 잘라냈다. 5만 원, 10만 원이라는 가액 기준은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다. 이로써 주는 사람은 ‘여기까지는 괜찮다’는 확실한 선을 긋고, 받는 사람은 ‘거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을 얻었다. 제도의 도입은 곧 청렴 문화로 이어졌다. 이제는 선물을 받는 순간 ‘혹시 법에 저촉되지 않을까’ 하는 자기 검열이 자동으로 작동한다. 제도 시행 이후 공직사회의 풍토가 맑아졌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불필요한 의심과 눈치가 사라졌고, 선물 본래 의미가 조금은 되살아났다. 선물은 결국 받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관계를 따뜻하게 만드는 삶의 지혜다. 하지만 대가를 떠올리게 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뇌물이다. 선물과 뇌물의 경계가 분명해질수록, 주고받는 풍경은 덜 화려해졌지만 사회는 더 건강해지고 있다. /임창희기자 lch8601@kbmaeil.com

2025-09-22

셀프 세족례

언제부턴가 새 버릇이 생겼다. 아니, 버릇이라기보다 새로 하게 된 ‘셀프 세족례(洗足禮)’라고 하는 게 낫겠다. 새 셀프 세족례 전에는 발을 손으로 만지며 씻는 일은 뜸했다. 따뜻한 물에 발을 불려 굳은살을 각질 제거 돌로 밀 때나, 뗄 거나 씻을 것이 묻었을 경우 외는 거의 발을 만지지 않았다. 보통은 바가지로 물을 양발에 한두 번 붓고 말거나, 물을 부으면서 한쪽 발바닥으로 다른 쪽 발의 등을 몇 번 문지르는 정도였다. 젊은 날부터 오랫동안 성당의 봉사자 활동을 하면서 여러 번 세족례를 받아보기도 했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은 모범을 따라, 성목요일 미사 때 사제가 선정된 12명 신자의 발을 씻는 예식이 세족례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알면서도 형식적 예식으로 치부하고 실생활에서 몸과 발, 여러 지체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 안다는 것과 깨닫고 행하는 삶의 거리가 북극성만큼이나 멀었다. 나이 들어가며 피부가 건조해지는 걸 느끼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때, ‘몸에서 아픈 소리가 난다’라고도 했다. 젊은 날 어른들에게서 이런 소리를 들을 때는, 다른 나라 얘기처럼 그냥 흘려보냈었다. 한데, 어느 날 자신에게도 닥친 문제라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이 느끼는 바가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자기 몸이 여러 지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비로소 바라다보았다. 이 무렵부터 발이 새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지체처럼 발을 두 손으로 꼼꼼히 씻었다. 발이 자신을 위해 고난을 겪은 흔적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발가락 사이엔 때가 많이 끼었고, 뒤꿈치는 굳은살이 늘어났으며, 박힌 티눈도 커진 걸 새삼 알아챘으니 말이다. 때, 굳은살, 티눈 모두가 온몸의 압박을 견뎌내며 죽어간 발의 세포들일 터. 발을 씻고 나면, 끝으로 맑은 물로 발을 헹구며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것이 ‘발을 다른 지체들처럼 대접하는 행위 곧, 셀프 세족례’다. 가장 낮은 곳에서, 온몸을 떠받치고 걸어가야 하는 버거운 몫을 말없이 해내는 존재가 발이다. 이유 없이 천대받기도 하는 존재도 발이다. 가슴에서 맨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까. 만일, 발이 없다면 인간은 문명은커녕, 생존조차도 못했을 터다. 발 못 쓰는 장애우를 보면 금방 그 소중함을 알고도 남는다. 사람이 여러 지체로 이루어진 생명 유기체라면, 국가는 사람으로 조직된 유기체다. 따라서, 국가도 지체들이 있기 마련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의 지체가 서로 이어져 유지, 발전하는 유기체가 국가이기에 생명 유기체와 닮았다. 국가의 지체는 지도층, 관리층. 감독층, 실무층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발에 해당하는 지체는 실무층이며 근로자, 농어민, 소상공인 등이 그들이다. 국가란 몸의 발 역할을 감당하는 실무층이 무시되거나 소외당하고 저소득 구조에 가난하다면, 이는 자유민주주의 복지사회가 아니다. 따라서 보편복지가 아니라, 꼭 필요한 저소득층을 도와주고 돌보는 선별복지가 요구된다. 셀프 세족례가 발의 소중함을 알아주는 데서 나왔듯이···. /강길수 수필가

