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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새순의 향연

산이 아기 엉덩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오릅니다. 푸른 물을 머금은 나무들을 보면 마음부터 바빠집니다. 팝콘 터지듯 하는 꽃보다 연초록의 새잎에 마음을 뺏깁니다. 꿈틀거리는 새순의 옹알거림에 귀가 간지러운 날입니다. 스물 두어 살 즈음 4월의 그날, 내 눈에 비쳤던 그 연두 빛을 잊지 못합니다. 점심시간이면 으레 찾는 구내식당 밥이 싫었습니다. 친구와 나는 밥 대신 빵과 우유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뒷마당으로 가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멈췄습니다. 봄 햇살이 초록물감보다 노랑물감을 약간 더 섞어서 잔디밭에 훅 뿌린 것 같았습니다. 풋내가 확 덮쳤습니다. 새순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는 눈부심 속에 말없이 한참이나 앉아있었습니다. 봄이 오면 입이 먼저 엄마를 기억합니다. 가죽나무 순에서 엄마 냄새가 납니다. 친정 텃밭 한 귀퉁이에 가죽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가죽나무 순으로 김치를 담았습니다. 식구 누구도 아닌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봄 내내 엄마의 냄새를 즐겼습니다. 봄을 기다리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나의 봄도 사라졌습니다. 나는 이십여 년 동안 그 맛을 지어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경주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잠시 시골집에 살 때였습니다. 옆집 할머니가 엄나무 순을 한 소쿠리 가져오셨습니다. 도시에서 온 우리가 먹을 줄 아느냐며 먹는 방법을 여러 가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눈만 끔뻑거리던 나는 가장 쉽다는 방법을 택해, 끓는 물에 살짝 데쳤습니다. 초고추장을 찍어 입에 넣는 순간, 엄나무 새순이 내 입맛을 홀렸습니다. 그동안 최고의 봄나물인 줄만 알았던 두릅이 엄나무 순에 밀려났습니다. 올해도 텃밭 한 귀퉁이에 보랏빛 제비꽃이 핍니다. 논둑에 냉이 꽃이 피고, 달래가 지천입니다. 텃밭에는 하얗게 완두콩 꽃이 피고, 부추와 쪽파가 자리를 잡습니다. 된장찌개 끓일 때마다 넣을 냉이와 달래까지 냉동실에 저장해 두었습니다. 쑥에 생콩가루를 묻혀 봄을 저장합니다. 비 내리는 초 여름날 저녁, 쑥국으로 마음을 채울 것입니다. 모양이 비슷한 씀바귀와 고들빼기를 분류합니다. 씀바귀를 무치고, 고들빼기김치를 담습니다. 쌉싸래한 맛이 입안에 맴돕니다. 나는 이제 봄나물을 만지고 먹어야 봄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첫물인 부추로 김치를 담급니다. 양념 묻힌 쪽파를 통에 가지런히 담습니다. 김치 안 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살짝 데친 머위를 김치 담그듯 양념에 무쳐봅니다. 된장으로 맛을 낸 것과는 또 다른 맛입니다. 시골 장에서 가죽나무 순과 초피나무 순을 샀습니다. 초피나무 순으로 장아찌를 만들고, 가죽나무 순을 만집니다. 인터넷을 뒤져 엄마의 맛을 내는 방법을 찾아봅니다. 그 맛이 나지 않습니다. 다시 또 해 봅니다. 어지간히 따라간 것 같은데 엄마 냄새는 없습니다. 김치 통 하나 채우려면 얼마만큼의 가죽나무 순이 필요하고, 고추장 단지가 움푹 비어버린다는 것을 이제야 압니다. 나도 엄마처럼 김치 통에 가죽나무 한 그루 담습니다. 아들과 딸에게 반찬 한 번 변변히 보내지 못했습니다. 가죽 나물을 먹을 때마다 엄마가 떠오르는데, 내 자식들은 언제 내가 생각날까. 이제야 애들을 생각합니다. 쑥을 한 움큼 보내겠다고 하자, 전화기 너머 딸애의 목소리가 뜨악합니다. ‘어떻게 하라고’가 말끝에 들려옵니다. 조금이라도 먹여 볼 요량으로 저마다 고유의 향과 맛을 가진 봄나물을 나열합니다. 바로 먹을 수 있도록 해서 보내겠다고 해도 손사래 치는 딸이 보입니다. 봄나물은 긴 겨울을 이겨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맛이 그냥 생긴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세월도 그냥 지나온 게 아니 듯이요. 세파를 헤쳐 온 내 안의 세월이 봄나물을 끌어당깁니다. 겨우내 무뎌졌던 감각을 새순의 향기로 깨웁니다. 겨울을 이겨낸 쌉싸래한 맛으로 또 한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돌나물 물김치까지 곁들여 식탁 가득 차립니다. 새순의 향연을 함께 즐길 엄마가 없어 서러운 봄날이지만, 나는 새순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윤명희 수필가

2025-05-21

데칼코마니

봄기운이 만연한 오후에 산책을 나갔다. 바람은 따뜻하고, 꽃나무들은 봉오리를 터뜨렸다. 길에 꽃잎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어 벚꽃, 개나리, 철쭉 꽃잎을 주워 모았다. 집으로 돌아와 도화지를 반으로 접은 뒤 한쪽 면에 꽃잎을 배치하고 움직이지 않게 풀로 붙였다. 손가락 끝으로 꽃잎을 살짝 눌러보았더니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던 까닭에 도화지에 색이 번졌다. 그 위에 또 다른 꽃잎을 올리자 색들이 서로 스며들었다. 꽃잎은 하나의 색만 지닌 것이 아니었다. 벚꽃은 가장자리가 하얗게 바래 있었으나 안쪽으로 갈수록 미세한 핏줄처럼 분홍이 서서히 퍼져 있었다. 개나리는 단순한 노랑이 아니라 햇살에 물든 금빛을 머금었고, 철쭉은 연분홍 속에 짙은 선홍빛 결을 품고 있었다. 꽃잎에 물감을 두껍게 칠한 다음, 나머지 면을 덮어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눌렀다. 도화지를 펼쳤을 때 나비 한 마리가 있었다. 한쪽 면에 놓인 색과 형체가 다른 면에 대칭적인 무늬로 찍혀 나오는 데칼코마니 기법이다. 여고 시절, 데칼코마니로 작품을 만든 때가 기억났다. 내 손끝에서 태어난 마법이었다. 똑같은 물감을 칠했어도 같은 색으로 다시 찍히는 법이 없었다. 매번 미세한 차이가 있었고, 때로는 예측하지 못한 선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데칼코마니의 묘미였다. 두 면은 서로 대칭이었지만, 종이를 누르는 손의 힘에 따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색깔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물감을 짜서 문질렀어도 좌우 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채도와 명도가 다르게 표현될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날 때 언제나 한결 같은 마음으로 대한다고 생각했지만 내 말투나 행동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은 내 마음에 짙은 색으로 찍혔던 존재가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되어 흐릿해졌다. 또한 처음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옅은 색처럼 여겨졌던 존재가, 시간이 흐를수록 내 안에 점점 더 진한 무늬를 남기며 선명해졌다. 우리 반 친구들의 데칼코마니 작품을 비교했을 때였다. 선이 강한 것도 있었고 부드러운 선으로 표현된 것도 있었다. 내 짝의 작품은 그녀의 신중한 성격 탓에 연한 선으로 나타났다. 물감을 짤 때도 신중했고, 손끝에 힘을 주어 누를 때도 너무 세지 않도록 조절했기에, 그녀의 데칼코마니는 다른 친구들의 작품보다 훨씬 부드러운 선을 가졌다. 어느 날, 나는 짝에게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고 했다. 좀 더 과감하게 짙은 색의 작품을 만들어 보라고 말했더니, 그녀는 망설였다. 그러나 내가 재촉하자 진한 색 물감으로 색을 칠하고 도화지를 덮은 뒤 손가락에 힘을 주어 눌렀다. 나는 종이를 펼치는 순간에 이제껏 만들었던 색과 선과 형태가 아닌 새로운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진한 선의 작품이었다. 나는 강한 선을 보며 그녀의 도전을 기뻐했다. 짝이 짙은 물감을 선택했을 때 자신의 평소 이미지도 변경하려고 잠시나마 노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평소에 내가 해오던 방식대로 살아가면 안전하고 편하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내가 원한다고 익숙한 길로만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지금껏 생활하면서 낯설고 불편하고 어긋난 길을 수없이 지나왔다. 익숙한 선택이 아닌 낯선 경험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날의 장면을 종종 떠올렸다. 내가 만든 데칼코마니를 들여다본다. 어쩌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의 데칼코마니일지도 모른다. 상대가 나에게 남긴 색과 내가 상대에게 남긴 흔적이 모여 하나의 무늬를 이룬다. 처음에는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친 것 같지만, 결국은 나 또한 타인이 남긴 색에 물들어간다. 그 모든 것이 모여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가는 것이리라. 도화지 위에 펼쳐진 나비의 날개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번지고 스며들며 하나의 무늬를 남길 것이다. /정미영 수필가

