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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청보리 바람이 머무는 섬

바람결마저 푸르렀던 5월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사는 섬 중 가장 낮은 섬인 가파도에 다녀왔다. 가파도는 이름에 얽힌 설이 여럿 있었다. 파도가 섬을 덮었다고, 생긴 모양이 가오리를 닮았다고 해서, 물결이 더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가파도는 섬의 특성상 바람과 파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날씨가 화창해도 섬에 들어갈 수 없는 날이 많다고 한다. 나는 운 좋게도 모슬포 운진항에서 출발하는 그날의 마지막 연락선을 탈 수 있었다. 출렁이는 수면 위로 뱃머리가 천천히 나아갔다. 저 멀리 구름 아래 떠 있는 섬이 서서히 가까워지자 내 가슴은 기대감으로 설렜다. 상동포구에 다다라 배에서 내리자마자, 제주올레 10-1코스인 ‘가파도 올레’를 걸었다. 그러나 마음에 닿는 곳이 보이면 샛길로 빠져 해안도로를 걷기도 하고 마을길을 걷기도 했다. 오솔길 따라 쉬엄쉬엄 걷다가 숨이 멎을 듯한 청보리의 물결을 보았다. 푸름이 바람에 밀려왔다가 밀려가며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풀잎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포항에서 살아온 나는 해마다 봄이 오면 구만리 보리밭에 간다. 언덕 위에서 바다를 향해 살랑살랑 나붓거리는 보리를 보며, 늘 겨울의 끝이자 봄의 시작을 체감한다.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의 물결이 계절을 지나가게 하고, 보릿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이 어느 시절의 꿈처럼 다가오곤 했다. 나에게 들숨마다 봄의 향기를 실어 나르는 푸른 숨결인 보리를 섬에서도 만났다. 가파도를 뒤덮은 푸르름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반가움이었다. 봄빛을 머금은 청보리는 바람 따라 쉼 없이 출렁였다. 마치 바다 위에 또 다른 바다가 피어난 것 같았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보리의 이마는 가볍게 눌렸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 질서 있고도 유연한 움직임을 바라보며, 나는 한흑구 선생님의 수필 「보리」를 떠올렸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누리는 푸른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른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한흑구 선생님께서는 수필은 시의 정신으로 창작되어야 하고, 철학이 그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실제로 그의 수필집 ‘동해산문’을 읽어 보면, 시적인 명문장들이 빛을 발했다. 보리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내가 섬 안으로 스며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람은 내 등을 떠밀지도 앞서 끌고 가지도 않았다. 그저 함께 머물렀다. 한참을 걷다 보니,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소망전망대가 나왔다. 높은 곳이라 해도 해발 20.5m로 언덕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그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뜻밖에도 크고 넓었다. 보리와 바람, 낮고 둥근 지붕들, 그리고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제주 본섬과 한라산은 감동적이었다. 가장 낮은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을 본다는 것은 매력적이었다. 그 순간, 마치 땅끝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발밑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이 펼쳐지고, 시선 끝에는 구름을 이고 선 한라산이 조용히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말없이 하나로 엮여 있는 섬은 오래된 시간처럼 존재했다. 바다와 바람 사이에 떠 있는 가파도에서, 나는 높이와 깊이의 감각을 동시에 느꼈다. 멀리 있는 산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듯했고 나의 마음은 고요한 풍경 속으로 천천히 침잠했다. 가파도에서 만난 섬사람들은 말수가 적었다. 그들은 밭일을 하다가도 바다에 잠시 눈길을 주다가 곧바로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보리처럼 허리를 숙이고 살아가는 강인한 눈빛의 사람들을 보니 내 가슴이 뭉클했다. 섬의 바람을 이겨내고 있는 것은 보리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도 함께였다. 섬사람과 청보리는 바람에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뿌리를 더 깊게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섬에 머무는 동안 나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는 더 머물고 싶었지만, 머무름의 끝이 곧 떠남이라는 것을 알았다. 돌아오는 배에서 뒤돌아보니, 섬은 점점 멀어지고 청보리는 점점 작아졌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남은 보리는 더 넓고 깊게 자라고 있었다. /정미영 수필가

2025-07-02

백경(白景)에 빠지다

누구의 손으로 빚어진 작품일까. 책장을 세운 듯 깎아지른 벼랑을 품고 여기저기 돌들이 꽃을 피웠다. 유월의 산은 더욱 짙어져 솔숲 사이로 불어오는 푸른 바람이 청량하다. 푸른 솔과 땅이 청송을 이루고 골짜기와 꽃돌이 만난 신성계곡, 지질공원으로 들어서는 길목부터 수려한 풍광이 펼쳐진다. 개울 건너 벼랑 위에 정자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조선 후기에 세운 방호정이다. 정치싸움에 염증을 느낀 선비들이 은거하며 백석탄 팔경(白石灘 八景)을 노래한 곳이다. 여덟 폭의 문을 열고 마루 끝에 서자 발아래가 절경이다. 계곡으로 내려간다. 빨래를 끝낸 하얀 천을 툭툭 털어 펼쳐놓았는지 개울 섶이 온통 하얗게 빛난다. 모래 알갱이 중에서도 풍화와 침식에 강하고 색깔이 흰 석영 입자로 생성된 사암이다. 바위가 물들게 했는가, 물이 바위를 채색했는가. 백석탄에서는 바위를 휘감고 도는 물조차 희게 보인다. 천상의 조각가들이 죄다 내려와 솜씨를 부렸는지 그 경치가 신묘하다. 조각가들은 굽이굽이 능선을 오래토록 깎아 완만하게 만들고 봉긋봉긋한 산꼭대기를 매끄럽게 다듬었다. 흰 색으로 빛나는 돌들을 옹기종기 모아 크고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웅덩이에 하늘을 그대로 내려 앉히고 그 위에 수초를 띄웠다. 바위 위에 망치와 정으로 재주를 부려 동그라미, 가오리, 뾰족한 물고기 모양의 돌개구멍도 팠다. 햇볕이 들지 않는 곳에는 이끼꽃을 그려 넣고 넓은 면에는 금을 그어 조화를 맞추었다. 앞에 돌이 놓이면 뒤의 돌은 병풍이 된다. 뒤의 돌이 옆의 돌과 이어져 맥을 잇는다. 산맥은 달리다가 잠시 한숨을 고르며 너른 들판을 만들고 다시 봉우리로 치솟는다. 아래로 미끄러진 능선은 주름 같은 골짜기를 이루고 그 사이로 물이 흘러내린다. 햇빛, 바람과 물에 돌은 갈리고 닦이고 다듬어진다. 골짜기마다 돌꽃들이 만개한다. 희디흰 돌에서 천지가 창조된다. 지상의 하얀 산들이 모여 경연을 펼친다. 알프스의 몽블랑이 자태를 뽐내는가 하면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가 백 년 설을 이고 있다.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와 아메리카 로키산맥이 설산의 자웅을 겨룬다. 이에 빠질세라 백두산이 천지를 머리에 인 채 대륙을 내려다보고 겨울 설악산과 개골산이 장엄하게 내려앉아 근육을 드러낸다. 산과 산 사이에는 눈 덮인 시베리아처럼 하얀 평원이 펼쳐진다. 천하의 명산들을 배경으로 여인이 요염한 자세로 누웠다. 도도한 자태와 백옥 같은 눈부심으로 보아 동양의 비너스로 불릴 만하다. 저쪽에서 불끈 치솟은 남근석이 늠름한 모습으로 비너스를 바라본다. 혹시, 이 계곡 어딘가에 생산의 여신과 창조의 남신이 사는 것은 아닐까. 돌조차 음과 양의 운행에 맞추어 빚어낸 관능미 앞에 숨이 막힌다. 절경에 빠진 사이. 세상을 천연색으로 밝히던 해가 서녘으로 기운다. 낮 동안 입은 옷을 툴툴 턴 바위가 태양빛에 타다만 피부를 재생시키려는지 이내를 몸에 감는다. 척척 바위를 감아 돌던 푸른빛은 그림자로 서로를 덮는다. 찬 기운 에도는 물결과 골짜기를 휘돌아온 서늘한 공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온몸을 내놓는다. 물소리가 자욱해지면서 서로의 그림자가 포개지고, 이윽고 하얀 천지는 시나브로 검게 물들어간다. 빛이 사라지는 자리에 안개가 스며든다. 남은 빛과 안개에 싸여 흰 빛은 푸르스름하게 변하더니 옥색으로 치장한다. 속까지 색깔이 배일까만, 백석탄이 푸른빛으로 채색된다. 그림자와 그림자가 합쳐져 낮에는 보지 못한 형상들이 꿈틀거린다. 잔금들이 살아온 날들의 지문처럼 남은 백석. 점점 사위가 컴컴해지더니 나를 감싸고 있던 흰 돌들의 그림자가 낮에는 볼 수 없던 풍광을 연출한다. 어둠은 한 부분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명암으로 말하는 흑백사진처럼 빛과 어둠의 하모니가 드라마틱하다. 이제부터는 음의 시간이다. 세상이 잠들면 물소리는 더욱 커지고, 달뜨면 달빛 받아 백색 천지는 더욱 하얗게 빛날 것이다. 천지창조의 비화(秘話)를 두고 한 폭의 환상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다. 아득한 옛날로 시간여행이라도 다녀온 듯 몽롱하다. /배문경 수필가

