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희 수필가
딸과 통화를 하고 있는데 남편의 전화가 끼어들었다. 딸을 미뤄두고 남편의 전화부터 받았다. 그는 뚜렷한 용건도 없이 끊었다.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려던 차에, 또 신호가 왔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딸에게 내 신분증을 보내라고 한다. 방금 전에 통화했다고 해도, 그는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빨리 보내라는 말만 두어 번 하고는 끊었다.신분증을 보내던 중에 또 남편의 전화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정신이 없냐고 묻자 대답은 없고 신분증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한다. 왜 필요하냐고 하니 느닷없이 버럭 화를 냈다. 급하게 신분증사본을 보내자마자, ‘딸이 원격으로’ 라는 그의 말이 어슴푸레 들렸다. 순간, 남편의 핸드폰이 내 명의라는 것이 떠올랐다.나는 사무실을 박차고 나와 뛰기 시작했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빤히 보이는 집은 멀기만 했다. 꼭대기 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는 층마다 서고, 나는 평소에는 오르지 않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숨을 헐떡이며 현관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비밀번호 숫자가 하얗게 보였다. 손가락의 기억으로 현관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놀란 신발이 따라 들어왔다.남편의 핸드폰이 식탁 위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식탁도 따라 울었다. 핸드폰을 손에 들자, 마치 쥐와 엉겨 붙은 도둑고양이의 발광 같은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도둑고양이가 내 집을 다 뒤지는 것이 소리로 보였다.그것을 멈추게 하는 방법은 전원만 끄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전혀 작동이 되지 않았다. 다급해진 나는 떨리는 손으로 딸에게 전화했다. 빨리 신고부터 하라는 말에 112를 눌러 더듬거렸다. 경찰은 비행기 모드로 하고 기다리라고 한다. 떨리는 화면은 전혀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몇 번이나 누르고 눌러 겨우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핸드폰이 축 늘어졌다. 도둑고양이의 기운이 손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탁자 위에 던지듯이 놓았다. 매일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 괴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금방이라도 비시시 다시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통화 내용 중에 도둑고양이가 남편이 내게 꼭 전해야 할 말만 들리게 하는 수법으로 교란시켰다는 것을 안 것은 나중 일이다. 나는 그제야 넋 잃고 서 있는 남편을 보았다.두 명의 경찰이 오고, 곧이어 젊은 경찰이 들어왔다.젊은 그는 도둑고양이가 깔아놓은 악성프로그램을 지워나갔다. 암호 같은 파일의 이름들을 빠른 손으로 처리하는 그를 멍하니 보았다. 통장에 돈이 없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라했다. 대출까지 한다는 말에 나는 다시 얼어붙었다. 신용대출에 카드대출까지, 훔쳐갈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핸드폰 속을 모르는 나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에 몸이 휘청거렸다.벌써 줘버린 내 신분증으로 뭔 짓을 할지, 일 분 일 초가 불안한데 금요일 밤이다. 신분증 분실신고를 월요일 일찍 해야겠다는 내 말에, 딸은 경찰청 홈페이지에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라며 한숨지었다. 답답해하는 딸의 마음이 보였다.예전, 이모 앞에서 깔깔댔던 내가 떠올랐다.30여 년 전, 이모가 딸네에 갔을 때 일이다. 딸은 점심약속이 있어 외출을 하고,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이모가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그녀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밥 생각이 났다. 반찬을 꺼내놓고 밥을 푸려고 하자, 밥솥이 당체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전에 밥이 다 되었다는 신호까지 들었다.이모는 비틀어도 보고 당겨도 굴려도 보았지만,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을 만지다시피한 밥솥뚜껑을 열지 못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다. 밥솥 안의 밥을 번연히 보고도 굶어야 했다. 그녀는 딸이 새로 샀다고 자랑한 전기밥솥을 발로 사정없이 차버렸다고 했다.저녁때가 다 되어 허기진 배를 안고 우리 집에 온 이모 앞에서, 나는 ‘살짝만 돌리면 될 텐데 그 쉬운 걸 모른다고?’하면서 웃고 또 웃었다.핸드폰 앞에서 씩씩대는 지금, 갑자기 이모가 보고 싶어지는 밤이다.
2023-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