2025-05-14

山門이 열리다

희양산 이마가 잔설처럼 하얗다. 바위가 거대한 성(城)처럼 보여 그 풍경이 시원하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참나무들이 자리를 잡았고 구부러진 소나무가 휘영청 밝은 달빛 받아 수묵화에서 걸어 나온 듯 담담하다. 그 곁에 봉암사가 봄빛을 받아 햇살에 노곤하다.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산문폐쇄를 하여 수도정진만을 하는 처소이기에 검문초소의 통과의례를 거치고서야 봉인을 푼 산사와 눈을 맞출 수 있었다. 길 따라 흐르는 계곡에는 겨울이 녹아내려 시냇물 소리며 맑은 기운이 청아하기까지 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곱게 단장된 기와지붕이 열두 폭 치마를 펼쳐 둔 듯이 이어진다. 일 년에 아흐레만 산문을 연다는 봉암사. 해방 이후 불교계에서는 일대 선풍(仙風)이 불기 시작했다. 봉암사에서는 결사(結社)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결사는 불가의 스님들이 뜻을 모아 불교 내부의 잘못과 타락을 개혁하려는 종교개혁운동을 말한다. 천태종의 백련결사,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 당대의 고승들이 모여 한 봉암결사가 그것이다. 백련과 정혜는 고려 때의 일이지만 봉암결사는 해방 후 두 해가 지난 후의 일이다. 그해 시월, 봉암사에서 성철 스님과 지운, 보문, 우봉 스님이 ‘부처님의 법대로 살아보자는 뜻을 세웠다. 그로부터 3년간 결사에 참여한 오십여 명의 스님들은 가부좌를 틀고 뼈를 깎는 수행에 들어갔다. 밭을 매고 나무를 하고 동냥하며 수행하기를 반복했다. 어느 하나라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고 소홀하면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과 일본의 탄압을 넘어서는 불교 근간을 세우리라는 한국불교의 혁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봉암 결사가 불교계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발우공양이며 금강경, 반야심경의 독송 의식도 결사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절에서나 이루어지는 절차들이 결국 이곳에서 시발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희양산의 희끗한 봉황의 머리를 둔다면 구왕봉과 곰틀봉이 좌우의 날개가 된, 이 자리가 당대 고승들의 수행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산사의 지붕은 결 따라 곱다. 처마 끝 풍탁은 높이 매달려 지나가는 바람을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홀로 그 속을 채워나가는 일이다. 숱한 밤을 지새우며 경전을 읽고 염불을 외며 하나의 길을 뚫고자 했을 승려들이 그려진다. 하나가 된 승려들도 창호지로 배어들 봄꽃의 향기에 취하고 벌과 나비가 희롱하는 여름 꽃에 시선을 빼앗길 만도 할 터인데, 저벅저벅 고무신 코만 보며 걷지 않았을까. 가슴속에 이는 숱한 불꽃과 바람을 잠재우며 단단히 쪼고 매었을 마음 자락이 오늘은 바람에 덩그렁 덩그렁 울리는 풍탁의 흔들림조차 산사를 향한 노래가 된다. 철없는 아낙의 불심이야 경전 한 장만 못 하겠지만, 불전에 두 손 모아 가족을 향한 끝없는 염원을 내려다보신 부처님께선 그래도 안쓰러운 마음에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주시지 않았을까. 한발 한 발 내딛는 발자국마다 살아온 나날이 물집을 남긴다. 좋은 일이건 슬픈 일이건 노엽고 괴로운 일이든 쌓이고 쌓여 인생이다. 그 인생길에 한 겹씩 쌓아 올린 업보라는 것이 저 얼음장처럼 차고 단단해 봄비에도 녹지 않겠다. 그래도 아침이면 조금씩 조금씩 깎아보려고 업장 녹이는 일에 정진한다. 때론 새들의 노랫소리가 천당인 듯하고 맑은 정화수 한 사발이 무거운 욕심을 씻어내니 네 귀퉁이 사자조차 정겹다. 나무 사이로 일어나는 햇살에 전신이 나긋해지며 여기까지 온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감사한 마음이 차오른다. 희양산 자락의 품은 신묘하다. 저곳에서 내려오는 정기야말로 희고 고와 세상을 깨끗하게 덮을 만하다. 그 앞에 서 있자니 세상을 지나며 잡힌 물집이, 겹겹이 쌓인 업보가 조금씩 허물어진다. 허물어지고 부서진 자리로 청아한 바람 한 점으로 풍탁이 안부를 묻는다. 오늘의 염려를 여기 내려놓고 가라고. 나는 소복이 내렸을 법한 그 기를 홀로 느끼며 대웅전의 부처님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그윽하다. 제 몸을 태워 피워 올리는 향(香)내여. /배문경 수필가

2025-05-07

스님의 소고기

좀처럼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그녀가 남편과의 불화를 얘기했다. 나는 문제를 풀어 볼 요량으로 남편 입장에 서서 그녀가 해 주었으면 좋을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렇게는 이미 다 해 보았다고 토로하는 그녀의 얼굴에 섭섭함이 묻어났다. 친구를 위해 한 말이 괜한 화를 불렀다. 입을 다문 그녀의 표정에 예전의 내가 보였다. 서른 즈음, 다섯 살인 딸애와 갓 두 돌 지난 아들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나날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대문을 나서면, 골목 마루에 앉아 담소 중이던 아주머니들이 오늘도 시댁에 가느냐고 묻곤 했다. 나의 일상은 집과 시장을 맴돌이 하는 것과 시댁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는 내게 폭탄이 터졌다. 남편의 공장이 부도가 났다. 예상치 못한 연쇄부도에 그는 우왕좌왕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화난 거래처의 전화를 받는 것뿐이었다. 밀린 자재 값이 무엇인지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또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댁과의 작은 오해가 부도보다 더 크게 나를 휘몰아쳤다. 풀려고 해도 꼬인 매듭의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댈 남편마저 채권자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모든 잘못은 이미 내 것이었고, 나는 혼자였다. 아이들을 친정엄마께 맡기러 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엄마는 내일 밭에 일할 사람들을 불러놨으니 아침 일찍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대답도 없이 대문을 나섰다. 엄마의 불안한 눈빛이 골목으로 따라 나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팔공산은 어스름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이십대에 자주 갔던 곳을 찾아가는 발길이 자꾸만 허방을 짚었다. 작은 절은 여느 때와는 달리 불빛 하나 없었다. 아무도 없어서 좋았다. 요사채 마루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았다. 친정에 두고 온 아이들도 내 머리 속에는 없었다. 풀벌레 소리조차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 돌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발견한 스님은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고 묻지 앉았다. 그를 보자 눈물이 먼저 말했다. 나는 두서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내게 그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다 내 업이라고. 그 말에 가슴이 시렸다. 억울했다. 내가 뭘 어쨌는데 다 내 탓이란 말인가. 내겐 혈육과 상관없이 오빠처럼 지낸 스님이었다. 딸과 아들도 외삼촌이라 부르는 그가 하는 말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전혀 엉뚱하게 법문처럼 들렸다. 절에는 스님만 있을 뿐 오빠는 없었다. 그 밤이 오래오래 지나갔다. 나는 여명 사이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산을 내려왔다. 내 하소연이 원하는 것은 ‘너, 참 힘들었겠구나.’라는 한마디였다. 그저 들어주기만 해도 내 생각의 서랍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먼 길을 찾아 갔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산을 내려오는 내내 나는 혼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길가에 앉아 집으로 가는 첫차를 한참 기다렸다. 정신없는 생활 속에서 점점 잊어가던 어느 날, 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과 나는 약속 장소로 갔다. 뜬금없는 소고기 식당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약속 장소가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하얀 고무신을 신은 스님이 먼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우리는 엉거주춤 따라 들어갔다. 스님과 소고기는 뭇사람의 눈길을 받기에 충분했다. 고기를 굽는 그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고기가 익기 바쁘게 남편과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 ‘어서 먹어라’는 채근에 마지못한 듯 젓가락을 들었다. 소고기가 입에 살살 녹는 듯 했다. 접시는 빠르게 비었고, 또 채워졌다. 목에 찰 때까지 먹고 나서야 가격표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우리는 얇은 스님의 주머니를 바닥냈다. 그가 말했다. ‘힘내야지’라고. 나는 그제야 스님이 상추쌈만 몇 점 드셨다는 것을 기억했다. 내 인생에서 잘라버리고 싶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싱싱하게 떠올랐다.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친구에게 했다. 너만큼 하기 쉽지 않다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친구는 내 추임새에 한참을 더 속을 풀어냈다. 나는 빈 찻잔에 따뜻한 차를 채워주었다. 친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2025-04-30

스님의 소고기

좀처럼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그녀가 남편과의 불화를 얘기했다. 나는 문제를 풀어 볼 요량으로 남편 입장에 서서 그녀가 해 주었으면 좋을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렇게는 이미 다 해 보았다고 토로하는 그녀의 얼굴에 섭섭함이 묻어났다. 친구를 위해 한 말이 괜한 화를 불렀다. 입을 다문 그녀의 표정에 예전의 내가 보였다. 서른 즈음, 다섯 살인 딸애와 갓 두 돌 지난 아들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나날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대문을 나서면, 골목 마루에 앉아 담소 중이던 아주머니들이 오늘도 시댁에 가느냐고 묻곤 했다. 나의 일상은 집과 시장을 맴돌이 하는 것과 시댁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는 내게 폭탄이 터졌다. 남편의 공장이 부도가 났다. 예상치 못한 연쇄부도에 그는 우왕좌왕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화난 거래처의 전화를 받는 것뿐이었다. 밀린 자재 값이 무엇인지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또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댁과의 작은 오해가 부도보다 더 크게 나를 휘몰아쳤다. 풀려고 해도 꼬인 매듭의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댈 남편마저 채권자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모든 잘못은 이미 내 것이었고, 나는 혼자였다. 아이들을 친정엄마께 맡기러 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엄마는 내일 밭에 일할 사람들을 불러놨으니 아침 일찍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대답도 없이 대문을 나섰다. 엄마의 불안한 눈빛이 골목으로 따라 나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팔공산은 어스름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이십대에 자주 갔던 곳을 찾아가는 발길이 자꾸만 허방을 짚었다. 작은 절은 여느 때와는 달리 불빛 하나 없었다. 아무도 없어서 좋았다. 요사채 마루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았다. 친정에 두고 온 아이들도 내 머리 속에는 없었다. 풀벌레 소리조차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 돌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발견한 스님은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고 묻지 앉았다. 그를 보자 눈물이 먼저 말했다. 나는 두서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내게 그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다 내 업이라고. 그 말에 가슴이 시렸다. 억울했다. 내가 뭘 어쨌는데 다 내 탓이란 말인가. 내겐 혈육과 상관없이 오빠처럼 지낸 스님이었다. 딸과 아들도 외삼촌이라 부르는 그가 하는 말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전혀 엉뚱하게 법문처럼 들렸다. 절에는 스님만 있을 뿐 오빠는 없었다. 그 밤이 오래오래 지나갔다. 나는 여명 사이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산을 내려왔다. 내 하소연이 원하는 것은 ‘너, 참 힘들었겠구나.’라는 한마디였다. 그저 들어주기만 해도 내 생각의 서랍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먼 길을 찾아 갔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산을 내려오는 내내 나는 혼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길가에 앉아 집으로 가는 첫차를 한참 기다렸다. 정신없는 생활 속에서 점점 잊어가던 어느 날, 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과 나는 약속 장소로 갔다. 뜬금없는 소고기 식당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약속 장소가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하얀 고무신을 신은 스님이 먼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우리는 엉거주춤 따라 들어갔다. 스님과 소고기는 뭇사람의 눈길을 받기에 충분했다. 고기를 굽는 그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고기가 익기 바쁘게 남편과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 ‘어서 먹어라’는 채근에 마지못한 듯 젓가락을 들었다. 소고기가 입에 살살 녹는 듯 했다. 접시는 빠르게 비었고, 또 채워졌다. 목에 찰 때까지 먹고 나서야 가격표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우리는 얇은 스님의 주머니를 바닥냈다. 그가 말했다. ‘힘내야지’라고. 나는 그제야 스님이 상추쌈만 몇 점 드셨다는 것을 기억했다. 내 인생에서 잘라버리고 싶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싱싱하게 떠올랐다.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친구에게 했다. 너만큼 하기 쉽지 않다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친구는 내 추임새에 한참을 더 속을 풀어냈다. 나는 빈 찻잔에 따뜻한 차를 채워주었다. 친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2025-04-16

