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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미리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꼭 하는 편이다. 평생 말하는 일을 직업으로 살아온 데다 나는 사심이 없고 내 말이 옳다는 신념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강하게 걸려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내 생각이 옳아도 그것을 관철시키려면 상황에 따라 참을 줄도 알아야 하고 수위도 조절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중용’의 말처럼 신중하게 미리 준비해야 한다. ‘천하와 나라와 집안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큰 원칙은 9가지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원리는 하나이니, 그것은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할 일을 미리 준비하면 성공하고, 할 말을 미리 준비하면 실수하지 않으며, 일을 미리 정하면 막히지 않고, 행동을 미리 정하면 탈 나지 않으며, 방법을 미리 정하면 오래 유지한다.’ 말이나 행동은 물론이고 일을 도모하는 것도 미리 준비하면 실수하거나 실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언제나 적절한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우발적인 사고는 막을 수 있지만, 평소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 미리 준비해도 성공하기 힘들다.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객관적이고 공평한 시각을 전제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실수하는 사람은 계속 실수한다. 최근 최강욱이 조국혁신당 고위 당직자의 성추행 사건에 대해 한마디 했다가 결국 더불어민주당교육연수원장에서 사퇴했다. 6분 정도 되는 최강욱 발언의 녹음 파일을 들어보면 2차 가해라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처음에는 열린우리당의 합당 반대파 이야기를 하다가 바로 조국혁신당의 성추행 사건으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사실 확인도 없이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단정하고 그런 사람을 개돼지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개돼지라는 표현의 수위도 높은데다 그가 말하는 열린우리당의 일과 조국혁신당의 일 사이에 연결고리도 별로 없다. 굳이 연결고리를 찾자면, ‘사소한 시비 다툼’이 될 텐데, 과연 열린우리당 합당 반대파들의 주장이 사소한 시비 다툼이었나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최강욱을 검색해보니 ‘말’로 구설에 오른 일이 여러 번이다. 그러고 보면, 최강욱의 평소 화법이 조심성이 없거나 평소 생각도 치우쳐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중용’에서는 미리 준비하기를 잘하려면 혼자 있을 때 생각과 감정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자신이 만든 터널에 갇히기 쉽다. 자기가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라는 인식이 강하면 일을 그르치기 쉽다. 요즘 동네 단톡방에서 리더 집단의 무능과 부정을 지적하다가 그들과 갈등의 골이 깊은 상태다. 내가 옳다는 떳떳함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며칠 전 한 주민에게서 내 발언이 아무리 옳아도 그렇게 강경하게 발언하면 일반 주민에게는 시비 거는 사람으로 보인다면서 수위 조절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듣고 깨달은 바가 많다. 어떤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미리 준비할 때는 혼자 있을 때 마음공부도 필요하고 듣는 이의 상황에 따른 표현 조절도 중요하다. 정치인들에게 특히 필요한 덕목이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9-14

전기누전 차단기

연일 계속되는 폭염이다. 매일 휴대폰 안전문자로 폭염경보 때론 주의보가 날아온다. 벌써 9월인데도 수그러들 기미가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집집마다 에어컨이 필수가 되었다. 오래 된 에어컨을 올해 마음먹고 바꾸었는데, 영 온도가 떨어지질 않는다. 용량이 작은 건가, 잘못 작동시키고 있나, 여러 생각이 오간다. 결국 설치기사분에게 전화를 했다. 기사가 오기로 한 날, 아침에 에어컨을 틀었다. 바람세기를 세게 하고 희망 온도는 낮게 잡았다. 그게 에어컨 전기료를 절약하는 방법이라 들었기 때문이다. 잘 돌아가던 에어컨이 갑자기 뚝 멈춰버렸다. 당황했다. 차단기가 내려간 것 같았다. 혼자 어쩔 수 없어서 기사분이 올 때까지 더위를 견뎌야 했다. 기사님이 접촉이 조금 나빠 온도가 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하며 쉽게 고쳐주셨다. 남은 문제는 차단기였다. 구축 아파트는 그 당시 가전제품이 많지 않아서 전압이 낮게 책정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나오는 가전제품은 정격전압이 높은 편이라 차단기가 내려가는 것이라며 차단기를 교체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누전 차단기는 전류가 새어 나가는 순간 자동으로 전원을 차단하는 장치이다. 전기 사용 중 발생할 수 있는 감전이나 화재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필수적인 안전장치로 주로 과부하가 걸렸을 때, 누전, 오래 된 전자기기, 등이 원인이라고 한다. 결국 차단기가 내려간다는 것은 안전을 위한 것이다. 결국 전기기사를 불렀다. 차단기는 4개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그 중 에어컨을 작동하는 차단기만 내려간 것이다. 차단기 전체가 너무 낡았다고 한다. 전체를 교체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같은 아파트에 거주했고 아이들도 같은 학년이라 친하게 지냈다.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고 아이들과도 놀러 다니며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았다. 어느 날 이 친구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우리 집으로 뛰어 왔다. 그리고 다자고짜 화부터 내었다. 도무지 영문을 몰랐기에 어리둥절한 내게 점점 수위 짙은 말이 빠른 속도로 뱉어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유추하니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며칠 전 다른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무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친하게 지내느냐고. 무심코 서로 세상을 보는 시각은 다른 것 같은데 그래도 잘 지내고 있어라고 답했던 것 같다. 그 이야기가 고스란히 전달된 것이다. 시각이란 단어가 수준이 낮은 걸로 들렸나보다. 아니라고 하는데도 전혀 생각지 않았던 부분에서 화를 내는 친구를 보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도 거칠어졌다. 그 날 어떻게 마무리가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이후로 좋았던 관계는 깨어지고 다른 아파트로 이사할 때까지 외면하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욱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 나는 잘 참는 것 같다가도 일정 수위 이상으로 감정이 솟구치면 화산 터지듯 폭발해버려 뒤는 생각지 않고 뱉어내는 나쁜 버릇이 있다. 그 날도 그런 한계상황까지 간 것이다. 차분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그 날 내 감정에도 차단기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위험수위에 이르면 저절로 내려가 욱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차단기가 있었으면 좀 더 현명하고 기분 나쁘지 않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아마 친구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더불어 아이들도 더 좋은 기억을 담았으리라 싶다. 행복하기를 원하고 잘 살기를 바라며 인정받고 싶은 우리들의 마음이 때로는 그것 때문에 무리한 욕심을 부릴 때가 있다. 더 잘 살기 위해 하는 무리한 투자,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하다며 몰아가는 자녀들에 대한 지나친 교육열.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나만의 이기심과 시기. 이런 것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나다운 나로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차단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군데군데 여러 개의 차단기를 마음에 심고 필요시에 얼른 내릴 수 있다면 조금은 더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기사가 가고 소파에 앉아 에어컨을 작동시킨다. 찬바람이 더위로 어질러진 마음을 가라앉힌다.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야지. 손보다 마음이 먼저 리모콘으로 향한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5-09-14

그냥 쉬었음 인구

통계청이 매달 발표하는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일도 하지 않고 구직 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일할 의사도 없는 ‘그냥 쉬었음’이라고 하는 인구통계가 있다. ‘쉬었음’ 인구통계는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중대한 질병이나 장애 등 특별한 이유 없이 쉬는 사람의 수를 말한다. 쉬었음 인구는 실업자와는 구분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실업자는 구직 활동을 하지만 취업이 되지 않은 상태의 사람이다. 그래서 구직의사 없이 쉬는 사람은 실업률에 포함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냥 쉬는 인구의 상당수가 노동력이 가능한 연령대지만 취업난이나 불경기 등으로 취업을 포기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일할 의사도 없고 구직 활동도 하지 않고 그냥 쉬었다는 사람의 수가 264만명(8월 기준)에 이른다. 연령층별로 보면 15~29세 청년층이 43만명, 30대는 32만명이다. 그중 가장 왕성하게 일할 연령대인 30대는 올 8월 중 그 수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20~30대 연령층에서 쉬었음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지난달 청년층의 고용률이 16개월째 하락 행진 중인 것이 이를 반증한다. 한 경제단체 조사에 의히면 청년 인구가 줄고, 그냥 쉰 청년이 늘면서 우리나라는 연간 9조원 가량의 경제적 손실을 입는다고 했다. 청년층의 쉬었음 인구 증가는 우리 경제의 건전성이 그만큼 약화됐다는 반증이다. 최근 우리 경제는 경기가 계속 침체되고 미국의 고관세 정책 등으로 일자리 창출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 쉬었음 청년을 구제할 일자리 창출만큼 다급한 과제는 없어 보인다. 정치가 정쟁(政爭)으로 소모할 때가 아닌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9-14

인사철마다 유언비어에 흔들리는 경주시정

경주시의 인사 풍토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인사철만 되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것으로, 유언비어와 투서가 난무하고, 승진 대상자를 둘러싼 뒷말이 조직을 뒤흔든다. 실제로도 공직사회의 성과와 전문성은 뒷전이고, 누가 누구와 가까운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어 버렸다는 세평이 파다하다. “일은 잘하지만, 업자와 유착됐다더라”, “시장 측근에 줄을 댔다더라”, “청사 내 힘 있는 세력이 따로 있다더라”라는 식의 소문이 꼬리를 물고, 확인되지 않은 투서까지 난무한다. 승진하려면 인사 전에 시장에게 의견이 전달돼야 한다는 뒷말도 무성하다. 성과보다 줄서기가 인사의 기준처럼 작동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무엇보다도 행정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 더욱 문제는 이런 풍토가 단순한 잡음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정 세력이 파벌을 형성하고, 누가 요직에 오를 때마다 ‘측근 인사’라는 잡음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그 결과, 경주시 공직사회에서의 사기 추락은 눈에 비칠 정도다. 시민들도 경주시 인사가 공정성과 투명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지하고 있다. 인사는 조직의 가장 큰 동기부여이자 갈등의 원천이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간다. 이런 무질서한 인사 관행을 비난하고 있는 시 직원들도 막상 승진때가 되면 친분과 줄서기에 나서는 모습을 볼 땐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행정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행위다. 또 공정하지 못한 인사가 남기는 것은 불신과 냉소, 그리고 행정에 대한 무력감뿐이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더 이상 이 악습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인사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평가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 성과와 능력을 최우선으로 하는 원칙을 세우지 못한다면 경주시정은 끝없는 유언비어와 파벌 싸움에 휘둘릴 것이며 공무원 사회의 신뢰 회복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주 시장이 경주 수장에 오른지도 8년이 다되어 가고 있다. 그동안 인사를 둘러싸고 말썽이 생기면 그는 ‘승진하지 못한 직원의 불만"이라면서 “공정하게 인사를 한다”고 강조해 왔다. 하지만, 지금 경주시의 돌아가는 사정을 들여다보면 과연 그런지 의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직사회에선 인사가 만사라고 했다. 조금 어긋나서도 안되지만 많이 일탈한다면 시장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경주시는 성과가 아닌 줄서기로 움직이는 낡은 풍토를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일은 잘하지만, 업자와 유착됐다더라", “누구 줄에 섰느냐”가 아니라 “무슨 성과를 냈느냐”로 평가받는 경주시정은 언제 가능할까. 이제는 시장이 답을 내야 할 시간이다. /황성호 기자 hsh@kbmaeil.com

