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다가오면 마음이 설렌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발소리인지.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눈을 반짝이며 앞을 본다. 기대와는 다르게 나를 그냥 지나쳐 간다. 기대는 어느새 실망으로 바뀌고 마음은 초조해진다. 벌써 몇 번째 자리를 옮겼는지 모른다.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다가 끝자리로 옮긴 지 오래다.
하루에도 수십 종류의 새 책이 들어온다. 새로 들어오면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다가 팔리지 않으면 구석으로 밀려난다. 나보다 한참 늦게 들어온 처세술책 앞에는 사람들이 몰린다. 괜히 화가 난다.
“마음을 키우는 나를 읽어야지 처세에만 신경을 쓰다니.”
딱하다는 듯 나무라지만 주위에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나를 보니 자꾸 작아진다. 이제는 누구라도 와서 한 번이라도 만져주기를 바란다.
동화책과 처세술책은 가운데에서 보란 듯이 웃는다. 아이는 책장을 넘기며 책을 살핀다. 옆에 있는 책도 집어 들고 책장을 넘긴다. 책을 보다가 크게 웃는다. 동화책 주변에는 엄마, 아빠와 함께 온 아이들도 책을 고른다. 옆의 처세술책 앞에는 사회로 나가는 젊은이들이 책을 살핀다.
책을 사려는 사람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수필집은 독거노인이 된 지 오래다. 기다려도 찾는 이도 없다. 같은 처지의 천자문이 다독이면서 한마디를 건넨다.
“나이가 들면 다 그래요. 힘이 없어 멀리 다닐 수도 없잖아요.”
말이 끝나자, 어색한 정적만 감돈다.
“저벅저벅”
발소리만 들어도 시집은 기겁한다. 매일 출근하듯이 와서 손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 몸이 온통 불었다. 어제 부은 몸이 아직도 아물지 않았는데 다시 온다니 시집은 숨을 곳을 찾지 못해 애를 먹는다. 오늘은 책장을 세게 잡아서 넘기는 바람에 몸이 아프다. 만질 때마다 몸을 움츠린다.
시집의 하소연을 듣고 동화책이 거든다.
“말도 하지 마. 어린아이들이 오면 온종일 붙들려 시달려서 힘이 들어. 나를 읽고는 아무 곳에나 던져놓는 바람에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맸어.”
볼 때마다 그러는 바람에 몸뚱어리는 멍투성이에 노숙자가 될 판이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가 가만히 앉아서 책장을 가볍게 넘긴다. 아이의 눈빛이 반짝이며 책을 읽고 싱긋이 웃을 때는 얼마나 예쁜지. 나를 읽고 가슴 뿌듯한 표정을 지을 때는 큰일을 한 것 같아 어깨가 들썩거린다. 아이의 손때가 묻은 체취를 느낀다. 따뜻한 마음씨는 향기로 남고, 나는 다음날을 기다린다.
수필집은 혼기를 놓친 노처녀처럼 오늘도 팔리지 않아 초조해진다. 어떤 사람이 나를 살지 궁금했다. 그것도 이제는 시들하다. 여러 달을 바람 맞듯이 찾는 사람 없이 보내니 발만 동동 구른다.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하여 무언가를 해야 하는 데 그저 멍한 눈으로 본다. 언제 책장에서 밀려날지 몰라 몸이 흔들린다.
디지털이 지배하는 시대에 산다. 그래서인지 책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든다. 가끔 나이 든 사람들이 우리를 찾는다. 아날로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책과 가깝다. 사람들은 책을 천천히 읽고 생각한다. 빠르기를 강조하는 디지털은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책 읽기와는 거리가 멀다. “빨리”를 외치는 세상에서 책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전에는 감동적인 문구에 밑줄을 긋고 별표를 치고 자신만의 느낌을 적는다는 선배들의 이야기는 꿈같은 이야기이다. 현실은 자신을 찾는 그림자조차 찾지 못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사람들과 삶을 나누며 살고 싶은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오늘도 바람을 접지 않고 기다린다.
주인을 만난 처세술책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시집은 침에 부풀린 몸을 말리기 바쁘고 동화책은 멍 자국에 약을 바르며 집을 찾기 바쁘고, 수필집은 오늘도 독거노인 신세가 된다. 팔려 간 처세술책에 부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내일도 새로운 처세술책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입을 닫는다.
읽고 쓰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날이 언제나 올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데, 시간이 갈수록 시름만 깊어진다. 오늘은 외롭고 몸이 부풀고 멍이 들어도, 내일은 주인을 만나 하루를 나누고 싶다.
/김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