언제나 최소한의 품위

정미영 수필가 며칠 전,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했다. 한 중형차와 오토바이가 부딪힌 사고였다. 다행히 큰 부상자는 없는 듯했지만, 오토바이 운전자는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차량 운전자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있었기에, 주변에서 누군가가 구급차를 부르는 듯했다. 그런데도 차량 운전자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최소한의 품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종종 품위를 ‘고상함’이나 ‘우아함’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품위라는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사고가 난 상황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다친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운전자는 자신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채 피해자를 몰아세우고만 있었다.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사고를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조차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려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분명 차량 운전자도 놀라고 화가 났겠지만, 그 감정을 무작정 쏟아내며 피해자를 윽박지르는 모습은 나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에서 ‘어떤 처지에서도 인간의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기를’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사고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것이야 말로 품위라고 생각한다.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리어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편함과 불쾌감을 주며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무례함은 순간의 감정에서 비롯되지만, 그 흔적은 오래도록 남는다. 내가 아무리 억울하고 답답하더라도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교통사고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감정을 다스리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성숙해지는 길일 것이다. 그 운전자가 아무리 감정이 북받쳐도 잠시 숨을 고르고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면, 피해자에게도 덜 상처를 주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쾌감을 주지 않았을 것 같다. 그날의 장면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나는 과연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며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내 감정의 민낯이 자주 떠올라 부끄러웠다. 사회생활에서는 그럭저럭 감정을 절제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은데, 가정생활에서는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기 힘든 나날이 많았다. 나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내 자녀에게는 엄격했다. 자녀를 키우면서 욕심이 앞선 탓에 아이들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킨 적이 많았다. 감정이 격해지면 쉽게 표정을 찡그렸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참다운 어른으로서의 태도나 부모로서의 품위를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품위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고 상황이 불편하더라도 감정을 억누르는 등의 사소한 행동들이 모여 사람다움을 만드는 것이리라. 품위와 배려,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김용균 감독의 영화 ‘소풍(2024년)’이 떠올랐다. 삶보다 죽음이 가까운 나이에 병이 든 몸이지만, 끝까지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고 주인공들은 노력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문희, 김영옥, 박근형 배우의 내면 연기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 당시에도 죽음을 앞둔 인간으로서의 품위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 자신에게 물었었다. 거친 갈등보다는 조용한 방식으로 인간의 따뜻함과 배려의 가치를 탐구하는 작품인 것 같아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우리네 삶은 생각보다 짧고 예측 불가능하다. 그런 삶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나와 타인을 존중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나 스스로에게 언제나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가라고, 야무지게 당부해 본다.

2025-04-09

쉼의 통점

배문경수필가 새벽에 잠에서 깼다. 어둠 속에서 곁에 둔 핸드폰을 더듬어 누르자 한 시다. 배가 아파서 잠결에 깬 것인지, 갱년기 불면증인지 겨우 한 시간 눈을 붙였다. 이즈음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한두 시간 잤다 싶으면 번쩍하고 눈꺼풀이 걷히면 이후 잠들 수가 없다. 잠들기 전 일이 떠올랐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몰려왔다. 동시에 위가 비틀리며 따갑게 통증을 유발했다. 손바닥으로 통증 부위를 둥글게 문질렀다. 위가 부은 것인가. 위액분비가 심한가. 원인을 찾다 수년 전 그녀를 만나던 장면으로 생각이 날아갔다. 연말에는 행사가 많았다. 대구 K 호텔은 화환이 입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서 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소속된 문학회의 화환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의 열기가 추위를 녹여내고도 남았다. 이미 얼굴이 익은 사람들과 안부를 묻고 이 큰 행사를 주관하는 홍 선생님과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리허설 중에 있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낭자했다. 진행 관계자가 이럴 때는 시간에 쫓겨 걱정스럽기도 하겠지만 이들의 얼굴에는 밝고 화사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잘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화색 좋은 그녀들을 보며 경주에서 온 서너 명인 우리 일행들도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그녀를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때 급하게 들어서던 그녀를 봤다. 적당히 틀어 올린 머리카락과 정돈된 옷이 잘 어울렸다. 그녀의 꽤 잘 쓴 글을 접한 이후 스타를 쫓는 팬처럼 올 때마다 그녀를 먼저 찾아 인사를 나눴었다. 반갑다고 다가가는 순간 그녀의 발에 슬리퍼가 눈에 띄었다. 남색 플라스틱에 흰 줄이 두 줄 그어져 있는 실내서 싣는 신발, 이 추위에 그녀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정장을 한 모습이었다. 중학교 과학 교사라고 전해 들었다. 별것 아닌 듯이 “아~ 슬리퍼 신었네요. 인주샘!” 그제야 자신의 발을 보더니 잊고 그냥 나왔다며 멋쩍게 웃었다. 나도 마주 보며 그럴 수 있다며 마주 보고 웃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의 문학 장르에서 큰 상을 받고 두각을 나타냈으며 촉망받는 작가였다. 나는 잘 가던 대구로의 행보가 쉽지 않아지고 기억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한 번씩 떠올랐지만 바쁜 일상으로 종종걸음을 치다 보니 시간은 그렇게 거리를 만들었다. 그래도 문득문득 그녀의 소식이 바람결에 날려와 내게 소식을 전했다. 문득 일상을 마감할 즈음에 그녀가 뇌리에 와서 박힌 건 이상했다. 검색창에 그녀의 이름 석 자를 치자 수상 소식과 아름다운 모습도 몇 컷이 보였다. 지인의 홈피가 열리고 그녀의 글이 실려 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녀의 이름 아래에 괄호 속에 생몰 연도가 표시되어 있었다. 태어난 해와 생을 마감한 해가 다 적힌 건…, 믿기지 않아 전화를 돌려 지인에게 확인을 시도했다. “아까운 사람이지. 스트레스로 인한 위암이었어.” 시인으로 우뚝 서고 싶었던 그녀는 높은 서울로의 진출이 어려웠던 모양이다. 때론 무엇에 꽂히면 앞뒤 좌우 없이 앞만 보고 달릴 때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엇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어찌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는 것인지,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이루지 못한 꿈과 좌절감으로 시커멓게 속이 탔을 그녀를 암으로 몰아넣은 모양이었다. 새벽 위통을 견디기 위해 물을 들이켰다. 위액이라도 중화시켜야 속이 덜 아플 것이었다. 근래 전에 없던 위통이 왜 새벽 한 시에 나를 깨운 것인가. 다시 잠을 청했지만 잠은 멀리 달아나 버린 상태였다. 나의 일상이 파노라마처럼 보였다. 수시로 굶고 수면 부족에, 이곳저곳에 있는 행사에 초대되거나 직접 치러내야 하는 일들 속에서 종종거릴 때가 많다. 나의 뇌리를 스친 그녀의 기억은 나의 현재 상황을 일깨웠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있는가. 바쁜 일상에서 내가 놓치고 빠뜨린 것은 무엇인가. 소중한 것들을 잊고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은 꼬리를 물고 나를 쳐다본다. 어떡할 거냐고 무슨 대답을 바라는 듯이, ‘쉼 때론 쉼이 필요해’라고 뱃속의 무엇인가가 여행도 하고 너를 위해 오직 너를 위해 너를 사랑하라고 타일렀다. 내일 이른 시간으로 위내시경을 예약하며, 오직 나를 위한 쉼 시간도 예약했다.

2025-04-02

불 켜진 창

윤명희 수필가 안막커튼까지 쳤다. 옅은 빛마저 사라지자, 시간의 소리도 멈추었는지 고요하다. 새벽 2시가 지나갔는데도 감은 눈이 아프다 못해 시릴 뿐이다. 잠이 들어야 할 자리에 뜬금없이 그녀가 들어온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프로필에서 만났던 앳된 모습도, 그녀가 쓴 소설의 제목 또한 기억에 없다. 단지 조금은 특이했던, 아니 내 취향과는 다른 디자인의 책 표지만 생각날 뿐이다.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불을 켜자 싸늘한 기운이 덮친다. 겨우내 난방을 하지 않은 그 방은 서재라기보다 창고에 가깝다. 책장 앞에 놓인 잡동사니들을 치우고 그 표지를 찾아 책 사이를 더듬었다. 그녀는 30년도 더 전, 대학생이었던 막냇동생의 동기생이었다. 얼굴 한 번 마주 한 적이 없었지만, 동생이 건네준 책의 저자라는 이유로 꽂아두었다. 다 읽었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책이 아니라 그녀의 열정이었던가 보다. 대학생이 장편소설책을 낼 만큼 뜨거웠던 그녀를 내 마음만큼이나 차가운 방에서 찾고 있다. 찾는 것은 보이지 않고, 손끝에 낡은 책 세권이 걸린다. 여고 때, 해마다 받아 둔 문예지다. 표지가 세월에 끌려 다니느라 나달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 책을 펼쳤다. 빛바랜 책장이 누렇다 못해 짙은 갈색으로 가고 있다. 간신히 붙어있는 책갈피가 흩어질까 조심스레 넘기다 문득 한 친구가 생각났다. 걔가 문예부였던가. 갈래머리 여고생이었던 우리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가을 산은 나무마다 꽃불이 난 것 같았다. 온 산을 뒤덮은 붉은 색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탄을 쏟아냈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함성이 단풍을 타고 산을 올라갔다. 나의 언어는 너무나 빈약했다. “아!”라는 단발마적인 감탄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을 뿐, 다른 어떤 표현도 하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친구가 눈물을 퍽 쏟았다. 나는 발까지 동동 구르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깊은 곳에 있던 감성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서러워 울음이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말보다도 더 명확한 감정 표현이었다.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설악산과는 뗄 수 없는 존재로 남아있다. 책 세권을 다 훑어봐도 그녀의 이름이 없다. 그녀가 문예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는 아니었더라도 지금은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인터넷을 뒤졌다.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소설책이나마 꼭 찾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다시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맨 아래 한 귀퉁이에 기억속의 표지가 보였다. 프로필의 사진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인터넷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 헤맸다.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는지, 단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설 외에 더 이상의 책은 없었다. 내가 이 시간에 그들을 찾는 이유를 생각했다. 매년마다 찾아오는 봄이 올해는 유난히 더 어지럽기 때문일까. 이 밤, 훅 치고 들어오는 봄을 감당하기가 힘들다는 게 이유였을까. 나이 든다는 게 익어간다고들 하지만, 내겐 그 홍시 같은 말랑함이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 같다. 설악산에서 울었던 그녀가 생각나는 건 내 속에서 꺼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어서일까. 쳇바퀴 도는 일상 속에서, 퇴근하면 소파에 누워 자반뒤집기나 하는 내게 무슨 열정이 찾아들겠는가. 그나마 있었던 것도 시나브로 빠져나가 찌그러진 동그라미가 된 것 같다. 지금 나는 그 동그라미로 세상을 참 힘겹게 굴러가고 있다. 책장 앞에 있는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청소기 소리를 내지 않으려 걸레를 빨아 책장을 닦는다. 엎드려 방을 닦다 문득 그녀들도 나처럼 사그라져가는 것들을 아쉬워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멈췄다. 감성과 열정의 그녀들을 나와 동격화 시켜 놓으니 왠지 미소가 지어졌다. 책상을 닦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밤, 불이 오래 켜져 있었다. 짙은 어둠이 골목 사이로 물러날 때까지.