2025-09-22

쇼펜하우어 VS 니체

쇼펜하우어는 욕망과 권태가 인간 실존의 두 얼굴이라 보았다. 욕망은 삶의 본질이자 고통의 원인이요, 권태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드러나는 삶의 공허이다. 욕망이 충족되면 권태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이렇듯 욕망과 권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영원히 회귀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묘비명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새겼다. 사실일지는 모르지만, 카잔차키스 자신은 욕망하지 않았으므로 두렵지 않았고, 그래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욕망하지 않으면 불안도 없다. 고통의 뿌리가 욕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이러한 욕망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생존에의 의지’의 핵심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Das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1819.)에서 밝힌 의지는, 생을 추동케 하는 맹목적 충동이자 끊임없는 욕망이다. 싯다르타의 고성제(苦聖諦. 삶이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쇼펜하우어가 삶에의 맹목적 의지(욕망)로 치환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더라도 ‘권태라는 악마의 등장’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권태는 단순한 지루함이 아니라, 존재가 아무런 욕망을 하지 않을 때도 만족하지 못하는 심리 상태이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권태는 단순한 무료함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 피로와 무의미’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라 보았다. 악의 꽃 마지막 부분에서, 권태를 괴물로 형상화하여 탐욕, 방탕, 허영을 능가하는 궁극의 악으로 규정하였다. 인간은 권태 속에서 공허를 견디지 못하고 술, 마약, 매춘, 심지어 폭력, 죽음까지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보들레르에게 권태는, 악의 꽃을 피우는 ‘토양’인 셈이다. 욕망과 권태의 윤회 속에서 인간은 허덕일 수밖에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진단에 대하여 니체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라 쏘아 부친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억제하거나 부정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니체에게는 자기실현과 자기극복의 특급열차가 된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존재 자체의 무의미성이자 삶의 고통과 허탈감으로 드러나는 권태라는 이름의 악마는, 니체에게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삶을 자극하는 천사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욕망과 권태로부터 구원받는 방식도 달라진다. 쇼펜하우어는 금욕, 관조, 욕망과 권태의 줄임과 제거를 주장하지만, 니체는 자기 극복, 새로운 가치창조, 아모르파티를 통해 욕망과 권태를 나의 일부로 포용하여 적극 수용하길 권한다. 예술의 경우는, 쇼펜하우어에게는 고통의 세계로부터 일시적 해방 또는 위안의 도피처이지만, 니체에게는 삶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적극적 힘의 놀이터이다. 두 사람이 대하는 욕망과 권태에 대한 태도와 해결 방안 중 누구 것이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니체를 따른다. 나로부터 분리하여 처리하여야 할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영원히 함께하는 동반자요, 내 삶의 귀한 손님으로 생각하자. 안녕! 반가워~ 나의 욕망과 권태야! /공봉학 변호사

