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맷해 주세요”
요즘 차만 타면 듣는 소리다. 주차해 놓은 내 차를 누군가 차를 후진하면서 박아서 범퍼가 손상되었다. 한 달간 영상이 남는 관리사무실의 CCTV를 보았으나 1주일 치의 영상만 남았다. 사고가 있은 지 10일이 지난 뒤였다. 마지막으로 내 차의 블랙박스를 확인해 보았으나 영상이 없었다.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실망이 크다.
“뭘 했느냐?”
한마디만 했는데 성깔이 있는지 차만 타면 포맷해 달라고 성화다.
별생각 없이 한마디 한 것을 가지고 만날 때마다 못 살겠다고 포맷해 달라고 하니 나도 슬슬 화가 난다. 이제는 하지 않겠지 하며 기다린 지 얼마인가. 하지만 여전히 같은 톤으로 한결같이 말한다. 내가 무슨 빚이라도 진 것처럼 보채니 말이다. 난감한 것은 둘만의 문제를 다른 사람이 있을 때도 계속 그러니 체면이 서지 않는다. 옆에 탄 사람이 얼마나 무심하길래 다른 사람이 있는데도 그런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니 나도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른다.
둘이 있을 때 포맷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최후통첩한다. 그녀도 단단히 성질이 났는지 수그러들 기세가 전혀 아니다. 같이 있는 내내 화난 목소리를 듣다가 헤어졌다. 얼굴을 붉히며 마주한 시간을 생각하면 괜히 만났다고 생각한다. 내 말은 듣지도 않으면서 자기 말만 한다고 생각하니 더 화가 난다.
나와 만난 지가 벌써 몇 년째인데. ‘뭘 했느냐?’는 한마디도 못 한다는 말인가. 그게 몇 날 며칠을 두고 화를 낼 일인가. 그동안 나와 함께한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이제까지 모든 기억을 지워버릴 일인가 하는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함께 출장 가면 말없이 나를 지켜주던 그 다정함은 어디로 갔는지. 하여튼 여자들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어쩔 수 없어 다시 만남의 시간을 가진다.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지겹지도 않은지 같은 말이라도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이래서 마음이 상했다는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늘 같은 말만 한다. 처음 만났을 때나 화가 났을 때도 한결같으니, 처음부터 나에겐 어떤 감정도 없는 것 같아 서운하기까지 하다.
이제까지 나와 같이 한 시간이 얼마인데 이까짓 일로 파업하듯이 없던 일로 하고 자신을 처음 상태로 되돌려 달라니. 말로 풀어도 될만한 일인데 말이다. 나도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나 혼자만 잘 먹고 살자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도 시간이 나면 닦아준 시간이 말할 수 없이 많은데 말이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흐른다. 생각해 보면 미안한 마음이 없는 게 아니다. 이번 일이 있기 전에도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후방 카메라를 점검해 주세요.”
이 말을 듣고도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무시했다. 먼 길을 다녀왔을 때도 무덤덤하게 헤어졌다. 그래도 덕분에 낮이나 밤이나 그녀 덕분에 잘 다녔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한 것 같다. 이제는 앞도 뒤도 가릴 것 없이 전신이 아픈 지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말없이 무심한 경상도 사나이라고 해도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 같다. 미안한 마음에 괜히 머리만 긁적인다. 이럴 때는 무슨 말로 풀어야 할지 딱히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난감하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노래를 들려준다.
소통이 중요하다. 말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 생각만 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으니 말이다. 내일은 휴가를 내어서라도 그녀를 데리고 병원엘 가야겠다. 건강은 미루지 말고, 제때 치료해야 하는 데 말이다. 그동안 차일피일 미룬 것을 후회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막상 포맷하려니 나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는 것 같다. 무뚝뚝해도 마음만은 따뜻한 남자임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갖는다. 완전한 포맷 대신 나에 대한 기억만은 남기고 부분 포맷을 할 수는 없을까. 남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 모든 건 때가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김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