2025-03-26

소리의 서막은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정미영 수필가 어둠을 가르며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소리의 서막이다. 물기를 빨아들이는 압지처럼 사이렌 소리가 빌딩숲 주변을 맴돌던 소음을 흡수해 버린다. 도시는 순식간에 사이렌 소리가 존재하는 곳과 사이렌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나뉜다. 거리를 휘적휘적 헤쳐 나오는 사이렌 소리를 눈으로 살핀다. 마치 소리를 ‘보는 것’처럼 차창에 바싹 얼굴을 갖다 대기도 하고, 백미러로 후방을 주시하다가, 급히 달려오는 119 구급차를 발견한다. 나는 이런 경우에 갖게 되는 당혹감이 아니라 신중함을 가지고, 최대한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 자동차를 한편으로 옮긴다. 다행이다. 이 순간만큼은 운전자들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떨쳐버리고 이타심을 발현한다. 서둘러 구급차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 준 다음,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며 다들 제 갈 길로 간다. 운전을 하면서도 마음은 온통 환자에게 쏠린다. 얼마나 위중한 상태일까, 환자는 의식이 있을까, 사위스러움이 내 머릿속을 온통 부유한다. 몇 년 전, 스무 살 아들이 의무소방원으로 군에 입대했다. 선발 시험에 통과해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중앙소방학교에 입교했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시험을 치고 땀 흘리며 노력한 끝에 얻게 된 제복이라 그런지, 아들의 모습이 늠름하고 대견스러웠다. 강도 높은 교육을 마치고 무사히 수료식을 거쳐 소방서에 배치되었다. 아들이 소방서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그러자 내 온몸의 세포가 두 귀에 집중되어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소방차나 구급차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나의 신경줄이 팽팽해지며 아들에 대한 걱정이 배가되었다. 혹시나 아들도 화재 현장이나 산악 구조 현장에 출동을 나가지는 않았는지,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사명감과 책임감도 중요하지만 무사안일과 안전을 기원했다. 그렇게 소리는 내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공간에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는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기도 했다. 휴가를 나온 아들이 소방 공무원들과 동행해 산불 현장에 갔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가 있었다. 그즈음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내 눈앞에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것만 같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또한 아들이 구급차를 타고 나갔다고 하면 죽음의 그늘을 마주하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지역 특성상 노인들이 많이 계셔서 사고사보다는 심정지를 당하시는 분들이 많단다. 119에 접수된 응급환자의 심정지, 노인의 마지막 숨결을 손에 쥐며 슬픔에 잠겼을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인 나는 아들이 죽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일상으로 접한다고 하니 가량없이 애가 탔다. 아들은 처음에는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르신들이 마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같아서, 죽음 앞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단다. 자신의 마음이 변하자, 임종을 대하는 태도에도 예의를 갖추게 되었다고 했다. 롤랑 바르트는 ‘애도하는 사람’만큼은 진짜 주체로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타인이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들이 의무소방원으로서의 생활 속에서도 스스로의 본질을 찾는 과정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나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다. 소방관의 삶은 끝없는 도전과 위험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의 헌신은 사이렌 소리가 전하는 희망과 함께 사람들에게 안전을 선사한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고난과 시련을 마주했을 때 현명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준다. 소리의 서막은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구급차는 병이 위중하여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라도, 살릴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사이렌을 울리며 최선을 다해 달린다. 소리에도 ‘경중’의 미덕이 있다면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달려가는 사이렌 소리는 밀도가 높은 진중함으로 구현되는 것이리라.

2025-03-19

대릉원 뒷골목

윤명희 수필가 오가는 관광객들 사이로 황남파출소가 눈에 띈다. 예전에 놀란 가슴으로 파출소 문을 열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친구와 황리단길을 걷던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파출소에서 보호자 찾는 전화가 왔었다. 아버지가 뙤약볕 아래 종일 헤맨 것 같다고 했다. 경찰에게 파출소 위치를 물은 나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그곳으로 내달렸다. 백발노인의 지친 몸이 소파에 처져있었다. 대릉원 뒷골목에서 발견했다는 말에 의아했다.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몇 번이나 더 그 곳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아버지를 모시러 갈 때마다 왜 연고도 없는 여기서 길을 헤매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이 없었다. 오래된 그날, 속이 더부룩하다고 병원에 간 엄마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엄마만 두고 우리는 집으로 왔다. 병원에 가져갈 생필품을 챙기는 내 뒤로 아버지는 안방에서 이불과 베개를 작은 방으로 옮겼다. 울음을 삼키는 아버지 뒤로 효자손도 물병과 컵도 따라갔다. 말리는 내 손을 내치는 아버지를 바라만 보았다. 닫힌 안방은 가족사진이 대신 지키고 있었다. 결국 엄마는 누웠던 병원 침대마저 내 놓았다.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엄마의 흔적을 못 견뎌 했다. 아버지는 집을 버린 듯 했다. 아들의 학사모를 쓰고 웃는 엄마의 사진을 거실 벽에서 떼어 내렸다. 남은 사진들을 자식들에게 나눠주며, 엄마가 아끼느라 넣어 둔 것들을 다 가져가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집을 팔고, 당신이 누우면 세간이 다 보이는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 집은 멀리서 자식들이 와도 자고 갈 공간이 없었다. 이젠 집이 아니라 아버지만의 거처였다. 줄어든 살림만큼 아버지의 뒷모습은 작아져갔다. 경주로 이사 오던 날, 아버지를 혼자 두고 올 수 없었다. 함께 이사하자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자, 아버지는 어디에 가서 살아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저 아버지가 부르시면 한달음에 내가 찾아 올 수 있는 거리에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도 아버지는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다. 나는 그저 아버지가 생활하기에 불편한 일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찾아뵐 때마다, 겨우 얼굴만 봤을 뿐인데도 빨리 집에 가라고 등 떠미는 것 또한 변함이 없었다. 자꾸만 밖으로 도는 아버지는 집이 없는 듯 했다. 눈만 뜨면 하릴없는 사람처럼 여명의 산길을 따라 김유신 장군 묘에 올랐다. 다음날엔 첨성대를 한 바퀴 돌고, 그 다음 날에는 중앙시장을 찾아 막걸리 한잔을 마셨다. 종일 어딘가를 다니다 해거름해지면 지친 몸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집 대신 우리 집에 형제들이 모이는 날이 많았다. 즐거운 시간도 잠시, 하룻밤만 지나면 당신의 거처로 돌아가려했다. 아직 남아있는 형제들이 조금만 더 있다 가시라고 붙잡아도 막무가내였다. 자식들의 집이 당신의 집은 아니라는 것을 매번 보여주는데 은근히 화가 났다. 그 빈 마음은 우리가 채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얼른 차의 시동을 걸었다. 아버지의 팔순 생신날, 대릉원 근처에 숙소를 빌렸다. 기와지붕이 반듯한 한옥 독채에 형제들이 모였다. 건넌방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안방에는 음식상이 푸짐했다.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혼자서 집 둘레를 몇 바퀴나 돌아보았다. 나는 창 너머로 한참동안 나무 기둥을 쓰다듬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이제 아버지도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가셨다. 몇 년 만에 황남 파출소 앞에 서 있는 나는 당신이 왜 매번 그 골목을 헤매고 다녔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하룻밤을 보냈던 그 집이 아버지에게는 엄마와 함께 잃어버린 옛집으로 보였나보다. 나도 쉽게 다시 찾아가지 못하는 그 집을 흐린 눈으로 찾아 다녔을 거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잃어버린 기억들이 날아다니는, 아버지가 찾아 헤맸던 기억의 집. 대릉원 뒷골목은 아버지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파출소 창문 너머에 낯익은 얼굴이 나를 보고 웃는다. 나는 자꾸 눈앞이 침침해 고개 숙인다.