2025-09-22

작가 윤흥길의 작은이모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다. 누구나 어렵다. 돈 많은 사람도, 없는 사람도 크고 작은 차이는 있어도 어렵다. 어려운 삶을 그 무게를 덜며 사는 법을 익힌 사람은 지혜롭다. 그래도 가난한 이들에게 천국이 가깝다는 말은 옳다고 생각된다. 이렇게도 생각한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들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 성스러움이 그네들의 삶의 무게를 덜어주지는 않겠지만, 우리들의 삶 전체를 위해서는 이 생각이 없어서는 안되겠다. 소설 공부가 어찌어찌해서 윤흥길 작가 쪽으로 흐르는데, 문제작 ‘장마’며,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를, 해석을 달리해 볼 방향을 찾는다. 이 공부는 동학과 증산교와 기독교를 들락달락해야 한다. ‘장마’에서 마당에 나타난 구렁이를 죽은 삼촌의 혼령이 씌운 것으로 보고 집안일은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네” 가야 할 데로 가라는 그 달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가 문제다. 소설만으로 보이지를 않아 작가가 쓴 산문집 ‘텁석부리 하나님’(1993)을 찾아 읽는다. 거기 작가의 작은이모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은이모의 남편 되는 분은 법원에서 일했는데, ‘인공’ 치하에서 잠시 외출했다 실종되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작은이모는 폐결핵까지 얻어 어린 작가의 집에 깃을 들여 함께 살았다 한다. 산문집을 통독하다, 작가의 정신세계가 기독교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음을 쉽게 깨닫게 된다. 단편소설 「집」을 보면 작가는 어려서 참 지지리 궁상도 그런 궁상은 없었던 것 같고, 정직하면서도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힘겨운 성장통과 씨름도 잦고 컸다. 그 시절, 작은이모의 깊은 신앙심이 작가를 인도해 주었더라고 한다. 가난하고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잔잔한 수면 같은 고요한 마음 세계 그대로였던 작은이모의 곱디고운 모습이 어린 작가를 헛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끌어주었다고 한다. 마지막 숨을 거두고도 마치 산 사람처럼 평화롭고 미소마저 어려있던 작은이모의 모습은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도 너무나 ‘처연하게’, 그러면서 아름답게 상상되는 것이었다. 이 작은이모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얻어 깨달은 것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작은 사람도, 세속에 크게 빛나지 않는 사람도, 고통이나 슬픔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크고도 좋은 힘이 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또 사람은 애써 크고 좋은 사람이 되려 할 것도 아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일, 이 충만함으로 늘 기쁨이 어린 삶을 만들어 가는 일이야말로 누구나의 삶이 이루어내야 할 크나큰 좋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일이 아니며, 또 종교만의 일도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윤흥길 작가의 작은이모는 어린 윤흥길에게 버티는 힘을 선사한 데 머무르지 않고, 작가의 작품에 살아 읽는 이들을 움직이고, 또 그 힘이 멀리 소설 공부하는 사람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다. 고요한 충만함, 내적인 충만함이 무엇인가를 다시 곱씹어보는 새벽에서 아침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9-22

맑은 콩나물국에 비친 무른 콩나물

여행에서 돌아오니 냉장고의 콩나물이 물러 있다 무른 콩나물은 버리고 먹을 만한 콩나물은 골라 그릇에 담는다 버려야 할 것들까지 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새벽의 노동 속에서도 계절이 흐르고 나는 가족을 이루었구나 좁고 기다란 식탁에는 김이 나는 콩나물국 고춧가루도 치지 않아 얼굴이 비치는 어느 아침 한 식구는 건더기를 모두 남기고 한 식구는 국의 절반을 버리고 국이 식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는 식구도 있는데 맑은 국물 위의 떠도는 얼굴들은 모두 매운 점심을 지나 어느 무른 저녁으로 갈 터이니 버리려던 콩나물의 절반을 얻은 것이 기쁘고 오늘은 가족이 모두 콩나물국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서 있던 그 새벽의 고요가 기뻤으므로 손에 가득한 콩 비린내로 얼굴을 쓸며 해가 어디쯤에 가고 있는지 창밖을 내다본다 ―심재휘, ‘맑은 콩나물국’ 전문 ‘두부와 달걀과 보이저’(2025, 문학과지성사) 심재휘 시인이 그려내는 새벽 풍경에는 콩나물과 식구라는 두 가지의 언어가 있다. 기실 콩나물과 식구는 두 개의 기표이면서 하나로 수렴된다고 하겠다. 여행에서 돌아온 화자가 냉장고에서 발견한 콩나물은 “물러 있다” 여기에서부터 화자의 새벽 노동은 시작된다. 이때 새벽이라는 물리적 시간과 식탁이라는 장소성은 ‘식구’라는 기표와 등가성을 가진다. 이들은 한 식탁에 동참하거나 늦잠으로 불참하며 화자가 골라내는 “먹을 만한 콩나물”과 “무른 콩나물”로 병치 된다. 또한 “버려야 할 것들까지 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화자의 태도에서 가족을 챙기며 돌보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한국인의 밥상에 자주 오르는 콩나물은 김치만큼이나 밥과 근친하는 식재료일 것이다. 여기서 콩나물은 밥처럼 자주 먹어도 물리지 않는 일상어가 된다. 말하자면 콩나물국은 매일 봐도 물리지 않는 식구와 같다. 이른 아침 화자의 콩나물국은 “고춧가루도 치지 않아 얼굴이 비치는” 맑은 이미지를 표상한다. 화자의 식구들이 콩나물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여느 가족의 일상적인 아침 풍경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가령 “한 식구는 건더기를 모두 남기고” “한 식구는 국의 절반을 버리고” 심지어 “국이 식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는 식구도 있는데”처럼 식구들이 여럿인 가족의 일상은 이 풍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화자가 궁구한 새벽 노동의 극진함과 달리 가족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아침 식탁을 맞는다. 이럴 때 ‘맑은’ 콩나물국은 생활인으로서의 일과 속 지난함과 곤함을 되비추는 거울과 같다. 화자의 말처럼 콩나물국에 비친 얼굴들은 “매운 점심을 지나 어느 무른 저녁으로 갈 터”이니까. 화자가 그토록 버리지 않으려고 애쓴 ‘무른 콩나물’과 식구들의 ‘무른 저녁’ 역시 등가이다. 결국 제목 ‘맑은 콩나물국’의 외현적 형식은 ‘무른 콩나물’이 표상하는 심상을 수반하고 있다. 이를테면 “어디쯤에 가고 있는지 창밖을 내다보는” 화자의 시선이 좇는 ‘해’ 역시 일과를 따라 움직이는 ‘식구’와 다름이 아니니 말이다. “새벽의 노동 속에서도 계절이 흐르고 나는 가족을 이루었구나”라는 언술에서 알 수 있듯 앞서 서술된 콩나물과 같은 값의 기표들은 유기적인 성격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어쨌든 화자는 “버리려던 콩나물의 절반을 얻은 것이 기쁘고” 무엇보다 “오늘은 가족이 모두 콩나물국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흡족하다. 하여 “생각하며 서 있던 그 새벽의 고요가 기뻤”다고 고백한다. “손에 가득한 콩 비린내로 얼굴을 쓸며” /이희정 시인