2025-06-25

순두부찌개

멀리 사는 딸네 식구가 간만에 집에 온다. 누나가 온다는 소식에 아들도 오겠다고 한다. 뭐가 먹고 싶으냐고 묻자, 망설이지 않고 하나같이 “엄마가 손수 끓인 순두부찌개”라고 했다. 때마침 길 건너에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라 다행이다. 장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두부를 전문으로 하는 가게로 향했다. 김이 나는 두부 모판 옆에 봉지 두 개가 서 있다. 두붓물에 잠긴 순두부의 따뜻함과 몽글한 순도가 마음에 든다. 냉장고를 뒤져 양파를 다듬고 당근을 깎는다. 파와 고추 곁에 잘게 썬 애호박을 담는다. 조갯살을 넣을까 하다가 딸과 아들의 입이 기억하는 비계가 붙은 돼지고기를 꺼낸다. 고추기름을 만들고 고기부터 볶기 시작했다. 빨간 국물을 보는 순간, 차고 방에서 만났던 그녀가 떠오른다. 손이 저절로 옛 기억의 맛을 쫓아가고 있다. 30년 전, 남편의 첫 사업 부도로 나는 집에만 있을 수 없었다. 유치원생인 딸과 어린이집 다니는 아들의 오후를 미술학원에 맡기며 내가 간 곳은 수학 학습지 사무실이었다. 오전에 전화로 학부모를 먼저 설득해야 했고, 오후에는 학생의 학습 수준에 맞게 수업 단계를 정해 선생님을 배치해 주는 일이었다. 새벽부터 비가 내렸던 그날, 아들 녀석이 눈 뜨자마자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칭얼거렸다. 기어코 눈물 콧물이 범벅된 녀석을 선생님 손에 넘기고 돌아섰다. 아이는 얼굴을 창문에 붙이고 엄마를 부르며 울었다. 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단계별 학습지가 담긴 가방을 메고 사무실을 나왔다. 빗속을 걸어 미리 약속한 주소를 찾아 골목을 헤맸다. 주소지를 들고 간 곳은 가정집 차고지를 개조해 만든 단칸방이었다. 집 안이 훤히 보이는 곳에 학생의 엄마가 홀치기 틀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가 하는 일에 방해될까 봐 한참 비속에 서 있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들어서자, 그녀가 반갑게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리라던 그녀는 재바르게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학습지 가방을 열어보지도 못한 채 허둥거렸다. 내 등 뒤로 학교에서 돌아온 남자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빗물에 젖은 발을 씻고 들어오는 아이와 함께 얼떨결에 나도 둘레 밥상 앞에 앉았다. 갓 지은 밥을 세 그릇 올린 그녀는 가운데에 보글보글 끓는 순두부찌개 냄비를 놓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내게 그녀는 매일 아들의 하교 시간에 맞춰 새 밥을 짓는다고 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은 따뜻하게 배부터 채워야 한다며 웃었다. 고추기름에 어우러진 찌개를 보자, 아침도 먹다 만 내 배에서 소리가 났다. 내 숟가락은 염치도 없이 들락거렸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허기진 마음까지 몽글해졌다. 상을 물리고, 학습지를 풀던 아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동글납작한 아이를 보자, 유리창에 코를 문대며 울던 아들이 생각났다. 나는 애써 웃으며 문제 푸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막힌 곳을 뚫어주자, 아이는 거침없이 풀어나갔다. 그녀는 멀찌감치 앉아 홀치기를 하며 웃었다. 학습지 하는 아이를 뿌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나는 순두부찌개 요리법이 적힌 종이를 받아왔다.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그녀가 말한 순두부를 샀다. 나는 그녀의 솜씨를 어설프게나마 흉내 내 밥상에 올렸다. 찌개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남편과 아이들이 이내 밥 한 그릇과 찌개 그릇을 비우고도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국물까지 마신 아들이 나를 보며 웃었다. 어스름 속에 비가 그치고 있었다. 그 후로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 순두부찌개를 끓인다. 고추기름을 내면, 오랜 기억 속으로 들어가 갓 지은 밥 냄새를 맡고, 돼지비계가 뜬 순두부찌개를 떠먹는다. 세월이 흠씬 지나버린 지금도 그 둘레밥상을 기억한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다 모인 밥상이 시끌벅적하다. 딸과 아들의 숟가락이 찌개냄비에 먼저 간다. “바로 이 맛이야.” 조미료를 넣지 않은 자리에 뭔지 모를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아들의 말에 딸이 “정성”이라며 맞장구친다. 정성보다 허기진 내 마음을 채워주었던 그녀가 함께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비가 내리지 않아도 순두부찌개가 맛있는 밤이다. /윤명희 수필가

2025-06-18

소나무 향 따라 맨발로 걷는 북천수

포항 북송리 북천수(北川藪)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숲 중 3번째로 긴 숲이다. 조선 철종 때 조성된 북천수는 오래된 지명의 향기를 지닌다. 북천의 숲이라는 뜻으로 곡강천의 다른 이름인 북천에서 유래했다. 예로부터 주민들은 북천의 물길을 따라 논과 밭을 일구었다. 가물어도 북천수가 마르지 않으니 생명의 젖줄이라 불렀다. 그 세월을 말하듯 지금도 그 옆길을 걷다 보면 시간이 잠시 숨결을 고르는 듯하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그 길에 들어선다. 소나무가 드리운 그늘 아래여서 햇살도 새소리도 부드럽다. 북천수 산책로는 잔돌과 흙이 동시에 밟혀 나 같은 맨발 걷기 초보자에게는 발걸음을 떼기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맨발로 걷는 경험은 눈이 아닌 발로 세상을 다시 읽어내는 일이 아닌가. 흙의 온도, 잔돌의 감촉, 마른 솔잎의 간지러움까지, 나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발바닥이 전달하는 감각으로 주변을 인식하기 위해 노력해 본다. 세상과 나 사이에 있던 어지러운 고민들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 같다. 문득 김훈 소설가의 ‘자전거 여행’ 책 속 문장이 떠오른다. “나는 걷는다. 걷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다.” 걸음을 옮기며 시공간을 통과하는 행위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유의 흐름에 빠지게 된다는 의미인 것 같다. 작가의 표현처럼 나는 북천수 솔숲 길을 맨발로 걷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왜 늘 빠르게 걸었을까. 무엇을 향해 그리 바삐 살아왔던 걸까. 내 이마에 땀 한 줄기 흐르고, 저녁노을이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 스며들기 시작할 즈음, 나는 한동안 생활하면서 천천히, 여유롭게, 걷는 법을 잊고 지냈던 일상을 회상한다. 북천수를 거닐 때처럼 느리게 걸어야 바람의 결을 느낄 수 있고, 나무 향을 맡을 수 있으며, 풍경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에 솔향이 섞여온다. 곧게 뻗은 소나무 숲은 바람을 타고 진한 송진 냄새를 풀어낸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시간, 마음속 깊이 잠들었던 유년시절 고향의 뒷산 소나무 숲에서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기억의 편린이 불쑥 되살아나 잠시 그리움에 젖어든다. 솔방울을 던지다가 다람쥐나 청설모를 만나면 그 뒤를 쫓아 내달리던 추억이 생각나서 웃어본다. 소나무 우듬지 사이로 새가 날고 있다. 이름을 모르는 작은 새가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옮겨 다니며 노래한다. 어떤 날은 곤충이 지나가며 흔적을 남기는 것을 보고, 또 어떤 날은 반려견이 가족과 발자국을 흙 위에 찍고 지나가는 것을 본다. 이 숲길은 사람만의 길이 아니다. 새와 곤충, 동물이 함께 다니는 생명의 오솔길이다. 산책로 중간쯤에는 오래된 정자가 있다. 사람들이 앉거나 누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편안한 자리다. 나도 그곳에서 고요히 눈을 감는다. 그러면 햇살이 내 무릎 위에 가만히 내려앉고 나뭇잎 그림자가 내 등에 업힌다. 포근하다. 그 순간부터 정자는 나에게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마음이 한 뼘 자라는 공간이 된다. 때마침 북천수 소나무가 노래를 들려준다. 솔바람과 새와 더불어 나지막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마치 시간이 흐르는 소리 같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할 때였다. 맑은 물소리와 한데 어우러져 하얀 비누 거품이 떠내려가던 그 장면처럼, 북천수도 지금 그렇게 시간을 씻어 내며 흐르고 있는 듯하다. 나는 다시 걷는다. 맨발로 조심조심 한 발자국씩 내딛는다. 발바닥이 말해주는 촉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며, 소나무 향기를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발끝으로 세상을 느끼고, 차분한 숨결로 시간을 받아들인다. 그 단순한 행위가 지금 내 마음을 맑게 비운다. 내가 걷는 북천수 길이 곧 생각의 자리이자 삶의 중심이 되는 것 같다. 나의 두 눈 가득 맺히는 북천수 길이 정겹다. 앞으로도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소나무 향기를 따라 맨발로 걸으리라. 북천수에서의 저녁, 붉은 노을이 숲에 번지면 새들이 날아든다. 그 풍경을 눈에 담으니, 소나무 숲에서 위로받은 나의 하루가 조금은 더 단단해진 느낌이다. /정미영 수필가