2025-09-14

기절초풍의 똘똘한 한 채

KB부동산이 밝힌 9월 중 통계에 의하면 전용면적 84㎡ 아파트 기준으로 전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는 서울 서초구 반포동 ㄹ아파트다. 지난 6월 거래된 가격이 72억원이다. 반면에 비슷한 규모로서 전국에서 가장 낮게 거래된 아파트는 경북 김천시의 ㅅ아파트다. 지난 5월 거래 가격이 7000만원이다. 이 아파트 102채와 서울 ㄹ아파트 한 채가 맞먹는 가격이다. 서울 인기 아파트단지의 똘똘한 한 채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통계다. 똘똘한 한 채란 시세상승 가능성이 높고 환금성이 좋으며 실 거주와 투자 가치가 모두 뛰어난 부동산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서울 강남·서초 일대의 인기 아파트단지로서 교통, 학군, 생활 인프라 등이 뛰어난 알짜배기 부동산이다. 똘똘한 한 채가 투자 대상으로 등장한 것은 다주택 소유자에 대한 정부의 세금규제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여러 채를 구입하는 것보다 확실한 한 채를 보유하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똘똘한 한 채에 대한 투자가 집중됐다. 세금 부담도 피하고 자산의 안정적 가치상승도 기대할 수 있으니 투자자 입장에서는 일거양득 효과를 본 것이다. 지방의 아파트 102채를 팔아 서울의 아파트 한 채를 겨우 살 수 있다는 가정에 기절초풍하지 않을 사람 있을까. 아파트 값만으로 본다면 지방의 아파트는 처참할 지경이라 할 수 있다. 서울과 지방의 양극화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를 보는 젊은층이 지방에 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이같은 양극화 현상이 결국은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데, 과거의 정부 정책은 늘 헛발질만 한 것 아닌가. 지방에서는 똘똘한 한 채보다 똘똘한 정책을 바라고 있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9-11

AI와 상담한 소년이 죽었다

요즘 의뢰인들이 챗지피티로 검색한 자료를 갖다 주곤 한다. 얼마 전엔 소송을 하면서 법리적으로 풀리지 않은 쟁점이 있어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해당 사건의 의뢰인이 “변호사님, 우리에게 딱 맞는 판례를 찾아냈어요”라며 챗지피티로 검색한 자료를 보냈다. 적혀있는 판례들은 정말 이 사건에 딱 맞으면서도 유리한 판례들이었다. 판례 번호까지 적혀 있길래 당장 판례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을 해보았지만 그런 판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사한 내용의 하급심 판례조차 없는 상태였다. 우리 법의 법리나 판례 면에서 AI의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법률전문가가 AI 정보의 오류를 잡아낼 수 있지만 AI 가 99% 정확해지는 세상이 되면 오히려 1%의 잘못된 정보는 누가 찾아낼 수 있을까 싶었다. 누군가 그 1%의 오류를 찾아내도 사람들은 AI의 허위 정보를 더 신뢰하지는 않을까. AI의 잘못된 정보는 그 수요자의 인지 수준이 낮은 경우 더 큰 문제가 된다. 지난 대선기간 한 학습지 업체의 태블릿 패드의 질문란에 대선후보 한 명의 이름을 입력하니 ‘사형입니다’ 라는 답변이 나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언론에 이를 보도한 제보자는 “저 같은 경우 (아이에게) ‘이건 잘못된 거다’라고 얘기해 줬지만, 이건 저희 아이들만 쓰는 게 아니라 많은 아이가 쓰고 있고 그중에는 이걸 그냥 받아들이는 아이도 있을 것”이라며 우려했다. AI의 위험성이 객관적 정보에 대한 진위를 따지는 수준에서 끝나면 다행인데, 이제는 AI가 사람의 심리와 행동을 지배하는 단계까지 간 것 같아 문제다. 작년 미국 플로리다주의 한 14세 소년이 AI 챗봇과 대화를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다. 소년은 챗봇과 주로 성적인 대화를 나누었는데 챗봇은 마지막으로 소년에게 “사랑한다, 가능한 빨리 내게로 와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얼마 뒤 소년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소년의 부모는 챗봇 개발사를 상대로 불법행위에 의한 사망 소송을 제기했고 플로리다 중부 연방지방법원은 “이러한 해로운 상호작용은 AI챗봇의 설계 결함 때문에만 가능하다”라고 판단하며 AI 개발사 측의 책임 가능성을 인정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도 16세 소년이 챗지피티와 대화하며 자살 계획을 구체화하고 실행에 옮기는 일이 있었다. 이렇게 심리 상담과 관련한 부작용 사례가 계속해서 발생하며 미국은 심리 치료를 목적으로 한 AI 사용을 제한하거나 사용자의 위험 징후를 감지하면 AI가 전문적 정신건강 서비스를 권고하도록 의무화하는 등 관련 제도 마련을 시작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AI 윤리에 관한 규제는 아직 무방비 상태다. AI챗봇과의 대화는 개인 간 통신에 해당해 이용자의 신고 없이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 규제기관이 감독하기도 어렵다. 새 정부가 한국을 ‘세계 3대 AI 강국’으로 도약시키겠다는 목표 아래 다양한 AI 발전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어떤 분야든 발전과 성장은 안전· 보호와 함께 가야 오래갈 수 있는 법이다. AI 윤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아이들이 AI 친구와 대화하다 목숨을 잃는 일이 우리나라에선 없었으면 한다. /김세라 변호사

2025-09-11

‘공공재생에너지’

9월에 들어서며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지만, 한낮의 폭염은 여전히 우리를 지치게 한다. 이제 ‘역대급’이라는 수식어조차 무색해진 극한기후는 우리에게 기후위기가 먼 미래가 아닌 오늘의 문제임을 알려준다. 그 해답이 ‘탄소중립’에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탄소중립을 위한 가장 큰 과제는 바로 ‘에너지 전환’, 즉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당장 2036년까지 전국 28기의 석탄화력발전소가 문을 닫을 예정이어서, 수많은 발전소 노동자들의 생계와 발전소 주변 지역 경제가 큰 위기에 놓여있다. 이 거대한 전환의 과정에서 우리는 ‘누가,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위해’ 에너지를 만들 것인지 물어야 한다. 그에 대한 가장 희망적인 대안이 바로 ‘공공재생에너지’이다. 낯선 이 단어는, 말 그대로 국가나 지자체 같은 공공기관이 주도하여 시민과 함께 만들고, 그 이익을 모든 시민이 함께 나누는 재생에너지를 뜻한다. 왜 ‘공공’이 중요할까? 민간기업은 이윤을 최우선으로 하기에 전기요금 인상, 환경 파괴, 지역 갈등과 같은 문제를 낳기 쉽다. 반면 ‘공공재생에너지’는 발전소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전환·승계하고, 개발 이익을 지역 공동체에 환원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핵심 가치로 삼는다. 우리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일부 민간 풍력발전 사업이 극심한 주민 갈등을 겪는 사례를 볼 때 ‘공공재생에너지’는 더 나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까? 이미 국내·외에는 훌륭한 성공 사례가 많다. 제주도는 조례를 통해 바람을 ‘공공의 자원’으로 선포하고, 제주에너지공사가 풍력 개발을 주도하며, 그 이익을 모든 도민과 나누고 있다. 우리 가까이에도 시민들이 십시일반 출자해 협동조합을 만들고 공공기관 옥상에 ‘햇빛발전소’를 세워 수익을 나누는 사례들이 있다. 이 모델들을 대구·경북에 적용해 볼 수 있다. 대구의 도심에서는 각 구청이나 공공기관 옥상, 주차장 부지를 활용해 시민 누구나 주주로 참여하는 ‘시민햇빛발전소’를 늘려나가고, 넓은 농촌 지역이 있는 경북에서는 지자체가 주도하고 지역 주민이 지분을 참여하는 ‘마을 풍력발전’를 통해 안정적인 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계획 단계부터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주민이 사업의 주체로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후위기 대응과 지역 소멸 위기 극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다. 대구시와 경상북도는 ‘공공재생에너지’를 체계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조례를 제정하고, 지방정부와 공기업이 안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공공기관의 유휴부지를 적극적으로 발굴하며, 시민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금융 지원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에너지 전환은 단순히 낡은 발전소를 새것으로 바꾸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일자리와 지역 경제, 그리고 미래 세대의 삶이 걸린 ‘정의’의 문제이다. 우리 모두가 주인이 되는 ‘공공재생에너지’로 지속가능한 대구·경북의 미래를 함께 열어가길 기대한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5-09-11

정리 일순위

또 새벽에 잠을 깼다. 최근에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소변이 마려운 것도 아니고 더워서 그런 것도 아니다. 밤에 잠 깨는 것을 이해를 못 하고 불면증이 무슨 병인지 모를 정도로 밤에 누가 안아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자는 인간이 새벽에 잠을 깬다는 것이 노인들의 잠 성향과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섬찟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땐 책을 읽거나 OTT에서 영화 한 편을 보다 보면 이내 잠이 다시 몰려와 잠이 들곤 했는데, 책을 보니 눈이 자꾸 충혈되는 것 같고 영화를 보다 잠이 들면 아침까지 텔레비전이 켜져 있어 늘 잔소리 대상이 되는지라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밖에 나가서 조용한 새벽 운동을 해 볼까도 생각해 보고 고양이가 흩어놓은 모래 정리나 할까 생각하다 괜히 자는 사람에게 피해가 되겠다 싶어 포기했다. 억지로 잠을 청하다가 갑자기 뭔가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한순간에 ‘바보 도 터지는 소리’를 지른다. 언제부터인지 한번은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시간도 나지 않고 꼭 지금 바로 해야 하는 급한 일도 아니라 차일피일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미뤘는데 이 기회에 하기로 했다. 그 일은 다름이 아니라 휴대폰 안에 저장되어있는 오래된 전화번호 정리이다. 확인하니 놀랄 정도다. 거의 3000건의 전화번호가 비좁은 전화기 안에 쑤셔박혀 있었다. 이 정도로 내가 대인관계가 넓었나 싶을 정도로 놀랄 정도다. 하나 하나 지우기 시작했다. 011로 시작하는 번호는 생각할 것도 없이 지웠다. 심지어 016도 나왔다. 이런 전화번호는 이미 잊혀진 사람이기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 거래가 끊어진 업체 사장들도 다 지워버렸다. 운동하면서 만난 친구들 전화도 지웠다. 동호회 활동을 하지 않은지 10년이 넘었는데 전화번호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당시엔 참 활발하게 활동을 하면서 친분을 쌓아왔는데 언제부터인지 소원해져 연락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얼굴이 어렴풋 기억이 나는 사람도 있고 얼굴조차 잊혀진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름만으로는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도 다 지워버렸다. 직장도 단체도 적혀있지 않고 이름만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그래도 알만한 사람이었을 텐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게 여자일 땐 더 궁금하다. 쭉 연락을 주고 받다가 몇 년간 소식은 없지만 나름 당시에는 친분이 있었던 사람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지웠다. 생각나면 연락이 오겠지 싶어서다. 연락이 오면 휴대폰을 잊어버렸다는 궁색한 변명을 하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해 본다. 갑자기 알람 소리가 울린다. 새벽 2시부터 시작해서 장장 4시간 동안 휴대폰 번호 지우기를 한 것이다. 그래도 아직 지울 전화번호가 남았다. 전화번호가 1천7백 개까지 떨어졌다. 약 1500명의 사람이 나와 단절이 된 것이다. 내 삶에 한 부분을 같이 한 사람이었건만 이제 연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제 그분들 카톡에 뜬금없이 내 생일이 뜨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지조차 별로 궁금하지 않을 사람들을 내 손으로 풀어주었다. 다음엔 그동안 찍어서 보관만 하는 사진 정리를 할 차례이다. 이건 전화번호 지우는 것보다 더 머리 아플 듯하다. /노병철 수필가

