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오는 속을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다. 부부가 되기로 언약한 인생의 시작이 꽃길이다. 저렇듯 모두가 축복하는 속에서 두 사람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팔짱을 끼고 함께 걷는 걸음이 행복해 보인다. 이제 시작하는 그 걸음이 늘 꽃비 속을 거니는 일상이었음 좋겠다.
예식장 방문 후에 어머니에게도 꽃바람을 쐬어 주고 싶었다.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여쭈니 H 할머니를 만나고 싶어 했다. 어머니는 H 할머니에게 결혼 부조금을 받기만 한 것이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다. 빚도 갚을 겸 안부가 궁금한 것이었다. 경산의 요양원으로 향했다. 대구를 넘어서 요양원 인근으로 가는 길옆 밭에는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산에는 진달래가 피었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논밭을 지나 언덕 위의 요양원으로 가는 길에 벚꽃이 터널을 이루었다. 그 길을 따라 굽이진 도로 끝에 요양원이 자리한다.
“죽으려고 들어왔잖아.”
여기서는 죽어야 나가지, 죽기 전에는 못 나간다. 첫 마디가 가슴에 맺힌 한을 토해낸다. H 할머니와 우리는 어릴 적 한집에서 살았다. 6·25로 신랑을 잃고 아들 하나만을 믿고 살아왔다. 나이 90에 아직도 꼿꼿한 허리는 건강을 말해 주지만 자식을 생각함인지 여기 들어올 때는 기어서 다녔다고 묻지도 않은 얘기를 두 번씩이나 한다.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감쌀 수밖에 없는 부모의 마음이 슬픈 멜로디로 천천히 흐른다. 그 마음을 아는지 창밖에는 꽃비가 내린다.
유족 연금으로 병원비와 약간의 용돈만을 받는다고 한다. 벌이가 없는 자식이 연금을 떼어서 생활비로 쓰고 있으며, 입원 후 아이들이 이사하여서 집도 모른다고 한다. 자신이 살던 집은 손녀의 결혼 자금으로 쓰이고 갈 곳 없는 할머니가 갈 곳은 요양원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현대판 고래장은 요양원 밖으로 어머니를 보내지 말라는 며느리의 요구를 철저하게 이행한다. 돈을 주는 사람의 목소리를 따를 수밖에 없는 못난 자본주의의 틀이다. 철저한 틀이 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벚꽃이 날리는 뜰에서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만나지 못한 그동안의 이야기를 천천히 나누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는 벚꽃이 핀 뜰을,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오랜만에 만남을 축복이라도 하듯이 꽃잎은 주위를 가득 메웠다. 이제 곧 끝이 날 만남이 아니라 긴 만남을 축복하는 꽃비였으면 좋으련만.
돌아오는 길에 경산의 한의대학교 캠퍼스를 차로 돌았다. 벚꽃이 가득한 길을 따라 올라갔다. 어머니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활짝 핀 벚꽃에는 관심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잿빛이 되어가는 엄마의 모습이 안타깝다. 눈물처럼 바람에 떨어지는 꽃비가 저리로 날린다.
어제도 사위에게 맞아 죽은 장모의 시신이 캐리어에 이삿짐처럼 담기어 신천을 떠돈다.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천박한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일터로만 내몰고 가정을 돌보는 일은 모른 체 한다. 아버지로도 모자라 어머니마저도 돈을 벌게 만들고 아이들은 돌봄센터를 전전한다. 지친 잠결에 부모를 보고 소젖을 먹고 자란 아이는 어쩌면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는지도 모른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좋은 음식을 먹고 비싼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는 것일까. 삶은 과정이다. 부족한 음식이라도 함께 나누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 아닐까. 옆에 있는 이웃을 알고 친구를 만나고 취미가 같은 사람끼리 모여 차를 나누며 좋아하는 걸 하고 살 때 우리는 더 많이 웃지 않을까. 혼자 휴대폰을 들고 시간을 보내기보다 친구와 공을 차는 게 더 인간답지 않을까. 삶에 지쳐 사는 것이 힘들다고 여길 때라도 우리는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식장에도 요양원에도 꽃비는 내린다. 꽃비 속에서 두 사람은 새로운 출발을 꿈꾸고, 다른 두 사람은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나눈다. H 할머니를 두고 돌아서는 마음이 먹먹하다. 돌아오는 길에도 꽃비는 내리는데 따뜻하지 않음은 비가 가지는 속성 때문인가.
/김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