2025-06-11

쪽빛에 물들다

자신의 색깔을 찾아서 술래가 된 친구에게 간다. 쪽빛 바다를 감고 골짜기를 굽이도는 길에 설렘이 일렁인다. 푸른 산 기스락에 도착하자 어느새 서녘이 노을빛으로 물든다. 민낯으로 반기는 친구의 얼굴이 비 갠 하늘처럼 말갛다. 흙빛이며, 먹빛이며 밤 이슥하도록 나누는 이야기에 별빛이 반짝 내려앉는다. 별이 사그라진 무렵, 친구가 나를 깨운다. 눈 밑에 덕지덕지 붙은 잠을 새벽바람이 몰아낸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자 밤새 물을 빨아올린 쪽에 자줏빛이 촉촉이 올랐다. 연보라 꽃을 한 두 송이 물고 있는 쪽은 아침이슬까지 머금어 색깔이 절정에 이르렀다. 햇살이 꽃눈을 틔우는 봄부터 풀빛 바람이 산모롱이를 에도는 여름까지 오롯이 쪽에 담겼다. 친구가 두 계절을 낫으로 베어 내게 한 아름 안긴다. 풋풋한 풀냄새를 맡자 온몸에 쪽빛이 번지는 것 같다. 친구가 소매를 걷어붙인다. 쪽을 맑은 물로 헹군 다음 항아리에 반쯤 채운다. 항아리에 물을 붓고 그 위를 돌로 지그시 눌러둔다. 비닐로 덮고 숨구멍을 뚫어주면 다음은 기다림이다. 하안거(夏安居)에 들어간 쪽은 체액을 배출하고 물은 그것을 받아들이며 둘은 끊임없는 교감을 나눈다. 땅을 달구는 태양열에 쪽이 발효되면서 물은 그 빛을 온전히 수용한다. 어둠 속에서 쪽과 물이 하나가 되고 다시 빛이 들면 쪽은 색깔로 자신을 말할 것이다. 여유를 즐기는 것도 산골의 일상 가운데 하나다. 뜨거운 물을 다기에 부어 작년에 말려둔 국화차를 우려낸다. 친구가 산골에 들어와 해와 달의 주기에 맞추기까지 사계절이 세 번이나 순환했단다. 염료를 구하려면 때를 맞춰야 하고 그 색깔을 우려내려면 땀을 흘려야 했다. 그렇게 도시에서 묻은 때를 씻어내면서 시나브로 자연에 물들었다. 국화차 한 모금 머금자 정겨운 담소에 노란 향기가 더해진다. 며칠 묵힌 항아리를 연다. 쪽잎에서 녹색 기운이 사라질 즈음 한 번 뒤집는다. 첨벙첨벙 물이 흔들리면서 쪽은 바깥공기로 숨을 쉰다. 어둠에 싸여있던 쪽은 그제야 한 줄기 빛을 받아 물에게 자신의 빛을 내놓는다. 마지막까지 제 몸을 우려낸 쪽을 건져 항아리 위의 횃대에 걸친다. 늙은 부모의 속살처럼, 쪽은 이제 알갱이는 물에 내어주고 쪼그라든 껍질만 남았다. 자신의 가치를 빛깔로 남기면서 할 일을 다 한 쪽은 훨씬 자유로워졌다. 암녹색 물에서 풀냄새가 풍긴다. 패각회를 항아리에 넣고 대나무로 휘젓자 기포가 생긴다. 바가지로 퍼서 고운체에 거르자 찌꺼기가 물과 분리되면서 쪽빛은 본연의 색으로 서서히 드러난다. 심연의 색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듯 항아리 속의 물을 퍼 올린다. 잿물을 넣어 쪽 발을 세운 다음 미리 빨아놓은 천을 조금씩 담근다. 천으로 옮겨가는 물은 처음에는 녹색으로 보이다가 건져내면 청색으로 변하는 마법을 부린다. 적시고 말리기를 거듭할수록 쪽빛은 더욱 깊어진다. 둘이 마주서서 천을 길게 펼쳐든다. 친구와 나 사이에 쪽빛 길이 난다. 생명의 기원인 바다, 바다색에서 남색 그리고 감청색까지 점점이 깊어지는 색은 볼수록 신비롭다. 처음에는 하늘색이다가 바다색으로 변한다. 깊이를 더한 쪽빛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심연에 닿아 꿈의 색깔이 된다. 내 본연의 색깔은 무엇일까. 이십대를 지나면서 빛이 바래다가 엄마가 되면서 유년의 색깔은 흔적 밖에 남지 않았다. 가끔 내 속을 들여다보면 물색이기도 하다가 더러 사라진 꿈의 색깔이 희미하게 스치기도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쪽처럼 친구는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의 색을 펼치고 있다. 자신을 다 내 놓고 영혼을 우려내야 완성되는 빛,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진 쪽빛은 내일이면 더욱 짙어질 것이다. 천을 펴서 빨랫줄에 널고 바지랑대를 높이 세워 바람을 부른다. 천이 만장처럼 펄럭이자 바람조차 푸른빛을 머금는다. 바람에 실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으로 가면 나의 빛깔을 찾을 수 있을까. 바다로 뛰어들어 수면 아래로 유영하다가 심연에 닿으면 태곳적부터 내려온 그리움의 색을 만날 수 있으려나. 그리움에도 빛깔이 있다면 쪽빛이 아닐까. 오늘은 내 마음도 쪽빛으로 물든다. /배문경 수필가

2025-06-04

두 글자를 새기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해.” 나는 아들에게 자주 말했다. 자신이 흘린 땀과 시간은 자아를 단단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험을 앞둔 날이나 대회에서 고배를 마신 뒷날, 작은 성취 앞에서도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가 성실하게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면 그 여정 속에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결과에 욕심낼 때가 있었다.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를 기원하거나 안정된 기업에 취업하기를 바랄 때는 부모로서 간절히 결과에 집착했다. 아들의 어떤 실패는 나 자신의 좌절보다도 더 아프게, 더 무겁게, 더 쓰라린 상처로 내게 남았다. 아들이 성취하고자 했던 것으로부터 멀어질 때면, 마치 실패의 날 선 조각들이 내 안으로 들어와 가슴팍을 긁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통은 자식뿐만 아니라 그를 품고 살아온 나에게도 전이되었다. 그래서 결과에 매달렸다. 이럴 때에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또한 살면서 과정이 중요한지, 결과가 중요한지, 내 마음속에서 의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 내게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해준 여행이 있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방문했을 때였다. 가우디의 흔적은 종교를 초월한 울림을 주었다. 돌마다 기도가 새겨져 있는 것 같은 조각품을 보니 가슴이 벅찼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자 시간의 성소에 머문 듯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친 빛이 시간 위로 내려앉아 성스러웠다. 경외와 경이, 그 사이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며 빛을 올려다보았다. 믿지 않는 사람조차 기도하게 만들고 경건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나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만드는 공간 앞에서 말없이 오래 서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대성당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장관이었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을 붙잡은 건, 화려한 첨탑이나 섬세한 장식이 아니었다. ‘아직도 공사 중’이라는 대성당의 완성되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대성당은 1882년에 착공해 지금도 짓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완성된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한다. 안정감과 질서를 주고 결과로서의 성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성당 앞에서는 미완의 건축물인데도 경외감을 느낀다. 완성이 아니라 과정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에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완성이라는 순간보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 속에서 더 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면, 완성은 그 자체로 정지된 상태다. 반면에 짓고 있는 것은 살아 있다. 변화하고, 이어지고, 다음 세대로 흘러간다. 대성당은 가우디가 짓지 못한 부분을 지금의 장인들이 이어가고 있다. 대성당의 미완성은 단순한 불완전이 아니다. 가우디의 신념이 세월을 통과해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 끊임없는 ‘도전’의 시간, ‘이어짐’의 마음이 곧 아름다움이었다. 언젠가는 완공될 그날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더 진실한 현재다. 그제야 나는 아들에게 결과보다 과정이 소중하다는 것을 왜 말했는지 깨달았다. 우리네 삶 또한 미완성의 대성당처럼 매 순간 완성을 향해 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간혹 실패를 하더라도 결과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실패를 이겨내는 힘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곳에서 인식했다. 성취보다 더 오래 남는 건 결국 살아온 시간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가우디의 묘소가 있는 대성당에 머무르니, 공간이 내 감정을 일깨웠다. 공간에 나의 기억이 보태지면 특별한 장소가 되어, 공간에 대한 사랑인 토포필리아(topophilia)를 느낀다고 한다. 과정이라는 두 글자를 새기며 대성당의 품안에서 토포필리아를 만끽했다. /정미영 수필가

2025-05-28

새순의 향연

산이 아기 엉덩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오릅니다. 푸른 물을 머금은 나무들을 보면 마음부터 바빠집니다. 팝콘 터지듯 하는 꽃보다 연초록의 새잎에 마음을 뺏깁니다. 꿈틀거리는 새순의 옹알거림에 귀가 간지러운 날입니다. 스물 두어 살 즈음 4월의 그날, 내 눈에 비쳤던 그 연두 빛을 잊지 못합니다. 점심시간이면 으레 찾는 구내식당 밥이 싫었습니다. 친구와 나는 밥 대신 빵과 우유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뒷마당으로 가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멈췄습니다. 봄 햇살이 초록물감보다 노랑물감을 약간 더 섞어서 잔디밭에 훅 뿌린 것 같았습니다. 풋내가 확 덮쳤습니다. 새순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는 눈부심 속에 말없이 한참이나 앉아있었습니다. 봄이 오면 입이 먼저 엄마를 기억합니다. 가죽나무 순에서 엄마 냄새가 납니다. 친정 텃밭 한 귀퉁이에 가죽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가죽나무 순으로 김치를 담았습니다. 식구 누구도 아닌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봄 내내 엄마의 냄새를 즐겼습니다. 봄을 기다리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나의 봄도 사라졌습니다. 나는 이십여 년 동안 그 맛을 지어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경주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잠시 시골집에 살 때였습니다. 옆집 할머니가 엄나무 순을 한 소쿠리 가져오셨습니다. 도시에서 온 우리가 먹을 줄 아느냐며 먹는 방법을 여러 가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눈만 끔뻑거리던 나는 가장 쉽다는 방법을 택해, 끓는 물에 살짝 데쳤습니다. 초고추장을 찍어 입에 넣는 순간, 엄나무 새순이 내 입맛을 홀렸습니다. 그동안 최고의 봄나물인 줄만 알았던 두릅이 엄나무 순에 밀려났습니다. 올해도 텃밭 한 귀퉁이에 보랏빛 제비꽃이 핍니다. 논둑에 냉이 꽃이 피고, 달래가 지천입니다. 텃밭에는 하얗게 완두콩 꽃이 피고, 부추와 쪽파가 자리를 잡습니다. 된장찌개 끓일 때마다 넣을 냉이와 달래까지 냉동실에 저장해 두었습니다. 쑥에 생콩가루를 묻혀 봄을 저장합니다. 비 내리는 초 여름날 저녁, 쑥국으로 마음을 채울 것입니다. 모양이 비슷한 씀바귀와 고들빼기를 분류합니다. 씀바귀를 무치고, 고들빼기김치를 담습니다. 쌉싸래한 맛이 입안에 맴돕니다. 나는 이제 봄나물을 만지고 먹어야 봄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첫물인 부추로 김치를 담급니다. 양념 묻힌 쪽파를 통에 가지런히 담습니다. 김치 안 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살짝 데친 머위를 김치 담그듯 양념에 무쳐봅니다. 된장으로 맛을 낸 것과는 또 다른 맛입니다. 시골 장에서 가죽나무 순과 초피나무 순을 샀습니다. 초피나무 순으로 장아찌를 만들고, 가죽나무 순을 만집니다. 인터넷을 뒤져 엄마의 맛을 내는 방법을 찾아봅니다. 그 맛이 나지 않습니다. 다시 또 해 봅니다. 어지간히 따라간 것 같은데 엄마 냄새는 없습니다. 김치 통 하나 채우려면 얼마만큼의 가죽나무 순이 필요하고, 고추장 단지가 움푹 비어버린다는 것을 이제야 압니다. 나도 엄마처럼 김치 통에 가죽나무 한 그루 담습니다. 아들과 딸에게 반찬 한 번 변변히 보내지 못했습니다. 가죽 나물을 먹을 때마다 엄마가 떠오르는데, 내 자식들은 언제 내가 생각날까. 이제야 애들을 생각합니다. 쑥을 한 움큼 보내겠다고 하자, 전화기 너머 딸애의 목소리가 뜨악합니다. ‘어떻게 하라고’가 말끝에 들려옵니다. 조금이라도 먹여 볼 요량으로 저마다 고유의 향과 맛을 가진 봄나물을 나열합니다. 바로 먹을 수 있도록 해서 보내겠다고 해도 손사래 치는 딸이 보입니다. 봄나물은 긴 겨울을 이겨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맛이 그냥 생긴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세월도 그냥 지나온 게 아니 듯이요. 세파를 헤쳐 온 내 안의 세월이 봄나물을 끌어당깁니다. 겨우내 무뎌졌던 감각을 새순의 향기로 깨웁니다. 겨울을 이겨낸 쌉싸래한 맛으로 또 한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돌나물 물김치까지 곁들여 식탁 가득 차립니다. 새순의 향연을 함께 즐길 엄마가 없어 서러운 봄날이지만, 나는 새순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윤명희 수필가