2025-09-11

경주 APEC 정상회의, 인류가 모은 10년의 답

다음달 경주에서 APEC 정상회의가 열립니다. 개최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주제(theme)를 아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올해 APEC이 내세운 화두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Building a Sustainable Tomorrow)’입니다.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닙니다. 지금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위기 상황을 반영합니다. 기후변화, 에너지 위기, 국제안보 위기 등 인류의 미래가 지속가능하지 않음에 대한 경고입니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되어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자국이익 중심의 보호무역주의에 의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때 APEC 정상회의가 경주에서 열립니다. 그간 APEC의 주제는 뚜렷한 추세를 보이며 변화해 왔습니다. 2014년 중국 베이징에서는 ‘아시아·태평양 파트너십을 통한 미래 형성’을 제시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던 시기, 협력을 통해 안정과 성장을 추구하자는 공감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듬해 201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는 ‘포용적 경제를 구축해 더 나은 세계로’를 주제로, 성장의 성과를 공평하게 나누자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경제발전이 소수에게만 집중돼서는 안 된다는 성찰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2016년 페루 리마는 ‘질적 성장과 인간 개발’을 내세웠습니다. 단순히 양적 지표가 아니라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성장이 중요하다는 관점을 제시한 것입니다. 2017년 베트남 다낭은 ‘새로운 역동성 창출, 함께하는 미래’를 통해 활기찬 경제공동체를 꿈꿨습니다.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국경이 닫히고 교류가 단절되는 상황에서, 말레이시아는 온라인 회의를 통해 ‘공동 번영의 회복력 있는 미래를 향한 인적 잠재력 최적화’를 제시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뉴질랜드는 ‘함께 참여하고, 함께 일하며, 함께 성장하자’라는 간결한 표현으로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두 차례 회의는 위기의 순간에도 협력과 연대가 답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팬데믹 이후 APEC은 미래를 향한 새로운 과제를 고민했습니다. 2022년 태국 방콕은 ‘개방, 연결, 균형’이라는 세 단어로 공급망 위기와 기후변화를 동시에 짚었습니다. 202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모두를 위한 회복력 있고 지속 가능한 미래 만들기’를 내세워 경제와 환경을 아우르는 지속가능성의 비전을 제시했고, 지난해 페루 리마는 ‘역량 강화, 포용, 성장’을 통해 다시 사람 중심 성장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지난 10년의 주제를 이어놓고 보면 흐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성장과 활력이 중심이었다면, 점차 포용과 회복력, 그리고 지속가능성으로 이동해왔습니다. ‘더 크게, 더 빨리’에서 ‘더 함께, 더 오래’로 무게중심이 옮겨간 것입니다. 팬데믹이라는 전례 없는 위기를 거치며 세계가 진정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깨달은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착점에 선 것이 바로 다음달 경주에서 열리는 2025 APEC 정상회의입니다. 주제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 : 연결, 혁신, 번영’입니다.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기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습니다. 경주는 이 메시지와 어울리는 도시입니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전쟁과 위기를 견뎌낸 회복의 기억을 품고 있고, 지금은 원자력과 미래차 산업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회복력, 현재의 포용, 미래의 지속 가능성이 공존하는 도시, 그 무대가 바로 경주입니다. 지난 10년간의 흐름이 이제 경주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세계 열강의 정상들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서로 손잡고 화해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갈등과 대결에서 화해와 협력의 장으로 나아가는 감동의 드라마가 경주에서 쓰이길 희망합니다. /주낙영 경주시장

2025-09-11

“물부족 포항시, 이제는 지하댐을 고민할 때다”

물은 도시의 혈관이다. 포항은 바닷가에 기대어 성장해온 대표적인 해안도시다. 철강산업으로 성장했고, 최근엔 2차전지와 수소산업 등 신산업의 중심지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도시 성장의 발목을 잡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물’이다. 포항은 연평균 강수량이 1100mm 안팎으로 전국 평균(약 1300mm)과 큰 차이가 없다. 문제는 지형이다. 내륙처럼 산과 계곡이 깊어 물을 가둬둘 곳이 거의 없다. 하천은 짧고, 빗물은 순식간에 바다로 흘러간다. 현재 포항은 공업용수의 80% 이상을 인근 댐 등에서 끌어다 쓴다. 연간 공업용수 사용량은 1억 4000만 톤에 달한다. 신산업단지 조성과 기업 유치로 수요는 매년 늘고 있지만, 외부 수원에 의존하는 방식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기후 변화로 극심한 가뭄과 불규칙한 강수량이 반복되면서 불안은 더 커졌다. 대안으로 거론되는 해수담수화는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초기 건설비만 수천억 원대, 생산된 물값은 기존 육상댐보다 5배 이상 비싸다. 농축염수 처리 등 환경 문제도 풀기 쉽지 않다. 결국 포항만의 물그릇이 필요하다. 그 대안이 바로 지하댐이다. 지하댐은 땅속에 흐르는 지하수를 막아 저장하는 구조다. 평소에는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고이게 하고, 필요할 때만 취수해 쓸 수 있다. 특히 포항처럼 하천이 짧고 해안에 인접한 도시는 빗물이 금방 바다로 흘러가 버리기 때문에, 지하에서 이를 붙잡아 두면 물부족 문제를 크게 덜 수 있다. 실제 일본 오키나와, 대만 등에서는 이미 지하댐이 가뭄 극복의 실질적 대안이 됐다. 제주도 역시 육상댐 건설이 어려운 지형적 한계를 지하댐으로 해결해 연간 800만 톤 이상을 안정적으로 확보한다. 한국수자원공사 관계자는 “지하댐은 육상댐 대비 건설비는 30~40% 수준이면서도 홍수와 가뭄을 함께 잡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최근 강원도 사례는 포항에 주는 교훈이 크다. 요즘 강릉시는 국가재난에 버금가는 심각한 가뭄으로 생활용수까지 부족해 시민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반면 인근 속초시는 상황이 다르다. 속초시는 일찍이 지하댐을 건설해 하루 63만t 규모의 수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면서,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여유 있게 물을 공급하고 있다. 불과 수십 킬로미터 차이지만, 지하댐을 선제적으로 준비했느냐의 차이가 도시의 운명을 가른 것이다. 포항에도 지하댐은 물부족 해소 이상의 의미가 있다. 포항 도심은 해수면과 높이 차가 거의 없는 저지대다. 우수기마다 불어난 빗물이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해 도심에 고인다. 이를 막기 위해 해마다 대형 배수펌프장을 돌려야 한다. 펌프 가동과 유지에만 연간 수십억 원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매년 반복되는 침수 피해는 여전히 시민의 몫이다. 지하댐이 들어서면 사정이 달라진다. 강우기에 넘치는 빗물을 지하로 흡수해 임시 저류조 역할을 하고, 평소에는 저장된 지하수를 취수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도심 침수 위험과 배수펌프장 운영 비용을 줄이고, 가뭄에도 안정적인 물 공급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하댐은 대규모 토지 수용이나 주민 이주가 필요 없다. 하천 하류나 평야 지하 등 여러 곳에 소규모로 나눠 지을 수 있어 현실성도 높다. 필요한 만큼 물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 뽑아 쓰는 ‘작은 물그릇’이 여러 개 만들어지는 셈이다. 물부족과 침수방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발상의 전환이다. 한 지역 물관리 전문가는 “포항은 물을 남이 가져다주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스스로 물을 모으고 지킬 방안을 찾아야 한다. 지하댐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물은 도시의 생명이다. 더 이상 다른 지역에서 가져다 쓰거나 비싼 담수화 기술에만 기대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이 어렵다. 기후위기 시대, 물을 지키는 일은 도시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강릉과 속초의 대비된 현실은 포항에 던지는 경고다. 이제 포항이 ‘땅속 물그릇’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임창희 부국장

2025-09-11

자녀 특채, 노조의 해괴한 요구

취직이 어려운 시대다. 대학을 졸업하고, 검증된 영어 실력을 갖추고, 거기에 학점까지 높아도 일자리를 얻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청년들의 가장 큰 희망 가운데 하나가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아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것’이란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고군분투 중이다. 학교 다닐 땐 전공과 외국어 공부에 매달리고, 졸업 이전에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을 갖추기 위해 인턴활동과 사회봉사에도 열심이다. 그래도 취직은 쉽지 않다. 그런데,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자리를 얻는 과정에서 특별한 혜택을 받는다면? 이건 ‘공정의 붕괴’라 불러 마땅한 심각한 문제다. 지난 9일 이와 관련된 사안이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언급됐다. 이날 이 대통령은 “최근 노동조합원 자녀에게 우선 채용권을 부여하자는 것과 관련된 논란을 보도를 통해 봤다”며 “취업시장은 어느 분야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이 필수”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는 KG모빌리티 노동조합이 퇴직 희망자 자녀를 특별채용해달라고 사측에 요구했고, 회사가 이를 추진하다가 논란 끝에 재검토한다는 뉴스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인다. 봉건시대엔 아버지가 높은 벼슬에 있으면 그의 자녀를 선발과정 생략하고 관리로 발탁해 쓰는 제도가 실재했다. 세칭 음서(蔭敍)다. 능력과 무관하게 부모가 가진 지위나 권력에 의해 자식의 미래가 결정되는 이 제도는 불합리성 탓에 오래전 폐지됐다. 혈통에 의해 결정되는 신분제가 사라진 21세기 현대사회에서 음서와 유사한 방식으로 제 자식에게 일자리를 대물림하겠다는 노조는 대체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건가?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9-10

눈 먼 자들의 도시

직시(直視)보다 왜곡(歪曲)에 편승하기 신념은 깡다구의 결과물 최고의 날라리가 되어 볼까 생각을 멈출까 눈 먼 사람은 밤과 낮이 없거든 그렇게 굳히기 한판의 삶 앞니에 끼인 고춧가루처럼 찬란하지 않더라도 기어코 개겨볼까, 몰라, 젠장 덩달아 짖는 개떼들의 공허한 하울링이 난무한다 그러나 사랑이 독약(毒藥)이라 해도, 그럼에도 결국엔 사람이 해독제인 걸, 나라 사랑 말고 사람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제목. .................................................................................................... ‘눈 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이 있다. 내용은 차치하고라고 그 제목만으로도 충분한 상징성으로 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나의, 어설픈, 차용이다. 나는 좀 비겁하다. 모든 것을 외면하고 회피한다. 다만 글 몇 줄 읽은 것이 다행이다. 그러나 찌그러진 바퀴 위에 올라탄 한 수레에 미치지 못하는 독서였다. 포항에서 다시 살면서 아쉬운 것은, 자기의 의사가 통용되지 않는다고 상대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며 저주하는 것은, 시대정신을 x도 모르는 똥개들의 하소연에 불구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하고 또한 비열한 정의는 결국 결과에 있다. 승복과 복종과 체제의 인정을 강요하고, 거기에는 당연한 반동이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이기적이고 분열적인 가역반응이다. 덩달아 짖는 개떼들의 공허한 하울링이 난무한다. 변방과 소외를 말하지만 그전에 누렸던 영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가장 비열하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물고 물린다. 개들의 습성이다. 달을 보고도 짖는다, 집을, 내 밥그릇을 지켜야지, 나의 밖에 무엇이 존재하리란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몰염치는 두렵고, 또한 훨씬 가소롭다. 깽판이나 치자는 시정잡배 수준의 시민의식으로 어떻게 시대정신에, 온전한 시민으로 살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시간과 시대를 좀먹는 비루한 존재들인 비정치적이고 비시민적이며 공감능력이 현저히 결여된 좀비들이 버젓이 활개하고 헐떡이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붕가붕가한다. 특별한 능력, 부여받지 않은 특권을 상시적으로, 상식적으로 내면화하여, 시대적 감각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감각하거나 회복불능이다. 시대의 탕진이 아니라 내면의 충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눈 먼 자들의 도시에 사는 시민들은 도무지 성찰하지 않는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빌린다.‘애국심은 사악한 자들의 미덕이다.’ 제발, 똥이나 제대로 누라!/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9-10

성주군은 왜 이토록 ‘청렴’을 외치는가?

