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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색에 물들다

피귀자 수필가 오래 볼수록 더 반짝이는 것들, 새싹 새순들이 수천의 문을 열고 나와 온 세상을 물들이며 일렁인다. 엷은 연두가 물감 번지듯 땅 위를 점령하기 시작한 봄날 겨우내 거칠었던 손바닥에도 연두물이 얼비친다. 연둣빛 봄풀들과 손 맞춤을 하면 따뜻한 기운이 나긋하게 온몸으로 퍼진다. 여리디 여린 새순들이 점령한 세상, 이보다 더 큰 이벤트가 또 있으랴.연둣빛 물감을 흩뿌린 길이 다소곳이 다리를 뻗고 혈관 같이 뻗은 잔가지에도 서서히 연두 피가 돌기 시작한다. 바닐라향이 그윽한 슈크림 같이 부드러운 색 연두. 더 없이 연연한 색이다. 한때는 보라색에 물든 적도 있었다. 보라색 라일락꽃이 좋았고 파스텔 톤 보라색에 빠져 옷과 장신구도 하나둘 늘어갔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뾰족뾰족 돋아나 천지에 일렁이는 연두에 감전되듯 흠뻑 빠져 들고 말았다. 보고 있으면 귀까지 열리는 하늘의 축복 연두의 향연. 빛을 향해 뻗어가는 연두의 미소가 폭소로 변할 때까지 나이를 잊고 어느 새 봄 처녀가 된다.누구에겐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 연두가 정점을 찍는 나뭇가지로 시선을 옮긴다. 보일 듯 말 듯 여릿한 자락을 비집고 그들의 숨소리를 듣는다.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하면 천지는 놀라운 일들이 뒤따르리라. 사랑스러운 봄 들판의 향기가 살랑살랑 흘러나 다양한 꽃들이 피어나고 오감이 민감하게 살아나는 봄날, 잠시 표류하던 마음도 이내 자연에 흠뻑 젖어든다.색깔에도 소리가 있다면 연두는 분명 나긋한 소녀의 속삭임이리라. 가랑비같이 가슴을 적시는 저 환한 소리들, 연두는 살랑 바람처럼 유순한 색이다. 꽃샘바람 속에서 감미롭게 살랑대다가 비비적거리는 풀잎들의 소리는 애처로워서 쓰다듬고 싶은 여인의 소리다. 귀 세우고 그 내밀한 소리들을 듣고 있노라면 연둣빛 빗장 안에 갇힌 봄이 더 사랑스럽다.봄의 무게는 연두가, 여름은 초록이 가늠한다. 날마다 조금씩 무게를 더하는 연둣빛 봄의 물결 속에서 기쁨이 넘치다가도 조바심이 인다. 노랑 빛을 머금은 연 연두가 체온이 높아져 뜨거워질수록 초록을 얼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덧씌워지는 초록의 물결 속에 연두는 녹아들고 단풍이 찾아오리니. 또 그렇게 한 해가 여물고.한때 천연 염색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애기똥풀에서 우러난 맑고 진한 노란색에 눈이 활짝 떠졌고 밤의 속껍질에선 중후한 멋이, 질경이의 초록색과 귤껍질과 치자, 보라색 양파껍질에서 우러난 노란색과 붉은색 물이 손수건과 흰색 천을 물들일 때마다 경이롭기까지 했다. 어느 날 삶은 대나무 잎에서 우린 물이 흰 명주 스카프에 스며드는데 숨이 멎을 뻔 했다. 연둣빛이 어찌나 부드럽게 곱던지. 그 후로 댓잎에서 우러나오는 맑고 엷은 연두색이 더 좋아졌다.봄의 노크 소리, 속삭임 같은 무 싹과 여린 새싹채소들은 입 속에서도 환하게 피어오른다. 그 맛은 포근한 이불처럼 혀를 감돌고 부드러운 풀과 나무가 연둣빛을 잉태한 봄을 마음껏 누리게 한다. 행복은 소소한 일상 가운데 있다는 걸 연두색으로 다시 깨친다. 혀끝에 닿는 봄풀냄새가 고향에 온 듯 평화를 주기 때문이다. 수시로 변하는 그 모든 빛깔들이 아름답지만, 풀과 나무를 입고 더욱 영롱한 빛깔을 내는 연두는 튀는 색이 아닌, 말랑한 공같이 아기 피부처럼 보드라운 빛이다.무채색이던 얼마 전과 달리 연두 빛으로 물든 오늘, 어제와 오늘을 가만히 되새겨보면, 이 우주에는 온통 이야기로 가득 차있음을 느낀다. 인생에서 마주치는 갈등도 봄 앞에서는 칠흑 같은 동굴이 아니라 연두 빛이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끝이 있고 나가는 출구가 있는. 갈등을 이겨내고 그 출구를 나서면 예전보다 더 큰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만물이 소생하는 근원의 빛은 단연 연두색이리라. 연두가 데워놓은 세상 속으로 연둣빛 명주 스카프를 두르고 소풍을 나선다. 솔바람과 스카프가 맞물려 하늘하늘 날아오른다. 보리 싹과 연잎 사이로 부는 바람이 빛을 더한다. 오감을 활짝 열어 돋고, 피어오르는 연한 살결을 만끽한다. 저절로 미소가 피어오른다. 나긋한 여인 연두의 독주, 우아한 이벤트에 이어 어느새 녹음 속에 서 있다.

2024-05-15

동요와 윤극영 + 박목월

배문경 수필가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첫 창작 동요가 100살이 되었다. 이 노래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의외로 제목을 맞히기 어렵다. 정답은 내용에 없는 ‘반달’이다.올해는 한국 첫 동요로 인정받는 ‘반달’이 탄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24년 경성(지금의 서울)에 아동 문학가이자 작곡가인 윤극영은 관동대지진에서 탈출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고통 받다 숨진 누이의 죽음으로 복받친 설움을 안은 그의 눈에 보인 한 장면은 바로 ‘반달’의 가사가 된다.그가 평생 지은 수많은 동요는 어린이거나 한때 어린이였던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노래였다. ‘까치까치 설날’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고드름’ ‘따오기’ ‘기찻길 옆’ ‘어린이날 노래’ ‘나란히 나란히’ 등 그가 작곡한 주옥같은 동요다. ‘반달 할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는 600여 곡의 동요를 남겼다.동요가 된 목월의 ‘얼룩 송아지’ 노래비가 경주 황성공원에 있다. 1968년에는 우리나라 여러 곳에 노래비가 세워졌는데, 그중 하나가 목월의 ‘얼룩송아지’ 노래비다. 박목월이 짓고 서울대 음대 출신의 손대업이 작곡해서 널리 알려진 동요다. 이 노래는 1960년대 문교부 제정 음악 교과서에 실렸고, 어린이들은 물론 국민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소는 우직하고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동물이다. 농부인 아버지의 곁에서 논과 밭을 갈고 짐을 운반하며 팔려서는 자식들의 학자금이 되었던 든든한 자산으로 우리와 뗄 수 없는 동물이기도 하다.가장 쉽고 많이 부르는 동요 ‘송아지’의 주인공은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우리 토종 한우인 얼룩배기 ‘칡소’를 보고 동시를 썼다고 한다.동시가 동요가 된다. 대한민국 최고의 동요축제 ‘KBS창작동요대회’가 33회를 거치는 동안 400여 편의 새 동요를 발표하였다. 1989년 ‘그림 그리고 싶은 날’을 시작으로 ‘수수꽃다리’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해주세요’ ‘꼭 안아줄래요’ ‘내 손은 바람을 그려요’ 그리고 작년 대상곡 ‘뻥뻥 뻥튀기’까지 이 시대 어린이들의 감성을 표현하는 동요들이 발표되고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올해 제34회 KBS창작동요대회에서는 창원문협 도희주가 쓴 노랫말 동요가 대상을 수상했다.‘멍멍 기분이 좋아/ 헥헥 강아지가 / 내 품으로 달려온다/ 졸랑졸랑 우리는 좋은 친구/ 꿈속에서 우리는 좋은 친구’-‘강아지’부분경주문인협회 주관 2024년 제57회 목월 백일장 초등저학년 장원작품이다. 시제는 초등저학년은 강아지 또는 우산, 고학년은 엄마 손과 봄비 중에 선택한다. 중학생은 달력과 사춘기, 고등학생은 보름달과 돌다리, 대학 일반부는 계단과 회오리였다. 어린아이들의 감정이나 생각을 담아서 표현한 문학 장르의 하나인 동요가 인구감소와 더불어 아쉽고 안타까운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이번 목월 백일장을 통해 가족의 연대를 보았다.원고지를 받아 든 참가자들이 숲의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았다. 글을 쓰기 위해 텐트와 앉은뱅이 탁자를 들고 오기도 하고, 돗자리를 깔고 두런두런 시제에 대해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소풍 나온 것처럼 보이던 그들이 낮 12시까지 본부석에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라 모두 마음이 바빠 보였다.아이가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듯이 동요가 사라지는 날을 생각할 수 없다. 유치원과 초등 저학년부터 아이돌의 노래와 춤을 따라한다, 아이들의 순수한 시기를 어른들의 모습을 그냥 모방함으로써 동요를 잃어버리고 있다. 지금 목월의 시(詩)가 세상 사람들에게 향수(鄕愁)를 느끼게 하고, 그리움은 수채화처럼 번져 과거와 현재가 어울림으로써 세상이 살만한 가치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목월의 목소리 들리는 듯하다.