2025-09-21

숲이 숨 쉬는 봉화, 치유산업으로 미래를 열다

봉화는 현재 지방소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치유산업 육성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예로부터 봉화는 산림과 농업, 관광 자원이 풍부한 청정지역으로, 이러한 자원을 바탕으로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치유산업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꾸준히 모색해왔다. 날로 감소하는 인구와 고령화, 수도권 집중화로 인한 지방소멸 위기 앞에서 이제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지속가능한 지역 성장 전략을 마련해야 할 때다. 단기적 대응에 머무른다면 미래 세대에게는 쇠퇴한 고향만 남길 수 있다. 이에 봉화군은 지역 자원의 특성과 정체성을 최대한 살린 ‘봉화형 치유산업’을 발굴해 나가며, 새로운 도전 속에서 지역의 활로를 찾아가고 있다. 치유산업은 단순한 서비스 산업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돌보고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산업이다. 경제적 효과를 넘어 사회적 안정과 주민 삶의 질 향상에까지 기여할 수 있는 다층적 산업으로, 일자리 창출·청년 인구 유입·지역경제 활성화 등 종합적 파급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숲이 가진 치유의 힘은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산림의 다양한 자연환경 요소를 활용한 치유 활동은 면역력 강화, 스트레스 완화, 정신 건강 개선 등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주며, 치유산업의 핵심 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봉화는 백두대간의 정기를 품은 천혜의 자연을 바탕으로 산림치유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최적지다. 최근 봉화군은 이러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사람과 자연이 함께 숨 쉬는 치유 공간, 문수산산림복지단지를 개장하고 본격 운영에 들어갔다. 문수산 자락에 조성된 이 단지는 산림휴양·교육·치유 기능이 융합된 종합 산림복지 거점으로, 단순한 휴식 공간을 넘어 봉화형 치유산업의 상징적 모델로 자리매김할 준비를 하고 있다. 문수산산림복지단지는 중심지구, 체험·교육지구, 산림치유지구, 자연휴양림지구 등 4개 권역으로 나뉜다. 중심지구에는 산림치유센터가 있어 건강측정실, 족욕체험실, 명상치유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치유 서비스를 제공한다. 체험·교육지구는 유아와 아동을 위한 자연친화적 학습 공간으로, 아이들이 오감을 통해 자연을 느끼며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산림치유지구는 명상숲, 힐링치유길, 요가숲 등 테마별 체험공간이 마련되어 방문객이 일상에서 벗어나 심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자연휴양림지구는 숙박과 야영시설을 포함해 가족 단위 관광객이 편안한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됐다. 정식 개장한 지 석 달여 만에 단지는 이미 방문객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다양한 연령층이 치유와 휴양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만족도를 표현하고, 이 경험이 입소문을 타면서 봉화의 새로운 관광 브랜드로 부상하고 있다. 이는 봉화가 지향하는 ‘치유산업 선도도시’ 비전을 구체화하는 첫 성과라 할 수 있다. 앞으로 봉화군은 문수산산림복지단지를 단순한 휴양공간을 넘어 산림치유산업의 새로운 모델을 구현하는 핵심 거점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전문 인력 양성과 프로그램 고도화, 디지털 치유 콘텐츠 확산을 통해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청년층이 찾아오는 활력 있는 지역사회를 만들어갈 것이다. 또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봉화정자문화생활관, 봉화목재문화체험장 등과 연계한 산림관광 네트워크를 구축해 봉화만의 독창적인 장기체류형 관광 모델을 개발하고자 한다. 이는 단순한 관광을 넘어 ‘머물고 싶은 도시 봉화’로 나아가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박현국 봉화군수 더 나아가 봉화군은 치유산업을 국가 정책과도 연계해 전국적 모범사례로 확산시킬 것이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안정적인 소득 기반을 제공하고, 외부인에게는 봉화만의 치유 문화를 체험할 기회를 선사함으로써, 지역 정주 여건 개선과 인구 유입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치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몸과 마음이 지친 현대인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가치이며, 동시에 지방이 살아남기 위해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이다. 봉화군은 산림치유라는 미래 산업을 통해 소멸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자 한다. 문수산산림복지단지가 봉화형 치유산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 지역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가길 기대한다. 더 나아가 봉화군이 ‘치유산업 선도도시’라는 당찬 비전을 실현하며, 사람과 자연이 함께 웃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2025-09-21