이달 초 성주군청의 아침 출근길은 잠시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이병환 군수를 비롯한 직원들이 출근하는 동료들에게 ‘청렴 포춘쿠키’를 나눠주며 청렴한 하루를 응원하는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며칠 뒤에는 전 부서장들이 모여 ‘직장 내 갑질’과 같은 예민한 주제를 놓고 소통 간담회를 열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연초부터 계속된 ‘공직 부패행위 집중신고기간’ 운영은 이제 정례화된 모습이다. 일련의 행사들을 보며 문득 질문이 들었다. 성주군은 왜 이토록 끊임없이,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청렴’을 외치는 것일까? 단순히 정부가 주관하는 청렴도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형식적인 노력은 아닐까? 며칠 간의 취재를 통해 내린 결론은, 성주군이 강조하는 ‘청렴’은 단순히 ‘부패하지 않는 것’을 넘어, 지역의 생존과 미래를 위한 행정철학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이었다. 요약하면 첫째, 청렴이 군민의 ‘신뢰’를 얻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인구 5만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지역 공동체에서 행정에 대한 불신이 싹트는 순간, 모든 정책은 동력을 잃고 만다. 내가 낸 세금이 투명하게 쓰이고, 모든 행정 절차가 공정하게 처리될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군민들이 지역에 애착을 갖고, 군정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다. 성주군이 벌이는 청렴 캠페인들은 결국 이 신뢰의 자본을 쌓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인 셈이다. 둘째, 청렴이 가장 효율적인 ‘지역 발전’ 전략이라는 것이다. 불공정한 특혜나 불필요한 관행이 사라진 자리에는 효율성이 싹트기 마련이다. 공정한 절차는 건실한 기업 유치와 투자 촉진의 첫걸음이 되고, 투명한 예산 집행은 한정된 재원을 군민들에게 꼭 필요한 도로, 복지, 문화 시설에 집중하게 만든다. 특히 성주는 ‘참외’라는 강력한 브랜드를 갖고 있다. 청렴한 성주 행정은 대내외적으로 이 브랜드 가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보호막과도 같다. 세째, 청렴은 ‘자부심’의 원천이다. 공직자에게는 깨끗한 조직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군민에게는 공정한 지역사회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심어준다. 이병환 군수가 간담회에서 “자부심이 넘치는 공직사회를 만들자”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우리 군은 깨끗하다’는 공통의 자부심은 지역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청렴 행정은 자치단체들이 입모아 외치는 구호다. 그러나 지키기가 쉽잖다. 유혹도 있고 과거 관성 또한 있어서다. 그러나 성주군은 이병환 군수 이후 직원들이 지겹도록 청렴을 외치고 교육하며 토론해 왔다. 이제 그 노력들이 켜켜히 쌓여 군민들이 믿음과 신뢰를 보내는 단계에까지 다다랐다. 어떻게 보면 이는 매우 소중한 성주의 자산이다. 더욱 잘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 그것이 성주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군민들이 청령 군 행정에 신뢰를 보내면서도 혹여 흐트러지지나 않을까, 늘 지켜보고 평가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전병휴기자 kr5835@kbmaeil.com

2025-09-10

꺼지지 않는 불

눈이 자꾸만 우리 집 맞은편에 있는 창으로 간다. 한 달도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전등불이 켜져 있다. 빤히 보이는 불빛 때문에 나의 여름밤이 더 덥다. 에어컨을 켜려면 실외기실 창을 열어야 한다. 아마 집 주인은 창을 열면서 전깃불 끄는 건 잊었나 보다. 가로등 불빛만이 아파트 마당을 밝히는 시간에 그 불빛은 마치 달처럼 떠 있다. 나는 빛 하나 없는 방에 누워 남의 집 전깃불 걱정하고 있다. 날씨가 추워져야 꺼지려나. 실외기실 창을 닫아야 하니 그제야 불이 켜져 있었다는 것을 알겠지? 그때까지 눈 감아야 하나? 관리실에라도 얘기해야 하나. 생각의 꼬리를 물다, 필요하지 않은 전깃불에 내가 유독 예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원인을 따라가 보니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그때로 돌아간다. 아버님 어머님과 형님네 식구들 시누이까지 대식구였다. 시끌벅적한 식구들 틈에서 나는 새로운 환경을 익히려고 온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그 많은 것 중에 전깃불 끄는 것이었다. 저녁 설거지가 끝나고 부엌을 나오기도 전에 잊지 않고 불을 껐다. 욕실에서 세수하다 방에 뭔가를 가지러 갔다 오면, 불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꺼져있었다. 마루의 작은 등이 꺼지는 날은 식구들이 일찍 다 들어온 날이었다. 방의 창마다 텔레비전 불빛만이 새어 나왔다. 여름날이었다. 안방에 늦은 저녁상을 차렸다. 땅거미가 방에도 내려앉았다. 컵을 들고 들어오다, 전원스위치로 가던 손이 멈칫했다. 반찬이 보이지 않을 만큼은 어둡지 않았다. 아무도 어둡다고 하지 않아 나는 그냥 내 자리에 앉았다. 방 안은 숟가락 움직이는 소리 속에 어린 조카들의 말소리가 간간이 건너다녔다. 늦게 밥상머리에 앉은 나는 주위에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앞에 놓인 반찬만으로 밥을 먹기 바빴다. 고요 속에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방안에 있는 스무 개도 넘는 눈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뭐지? 왜? 내가 뭘 잘못했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퍼뜩 남편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남편의 눈에 불이 켜진 것 같았다. 늑대의 눈빛이 그러했을까. 그 눈빛을 본 순간, 나는 마치 낯선 방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숟가락을 든 손에 힘이 빠졌다. “숙모, 불” 일곱 살배기 조카가 손가락으로 내 머리 위를 가리켰다. 그제야 내 뒤에 전원 스위치가 있어서라는 것을 알았다. 그 밤, 나는 숨죽여 울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어이없어했고, 나는 무엇보다 부드러운 말 대신 눈 화살을 쏜 남편이 야속했다. 불 켜라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모두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는 사실에 괜히 억울했다. 내 마음대로 불도 못 켜고, 세탁기를 두고도 뻣뻣한 청바지까지 손으로 빨아야 하는 날들이 서러웠다. 어머님의 눈을 피해 재바르게 세탁기를 돌려야 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 싶어 울다 잠들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가 불을 끄고 다닌다. 얼마 전, 딸이 손자들을 데리고 왔다. 꼬맹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초토화가 된다. 욕실에 들어갈 때면 전원스위치를 있는 대로 다 켠다. 변기 쪽과 환풍기만 켜면 된다는 생각은 아예 없다. 딸도 아들도 마찬가지다. 낮에도 식탁에 앉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등부터 켠다. 밤에도 등 하나만 켜곤 하는 거실에 낮에도 등이란 등은 다 켜 놓는다. 따라다니며 불을 끄다 내뱉는 내 말은 언제나 잔소리가 되고 만다. 어둠 속에 있어 본 사람만이 밝은 빛의 소중함을 안다. 호롱불 밑에서 자란 할머니가 아껴두었던 전기가 아쉬운 게 없는 아이들 손에서 흘러넘친다. 맞은편 창의 불빛처럼 꺼지지 않는 아이들의 전깃불. 지금 있다고 마냥 있는 것은 아니다. 끄지 않아 다시는 켜지지 않는 날이 올까 두렵다. 나도 한때는 전깃불 하나 켜는 일에도 눈치를 보며 살았으니, 아이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날씨가 추워지면 창의 불도 꺼지고, 아이들도 언젠가는 스스로 스위치를 내리기를 기대한다. 나는 애써 맞은편 창을 보지 않으려고 안막 커튼을 친다. 내일 관리실에 얘기해야 하나 다시 고민하면서. /윤명희 수필가

2025-09-10

우리 정부의 당당한 대응을 기대한다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이 미국에 대규모로 투자하며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배터리공장에서 충격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던 300여 한국인 전문기술자들이 미 이민당국에 의해 불법체류자로 분류되어 체포 구금되었다. 중범자 체포 작전을 방불케 하며 거칠고 폭력적으로 진행되었고 전 장면이 전 세계 미디어를 통해 여과 없이 노출되었다. 우리 국민들의 안전과 존엄이 매우 부적절하게 무참히 짓밟힌 순간이었다. 사건의 본질은 분명하다. 워낙 대규모 첨단 프로젝트여서 한국에서 축적된 유사 건설 경험을 가진 인력이 필요했다. 미국 현장에 수백 명의 숙련고도 기술자들이 파견되어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까다로운 미국이민제도가 이런 상황을 배려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민 당국은 이들을 불법체류자라 규정하고 일괄 구금하고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이것이 단순한 행정적 착오였는가, 아니면 정치적 배경을 가진 노골적인 과잉단속이었는가. 트럼프 대통령은 벌어진 사태를 두고 ‘공장 건설에 필요한 전문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둘러대었다. 이번 사건에 미국 정부 내부에 일부 책임이 있었음을 우회적으로 인정한 발언으로 여겨진다. 그런 정도 언급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단순한 실수였다고 치부하고 넘어갈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 미국 이민당국의 성급한 결정과 폭력적인 집행은 명백히 한국 시민들의 정당한 권익을 침해했다. 한국 정부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외교채널을 통해 구속된 기술자들이 조속히 풀려나 귀국길에 오르게 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 정부로부터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내야 하며 향후 유사한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적 완비와 안전장치를 요구해야 한다. 이는 동맹국 국민의 권익과 안전을 담보하는 최소한의 책무가 아닌가. 가장 큰 상처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던 우리 기술자들이 입었다. 이들은 미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기초를 놓으며 땀을 흘리던 중이었다. 하루아침에 불법체류자로 낙인찍혀 수갑과 쇠사슬을 차고 끌려갔다. 구금과정에서 겪었을 모욕감과 심리적 트라우마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이들이 미국을 다시 방문할 때 불이익이 없도록 정부가 전방위적으로 세심하게 지원해야 한다. 한국 사회 일반에도 깊은 상흔이 남았다. 자국민이 해외에서 폭력적으로 체포되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했다. 자존감의 손상이 깊고 대미감정의 흔들림도 만만치 않다. 한미관계가 긴요하지만, 동맹국의 국민을 이토록 무리하게 대하는 일은 용인하기 어렵다. 미국이 진정한 우호적 파트너십을 원한다면, 상처 입은 한국의 국격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우리 정부도 미국에게 주저하거나 미온적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신속한 봉합을 넘어 원칙과 신뢰에 기초한 단호한 외교가 있어야 한다. 국민이 해외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정부가 당당하게 나서서 안전하게 보호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비로소 국격은 지켜진다. 동맹이란 이름으로 불평등을 감내하는 시대는 끝났다. 한미관계는 대등한 파트너십이어야 한다. 주권 국가다운 면모를 지켜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9-10

‘대만과 함께, 평화와 번영을’

대만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요한 구성원이자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로서, 세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을 지키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인도·태평양 제1도련(第一島鏈)’의 전선에 위치한 대만은 민주와 자유의 가치를 굳건히 지켜내며, 권위주의 확장을 저지하고 있다. 아울러 강건한 경제력과 완전한 반도체 산업 공급망을 바탕으로 세계의 안정과 번영에 중대한 기여를 해왔다. 대만은 세계 21위의 경제체로서 인공지능과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전 세계 반도체의 60% 이상, 그리고 첨단 반도체 생산의 90% 담당하면서 글로벌 성장을 견인할 뿐만 아니라 각 분야 발전의 핵심적인 동반자가 되고 있다. 대만은 국내외에서 민주적 가치를 수호할 것을 굳게 다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라이칭더 총통은 ‘4대 평화 기둥 행동 방침’을 추진하며, 국방 예산 증액과 사회 전반의 회복력 강화를 약속했다. 대만은 결코 중국과의 충돌을 원하지 않으며, 또한 스스로 도발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대만은 베이징이 평등과 존엄을 바탕으로 양자 간 대화를 재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대만은 또한 ‘글로벌 민주 가치 사슬’을 통해 민주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며, 불확실한 지정학적 위험에 공동 대응하고, 권위주의적 영향력을 저지하며, 인권 증진과 디지털 거버넌스를 추진하고 있다. 나아가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굳건히 지켜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만이 보여준 회복력은 권위주의 체제의 위협에 직면하더라도 민주 제도가 압력 속에서 더욱 성장하고 굳건해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대만은 ‘경제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 반도체와 첨단 기술 공정을 선도하며, 이를 기반으로 인공지능·디지털화·의료 등 다양한 분야의 혁신과 발전을 촉진하고 있다. 또한 ‘비(非) 홍색 공급망’을 핵심으로 한 경제·무역 전략을 추진하여, 신뢰할 수 있고 투명한 산업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권위주의 체제에 의해 핵심 산업이 좌우되는 것을 막고자 한다. 그러나 세계 발전에 대한 큰 기여도에도 대만은 국제 사회로부터 정당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유엔 체계에도 참여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다. 대만은 국제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국제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이미 많은 나라들이 양자 및 다자 무대, 예컨대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등에서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여러 국가의 행정부와 입법부 역시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며, 유엔 총회 제2758호 결의가 대만의 지위를 결정하지 않았고, 대만의 국제기구-유엔 체계를 포함한-참여를 배제하지도 않았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엔 창립 80주년을 맞이하고 ‘2030 지속 가능 발전목표’ 달성까지 불과 5년밖에 남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대만을 국제 사회에 포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래야만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함께 나아가자”는 비전을 실현할 수 있다. 대만은 국제무대에서 정당한 지위를 인정받고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가치와 기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기를 호소한다. 오직 손을 맞잡고 협력할 때에만, 인도·태평양 지역은 물론 전 세계가 더욱 아름답고 밝은 미래를 함께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린자룽 대만 외교부 장관