2024-05-08

이모

윤명희 수필가 점심시간의 국숫집이 분주하다. 나지막한 기와지붕의 식당은 벗어놓은 신발들이 제 짝을 찾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겨우 빈자리를 차지한 우리는 식당아주머니를 대신해 컵과 물병을 가져왔다. ‘이모!’ 걸쭉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다. 머리 희끗한 남자는 자기보다 나이가 적어보이는 아주머니를 이모라 부른다. 친구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녀는 젓가락으로 뜨거운 국수 가락을 휘휘 저으며 한마디 했다.“왜 이모를 식당에서 찾는대?”나는 혹시나 누가 들었을까봐 곁눈질로 돌아보았다. 다행히 입으로 들어가는 국수의 뜨거운 열기로 친구의 목소리는 멀리가지 않았다. 여전히 이모를 찾는 다른 사람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식당종업원을 이모라는 호칭으로 불러 기분 나쁘다는 친구에게 나는 얼마 전에 아들이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모처럼 집에 온 아들이 대학동기 모임에 다녀왔다고 했다. 일찍 결혼한 친구가 아기를 안고 왔다. 여자 친구들이 목련꽃 봉우리 같은 아기의 볼을 부비며 서로 안으려 했다. 겨우 옹알이 하는 아기에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모’라 불러보라고 야단이었다. 옆에 있었던 아들이 ‘고모’라 불러야 한다고 거들었다. 우리는 아기아빠의 친구니까 고모가 맞지 않으냐는 말에 그래도 이모가 좋다고 했다.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불멍을 하던 친구들이 낮에 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모는 편한데 고모는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자기도 그런 느낌이라면서 ‘왜 그렇지?’ 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친한 건 고모인데 편한 건 이모라는 말에 모두 동의를 했다. 이해가 안 된다고 하자, 평소 별로 말이 없던 한 친구가 캔 맥주를 하나씩 던져주며 말했다.“왜긴 왜야, 내 엄마가 고모보다 이모가 편하니까 그렇지.”잠시, 자기 집안을 돌아보는지 조용했다. 자식들은 엄마의 지나온 길을 기억한다. 자기한테 잘 해 줘도 내 엄마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에 아무도 반기를 내지 않더란다. 맥주를 단숨에 마신 그는 아빠와 엄마 사이가 좋지 않을 때도 아빠가 싫지 않더냐고 되물었다. 여기저기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아이들이 엄마가 편해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살아온 세월의 깊은 내면에 쌓인 감정이다.나의 지난 시간, 할아버지 할머니 제삿날이면 고모가 왔다. 제사음식 준비만으로도 바쁜 엄마는 평소에는 보기 힘든 생선구이를 밥상에 올렸고, 새로운 나물반찬 하나라도 더 준비했다. 행여 우리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도 할까봐 주의를 준 터에 우리는 고모가 반가우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우리 형제들의 손에 용돈을 쥐어주었던 고모는 엄마가 모셔야 하는 형님이었다.이모가 오는 날도 먹을 게 많았다. 엄마는 당신이 동생이라는 위치를 한껏 이용하는 것 같았다. 이모가 오는 날은 김칫거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다듬지 않은 푸성귀가 있었다. 우리는 제비새끼마냥 엄마 곁에 앉아, 이모 손에서 김치쪼가리를 받아먹곤 했다. 남은 양념에 밥을 비벼 입을 호호 불어가며 퍼 먹었던 기억은 푸근함이었다. 엄마는 자식들이 나이만 먹었지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둥 흉을 보고, 이모는 자기 집 딸년들도 마찬가지라며 받아주었다.엄마가 아픈 날이었다. 이모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비닐봉지 속의 장어가 작은 체구의 이모를 휘청거리게 했다. 가스 불에 들통을 얹고, 참기름을 두른 이모는 장어를 집어넣었다. 이모와 내가 누르고 있던 뚜껑을 젖히고 튀어나온 장어가 온 주방을 휘저었던 그날, 우리는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국숫집을 나오며 나는 친구에게 저 남자들도 고모보다 이모가 편한가보다라고 했다. 그러자 친구는 요즘은 이모, 고모 없는 애들이 많은데, 이모가 식당아줌마인 줄 알게 될까봐 겁난다고 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돌아가신 이모가 보고 싶은 날이다.

2024-05-01

바람, 불다

정미영 수필가 어제부터 강한 꽃샘바람이 분다. 겉옷이 날릴까봐 양팔로 감싸고 걷는데도 옷깃을 들추며 스며드는 바람 때문에 수시로 옷섶을 여미고 있다.나무는 나와는 달리 온몸으로 바람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 오히려 바람의 손길에 운명을 맡긴 듯하다. 그런 연유로 벚꽃 잎이 하르르 하르르 떨어지더니 길섶마다 소복하게 쌓인다.꽃잎을 밟으며 걷는데, 문득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이 생각난다. 얼마 전에 중고등학생들과 이 시로 수업할 때였다. 나는 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수업을 할 때에 ‘역할 바꾸기’를 자주 요구한다. 소설에서는 등장인물, 시에서는 화자와 청자의 입장이 되어 보라는 것이다.예전에는 관점을 달리해 보고 작품 속 인물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웬만하면 중심인물이나 주변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옹호하고 변호를 이끌어 내는 경우가 많았다.그런데 요즘은 청소년들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진달래꽃’ 시에서의 역할을 바꿔 생각해 보라고 했더니, 도저히 공감할 수 없다는 학생들이 늘었다. 이별하는 자체도 나와 상대방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기분이 상하는데, 떠나는 임에게 꽃을 뿌리며 축복하고, 더군다나 사랑의 승화까지 기원하는 여인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감정 소모를 많이 시키고 자기들 마음에 상처를 주며 헤어졌는데, 어떻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느냐며 나에게 반문했다.민족적 한과 정서를 표현한 시인이라고 설명하면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별을 대하는 의식과 가치관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리라.“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나는 소리 내어 시를 읊어본다. 다시 한 번 가로수에서 떨어지는 꽃잎을 밟으며 한참을 걸으니, 괜스레 시 속의 애절한 화자가 되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소소리바람 탓이려나! 학생들에게 이런 내 마음을 이야기하면 가식적이라며 야유를 퍼붓겠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오늘의 모임 장소에 다다른다.포항시립미술관 앞에서 일행을 기다린다. 차량이 밀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연락이 왔다. 환호공원을 산책하면서 기다려야지. 길을 따라 걷다가 가게에서 파는 풍선을 보았다. 풍선을 보면 꿈과 자유, 희망과 순수라는 낱말이 떠오르며 정겹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풍선의 모습은 놀이동산이나 유원지에서 솜사탕과 함께 한다. 노랑, 빨강, 파랑 등 색색의 풍선이 매달려 있는 실을 놓치지 않으려고 손으로 꽉 잡고 다니면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어린 마음에도 풍선처럼 하늘을 자유로이 날고 싶었나 보다.미술관으로 되돌아오는 길은 호젓한 곳으로 고른다. 새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고, 봄 햇살 머금은 나무들이 초록 잎을 반짝거린다. 기분 좋은 설렘을 안고 걷는데, 나뭇가지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는 풍선이 보인다. 어쩌나! 주변에 장대라도 있으면 구해주려는 시도라도 해보련만. 봄꽃이 사계절 동안 화사하게 피어 있는 것이 아니듯이, 풍선도 늘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나는 것이 아니다.풍선은 바람의 흐름을 잘 읽어야 한다. 바람의 힘에 영향을 받아 방향을 바꾸거나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나뭇가지에 걸린 풍선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싶어 애처롭다.우리네 삶도 이와 같은 이치이리라. 내 가슴에 꿈을 담고 바람을 잘 이용해 더 높이, 더 멀리 날고 싶지만, 생활 속에 이따금 찾아오는 거센 태풍으로 인해 좌절하고 포기하고 두려워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변곡점 위에 섰을 때 바람이 불어온다면 다부지게 옷깃을 여미든가, 나무처럼 온몸으로 순응하든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내 몸 안의 세포와 감각을 온전히 열어 세밀하게 세태의 기류를 잘 읽고, 주변의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허방을 딛지 않을 것이다.내 인생에 무시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을 슬기롭게 이용해야겠다.

2024-04-24

명태 껍질

피귀자 수필가 ‘여인과 노인’이라는 거장 루벤스의 그림 앞에 섰다.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노인이 젊은 여인의 가슴을 빨고 있는 부자유스러운 애정 행각에, 먼저 불쾌한 감정을 노출하기 일쑤라고 한다. 딸 같은 여자와 놀아나는 반나체의 노인을 통렬히 꾸짖던 사람들에겐 노인과 이성을 잃은 젊은 여인이 가장 부도덕한 인간의 유형으로 비춰졌을 테니 말이다. 삼류 포르노 같은 그림은 알고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보게 된다.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데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가끔 일어나고 그 끝은 대개 아름답지 못했던 까닭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커다란 가슴을 내놓고 있는 그림 속의 여인은 노인의 딸이다. 이 노인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였고 로마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둔 후 ‘음식투입금지’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 노인은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가고 있었고, 그의 딸은 해산한지 며칠 되지 않은 무거운 몸으로 감옥에 찾아갔던 것이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엔 핏발이 섰으리라.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금 밖으로 사라지려는 아버지. 여인은 가슴을 풀고 불은 젖을 아버지께 물렸다는 것이다. 무엇이 부끄러웠겠는가.마지막 가시는 아버지에게 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의 장면이었던 것이다. 부녀간의 사랑과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으로,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아끼는 그림이라고 한다.부도덕한 작품이라고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도 설명을 듣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한다. 사람들은 종종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본질을 알면 시각이 달라진다. 옛날 어른들은 종종 본질을 호도할 때 ‘눈에 명태껍질이 씌었나.’라고 나무라기도 하였다.지인 중에 직접 재배한 농산물이나 꿀 등을 파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알맞은 값을 받을 판로가 부족하다보니 부탁을 받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해주려면 일일이 설명을 해야 하고 가끔 물건을 전달해줘야 하는 수고로움도 있었다. 하지만 사는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물건을 시중보다 싸게 살 수 있고, 파는 사람들은 가계에 도움이 되니 서로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자주 연결을 해주었다. 할 수 있는 한 적극 이어주던 어느 날 깜짝 놀랐다.그렇게 하면서 중간에서 물건을 얻는 등 이득을 취하리라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의 겹이 두꺼울수록 그림자의 깊이는 깊어지는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 오해를 받고 보니 사람 마음은 모두 같지 않음이 더 서글펐다. 수십 년 사귄 친구는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으리라 여겼는데 어떤 이유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되돌아 보였다. 사람들은 소개를 위해 입을 떼는 자체를 귀찮아하거나 자신에게 이로움이 생기지 않는 일에는 몸을 사리는 경우가 많음도 알게 되었다.생각과 믿음에도 숨이 있다. 어떤 생각에는 숨통이 트이고, 어떤 생각에는 숨이 막힌다. 내가 한 행동처럼 좋은 일 한답시고 나서는 이는 오지랖이 넓어서가 아닐까. 한번은 소개를 해주었을 뿐인데 우리 집에 보낸 걸로 착각하는 해프닝으로 곤욕을 치른 경우도 있었다. 말의 독한 상처에 베인 이후로 나서지 않으려고 조심하지만 또 딱한 사정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다.옛날엔 그냥 버렸던 마른 명태껍질이 요즘 각광을 받고 있다. 콜라겐이 많다고 알려지자 기호식품이 되었다. 튀기거나 볶은 반찬은 맛도 괜찮은 편이다. ‘눈에 명태껍질을 발랐나’라고 질책하던 말의 뜻은 아무리 얇을지라도 눈에 막을 치면 사람의 품성이나 물건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술작품이나 사물의 이치, 사람사이의 모든 관계에도 해당되리라. 눈에 불필요한 명태껍질을 떼고 교만과 아집과 편견을 버리면 세상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내뿜는 세상의 향기들이 발을 헛디뎌 사라지지 않도록.