2025-05-21

데칼코마니

봄기운이 만연한 오후에 산책을 나갔다. 바람은 따뜻하고, 꽃나무들은 봉오리를 터뜨렸다. 길에 꽃잎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어 벚꽃, 개나리, 철쭉 꽃잎을 주워 모았다. 집으로 돌아와 도화지를 반으로 접은 뒤 한쪽 면에 꽃잎을 배치하고 움직이지 않게 풀로 붙였다. 손가락 끝으로 꽃잎을 살짝 눌러보았더니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던 까닭에 도화지에 색이 번졌다. 그 위에 또 다른 꽃잎을 올리자 색들이 서로 스며들었다. 꽃잎은 하나의 색만 지닌 것이 아니었다. 벚꽃은 가장자리가 하얗게 바래 있었으나 안쪽으로 갈수록 미세한 핏줄처럼 분홍이 서서히 퍼져 있었다. 개나리는 단순한 노랑이 아니라 햇살에 물든 금빛을 머금었고, 철쭉은 연분홍 속에 짙은 선홍빛 결을 품고 있었다. 꽃잎에 물감을 두껍게 칠한 다음, 나머지 면을 덮어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눌렀다. 도화지를 펼쳤을 때 나비 한 마리가 있었다. 한쪽 면에 놓인 색과 형체가 다른 면에 대칭적인 무늬로 찍혀 나오는 데칼코마니 기법이다. 여고 시절, 데칼코마니로 작품을 만든 때가 기억났다. 내 손끝에서 태어난 마법이었다. 똑같은 물감을 칠했어도 같은 색으로 다시 찍히는 법이 없었다. 매번 미세한 차이가 있었고, 때로는 예측하지 못한 선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데칼코마니의 묘미였다. 두 면은 서로 대칭이었지만, 종이를 누르는 손의 힘에 따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색깔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물감을 짜서 문질렀어도 좌우 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채도와 명도가 다르게 표현될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날 때 언제나 한결 같은 마음으로 대한다고 생각했지만 내 말투나 행동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은 내 마음에 짙은 색으로 찍혔던 존재가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되어 흐릿해졌다. 또한 처음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옅은 색처럼 여겨졌던 존재가, 시간이 흐를수록 내 안에 점점 더 진한 무늬를 남기며 선명해졌다. 우리 반 친구들의 데칼코마니 작품을 비교했을 때였다. 선이 강한 것도 있었고 부드러운 선으로 표현된 것도 있었다. 내 짝의 작품은 그녀의 신중한 성격 탓에 연한 선으로 나타났다. 물감을 짤 때도 신중했고, 손끝에 힘을 주어 누를 때도 너무 세지 않도록 조절했기에, 그녀의 데칼코마니는 다른 친구들의 작품보다 훨씬 부드러운 선을 가졌다. 어느 날, 나는 짝에게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고 했다. 좀 더 과감하게 짙은 색의 작품을 만들어 보라고 말했더니, 그녀는 망설였다. 그러나 내가 재촉하자 진한 색 물감으로 색을 칠하고 도화지를 덮은 뒤 손가락에 힘을 주어 눌렀다. 나는 종이를 펼치는 순간에 이제껏 만들었던 색과 선과 형태가 아닌 새로운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진한 선의 작품이었다. 나는 강한 선을 보며 그녀의 도전을 기뻐했다. 짝이 짙은 물감을 선택했을 때 자신의 평소 이미지도 변경하려고 잠시나마 노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평소에 내가 해오던 방식대로 살아가면 안전하고 편하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내가 원한다고 익숙한 길로만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지금껏 생활하면서 낯설고 불편하고 어긋난 길을 수없이 지나왔다. 익숙한 선택이 아닌 낯선 경험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날의 장면을 종종 떠올렸다. 내가 만든 데칼코마니를 들여다본다. 어쩌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의 데칼코마니일지도 모른다. 상대가 나에게 남긴 색과 내가 상대에게 남긴 흔적이 모여 하나의 무늬를 이룬다. 처음에는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친 것 같지만, 결국은 나 또한 타인이 남긴 색에 물들어간다. 그 모든 것이 모여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가는 것이리라. 도화지 위에 펼쳐진 나비의 날개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번지고 스며들며 하나의 무늬를 남길 것이다. /정미영 수필가

2025-05-14

山門이 열리다

희양산 이마가 잔설처럼 하얗다. 바위가 거대한 성(城)처럼 보여 그 풍경이 시원하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참나무들이 자리를 잡았고 구부러진 소나무가 휘영청 밝은 달빛 받아 수묵화에서 걸어 나온 듯 담담하다. 그 곁에 봉암사가 봄빛을 받아 햇살에 노곤하다.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산문폐쇄를 하여 수도정진만을 하는 처소이기에 검문초소의 통과의례를 거치고서야 봉인을 푼 산사와 눈을 맞출 수 있었다. 길 따라 흐르는 계곡에는 겨울이 녹아내려 시냇물 소리며 맑은 기운이 청아하기까지 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곱게 단장된 기와지붕이 열두 폭 치마를 펼쳐 둔 듯이 이어진다. 일 년에 아흐레만 산문을 연다는 봉암사. 해방 이후 불교계에서는 일대 선풍(仙風)이 불기 시작했다. 봉암사에서는 결사(結社)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결사는 불가의 스님들이 뜻을 모아 불교 내부의 잘못과 타락을 개혁하려는 종교개혁운동을 말한다. 천태종의 백련결사,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 당대의 고승들이 모여 한 봉암결사가 그것이다. 백련과 정혜는 고려 때의 일이지만 봉암결사는 해방 후 두 해가 지난 후의 일이다. 그해 시월, 봉암사에서 성철 스님과 지운, 보문, 우봉 스님이 ‘부처님의 법대로 살아보자는 뜻을 세웠다. 그로부터 3년간 결사에 참여한 오십여 명의 스님들은 가부좌를 틀고 뼈를 깎는 수행에 들어갔다. 밭을 매고 나무를 하고 동냥하며 수행하기를 반복했다. 어느 하나라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고 소홀하면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과 일본의 탄압을 넘어서는 불교 근간을 세우리라는 한국불교의 혁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봉암 결사가 불교계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발우공양이며 금강경, 반야심경의 독송 의식도 결사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절에서나 이루어지는 절차들이 결국 이곳에서 시발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희양산의 희끗한 봉황의 머리를 둔다면 구왕봉과 곰틀봉이 좌우의 날개가 된, 이 자리가 당대 고승들의 수행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산사의 지붕은 결 따라 곱다. 처마 끝 풍탁은 높이 매달려 지나가는 바람을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홀로 그 속을 채워나가는 일이다. 숱한 밤을 지새우며 경전을 읽고 염불을 외며 하나의 길을 뚫고자 했을 승려들이 그려진다. 하나가 된 승려들도 창호지로 배어들 봄꽃의 향기에 취하고 벌과 나비가 희롱하는 여름 꽃에 시선을 빼앗길 만도 할 터인데, 저벅저벅 고무신 코만 보며 걷지 않았을까. 가슴속에 이는 숱한 불꽃과 바람을 잠재우며 단단히 쪼고 매었을 마음 자락이 오늘은 바람에 덩그렁 덩그렁 울리는 풍탁의 흔들림조차 산사를 향한 노래가 된다. 철없는 아낙의 불심이야 경전 한 장만 못 하겠지만, 불전에 두 손 모아 가족을 향한 끝없는 염원을 내려다보신 부처님께선 그래도 안쓰러운 마음에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주시지 않았을까. 한발 한 발 내딛는 발자국마다 살아온 나날이 물집을 남긴다. 좋은 일이건 슬픈 일이건 노엽고 괴로운 일이든 쌓이고 쌓여 인생이다. 그 인생길에 한 겹씩 쌓아 올린 업보라는 것이 저 얼음장처럼 차고 단단해 봄비에도 녹지 않겠다. 그래도 아침이면 조금씩 조금씩 깎아보려고 업장 녹이는 일에 정진한다. 때론 새들의 노랫소리가 천당인 듯하고 맑은 정화수 한 사발이 무거운 욕심을 씻어내니 네 귀퉁이 사자조차 정겹다. 나무 사이로 일어나는 햇살에 전신이 나긋해지며 여기까지 온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감사한 마음이 차오른다. 희양산 자락의 품은 신묘하다. 저곳에서 내려오는 정기야말로 희고 고와 세상을 깨끗하게 덮을 만하다. 그 앞에 서 있자니 세상을 지나며 잡힌 물집이, 겹겹이 쌓인 업보가 조금씩 허물어진다. 허물어지고 부서진 자리로 청아한 바람 한 점으로 풍탁이 안부를 묻는다. 오늘의 염려를 여기 내려놓고 가라고. 나는 소복이 내렸을 법한 그 기를 홀로 느끼며 대웅전의 부처님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그윽하다. 제 몸을 태워 피워 올리는 향(香)내여. /배문경 수필가