2025-09-10

찐 옥수수를 먹으며

여름이 되면 먹거리들이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찐 옥수수다. 요즘이야 사철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간식거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쫀득쫀득하고 부드럽고 찰진 옥수수는 아무래도 여름에 나는 제철 옥수수다. 남편도 좋아해서 한 봉다리씩 사서 자주 먹곤 한다. 옥수수를 좋아한다는 내 말을 듣고 유 선생님께서는 풍각장에서 파는 찐 옥수수가 참 맛있던데 하시며 사다 줄 걸 하셨다. 그러고 한참이 지난 며칠 전 저녁 유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선생님 내일 풍각장날인데 찐 옥수수 사다 드릴게요.“ 아이고 언뜻 지나가는 말처럼 했던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새기셨던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장터까지 가서 사오신 뜨거운 찐 옥수수를 넘치게 가져다 주셨다. 선생님의 뜨거운 사랑같은 찐 옥수수를 먹으며 옥수수에 대한 몇 가지 기억을 소환해 낸다. 초등학교 땐 학교급식으로 옥수수죽, 옥수수빵을 나눠주었다. 요즘같이 모든 학생들이 먹는 급식이 아니라 가난해서 도시락을 못 싸오는 아이들에게만 주는 급식이었다. 나는 무슨 연유인진 모르겠는데, 4학년부터 6학년까지 줄곧 급식당번을 했다. 4학년 때는 옥수수죽이었다. 점심 시간이 되면 양호실로 달려가 큰 양동이에 받아온 옥수수죽을 빈 도시락을 들고 온 아이들에게 펴 담아 주었다. 가난했던 시절, 70명이 넘는 학생 중 유독 더 가난하여 도시락도 챙겨오지 못한 아이들이 꽤 되었다. 제법 커다란 양동이 가득 받아온 옥수수죽을 한 도시락씩 담아 주면 금세 바닥을 보이곤 했다. 옥수수죽을 배급하는 사이 도시락을 싸온 아이들은 이미 거의 도시락을 먹은 상태였고, 그동안 이 아이들은 쫄쫄 굶은 배를 움켜쥐고 밥 먹는 아이들을 지켜만 보고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싸온 도시락을 먹지 못한 채 급식 배급이라는 중요한 임무 수행 중이었다. 그 당시 내가 맡은 일이 하나는 더 있었다. 소소한 학급 일상을 적는 학습일지를 쓰는 것이었다. 매일의 학급일지에는 ‘착한 일 한 사람’, ‘나쁜 짓 한 사람’을 적는 난도 있었다. 이따금 나는 ‘착한 일 한 사람’ 난에 내 이름을 적고 싶어,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 친구에게 내 도시락을 주고, 대신 나는 옥수수죽을 떠먹기도 하는 앙큼한 짓을 하곤 했다. 가끔은 친한 친구에게 도시락과 옥수수죽을 바꿔 먹으면 이름을 올려주겠다며 꼬드기기도 했다. 옥수수 급식은 해마다 바뀌었다. 5학년 때는 옥수수로 만든 찐빵이었고, 6학년 때는 빵틀에 구운 옥수수빵이었다. 해마다 조금씩 나아진 것 같기도 하지만 가장 맛있었던 것은 옥수수죽이었고, 찐빵은 별로였다. 내가 3년을 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양호실 선생님과 꽤나 친해졌나 보았다. 가끔 양호 선생님께서는 수업 후에 양호실에 들르라고 말씀하셨고, 집에 가지고 가 식구들과 나눠 먹으라시며 남은 빵을 가득 싸 주시기도 했다. 따로 넣을 곳이 마땅찮으면 책가방의 책을 빼내 신발주머니에 넣거나 끈으로 묶어 주시고, 가방 가득 빵을 넣어주셨다. 이렇게 받아온 빵은 엄마에겐 좋은 요깃거리였다며 엄마는 회상하곤 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9-10

‘이준석의 보수재편’ 성과낼 수 있을까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지난주 경북대와 영남대 교문 앞에서 안전모를 쓰고 직접 작업차에 올라 현수막을 설치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돼 눈길을 모았다. 정치성이 강한 연출이지만, ‘이준석 답다’는 생각은 든다. 이 대표는 지난 대선 때도 예비후보 등록을 하자마자 대구에 내려와 시민들에게 출퇴근 인사를 했다. 대선후보가 권위의식을 내려놓고 ‘나홀로’ 출퇴근 인사를 하는 모습을 대구시민들도 그때 처음 봤다. 이 대표가 TK대학가에서 현수막을 달며 언론과 접촉한 것은 얼마 전 대구를 다녀간 조국 전 혁신당 대표를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두 사람은 최근 ‘2030세대 극우화’ 논쟁으로 뜨거운 공방을 벌이고 있다. 정치권에선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감한 의제를 선점하면서 지지층 결집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대표가 대구에서 조 전 대표의 ‘2030 세대 극우론’을 쟁점으로 만들 경우 TK출신 젊은 층 외연확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대표는 최근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과 안철수 의원과도 ‘지방선거 연대’를 추진하고 있는 것 같다. 이미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이 서울에서 각각 ‘구청장 1곳 불출마’와 ‘서울시장 불출마’를 조건으로 연대하는 방식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거론되는 모양이다. 대구·경북을 비롯한 영남권에서도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의 이러한 딜(deal)이 가능할 것이다. 이 대표는 오 시장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에 대해 “정치적으로 인적 교류도 많고, 거의 한 팀이라고 보고 있다”고 했다. 이 대표는 한때 욕설까지 주고받았던 안철수 의원과도 화해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는 최근 BBS 라디오에 출연해 국민의힘 내 탄핵찬성파와의 연대 여부와 관련, “안철수 의원과는 여러 가지 해볼 수 있는 게 많다”고 했다. 두 사람은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개혁보수’라는 동일 노선을 취하고 있고, 둘 다 경기도에 지역구를 두고 있어 ‘선거 연대’가 가능하다는 분석이 유력하게 나온다. 지난 7일에는 두 사람이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 물빛무대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도 같이 참석했다. 이 대표는 지난 대선 당시 ‘안철수·오세훈·홍준표 정책 통합 전략’ 보고서를 공개한 적이 있다. 세 후보 캠프의 공약을 각각 정리한 뒤 이 대표가 공통 키워드를 찾아 통합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 보고서가 내년 지방선거에서도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이 대표의 이러한 행보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과의 관계를 변수로 개혁신당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만약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중수청’(중도·수도권·청년)을 향한 지지세 확장에 성공한다면 이 대표로서는 국민의힘과의 연대 수준을 올릴 수 있다. 반대로 국민의힘이 ‘극우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할 경우에도 이 대표의 개혁 보수 이미지는 더 주목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이 대표가 국민의힘 내 탄핵찬성파와의 접점을 넓히면서 보수진영 재편을 하는데 자신이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 대표의 ‘보수재편 시나리오’가 어떤 정치 지형을 만들어 낼지 주목된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09-09

정치인의 악수

악수란 세계적으로 가장 보편화된 인사 방법이다. 나라마다 문화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반가움이나 친근, 화해 등을 드러내는 인사법이다. 이런 악수에는 예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 윗사람이 먼저 청할 때 악수를 해야 한다. 악수를 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바로 쳐다보아야 한다거나 왼손잡이도 오른쪽 손으로 인사를 해야 한다는 등등이다. 2013년 미국의 빌게이츠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예방했을 때의 일화다. 빌게이츠는 박 전 대통령과 악수하면서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공개되자 미국의 한 언론은 그의 무례함을 비판한 적이 있다. 비록 사소한 악수일지라도 장소와 사람에 따라 격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정치인은 악수를 특별하게 해석할 때가 많다. 정치인이 사람을 만나 악수하는 것은 정치적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중국 전승절 기념행사 참석차 중국을 다녀왔던 우원식 국회의장은 귀국 후 “김정은 위원장과 악수를 했다”고 자랑하며 악수한 그 자체가 성과라고 말해 어리둥절케 했다. 그의 악수를 두고 남북 관계의 복원 가능성이나 한반도 정세에 작은 변화 가능성을 주었다는 정치적 해석을 따로 붙인 것이다. 김 위원장과 아주 잠깐 악수를 한 것에 불과한데 해석치고는 너무 거대해 보였다. “악수는 사람과 하는 것”이라며 국민의힘과는 죽어도 악수않을 것 같았던 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와 악수를 하자 언론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이 대통령의 제안으로 만나기조차 꺼렸던 양 대표의 첫 악수가 성사된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 화해일 수도 있고 대화의 시작일 수 있는 두 정치인의 악수 이후가 어떨지 기대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9-09

선택의 저울

어제 저녁, 가을 바람이 유난히 기분 좋게 불어왔다. 하루 종일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산책을 나섰다.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짐을 서둘렀고 저녁 바람은 초가을의 신선함과 여유를 가져왔다. 나는 오랜만에 뛰기도 했다. 호흡이 거칠어질수록 운동이 주는 해방감에 머리도 맑아지고 기분도 좋아졌다. 땀이 이마에 맺히자 몸 안에 쌓였던 무거움이 바람결에 흩어지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신호등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막 깜빡이고 있었지만 무리해서 건너기보다 잠시 더 기다리기로 했다. 저녁 운동을 마치고 많은 사람들이 건너고 있었다. 순간적인 조급함보다 한 박자 늦추는 선택이 나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다음 신호가 켜지자 천천히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눈끝에 무언가가 보였다. 고개를 내려다보니 접힌 지폐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보지 못했던 지폐가 내게 온 건 행운이지 않을까. 나는 멈칫했다. 지폐를 세어보니 칠만원이었다. 오만 원권 한 장이랑 만 원권 2장이 접힌 채 바닥에 놓여 있었다.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공(空)돈으로 맛있는 것을 사 먹을 수도 있고, 그간 미뤄온 책을 살 수도 있지 않을까?’욕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또 다른 생각이 뒤따랐다. ‘이건 누군가의 하루 일당일지도 몰라. 한 어르신이 힘겹게 모아둔 비상금일 수도 있고, 내일 병원에 가야 할 돈일 수도 있잖아.’ 지폐가 내 손에 쥐어져 있는 동안, 내 마음은 양쪽으로 기울다 다시 반대편으로 기울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다. 그러나 끝내 한 가지 생각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나에게는 칠만원이 특별한 행운처럼 다가올지 몰라도 잃어버린 누군가에게는 삶의 무게만큼 절실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내 발걸음을 가까운 지구대로 향하게 했다. 지구대 문을 열며 스스로 조금은 부끄러웠다. 내심 ‘누군가가 찾아올까? 그냥 돌아서서 내 주머니에 넣어둘까?’하는 흔들림이 있었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대 안의 경찰관에게 돈을 건네는 순간 마음 속에서 묘한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경찰관은 친절하게 분실물 접수 절차를 설명하며 내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넣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돌아 나오는 내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적갈등이 일렁이던 순간을 곱씹었다. 인간은 누구나 욕심과 양심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그 갈등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우리를 규정한다. 돈을 맡기며 내가 얻은 것은 단순히 ‘옳은 일을 했다’는 자기 만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욕심을 이겨낸 작은 경험이 나를 더 단단하게 해 주었다는 자각이었다. 집에 돌아와 창가에 앉았을 때 문득 바람이 커튼을 스치며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저녁의 공기에는 미묘한 신선함과 고요가 깃들어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조금 전의 일을 되새겼다. 바닥에서 우연히 주운 돈, 그 돈을 맡기기까지의 짧은 갈등, 내 손을 떠났지만 웃음이 났다. 그것은 ‘소유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묘한 충만감이었다. 생각해 보니 인생의 굽이마다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화려한 성취가 아니라 이러한 사소한 순간들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기엔 하찮아 보일 수 있는 선택이 스스로에게는 오래도록 등불이 되어 줄 수도 있다. 누군가는 ‘굳이 왜’라고 가볍게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의 작은 선택이 훗날 어느 위기 앞에서 다시 내 마음을 붙들어 줄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그 확신이 가을바람처럼 오늘 밤, 조용히 스며들었다. 인생은 예기치 못한 순간들의 연속이다. 길을 걷다 주운 돈 몇 장에서도 우리는 삶의 의미와 교훈을 얻는다. 욕망은 언제나 손쉬운 유혹처럼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소유한다. 돈은 사라졌다. 가을바람처럼 스쳐간 짧은 순간이었지만 ‘옳은 선택’이란 결국 자신을 지키는 선택이라는 명제를 새겨주었다. 선택의 무게는 나를 지켜내는 울타리임을 오늘 저녁 다시 일깨웠다. /김경아 작가

