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를 받고 약까지 챙겼다. 바람이 차다. 목도리를 여미고 잰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나이 듦을 확인한 탓일까. 요즘은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마음이 가볍지 않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내 차 앞을 가로질러 화물차 한 대가 서 있다. 앞 유리에 붙은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두어 번 신호가 가자, 곧바로 전화를 받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밝다.
잠시 뒤, 화물차 주인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그는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미안하다는 손짓을 했다. 차를 몰고 나가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다. 같이 고개를 숙이며 내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차에 올라 약봉지를 조수석에 두려는 순간, 누군가 차창을 툭툭 두드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을 내렸다.
“야! **, 이 땅이 니 꺼가?”
창문이 다 내려가기도 전에 욕이 먼저 들이닥쳤다. 반말에다 날 선 욕설에 순간 멍해졌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남자가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있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왜 이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화를 내지? 병원 건물 벽에 붙은 주차장 화살표를 보고 들어왔고, 빈 공간에 차를 세웠고, 주차 선도 어기지 않았는데. 기억을 빠르게 더듬어 보아도 내 잘못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는 다짜고짜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다. 병원이라고 하자, 그의 입은 더 거칠어졌다. 입에 담기 힘든 말들이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앞뒤 없이 퍼붓는 욕설 사이사이에 요지가 보였다. 이 곳은 자기 땅인데 왜 마음대로 주차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그 땅이 개인 소유라는 표시가 없었다. 주차금지 팻말도, 안내문도, 경고 문구조차 없었다. 그저 병원 옆에 비워진 공간일 뿐이었다. 그런 곳에 잠시 차를 세웠다는 이유로, 나는 마치 큰 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욕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다시 돌아보니 병원 주차장은 조금 더 안쪽에 있는 게 보였다. 얼른 고개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몰라서 그랬어요. 다음부터는 주차 안 할게요.”
나의 사과는 그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는커녕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을 일을, 그는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잡스런 말들로 나를 깎아내렸다. 사과를 하면 할수록 그의 말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공격했다.
‘여기가 당신 땅이라는 표시가 어디 있느냐’고, ‘그렇게 욕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욕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대꾸 한마디 하지 못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는데, 눈만 끔뻑이며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천천히 차창을 올렸다. 그의 목소리는 유리창 밖에서 둔탁하게 찌그러졌다.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참아. 참는 거야. 아니, 참을 일도 아니야. 너는 준다고 다 받니? 뭐든 받지 않으면 결국 그건 준 사람 몫이 되는 거지.’
시동을 걸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최대한 침착한 손놀림으로 차를 움직였다. 지금 네가 뱉은 욕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너에게 선물로 되돌려 줄게.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사이드미러 너머로 그는 여전히 손짓을 해대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자꾸만 떨렸다. 입에서는 ‘허, 참’이라는 말이 연신 새어 나왔다. 분노도 억울함도 아닌, 뭐라 이름 붙이기 힘든 감정이었다.
어딘가에 이 기분을 풀어놓고 싶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욕바가지를 그대로 되돌려주고 왔다고 하자, 그녀는 잘했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다 조용히 한마디 덧붙였다.
“얘, 밖에서 새는 바가지가, 안에서는 안 샐까?”
순간,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안 보면 그만이지만, 욕바가지 속에 사는 그의 가족들은 매번 휘청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입이 언젠가 가족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해 봤을까.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현관문을 열자, 아무 말 없이 나를 받아주는 이 공간이 고맙다. 조금 전, 내가 받지 않기로 한 욕 중에 하나라도 우리 집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조용히 목도리를 풀었다.
/윤명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