2024-04-17

벚꽃이 피던 날

배문경 수필가 ‘죽산 가는 길목, 머리 없는 석불 둘이 서서 비에 젖는다. 사그막골 두 노인네 점심 끼니로 찐 감자 두어 개 천일염에 찍어 먹고 종일 오시는 비나 내다본다.’ - 장석주 시인의 ‘석불(石佛)’중창문을 열었다. 열린 창으로 빛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환한 빛 속에서 기다리는 무수한 눈동자들 사이로 “밥 두가, 밥 두가” 노인의 목소리가 아침의 고요를 깬다. 그 소리를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수런수런 들리는 소리로 인해 밤의 시간은 툭툭 털고 일어선다. 세 끼 식사는 어찌 그리 빨리 다가오는지. 세 끼 식사는 얼마나 마음을 짠하게 하는지. 산다는 것은 입으로 밥풀을 넘기는 일이다.아침과 점심시간 사이에는 종교적 위안을 주는 소리와 영상과 목회자가 있다. 따라 하는 음절 속에는 평화와 안식이 존재할 수 있다. 서성이던 사람들도 조금은 고요해지는 시간, 몰입되는 시간이 고맙다. 내일을 알 수 없다. 떠난 사람이 기억나지 않는 시간과 이후 새로울 것이 없는 내일이라는 미래. 창밖은 비가 오거나 흐리거나 눈부시거나.이곳도 계급이 있다면 있다. 점심과 저녁 식사 사이에 간식이 주어지고 다섯 끼의 음식 사이, 식사할 때 조미 김 하나를 더 먹을 자유가 있고 자식이 사 준 과자나 과일을 혼자 먹거나 나누어 먹으며 으쓱할 자유도 있다. 대부분 자식들의 챙김이 어르신의 자존심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유형의 보호자들이 부모를 찾는다. 음식과 필요로 하는 것을 서너 박스로 챙기는가 하면 잘 지내냐고 인사만 하러 오는 경우도 있다. 챙겨드리고 남은 음식을 자세히 적어두었다가 챙겨드리는 것은 직원들의 책임이다. 그래도 이미 자식들이 넣어준 과자며 과일은 다 먹은 뒤인데 치매로 떠오른 음식의 이미지로 사람을 몰아세운다. 남은 것은 없는데 누가 사다 준 그것을 달라는 어른이 인정할 때까지 시간이 소요된다.저녁 식사 후 양치가 끝난 어르신들의 잠자리는 일상의 마침표이지만 덜 끝낸, 그래서 또 하나의 시간이 시작되는 밤이다. 소리란 고요할 때 더 크게 들리니까. 낮과 밤이 구분이 되지 않는 몸과 정신으로 서성이는 어른들, 쉴 새 없이 오라고 알리는 벨 소리, 어둠과 함께 여러 형태로 만들어지는 밤의 전경들로 한밤의 고요는 없다. 때론 토닥토닥 어릴 적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자장가로 재워드리며 당직자의 밤이 하얗게 물든다. 대, 소변과 밤새 주무시지 않고 소리를 지르거나 시끄럽다고 룸메이트를 겨냥한 욕설과 집에 가겠다고 배회한 사람들에 대한 이모저모가 타닥타닥 자판 속에서 잠자다 일어나 하품을 한다.노년의 무게가 큰 바위 같다. 언제 건너온 강 건너의 시간일까. 찬란한 시간이 모이고 모였던가. 그래서 人生(인생)이란 집 한 채를 지우고 자식을 그리워하다 지치고 지쳐야 이곳에 정착한다.이곳에서 자식은 만나고 싶을 때마다 만날 수는 없다. 서로가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있기에. 오직 자식을 건사하고 먹이고 보살폈던 몸은 겨울나무처럼 메말라 거칠고 작아졌다. 몸피가 작아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다. 삶의 무늬는 어떤 것일까. 날실과 씨실의 시간이 교차하며 만든 곱고 아름다운 시간의 흔적은 숙연해지는 빛깔을 만드는 조각과 조각 사이.초록의 싹이 돋아나더니 벚꽃이 영글기 시작했다. 바람이 쏴아 파도치듯 지나가면 겨울 비킨 자리로 꽃의 계절이 눈부시게 카펫처럼 펼쳐진다. 벚꽃이 눈부시게 펼쳐진 길로 나아간다. 걷거나 휠체어를 타거나 부축 받거나 어르신들이 다시 소녀로 소년으로 변신하는 시간으로 들어간다. 봄바람이 파도처럼 넘실거리자 얼굴 위로 주름진 얼굴은 사라지고 리즈의 시절로 돌아간 모습이 되고 웃음소리 낭자하다. 그래, 다시 피어나는 거야.벚꽃의 꽃말이 잠시 머무는 아름다움이라고 했던가. 꽃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데 눈부신 어르신들의 웃음이 환하게 번져나간다. 오늘 지금이 행복이고 즐거움인 것을.

2024-04-10

나무의 시간

정미영 수필가 봄바람이 고즈넉한 숲을 흔들어 깨운다. 돋을볕의 줄기들이 나무 사이로 퍼져나가면 밤사이 내려앉았던 어둠이 서둘러 제 갈 길을 떠난다. 나뭇가지들은 따뜻한 바람의 손길이 닿자마자 앙증맞은 꽃망울을 터뜨리느라 분주하다.나무들은 오래 전 각인된 유전자의 기억으로 봄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환경에 적응하면서 대대손손 수천 년을 지탱해 온 나무의 저력이 새삼 경이롭다. 무리지어 사는 것처럼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도 저마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면서 각자의 속도로 오랜 세월의 흐름을 건너왔겠지.나는 봄맞이를 하려고 나무 앞에 선다. 겨우내 움츠렸던 가슴을 펴고 환한 얼굴로 나무를 마주하고 있다. 나무는 해마다 세찬 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매서운 추위에도 씩씩하게 견뎌낸다. 나는 그러한 나무들을 보면서 지난겨울에도 봄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 믿었다. 봄바람이 불어와 얼었던 계곡물을 녹이고 나목의 수피를 봄기운으로 물들일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다.나는 나무를 쓰다듬으며 자연의 섭리에 대해 생각해 본다. 꽃 피는 봄의 따스함,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의 열정과 낙엽이 휘날리는 가을의 쓸쓸함, 무채색 겨울 숲속에서의 고요를 떠올린다. 잊지 않고 반복되는 시간의 순환은 나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어느 한 계절 동안 내 삶에 모진 풍파가 찾아와 내가 침잠하고 바닥을 헤매다가도, 언젠가 다가올 앞날에는 희망이 두 팔 벌리고 안아주겠지, 나를 기대하게 만들고 꿈을 꾸게 만드는 힘이 있다.소설을 쓰는 K작가가 이탈리아를 다녀오면서 지인들에게 선물을 했다. ‘판타레이(panta rhei)’가 적힌 냉장고 마그넷이었다. 냉장고에 붙여 놓고 오며가며 글자를 들여다보다가 요 며칠 생각했다. 나무처럼 판타레이(panta rhei)를 잘 증명하는 존재가 있을까.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말했다. 매일 찾아오는 24시간의 하루도 어제의 하루와 오늘의 하루, 내일의 하루가 다르듯이, 나무가 일생을 견뎌내는 시간을 지켜보면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을 나는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나무의 시간은 계절에 따라 변곡점의 연속이다. 뿌리가 땅 속 깊이 뻗어 있고, 나뭇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어 생명력을 과시하는 동안에는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내적 성장을 도모한다. 나무를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 스쳐 지나가면 알 수 없다. 나무의 하루가 겉으로는 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순간 생장점을 성장시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햇빛을 받아 꽃을 피우며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나의 내적 성장도 때로는 나무를 닮아 천천히 이루어져야 되리라.북 트레일러 강좌에 등록했다. 몇 번의 수업을 들은 뒤, 복습하려고 휴대폰 앱에 들어갔다. 제작을 위해 알아야 되는 개념과 요소를 기억해 내며 고군분투했다. 19초 영상을 만드는데 5시간이 걸렸다. 디테일을 표현하기 위해 1초 단위로 크롭, 키프레임, 페이드 등의 다양한 기법을 작동시켜야 했고 어떤 배경과 사진이 어울릴지, 글씨체와 음악은 무엇이 좋을지를 선택하는데 고민했다. 서툴고 어려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어느 순간 배움의 즐거움과 스트레스의 무게가 비례해지며, 수시로 양가감정에 시달렸다.북 트레일러 제작법을 능숙하게 배우고 싶었다. 강사님께서 나의 책 ‘사계’로 영상을 제작해 오셔서, 그것을 표본으로 매시간 수강생들과 수업하고 있기 때문에 혼자서 잘해 내고 싶은 마음이 늘었다. 또한 다른 작가의 책도 멋진 영상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기에 욕심이 생겼다. 배움의 속도가 느린 나를 배려와 인내심으로 지켜봐 주시는 강사님과 다른 수강생들께 미안함이 커질수록 마음이 앞섰다.나무의 시간을 닮고 싶은, 햇살 고운 봄날 오후다. 나무의 시간에 가치를 부여하며 나의 시간을 투영해 본다. 나의 성장이 느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배운다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변화하고 발전할 것이다.