2025-09-09

대세르비아주의 독립투쟁사 ②세르비아, 피의 명가(名家) 탄생

러시아 알렉산더 1세. 나폴레옹 정복전쟁에 위협을 느끼던 러시아는 1812년 본국으로 철군해버렸다. 영국 역시 러시아가 돌아서자 터키를 제압하려던 초심은 간곳없이 슬그머니 발을 빼면서 터키와 휴전을 맺으며 관망 자세로 돌아섰다. 국제사회 냉혹함을 몸소 경험해야 했다. /퍼블릭 제공 세르비아인 최초 공식적인 피의 학살 서막이 열렸다. 역사는 위기 때 영웅을 탄생시킨다. 이제는 단순항쟁이 아니라 반란으로 확장이었다. 하우두크(Hauduk), 즉 튀르키예에 조직적으로 대항하는 반란군을 뜻하는 용어가 생겼다. 예니체리에 대항하는 첫 조직이다. 하지만 가장 큰 피해를 봤던 크네즈를 비롯해 성직자들까지도 농민들을 다독이는데 동참했다. 그러나 농민들 생각은 달랐다. 분노는 예상보다 강했다. 농민들은 그야말로 농기구를 들고 대항했다. 일찌감치 최정예 전투력으로 무장한 예니체리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면서 과거 전투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면 지도자로 뽑아 그를 중심으로 뭉쳤다. 농민들은 1804년 2월 블랙조지, 세르비아어로 페트로비치 카라조르지예(Petrovic Karadjordje)를 지도자로 뽑았다. 졸지에 블랙조지가 급부상하면서 농민군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오스트리아군 소속으로 터키와 맞서 싸운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산발적인 대항에 불과했던 세르비아 농민들을 똘똘 뭉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고, 무기 조달과 풍부한 전쟁 경험은 오스만터키에 대한 독립투쟁으로 확산하는 데 성공한다. 세르비아 무신정권이 시작된 지 4년 째, 블랙조지를 중심으로 한 농민군은 곳곳에서 예니체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다. 36세 블랙조지는 일약 스타로 떠오르면서 예니체리의 지도자 다이스 네 명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처량한 도망자 신세가 된 다이스를 끝까지 추적해 섬에 숨어 있던 예니체리 지휘관 다이스 목을 베는 데 성공한다. 블랙조지는 농민군 지도자로 우뚝 서며 술탄을 향해 예니체리 해체를 요구했다. 술탄으로서는 씨알도 안 먹히는 말이었다. 술탄으로서는 발칸반도 중앙에 위치한 세르비아의 지리적 이점은 매우 다양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비롯해 도이칠란트 등 서구열강들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반대로 국제사회가 바라보는 세르비아 땅은 매우 단순했다. 재빨리 발을 담그면 자신들 차지가 될 것처럼 보였을 법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군침 삼키며 발칸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된 터키제국으로선 도무지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러시아가 터키제국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게 된 시점이라고 보면 거의 정확할 것이다. 블랙조지는 러시아로 눈을 돌렸다. 때마침 오스만터키가 나폴레옹과의 외교적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가 내민 손을 뿌리치고 외교관계를 거절해버린다. 러시아로서도 방법은 단 하나, 세르비아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것뿐이었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더 1세로서는 닭 대신 꿩인 셈이다. 알렉산더 1세는 가장 먼저 농민군 지도자 블랙조지를 자신 편으로 만들었다. 1811년 러시아는 세르비아 농민군을 지원하면서 의회를 설립하고, 블랙조지를 의장으로 선출한다. 러시아와 영국의 뒷배를 믿은 블랙조지는 오스만제국과 전쟁에서 꾸준히 승리를 거두며 중부도시 니쉬를 손에 넣는다. 하지만 나폴레옹 정복전쟁에 위협을 느끼던 러시아는 1812년 본국으로 철군해버렸다. 영국 역시 러시아가 돌아서자 터키를 제압하려던 초심은 간곳없이 슬그머니 발을 빼면서 터키와 휴전을 맺으며 관망 자세로 돌아섰다. 국제사회 냉혹함을 몸소 경험해야 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된 블랙조지는 사면초가에 빠지고 말았다.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잔존 예니체리는 오스만제국의 힘을 뒷배로 몸을 돌려 재차 반격해오기 시작했다. 예니체리들이 반전에 성공하자, 블랙조지는 독립은커녕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힘에 겨웠다. 예니체리들은 일시에 도나우강을 건너 베오그라드를 점령해버렸다. 두 번째 입성이었다. 다시 권력을 잡은 무슬림과 예니체리의 악정은 이전보다 더욱 심했으며, 농민을 향한 폭력이 기승을 부렸다. 예니체리의 보복은 처절했다. 반란군을 뿌리 뽑겠다며 15세 이상 세르비아 남자들을 잔인하게 도륙한다. 여자와 어린이는 노예로 삼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혁명군 지도자 블랙조지와 수많은 세르비아인이 베오그라드 도나우강 서쪽지역 제먼이나 노비사드 인근지역으로 몸을 피해야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농민들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1815년 짠, 하고 등장한 인물이 세르비아 우쥐째 출신의 밀로쉬 오브레노비치였다. 그는 비록 농민 출신이었으나 전쟁보다 뛰어난 언변으로 타협에 능한, 외교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그 역시 농민항쟁에 몸을 담았던 경력이 있었지만, 재력과 세치 혀로 오스만제국에 충성을 맹세해 처형을 면한 인물이다. 민족의 미래보다 쥐꼬리 권력이 더 중요했던 까닭이다. 인간은 권력의 달콤함을 잊지 못한다. 욕망은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이때부터 세르비아는 블랙조지와 밀로쉬 두 가문과 지지자들이 나눠지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박필우 스토리텔링작가

2025-09-09

삶의 내려놓기와 새로운 도전

내려놓을 줄 알아야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잠재력을 발현할 수 있다. 사회 첫 발을 내디뎠을 때는 더 올라가기 위해 손에 쥔 것을 포기하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 또 다른 기회만 잡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은 포기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륜이 된 당신은 좋아하는 일, 후한 봉급, 안락한 집,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 등을 갖추게 되었을 때 당신 안의 잠재력을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그것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겠는가. 가진 것을 과감히 내려놓고 새로운 삶으로 보여준 한 사업가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고학으로 수학과를 졸업한 그는 처음으로 선택한 곳은 아버지가 운전기사로 있던 코카콜라였다. 관리직으로 들어갔으나 운전기사의 아들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과소평가를 받고 승진에도 한계가 있을 것 같아 필스베리(Pillsbury)의 본사로 이직했다. 상사는 코카콜라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는데, 회사에 큰 고비가 있다며 모두가 일자리를 알아봐야 할 판이라고 했다. 그는 두렵지 않았다. ‘언제나 실패의 두려움보다 성공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마흔 살까지 부사장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필스베리에 들어갈 때 팀장이었던 그는 곧 부장이 되고, 국장을 거쳐 부사장이 되었다. 36층의 전망 좋은 집무실에서 일했고, 초라한 시절을 뒤로 하고 급상승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현재의 자리에서는 사장이 될 수 없었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최고 경영자와 상의를 한 후 필스베리의 한 사업부인 버거킹의 직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모든 조건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처음 접하는 일에 밑바닥부터 배워야 한다. 신입사원들과 함께 그릴 작동법, 와퍼 조리법, 손님 응대법 등을 비롯한 매장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 교육과정이 끝나고 매장 부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꿈을 향한 도전은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점장, 지역 본부장, 필라델피아 치즈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물론 평탄하지 않았고, 시련도 많았지만 꿋꿋이 이겨냈고, 마침내 망해가던 갓파더 피자을 인수한 곳에 사장으로 승진해갔고, 꿈을 실현하게 된다. 그가 바로 허먼 케인(Herman Cain)이다. 그는 내려놓음의 법칙을 알고 손에 쥔 것을 포기한 덕분에 새로운 선택과 도전, 그리고 큰 성공이 주어졌다. 이것은 한 인생이 성공한 것이고 피자 사업에 새로운 이정표를 찍게 된 것이다. 내려놓기는 새로운 성장의 기회다. 성장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선택에 있다. 인생의 갈림길에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아예 선택을 포기하는 바람에 인생이 더 힘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주변에 ‘내 처지가 바뀌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있다. 변하지 않으면 지금 있는 곳에 머물 뿐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다. 제2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평소 하고 싶었던 일, 살고 싶었던 곳으로 과감히 이동하라. 기대하던 행복한 삶의 이정표를 그려갈 수 있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09-09

문경관광공사 노사 갈등, 시민 눈높이에서 보라

문경관광공사의 노사 갈등이 결국 고용노동부와 경북지방노동위원회의 손에 맡겨졌다. 공공기관의 내부 문제를 지역사회 안에서 풀지 못하고 국가기관의 중재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 참담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노조는 부당노동행위와 불공정한 인사관리, 소통 부재를 문제 삼고 있다. 사측은 징계권과 채용 권한을 앞세워 맞서고 있다. 하지만 정작 시민들이 느끼는 것은 관광공사의 본분을 잊은 듯한 소모적 대립뿐이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속담처럼,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내는 싸움이 자신들에게도 해가 되고 있음을 왜 모르는가. 더 큰 문제는 이 갈등을 지켜본 문경시와 시의회의 태도다. 공공기관을 감독하고 지도해야 할 책무가 있음에도 적극적인 중재는 보이지 않았다. ‘시민의 기관’을 표방한 공사가 시민의 눈 밖으로 나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다’는 말은 지금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물론 책임은 한쪽에만 있지 않다. 사측은 강압적 조치로 문제를 덮으려 해서는 안 되고, 노조 역시 모든 갈등을 법적 투쟁으로만 끌고 가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서로를 파고드는 싸움을 계속하다 보면, 결국 ‘자승자박(自繩自縛)’, 스스로의 올가미에 발이 묶이는 꼴이 된다. 문경관광공사의 갈등은 단순한 노사 문제를 넘어 문경시 공공기관 운영의 투명성과 리더십을 시험하는 무대가 됐다. 본래 공공기관의 목적은 시민을 위한 봉사와 관광산업의 발전이다. 이제는 양측 모두 ‘화이부동(和而不同)’, 조화 속의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로 대화와 협력에 나설 때다. 시민은 더 이상 노사 갈등의 구경꾼이 아니다. 시민의 눈높이에서,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답을 내놓아야 할 시간이다. /고성환기자 hihero2025@kbmaeil.com