2025-03-12

화양연화(花樣年華)

배문경 수필가 어둠이 삽시간에 창으로 깊게 들어왔다. 불빛과 노인 가족들의 대화가 교차하며 밤은 깊어 갔다. 이제 퇴근 시간이다. 덜 끝낸 숙제를 남겨둔 것 같은 마음으로 노인이 누운 침대 주위로 가족이 함께 있는 방을 걸어 나왔다. 매일 보는 일이지만 볼 때마다 삶이란 얼마나 가여운 것인지. 앰뷸런스에 실려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달리던 그 안에서도 삶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얼마 전, 꽃진 자리에 눈꽃이 피었다.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자 양로원의 방들은 온도를 높여도 서늘한 바람이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창밖은 어둠에 휩싸여 있어도 쌓인 눈으로 인해 창백해 보였다. 노인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가족들이 이 방에서 노인을 중심으로 심각한 대화가 오갔다. 작년에도 유사한 장면이 연출되었지만, 노인은 실오라기 같은 생명줄을 놓지 않았다. 가족들은 임종을 못 본 채 조금은 어정쩡하게 자신들의 생활로 돌아갔다. 그 이듬해가 된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일 수 있다고 가족들은 생각했을까. 그래도 그들은 임종을 못 보는 일이 불효라고 여기는 듯했다. 둘러앉아 의식이 가물가물한 노인 머리맡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호흡을 살피면서 그렇게 시간을 붙잡고 있었다. 소중한 한 생명이 죽음을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노인은 고왔다. 젊은 날 동네에서 미인이란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말씀도 나긋나긋 곱게 하셨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혈압을 재고 나면 괜찮으냐는 질문을 하셨다. 혈압수치가 삶의 연장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것인지, 의미 없이 고맙다는 뜻에서 그냥 하시는 말씀인지 헷갈리곤 했다.‘좋습니다.’라고 대답하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서랍에는 작은 앨범이 들어 있었다. 자녀들이 어머니를 위해 놓아둔 사진 서너 장이다. 맑은 가을, 마당에 의자를 내놓고 기와집을 배경으로 부부가 앉았고, 그 뒤를 자녀들이 병풍처럼 서 있었다. 기와집은 제법 기품이 있었고 동네 부녀회장을 하셨다는 할머니는 아름답고 의젓했다. 아니 의기양양했다. 자녀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사진 밖으로 들려오는 듯했다. 식당에서 식탁에 앉아 자신의 숟가락을 들 수 있다면 그것이 삶이었다. 그 숟가락의 무게를 지탱할 힘이 없으면 죽으로 바뀌고 갈아진 음료가 대신 들어가야 했다. 입으로 들어가는 밥은 그냥 밥이 아니라 삶이다. 젊은 시절은 아이들 입에 들어가는 밥숟가락만 봐도 행복하다는 부모의 마음, 그 부모님이 이젠 자신의 입에 들어갈 밥을 떠 넣을 수 없고 삼킬 수가 없다. 점점 희미해지는 숨결이 거칠어지다가 조용해지기를 반복한다. 밥심이 없어서일까? 자녀들의 이야기는 옛 추억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동네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에서는 함께 웃었다.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인 어르신의 초상을 치를 때를 떠올렸다. 그래서 지금의 심정이라는 이야기가 오가는 듯했다. 살아 있는 동안 혈압을 재고 맥박을 확인하며 산소포화도까지 살핀다. 밤새 병실을 오가며 듣는 이야기가 오래전 창호지 밖으로 새어 나오던 부모님의 이야기 같아 내 마음은 아련하게 시골 동네 어귀를 거닌다. 노인이 요양원으로 들어오실 때만 해도 가족들은 모실 여건이 안 되었다고 했다. 자녀들의 바쁜 직장생활로 인해 부모님을 간병할 사람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친하게 지내는 언니는 부모님을 거의 십 년 정도 수발했다. 결혼하지 않고 우선 부모님을 보살피고 싶었다고 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부모님을 오래도록 모시고 두 분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나니 언니는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시력은 안 좋아졌고 몸은 여기저기 아픈 소리를 내 허무해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사람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간병에 딸의 인생은 홀연히 부모님의 세월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다. 부모님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부른 자식이란 속담이 없는 이유다. 요양원에 들어가는 일이 유배당하는 것 같아 대부분 노인이 질색한다. 자식의 화양연화 시절을 간병으로 보낸다면 그것이 부모가 바라는 효도일까? 병원을 나서며 어르신께 “내일 또 뵈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오늘 밤도 그녀의 입에 밥이 들어가는 화양연화이길 바라며.

2025-03-05

서로의 문장을 해독하는 중

정미영 수필가 딸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늘 소파 한쪽에 기대어 책을 읽었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반복해서 읽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글자를 삐뚤빼뚤 따라 적는 모습도 앙증맞았다. 아이가 자라서 이제는 두꺼운 책도 제법 막힘없이 읽는다. 나는 그런 딸을 보면 흐뭇했다. 딸은 책 속 등장인물들의 상황을 잘 이해했기에, 학교생활에서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쉽게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아 안심이 되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소통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학교가 아닌, 나와의 소통에 문제가 생겼다. 나는 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완전 짜증나는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인데?” “아, 말해도 몰라.” 딸의 대답은 짧았고, 표정은 쉽게 변했다. 웃다가도 갑자기 화를 냈고, 어떤 날은 하염없이 한숨을 쉬며 침묵을 지켰다. 엄마인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았지만, 딸은 나를 밀어내듯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읽히기를 거부하는 책처럼. 나도 갱년기라는 변화무쌍한 강을 건너고 있는 중이었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났다.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게 나도 싫었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건 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전에는 딸의 마음이 또렷하게 읽혔다. 목소리를 듣거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딸은 사춘기가 되었고, 나는 갱년기가 되었다. 우리의 대화는 암호문을 해독하는 것처럼 어려웠다. 딸의 말은 나에게 난해한 시처럼 다가와 해석되지 않았고, 나의 말은 딸에게 낡은 서체의 흐릿한 활자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엄마, 왜 이렇게 예민해?” 딸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엄마인 나의 감정 문장이 고리타분한 글처럼 느껴졌는지 읽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한숨을 쉬어도 딸은 그저 고개를 들어 나를 한번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는 나의 마음을 딸이 읽지 못하는 게 서운했다. 하지만 어쩌면, 나도 딸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난독증이 있는 사람들은 특정한 서체를 사용하면 읽기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명조체를 고딕체로 바꾸면 문장이 선명해진단다. 한 글자 안에서 초성-중성-종성의 간격과 줄 간격, 글자 간의 간격이 모두 넓으면 읽기가 수월하다. 나도 딸의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먼저 딸의 말에 쉼표를 두기로 했다. “왜 그래?” 하고 다그치듯 묻는 대신에 “괜찮아?” 하고 기다려 보았다. 질문의 형태를 조금 바꾸었을 뿐인데도 딸은 훨씬 덜 부담스러운 듯했다. 가끔 딸이 좋아하는 소설을 슬쩍 펼쳐 보았다. 어떤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지 살펴보며, 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헤아리기도 했다. 내가 변하기 시작하자 딸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몰라도 돼.”라고 말했던 아이가, “엄마, 내가 좀 예민한 거 같아.” 하고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나는 그럴 때 가만히 듣기만 했다. 활자의 간격을 넓히듯 딸의 말을 서두르지 않고 읽어 내려가기로 했다. 나는 여전히 딸의 마음을 완벽히 읽지 못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딸의 마음을 읽고 싶어 노력한다는 점이다. 딸도 아직은 내 감정을 쉽게 해석하지 못한다. 그러나 가끔 내 옆에 앉아 “엄마, 오늘은 괜히 피곤해 보여.” 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 속에서 딸이 나를 읽으려 애쓰는 모습을 엿본다. 오늘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는 중이다. 어쩌면 우리의 글씨체는 평생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조급해 하지 말고 활자의 간격을 넓혀 문맥을 살피리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두 사람의 마음을 또렷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같은 문장을, 같은 속도로, 읽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나는 희망한다. 그때까지 서로의 책장을 계속해서 넘길 것이다.

2025-02-26

어머님의 막걸리

윤명희 수필가 구순의 어머님이 차례 준비로 비좁은 주방을 이리 저리 뒤지신다. 혼잣말을 알아듣지 못한 나는 뭘 찾으시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형님이 다용도실에서 막걸리를 들고 나온다. 어제 어머님이 직접 사오셨다고 한다. 당신 걸음으로는 한참 가야 할 거리다. 빈 쟁반을 들고 들어오던 조카와 떡국의 꾸미를 챙기던 나는 아침부터 술을 찾는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설한 차례 상은 떡국만 올리면 된다. 제주로 올릴 청주병도 상 앞에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막걸리를 들고 나오시는 통에 식구들의 눈이 그곳에 모였다. 한복을 곱게 입은 터라 행여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질까 불안한 눈치들이다. ‘음복주 마실 텐데 막걸리는 왜 들고 오시지?’ 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어머님은 조상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한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엉거주춤 바닥에 앉아, 손수 청주를 비우고 막걸리를 붓는다. 혼자서는 일어나지 못하시는 것을 아는 손자가 곁에 섰다. 침대에서 소파로 식탁의자로 옮겨 앉는 일이 전부인 어머님이 손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절을 두 번 하고 일어섰다. “어매 아배요, 우리 장손 장가 좀 보내주소. 영감은 거기서 뭐 하니껴” 참았던 소원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어머님은 조상님께 올리는 막걸리가 효험이 있을 거라 믿으시는 듯 했다. 차례 상 앞이 조용해졌다. 나는 곁눈질로 장본인인 조카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같은 처지인 우리 아들을 끌어넣는다. 사촌형이 던진 장가라는 공을 얼떨결에 받은 아들이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조상님, 할매가 부탁까지 했는데 손자들이 장가 못가면 조상님 탓입니데이” 아들의 너스레에 한바탕 웃음으로 계면쩍은 순간을 넘겼다. 차례 상을 물리고 세배를 한다. 절을 한 손자들이 할머니께 증손자 대신 얇은 봉투를 내민다. 떡국을 앞에 놓고 둘러앉았다. 이제는 두 집 식구 모여 봐야 예전 큰댁 식구보다 적다. 시집간 딸네들의 빈자리는 떡국 먹는 소리만이 채우고 있다. 그때의 설날은 집안이 아이들로 왁자했다. 가래떡을 썰고, 강정을 만들었다. 조카들의 손까지 빌려 한 광주리나 되는 콩나물을 다듬고, 몇 시간동안 전을 부쳤다. 친척들을 맞이하는 인사가 연이었고, 방마다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만큼 주방은 상차리기에 바빴다. 차례상 앞은 흰 두루마기 차림의 어른들과 양복차림의 젊은이들로 그득했다. 맨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은 잠시 후에 받을 세뱃돈 생각에 마냥 신났다. 거실에 빙 둘러 앉아 윷놀이 판을 벌렸다. 바닥에 발을 구르며 도야, 도야 호부랑 도야를 외치며 흥을 돋우는 팀과, 모가 나오기를 두 손 모아 염원하는 팀의 목소리가 어우러졌다. 공중을 휘돌아 치며 바닥에 떨어지는 윷가락이 판세를 뒤집으면, 와아 함성 소리와 함께 시아버님의 어깨가 들썩였고 큰며느리인 형님도 춤을 추었다. 서른 명도 넘는 친척들과 함께 했던 그날들이 꿈결인 듯 아스라하다. 코로나 이후로 우리 식구는 설날 아침에 큰댁에 간다. 간단히 차례를 지내고, 아침을 먹는다. 상을 마주하고 앉아 하는 이야기가 길지 않다. 설거지를 끝내고,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소파에 앉는다. 차를 마시며 멀거니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 몇 번이나 재방송한 드라마의 대사까지 외우다시피 하는 어머님은 장면마다 설명을 덧붙인다. 사촌형과 몇 마디 나누던 아들은 할머니 방에서 자고, 남편은 소파에 앉아 졸고 있다. 형님이 윷가락을 가지고 나온다. 해 지난 달력의 뒷면에 윷판을 그리지만, 아무도 다가앉는 이가 없다. 나는 슬그머니 그 앞에 앉아 윷가락을 만져본다. 아버님이 만드신 싸리 윷이 손안에 착 붙는다. 어깨위로 높이 던져본다. 바닥에 먼저 떨어진 세 가락이 엎어지고, 뒤늦게 떨어진 한 개가 흰 배를 내 보인다. 한 귀퉁이가 배꼽마냥 까맣게 칠해져 있다. 왔던 길로 뒤돌아 가라는 뒷도다. 오래 묵은 윷가락도 어머님의 화양연화였던 그때가 그리운가 보다. 졸던 남편이 집에 가자며 옷을 주섬주섬 걸친다. 나는 형님이 챙겨 주는 음식들을 받아들고 마지못한 듯이 뒤를 따라 나선다. 설날 하루가 길다. 우리는 남은 시간 앞에서 잠시 허둥거린다.