2024-04-03

무관심과 호기심 사이

피귀자수필가 나긋하게 얹힌 봄이 꽃샘추위 속에서 시간의 길을 잃어버린 날, 무엇에 이끌렸을까. 지하철에 들어선 풍뎅이 한 마리가 수십 개의 눈 안에 갇히고 말았다. 이리저리 부딪다가 뒤집어져 팽그르르, 축을 잃은 팽이의 동작에 놀란 몇몇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그 모양이 마치 찬바람 속에서 버둥거리는 새싹을 닮았다.진화를 꿈꾸던 곳은 어디였을까 여긴 분명 아닐 텐데. 낯선 환경을 뒤늦게 감지한 걸까. 날갯짓의 속도에 점점 불안함의 무게가 더해진다. 먼 섬을 찾아 들썩여도 좋았을 저 튼튼한 견골. 잘못 접어든 골목길에서 한참을 헤매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던 난감함이 저럴까. 미로를 빠져 나가려고 허우적거리다보면 당황하기 일쑤 아니던가. 조급한 마음에 애를 쓰면 쓸수록 침착함과는 멀어지고 눈앞이 캄캄해지지 않던가.호기심 가득한 구둣발과 운동화 사이로 앞발 뒷발 바싹 들고 하늘을 이고 살던 등으로 돌리는 풍뎅이의 연자방아. 낯선 말의 길에서 한동안 잃었던 나를 여기서 다시 보듯 풍뎅이의 비보이 공연이 아찔했다. 그때 새로 들어찬 사람들에 가려 대각선 입구 쪽에 있던 풍뎅이는 보이지 않게 되었고 안개처럼 일어났던 관심도 차츰 바람처럼 사라져갔다.또각또각 뾰족 하이힐이 걸어와 맞은편 빈자리에 앉자 의자까지 환하다. 매끈한 종아리 위의 짧은치마 끝을 향해 저절로 고개가 들려지고 아뿔싸 훔쳐보던 눈동자들, 들키고 말았다. 여자의 눈도 저절로 드러난 다리를 더듬는데 남자들이야 오죽할까. 옆자리 검은 운동화의 하얀 끈과 날씬한 종아리도 눈부시다. 파릇한 청춘의 다리는 곧다. 맞은 편 사람의 눈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핸드폰의 자판을 두드리느라 여념이 없다.창 모자 밑으로 보이는 세상은 색다르다. 모자를 쓰고 지하철에 앉아 고갤 살짝 숙이면 사람들의 무릎아래만 보인다. 마주보는 것이 어색했는데 창 모자 하나가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까만 납작 망사구두가 부푼 발을 감싸느라 터질 듯 하고 연세 많은 할머니의 통통한 다리는 아직 세상을 딛고 설 기운이 넘침을 말해 준다. 끌어올린 두꺼운 양말 속 종아리가 나이를 과시하고 있지만. 발만 바라봐도 나이가 보이고 비슷하거나 아예 같은 신발의 남녀는 다정한 커플임을 과시한다. 아마 고개를 조금 더 들면 겉옷이나 윗도리 등도 커플룩이 보일지도 모른다.어느 역에서인가 맞은편 의자의 손님들이 교체되었다. 여섯 자리 모두. 평소엔 다섯 개인지 여섯 개인지 중요치 않던 자리 수를 세다보니 지하철은 종점을 향해 달린다.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다는 시외로. 팔이 불편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운동화 한 쪽 앞이 비어있는 듯 앞쪽이 쭈글쭈글 하다. 발 뿐 아니라 한쪽 손까지 불편한지 손바닥이 위쪽을 향해 의자에 힘없이 놓여 있고, 또 다른 발이 되었을 지팡이 끝 고무판도 비뚤게 닳아 있었다.레이스가 있는 하얀 바짓단 아래 분홍 색깔의 구두는 더 선명하다. 그 옆자리 까무잡잡한 슬리퍼의 아주머니와 대조적이다. 두 사람의 나이는 비슷할 것도 같으나 신발로만 본 나이는 차이가 확연하다. 다리 사이에 삼진 어묵 종이봉투를 끼우고 앉은 아주머니는 구겨진 봉투처럼 안절부절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다시 문이 열리자마자 검은색 바탕에 연두색 끈이 달린 볼 넓은 운동화에 온통 흙이 묻은 아저씨가 올라왔다.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텃밭이라도 가꾸느라 묻힌 흙일까?아뿔싸! 굼뜨게 지하철을 내리려던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와 그 흙발아저씨가 부딪히고 말았다. 기우뚱하던 할아버지는 기어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손과 발이 불편해 보이더니 풍뎅이를 밟고 미끄러지면서 주저앉듯 벌러덩 드러눕고 말았다. 그때까지 파르르 떨다가 점점 움직임이 느려지던 풍뎅이처럼.목소리가 없어 말을 못하는 풍뎅이. 온몸으로 안간힘을 쓰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던 당신의 슬픈 등은, 마스크와 모자로 변장하고 자신의 일 외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암시를 보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상대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상대에 대한 최고의 배려라는, 이청득심(以廳得心)을 실천하지 못하고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2024-03-27

말 많을 절

말을 많이 한 날은 왠지 속이 텅 빈 것 같다. 내 속의 무언가를 다 끄집어내 보여준 것 같아 기분마저 가라앉는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나눌 때도 있다. 그런 날은 가슴이 꽉 차게 느껴지지만, 나 혼자 떠든 것 같은 날은 왠지 마음 한 쪽 구석에 찬바람이 휭 하니 지나간다. 주책없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왜 했을까?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어 괜히 머리만 쥐어박는다. 나는 말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한다.한자를 찾아 옥편을 뒤적이다 획순이 가장 많은 글자는 무슨 자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획순 따라 가장 뒷면을 펼치니 총획수가 64획이나 되는 ‘말 많을 절’이 있었다.용(龍)자가 네 개나 붙어 있는 글자다. 한 마리만 해도 획수가 많은데 위 아래로 포개듯이 네 마리나 있으니 그 수가 좀 많겠는가. 그런데 왜 용이 많으면 말이 많을까? 낙관(落款) 같은 글자의 모양에 관심이 일었다.용은 우두머리를 뜻하지 않을까? 우두머리 넷을 한 글자에 담았다는 자체에 생각이 머물렀다. 용이 넷이나 되니 서로 자기가 최고라고 자칭하게 될 것이고, 그러자면 자연 말이 많아 시끄러울 것이라는 쪽으로 마음이 갔다. 같은 용이지만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 차이가 나지 않을까? 위에 있는 것과 아래에 있는 용이 다를 것이고, 좌청룡 우백호를 따지는 입장에서 보자면 같은 위에 있더라도 직책은 다를 것이다. ‘말 많을 절’자 안에는 같은 용이지만 네 가지의 계급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생각이 꼬리를 물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글자 안의 용들이 꿈틀거린다. 누가 더 힘이 셀까? 네 마리의 용의 모양은 같지만, 품성은 다 다르게 보인다. 네 자리 중 서로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물고 뜯는다. 서로를 비방하고 모함하며 모두 제가 가장 잘났다고 내세우기에 바쁘다. 남의 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기에 나와 상대를 비교분석 해야 한다는 것은 애초에 없다. 단지 내가 아니면 안 될 이유만 말 할 뿐이다.그 글자 안에는 말만 많은 것이 아니라 욕심도 많다. 세상과 단체를 위한다는 대의명분 속에 감춰진 마음을 조금도 버릴 수가 없어 한 치의 양보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진정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누가 더 갖추고 있는지 차근차근 따져, 나보다 더 나은 한 마리의 용에게 선뜻 여의주를 넘겨주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남은 세 마리의 용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 추천된 용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준다면 아마 그 글자는 처음부터 ‘말 많은 절’자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윤명희 수필가 용(龍)은 하나일 때 빛이 난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용이 될 수 없다. 그저 ‘말 많을 절’자에 불과하다. 말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은 모습만 용일 뿐 이무기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자신을 용이라 하겠지만, 멀리서 보는 내 눈에는 그들이 말 많은 한 무리로 보일 뿐이다. 여의주를 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용들로 인해 그 글자는 지금도 복잡하다.좁은 내 생활의 테두리 안에도 작지만 용의 자리는 있다. 예전, 어느 단체에서 잠시 네 마리의 용 틈에 있었던 적이 있다. 지나고 보니 그 자리였지, 정작 그때는 몰랐다. 그런데 한 사람이 계속 다른 사람들의 험담을 내게 해서 마음이 복잡했다. 그가 다른 이에게 내 말을 하는 것을 안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른 체 이상해져 가는 단체 분위기에 갈팡질팡했다. 말 속에 있는 내가 싫어 그 단체를 나왔다. 시간이 흘러, 한 발짝 뒤에서 보니 그녀가 단체장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것을 알았다.뉴스에서 보는 정치가들의 모습이 내가 속한 단체에서 보였다. 서로 화합하면 재미있을 일이 누가 회장이냐에 따라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네모난 낙관(落款)처럼 생긴 ‘말 많을 절’자를 가슴에 찍는다. 다만, 내가 그 속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용 뒤에서 비록 내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2024-03-20

목리

배문경 수필가 장롱 한 짝을 들였다. 친정집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리만 차지하던 장롱이다. 앞은 느티나무에 옆과 뒤는 오동나무로 된 전통 방식의 맞춤이다. 비록 유행이 지나고 낡았지만 합판에 무늬 필름을 덧씌운 가구보다 나을 것 같았다.장롱은 부모님과 오래도록 한 방에서 숨을 쉬었다. 연륜이 있는 물건은 내력을 품어서 그런지 곳곳에 부모님의 숨소리가 배어있는 듯하다. 두런두런 나누는 말이며 갸릉갸릉 가래소리와 쿨럭쿨럭 기침소리 그리고 얼굴에 새겨진 주름까지 느껴진다. 물걸레로 닦고 광택제로 문지르자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삶의 무늬가 깨어난다.물결일까, 바람의 무늬일까, 아니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세상의 등고선일까. 이쪽에서는 산모롱이를 지나는 물처럼 유려하게 휘돌고 저쪽에서는 들판을 달리는 바람처럼 곧장 내달린다. 옹이에 부딪치면 소용돌이치다가 서로 엉킴도 없이 다시 흘러간다. 곡선과 직선의 흐름은 말 없는 나무가 온몸으로 그려낸 무늬다.땅속에 묻힌 씨앗 하나, 땅을 움켜쥐고 가만히 고개를 내민다. 축복이라도 하듯 따뜻한 햇살이 뺨을 어루만진다. 직립의 의지를 곧추세운 나무는 우듬지를 하늘로 밀어 올린다. 그토록 사납던 바람이 언제 부드러워졌는지 교태를 부리며 겨드랑이를 간질인다. 꽃이 만개하면 봄날은 절정이다. 벌 나비와의 밀애는 달콤하다. 그러나 봄날 뒤에는 또 다른 시련이 예고되어 있다.나무는 선택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다. 직립을 무너뜨릴 듯 바람이 멱살을 잡고 흔들어도 온 힘을 다해 버틴다. 뿌리째 뽑히거나 부러지면 끝이다. 땅을 꽉 움켜잡는다. 우지끈, 견디지 못한 팔이 파열음을 내며 부러진다. 발성기관이라도 있으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다. 하소연조차 하지 못하는 나무는 속으로 제 울음을 가둔다.나무는 소리조차 몸으로 듣는다. 소리에도 나름의 무늬가 있다. 졸졸졸, 쏴아, 휘이잉, 매암매암, 나무는 소리에서 무늬를 읽고 차곡차곡 몸으로 기억해둔다. 우르릉 쾅,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지만 몸을 움츠리지는 않는다. 나무는 두려움도 둥글게 안으로 감아 무늬로 승화한다.몸이 가벼워지면 나무는 스스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고요한 참선에 들어 봄 여름 가을을 다시 돌아본다. 해충이 몸을 갉아댈 때의 아픔, 팔이 부러진 후의 환상통, 온몸을 받아들여야 했던 희로애락, 나무는 한 생애를 통해 겪은 일들을 레코드판에 깊게 새긴다.나무는 제 결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베도록 온전하게 몸을 내놓는다. 결 따라 쓰다듬으면 부드럽게 눕고, 거스르면 가시를 세운다. 자르는 대로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굴리면 둥글게 굴러가지만 대팻날이 지나갈 때는 날을 덥석 물기도 한다.산다는 것은 그 흔적을 새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울고 웃고 즐기고 참는 과정에서 들추면 아픈 옹이 몇 개쯤 가슴속에 뭉쳐두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알고 보면 사람의 결도 나무를 닮았다. 버림받고 거절당할 때, 오해로 억울할 때, 외로움과 열등감을 혼자 추스를 때,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여한과 부러움을 삭일 때, 때로는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도 치지만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계절이 순환하면서 사람도 그러한 시련들이 무늬로 새겨진다.삶은 나름의 결을 짜는 일이다. 그것은 누에가 실을 뽑고 직조하는 일만큼 과정이 지난하다.타고난 성질마다 다르고, 겪은 파란에 따라 아랍카펫처럼 다양한 문양이 될 수도 있다. 살아온 날을 돌이킬 수 없듯 한 번 그어지면 바꿀 수 없는 나이테, 기왕이면 추녀에 걸린 풍경소리처럼 은은히 번지고 싶은 것은 나만의 바람일까.나무는 동강나야 제 속의 무늬를 드러낸다. 나무의 종을 보려면 자르고, 횡을 보려면 켜야 한다. 종은 하늘을 향한 마음이요, 횡은 삶을 아우르는 역사다. 세상을 종횡으로 누비는 나도 차마 말할 수 없는 서정과 서사를 아울러 내면에 무늬로 켜켜이 새기고 있으리라.장롱을 곁에 두고 나는 오래도록 목리(木理)를 읽을 것이다.