2025-09-09

철강산업 특별법, ‘K-스틸법’ 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포항은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심장이자 산업화의 출발점이다. 뜨거운 화로와 쉴 새 없는 압연기의 굉음 속에서 이 나라는 성장했고, 포항은 늘 그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심장이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 공급과잉, 미국의 50% 고관세, 중국 저가 철강의 공세, 유럽연합(EU)의 탄소 국경 조정제도(CBAM)까지. 철강산업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격랑에 휩싸여 있다. 철강은 국내총생산(GDP)의 4.8%를 차지하며 자동차, 조선, 반도체, 국방산업까지 대한민국 산업 전반을 떠받쳐 왔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법적·제도적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 국회에 발의된 ‘K-스틸법’은 단순한 구조조정 법안이 아니라 수소 환원 제철 같은 핵심 기술 개발 가속화, 탄소중립 대응 인프라 확충, 국제 무역환경 변화에 선제 대응, 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까지 아우르는 종합 패키지다. 대통령 직속위원회 설치, 장기전략 수립, 녹색 철강 투자 인센티브, 특별구역 지정과 무역 방어 확대 권한은 이 법의 뼈대다. 이는 포항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제조업 전체의 미래를 위한 안전망이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해 자국 철강을 보호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탄소 국경 조정제도로 국경세를 부과하며, 일본도 ‘그린 철강 특별법’을 제정했다. 세계 주요국들이 앞다퉈 철강산업 보호와 지원에 나서고 있는 지금, 우리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뒤처지는 순간, 글로벌시장에서 우리 철강의 입지는 급격히 축소될 것이다. 포항은 최근 ‘산업위기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이는 당장에 응급처치이지만 근본적 처방은 아니다. 수많은 협력업체와 노동자들이 일감 감소와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등진다. 지역 상권은 매출을 잃고, 소상공인은 생계를 걱정한다. 철강의 위기는 곧 포항시민 한 사람 한 사람 삶의 위기다. ‘K-스틸법’은 철강산업의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수소 환원 제철을 비롯한 저탄소 기술은 글로벌 탄소중립 전환 시대의 생존 전략이다. 이 법이 제정되면 포항은 연구개발 거점이 되고, 청년들에게는 양질의 일자리가 제공된다. 지역경제는 다시 활기를 찾고, 대한민국은 철강을 발판으로 제조업의 버팀목을 지킬 수 있다. 여야는 모두 철강산업 특별법 제정 필요성에 공감했다. 이제 남은 것은 속도다. 더 늦기 전에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K-스틸법’을 통과시켜야 한다. 이 법안은 특정 지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제조업 전체의 존립을 위한 국가적 과제다. 국회의 결단은 국민의 삶과 직결된 책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철강은 정쟁의 도구가 아니라 국가 경제의 뼈대다. 철강을 지키는 일은 특정 기업을 위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이다. 포항의 외침은 결코 지역 이기주의가 아니다. 이는 우리 아이들과 청년,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한 절박한 외침이다. 철강산업이 무너지면 대한민국 제조업 전체가 무너진다. 국회와 정부는 이제 응답해야 한다. 시민은 하나로 연대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K-스틸법’ 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철강을 살리는 길이 곧 가정을 살리고, 지역을 살리며, 나라를 살리는 길이다. /김일만 포항시의회의장

2025-09-09

성희롱 수렁에 빠진 조국혁신당

이걸 내홍(內訌)이라 불러야 할까, 자중지란(自中之亂)이라 해야 할까? 조국혁신당이 ‘성비위’라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형국이다. 지난 4일 그 당 강미정 대변인이 당내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건의 처리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탈당 기자회견을 열었다. 심각한 사안이 제기됐음에도 이규원 사무부총장은 “성희롱은, 언어폭력은 범죄는 아니다”라는 상황 파악 못한 발언으로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사회적 파장과 논란이 커지자 7일 황현선 사무총장이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어 김선민 조국혁신당 대표 권한대행도 물러났다. 이로써 조국혁신당은 자의 반 타의 반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됐다. 조국혁신당에서 시작된 불길은 더불어민주당 최강욱 교육연수원장에게까지 옮겨 붙었다. 성희롱을 당하고 이에 문제를 제기한 피해자를 비난하는 듯한 최 원장의 발언은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고, 결국 최 원장도 스스로 자리를 버렸다. 그럼에도 조국혁신당 성비위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왜냐? 그 당에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고, 실질적인 소유주라 할 수 있는 조국 전 법무장관이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지켜봐야 하는 게 남았기 때문. 이른바 진보 진영의 성희롱과 성폭력 스캔들은 잊을만하면 터져 나오는 고질적인 악재 가운데 하나다. 현재도 보수 진영은 ‘때는 지금’이라는 듯 목소리 높여 조국혁신당에 돌을 던지고 있다. 그 돌팔매를 피해가기가 쉽지 않다. 조국 전 장관은 자신의 책을 홍보하고, 향후 다가올 선거를 위한 정치적 입지 다지기에 앞서 조국혁신당 내부 문제부터 명쾌하게 해결해야 마땅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9-08

평창 봉평, 이효석문학관의 가을

새벽 5시. 겨우 눈이 떠졌다. 알람을 5시부터 6시까지 대여섯 개를 설정해 놓았었다. 대충 준비하고 나서자 벌써 여섯 시에 가깝다. 동서울버스터미널까지, 지하철로 한 시간 계산, 7시 10분까지 모이기로 했다. 6호선에서 3호선으로, 다시 2호선으로 갈아탄다. 택시보다 마음 편한 지하철이다. 가면서 무념이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평화롭다. 평창까지 아침 일찍 출발하면 2시간 남짓이다. 춘원학회를 같이하시는 전순영 시인, 이자성 선생께서 와 계시다. 발표자들, 토론자들도 모두 제때 도착이다. 우등버스 같은 버스 안, 편안하다. 예산이 없어 쩔쩔매다 어렵게 후원을 얻어 준비할 수 있었다. 버스는 휴게소에도 들르지 않고 아침 길을 달린다. 모두 고단한 아침 잠에 빠져든 듯. 나는 장문석 선생을 붙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청한다. 그는 최근에 오무라 마쓰오 선생에 관한 책을 냈다. 오무라 마쓰오, 사에구사 도시카스, 김윤식, 1970년, 일본 좌파, 윤동주, 김지하···. 이야기는 멀리, 깊은 곳까지 흘러간다. 전순영 시인은 그 사이에 근 십 년 가까이 힘든 병을 치러내셨다 했다. 아제르바이잔 유학생 레일라는 새벽에 인천에서 출발했다. 목하, 고단한 잠에 빠져 있다. 진우동, 린커쉬도 모두 유학생, 이번 준비에 대단한 활약을 했다. 먼저 문학관에 가 플래카드도 걸고 줌 장비로 점검했다. 그러고 보니, 신주희, 김산아, 장제희, 작가들이 동승했다. 오늘 세미나에서 연구자들 발표에 질의를 해주기로 했다. 9시 반 넘어 버스는 이효석문학관 밑에 제대로 당도한다. 10시부터 시작이다. 이효석 아드님 이우현 선생과 이주리 재단 실장님이 반겨 주신다. 봉평의 이효석 문학 선양회 분들도 나오셨다. 지금은 이효석 문화제 축제 기간. 일요일인데도 문학관의 내방객이 많다. 실무를 총괄한 구자연 선생, 몹시 바쁘다. 올해의 학술행사 주제는 이효석의 문제작을 다시 해부하는 것. 발표자만 모두 여덟 명에, 질의자도 여덟, 토론자가 넷이다. 하루 행사치고는 많다. 다섯 시까지 강행군이다. 단편소설 ‘하얼빈’의 주석적 연구를 발표한 부용은 바다 건너에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야 비자가 만료된 걸 았았다던가. 줌으로 발표를 해주기로 했다. 첫 창작집 ‘노령근해’(동지사, 1931)부터 ‘해바라기’(학예사, 1939)까지, 또 장편소설 ‘화분’(인문사, 1939)과 ‘벽공무한’(박문서관, 1941)까지, 또 희곡 ‘역사’('문장', 1939년 12월)까지 발표들을 했다. 특별한 것은, 평창 작가 김도연 씨가 자신이 읽은 이효석 작품들에 나타난 평창, 진부, 봉평, 대화, 월정 같은 곳들에 대해 아주 상세하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해준 것, 그리고 정선의 시인 전윤호 씨가 와서 유머러스하고도 평온한 토론을 펼친 것. 올해 세미나 준비하면서 각별히 신경 쓴 것은 평창 분들, 내방객들까지 함께 할 수 있는 학술토론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작가와 시인들의 역할이다. 발표자들도 빠짐없이 PPT까지 준비했다. 이제 겨우 다 마쳤다. 끝나고 저녁식사하러 내려오면서, 문학관 전망대에 섰다. 낮은 산들에 둘러싸인 봉평의 푸른 들, 녹 빛들이 한눈에 너무나 시원스럽다. 학술도 학술이지만, 이 빛을 만나려고 여기 왔던 것인가. 바로 그러했을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9-08

물 맛에 대하여

순수한 물(H2O) 자체는 사실상 아무런 맛이 없다. 실제 우리가 마시는 물은 다양한 무기질과 철 망간 등의 미량 성분이 용해되어 있어 맛이 달라진다. 여기에 물의 온도, 지역, 마실 때의 상황에 따라 물의 맛이 더 다양해진다. 오래전 어떤 드라마 장면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물맛을 아느냐’라고 물었던 장면이 아직 기억에 선명하다. 물맛이 그 맛이지 따로 무슨 맛이 있겠느냐는 식의 생각이 지배했던 30대쯤이었던 것 같다. 도시의 아파트를 떠나서 시골 산자락에 터를 잡은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정원에서 하루가 시작되고 정원에서 하루가 마감된다. 따로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노동량이다. 전원생활의 절반은 풀과의 전쟁이다. 깨끗한 정원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풀을 뽑아야 한다. 잔디를 깎는 것도 사실은 풀을 뽑는 것과 유사한 행위이다. 꽃과 나뭇가지들도 적당하게 정리하여 주지 않으면 금방 볼썽사나워진다. 마당은 나의 헬스클럽인 셈이다. 시골에 집을 지을 때 뒤뜰 황토방을 지어주신 어르신께서, ‘공 변호사는 따로 운동할 필요가 없겠구먼’ 하시면서 빙긋이 웃으셨던 한마디가 아직 귓전에 어른거린다. 그 말씀은 사실이 되었다. 마당 일을 마치고 생수병을 들이킬 때면 문득 어른의 말씀이 떠오른다. 운동이나 육체노동 이후에는 계절을 불문하고 몸에서 열이 난다. 추운 겨울에도 노동 후에는 시원한 물을 찾게 되는 것이다. 특히 여름의 마당 일은 많은 양의 물을 필요로 한다. 어떤 때에는 생수 몇 통을 들이킨 적도 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맛이 있었던 것은 갈증 날 때 마시는 시원한 물이었지 싶다. 같은 이유로 밥맛은 배고플 때가 최고이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그 뜻이리라. 현대는 물맛과 밥맛을 잊은 시대이다. 체내 수분 유지를 위해 갈증 나기 전에 물을 섭취하여야 하며, 위장에 부담을 주는 폭식을 피하기 위해 때 맞춰 밥을 먹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먹고 마신다. 갈증 나지 않고 배고프지 않으니 최고의 맛난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을 수가 없다. 밥상의 요리도 웬만해서는 맛나다는 칭찬을 듣기 어렵다. 시원한 물맛은 필요와 충족, 결핍과 해소의 원초적인 합일이다. 갈증이라는 결핍이 땀 흘린 노동 속에서 절정에 이르렀을 때, 물은 단순한 수분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그 무엇이다. 바야흐로 땀을 흘리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 아니 벌써 왔을지 모른다. 사람의 노동을 대체하는 인공지능 로봇들이 인간의 물맛까지 빼앗고 있지 않은가. “노동은 최고의 사랑.” 노동으로 흘린 땀방울이 일으킨 갈증을 추구하자. 최고의 물맛을 즐기고 싶은가, 그러면 갈증을 일으켜 보라. 최고의 식사를 하고 싶은가, 그러면 굶어 보라. 땀을 흘리지 않고 시원한 물맛을 기대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고 행복을 바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현대인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갈증이 나질 않고,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육체노동을 할 일이 없으면 운동이라도 하자. 최고의 물맛을 보기 위하여 시원한 생수 한 통 들고 운동장으로!! /공봉학 변호사