2025-02-19

꿈, 현실이 되다

정미영 수필가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고 습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수식어를 쓰지 않고 건조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를 즐겨 썼던 그였다. 하드보일드 문체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것은 헤밍웨이의 글쓰기에 대한 신념이었다. 소설가는 이야기에 살을 붙일 수 있지만,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글을 써야 한다는 그의 가치관은 내게 신선했다. 그는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것은 ‘무기여 잘 있거라’, 아프리카의 사냥 경험은 ‘킬리만자로의 눈’으로 발간되었다. 경험으로 배우는 것이 많아질수록 진실에 가깝게 상상할 수 있다고 작가 지망생들에게 자주 언급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유달리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을 때면 소설의 배경 장소와 집필 공간이 궁금했다. 언젠가는 문학 기행으로 꼭 가보고 싶었다. 내 꿈은 현실이 되었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 영감을 주고, ‘오후의 죽음’을 집필했던 장소가 남아 있는 론다에 갔다. 해발 739미터에 위치한 론다는 강원도 평창과 비슷한 위치라고 한다. 주변의 낮은 평원 위에 우뚝 솟은 암석 고원이라는 설명이 막연했는데, 우리나라 지형과 비교를 하니 쉽게 이해가 되었다. 론다는 스페인 투우의 본고장으로 유명하다.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 있고 현대 투우 방식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이 고장 출신의 전설적인 투우사 로메로가 경기 방식을 바꾼 덕분이었다. 로메로는 투우 관람을 즐겼던 헤밍웨이가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소설에 그의 이름을 그대로 썼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론다에는 ‘헤밍웨이 산책로’가 존재한다. 나는 헤밍웨이의 흉상 옆에서 사진을 찍고는 곧장 그 옛날 그의 발자국을 상상하며 내 흔적을 남겼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에 알맞은 마을”이라고 했다.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강렬한 절벽을 도화지 삼아 누군가 그림 한 폭을 그려놓은 듯한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헤밍웨이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누에보 다리로 갔다. 120미터 깊이의 엘 타호 협곡 위에 놓인 아치형의 다리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양쪽으로 절벽이 계속 이어지고 한가운데에는 과달레빈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아찔하면서도 황홀했다. 주변의 경치를 내 마음에 담으면서 한편으로는 다리를 만든 사람들이 떠올랐다. 절벽 위에 선 론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닿을 수 없는 거리 앞에서 오랫동안 한숨을 삼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절망은 포기하지 않는 집념으로 변했고 꿈은 현실이 되었다. 변화를 위한 갈망과 화합을 위한 노력은 결실이 되었다. 절벽을 사이에 두고 나뉘었던 삶이 연결되었다. 42년간의 공사를 거쳐 1793년에 새로운 다리를 뜻하는 누에보 다리가 완공되면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원활하게 소통되었다. 다리를 건설했던 노동자에게는 고단하고 아슬아슬한 생의 단면이었고, 또 다른 이에게는 두 지역을 연결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협곡 아래로 스며들었지만, 꿈은 다리로 남아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는 다리 전체를 온전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측면이 아닌 정면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다리 아래 협곡으로 내려가는 입장권을 사야 했다. 표를 끊고 안전모를 쓴 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었다. 누에보 다리 전체 모습이 내 두 눈에 담긴 그 순간이었다. ‘노인과 바다’ 책 속의 주인공인 산티아고의 독백이 떠올랐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아.” 그는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고 바다를 헤맸다. 그러나 고기를 잡겠다는 꿈을 잃지 않았기에 마침내 커다란 청새치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청새치는 상어 떼의 습격을 받아 뼈만 남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로 나갈 용기와 희망을 다시 얻었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꿈은, 현실이 되리라.

2025-02-12

겨울에도 꽃은 핀다

배문경 수필가 올겨울 젤 추운 날 겹겹의 마음이 모였다. 차에서 내리자 저편에서 S가 손을 흔든다. 추운데 얼른 차를 옮겨타라고 손짓한다. 배낭을 차에서 꺼내 친구 차로 옮기자 데워둔 차 안이 따뜻하다. 오랜만에 봐도 어제 본 듯 반갑다. 그새 좀 수척해진 걸까. 희고 눈부신 피부는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밝게 빛나는 화이트 리시안 같다. 가까이 살아도 이렇게 모임을 따로 갖지 않고는 얼굴 보기가 힘드니 핸드폰으로 일상을 묻고 답을 하며 미루어둔 만남이 오늘이다. 이번 만남을 주체적으로 만들고 스케줄을 엮은 친구이기도 하다. 오랜 교직생활을 명예퇴직했다. 그의 집 뜨락에 푸르게 빛나던 화초처럼 나날이 빛난다. 날마다 포항 북부 해수욕장 근처에서 운동할 그녀가 반갑다며 손을 내민다. 곧이어 K가 차 문을 열고 앉자마자 대구까지는 본인이 운전을 하겠다며 나선다. 나는 속으로 안심이 되었다. 대구에서 운전하다 신호등이 헷갈려 사고 날 뻔한 경험이 있어 흔쾌히 고맙다고 했다. 제제벨 스프레이 장미처럼 화려한 그녀다. 선글래스가 언제나 잘 어울리고 어디서든 걸림이 없는 당당함과 거침없는 입담은 매력 만점이다. 스무 살에 그녀 손에 있던 카메라는 삶이 되었다. 웨딩 촬영 사진과 우리가 그녀의 손에서 재탄생되곤 했다. 한 편의 인생 드라마가 온전히 사진 속에서 시작되고 사진으로 연결된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걸려있던 무수한 사진들이 그녀의 삶이다. 근래는 십여 년을 추구해온 요가로 자신의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이제 셋이 출발해서 동대구역으로 올 친구를 만나러 간다. 도착시간에 맞춰 그녀를 픽업해서 목적지로 향해가리라. 함께 하기로 했던 두 명의 친구 중에 한 명은 참석이 어렵다는 전화를 먼저 했던 모양이다. 다섯 명이 모여 가기로 한 여행이기에 미리 알았다면 나는 참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프지 말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무던하고 고요한 L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이를 돋보이게 한다. 누구보다 배려심이 많은 그녀를 보기 위해 만나러 간 적이 있다. 이 겨울 더 추워졌을 평창에서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는다. 아프지 마라. 다섯이 아니라 넷이지만 옆자리 하나는 그녀의 몫으로 비워두었다. 그리움은 두 배가 되어 다음 만남에서 온전히 손을 잡고 기쁨을 노래하리라. 이전에 꼭 참석하겠다던 말이 떠 올라 마음이 짠하다. 작은 나비 같은 A가 환한 얼굴로 다가온다. 역으로 간 우리의 마중으로 함께 모닝커피와 도넛을 한입 베어 문다. 달콤쌉사름한 쵸코도넛과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우리의 아침을 맛나게 만든다. KTX를 타고 오느라 애썼을 그녀의 얼굴이 볼그레하다. 오늘 일정과 내일 일정을 공유하며 우린 떠났다. 겨울 구례 쌍계사의 옛 추억을 더듬었고 화계장터를 구경하며 생강청을 사고 옛 장터같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아점을 먹었다. 바로 앞 강에서 잡았다는 재첩이 든 부추전과 재첩국과 빙어 튀김으로 모두 만삭이 되었다. 그곳에서 먼 경남 산청으로 어둠을 뚫고 달려 동의 한방촌에서 구들목 같은 따뜻한 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물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새벽의 신선한 기운은 일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가벼운 세상의 나로 태어나길 기대했다. S가 삶의 고마움으로 일인 오만 원이 넘는 한정식을 예약 주문했다. 약선으로 만들어진 소갈비찜과 하나하나 공들인 음식을 우리에게 건강으로 선물했다. 덮개를 한 나무 터널을 지나며 사는 이야기들로 꽃을 피웠다. 엄청나게 큰 기가 센 바위 앞에서 각자의 안녕과 삶을 위해 기도했다. 보이지 않는 큰 힘이 우리를 소원하는 곳으로 이끌어 주리란 마음 한 자락을 바위 구석구석에 새겼다, 빠듯한 일정으로 지치자 K가 족욕과 십전대보탕으로 짧고도 좋았던 이번 여행을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또 한 번 두 손을 모았다. 어둠 같은 세상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다발처럼 함께 아름답게 뭉쳐 피어나자꾸나. 환갑이란 나이가 우리를 노을처럼 무르익게 만들지만, 아프지 마라, 그리고 다시 뭉칠 그날을 기약하며.