2024-03-13

내 안의 이상한 앨리스

정미영 수필가 연일 내린 비가 잦아들자마자 오어지 둘레길을 걷는다.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는 둘레길을 이제껏 한 번도 무결하게 걸어본 적이 없다.고즈넉한 오어사 경내를 둘러보고 원효교를 지날 때까지는 호기롭게 걷지만, 둘레길의 반 정도에서 발걸음을 되돌려 나오기 일쑤였다.오늘은 겨울 끝자락의 비바람에 대비해 모자를 쓰고 장갑을 챙기면서 기필코 끝까지 걷겠다고 다짐한다.얼마 전, 포스코갤러리에 다녀왔다. 특별기획전 ‘숲에서 발견한 위로 : 이너피스’전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전시실을 산책하듯 여유롭게 거닐었다. 첫 번째 여정인 사유의 숲을 지나 두 번째 여정인 치유의 숲에 도달했다. 실제 연주자 없이 빛과 소리가 어우러져, 피아노에서는 드뷔시의 ‘달빛’이 연주되고 첼로에서는 생상의 ‘백조’가 흘러나와 공간을 채웠다. 건물 안에 따뜻한 공기의 질감이 느껴지는 듯하더니, 공기 입자가 관람객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는 것 같았다.내 마음에 젖어든 ‘숲’의 기운을 음미하며, 마지막 여정인 동화의 숲에 다다랐다. ‘나만의 앨리스’를 찾아보라는 문구를 시작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설치미술이 조성되어 있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의 모험을 통해 자기 발견을 하는 여정이 펼쳐진다. 다양한 인물과 일을 경험하면서 자아를 찾고 자신의 용기와 삶의 지혜를 키워나간다.문득 한 달 전에 남미 등반을 다녀온 옛 제자가 떠올랐다. 그는 대학 산악부 소속으로 남미 아콩카구아를 등반하기 위해 5명으로 YB원정팀을 꾸려 가족과 산악대원들의 응원을 가슴에 간직한 채 한국을 떠났다가 무사히 귀국했다. 나는 A4용지로 30쪽이나 되는 등반보고서를 운 좋게 읽어볼 기회가 생겼다.첫날의 여정을 살펴보니 인천공항을 떠나 아디스아바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멘도사에 도착하기까지는 약 50시간의 비행 후에 땅을 밟을 수 있다고 했다. 시작부터 그들의 비행시간에 입이 떡 벌어졌다.등반보고서를 다 읽었을 때쯤에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혼쭐이 났다. 베이스캠프에서의 고된 생활과 고소증을 피하거나 극복하기 위한 노력, 컨디션 난조로 몸과 마음이 지친 모습, 날씨를 살피며 등정 일정을 계획하느라 무작정 기다리던 일, 아콩카구아 정상을 밟은 자와 고소 증세로 정상을 밟지 못한 자들의 심리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광경을 상상해본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등반보고서 말미에 적힌 글이 인상 깊었다. “산악부에 참여한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저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선배님들의 뒤만 쫓아가기 바빴던 파키스탄 PK39 BC트레킹부터 대장을 맡은 북알프스 종주, YB 아콩카구아 원정대의 일원으로 등반까지. 그 외에 산악부에서 보낸 크고 작은 순간이 쌓여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산악부가 제 삶의 전반을 바꾸었습니다. 산악부에 몸담으며 세상을 이겨 낼 훌륭한 무기를 많이 얻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니 성실하게 노력하겠습니다.”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의 모험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켰다. 이상한 동물들과 마주했던 경험을 통해 자신을 향한 믿음과 용기를 되찾고 삶의 지혜를 터득했다. 그도 산악부의 일원으로 등반에 참여하면서 예상치 못한 시련에 부딪혔을 때 슬기롭게 극복하며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을 단단하게 성장시켰을 것이다.내 삶의 궤적을 돌이켜본다. 나는 인생의 숱한 고비마다 어떻게 건너왔었나? 삶에서 생겨나는 문제의 답은 대부분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의 혼돈과 두려움이 싫어 회피하려던 순간이 떠오른다. 만약 앞으로 나에게 고난이 찾아온다면 앨리스처럼, 옛 제자처럼, 자아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용기를 내어 현명하게 대처해야겠다. 또한 나의 가능성과 역량을 시험해 보는 일에 새로운 시각으로 도전하리라.나는 지금, 내 안의 이상한 앨리스를 찾기 위해 둘레길을 묵묵히 걷는다.

2024-03-06

잎꾼 개미

피귀자 수필가 이파리들이 찰랑거리며 간다. 잘린 나뭇잎을 지고 가는 개미떼의 모습이 팔랑거리는 날개 같다. 개미는 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고 다양한 모양으로 잘린 잎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동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지고 갈 크기만큼 잎을 잘라 등에 지고 나른다고 잎꾼 개미, 또는 잎을 자를 때 아래턱뼈를 마치 가위처럼 사용하기 때문에 가위 개미라고도 불린다.열대종인 이 개미가 최초의 농사꾼이라니! 부지런하고 근면한 대명사가 개미지만 농사도 짓는다는 말에 저절로 귀가 쫑긋해졌다. 게다가 인간보다 5천만년 정도 먼저 농사를 시작한 종으로 평가 받는다고 하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개미들은 지구에서 가장 크고 복잡한 동물 사회를 이룩하고 있다. 무리가 생성되고 몇 년 있으면 800만의 개체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 개미학자들이 규모를 알기 위해 버려진, 어떤 개미집의 내부에 시멘트를 들이부은 결과 42평, 즉 어지간한 집 한 채 크기가 나왔다고 한다. 작은 개미들의 생활 과정이 놀랍다.우리는 종종 보이는 대로 그것에 갇혀버리는 실수를 한다.작고 보잘 것 없다고 무시하거나 마음대로 판단해 버리고, 편견과 고정관념의 방해에 전체 모습을 오롯이 바라보지 못한다. 하여 생각의 확장을 스스로 가로막고 진실을 보는 시야를 차단해버리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꽃나무처럼 순순해져 보이는 것 너머의 진실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야 하리.이들이 잎을 채취하는 이유는, 잘게 찢어서 균사를 사육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균사가 이들의 주식인데, 그들이 기르는 균사와 서로 의존적인 공생을 하고 있다. 즉 균은 개미들이 있어야 살 수 있고, 개미의 애벌레들은 균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는 공생관계인 것이다. 개미들은 버섯 균이 새로운 식물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감지해낼 수 있으며, 만약 어떤 식물이 균에 해롭다고 밝혀지면 더 이상 그 식물을 수집하지 않는다고 하니 많이 똑똑하다. 무르익은 개미들 삶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인생의 온갖 경험들이 응축되어 쌓인 지혜와 비견되어 감탄하게 된다.이들 개미의 분업화 수준은 매우 높다. 성숙한 무리에서는 몸의 크기로 대략 4계급으로 나뉘는데, 계급마다 맡은 일이 다르다고 한다. 각 계급의 이름은 정원사개미, 소형일개미, 중형일개미, 대형일개미(병정개미)이다. 머리의 직경이 1㎜가 되지 않는 정원사개미는 어린 유충을 돌보거나 버섯 농장에서 일하며, 잎을 운반하는 개미들을 기생파리로부터 보호한다. 소형일개미는 정원사 개미보다는 약간 크며 경비병 역할을 한다. 잎을 가지러 가거나 오는 개미들을 보호하며 다른 생물이 공격할 경우 제일 먼저 방어를 한다. 중형일개미는 잎을 자르고 무리로 가져오는 역할을 한다. 대형 일개미는 가장 큰 개미로 무리를 외부침입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주 임무이다.개미들이 잎을 수집하고 있을 때, 잎꾼 개미 위에 다른 개미들이 올라타서 가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얌체라서가 아니다. 기생파리가 이동하는 개미의 목을 공격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기생파리는 일개미 머리의 관절에 산란관을 꽂아서 알을 낳으므로, 잎을 들고 가는 정원사 개미나 소형개미가 지키면서 기생파리의 공격을 방지해준다니 조직적이고 일사불란하다.작디작은 개미들도 이렇게 서로 힘을 합쳐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어떠한가. 서로 편을 갈라 공격하고 없는 일까지 만들어 험담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어떻게든 상대를 끌어내리고 내가 올라가겠다며 모여서 시위를 하고 피켓을 들고 소리치며 일상생활을 방해하는 여러 어리석은 작태가 혐오스러울 지경이다.새해엔 잎꾼 개미처럼 맡은 일 잘하며 시기와 질투 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역할을 스스로 헤쳐 나가는, 모두에게 이로운 사람, 쓸모가 많은 사람, 살아서는 기둥이 되고 죽어서는 역사가 되는 사람, 그가 있음으로 우리 모두가 더 아름답고 행복해지는 그런 사람이 늘어나 평화로운 사회가 되기를 빌어본다. 우리 모두가 이들 개미처럼 자유와 평화를 위한 달콤한 농사꾼이 되어보면 어떨까.