가짜뉴스? 민주당이 진원지다

민주당이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가짜뉴스에 대해 15~20배에 이르는 ‘징벌적’인 손해배상을 물리는 내용이다. 1천억 원의 매출을 올리던 고 김영애 씨의 황토팩이 KBS의 ‘소비자 고발’ 오보로 파산했다. MBC의 광우병 보도는 정권을 무너뜨릴 기세로 전국을 뒤집어 놓았다. 스카이데일리라는 인터넷신문은 중국인이 부정선거에 개입했다는 조작뉴스로 극우파 시위에 기름을 부었다. 그에 합당한 책임을 졌느냐 하는 문제 제기가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다. 노골적인 사실 조작이 횡행하지만, 정치인이 앞장서 이를 이용한다. 내 편 가짜뉴스는 상을 주고, 상대편이면 ‘징벌’하는 식이라면, 언론자유를 핍박하고, 권력에 대한 비판에 재갈을 물릴 가능성이 크다. 청담동 룸살롱 폭로가 대표적이다. 김의겸 당시 민주당 의원은 국정감사장에서 청담동 룸살롱 의혹을 터뜨렸다. 유튜브 채널 ‘더탐사’(옛 열린공감TV)가 한 첼리스트의 통화 녹음을 근거로 잇달아 의혹을 부풀렸다. 의혹의 당사자였던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의 해명, 첼리스트의 경위 설명으로 오보임이 확인된 이후에도 한동안 물고 늘어졌다. 지난달 1심에서 관련자들이 한 전 장관에게 8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논란 속의 김의겸 전 의원을 이재명 대통령은 새만금개발청장으로 임명했다. 정치적 공격수로 오명을 감수하면 상훈이 있다는 전례를 만든 셈이다. 김어준, 전한길 유튜브가 논란의 중심이다. 최근에는 열린공감TV가 조희대 대법원장이 한덕수 전 총리와 비밀 회동했다고 보도해 정치권이 시끄럽다. 열린공감TV가 지난 5월 4인 회동의 녹음 파일을 들려줬다. 그 녹음에서 조 대법원장이 ‘이재명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오면 알아서 처리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대법원이 이 대통령 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는 게 보도의 요지다. 이어서 서영교 민주당 의원이 법사위 청문회에서 이 녹음을 틀었다. 최근 부승찬 민주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 문제를 다시 꺼냈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조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대통령실도 이에 동조하는 듯한 발표를 했다가 발을 뺐다. 그런데 이 영상 앞부분에 ‘해당 음성은 AI로 제작된 것으로, 특정인들이 실제 녹음한 것이 아님을 알려 드린다’라는 자막이 붙어있다. 그런데도 서 의원은 ‘제보자가 특검에서 증언할 용의가 있다고 한다’라며 굽히지 않는다. 정청래 대표는 “억울하면 특검 수사 받고 결백을 밝히면 될 일”이라며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유튜버와 욕받이 정치인 한 사람이 던지면, 일제히 공세에 나섰다가, 슬그머니 빠지는 행태가 반복된다. ‘사실이라면…’ ‘억울하면…’이라며 책임지지 않을 ‘…라면’식 흠집 내기다. 가짜뉴스를 징벌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민주당이 검찰을 비난하는 대표적 사례가 ‘논두렁 시계’다. 권양숙 여사가 받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수사 내용을 흘려 모욕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검찰을 대신해 수사하는 특검은 얼마나 달라졌나. 연일 확인되지 않은 추정까지 쏟아내지 않나. 문재인 정부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사퇴시키고, 47개 죄목으로 기소했다. 그런데 5년 만인 지난해 1월 1심에서 모두 무죄가 났다. 오는 11월 항소심 판결이 있다. 무죄건 아니건, 대법원장은 불명예 퇴진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법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윤석열 정부에서도 2년 가까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는 조희대 대법원장과 조금도 같이 있기 힘든 모양이다. 정파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대법원장은 누구였나. 정청래 대표는 조 대법원장이 “계엄에 침묵하고 서부지법 폭동에 침묵했다”라면서 “깨끗이 물러나라”라고 요구했다. 지귀연 부장판사가 윤석열 전 대통령을 석방했을 때도 입장을 밝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 양 전 대법원장의 핵심 죄목 중 하나가 ‘재판개입’이다. 이제 와 대법원장이 하급심의 재판에 일일이 개입하라는 건가. 집권당인 민주당이 가짜뉴스의 진원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9-21