2025-05-07

스님의 소고기

좀처럼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그녀가 남편과의 불화를 얘기했다. 나는 문제를 풀어 볼 요량으로 남편 입장에 서서 그녀가 해 주었으면 좋을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렇게는 이미 다 해 보았다고 토로하는 그녀의 얼굴에 섭섭함이 묻어났다. 친구를 위해 한 말이 괜한 화를 불렀다. 입을 다문 그녀의 표정에 예전의 내가 보였다. 서른 즈음, 다섯 살인 딸애와 갓 두 돌 지난 아들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나날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대문을 나서면, 골목 마루에 앉아 담소 중이던 아주머니들이 오늘도 시댁에 가느냐고 묻곤 했다. 나의 일상은 집과 시장을 맴돌이 하는 것과 시댁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는 내게 폭탄이 터졌다. 남편의 공장이 부도가 났다. 예상치 못한 연쇄부도에 그는 우왕좌왕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화난 거래처의 전화를 받는 것뿐이었다. 밀린 자재 값이 무엇인지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또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댁과의 작은 오해가 부도보다 더 크게 나를 휘몰아쳤다. 풀려고 해도 꼬인 매듭의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댈 남편마저 채권자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모든 잘못은 이미 내 것이었고, 나는 혼자였다. 아이들을 친정엄마께 맡기러 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엄마는 내일 밭에 일할 사람들을 불러놨으니 아침 일찍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대답도 없이 대문을 나섰다. 엄마의 불안한 눈빛이 골목으로 따라 나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팔공산은 어스름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이십대에 자주 갔던 곳을 찾아가는 발길이 자꾸만 허방을 짚었다. 작은 절은 여느 때와는 달리 불빛 하나 없었다. 아무도 없어서 좋았다. 요사채 마루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았다. 친정에 두고 온 아이들도 내 머리 속에는 없었다. 풀벌레 소리조차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 돌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발견한 스님은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고 묻지 앉았다. 그를 보자 눈물이 먼저 말했다. 나는 두서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내게 그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다 내 업이라고. 그 말에 가슴이 시렸다. 억울했다. 내가 뭘 어쨌는데 다 내 탓이란 말인가. 내겐 혈육과 상관없이 오빠처럼 지낸 스님이었다. 딸과 아들도 외삼촌이라 부르는 그가 하는 말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전혀 엉뚱하게 법문처럼 들렸다. 절에는 스님만 있을 뿐 오빠는 없었다. 그 밤이 오래오래 지나갔다. 나는 여명 사이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산을 내려왔다. 내 하소연이 원하는 것은 ‘너, 참 힘들었겠구나.’라는 한마디였다. 그저 들어주기만 해도 내 생각의 서랍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먼 길을 찾아 갔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산을 내려오는 내내 나는 혼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길가에 앉아 집으로 가는 첫차를 한참 기다렸다. 정신없는 생활 속에서 점점 잊어가던 어느 날, 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과 나는 약속 장소로 갔다. 뜬금없는 소고기 식당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약속 장소가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하얀 고무신을 신은 스님이 먼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우리는 엉거주춤 따라 들어갔다. 스님과 소고기는 뭇사람의 눈길을 받기에 충분했다. 고기를 굽는 그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고기가 익기 바쁘게 남편과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 ‘어서 먹어라’는 채근에 마지못한 듯 젓가락을 들었다. 소고기가 입에 살살 녹는 듯 했다. 접시는 빠르게 비었고, 또 채워졌다. 목에 찰 때까지 먹고 나서야 가격표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우리는 얇은 스님의 주머니를 바닥냈다. 그가 말했다. ‘힘내야지’라고. 나는 그제야 스님이 상추쌈만 몇 점 드셨다는 것을 기억했다. 내 인생에서 잘라버리고 싶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싱싱하게 떠올랐다.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친구에게 했다. 너만큼 하기 쉽지 않다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친구는 내 추임새에 한참을 더 속을 풀어냈다. 나는 빈 찻잔에 따뜻한 차를 채워주었다. 친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2025-04-30

스님의 소고기

좀처럼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그녀가 남편과의 불화를 얘기했다. 나는 문제를 풀어 볼 요량으로 남편 입장에 서서 그녀가 해 주었으면 좋을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렇게는 이미 다 해 보았다고 토로하는 그녀의 얼굴에 섭섭함이 묻어났다. 친구를 위해 한 말이 괜한 화를 불렀다. 입을 다문 그녀의 표정에 예전의 내가 보였다. 서른 즈음, 다섯 살인 딸애와 갓 두 돌 지난 아들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나날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대문을 나서면, 골목 마루에 앉아 담소 중이던 아주머니들이 오늘도 시댁에 가느냐고 묻곤 했다. 나의 일상은 집과 시장을 맴돌이 하는 것과 시댁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는 내게 폭탄이 터졌다. 남편의 공장이 부도가 났다. 예상치 못한 연쇄부도에 그는 우왕좌왕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화난 거래처의 전화를 받는 것뿐이었다. 밀린 자재 값이 무엇인지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또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댁과의 작은 오해가 부도보다 더 크게 나를 휘몰아쳤다. 풀려고 해도 꼬인 매듭의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댈 남편마저 채권자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모든 잘못은 이미 내 것이었고, 나는 혼자였다. 아이들을 친정엄마께 맡기러 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엄마는 내일 밭에 일할 사람들을 불러놨으니 아침 일찍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대답도 없이 대문을 나섰다. 엄마의 불안한 눈빛이 골목으로 따라 나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팔공산은 어스름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이십대에 자주 갔던 곳을 찾아가는 발길이 자꾸만 허방을 짚었다. 작은 절은 여느 때와는 달리 불빛 하나 없었다. 아무도 없어서 좋았다. 요사채 마루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았다. 친정에 두고 온 아이들도 내 머리 속에는 없었다. 풀벌레 소리조차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 돌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발견한 스님은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고 묻지 앉았다. 그를 보자 눈물이 먼저 말했다. 나는 두서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내게 그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다 내 업이라고. 그 말에 가슴이 시렸다. 억울했다. 내가 뭘 어쨌는데 다 내 탓이란 말인가. 내겐 혈육과 상관없이 오빠처럼 지낸 스님이었다. 딸과 아들도 외삼촌이라 부르는 그가 하는 말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전혀 엉뚱하게 법문처럼 들렸다. 절에는 스님만 있을 뿐 오빠는 없었다. 그 밤이 오래오래 지나갔다. 나는 여명 사이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산을 내려왔다. 내 하소연이 원하는 것은 ‘너, 참 힘들었겠구나.’라는 한마디였다. 그저 들어주기만 해도 내 생각의 서랍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먼 길을 찾아 갔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산을 내려오는 내내 나는 혼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길가에 앉아 집으로 가는 첫차를 한참 기다렸다. 정신없는 생활 속에서 점점 잊어가던 어느 날, 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과 나는 약속 장소로 갔다. 뜬금없는 소고기 식당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약속 장소가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하얀 고무신을 신은 스님이 먼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우리는 엉거주춤 따라 들어갔다. 스님과 소고기는 뭇사람의 눈길을 받기에 충분했다. 고기를 굽는 그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고기가 익기 바쁘게 남편과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 ‘어서 먹어라’는 채근에 마지못한 듯 젓가락을 들었다. 소고기가 입에 살살 녹는 듯 했다. 접시는 빠르게 비었고, 또 채워졌다. 목에 찰 때까지 먹고 나서야 가격표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우리는 얇은 스님의 주머니를 바닥냈다. 그가 말했다. ‘힘내야지’라고. 나는 그제야 스님이 상추쌈만 몇 점 드셨다는 것을 기억했다. 내 인생에서 잘라버리고 싶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싱싱하게 떠올랐다.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친구에게 했다. 너만큼 하기 쉽지 않다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친구는 내 추임새에 한참을 더 속을 풀어냈다. 나는 빈 찻잔에 따뜻한 차를 채워주었다. 친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2025-04-16

언제나 최소한의 품위

정미영 수필가 며칠 전,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했다. 한 중형차와 오토바이가 부딪힌 사고였다. 다행히 큰 부상자는 없는 듯했지만, 오토바이 운전자는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차량 운전자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있었기에, 주변에서 누군가가 구급차를 부르는 듯했다. 그런데도 차량 운전자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최소한의 품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종종 품위를 ‘고상함’이나 ‘우아함’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품위라는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사고가 난 상황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다친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운전자는 자신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채 피해자를 몰아세우고만 있었다.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사고를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조차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려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분명 차량 운전자도 놀라고 화가 났겠지만, 그 감정을 무작정 쏟아내며 피해자를 윽박지르는 모습은 나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에서 ‘어떤 처지에서도 인간의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기를’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사고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것이야 말로 품위라고 생각한다.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리어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편함과 불쾌감을 주며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무례함은 순간의 감정에서 비롯되지만, 그 흔적은 오래도록 남는다. 내가 아무리 억울하고 답답하더라도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교통사고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감정을 다스리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성숙해지는 길일 것이다. 그 운전자가 아무리 감정이 북받쳐도 잠시 숨을 고르고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면, 피해자에게도 덜 상처를 주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쾌감을 주지 않았을 것 같다. 그날의 장면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나는 과연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며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내 감정의 민낯이 자주 떠올라 부끄러웠다. 사회생활에서는 그럭저럭 감정을 절제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은데, 가정생활에서는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기 힘든 나날이 많았다. 나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내 자녀에게는 엄격했다. 자녀를 키우면서 욕심이 앞선 탓에 아이들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킨 적이 많았다. 감정이 격해지면 쉽게 표정을 찡그렸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참다운 어른으로서의 태도나 부모로서의 품위를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품위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고 상황이 불편하더라도 감정을 억누르는 등의 사소한 행동들이 모여 사람다움을 만드는 것이리라. 품위와 배려,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김용균 감독의 영화 ‘소풍(2024년)’이 떠올랐다. 삶보다 죽음이 가까운 나이에 병이 든 몸이지만, 끝까지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고 주인공들은 노력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문희, 김영옥, 박근형 배우의 내면 연기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 당시에도 죽음을 앞둔 인간으로서의 품위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 자신에게 물었었다. 거친 갈등보다는 조용한 방식으로 인간의 따뜻함과 배려의 가치를 탐구하는 작품인 것 같아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우리네 삶은 생각보다 짧고 예측 불가능하다. 그런 삶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나와 타인을 존중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나 스스로에게 언제나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가라고, 야무지게 당부해 본다.