2024-02-28

낙타처럼

배문경수필가 사막을 걷는다. 모래에 한 땀 한 땀 발자국이 남았다. 제대로 걸어온 길일까. 중간쯤에서 돌아보니 곧은 길이 아니라 삐뚤다. 바람이 불어와 먼 곳 발자국부터 지운다. 모래언덕을 바라보는 나는 낙타다. 놀라 깨어보니 꿈이다.월요일 아침은 부산하다. 씻어둔 유니폼을 꺼내 보니 허벅지 쪽 실밥이 풀렸다. 침대에 걸터앉아 바느질을 시작한다. 바늘귀에 실을 꿰려니 실이 귀를 통과하지 못한 채 그대로다. 돋보기를 끼니 이젠 영락없는 세월을 느낀다. 눈 하나는 타고났다고 스스로 자만했다. 하지만 이젠 세월이 일러주는 길을 따라 낙타처럼 천천히 따라 걷는다.얼마 전, 몽골의 낙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래서 스스로 낙타가 되어버린 꿈을 꾼 걸까. 낙타는 단봉낙타와 쌍봉낙타의 두 종류가 있다. 단봉낙타는 혹이 하나로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남서부에 분포하며, 쌍봉낙타는 혹이 두 개로 단봉낙타보다 몸이 작으며 중앙아시아에 분포한다.발가락은 2개로 모래땅을 걸어 다니기에 알맞은 구조다. 또, 콧구멍을 막을 수 있으며, 귀 주위의 털도 길어서 모래 먼지를 방지할 수 있다. 등 위의 혹은 물주머니가 아니고 지방 덩어리이다. 따라서 며칠 동안 먹이를 섭취하지 않아도 활동할 수 있는데, 이때에는 혹이 점점 작아지고 종래는 소실된다. 3일간 물을 마시지 않아도 별 지장이 없는 것도 탈수로 혈액이 짙어져도 타원형의 적혈구가 농축된 헤모글로빈을 가지고 혈관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세포에 산소를 공급하기에 가능하며, 적혈구가 수분을 잘 빨아들여서 수분 유지가 가능하다. 1회에 57ℓ의 물을 마실 수 있으며, 임신기간은 1년, 수명은 40∼50년이다.한 번에 500㎏의 화물을 운반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세며, 장시간 물을 마시지 않고 지낼 수 있어서 일찍부터 가축화되었다.운반이나 승용(乘用) 이외에 고기는 식용으로, 젖은 음료로, 털은 직물에 이용되므로 사막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가축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초에 거란인이 타고 온 낙타 54필을 만부교 아래에 매어 굶어 죽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바지를 뒤집어 솔기를 찾아보니 손가락 두 마디쯤이 터졌다. 매듭 묶은 실이 바늘에 딸려 솔기를 지날 때마다 삶의 편린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낙타가 사막의 계곡을 지나 언덕을 오르듯이 고단한 순간도 지나고 나니 웃음이 난다.이 바지를 입은 것이 십 년이 넘었다. 유니폼 두 벌로 매주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세탁해서 입었으니 십 년으로 계산해도 대략 520주다.그것을 반으로 나누면 260번을 세탁해서 말렸다. 양봉 사이에 인간을 싣고 모래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는 모습은 이 바지를 입은 내 모습이다. 누군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삶의 무게 바로 그것이었다.내가 나이를 먹는 사이 아이들은 자랐다. 간호사 유니폼은 낙타가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눈과 귀를 닫고 묵묵히 사막을 횡단하듯 내 직장생활을 버티는 갑옷이 돼주었다. 어느덧 나보다 키가 크고 목소리에 힘도 들어간 아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보면 대견하고 어찌 보면 곁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 속 쓰리고 슬프다.얼마 전 직장을 옮겼다. 새로운 자리에 적응하려니 힘에 겨워 몸살이 났다. 낙타의 봉에 가득하던 지방을 다 소진해 혹이 사라져버린 것 같다. 며칠은 물을 마시지 않아도 견디던 젊은 낙타가 아닌 삶에 지친 나이가 된 것이다. 한 땀씩 내 삶에 그려 넣었던 많은 추억들을 낙타처럼 되새김질한다. 서서 바라보는 수평선이며 지평선 아래 얼룩덜룩 남루한 것과 햇빛에 반짝이는 고운 것들도 있으니 잘살았다, 잘살았다. 나의 등을 두드려준다.주섬주섬 바느질을 마치고 낙타처럼 훌쩍 일어선다. 사막에 해가 저문다. 언덕 위에서 모래폭풍이 지나간 사막 저 끝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가리라. 황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낙타의 뒷모습이 애잔하다.

2024-02-21

까치설날에

윤명희 수필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가 여느 날보다 더 반갑다. 하필이면 단대목에 프린트기가 말썽이란 말인가.“큰댁에 가셔야 할 텐데 죄송해요.”“어디 요새 설이 설입니까? 아침에 잠시 가서 절이나 하고 오면 한나절도 안 걸리는데요. 어디 보자, 빨간 잉크 분사가 잘 안 되는 모양인데.”어디까지 가셔야 하느냐고 묻자, 그는 프린트기를 열어젖히며 말했다.본가가 저기 강 건너 산 아래 있는 집성촌이거든요. 지금이야 타성이 조금 있긴 하지만, 뭐 그래도 아직 우리집안 사람들이 대부분이지요. 요즘 촌에 젊은 사람 있기나 한가? 나이 많은 어르신들뿐, 쉰 중반인 내가 가장 젊다니까요. 강 너머지만 가까이 살다보니 집안대소사 총무 일을 여태껏 맡고 있어요.우리 집안은 선산 한 귀퉁이가 도로 확장에 들어가는 바람에 집안 경비 통장에 돈이 많거든요. 1년 이자만으로도 해마다 봄에는 꽃놀이 가고 가을에는 단풍놀이 가고 했지요. 이제는 모두 나이가 많아서 어디 관광 가는 것보다 모여서 먹고 노는 걸 더 좋아합디다. 지난 연말에 큰 식당 빌려서 집안 어른들 다 모셨거든요. 분위기 띄우는 것도 내가 해야지 누가 하겠습니까. 부모 맞잡이 되는 형님 형수도 있고, 막내 형수가 나보다 댓살이나 많을라나. 술 분위기가 한껏 올라가는데, 평소에는 입도 잘 띠지 않던 막내 형수가 느닷없이 올해부터 제사는 각자 지내자고 하대요. 코로나도 끝났는데 그렇게 말하는 건 우리 집안에서는 반란이거든요. 얼른 옆에 앉아있는 대장 형수 표정부터 살폈지요. 무슨 소리냐며 탁자부터 칠 형수가 ‘그래, 그러자’는 말로 일축하는데 더 놀랐지요. 여기저기 형수들이 무슨 단합을 했는지 이젠 그래야 한다고 웅성거립디다.프린트기를 들여다보는 내게 그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말했다. “잉크선 중간에 생긴 기포 때문이네요. 이런 건 간단합니다.”그는 잉크와 연결된 호수의 기포를 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뒷이야기가 궁금해 ‘그래서?’라고 추임새를 넣었다.형님들이 화낼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아무 말 없이 술잔만 비우더라고요. 빈 술잔을 채워주면서 큰형님한테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었지요. 그 형님이 어떤 사람인 줄 아십니까? 명절이면 아침 댓바람부터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렸거든요. 윗대 제사부터 지내고 우리 집 제사까지 오자면 오후 2시가 넘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지는 법이 없었어요. 집안의 제사 참석으로 존재감을 보이는 양반이었다니까요.그런 양반이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시절 따라 가는 거지 뭐.’라고 하는데 이건 뭐지? 싶더라고요. 그날 그 장소는 의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선포하는 자리였단 말입니다. 알게 모르게 그동안 집집마다 많은 얘기가 있었겠지요. 누가 말을 꺼내주기만 기다린 분위기라는 게 느껴집디다. 물론 그동안 형수님들 힘들었지요. 집사람도 명절 지내고 나면 몸살 나는데요. 다들 그랬다 아닙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 여겼지요. 코로나라는 복병이 나만 고마운 게 아니었더라고요. 단 얼마동안이었지만, 내가 안하려고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코로나가 못하게 했으니 사실 나는 마음이 편했거든요.안하면 큰일 날 것처럼 이어왔지만, 코로나가 굳이 안 해도 괜찮더라는 인식을 심어줬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총대를 메는 걸 두려워하거든요. 내 대에서 안 한다? 나 때문에 그렇다? 그런 말 듣는 거 자체가 쉽지 않아요. 그 역할을 코로나가 해결해 준 거 아닙니까. 사회적인 핑계가 되어 줬지요. 형님 말씀처럼 시절에 맞춰 갈 수밖에 없어요. 변화의 계기가 아닐까요? 그렇다고 설을 없애자는 건 아니고 우리 식구끼리 새로운 설날 문화를 잘 만들어가야지요.“자, 이젠 프린트가 깨끗하게 잘 되지요?”컴퓨터 가게 아저씨가 명절 잘 보내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 문을 나선다. 나 또한 명절 이틀 전부터 큰댁에 가야했고, 종숙 댁에서 지내는 제사까지 참석해야 했다. 설날 아침에나 잠시 왔다가라는 큰댁 형님의 전화가 반가우면서도 섭섭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2024-02-14

우물쭈물하면 좀 어때

정미영 수필가 경북대학교 신년음악회에 다녀온 친구가 동영상을 보내왔다. 뮤지컬배우 최정원이 활약한 대목을 꼭 보라는 당부와 함께. 얼마나 감동적인 무대였는지, 궁금증이 일었다.최정원은 10년 만에 초대를 받아서 왔다고 했다. 10년마다 불러주신다면, 10년 뒤 66세가 되는 해에 이곳에서 여러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가 기다려진다며, 관객과 나눈 따뜻한 마음을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어 행복할 것 같단다. 사랑스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그녀는 뮤지컬 ‘맘마미아’로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17년 동안 무대에 서 왔다. 그런 이유로 기네스북에 오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단일 역 단일 작품으로 1천300회 이상 부른, 아바의 명곡이자 ‘맘마미아’의 명곡 ‘The Winner Takes It All’을 열창했다. 풍부한 감정의 몰입이 스며든 노랫말의 서사가 전해지자 내 가슴이 아리고 저렸다.노래와 입담에 푹 빠져 있었는데 벌써 앙코르곡을 부를 순서가 되었다. “저는 이 곡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뒤에 이어지는 그녀의 말이 압권이었다. 저는 훗날 80세 90세가 되는 어느 날, 인생을 마감하게 되었을 때 딸에게 묘비명으로 이 가사를 써달라고 했어요. ‘신나게 춤춰 봐. 인생은 멋진 거야. 기억해. 넌, 여러분은, 당신은, 최고의 댄싱 퀸입니다.’ 그녀의 ‘Dancing Queen’ 노래와 춤에 관객들이 함성과 박수로 호응하는 기분 좋은 순간, 카톡방이 들썩였다.먼저 본 친구들이 저마다 감상평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그 중에 한 친구가 “나도 어떻게 살다 갈 건지, 묘비명을 생각해 둬야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다른 친구가 “나는 미영이 북콘서트가 생각나면서 조지 버나드쇼의 묘비명이 떠오르더라.”라고 맞장구를 쳤다. 우리에게 익숙한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묘비명은 오역이라는 말과 함께 해석이 분분하다. 아무튼, 친구 말의 본질은 ‘우물쭈물’이 나와 같다는 의미였다.내가 평소 우유부단하다고 느꼈단다. 그것이 취향이 정립되지 않은 탓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고 했다. “단어를 하나하나 쓰고 지우고 앞으로 써나갈 글감을 하나하나 쌓아두었다가 시의적절하게 꺼내 쓰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고’ 그래서 최선의 것을 선택할 때까지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거구나! 우물쭈물이 있어서 감동 있는 좋은 글이 나올 수 있구나. 우물쭈물이 있어서 오래 전 지나간 사람들과의 소중한 경험들과 그때 나눴던 사소한 대화들도 모두 차곡차곡 쌓아놓고 기억하고 있었구나.그러면서 자신은 “우물쭈물이 없구나. 새로운 것 다른 것 흥미로운 것으로 바로바로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구나. 두 사람이 참 반대구나.” 그러자 또 다른 친구가 말했다. “나는 미영이처럼 우물쭈물하다가, 너처럼 새로운 것 다른 것 흥미로운 것으로 바로바로 넘어가는 결단력을 배워 큰일을 한 번 내어 보기를 스스로에게 기대해볼게.”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얼마나 근사한 위로인가? 40년이 된, 막역한 벗들이 내게 건네는 훈훈한 마음이 있기에 내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살아갈 힘을 얻고, 내가 빛이 날 수 있는 거구나. 지금껏 내게 맡겨진 업무를 할 때에는 야무지게 매듭지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우유부단할 때가 많았다. 여럿이 모여 음식을 선택할 때나 여행지를 고를 때 등 나의 태도가 누군가에게는 배려보다 답답함과 불편함으로 크게 다가갔을 것이다.나라는 실존의 뿌리는 부모님이다. 그 곁뿌리로 친구들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에 수많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객관적 관점과 거리를 두고 성찰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자가 치유의 변명을 굳이 하자면, 내가 생각하기에 대부분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그런데 우유부단한 나를 한없이 보듬어 품어 주고 자존감을 세워주는 친구들이 곁에 있는 한 ‘우물쭈물’ 좀 하면 어떨까 싶다.