국익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국과 미국은 대(對) 한국 상호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고, 한국이 총 3천500억 달러(486조 원)를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구체적 이행 방안에 서로 의견 차이를 드러내며 협상이 난황을 보인다. 이미 문서로 합의한 일본은 16일부터 자동차·부품 관세가 15%로 낮아져 한국산 자동차가 일본산에 비해 비싸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에 근무하는 우리 근로자들이 비자 문제로 죄인처럼 손발이 묶인 상태로 연행되어 구금된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것도 한미 정상 간의 회담이 이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미국이 한국을 진정한 동맹과 경제 파트너로 생각하는지 의심이 든다. 상도의를 벗어난 미국의 요구는 안보를 볼모로 온갖 요구를 하고 있다. 주한 미군 부지를 달라고 요구하고 투자금을 현금으로 부담하고 투자에서 얻은 수익금의 90%까지 미국이 갖겠다고 한다. 이러한 불평등한 내용으로 압박하니 대처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의 대응은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의구심이 든다. 국가의 모든 힘을 모아 미국의 요구에 대응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 더해 해킹 문제로 사회는 불안하고, 물가는 오르고 국민의 삶은 힘들어지는데 여당은 삼권분립의 정신을 잊고 대법원장 끌어내리기에 바쁘다. 경제가 점점 힘들어지는데, 강화된 상법은 관세로 힘들어하는 산업체를 옥죄고 있다. 다른 나라들이 국가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제도를 개선하고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난리인데 정부는 산업체를 살릴 의향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중소기업체는 인력을 구하지 못해 난리인데도 정부의 대응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기업체를 옥죄는 일에만 열중이고 근로일수를 줄이고 근로자의 과도한 요구를 들어주느라 법을 고치기에 바쁘다. 모든 것은 때가 있지 않은가. 관세로 수출이 어려워 허덕이는 기업을 사지로 내모는 것인지. 해고도 자유롭지 않은 한국에서 기업이 선택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재명 정부가 끝날 즈음에는 한국의 많은 기업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금이라도 기업의 가치를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일하러 미국에 가서 죄인 취급을 받은 우리 국민이 고통을 이야기하는데 정부의 대응은 미흡하다. 해킹 문제로 국민은 불안하고 해결하지 못한 관세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기업체를 위해 정부는 국가의 온 힘을 국민의 삶과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 기울여야 한다. 정부의 관련 부서만 움직이고 여당은 대법원장을 끌어내리느라 바쁘고 기업을 옥죄는 법을 만드느라 힘을 빼기보다 다양한 각도로 미국에 우리의 입장을 전하고 관세를 타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통령의 미국 방문 시에 보여준 대미 협상팀과 기업인들이 하나가 되어 보여준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불안한 사회다. 경제도 사회도 안정되기를 바라는 국민의 바람이 있는데, 4류의 우리 정치는 이해하지 못한다. 오로지 제 갈 길만을 가겠다는 정치행태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 힘을 모아 트럼프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괴물과 싸워 이겨야 한다. /김규인 수필가