2025-04-09

쉼의 통점

배문경수필가 새벽에 잠에서 깼다. 어둠 속에서 곁에 둔 핸드폰을 더듬어 누르자 한 시다. 배가 아파서 잠결에 깬 것인지, 갱년기 불면증인지 겨우 한 시간 눈을 붙였다. 이즈음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한두 시간 잤다 싶으면 번쩍하고 눈꺼풀이 걷히면 이후 잠들 수가 없다. 잠들기 전 일이 떠올랐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몰려왔다. 동시에 위가 비틀리며 따갑게 통증을 유발했다. 손바닥으로 통증 부위를 둥글게 문질렀다. 위가 부은 것인가. 위액분비가 심한가. 원인을 찾다 수년 전 그녀를 만나던 장면으로 생각이 날아갔다. 연말에는 행사가 많았다. 대구 K 호텔은 화환이 입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서 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소속된 문학회의 화환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의 열기가 추위를 녹여내고도 남았다. 이미 얼굴이 익은 사람들과 안부를 묻고 이 큰 행사를 주관하는 홍 선생님과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리허설 중에 있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낭자했다. 진행 관계자가 이럴 때는 시간에 쫓겨 걱정스럽기도 하겠지만 이들의 얼굴에는 밝고 화사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잘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화색 좋은 그녀들을 보며 경주에서 온 서너 명인 우리 일행들도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그녀를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때 급하게 들어서던 그녀를 봤다. 적당히 틀어 올린 머리카락과 정돈된 옷이 잘 어울렸다. 그녀의 꽤 잘 쓴 글을 접한 이후 스타를 쫓는 팬처럼 올 때마다 그녀를 먼저 찾아 인사를 나눴었다. 반갑다고 다가가는 순간 그녀의 발에 슬리퍼가 눈에 띄었다. 남색 플라스틱에 흰 줄이 두 줄 그어져 있는 실내서 싣는 신발, 이 추위에 그녀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정장을 한 모습이었다. 중학교 과학 교사라고 전해 들었다. 별것 아닌 듯이 “아~ 슬리퍼 신었네요. 인주샘!” 그제야 자신의 발을 보더니 잊고 그냥 나왔다며 멋쩍게 웃었다. 나도 마주 보며 그럴 수 있다며 마주 보고 웃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의 문학 장르에서 큰 상을 받고 두각을 나타냈으며 촉망받는 작가였다. 나는 잘 가던 대구로의 행보가 쉽지 않아지고 기억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한 번씩 떠올랐지만 바쁜 일상으로 종종걸음을 치다 보니 시간은 그렇게 거리를 만들었다. 그래도 문득문득 그녀의 소식이 바람결에 날려와 내게 소식을 전했다. 문득 일상을 마감할 즈음에 그녀가 뇌리에 와서 박힌 건 이상했다. 검색창에 그녀의 이름 석 자를 치자 수상 소식과 아름다운 모습도 몇 컷이 보였다. 지인의 홈피가 열리고 그녀의 글이 실려 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녀의 이름 아래에 괄호 속에 생몰 연도가 표시되어 있었다. 태어난 해와 생을 마감한 해가 다 적힌 건…, 믿기지 않아 전화를 돌려 지인에게 확인을 시도했다. “아까운 사람이지. 스트레스로 인한 위암이었어.” 시인으로 우뚝 서고 싶었던 그녀는 높은 서울로의 진출이 어려웠던 모양이다. 때론 무엇에 꽂히면 앞뒤 좌우 없이 앞만 보고 달릴 때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엇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어찌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는 것인지,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이루지 못한 꿈과 좌절감으로 시커멓게 속이 탔을 그녀를 암으로 몰아넣은 모양이었다. 새벽 위통을 견디기 위해 물을 들이켰다. 위액이라도 중화시켜야 속이 덜 아플 것이었다. 근래 전에 없던 위통이 왜 새벽 한 시에 나를 깨운 것인가. 다시 잠을 청했지만 잠은 멀리 달아나 버린 상태였다. 나의 일상이 파노라마처럼 보였다. 수시로 굶고 수면 부족에, 이곳저곳에 있는 행사에 초대되거나 직접 치러내야 하는 일들 속에서 종종거릴 때가 많다. 나의 뇌리를 스친 그녀의 기억은 나의 현재 상황을 일깨웠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있는가. 바쁜 일상에서 내가 놓치고 빠뜨린 것은 무엇인가. 소중한 것들을 잊고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은 꼬리를 물고 나를 쳐다본다. 어떡할 거냐고 무슨 대답을 바라는 듯이, ‘쉼 때론 쉼이 필요해’라고 뱃속의 무엇인가가 여행도 하고 너를 위해 오직 너를 위해 너를 사랑하라고 타일렀다. 내일 이른 시간으로 위내시경을 예약하며, 오직 나를 위한 쉼 시간도 예약했다.

2025-04-02

불 켜진 창

윤명희 수필가 안막커튼까지 쳤다. 옅은 빛마저 사라지자, 시간의 소리도 멈추었는지 고요하다. 새벽 2시가 지나갔는데도 감은 눈이 아프다 못해 시릴 뿐이다. 잠이 들어야 할 자리에 뜬금없이 그녀가 들어온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프로필에서 만났던 앳된 모습도, 그녀가 쓴 소설의 제목 또한 기억에 없다. 단지 조금은 특이했던, 아니 내 취향과는 다른 디자인의 책 표지만 생각날 뿐이다.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불을 켜자 싸늘한 기운이 덮친다. 겨우내 난방을 하지 않은 그 방은 서재라기보다 창고에 가깝다. 책장 앞에 놓인 잡동사니들을 치우고 그 표지를 찾아 책 사이를 더듬었다. 그녀는 30년도 더 전, 대학생이었던 막냇동생의 동기생이었다. 얼굴 한 번 마주 한 적이 없었지만, 동생이 건네준 책의 저자라는 이유로 꽂아두었다. 다 읽었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책이 아니라 그녀의 열정이었던가 보다. 대학생이 장편소설책을 낼 만큼 뜨거웠던 그녀를 내 마음만큼이나 차가운 방에서 찾고 있다. 찾는 것은 보이지 않고, 손끝에 낡은 책 세권이 걸린다. 여고 때, 해마다 받아 둔 문예지다. 표지가 세월에 끌려 다니느라 나달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 책을 펼쳤다. 빛바랜 책장이 누렇다 못해 짙은 갈색으로 가고 있다. 간신히 붙어있는 책갈피가 흩어질까 조심스레 넘기다 문득 한 친구가 생각났다. 걔가 문예부였던가. 갈래머리 여고생이었던 우리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가을 산은 나무마다 꽃불이 난 것 같았다. 온 산을 뒤덮은 붉은 색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탄을 쏟아냈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함성이 단풍을 타고 산을 올라갔다. 나의 언어는 너무나 빈약했다. “아!”라는 단발마적인 감탄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을 뿐, 다른 어떤 표현도 하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친구가 눈물을 퍽 쏟았다. 나는 발까지 동동 구르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깊은 곳에 있던 감성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서러워 울음이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말보다도 더 명확한 감정 표현이었다.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설악산과는 뗄 수 없는 존재로 남아있다. 책 세권을 다 훑어봐도 그녀의 이름이 없다. 그녀가 문예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는 아니었더라도 지금은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인터넷을 뒤졌다.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소설책이나마 꼭 찾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다시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맨 아래 한 귀퉁이에 기억속의 표지가 보였다. 프로필의 사진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인터넷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 헤맸다.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는지, 단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설 외에 더 이상의 책은 없었다. 내가 이 시간에 그들을 찾는 이유를 생각했다. 매년마다 찾아오는 봄이 올해는 유난히 더 어지럽기 때문일까. 이 밤, 훅 치고 들어오는 봄을 감당하기가 힘들다는 게 이유였을까. 나이 든다는 게 익어간다고들 하지만, 내겐 그 홍시 같은 말랑함이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 같다. 설악산에서 울었던 그녀가 생각나는 건 내 속에서 꺼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어서일까. 쳇바퀴 도는 일상 속에서, 퇴근하면 소파에 누워 자반뒤집기나 하는 내게 무슨 열정이 찾아들겠는가. 그나마 있었던 것도 시나브로 빠져나가 찌그러진 동그라미가 된 것 같다. 지금 나는 그 동그라미로 세상을 참 힘겹게 굴러가고 있다. 책장 앞에 있는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청소기 소리를 내지 않으려 걸레를 빨아 책장을 닦는다. 엎드려 방을 닦다 문득 그녀들도 나처럼 사그라져가는 것들을 아쉬워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멈췄다. 감성과 열정의 그녀들을 나와 동격화 시켜 놓으니 왠지 미소가 지어졌다. 책상을 닦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밤, 불이 오래 켜져 있었다. 짙은 어둠이 골목 사이로 물러날 때까지.

2025-03-26

소리의 서막은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정미영 수필가 어둠을 가르며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소리의 서막이다. 물기를 빨아들이는 압지처럼 사이렌 소리가 빌딩숲 주변을 맴돌던 소음을 흡수해 버린다. 도시는 순식간에 사이렌 소리가 존재하는 곳과 사이렌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나뉜다. 거리를 휘적휘적 헤쳐 나오는 사이렌 소리를 눈으로 살핀다. 마치 소리를 ‘보는 것’처럼 차창에 바싹 얼굴을 갖다 대기도 하고, 백미러로 후방을 주시하다가, 급히 달려오는 119 구급차를 발견한다. 나는 이런 경우에 갖게 되는 당혹감이 아니라 신중함을 가지고, 최대한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 자동차를 한편으로 옮긴다. 다행이다. 이 순간만큼은 운전자들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떨쳐버리고 이타심을 발현한다. 서둘러 구급차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 준 다음,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며 다들 제 갈 길로 간다. 운전을 하면서도 마음은 온통 환자에게 쏠린다. 얼마나 위중한 상태일까, 환자는 의식이 있을까, 사위스러움이 내 머릿속을 온통 부유한다. 몇 년 전, 스무 살 아들이 의무소방원으로 군에 입대했다. 선발 시험에 통과해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중앙소방학교에 입교했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시험을 치고 땀 흘리며 노력한 끝에 얻게 된 제복이라 그런지, 아들의 모습이 늠름하고 대견스러웠다. 강도 높은 교육을 마치고 무사히 수료식을 거쳐 소방서에 배치되었다. 아들이 소방서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그러자 내 온몸의 세포가 두 귀에 집중되어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소방차나 구급차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나의 신경줄이 팽팽해지며 아들에 대한 걱정이 배가되었다. 혹시나 아들도 화재 현장이나 산악 구조 현장에 출동을 나가지는 않았는지,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사명감과 책임감도 중요하지만 무사안일과 안전을 기원했다. 그렇게 소리는 내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공간에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는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기도 했다. 휴가를 나온 아들이 소방 공무원들과 동행해 산불 현장에 갔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가 있었다. 그즈음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내 눈앞에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것만 같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또한 아들이 구급차를 타고 나갔다고 하면 죽음의 그늘을 마주하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지역 특성상 노인들이 많이 계셔서 사고사보다는 심정지를 당하시는 분들이 많단다. 119에 접수된 응급환자의 심정지, 노인의 마지막 숨결을 손에 쥐며 슬픔에 잠겼을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인 나는 아들이 죽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일상으로 접한다고 하니 가량없이 애가 탔다. 아들은 처음에는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르신들이 마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같아서, 죽음 앞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단다. 자신의 마음이 변하자, 임종을 대하는 태도에도 예의를 갖추게 되었다고 했다. 롤랑 바르트는 ‘애도하는 사람’만큼은 진짜 주체로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타인이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들이 의무소방원으로서의 생활 속에서도 스스로의 본질을 찾는 과정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나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다. 소방관의 삶은 끝없는 도전과 위험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의 헌신은 사이렌 소리가 전하는 희망과 함께 사람들에게 안전을 선사한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고난과 시련을 마주했을 때 현명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준다. 소리의 서막은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구급차는 병이 위중하여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라도, 살릴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사이렌을 울리며 최선을 다해 달린다. 소리에도 ‘경중’의 미덕이 있다면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달려가는 사이렌 소리는 밀도가 높은 진중함으로 구현되는 것이리라.