2024-02-07

오래된 것들의 처소(處所)

배문경 수필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집으로 들어서는 곳에 늘 늦게까지 불을 밝히던 곳이었다. 주위가 어두워도 환한 빛으로 안심이었다. 가게 하나 불을 껐다고 골목이 암흑 세상이다. 27년간 슈퍼마켓을 지키던 아저씨는 그만둘 때가 되었다며 몇 월 며칠까지 마지막 할인을 하니 필요한 것을 사가라고 덧붙여 말했다. 이제 뭘 해야 할지 고민해 봐야 한다며 말끝을 흐렸다.경쟁에서 밀린 가게에는 오래된 물건과 새 물건이 섞여 있었다. 아파트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편의점의 불빛이 환하게 빛난다. 손님들이 빛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두 번 얼굴을 보던 사람도 편리한 것에 밀렸다. 왠지 모를 낯선 기분만이 아니라 서글픔 같은 것이 밀려온다. 자신의 건물이었다면 그는 가게를 계속했을지도 모른다. 건축은 건축가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이뤄지는 삶에 의해 완성된다던 승효상의 글이 생각난다.경주는 기와집이 어느 곳보다 많다. 고도 제한을 두어서 시민들이 제값을 못 받는다고 오래된 아파트를 재건축하자고 해서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던 아파트 값이다. 삼사십 년 된 아파트는 나지막하고 숲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굳이 엘리베이터가 없어도 큰 불편이 없다고 할 정도였지만 바람은 거세게 불어 정보를 들은 외지 사람들이 들불 번지듯이 싼값에 아파트를 사들였다.그곳에서 판사 딸을 길러낸 언니가 있다. 낡은 것만 생각하고 들린 집은 아파트 옆의 나무가 자라 운치가 있어 보였다. 새소리가 자작하니 들렸고 늘 조금씩 고쳐가며 자신의 세상을 만든 언니만의 공간을 보았다. 집이 따뜻하고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 집 주인의 생각과 가치를 집에 불어넣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곱게 만들어진 조각보가 놓인 식탁과 나무문에 달린 손뜨개 커튼과 작은 풍경이 고풍스러웠다. 우리의 삶이 사실 작고 사소한 일을 하루하루 쌓으며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덧붙여 “나는 여기가 좋다.”라는 언니의 말에서 자신의 손때가 묻은 집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애정을 쏟은 고택 카페가 경주에 늘어간다. 어쩌면 고택을 잘 활용하는 예가 될 수도 있겠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다. 흙과 대들보가 드러나 있고 나지막한 처마에 옛 정취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밖의 풍경이 푸른 하늘과 어울려 잔디밭과 내가 좋아하는 나무 백일홍의 꽃이라도 그득하니 피어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워진다. 살지는 못해도 그곳에서 힐링된 넉넉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올 때면 울적했던 마음도 슬펐던 마음도 사그라진 다음이다.경주에는 독락당이 예전의 모습을 잘 건사하고 있다. 특히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살창과 건물에 달아낸 계정은 건축물로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건축학적 의의를 함께 지녀 건축학도들의 발길을 이끈다. 사람들에게 그 가옥의 형태나 쓰임새와 풍경을 둘러볼 수 있도록 열어놓아 더 반갑다. 유지되도록 가문과 피붙이의 노력이 오늘의 우리에게 힘듦을 치유할 공간을 내어준다.기와집이 주는 넉넉함과 매끈한 곡선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더러 찾아가는 불국사의 사계(四季)는 살아가는 삶의 여정과 닮아있다. 더 좋아지려고 뭉개고 헐고 다시 시멘트로 세우는 일이 아니라 조금은 생활이 불편해도 세월이 녹아든 낡은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지 나에게 스스로 묻곤 한다. 덧대어 그것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이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애틋한 조언에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다.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자리에 있고 그 자리가 편안하게 보이는 어제의 건축들에서 오늘의 내가 위안을 얻는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이듯이 과거에서 연결된 오늘의 것들에 애정을 갖는 일이 내가 할 일이다. 건축물과 그 안에 깃든 가치와 전통이 같은 의미로 함께 한다는 것은 여간 고맙지 않다. 고택 마당에 널어둔 이불홑청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슬쩍 까치발을 하고 들여다볼 수 있게 나지막한 담장으로 배려함에 감사하며.

2024-01-31

보물찾기

피귀자 수필가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예외의 것들이 필요하다.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점들이 구석구석 많이 박혀 있어야 이야기가 재미있고 흥미진진해지듯 시장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의 손맛과 할머니의 푸근함과 아버지의 비틀걸음도 들어있다.그 중에서도 떠나고 없는 어른들과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울 때 푸근한 정을 느끼고 싶을 때, 만남이 그리울 때 시장엘 간다. 만남은 함께 자라며 흐르는 강물 같기에.목요장은 도심 속 시장이다. 상주하는 많은 가게가 있는 큰 시장으로 장날이 되면 주변의 골짜기에서 가꾼 많지 않은 푸성귀와 과일과 곡식들을 늘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들이 모여 있는 골목도 여러 군데 있다. 그곳은 어릴 적 시장의 모습 같아서 꼭 들르는 곳이다.가을이 무르익자 울긋불긋 더 풍성하고 활기가 넘치는 골목에 어떤 할머니가 대추를 사라고 손짓을 했다. 큰 상자에 담긴 굵고 실한 것을 점찍어 둔 것이 있었음에도 주름진 손과 간절한 눈빛에 이끌려 담아오게 되었다. 아뿔사! 집에 와서 검은 봉지를 열었더니 덜 영글고 벌레 먹어 떨어진 작고 꼭지 없는 대추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한 알 한 알 주워 말렸는지 연하고 진하게 색깔도 다양하고 너무나 쪼글쪼글 상처투성이인 대추는 아무리 후하게 골라 봐도 먹을 것이 반도 되지 않았다.처음부터 탐탁지 않았지만 위쪽에 그나마 꼭지 달린 몇 알을 얹어 놓아 검은 봉지 속사정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당장 물리러 가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엎드려 수레를 밀고 가는 사람과 그릇을 앞에 놓고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생각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며 오죽하면 그렇게 팔겠느냐고. 화살의 방향을 1도만 바꿔도 목적지가 완전히 달라지듯 생각의 각도를 1도만 바꾸면 자칫 심각해질 수 있는 상황도 달라질 수 있다고 달래며.신뢰를 얻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누가 정직한지 진실은 위기의 순간에 가장 잘 드러난다. 쭉정이와 알곡을 갈라놓는다. 무엇이 거품이고 무엇이 실체인지도 가려주고, 희미했던 진실과 거짓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할머니라는 단어 속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편안하고 따뜻한 손, 푸근한 어루만짐, 무조건적인 사랑 등 누구에게나 아련한 기억이 깃들어 있는 그런 할머니를 그렸는데 대추 할머니 때문에 다른 사람도 경계하게 될까 겁나지만 때로는 가만히 있어도 덤을 얹어주는 아저씨와 두 소쿠리 사면 군말 없이 깎아주는 아지매도 있기에 상쇄되고도 남지 않는가. 거의 모든 사과가 퍼석해질 시기에 아삭아삭 새콤달콤한 사과를 사서 기분 좋은 날이 있다. 싱싱한 도라지와 연근과 파르스름한 현미 햅찹쌀에 도톰한 다시마, 새파란 멸치 등 찾는 것이 펼쳐져 있을 때의 기쁨은 또 어떤가.생각지도 않았던 귀한 산나물이나 말랑한 찰옥수수, 갓 따온 첫 홍시를 사는 기쁨을 얻는 곳도 시장이다. 포근한 이불을 파는 아저씨는 따뜻하고 재미있는 말과 온몸에서 발산하는 기쁨의 에너지가 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니 발길이 향하게 된다. 어려운 일도 의외로 쉽게 풀어가는 창의적인 인물들은 자신의 일을 얼마나 놀이처럼 즐기고 있는지를 누누이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일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은 그 일이 주는 즐거움이 포기할 수 없는 가장 큰 보상인 것이다.외딴섬이라고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다 속의 한 공간이고, 또 다른 외딴섬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사람과 자연과 우주도 서로 얽히지 않은 것은 없다.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서로 서로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면서 성장하고 소멸한다.물건을 받기 전 미리 돈을 지불했는데 안 받았다고 우기던 아주머니, 주머니에서 돈이 나와도 사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쁜 일보다는 즐거운 일이 더 많고 볼거리와 흥겨움이, 활기가 넘치는 시장이 거기 있어 오늘도 간다. 많이 파시라는 사랑의 말을 얹어서 웃음을 나눌 수 있는 그 곳, 어린 시절 숨겨둔 보물찾기하듯 싱싱하고 귀한 보물을 찾으러. 어느 새 발걸음이 빨라진다.