2025-09-21

노란봉투법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2주 전쯤, 건축업에 종사하는 이웃과 동네 일을 의논하러 만났다가 대화 주제가 노란봉투법으로 이어졌다. 그 이웃은 공사 현장에서 사람 다치고 죽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그렇게 패널티를 많이 주면 건축업이 위축된다면서 정부를 비판했다. 바로 며칠 전에도 유튜브 채널 부읽남TV에서 같은 논조의 영상이 올라왔다. 그는 건축 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죽었을 때 어떤 패널티를 주는지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노란봉투법이 주택 공급 소멸 정책이라며 집값 폭등을 예고했다. 노란봉투법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쌍용자동차의 해고노동자가 파업했을 때 법원에서 47억 원의 손해배상을 명령하자, 시민들이 노란 봉투에 4만 7천 원씩 넣어 후원했다. 현금으로 월급을 주던 시절 노란 봉투에 담아 주었기 때문에 노란 봉투에는 노동자의 생계를 보호한다는 의미가 있다. 노란봉투법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2조와 제3조를 일부 개정한 것이다. 제2조는 근로자와 사용자, 노동쟁의의 정의 등을 규정하고 있고, 제3조는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 및 배상 책임을 다룬다. 9월 12일 공포된 이 법안은 내년 3월부터 시행된다. 이 법은 크게 세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는 사용자의 범위를 확대했다. 사용자를 근로계약 당사자만이 아니라 근로 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주체를 모두 사용자라고 보았다. 이렇게 되면 특수고용이나 플랫폼 종사자도 노조의 지위를 가질 수 있게 되어 원청과 협상할 수 있다. 둘째는 노동쟁의의 대상이 확대된 것인데, 이전에는 임금과 근로 조건에 직접 관련된 상황에서만 쟁의가 가능했지만. 노란봉투법에서는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경영상 결정도 쟁의 대상이 된다. 물론 회사가 불법행위를 하거나 단협을 위반했을 때 가능하다. 셋째는 파업이나 노조 활동을 했을 때 지나친 손해배상 청구를 금지한 것이다. 쌍용자동차 파업 때 47억 원을 청구한 것이 부당하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노동자의 권익 보호의 폭이 확대된 것이다. 그러니 사업자 측이 반발할 것은 당연하다. 전국경제인연합은 경영권 직접 침해, 해외 투자 위축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기준과 매뉴얼을 마련해서 불확실성과 남용을 방지하겠다”고 했지만, 갈등이 쉽게 수그러들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럴 때는 오히려 철학적이고도 원론적인 접근이 유효할 수 있다. 롤즈는 ‘무지의 베일’이라는 원초적 상황을 가정한다. 사회 계약 후의 내 지위를 전혀 알 수 없다고 전제했을 때 사람들은 모든 사람에게 기본 자유를 보장하고, 경제적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인 약자에게 최대이익이 되도록 조정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사회 정의를 고려할 때 자신이 약자가 될 경우를 가정한다는 것이다. 부읽남TV 댓글 중 한 명의 병사도 죽지 않기를 바라는 장수는 패한다는 말이 있었다. 건설 현장에서 사람 한두 명도 죽지 않기를 바라면 사업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만약 죽는 병사가 나라면, 내 가족이라면 그래도 그 장수를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9-21