2025-03-19

대릉원 뒷골목

윤명희 수필가 오가는 관광객들 사이로 황남파출소가 눈에 띈다. 예전에 놀란 가슴으로 파출소 문을 열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친구와 황리단길을 걷던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파출소에서 보호자 찾는 전화가 왔었다. 아버지가 뙤약볕 아래 종일 헤맨 것 같다고 했다. 경찰에게 파출소 위치를 물은 나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그곳으로 내달렸다. 백발노인의 지친 몸이 소파에 처져있었다. 대릉원 뒷골목에서 발견했다는 말에 의아했다.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몇 번이나 더 그 곳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아버지를 모시러 갈 때마다 왜 연고도 없는 여기서 길을 헤매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이 없었다. 오래된 그날, 속이 더부룩하다고 병원에 간 엄마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엄마만 두고 우리는 집으로 왔다. 병원에 가져갈 생필품을 챙기는 내 뒤로 아버지는 안방에서 이불과 베개를 작은 방으로 옮겼다. 울음을 삼키는 아버지 뒤로 효자손도 물병과 컵도 따라갔다. 말리는 내 손을 내치는 아버지를 바라만 보았다. 닫힌 안방은 가족사진이 대신 지키고 있었다. 결국 엄마는 누웠던 병원 침대마저 내 놓았다.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엄마의 흔적을 못 견뎌 했다. 아버지는 집을 버린 듯 했다. 아들의 학사모를 쓰고 웃는 엄마의 사진을 거실 벽에서 떼어 내렸다. 남은 사진들을 자식들에게 나눠주며, 엄마가 아끼느라 넣어 둔 것들을 다 가져가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집을 팔고, 당신이 누우면 세간이 다 보이는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 집은 멀리서 자식들이 와도 자고 갈 공간이 없었다. 이젠 집이 아니라 아버지만의 거처였다. 줄어든 살림만큼 아버지의 뒷모습은 작아져갔다. 경주로 이사 오던 날, 아버지를 혼자 두고 올 수 없었다. 함께 이사하자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자, 아버지는 어디에 가서 살아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저 아버지가 부르시면 한달음에 내가 찾아 올 수 있는 거리에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도 아버지는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다. 나는 그저 아버지가 생활하기에 불편한 일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찾아뵐 때마다, 겨우 얼굴만 봤을 뿐인데도 빨리 집에 가라고 등 떠미는 것 또한 변함이 없었다. 자꾸만 밖으로 도는 아버지는 집이 없는 듯 했다. 눈만 뜨면 하릴없는 사람처럼 여명의 산길을 따라 김유신 장군 묘에 올랐다. 다음날엔 첨성대를 한 바퀴 돌고, 그 다음 날에는 중앙시장을 찾아 막걸리 한잔을 마셨다. 종일 어딘가를 다니다 해거름해지면 지친 몸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집 대신 우리 집에 형제들이 모이는 날이 많았다. 즐거운 시간도 잠시, 하룻밤만 지나면 당신의 거처로 돌아가려했다. 아직 남아있는 형제들이 조금만 더 있다 가시라고 붙잡아도 막무가내였다. 자식들의 집이 당신의 집은 아니라는 것을 매번 보여주는데 은근히 화가 났다. 그 빈 마음은 우리가 채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얼른 차의 시동을 걸었다. 아버지의 팔순 생신날, 대릉원 근처에 숙소를 빌렸다. 기와지붕이 반듯한 한옥 독채에 형제들이 모였다. 건넌방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안방에는 음식상이 푸짐했다.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혼자서 집 둘레를 몇 바퀴나 돌아보았다. 나는 창 너머로 한참동안 나무 기둥을 쓰다듬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이제 아버지도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가셨다. 몇 년 만에 황남 파출소 앞에 서 있는 나는 당신이 왜 매번 그 골목을 헤매고 다녔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하룻밤을 보냈던 그 집이 아버지에게는 엄마와 함께 잃어버린 옛집으로 보였나보다. 나도 쉽게 다시 찾아가지 못하는 그 집을 흐린 눈으로 찾아 다녔을 거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잃어버린 기억들이 날아다니는, 아버지가 찾아 헤맸던 기억의 집. 대릉원 뒷골목은 아버지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파출소 창문 너머에 낯익은 얼굴이 나를 보고 웃는다. 나는 자꾸 눈앞이 침침해 고개 숙인다.

2025-03-12

화양연화(花樣年華)

배문경 수필가 어둠이 삽시간에 창으로 깊게 들어왔다. 불빛과 노인 가족들의 대화가 교차하며 밤은 깊어 갔다. 이제 퇴근 시간이다. 덜 끝낸 숙제를 남겨둔 것 같은 마음으로 노인이 누운 침대 주위로 가족이 함께 있는 방을 걸어 나왔다. 매일 보는 일이지만 볼 때마다 삶이란 얼마나 가여운 것인지. 앰뷸런스에 실려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달리던 그 안에서도 삶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얼마 전, 꽃진 자리에 눈꽃이 피었다.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자 양로원의 방들은 온도를 높여도 서늘한 바람이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창밖은 어둠에 휩싸여 있어도 쌓인 눈으로 인해 창백해 보였다. 노인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가족들이 이 방에서 노인을 중심으로 심각한 대화가 오갔다. 작년에도 유사한 장면이 연출되었지만, 노인은 실오라기 같은 생명줄을 놓지 않았다. 가족들은 임종을 못 본 채 조금은 어정쩡하게 자신들의 생활로 돌아갔다. 그 이듬해가 된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일 수 있다고 가족들은 생각했을까. 그래도 그들은 임종을 못 보는 일이 불효라고 여기는 듯했다. 둘러앉아 의식이 가물가물한 노인 머리맡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호흡을 살피면서 그렇게 시간을 붙잡고 있었다. 소중한 한 생명이 죽음을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노인은 고왔다. 젊은 날 동네에서 미인이란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말씀도 나긋나긋 곱게 하셨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혈압을 재고 나면 괜찮으냐는 질문을 하셨다. 혈압수치가 삶의 연장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것인지, 의미 없이 고맙다는 뜻에서 그냥 하시는 말씀인지 헷갈리곤 했다.‘좋습니다.’라고 대답하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서랍에는 작은 앨범이 들어 있었다. 자녀들이 어머니를 위해 놓아둔 사진 서너 장이다. 맑은 가을, 마당에 의자를 내놓고 기와집을 배경으로 부부가 앉았고, 그 뒤를 자녀들이 병풍처럼 서 있었다. 기와집은 제법 기품이 있었고 동네 부녀회장을 하셨다는 할머니는 아름답고 의젓했다. 아니 의기양양했다. 자녀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사진 밖으로 들려오는 듯했다. 식당에서 식탁에 앉아 자신의 숟가락을 들 수 있다면 그것이 삶이었다. 그 숟가락의 무게를 지탱할 힘이 없으면 죽으로 바뀌고 갈아진 음료가 대신 들어가야 했다. 입으로 들어가는 밥은 그냥 밥이 아니라 삶이다. 젊은 시절은 아이들 입에 들어가는 밥숟가락만 봐도 행복하다는 부모의 마음, 그 부모님이 이젠 자신의 입에 들어갈 밥을 떠 넣을 수 없고 삼킬 수가 없다. 점점 희미해지는 숨결이 거칠어지다가 조용해지기를 반복한다. 밥심이 없어서일까? 자녀들의 이야기는 옛 추억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동네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에서는 함께 웃었다.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인 어르신의 초상을 치를 때를 떠올렸다. 그래서 지금의 심정이라는 이야기가 오가는 듯했다. 살아 있는 동안 혈압을 재고 맥박을 확인하며 산소포화도까지 살핀다. 밤새 병실을 오가며 듣는 이야기가 오래전 창호지 밖으로 새어 나오던 부모님의 이야기 같아 내 마음은 아련하게 시골 동네 어귀를 거닌다. 노인이 요양원으로 들어오실 때만 해도 가족들은 모실 여건이 안 되었다고 했다. 자녀들의 바쁜 직장생활로 인해 부모님을 간병할 사람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친하게 지내는 언니는 부모님을 거의 십 년 정도 수발했다. 결혼하지 않고 우선 부모님을 보살피고 싶었다고 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부모님을 오래도록 모시고 두 분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나니 언니는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시력은 안 좋아졌고 몸은 여기저기 아픈 소리를 내 허무해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사람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간병에 딸의 인생은 홀연히 부모님의 세월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다. 부모님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부른 자식이란 속담이 없는 이유다. 요양원에 들어가는 일이 유배당하는 것 같아 대부분 노인이 질색한다. 자식의 화양연화 시절을 간병으로 보낸다면 그것이 부모가 바라는 효도일까? 병원을 나서며 어르신께 “내일 또 뵈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오늘 밤도 그녀의 입에 밥이 들어가는 화양연화이길 바라며.