2025-02-05

15층에서 내려다본 지구

윤명희 수필가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허둥거린다. 지나는 길에 잠시 들리겠다고 하자, 조심해서 오라는 말과 함께 천천히 오라는 말이 길게 따라붙는다. 혼자 사는 아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 뒤로 미처 치우지 못한 베란다를 떠올렸나 보다. 전화를 끊자마자 그는 쓰레기를 양손에 들고 계단을 내려갈 것이다. 지난 여름, 휴가라고 모처럼 집에 온 아들과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보았다. 영화를 한 편 보고, 막 리모컨을 돌리는데 잡다한 물건 속에 파묻히다시피 한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는 누울 자리도 없어 앉아 자야 할 만큼 온 집을 물건으로 가득 채웠다. 그녀가 주워 온 것들은 쌓이고 쌓여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른 프로 보자는 아들의 말을 자르며 잘 보란 듯이 볼륨까지 높였다. 화면에 비치는 것들의 썩은 냄새가 내 코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들끓는 파리에 바퀴벌레까지 눈앞을 어른거렸다. 아들은 할머니가 저장강박증 환자 같다고 했다. 아픈 기억으로 생긴 마음의 빈 공간을 물건으로 채운다는 것이다. 끌어 모은 물건들은 누가 봐도 쓰레기로 보일 것들이었다. “너도 아픈 기억이 있니?”라고 묻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베란다에 분리해 둔 재활용은 다 버리고 왔느냐, 생활쓰레기통은 깨끗이 다 비웠느냐는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이 뜨거운 여름, 온 집안에 퀴퀴한 향수가 피어오르겠다고 하자, 아들이 기겁했다. 쓰레기까지 껴안고 살려면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해야겠다는 내 말에, 그는 눈만 끔뻑끔뻑한다. 나는 집의 평수에 예민하다. 거주할 곳 한 평을 늘리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가. 아침에 눈 뜨기 바쁘게 일하러 가고,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대충 배달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아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 주말이면 밀린 잠을 자고, 겨우 일어나 빨래한다. 그 또한 일이 덜 바쁠 때 말이지, 주말 없이 일 할 때는 빈 택배상자와 배달음식 통들로 베란다가 점점 좁아진다. 쉬는 날 큰마음 먹어야 치운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할머니를 핑계로 아들에게 제때 버리라고 각인시키려했다. 할머니 집에 도움을 주려는 이웃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쓰레기들을 끌어내 차에 싣는다. 화물차가 몇 대나 줄을 지어 실어낸다. 저렇게나 많다고? 끝없이 나오는 것들에 숨이 턱 막혔다. 나는 할머니 걱정보다 끌어내는 쓰레기에 눈이 꽂혔다. 온갖 병균이 내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몇 대의 차가 나가고 나자, 조금씩 집안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볼일을 마치고, 아들의 아파트에 들어섰다. 주차장 한 귀퉁이에 경비아저씨가 플라스틱 더미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오물이 묻은 배달 음식 통들을 건져 포대 옆으로 던졌다. 달라붙었던 음식 찌꺼기가 바닥에 흩어졌다. 분리수거장을 넘어 주차선까지 몇 개나 침범한 것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해 몇 바퀴나 돌았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지 않았다. 누가 붙잡아 둔 건가, 짜증이 살짝 올라왔다. 나는 버튼을 누르고 또 눌렀다. 한참 만에 숫자가 천천히 내려오고 문이 열렸다. 한 남자가 쓰레기 더미 속에 서 있다. 손가락에는 플라스틱이 든 커다란 봉지와 일반쓰레기 봉지가 걸려있고 발치에는 종이상자가 가득이다. 한 번 만에 다 버리고 싶은 그의 마음이 줄줄이 그것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있다. 종이상자에 얹힌 크고 작은 택배 상자가 바닥에 떨어진다. 아들을 보는 것 같아 나도 덩달아 거들어주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그에게 목례하고 아들 집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음악이 먼저 마중한다. 아들은 보란 듯이 베란다 문까지 열어두었다. 나는 빈 쓰레기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베란다 문을 닫으려다 바깥을 내다보았다. 잎들을 놓아버린 겨울나무의 앙상함 사이로 큰 포대들이 보였다. 조금 전에 봤던 것보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재활용 포대들이 더 많은 차선을 물고 있다. 주위를 돌아보았다. 첩첩이 고층아파트로 둘러싸였다. 그들도 똑같이 쏟아내고 있겠지. 곧 쓰레기가 15층까지도 금방 차고 오를 것 같다. 할머니는 남들이 만든 쓰레기를 집에다 모으고, 나는 내가 만든 것들을 집 밖에 버리고 있다. 집안이 깨끗하지 않으냐고 묻는 아들에게 나는 할 말이 없어, 애초부터 만들지를 말라며 등짝을 후려친다.

2025-01-22

계단을 오르는 여자

정미영 수필가 매서운 겨울비가 아파트 단지를 역동적인 빗물체로 풀어헤친다. 빗방울이 굼뜨게 내리는 틈을 타 집을 나선다. 퇴원한 후, 회복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누워 지내는 것보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맨 꼭대기 층에 올라간 엘리베이터를 한참이나 기다린다. 무리한 운동보다는 걷기부터 시작해야지. 동 입구에 다다른다. 그칠 줄 알았던 빗줄기가 더 굵어져 땅 위로 곤두박질을 거듭하고 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겨우 나왔는데 집으로 돌아가려니 아쉽다. 그 순간 열린 비상문 사이로 계단이 보인다. 16층에 있는 나의 집으로 이어진 길을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밟는다. 신음을 토하고 숨 고르기를 반복했지만 계단 오르기를 멈출 수는 없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중에 ‘계단을 오르는 여인’이 있다. 그는 여인이 오르는 계단을 통해 삶의 여정과 노력, 끊임없는 도전과 성장을 담아내고 내면적인 탐색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었다고 한다. 나는 오늘, 마치 고흐 그림의 모델이 된 듯 계단을 오른다. 계단은 내 삶의 여정을 나타내며, 오르는 과정은 인생을 건너가는 나의 노력과 도전을 나타내는 것만 같다. 남편이 심장 시술을 하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즈음 나는 수필가로 등단을 했고 논술 선생님으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몸져누운 남편을 바라본 뒤, 집에 있는 컴퓨터로 ‘논술생 모집’이라는 광고 전단지를 만들었다. 나에게 투자한다고 생각하고 대용량 프린트기를 구입해서는 용지를 출력했다. 그러고는 어린 두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몇 날 며칠 계단을 오르내렸다. 전단지를 1500세대 현관문에 일일이 붙였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요령이 없던 탓에 다리가 붓고 팔이 무척이나 아팠다. 운동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았던 내가 스스로를 다독였다. 계단을 오르내리면 운동이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사실은 한 푼이라도 돈을 절약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계단을 오르는 것은 어렵고 힘든 순간이었다. 계단은 내가 성장하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나의 용기와 의지를 자주 시험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여기, 계단 위가 맞는지, 현실적으로 자각할 때면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고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수시로 찾아들었다. 한번은 복도 창문으로 감빛 노을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따뜻한 저녁밥을 해놓고 아이들을 기다려야 하는 시각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더욱 급해져서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다녔다. 눈앞에 펼쳐진 계단은 나에게 긴 여정을 거쳐야만 휴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져 때론 두려웠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남편과 두 아들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 보았다. 가족은 항상 내 곁에서 위안을 주는 존재고 나를 앞으로 계속 걸어가라고 힘이 되어 주었다. 가족의 사랑은 마치 그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넘어지지 않게 나를 비춰주던 빛과 같았다. 그 빛을 따라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 자신의 내면을 단단하게 하며 성장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여정의 막바지에는 가족의 사랑이 깃든 따뜻하고 안정감을 주는 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전단지를 붙인 것은 내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자 용기의 발현이었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이전에 전업주부로서 살던 내가 더 이상 아니었다. 한 명의 학생과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단을 오르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선생님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드디어 시작했다. 나는 지금, 쉬엄쉬엄 아파트 계단을 오르고 있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다양한 형상의 계단을 무수히 마주할 것이다. 그 가파른 여정은 끝이 없겠지만 어려움과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나 자신이 허방을 딛지 않도록 서두르지 말고 나만의 보폭으로 걸어가야겠다.

2025-01-15

장갑 한 짝

윤명희 수필가 오늘은 버스타고 출근한다. 어젯밤, 퇴근 후 지인들과 늦게까지 술자리를 즐긴 탓이다. 이미 출근시간은 늦었고, 버스는 한산하다. 내 차로 십오 분이면 도착할 사무실이 삼십 분이 지나도 아직 한참 더 가야 할 것 같다. 버스가 중앙시장에 정차했다. 시장의 아침은 번잡한데 버스에 오르는 이가 없다. 바쁜 내 마음과는 달리 운전기사는 문을 열어둔 채 정류장을 내다보고 있다. 검정비닐봉지를 든 백발의 할머니가 힘겹게 버스에 오른다. 한 발 오르고 다시 또 다른 발을 올린다. 걷는 걸음마다 바라보는 내가 숨이 찬다. “잠시만 잠시만요, 기사양반 내가 앉거든 출발 하세이” 손잡이를 꽉 움켜잡은 할머니가 당부한다. 계단에 발을 올리면서부터 운전석 바로 뒤의 의자까지 한 발자국씩 내 딛는 걸음걸이가 빙판길을 걷는 것 같다. 서너 발자국이면 닿을 거리가 멀기만 하다. 겨우 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손에 든 검정비닐봉지를 발치에 놓는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할머니가 벌떡 일어섰다. 깜짝 놀란 운전기사가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쳤다. 할머니는 손가방이 없어졌다며 빈손을 들어 허둥거렸다. 운전기사가 황급히 핸드브레이크를 당겼다. 그는 할머니에게 가만히 앉아있으라는 말을 연거푸 내뱉으며 황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빼고, 정류장 의자 밑까지 가방을 찾아보는 그를 내다보았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어디서 잃어버렸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조금 전까지 있었다며 검정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헤쳐 보았다. 작은 손가방을 발견한 그녀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했다. 나는 못 본 척 눈을 반쯤 감고 있는데, 내 뒷좌석에 앉은 남자가 쥐어박을 듯이 혀를 찼다. 할머니가 차에 오를 때부터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연신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혀를 찼던 남자다. 마지막 ‘에잉!’까지 따라붙는 남자의 말투에 속이 뒤틀렸지만, 어떤 사람인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저 할머니의 모습이 나의 내일인 것 같은데 혀까지 찰 일인가. 얼마 전, 친구와 시골길을 걸었다. 추수를 끝낸 들판은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햇볕이 모인 논둑 밑에 한 무더기의 들국화가 보였다. 소담스러운 모습을 지나칠 수 없었다. 쪼그리고 앉아 내려보다가, 서리라도 내리면 시들어버릴 들국화에 욕심이 생겼다. 치맛자락을 모아 움켜쥐고 조심스레 내려가려 하자, 친구가 나잇값을 하라고 했다. 괜히 엎어지는 불상사를 만들지 말라는 말에 나는 바지만 입었다면 폴짝 뛰어내릴 수도 있다고 장담했다. 큼지막한 돌을 밟고 내려가면 될 것 같아 살짝 왼발을 내렸다. 몸의 무게가 오른 다리에 실리자 무릎이 시큰거렸다. 삼십 몇 년 전에 다쳤던 무릎이 요즘 말썽이다. 불편한 발을 먼저 내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오른 발끝이 돌에 닿는 순간이었다. 나는 논바닥에 가오리 엎어놓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의 경로는 기억에 없다. 왜 넘어졌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천천히 가고 있었다. 논바닥에 뺨을 붙인 채 일어서지를 못했다. 친구의 부축에 겨우 일어난 나는 비틀어진 안경보다 얼얼한 오른쪽 광대뼈에 먼저 손이 갔다. 얼굴에 상처가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긁힌 무릎에 붙은 흙을 쓸어내리며 논둑을 쳐다보았다. 저 높이에 내가? 허방을 짚은 것도 아닌데? 치맛자락에 도깨비 가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친구는 가시를 떼어내며 걱정스레 살폈다. 바위를 이리 저리 뛰어넘으며 산을 오르던 순발력은 이미 나를 떠나고 없었다. 몸은 세월의 눈금만큼 정확하게 가고 있는데, 내 마음은 그 몸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젠 우리 나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친구의 말이 유리조각이 되어 가슴에 빗금을 그은 날이었다. 버스가 서자, 혀를 차던 남자가 일어섰다. 나는 눈을 지그시 뜨고 그 남자를 곁눈질로 훑어보았다. 정수리가 휑한 그도 한발 내리고 또 한 발 옮긴다. 창밖을 내다보니 굽은 등이 허정거리며 가고 있다. 내 눈길이 따라간다.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하자, 갑자기 그가 돌아서서 허우적거리며 뛰어왔다. 장갑 한 짝을 든 손을 휘휘 저으며 ‘장갑, 장갑’이라고 외쳤다. 뒤돌아보니 그가 앉았던 자리에 한 짝이 놓여있다. 던져줄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버스가 천천히 달렸다.