사법도시 대구

대구가 사법도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조선시대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된 이후 영남권의 사법,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대구가 한 것이다. 1895년 대구재판소가 설치됐고, 일제 강점기에는 서울과 평양을 제외하면 지금의 고등법원 격인 복심법원이 대구에 유일하게 설치됐다. 광주시에 고법이 신설된 1952년까지 지방에는 고등법원이 있는 곳은 대구가 유일했다. 더불어 민주당 김용민 의원이 대법관 증원 등 사법개혁에 반발하는 대법원을 향해 대법원을 대구로 옮기자는 제안을 해 제안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법개혁 추진 과정에서 대법원과 충돌하면서 나온 제안이라지만 김 의원은 작년 국가균형발전 명목으로 대법원을 대구로 이전하는 법안을 발의한 바 있어 그의 대법원 이전이 그냥 한 말로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 민주당은 5년 전에도 대구시당을 방문한 자리에서 대법원은 대구로, 헌법재판소는 광주로 이전하자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또 지난해 홍준표 전대구시장도 지역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수도권 외에 사법 수도를 두는 것도 검토해 볼만하다는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대법원의 대구 이전설 자체가 생소한 이야기는 아니다. 김 의원의 대법원 이전 제안이 대법원장 사퇴를 요구하는 압박용이라는 설과 내년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민주당의 포석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대법원의 대구 이전설이 그간의 사정을 살펴보면 현실화 되지 못할 것도 없다. 대법원의 이전은 지역발전 측면에서 메가톤급 구상이다. 김 의원의 제안이 대법원 이전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될지 지켜 볼 일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9-21

시그나기를 아시나요?!

귀국을 하루 앞둔 8월 27일 오전 8시 20분 나와 김 이사는 호텔 로비에서 김 영사 가족과 대면한다. 오늘은 트빌리시에서 남동쪽으로 113km 떨어진 유서 깊은 도시 시그나기(Signagi)를 찾아가는 날이다. 어젯밤 늦도록 우리는 어떻게 하면 다 함께 뜻깊은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 결과가 소형 버스를 이용한 시그나기 왕복 여행이었다. 9시에 불콰한 얼굴의 안내자와 함께 시그나기 여정이 시작된다. 환한 얼굴에 유창하게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안내자는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쉬지 않는 끈기를 선물한다. 도중에 포도주와 차차 그리고 코냑을 시음하기도 했지만, 내게 인상적인 장소는 빵 굽는 곳이다. 노년을 바라보는 아낙이 바게트 크기의 빵을 굽고 그것을 500원 정도의 가격에 파는 것이다. 식료품 가격이 안정돼있는 나라는 정치가 엉망이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예나 지금이나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이다. 조지아는 카프카스산맥 남단에 자리하고 있는 산악 국가지만, 곳곳에 드넓은 평원이 자리한다. 그리하여 포도를 비롯한 각종 과일과 밀 생산이 제법 풍족하다. 목축과 그에 따른 육류 가공이 충실하여 국민의 식생활이 어렵지 않다. 서너 시간을 거쳐 마침내 시그나기에 도착한다. 시그나기는 ‘백만 송이 장미’의 주인공 니코 피로스마니 (1862-1918) 덕분에 우리에게 기억되는 도시다. 가난뱅이 화가 피로스마니는 프랑스에서 온 어여쁜 여배우에게 반해서 수많은 장미를 바쳤다는 일화가 아직도 전해진다. 러시아 여가수 알라 푸가초바(1949-)가 1982년에 ‘백만 송이 장미’를 불러 크게 유행한다. 나는 피로스마니를 이미 모스크바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것도 22년 전에, 그리고 얼마 전에 말이다. 모스크바 문화원의 박 원장 가족과 삼성 지사장으로 일하는 99학번 졸업생 병창과 어울려 피로스마니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것이다. 오래된 피로스마니 식당은 고색창연했고, 세계의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다녀간 곳으로 예전 명맥을 근근이 잇고 있었다. 그런 내력이 있는 도시여서 그런지 모르지만, 시그나기는 오다가다 만난 여행객들이 쉽게 결혼할 수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24시간 결혼이 가능한 교회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시그나기는 튀르키예 말로 ‘피난처’를 뜻하는 ‘시기나크(siginak)’에서 이름이 만들어졌다는데, 사랑의 도시란 수식어와 어긋난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시그나기 성벽을 따라 걷다 보니 크고 작은 노점이 성업한다. 조지아 국기가 들어간 초록색 모자와 자그마한 양탄자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양탄자와 모자를 산다. 김 영사 가족과 김 이사가 나의 구매에 찬동을 표해 주었기로 힘이 솟는다. 얼마 뒤에 우리 일행은 1,7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보드베 수도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텔라비를 경유하는 귀로는 생각보다 멀고 지루했다. 하지만 평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지대의 거대한 십자가 아래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김 이사 사진을 찍으면서 뭉클한 느낌이 찾아든다. 삶은 언제든 어디서든 어떻게든 살만한 것이라는 자명한 명제가 뇌리를 스친 까닭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