2025-03-05

서로의 문장을 해독하는 중

정미영 수필가 딸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늘 소파 한쪽에 기대어 책을 읽었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반복해서 읽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글자를 삐뚤빼뚤 따라 적는 모습도 앙증맞았다. 아이가 자라서 이제는 두꺼운 책도 제법 막힘없이 읽는다. 나는 그런 딸을 보면 흐뭇했다. 딸은 책 속 등장인물들의 상황을 잘 이해했기에, 학교생활에서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쉽게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아 안심이 되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소통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학교가 아닌, 나와의 소통에 문제가 생겼다. 나는 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완전 짜증나는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인데?” “아, 말해도 몰라.” 딸의 대답은 짧았고, 표정은 쉽게 변했다. 웃다가도 갑자기 화를 냈고, 어떤 날은 하염없이 한숨을 쉬며 침묵을 지켰다. 엄마인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았지만, 딸은 나를 밀어내듯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읽히기를 거부하는 책처럼. 나도 갱년기라는 변화무쌍한 강을 건너고 있는 중이었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났다.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게 나도 싫었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건 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전에는 딸의 마음이 또렷하게 읽혔다. 목소리를 듣거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딸은 사춘기가 되었고, 나는 갱년기가 되었다. 우리의 대화는 암호문을 해독하는 것처럼 어려웠다. 딸의 말은 나에게 난해한 시처럼 다가와 해석되지 않았고, 나의 말은 딸에게 낡은 서체의 흐릿한 활자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엄마, 왜 이렇게 예민해?” 딸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엄마인 나의 감정 문장이 고리타분한 글처럼 느껴졌는지 읽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한숨을 쉬어도 딸은 그저 고개를 들어 나를 한번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는 나의 마음을 딸이 읽지 못하는 게 서운했다. 하지만 어쩌면, 나도 딸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난독증이 있는 사람들은 특정한 서체를 사용하면 읽기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명조체를 고딕체로 바꾸면 문장이 선명해진단다. 한 글자 안에서 초성-중성-종성의 간격과 줄 간격, 글자 간의 간격이 모두 넓으면 읽기가 수월하다. 나도 딸의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먼저 딸의 말에 쉼표를 두기로 했다. “왜 그래?” 하고 다그치듯 묻는 대신에 “괜찮아?” 하고 기다려 보았다. 질문의 형태를 조금 바꾸었을 뿐인데도 딸은 훨씬 덜 부담스러운 듯했다. 가끔 딸이 좋아하는 소설을 슬쩍 펼쳐 보았다. 어떤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지 살펴보며, 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헤아리기도 했다. 내가 변하기 시작하자 딸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몰라도 돼.”라고 말했던 아이가, “엄마, 내가 좀 예민한 거 같아.” 하고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나는 그럴 때 가만히 듣기만 했다. 활자의 간격을 넓히듯 딸의 말을 서두르지 않고 읽어 내려가기로 했다. 나는 여전히 딸의 마음을 완벽히 읽지 못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딸의 마음을 읽고 싶어 노력한다는 점이다. 딸도 아직은 내 감정을 쉽게 해석하지 못한다. 그러나 가끔 내 옆에 앉아 “엄마, 오늘은 괜히 피곤해 보여.” 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 속에서 딸이 나를 읽으려 애쓰는 모습을 엿본다. 오늘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는 중이다. 어쩌면 우리의 글씨체는 평생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조급해 하지 말고 활자의 간격을 넓혀 문맥을 살피리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두 사람의 마음을 또렷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같은 문장을, 같은 속도로, 읽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나는 희망한다. 그때까지 서로의 책장을 계속해서 넘길 것이다.

2025-02-26

어머님의 막걸리

윤명희 수필가 구순의 어머님이 차례 준비로 비좁은 주방을 이리 저리 뒤지신다. 혼잣말을 알아듣지 못한 나는 뭘 찾으시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형님이 다용도실에서 막걸리를 들고 나온다. 어제 어머님이 직접 사오셨다고 한다. 당신 걸음으로는 한참 가야 할 거리다. 빈 쟁반을 들고 들어오던 조카와 떡국의 꾸미를 챙기던 나는 아침부터 술을 찾는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설한 차례 상은 떡국만 올리면 된다. 제주로 올릴 청주병도 상 앞에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막걸리를 들고 나오시는 통에 식구들의 눈이 그곳에 모였다. 한복을 곱게 입은 터라 행여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질까 불안한 눈치들이다. ‘음복주 마실 텐데 막걸리는 왜 들고 오시지?’ 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어머님은 조상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한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엉거주춤 바닥에 앉아, 손수 청주를 비우고 막걸리를 붓는다. 혼자서는 일어나지 못하시는 것을 아는 손자가 곁에 섰다. 침대에서 소파로 식탁의자로 옮겨 앉는 일이 전부인 어머님이 손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절을 두 번 하고 일어섰다. “어매 아배요, 우리 장손 장가 좀 보내주소. 영감은 거기서 뭐 하니껴” 참았던 소원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어머님은 조상님께 올리는 막걸리가 효험이 있을 거라 믿으시는 듯 했다. 차례 상 앞이 조용해졌다. 나는 곁눈질로 장본인인 조카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같은 처지인 우리 아들을 끌어넣는다. 사촌형이 던진 장가라는 공을 얼떨결에 받은 아들이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조상님, 할매가 부탁까지 했는데 손자들이 장가 못가면 조상님 탓입니데이” 아들의 너스레에 한바탕 웃음으로 계면쩍은 순간을 넘겼다. 차례 상을 물리고 세배를 한다. 절을 한 손자들이 할머니께 증손자 대신 얇은 봉투를 내민다. 떡국을 앞에 놓고 둘러앉았다. 이제는 두 집 식구 모여 봐야 예전 큰댁 식구보다 적다. 시집간 딸네들의 빈자리는 떡국 먹는 소리만이 채우고 있다. 그때의 설날은 집안이 아이들로 왁자했다. 가래떡을 썰고, 강정을 만들었다. 조카들의 손까지 빌려 한 광주리나 되는 콩나물을 다듬고, 몇 시간동안 전을 부쳤다. 친척들을 맞이하는 인사가 연이었고, 방마다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만큼 주방은 상차리기에 바빴다. 차례상 앞은 흰 두루마기 차림의 어른들과 양복차림의 젊은이들로 그득했다. 맨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은 잠시 후에 받을 세뱃돈 생각에 마냥 신났다. 거실에 빙 둘러 앉아 윷놀이 판을 벌렸다. 바닥에 발을 구르며 도야, 도야 호부랑 도야를 외치며 흥을 돋우는 팀과, 모가 나오기를 두 손 모아 염원하는 팀의 목소리가 어우러졌다. 공중을 휘돌아 치며 바닥에 떨어지는 윷가락이 판세를 뒤집으면, 와아 함성 소리와 함께 시아버님의 어깨가 들썩였고 큰며느리인 형님도 춤을 추었다. 서른 명도 넘는 친척들과 함께 했던 그날들이 꿈결인 듯 아스라하다. 코로나 이후로 우리 식구는 설날 아침에 큰댁에 간다. 간단히 차례를 지내고, 아침을 먹는다. 상을 마주하고 앉아 하는 이야기가 길지 않다. 설거지를 끝내고,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소파에 앉는다. 차를 마시며 멀거니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 몇 번이나 재방송한 드라마의 대사까지 외우다시피 하는 어머님은 장면마다 설명을 덧붙인다. 사촌형과 몇 마디 나누던 아들은 할머니 방에서 자고, 남편은 소파에 앉아 졸고 있다. 형님이 윷가락을 가지고 나온다. 해 지난 달력의 뒷면에 윷판을 그리지만, 아무도 다가앉는 이가 없다. 나는 슬그머니 그 앞에 앉아 윷가락을 만져본다. 아버님이 만드신 싸리 윷이 손안에 착 붙는다. 어깨위로 높이 던져본다. 바닥에 먼저 떨어진 세 가락이 엎어지고, 뒤늦게 떨어진 한 개가 흰 배를 내 보인다. 한 귀퉁이가 배꼽마냥 까맣게 칠해져 있다. 왔던 길로 뒤돌아 가라는 뒷도다. 오래 묵은 윷가락도 어머님의 화양연화였던 그때가 그리운가 보다. 졸던 남편이 집에 가자며 옷을 주섬주섬 걸친다. 나는 형님이 챙겨 주는 음식들을 받아들고 마지못한 듯이 뒤를 따라 나선다. 설날 하루가 길다. 우리는 남은 시간 앞에서 잠시 허둥거린다.

2025-02-19

꿈, 현실이 되다

정미영 수필가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고 습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수식어를 쓰지 않고 건조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를 즐겨 썼던 그였다. 하드보일드 문체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것은 헤밍웨이의 글쓰기에 대한 신념이었다. 소설가는 이야기에 살을 붙일 수 있지만,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글을 써야 한다는 그의 가치관은 내게 신선했다. 그는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것은 ‘무기여 잘 있거라’, 아프리카의 사냥 경험은 ‘킬리만자로의 눈’으로 발간되었다. 경험으로 배우는 것이 많아질수록 진실에 가깝게 상상할 수 있다고 작가 지망생들에게 자주 언급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유달리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을 때면 소설의 배경 장소와 집필 공간이 궁금했다. 언젠가는 문학 기행으로 꼭 가보고 싶었다. 내 꿈은 현실이 되었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 영감을 주고, ‘오후의 죽음’을 집필했던 장소가 남아 있는 론다에 갔다. 해발 739미터에 위치한 론다는 강원도 평창과 비슷한 위치라고 한다. 주변의 낮은 평원 위에 우뚝 솟은 암석 고원이라는 설명이 막연했는데, 우리나라 지형과 비교를 하니 쉽게 이해가 되었다. 론다는 스페인 투우의 본고장으로 유명하다.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 있고 현대 투우 방식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이 고장 출신의 전설적인 투우사 로메로가 경기 방식을 바꾼 덕분이었다. 로메로는 투우 관람을 즐겼던 헤밍웨이가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소설에 그의 이름을 그대로 썼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론다에는 ‘헤밍웨이 산책로’가 존재한다. 나는 헤밍웨이의 흉상 옆에서 사진을 찍고는 곧장 그 옛날 그의 발자국을 상상하며 내 흔적을 남겼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에 알맞은 마을”이라고 했다.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강렬한 절벽을 도화지 삼아 누군가 그림 한 폭을 그려놓은 듯한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헤밍웨이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누에보 다리로 갔다. 120미터 깊이의 엘 타호 협곡 위에 놓인 아치형의 다리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양쪽으로 절벽이 계속 이어지고 한가운데에는 과달레빈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아찔하면서도 황홀했다. 주변의 경치를 내 마음에 담으면서 한편으로는 다리를 만든 사람들이 떠올랐다. 절벽 위에 선 론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닿을 수 없는 거리 앞에서 오랫동안 한숨을 삼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절망은 포기하지 않는 집념으로 변했고 꿈은 현실이 되었다. 변화를 위한 갈망과 화합을 위한 노력은 결실이 되었다. 절벽을 사이에 두고 나뉘었던 삶이 연결되었다. 42년간의 공사를 거쳐 1793년에 새로운 다리를 뜻하는 누에보 다리가 완공되면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원활하게 소통되었다. 다리를 건설했던 노동자에게는 고단하고 아슬아슬한 생의 단면이었고, 또 다른 이에게는 두 지역을 연결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협곡 아래로 스며들었지만, 꿈은 다리로 남아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는 다리 전체를 온전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측면이 아닌 정면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다리 아래 협곡으로 내려가는 입장권을 사야 했다. 표를 끊고 안전모를 쓴 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었다. 누에보 다리 전체 모습이 내 두 눈에 담긴 그 순간이었다. ‘노인과 바다’ 책 속의 주인공인 산티아고의 독백이 떠올랐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아.” 그는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고 바다를 헤맸다. 그러나 고기를 잡겠다는 꿈을 잃지 않았기에 마침내 커다란 청새치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청새치는 상어 떼의 습격을 받아 뼈만 남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로 나갈 용기와 희망을 다시 얻었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꿈은, 현실이 되리라.

2025-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