2024-01-24

손바닥

윤명희 수필가 문틈으로 노란가방이 먼저 들어온다. 호박죽이다. 같이 먹자는 친구의 전화를 미리 받은 나는 손부터 내밀었다. 사무실에 들어오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내 뒤의 그를 아는 척했다.“어머나, 00씨 맞죠? 오랜만이네요. 30년만인가?”반갑게 말을 건네는 그녀와는 달리 그의 얼굴은 살짝 당황한 기색이다. 서로 아는 사이냐고 묻는 내게 그는 멋쩍은 웃음과 몇 마디의 말로 대충 얼버무렸다. 친구가 오래전 인연들을 꺼내자, 그는 주머니의 담배를 꺼내며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예전에 같이 일한 동료라고 했다. 전혀 반갑지 않아 보이는 그의 표정에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는 평소에 가끔 내 사무실에 왔다. 일이 먼저였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았다. 그를 더없이 반듯한 사람이라고 평하자, 친구가 씩 웃는다.“왜? 아니야?”그녀는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 생각이나 했겠냐며 세상 좁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나는 유리문 너머로 그를 찾았다. 그는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겠다는 손짓을 하고는 사라졌다. 보이고 싶지 않은 그의 지난 시간보다 예고도 없이 부닥친 그의 마음이 내게로 왔다.20년도 훨씬 더 전, 남해에 있는 사량도에 가는 길이었다. 바다색이 하늘만큼 눈부셨던 날, 모처럼만에 떠나온 여행지가 섬이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한껏 부풀기에 충분했다. 친구들의 수다에서 빠져 나온 나는 배 후미 난간에 턱을 괴고, 배가 지나온 길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새우깡을 받아먹던 갈매기도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육지가 눈에서 사라진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은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잘못 봤나? 안경을 바로 하고 다시 봐도 큰댁 아주버님이 확실했다. 생각지도 않은 만남에 정신없이 인사부터 했다. 놀라기는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맞받아 인사하는 그의 눈이 내 옆을 살폈다. 그 눈길을 따라가자 한 남자가 보였다. 조금 전까지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물살을 내려다보던 남자다. 그 남자도 흘낏 그를 돌아보았다. 마치 불륜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그 남자와 나는 ’오늘은 산행하기에 참 좋은 날씨네요’ 정도의 지나가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겠지만, 보이지 않는 진실보다 보이는 그림이 먼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의아한 눈빛을 한 아주버님과 헤어진 나는 괜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가 집으로 돌아가서 조금 전에 본 그림을 슬쩍 흘린다면? 그저 나를 봤다고만 해도 어떨까? 만들어지지도 않은 시댁식구들이 끌고 갈 이야기가 신경 쓰였다.남편을 찾아 나섰다. 육지와 섬을 이어주는 배안에는 지리망산을 오를 등산객들의 엇비슷한 옷들로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선실에서 다리 펴고 내 친구들과 얘기 중인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형님? 여기서 형님을 만났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의 그를 끌고 아주버님을 찾아다녔다. 그 많고 많은 날과 시간 중에 하필이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그것도 망망대해를 달리고 있는 작은 배의 후미에서 만나다니.실은 사량도에 가자는 내 말을 남편은 처음에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몇 번 권해도 친구들과 잘 다녀오라고만 할 뿐, 갈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혼자 가도 되지만, 이름난 섬을 그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우리 둘이 내는 회비의 몇 곱절해도 절대 그 먼 섬을 다녀올 수 없다며 몇날며칠을 졸라댔다. 마지못해 따라와 구세주가 되어 준 남편에게도 그날은 오래 기억되었다.친구와 나는 호박죽을 먹으며 보이지 않는 진실과 보이는 그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다 그녀가 잠시 밖으로 나갔다. 손을 닦으며 들어온 그녀가 화장실 입구에 원래 CCTV가 있었냐고 물었다. 공동화장실에 개인적인 쓰레기를 갖다버리는 이를 찾기 위해 얼마 전에 달아놓은 것을 봤나보다. 친구는 어딜 가나 쳐다보는 저 물건 때문에 자유롭지 않다고 했다. 우리의 흔적이 안 보이는 곳은 어디 없냐고 묻기에 나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2024-01-17

장밋빛 인생

정미영 수필가 장미 문양 찻잔에 돋을볕이 잠겼는가. 갑진년 새해를 맞아 태양의 기운을 느끼기 위해 홍차를 우려내는 중이다. 찻물을 한 모금 머금고 있으니, 인생의 행복이 별건가? 마음이 따뜻해진다.라비앙로즈 커피잔세트를 생일선물로 받았다. 트위그 뉴욕 디자이너 몰리 해치와 테라로사의 콜라보레이션 작품으로 한국도자기에서 만들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도예가의 고풍스러운 작품을 집에서 혼자 보는 멋이란, 나만 감상하기 위해 아무도 없는 시간에 도자기 전시관을 방문한 듯 설레는 맛이 있었다.라비앙로즈는 장밋빛인생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요즘은 가수 아이즈원의 노래로 유명하지만, 에디트 피아프가 1947년에 부른 샹송 제목으로 먼저 알려져 있다. 2007년에는 올리비에 다한 감독이 그녀의 일생을 담아 영화 ‘라비앙로즈’로 제작했다. 유년시절 거리에서 곡예를 하다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중에는 스타가 되어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계속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그녀였다. 영화에서는 그녀의 성공보다 어두운 아픔이 더 시각적으로 다가와 보는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나는 순간 깨달았다. 장밋빛 인생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대부분 장밋빛인생의 아름다운 면만을 꿈꾼다. 화려한 꽃과 향기를 품고 꽃길만 걷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그러나 향기와 가시를 동시에 지닌 장미의 속성처럼 우리네 삶에는 야속하게도, 최승자 시인의 ‘나날’에 나오는 애매와 모호가 일란성 쌍둥이처럼 싸우며 죽어 갔다는 시구처럼 행복과 불행 또한 일란성 쌍둥이처럼 엎치락뒤치락하는 것 같다.나 또한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겪은 적이 있다. 상견례를 하면서 기분 좋으셨던 양가 부모님들께서 곧바로 마주 앉은자리에서 결혼 날짜를 잡을 때까지는 앞으로 장밋빛 인생 중 행복만이 보장된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친정아버지께서 공무수행 중 돌아가셨다. 호사다마! 그렇다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인생의 부정적인 면을 두려워해 집안에만 갇혀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 나만의 긍정적인 면을 가득 채울 수 있도록 힘차게 길을 나서야 옳은 일임에랴.그런 이유로 나는 어쩌다 한 번씩 카페에서 콜라보레이션 작품을 살 때가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 비싼 항공권을 구매해 전시회를 찾아가지 않아도, 동네 카페에서 외국으로 여행나간 사람처럼 기분 전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다 몇 년 전에는 서울에서 제임스 진을 만났다. 지금은 사라진 포항시청 옆 엔제리너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제임스 진의 대표작인 ‘아우렐리안즈(Aurelians)’를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머그컵과 물병을 구입했다. 그는 세계적인 그래픽노블(만화와 소설의 중간형식을 취하는 작품) 회사인 미국의 DC코믹스 출신으로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을 오가며 만화와 회화가 결합된 독특한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고 있었다.며칠 뒤, 롯데뮤지엄에서 ‘제임스 진, 끝없는 여정’ 전시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제임스 진과 엔제리너스 아트 콜라보레이션 기념이었다. 주말에 가족들과 도슨트 설명을 들으며 전시회를 둘러보다가 잠시 후에 제임스 진의 사인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에게 진짜 행운을 잡았다면서, 전시회 기간 중 딱 한 번 있는 사인회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제임스 진의 실물을 영접하다니! 당신의 작품을 보기 위해 서울에서 먼 거리인 포항에서 왔다고 말했더니, 환하게 웃으며 우리 가족의 손에 들려 있던 협업 작품에 개별로 사인을 해주었다. 행복과 불행 사이에 행운이 숨어 있기에 우리네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홍차가 차갑게 식어 다시 찻물을 끓인다. 문득 에디트 피아프가 영화 마지막에 불렀던 ‘아니요,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가 떠오른다. 내 인생의 매 순간마다 그녀처럼 기쁨과 슬픔까지도 포용하여, 후회하지 않는 장밋빛 인생을 살았다고 말해야지.

2024-01-10

말 없는 말

피귀자 수필가 아삭아삭 생오이를 씹는 맛,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하다. 어린이들이 천진스럽게 표현하는 언어들은 싱싱한 야채처럼 달고 신선하다. 게다가 까르르 웃음까지 섞어주면 별처럼 색도 되고 빛도 된다.같은 밤길인데도 그 별빛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지듯 같은 말인데도 빛과 색에 따라 달리는 열매가 전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사람의 말마다 내는 빛이 있다. 밝고 맑은 말로 사람을 즐겁게도 하고 어두운 말, 탁한 말로 슬프게도 한다.또 어떤 사람은 눈부신 말로 빛의 샤워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는 영적 에너지가 보고 듣는 사람을 압도하고 설득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나무들이 발갛게 노랗게 한데 어울려 터트리는 단풍들의 합창처럼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어도 시간의 결이 스며든 것처럼 익숙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오래 간을 맞춘 사이처럼 편안하고 배려하는 말 한 마디에는 가슴이 녹기 때문이다.씨앗이 껍질을 벗어야 파릇한 새싹이 나오듯 친절한 말은 세상을 따뜻하고 평화롭게 만든다. 내가 먼저 친절을 베풀면 내 주변이 따뜻해지리라.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로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을 판단할 때는 가장 먼저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살피게 된다. 언어는 영혼, 부모의 영혼이 언어를 통해 아들딸들에게 전해진다. 말을 배울 적에 사랑을 배우면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가까이에 항상 예쁜 말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과는 자주 대화하고 싶고 자연히 연락도 잦다.‘아’ 다르고 ‘어’ 다르듯 토씨 하나, 점 하나가 뜻을 바꾸는 것이 우리 말 아닌가. 토씨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점을 밖으로 찍으면 ‘나’가 되고, 안으로 찍으면 ‘너’가 되니까. ‘길이 있다’와 ‘길은 있다’도 품은 뜻이 다르듯, 조사 하나로 칭찬의 말이 되기도 하고 조롱의 말이 되기도 하지 않던가. ‘배가 고프냐’에서 ‘가’ 대신 ‘배는’ 이나 ‘배도’를 넣어 억양을 어디에 두느냐를 살펴보면 의미가 극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평생 우리말과 글을 쓰면서도 토씨 하나를 왜 알맞게 쓰지 못하고 오랫동안 어색하게 잘못 쓰고 있는가.무슨 말을 하고, 또 무엇을 하는지 유심히 보면 그가 타인에게 인색하고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인지도 그 사람의 말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말을 지킨다는 뜻이고 말을 행동으로 옮겨 언행일치를 보이는 것. 약속은 그 사람의 삶의 태도뿐만 아니라 믿음과 신용의 수준도 드러내므로. 말로 한 약속을 지키는지 아닌지 하나만 봐도 그의 모든 것을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이유이리라.즐거움도 근육이 필요하듯 입말에도 맛이 있다. 단맛과 쓴맛, 상한 맛과 싱싱한 맛. 오묘하고도 질감 넘치는 언어의 맛에 울고 웃는다. 아프지 않다는 ‘통즉불통’이 소통 감수성에도 적용되는 말 같다. 아무리 찾아봐도 돈 안 들고 힘들이지 않으면서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건 역시 말이 아닌가.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감정들은 말에서 나와 삶의 나침반이 되기도 하니까.말이 통하지 않는 먼 타국에서도 반겨주거나 친절을 베푸는 사람에게 엄지 척과 웃음 한 스푼이면 족하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만국 공통어는 웃음, 말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말임을 여러 곳에서 실감했기 때문이다. 흔히 말은 씨가 된다고 한다. 그 씨라는 말을 화분에 심어 가꾸고 싶다. 물 주고 거름 주며 비바람에 뿌리가 뽑히지 않도록 가꿔 모난 목소리를 깎아내면, 화음을 이루며 살며시 다가와 우리의 뺨을 어루만져주지 않을까.위대한 책은 행간이 넓은 책이라던가. 그런 책은 여백이 있고, 글이 곧 그림 같다는 느낌을 준다. 사람도 나이가 들고 삶의 지혜가 쌓여가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행간이 이윽고 보일 때가 있다. 여백도 생긴다. 새해엔 말에도 행간을 넣고 여백엔 웃음을 버무려 말이 필요 없는 말 웃음으로, 말맛을 차지게 살려봄이 어떨까.

2024-01-03