2025-09-08

길은, 디테일에 있다

처서를 지나 9월이 와도 기온이 33℃를 오르내린다. 열대야도 멈추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기후변화의 디테일이다. 기계음이 시끄럽다. 모서리를 돌자, 공원 나무 가지치기 광경이 펼쳐졌다. “저 사람들은 주민이 안중에도 없나?”하고 푸념이 난다. 하나, ‘당국이 시키니까 할 뿐인데.’란 속말로 마음을 추스른다. 주민편의, 기후변화대응 같은 디테일들을 민원 없이 당국이 챙기기는 어려울 터. 나뭇가지가 잘려 그늘이 적어진다. 준 그늘에 주민은 짜증 나겠다. 티끌 모아 태산이듯, 디테일이 쌓여 전체 되는 진리를 잊고 살기 일쑤다. 그렇다. 개인이나 가정, 사회, 국가, 지구촌의 사람 삶은 디테일이 요구된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교육, 국방, 기술 등 인간 활동은 언제, 어디서나 디테일이 함께해야 한다. ‘원죄’ 개념이 말하듯, 인간 본성은 디테일이 모자라 보인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을 포털에 검색했다. 맨 앞에, “‘신은 디테일에 있다’라는 표현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그 유래를 브리핑했다. 군 제대 뒤 제철소의 실험실에서 직장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수십 년 흐른 지금까지 줄곧 느꼈던 것이, ‘문제는, 디테일에 있다’였다. 많게는 수십 단계를 거쳐야 하는 까다로운 화학성분 정량분석(定量分析)실험도 했다. 만일 중간에 한 번만 실수 곧, 디테일하지 못하면 결과가 없거나 틀린 수치가 나온다. 이때는,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황당한 경험도 여러 번 했다. 개인이나 가정, 적은 공동체라면 디테일이 부족해도 악영향은 그만큼 적을 터다. 하지만, 국가나 지구촌으로 확대되면 결과도 온 인류에 미치는 사실을 인간은 지금도 보고, 당하며, 체험하고 살아낸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미국 주도 세계 관세문제, 우리의 남북관계 등 수없이 많다. 이강덕 포항시장이 9월 1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 앞에서, “동맹국 한국에 대한 철강 관세부과를 멈춰주세요”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관세 인하 요구 시위를 벌였다. 오죽하면 이 시장이 미국에 갔을까. 중국 저가품 공세로 어려운 한국 철강제품에 50% 관세는 살인적이다. 합의문 없이, 디테일하지 못한 8월 한미정상회담 때문이리라. 우리 사회엔 ‘총체적 불신’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운다. 여러 재판을 받는 후보가 부정선거 의혹 속에 대통령이 되자, 법원이 알아서 재판을 미루는 법치주의 디테일의 몰락을 국민은 멍하게 바라보았다. 여당, 정부가 전체주의 뺨치게 밀어붙인 특검이 휘두르는 직전 대통령 부부 구속 수사란 야만의 칼날이, 국민 가슴을 가른다. 불신의 근원은 ‘부정선거 의혹’의 디테일에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존폐와 결부될 이 중대한 사안을, 우리 사회 거의 전 부문의 힘 쥔 층들은 무조건 ‘음모론 프레임’을 씌워 외면해왔다. 선거결과에 진실을 감춘 디테일이 있다는 데도, 상당수 유권자도 공명선거에 무심했다. 우리는 눈앞의 작은 이익에 홀려 진‧선‧미, 지‧정‧의, 신‧망‧애 같은 인간 근본 가치들마저 장사지내버린 걸까. 길은 디테일에 있는데···. /강길수 수필가

2025-09-08

이재명, 의외로 잘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경선 후보 시절 “야당 대표를 가장 먼저 만나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 토론회에서 “대통령이 되면 가장 먼저 누구를 만나겠느냐”라는 질문을 받고서다. 그는 “여야 대화도 끊어지고 너무 적대화 돼 있다. 대통령이라도 시간 내고 설득해서 여야 대표, 특히 야당 대표와 주요 정치인을 만나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정치라는 게 혼자 잘 사는 게 아니라 나라가 잘되고, 국민이 잘되자고 하는 것”이라며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얘기하도록 하겠다”라고 강조했다. 그 말을 이제 실현하게 됐다. 이 대통령은 오늘(8일) 여야 대표를 대통령실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한다. 오찬 뒤에는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와 단독 회동도 할 예정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해외순방에서 돌아오면 야당 대표를 불러 설명하는 게 관례였다. 야당 대표와 단독회동을 하자는 국민의힘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양을 갖췄다. 의제도 국민의힘 주장대로 제한을 없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이재명 야당 대표와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이 대표가 ‘영수회담이든, 여야 지도부 면담이든 형식은 뭐라도 좋으니, 민생을 위해 일단 만나자’라고 여러 차례 반복해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영수회담을 제안하는 참모들에게 이 전 대표의 과거 이력을 들먹이며, “내가 왜 이런 사람과 만나야 하느냐” “범죄 피의자 아니냐”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참패하고 나서야 갑자기 영수 회담을 했다. 그러나 4월 29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수 회담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대화를 계속 이어가기는 어려웠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야당과 대화를 거부한다. 그는 지난달 말 페이스북에 “상식적으로 나를 죽이려 했던 자들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대화할 수 있을까?”라며 “나의 대답은 NO”라고 썼다. 야당 지도부를 만나면 악수는커녕 눈길도 피했다. 윤 전 대통령과 판박이다. 정 대표는 국회에서 독주한다. 무조건 다수결로 밀어붙인다. 모조건 다수결로 처리하면 국회가 왜 필요한가. 일방적인 정책을 당내는 물론 야당까지 찍어 누른다. 대통령이 다수표를 얻었다고 전횡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파시스트 정당이 써먹던 위험천만한 반민주적 발상이다. 법안 처리와 의사 진행뿐 아니다. 이제 야당의 견해를 대변해 협상하는 야당 간사마저 여당 입맛대로 정하겠다고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지나치면 부러진다. 지금 국민의힘은 동네북 처지다. 약장수 같은 유튜버들의 선동이 당대표를 결정할 정도로 줏대 없이 휘둘린다. 보수 지지자들의 마음도 당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유일한 응원군이 민주당이다. 절제라고는 모르는 민주당의 강성 모드가 극우세력에게 명분을 제공한다. 민주당의 유치한 선명 경쟁 탓에 말도 안 되는 극우적 주장이 합리적 근거를 얻고 있다. “오죽하면…”이라거나 “그래도 정청래를 응원할 수는 없지 않으냐”라는 주장이 떠나던 보수 지지층의 발목을 잡고 있다. 야당의 극우화가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에 유리할지도 모른다. 강성모드로 서로 자기 표를 깎아 먹어도, 전국적인 판세에서는 그래도 불리한 게 ‘윤 어게인’이다.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긴개긴 극우화에 명분을 주고, 불씨를 지피는 언행은 역사에 죄를 짓는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스스로 무너질 ‘윤 어게인’이나 극우적 주장이다. 그런데 “민주당 하는 것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라는 말이 나오게 만든다. 극우 주장이 먹혀들도록 명분을 제공하는 것 역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공범이다. 이 대통령은 양대 노총을 만난 자리에서 “내가 편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민주당의 성공도 중요하겠지만, 대한민국의 성공이 더 중요하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그로 인해 더 발전했느냐, 후퇴했느냐가 역사에 기록된다. 두려울 게 없다. 지난 정부를 따라 할 이유가 없다. 보수 인사들 사이에서도 이 대통령이 “의외로 잘하고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조금 더 포용과 관용을 발휘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바란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9-07

그저 사사로운 나날들

그 시절 나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아버지 없는 아이가 참으로 부러웠다 안팎이 그저 고요한 사사로운 나날들이 ​ 노름판의 아버지를 찾아다니지 않고 근심으로 잠 못 드는 어매도 없고 맥없이 서성이기만 하는 할배도 없는 ​ 그토록 사소하게 지나가는 나날들이 소원이었다고, 팔순이 목전인 오라비는 아버지 산소 뒤에서 때늦은 고백을 했다 ​ 평생 지나간 일을 내어 말한 적 없는 그 뜻밖의 사건은 이를테면 누수였는데 그때는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권규미, ‘누수’ 전문 (시조21, 2025, 가을호) 권규미 시인의 ‘누수’는 그림으로 보자면 사실화이면서 내면화된 울림 또한 깊다. 담담하게 고백되는 과거의 기억은 겉만 보아서는 한없이 고요하게 서술되는 것 같지만, 내부에는 격렬한 감정의 급류가 있다. 이때 기억에 대한 모든 언술은 결국 시간에 대한 언술일 것이다. 기억이란 흘러간 시간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경험이든 순간에 깊이 파인 후 시간의 흐름 속으로 말려 들어간다. 그러니 경험을 소환해 기억하려는 자는 곧 시간과 맞서는 자일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가족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운명의 공동체다. 같은 맥락에서 한 작가는 “사랑은 폭력과 동의어”라고 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언술에 대입해 보지 않더라도 ‘가족’이란 기표는 가장 내밀한 관계어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감싸는 껍질이 된다. 시인과 가족들에게는 ‘누수’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 시절’이 있었다. 가령 “노름판의 아버지”가 있는 유년의 장소에는 드러내 놓지 못할 비밀이 함께 산다. 그 비밀은 평화롭지도 고요하지도 않은 경험으로 기억된다. 시인은 그 시절을 “아버지 없는 아이가 참으로 부러웠”고 “근심으로 잠 못 드는 어매도”“맥없이 서성이기만 하는 할배도 없는” 공간이 부러웠다고 서술한다. 시인의 파편적인 시점으로 가족을 기억하는 데 있어 “팔순이 목전인 오라비”의 “때늦은 고백”의 접목은 이러한 기억의 서사를 극화한다. 시인이 누수라고 정의한 이 “뜻밖의 사건”은 “아버지 산소 뒤”에서 일어나는데 “평생 지나간 일을 내어 말한 적 없는” 오라비의 고백은 누수로 인식된다. 이때 사건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아버지의 산소는 팔순이 목전인 오라비의 시간을 병치하며 단절되었던 그간의 시간을 복원한다. 그들에게 아버지와 함께한 날들은 장대한 시간을 경유한 불안한 경험이다. 그 시절 조각난 기억은 파편처럼 가족의 집은 실로 위태하게 직조된다. 발터 벤야민은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삶에서의 실제 체험이 아니라, 그런 체험의 기억을 짜는 일이라고 했으며, 낮 동안 짠 실을 밤이면 풀어헤치는 텍스트라는 개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작가는 프루스트였다고 했다. 바로 그 기억의 서사가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면 권규미의 시편 또한 그 지점에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시인의 시집 ‘누가 나를 놓쳤을까’(가히, 2025)에는 체화된 기억이 순장된 신화적 공간과 접목하는 정황이 두루 포착된다. 기억은 사랑이었든 폭력이었든 돌이킬 수 없다. 이때 그들이 바라는 건 ‘대화’다. 그것이 뜻밖의 누수이었건 고백이었건 말이다. 시인이 기억을 시로 복기하기 위해 선택한 오라비의 나이는 팔순이 목전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아버지와 오라비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난 때늦은 고백은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끝내 멈추어 설 것 같지 않다. “그때는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럴 때 기억은 어떻게 깃드는 것일까.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가장 비극적인 순간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고를 것인가. 이것이 시인의 선택이었다. “그토록 사소하게 지나가는 나날들이 소원이었다고” /이희정 시인

2025-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