2025-01-08

벼랑에 서다

“봄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울어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니려는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만나 뵈옵기를 기우리리. 낭이여, 그리운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오.”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차출된 득오가 화랑 죽지랑을 추모하여 읊은 모죽지랑가다. 한 때는 역사의 정점에 있었을 그들이다. 오봉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나무숲 사이 부산산성의 잔해는 겹겹이 쌓인 돌무더기로 남아있다. 옛날 군창지(軍倉址)며 우물과 연병장의 흔적으로 관문성(關門城)처럼 할석(割石)으로 쌓아도 세월의 풍화 속에 대부분 붕괴되고 일부분이 남아있다. 의상대사가 지은 주사암은 죽어나간 사람이 없다고 하여 불사처라 불리기도 한다. 옛날 어느 왕녀가 밤마다 나갔다 돌아오니 왕은 수상히 여겨 그녀의 손에 붉은 주사를 칠해 놓았다. 이튿날 주사암 언저리의 암벽에 붉은 주사를 발견하고 승려를 급박한다. 그러나 승려는 많은 군사를 일으켜 봉변을 면하고 왕은 부처님의 보호를 받는 큰 승려라 여겨 국사의 자리에 앉힌다. 전설은 이름을 주고 오봉산 정상에 큰 바위 두 개가 사천왕상처럼 입구를 지키는 절하나 우뚝하다. 직사각형 네모진 바위가 벼랑 끝에 버티고 있다. 기암절벽은 산의 또 다른 모습으로 낙랑장송과 떡갈나무 사이에 앉을 자리 좁은 산의 정상에 놀랍도록 펼쳐져 있다. 한때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사극 두어 편이 이 곳에서 촬영되었다며 이정표처럼 꽂혀있다. 말로만 듣던 바위에 서보니 세상이 눈 아래 보인다. 어깨를 서로 걸친 산들이 바위를 비호하며 바위를 향해 모두 올려다보는 느낌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명불허전의 마당바위에서 김유신은 보리로 술을 담았다. 천길단애의 위태한 곳에서 하필이면 수백 명의 화랑을 집결시키고 회의를 연 이유를 생각해본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수백 미터 아득한 벼랑이 아닌가. 보여주었으리라. 죽기로 마음먹은 자만이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마음먹지 않으면 적의 칼에 희생될 터 눈을 부릅뜨고 벼랑을 대하듯 적을 베라는 강건한 마음을 전달한 것은 아닐까. 보리술을 나눠 마시며 서로의 마음에 진정한 신뢰와 우의를 다졌을 일이다. 배문경수필가 언제부터였을까. 마당바위 한 귀퉁이 촘촘히 돌들을 쌓아올린 공덕탑이 있다. 한 개 한개 쌓아올리며 그만큼의 소원도 함께 쌓았으리라. 정상으로 부는 바람에도 끄떡없이 소원은 빛을 발한다. 누군가 금줄을 쳐두었다. 천년 전 이곳에서 화랑의 도를 설한 자리 옆, 귀 밝은 돌이 그래 그래하며 침묵 속 동감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풍월을 읊지는 않아도 속세의 시린 속마저 다 버리고 절벽과 마주한 사람들의 등을 따뜻한 눈빛으로 지켜보지 않았을까. 산바람이 능선을 에돌고 장송의 솔잎사이를 비집고 나와 마당바위 귀퉁이에 정좌한다. 마당바위에 서니 세월 속 탁류가 그냥 지나가지는 않은 것 같다. 백성과 왕 그리고 장군이 나라의 하나 됨을 간절히 원했던 신라를 읽어본다. 마당바위에서 세상에 대한 갈급함이 만든 하나의 목적, 당시 시대를 지탱하는 화랑의 힘이었다. 우리에게 이 시대를 유지할 힘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높은 산봉우리가 다섯 개라 오봉산이다. 다섯 봉우리에는 넓은 주름치마 같은 능선과 계곡사이로 여근곡(女根谷)이니 부산성(富山城)이니 주사산(朱砂山)과 유학사 등이 담겨 넉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당바위에 올라 세상사를 내려다보고 민초들의 삶을 어루만질 수 있는 긍휼은 마당처럼 넓고 넓음에서 온 것이리라. 산세가 수려한 이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노라니 조급증도 내려놓고 욕망도 내려놓은 채 젊은 유신이 따라주는 보리술 한 잔이 그리울 뿐이다. 마당바위에 서 보라. 삶이 절벽이라 돌아설 자리가 없는 이 곳에서 다시 한 번 더 시작을 각오하게 되리라. 정상의 바람이 푸른 기운으로 가득하다.

2024-12-25

서유당기(書遊堂記)

정미영 수필가 새뜻한 돋을볕이 어둠을 사르며 적막한 공간에 들어선다. 밤사이 아무런 움직임도, 아무런 소리도 없던 곳을 지배하던 절대 고요도 서둘러 아침에 자리를 양보하며 길을 떠난다. 여기는 어린이 도서관이다. 나는 ‘책과 노니는 집’ 즉 서유당(書遊堂)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어린이 도서관은 1979년 사직공원에 처음으로 생겼다. 1906년 평양에서 문을 연 최초의 공공도서관 ‘대동서관’이 지어진 뒤, 73년 만에 생겨났다. 어린이 도서관이라고 이름을 붙였어도 그때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을 것이다. 종이로 된 출판물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교과서나 참고서, 동화책 등을 깨끗하게 읽고 선배가 후배에게, 형이나 누나가 동생에게 물려주던 때였다. 아마도 조용히 독서하고 공부하려고 이용했던 일반 공공도서관처럼 정적(靜的)인 이미지가 강했을 것 같다. 그에 비해 요즘 어린이 도서관은 동적(動的)이다. 책과 연계해 인형극을 보여주거나 작가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고, 영화를 보는 시청각실,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동아리방도 있다. 유아실에는 책을 가지고 도미노를 쌓는 아기들도 눈에 띄고, 소리 내어 읽어 주는 부모님도 있다. 모두 따사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주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이야말로 책과 노니는 집이 아닐는지. 인생시계의 가을 중턱을 숨이 가쁘게 넘고 있는 나도 어린이 도서관에 자주 방문한다. 그곳에서 내가 책을 바라보는 마음은 별빛을 응시하는 것과 같다. 어두운 밤하늘을 끊임없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바라보는 어린이들처럼 나의 눈동자도 책장 앞에서 지식의 환향(還向)을 꿈꾼다. 책들은 나에게 끝없는 발견의 여정을 약속하며, 상상력의 날개를 펴주는 비밀의 문으로 느껴진다. 나의 항로가 되고 책 속의 각 페이지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나침반과 같다. 호미곶을 마주하고 있다. 유달리 소금기 실린 바람의 인자들이 몸에 들러붙는 것만 같아 내 마음이 세차게 흔들린다. 땅 속 뿌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물줄기를 찾듯, 독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도서관을 찾는다. 구룡포에 있는 폐교를 새로 단장해 개관한 바닷가 도서관이다. 운동장 벽면에 해초를 입에 물고 있는 거대한 고래 벽화가 있다. 바다가 아닌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이 요동친다. 정신적 빈곤에 허덕이는 나도 다시 자유를 되찾고 싶다는 열망이 고조된다. 나는 열람실을 향해 자박자박 발걸음을 옮긴다. 서가 사이에 들어서자마자 종이가 만들어지기 전, 갈대를 엮어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렸던 파피루스를 떠올린다. 파피루스의 후예들인 종이책과 눈인사를 나눈다. 정갈하게 정리된 서가 사이를 오가며 서너 권의 책을 꺼내 들면, 작가의 소중한 글을 제각각의 공법으로 알차게 꾸민 출판사의 노력이 표지부터 물씬 전해진다. 책을 펼치면 주옥같은 언어의 황홀경이 펼쳐진다. 인생의 세밀한 구석들을 명증하게 들추어내는 책을 들여다볼 때면, 글을 쓰고 싶은 나로서는 자극을 받는다. 나도 우리네 인생사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깊은 울림을 주는 문체를 사용해 진솔한 작품을 창작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내 글 속 청신한 문장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날아가 선명하게 돋을새김 되어 빛나면 좋으련만. 큰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잠시나마 무념무상 바라본다. 그러다가 ‘독서는 마음의 창문을 넓히는 여정이다.’라고 했던 노자의 말을 떠올린다. 그 창문을 열고 들어온 지식과 경험은 나의 내면을 더 넓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비결이리라. 나는 지금, 내면을 넓히고 삶을 풍요롭게 하려고, 서유당(書遊堂)을 거니는 중이다. 한 손에는 책이라는 나침반을 들고서, 내 생의 지도에 나만의 항로를 그려 넣는다. ※기(記)는 한문 산문 양식으로 성현의 말씀을 인용하고, 사실을 그대로 적는 글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록 문학이나 수필에 속한다.

2024-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